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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와 가정예배 <진실된 믿음>

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신앙은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은 바로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진실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잘 보이게 된 것은 그의 순종 체질화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첫째,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할 때 떠났습니다. 그곳은 본토요, 아비 집, 친척들이 있는 곳입니다. 부동산이 있는 곳입니다. 생활의 안정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떠나라 할 때 떠났습니다.

둘째, 번제를 드리라고 할 때 순종했습니다(창 15:9∼11). 시키는 대로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번제를 드리라 할 때 드렸습니다. 순종했던 것입니다.

세째,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실 때 순종했습니다(창 17:9∼14).

넷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할 때 순종했습니다(창 21:9∼21). 

다섯째,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일언반구의 불평도 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모리아 산 까지 가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치는 일까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2:12)고 했습니다.

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6∼18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는 최선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은 가장 정성스럽게 드리는 믿음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바치라 할 때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다 부모가 키워주고, 입혀 주고, 다 부모가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 달라고 해서 받으면 마음이 흐뭇할 것입니다. 사탕을 한 봉지 사 주고, 다시 그 사탕을 나도 한 알만 달라고 해서 받으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사탕을 한 봉지 사주고, 하나만 달라고 하는데도 안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의 믿음을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 믿음으로 드리는 봉헌, 믿음 안에서의 교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가족 모두 믿음으로 삽시다. 

믿음으로 봉사합시다.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믿음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으로 잘 보이는 개인, 가족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고, 예배 중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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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예수관에 대한 비교연구

(- 이슬람적 관점을 통한 고찰 -) 

 

남옥정 / 조선대학교 강사

Ⅰ.서론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세계종교사에서 포괄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양 종교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교리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것이다. 이슬람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엄격한 유일신 사상이다. 그리고 신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교에서 예수는 요컨데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무슬림은 믿을 수 없는 부분이다. 신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무슬림은 예수를 신이 아닌 가장 훌륭한 예언자들 중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양 종교간의 예수에 관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즉,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 아니면 단지 예언자로서만 인정하느냐의 교리적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논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현대 역사에서 왜 대립구조를 갖게 되었는가? 양 종교는 갈등과 대립의 관계일 수 밖에 없는가, 아니면 화해와 화합도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에 논자는 이슬람과 크리스트교의 첨예한 견해차이들 중 하나인 예수의 지위와 성격에 관한 비교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양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지위에 대한 인식은 양 종교의 교리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슬람교에 관한 인식은 크리스트교에 비해 매우 빈약한 형편이다. 그에 비례하여 크리스도교인과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교에 관한 편견이나 선입관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에서 5명 중 1명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고, 이슬람교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점으로든지 이슬람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이 논문을 통해 세계 3대 종교에 속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한 부분에 관해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또한 예수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양 종교간의 갈등과 대립의 관계의 시발점을 찾아 양 종교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예수에 관한 비교 연구는 꾸란과 성서에 근거하여 수행할 것이다. 예수에 관한 꾸란과 성서의 언급은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마리아에 대한 서약, 예수의 탄생, 예수의 기적들, 예수의 신성의 임무, 예수와 십자가, 예수와 신성, 예수와 삼위일체설이다2).

 

Ⅱ.예수 이전의 예언자들에 관한 고찰

예수의 비교연구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수 이전의 예언자들을 살펴보고 예수의 혈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으로부터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그리고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분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이삭만이 유일한 독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오류로 인하여 이 사실을 주장하기는 힘든 듯 하다. 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험에 들게 한 장면에서 꾸란과 성서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

"그 일 후에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부르시되......(중략)......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니 아브라함이 가로되, '여기 있습니다.'하니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이제야 신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 1-12절)

구약성서에 언급된 이삭의 희생 이야기에서 이렇듯 독자라는 대목이 여러 번 나왔다. 이 사실을 이슬람적 시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설사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장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구원의 위대한 언약을 받게 될 '네 씨'에 속하지 못하였으며,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삭의 중요성에 비추어 이스마엘은 인간의 생식본능이라는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개념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구원의 이야기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이삭은 유일한 독자로 묘사되어 희생명령을 통한 예언적 임무를 부여 받았으며, 이 독자의 개념은 신약성서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 독생자의 개념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3).

반면, 꾸란에 나타난 내용은 극히 대조적이다.

"아들의 나이가 그와 함께 일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가 말하길 '내 아들아, 너를 제단에 올리라는 명령을 내가 꿈에서 보았노라.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니 아들이 말하길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받은 대로 하옵소서. 신이 인내하는 종을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였더라. 그 둘이서 신께 순종하고 그는 그로 하여금 이마를 숙이도록 하였을 때, 신은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그대는 이미 그 꿈을 수행하였노라. 신은 이렇듯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내리니라.' 실로 이것은 분명한 하나의 시험이었으니, 신은 훌륭한 희생으로 그를 대신하였노라." (꾸란 37장 102-107절)

꾸란에 따르면 이 일이 있은 뒤, 아브라함의 이삭의 잉태계시를 받는다.

꾸란과 성서에 나온 희생이야기를 살펴본 바 꾸란의 시각으로 볼 때, 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에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86세(창세기 16:16)였고,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100세(창세기 21:5)였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이삭의 손위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13세나 손위였으며 이스마엘이 엄연히 존재하므로 이삭을 독자라 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독자란 언급은 이스마엘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슬람의 주장이다4).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브라함은 성서에서 주장하듯 이삭을 독자만으로 볼 수 없고, 이스마엘을 장남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신은 그대에게 계시하였거늘 이는 노아나 그 이후 예언자들에게 계시한 것과 같으며 도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후손과 예수와 아이욥과 유누스와 하룬과 솔로몬에게 계시한 것과 같으며, 다원에게 시편을 내린 것과도 같으니라."

(꾸란 4장 163절)

아브라함은 신의 예언자임을 계시 받았는데, 그의 후손들, 즉, 이삭뿐 아니라 이스마엘, 또한 이삭의 아들인 야곱과 예수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에게 내린 계시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즉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신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겠다. 성서와 꾸란 구절이 대립된 양상을 띄는 부분도 있지만, 그 대립의 바탕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즉, 유일신론을 가진 아브라함의 가계라는 근본이 깔려있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동일한 신을 믿으며, 그들의 선조는 동일 인물이었다는 근본 생각을 바탕으로 예수에 관한 비교연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Ⅲ.예수에 관한 성서와 꾸란의 언급

 

첫째, 예수에 관한 꾸란의 언급은 마리아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꾸란 이므란의 장에는 마리아의 탄생이 언급되어 있다. (꾸란 3:35-365))

이므란가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신의 특별한 보호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신은 사가랴에게 그녀를 돌보도록 하였다. 마리아는 신에게 선택되는 행운을 얻어 모든 여성들 가운데 최고라는 극찬받는 위치를 얻었다. 꾸란에서 다른 여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고 시바의 여왕도 이름없이 여왕으로만 기록되었는데, 마리아만 이름으로 명시되었다. 그러나 이븐 마르얌(Ibn maryam), 즉, '마리아의 아들'이란 칭호로 나오며, 단독으로 나올 때는 거의 아무런 역할과 위치가 없다6). 성서와 마찬가지로 꾸란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잉태계시를 받는다. 또한, 마리아의 장에는 더욱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다른 여인들과 차별되며, 꾸란은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둘째, 예수탄생의 이야기에 관해 꾸란과 성서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예수탄생 이전에 사가랴와 요한의 탄생이 언급되어 있다. 꾸란에서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아랍어로는 Zakariy?)는 마리아의 성장을 보살핀 신앙심이 깊은 제사장이었다. 꾸란에서는 요한과 사가라, 그리고 마리아를 늘 함께 언급하고 있다.

2. 사가라는 노인이며, 그의 아내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돌봄으로서 세례요한을 얻었다. 그 예증으로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었다.

3.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예언받는 것은 사가랴와 그의 아내가 요한을 잉태한 후이다.

4. 예수의 탄생장소는 성서는 배들레헴의 사관의 구유이며, 꾸란은 종려나무 숲으로 기록되어 있다. 압둘라 유수프 알리는 이곳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6마일쯤 떨어진 베들레헴이라고 풀이한다.

5. 꾸란에는 마리아가 출산의 고통을 겪었음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성서에는 출산의 고통에 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꾸란과 성서 모두 위의 언급을 통해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양 종교에서 예수의 해석을 달리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트교에서 예수의 탄생은 인간의 혈육관계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신으로부터 나온 독특한 아들 개념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예수가 신의 아들임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직 알라 외에는 신은 없으며, 예수는 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는 반박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 복음서의 상당 부분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기적을 행하고 공식적,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보냈던 해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신약성서는 우리가 '기적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여러 단어로 묘사하였다. Wonders, signs, mighty works, works 이 여기에 해당한다7).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기적은 치료사의 예수로서 돌보시는 신을 보여주며, 자연현상의 기적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신의 일을 행한다는 것을 가르치며,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꾸란에서 기적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야(?yah)이다. 이 용어는 신의 증거 또는 신성의 메시지란 의미 중 하나로 일반화되었다. 아야의 의미는 기적, 또는 꾸란의 구절을 의미한다. 신성한 메시지와 그것의 증거를 가리키기 위해 똑같은 단어를 채택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신성한 메시지 그 자체가 기적을 증명하는 으뜸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꾸란은 무슬림들에게 예언자의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간주된다8). 성서와 마찬가지로, 꾸란에는 예수의 기적이 언급되어 있으며, 꾸란 3장과 5장의 내용에 따르면 꾸란은 예수의 기적을 인정한다. 하지만 예수의 기적을 인정하는 것은 크리스트교의 예수의 기적과는 다르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예수의 기적은 돌보시는 신을 보여준다고 하였다9). 이는 신을 대신하는 예수의 기적행위가 아닌, 예수의 기적 자체가 신과 동일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말하는 예수가 행한 기적은 단지 신과 예언자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의미로 한정된다.

 

넷째, 성서와 꾸란의 예수의 임무는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하며 신에게 귀의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꾸란에는 예수가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도래를 예언한 구절이 있다. (꾸란 61장 6절) 이 구절을 통해 무함마드의 정통성과 더 나아가 예수와 무함마드는 예언자적인 동등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함마드에 대한 계시가 아랍어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그가 이 계시를 바탕으로 신의 율법을 실행했다는 점일 것이다10).

 

다섯째, 꾸란에서 예수와 십자가의 문제를 논할 때 최대의 쟁점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는가, 아니면 살아있었는가의 문제이다. 크리스트교에서 십자가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담이래 모든 사람들의 죄를 그가 짊어졌다는 의미이며, 이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그의 신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리자적 속죄 죽음'의 의미로 간주된다11). 무슬림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꾸란은 예수의 십자가 못 박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마리아의 아들이며 신의 선지자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다'라고 그들이 주장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게 추측을 할 뿐 그를 살해하지 아니했다12)."

위 구절은 이슬람교 기독론의 핵심이다. 바로 여기에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슬람교의 모든 종파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정한다. 이슬람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심교리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일부 무슬림 현대 학자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죽음 사건과 반대되지 않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전체 무슬림들의 믿음과는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교는 공식적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교리를 전면 부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의 이해 관계에서 매우 민감한 부분이며, 이슬람교의 예수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결정적 단서이다13).

 

여섯째,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주장과 함께 예수의 신성에 관한 주장도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상호 대립하는 부분이다. 꾸란 112장에 의하면 알라는 낳지도 낳으시지도 않았음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며 선지자일뿐이며 그는 이전에 등장한 선지자들과 동일한 자격과 의미를 지닌다. 이는 크리스트교의 삼위일체설과 관련된 사항이다. 성서 자체에는 '삼위일체(Trinities, Trinity)'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은 성서적 구속사에서 기초적이고 지배적인 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의 문제는 역사적 기독교의 실제적 관심사이기도 했다14).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하나이고 유일하신 참 주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인 동시에 동일한 본체에서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바로 말하며, 믿으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15)." 이 말에 크리스트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신의 유일성에 대한 주장의 핵심이 들어있다. 하지만, 꾸란은 삼위일체의 개념을 부정하며 오직 한 분의 신만을 인정한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는 무슬림의 유일신관을 부정하는 개념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꾸란에는 신은 성자와 성부를 두지 않았음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성서의 백성들아! 너희 종교에 지나치지 말고 신께 진리만을 말하라.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 예수는 신의 예언자이니, 그 분께서 마리아에게 그 분의 말씀과 그 분의 영혼을 보내셨다. 그러니 신과 그 분의 예언자들을 믿고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치라. 너희에게 이로울 것이다. 신은 진정 한 분이시다. 아들이 있다니, 그 분께 영광이 있으라!" (꾸란 4장 171절)

크리스트교인들은 무슬림들이 예수가 육체적 의미의 신의 아들로서 오해함으로써 이와 같은 반대 의견이 나왔다고 지적한다. 또한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 반박하였다. 파울루사르라힙(Paulusar-R?hib)은 13세기 시돈의 수도승이었는데 그는 『크리스트교 교리의 설명』에서 유일신 믿음에 관하여 말했다. 그가 언급한 내용은 삼격 안에 하나의 본질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신은 삼격이지만 신이 이성(성자)과 생명(성신)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에 유일신이라는 것이다. 즉, 유일신 안에 상격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또한 신의 아들은 육체생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가사의한 방법을 통하여 탄생한다는 것이다. 위의 주장에 대해 무슬림인 알 까라피(al-Qar?f?)는 "고약한 질문에 대한 뛰어난 대답"이라고 말하며, 이에 대해 한 줄 한 줄 논박하였다. 그의 반박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이슬람식 반론이 되었다. 알 까라피는 말하길 "크리스트교인들은 꾸란의 각 장 도입부분에서 읽혀지는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신의 이름으로'란 구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이격을 만들었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되었다. 하지만 꾸란속에서 그와 같은 것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꾸란은 신의 유일성을 강조 한다. 복음서라 불리는 크리스트교의 성서는 신의 계시를 왜곡했다."

알 까라피의 반론은 지나치게 간략화 된 듯 하다. 하지만 그의 반론은 삼위일체론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입증시켜 주기에 충분하였다16).

 

Ⅳ.결론

본 논문은 예수 이전의 예언자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선조는 동일하며, 그들은 동일한 신에게 동일한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출발하였다. 만약 이에 대한 양 종교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수에 관한 양 종교의 주장을 비교하여 절충안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위와 같이 꾸란과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의 예수관을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기적적으로 태어났고,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의 지위에 관한 미묘한 입장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꾸란 속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에 관련된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교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예수를 적대시하지 않고 예언자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슬람은 예수가 신으로부터 복음서를 부여받고 이를 백성들에게 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17).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슬람교가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는 실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에 발생한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의 불상파괴 소식은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도 역시 대부분의 이슬람교 신자들은 꾸란을 잘못 이해한 극단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도 이슬람교가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종교다원화시대를 맞이하여, 양 종교간에는 얼마든지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서로 대립되는 부분에 관한 관용적인 학문적 고찰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예수관의 비교는 양 종교간의 우월성을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양 종교간의 이해와 절충을 이끌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각 주1) 이 논문은 2000년 9월 29일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연구소 제6회 초청강연회 겸 한국아랍어ㆍ아랍문학회 추계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임.

2) 황병하, "코란 속의 예수와 성서 속의 무함마드에 대한 비교연구" 『한국이슬람학회 논총 창간호』, 1990, p. 23.

3) 황병하, Ibid, pp. 15-16.

4) Ibid., pp.9-10.

5) F. E. Peters, Judaism, Christianity, and islam, (Princeton University Press, New Jersey, 1990), p. 117

6) 전재옥, 『무슬림은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서울: 예명 커뮤니케이션,1995. pp.27-28.

7)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 『예수의 치유』 고재봉 역, (서울: 요단 출판사, 1988), p.163.

8) Maulana  Al?, The Religion of Islam, (Printed India by Jainendra Prakash Jain at Shri Jainendra Press. New Delhi, 1994), p. 181.

9)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예수에 관한 12가지 질문』유선명 역, (서울: 주식회사 흥성사, 1996), p. 69.

10) 김용선, 『코란의 이해』 (서울 : 민음사, 1990), p. 48.

11) 성종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장신논단,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0, p. 238.

12) 꾸란 4장 157-158절

13) 전재옥, op. cit., pp. 43-44.

14) 한국종교연구회, 『세계종교사입문』, (서울: 청년사, 1991), pp. 493-494.

15) Battenhouse, R, W, A Companion to the Study of St. Augustine, p. 38.

16) Hans K?ng et al, 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 (Doubleday, New York, 1986), pp. 113-114.

17) 황병하, 『아랍ㆍ이슬람문화』(조선대학교 출판부, 2001),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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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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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박 한 응목사                        
본  문 : 로마서 12 : 1 - 3
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Series 1)
찬  송 : 213, 214, 321, 325, 327, 539

        할렐루야!!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려고 오늘 거룩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충만하게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 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금까지 쌓여만 가던 모든 죄악은 모두 아침 안개의 사라짐같이 빽빽한 구름이 물러감같이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씻음 받아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래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되겠습니다만 저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이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선교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오늘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다음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이렇게 시리즈로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아멘!>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건축케 하신 후에 성소에서 만나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광야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골방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안방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 하나님과 만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평생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정이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②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의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거느린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온 성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15:26) 고 말씀 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②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③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④ 거라사 지방의 군대 마귀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병 고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하나님을 만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 창21:14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온 물과 떡이 모두 떨어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샘물을 주시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5병2어를 가지시고 저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입니다. 바로 한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왕상 17:8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르밧의 한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를 듣고 순종하였을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예배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허랑 방탕하여 허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아사 상태에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가 도무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아들은 고사하고 그저 품꾼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모든 일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억치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3.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고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4. 예배는 우리의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들까지도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오직 귀한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시간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인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을 내시며 저들을 책망하여 내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기갈이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갈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7:9)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기름진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가 되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님의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22;1-14절 말씀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이 종들을 불러 청한 사람을 모셔오라고 하였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청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 상태는 지금 아사(餓死) 상태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 하여 피곤하리라”
        이와 같은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 예배드리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2)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예배는 피 흘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피 흘림이 있는 예배는 희생과 헌신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희생이 없고 감사가 없고 제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는 곳에 강림하셨고, 제물 있는 곳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 제물 있는 곳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3) 새롭게 변화된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성령이 역사 하시고 거듭남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옷도 아무렇게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또 지각이나 하고, 와서는 졸기나 한다면 이런 예배를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짖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모든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아무쪼록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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