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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 터키 이야기 ] 제3차 공의회가 열렸던 대도시 ‘에베소’

 

세계 최대의 도시 유적이 남아 있고, 바울의 2~3차 전도여행지였으며, 아데미를 숭배하던 ‘여신의 땅’ 에베소. 옛 역사와 마리아기념교회에서 열린 제3차 공의회에 대한 ‘성지 터키 이야기’ 두 번째다.


한국은 지금 ‘여교주’ 전성시대라고 합니다. 문선명의 뒤를 이은 통일교의 한학자, 안상홍의 뒤를 이은 하나님의 교회의 장길자, 그리고 이만희의 뒤를 이를 것처럼 급부상하고 있는 신천지의 김남희 등이 마치 트로이카처럼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예로부터 ‘여신의 땅’이었습니다. 그 여파는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인 AD 431년에 기독교 안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등 에게해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섬기던 대모신(大母神)인 아데미(Artemis) 신(神)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431년 에베소의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열린 에베소 3차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때문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이단사이비들의 여교주 등장과 에베소의 뿌리 깊었던 여신 숭배의 결과가 묘한 동질감 느낌이 있습니다.


에베소의 개관


에베소(Ephesus) 도시 유적은 버가모(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 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습니다.


신약성서 ‘에베소서’나 요한계시록의 수신지로 소아시아 7교회 중 하나로 등장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 로마제국 시대에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면서부터인데, 수많은 국제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에베소의 최전성기는 AD 1~2 세기경으로 도시 인구가 30만 명에 달하면서, 당연히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항만을 끼고 번영한 상업도시 에베소가 쇠퇴한 것은 카이스터(Cayster) 강의 토사 퇴적으로 항구가 묻혀져 가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며,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서 현재의 장소(Selçuk)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AD 612년의 지진으로 부분적인 파괴를 겪으면서 에베소는 급속하게 기울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2, 3차 전도여행 때 이곳을 방문했고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3통의 편지(먼저 쓴 편지, 고린도전서, 눈물로 쓴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습니다.


에베소의 역사


에베소(Ephesus)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리스의 역사가요, 철학자인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에베소 도시는 흑해로부터 건너 온 여인(女人)족인 아마존족이 BC 1,400년경에 마을을 처음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에베소는 아마존족 언어로 ‘꿀벌’이라는 뜻의 ‘아빠소스’라는 아마존족의 여왕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후 BC 1,100년경 이오니아인(Ionians)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Androcles)가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 토착민들을 추방시키고 에베소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많은 그리스계인들이 척박한 그리스 본토와 섬을 떠나서 비옥한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버가모, 에베소, 서머나 등)으로 대거 침략하여 그리스계 도시들을 건설하였던 시기였는데, 안드로클레스 왕자도 당시의 전통에 따라 새 도시를 세우기 위해 델피의 아폴로 신전으로부터 신탁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생선과 산돼지와 불이 함께 만나는 곳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안드로클레스는 에베소 지역에 이르러 바다가 인접한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그가 부하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던 중에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똥이 튀어 코레소스(Koressos) 산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 숲속에서 산돼지가 달려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곳이 ‘신이 원하는 장소’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그것을 기념하는 ‘산돼지 상’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바로 에베소 원형대극장이 위치한 언덕 쪽이었습니다.

 

안드로클레스가 그리스계 이오니아 도시 국가를 건설하면서 에베소는 점차 항구 도시로서 발전을 거듭하며 성장하기 시작했고, 후에 페르시아와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의 침략,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 로마 제국, 셀축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동양에서 서양으로 진출하려는, 반대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출하려는 세계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여신 숭배


재밌는 것은 에베소는 아주 오래 전부터 대대로 여신을 섬겨 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데미 여신 이전에는 대모신인 키벨레(Cybele) 여신을 섬겼고, 키벨레의 또 다른 형태의 아데미(Artemis) 여신이 그 뒤를 이었으며, 재밌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온 후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연안 도시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스다롯과 아세라 여신을 섬겼던 것처럼, 예전부터 달의 여신인 키벨레(Cybele)라고 하는 여신을 숭배했었습니다. 에베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키벨레를 전통적으로 섬겨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마존족이 추방되고,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은 에베소에 정착하면서 그들이 그리스에서 섬기던 아데미를 아나톨리아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에베소는 다산과 번성을 주관하며 출산과 갓난아기의 발육을 관장하는 신인 아데미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에베소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에게해 인근 도시들은 모신(母神), 즉 ‘어머니 신’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항상 사람들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처음 거주자들이 아마존 여인족이었던 것도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6년)을 하면서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에베소 시민들이 아데미에 대한 신앙심이 떨어지면서 은으로 만든 아데미 상의 판매 부진으로도 이어지기도 했지만, ‘은장색 조합’(Guild)의 폭동이 일어나고 네로 황제를 비롯한 이후의 황제들의 기독교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위기를 맞게 되고 자연스럽게 아데미를 숭배하는 신앙은 더욱더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로제 제국에서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제국 내에 더 깊이 더 넓게 뿌리를 내리며 퍼져갔습니다. 바울이 제국 내에 기독교 복음의 씨앗을 심은 후 약 250년이 지난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따라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지정되었으며,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테살로니키아 칙령’에 따라 로마제국의 국교(國敎)로 지정되기에 이릅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에는 그동안 지하에서 제국의 박해를 피해 몰래 예배를 드리며 숨죽여 왔던 기독교가 이제는 지상으로 올라와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교회 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리며 나래를 활짝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체로 퍼져가며 외면적으로 성장을 해 갈 때에도 아나톨리아의 에게해 인근 도시의 시민들은 항상 예전부터 그들의 조상, 조상들의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여신(女神) 혹은 모신(母神)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 그들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여신을 향한 그들 안에 내재되어 있던 욕구와 욕망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431년도에 에베소 마리아기념교회에서 있었던 3차 에베소 종교회의가 그것입니다.

 

에베소 3차 공의회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정식 종교로 공인받은 후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와서 제국의 메이저급 종교가 되어가면서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내홍을 겪습니다. 주된 이슈는 바로 예수의 신성과 관련되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믿고 있는 ‘삼위일체’(Trinity)라든가, ‘성육신’(Incarnation) 같은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도 그 당시에는 가장 뜨거운 감자였고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이슈였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327년에 1차 공의회가 니케아(Nicea, 현재 이즈닉)라는 곳에서 열려서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 본질’이라는 교리가 확정 되었고, 381년에는 2차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현재 이스탄불)에서 개최되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한 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신성에 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마리아는 누구인가?’에 대한 주제를 놓고 3차 공의회가 431년에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개최된 것입니다.


당시는 성모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던 때라 교우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사실 이 존칭은 그리스 교부들이 자주 사용해 오던 관용어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란 뜻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의 논리인즉, 예수는 신격과 인격을 갖춘 분인데, 성모는 인간 예수를 낳으신 예수의 어머니지 결코 신(神) 예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키릴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으로 합치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안디옥 학파의 대표자인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렉산드리아 총 대주교 키릴 간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431년 6월 7일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에서 공의회를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키고 마리아에게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존칭을 드리기로 결의했습니다. 출교된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로 유배되었는데, 436년 사막에서 쓸쓸하게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 본질이다’라는 명제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사고의 지평을 의미 없는 마리아에게까지 넓힌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신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해석에서 마리아가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마리아 숭배사상이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3차 에베소 공의회를 통하여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던 것입니다.


에베소 공의회의 결의가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로마 국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단순한 예수의 어머니가 아닌, 그 이상의 신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이 정치적인 수완이 네스토리우스 보다 뛰어났는데, 그 능력을 가지고 황제 및 다른 주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관철시키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던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키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전부일까요? 필자는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상기했듯이 에베소를 비롯한 에게해 연간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여신을 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는 여신에 대한 마음이 항상 남아 있었는데, 이 부분은 기독교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 점이 불만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키릴이 여신을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혹은 본인의 제국 교회에서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아니면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포교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포교할 목적으로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마리아의 신성에 관한 것을 이슈로 부각시켜서 이 안건을 에베소 공의회로 가져가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마리아 숭배 교리를 통과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에베소 지역에 아마존 여인족이 처음 터를 잡은 후로 전통적으로 여신인 키벨레를 섬겨왔고, 그리스 이오니아인들이 점령한 후에는 키벨레에서 그들이 섬겨오던 아데미로,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아데미에서 마리아로 여신의 계보가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3차 공의회가 열렸던 장소도 여신에 대한 감성이 가장 큰 에베소였고, 에베소 중에서도 마리아 기념교회를 공의회 장소로 잡은 것도 어떤 의도가 배후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3차 공의회를 통하여서 로마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간 예수의 어머니’를 넘어서,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지위가 수직 상승되어 본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개신교와 가톨릭이 하나가 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교회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울 때 일수록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항상 이단과 사이비는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적용시키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앙생활만이 우리 자신과 가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서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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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이야기 전도여행 Paul's missionary trips

 

1. 첫 번째 전도 여행/13-14

 

2년 동안

 

갈라디아 지방(사도 바울의 1차 전도지역을 갈라디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보니 자꾸 이방인들을 유대인들처럼 만들려고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논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을 할례를 받게하고, 모든 율법의식을 지키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복음은 예수 + nothing이라고 하였다.

* 예루살렘

* 총회

* 율법? 아니요!

 

그러나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대표를 보내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게 하였다. 이때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한 결과 그들은 구원을 받는 데에는 예수 외에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결론을 맺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법을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는 있다. 복음을 구체적으로 요약을 해서 들려주면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여기에 율법은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참다운 삶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에 총회 장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 그리고 이때에 사도들과 바울이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2. 두 번째 전도 여행(15:-)

 

* 3년 동안

*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이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흘렀고, 남서쪽인 아프리카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2-5세기에 유명한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은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갔다. 이 곳에서 길리기아 지방으로 돌아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가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이때에 성령께서 이 곳으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게도니아에서 바울을 부르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서 네압볼리, 빌립보(감옥에 들어감-찬송과 지진으로 간수가 자살 하려고 함-그를 구원함-그 밤에 그 간수와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데살로니가에서 온 여인-이 복음을 듣고, 점치던 여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빌립보서에는 계속 기쁨이란 단어가 등장함. 그 후에 반대에 부딪혀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서 아덴과 고린도(서울)와 겐그레아(인천 같은 도시) 지방으로 여행하였다.)

 

빌립보가 있는 지역을 마게도니아라고 불렀다.(지금의 알바니아) 소아시아는 지금의 터어키 그리고 남쪽은 아가야(지금의 그리이스)라고 불렀다. 바울이 바로 이 아덴에 이르러 논쟁과 논란을 벌였다.

 

고린도에 약 16개월간 있으면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썼다. 이때에 죽은 가족들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슬퍼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재림이 지나가고 자신들은 다 버림받은 것이 아니냐고 걱정을 하였다. 이때에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나고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 것이므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다.(살전후)

 

그리고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건너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미 곳곳마다 회당을 준비해 놓으셨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상당히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알렉산더가 헬라 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래서 전세계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그래서 주전 150년 구약 성경을 그리이스 성경으로 번역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유대 사람이면서 유대 말을 잘 몰랐다. 그래서 헬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을 70인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때에는 사도들이 헬라어로 쓴 신약 성경을 썼으며 구약 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주전 4-500 년경 에스라를 통해서 10명만 있는 마을에는 곳곳에 회당을 지어 놓았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95년에 죽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등에서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선교 보고를 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바울은 또 다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인해서 다툼이 있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기를 원했고, 바울은 그를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마가가 어려서 일차 여행에서 돌아간 것이 그 싸움의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파와 바나바 파가 갈라졌다. 바울은 누가를 데리고 다시 전도한 지역으로 갔고, 바나바는 또 다른 지역으로 따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이것을 보면 꼭 한국교회와 같다. 장로교가 수십 개가 된다. 한국 교회는 교단이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러나 인간은 싸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해를 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셨다. 단결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성숙해 가는 재미있게 목회 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싸우고 분열은 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 성숙해 가는 교회는 드물다.

3 세 번째 전도여행

 

* 4년 동안

* 소아시아

 

이제 바울은 세 번째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약 4년간 하게 되는데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갈라디아 지역은 들리지 않고 직접 에베소로 갔다.

 

그래서 이곳에서 드로아, 네압볼리,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방문을 하였다. 이때에 드로아에서 바울이 고별 설교를 밤늦게까지 하다가 한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은 일이 발생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 오면 조는 사람들이 있다. 호롱불에서 나오는 탄산가스를 창문에 앉은 사람이 다 마심-그리고 고린도에서 56-7년에 로마서를 썼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에도 많은 열매를 주셨는데, 이제는 스페인까지 가야하겠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때에 이미 로마에는 교회가 있었다. 로마에 가서도 복음의 열매를 맺고 싶다고 한 유명한 로마서가 이때에 쓰여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때는 2차 여행과 같이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쳐 온 모든 지역들을 다시 돌아서 갔다. 그리고 드로아에 이르러서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다시 초청하여 고별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배로 여행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에 약 2년간 있는 동안에 누가를 데려왔다. 이때에 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자료를 수집하여 누가복음을 쓸 자료를 수집한다.

 

* 재판

* 벨릭스

* 베스도

* 아그립바

 

바울이 예루살렘의 환영을 받자마자 사도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유대인들이 당신이 모세도 금하고 할례도 금하고 율법도 금하고 있다고 하여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알려준다.

 

결국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 잡혀서 공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하여 유명한 간증을 하게된다.(22)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사형을 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로 끌고 갔다. 그래서 벨릭스가 심문을 하였으나,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고 황제에게 항소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감옥에 약 2년 동안 있게 되었다. 24장 맨 마지막 절을 보면 "이태를 지나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베스도가 와서 보니까 아직 미결된 죄수가 하나 있다고 하여 조사를 해보니 아무 잘못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유대인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받게 하였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조사를 해보니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지 아니하였으면 놓아줄 뻔 하였도다. (26:31-32)고 말함.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받을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아그립바가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놓을 수 있을 뻔 하였도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로마로 호송할 것이 결정이 됨.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로 호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에 풍랑을 만났으나 바울이 그들을 격려하고 인도해 준다. 위기 속에서의 사도 바울-하나님과 친하니까 풍랑 속에서도 담대하다.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은 풍랑을 만나야 알 수 있다.-평상시에는 모두 다 신자 같으나 정말 어려움이 당하면 진짜가 나타난다.-일제 시대에 다른 목사님들이 다 포기할 때에 주기철 목사님같이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고 의뢰하는 사람들은 시련이 올 때에 그 진가가 발휘된다. 바울은 한 명도 안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배 한 조각씩 붙잡고 살아났다.

 

* 첫 번째 감옥살이(27-28)

* 석방됨

 

그리하여 그들은 살아난 후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2823절을 보면 결론 부분이 나타난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는지라"(28:23) 바울은 감옥에 갔다가 잠깐 놓였을 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문제가 없다.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 그래서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믿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진짜 신앙 생활은 삶 속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예수님을 전하는 일만 하였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 말이 서로 맞지 아니하니..."(28:24) -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사야의 예언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과 귀를 받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만 하면 된다.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

 

* 두 번째 감옥살이

* 확장

 

사도 바울은 이때에 집을 하나 세를 내어서 가택 연금 상태로 이년간 있었다.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1-) 사도 바울은 이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으나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가 바로 62년쯤 된다. 60년경에 로마에 와서 62년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를 쓰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그때에 그는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로마에 와서 네로 때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베드로는 64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울은 이 곳에서 마지막 편지(디모데후서)를 썼다.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누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마가를 데려오고, 추위를 가릴 겉옷과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은 68년 봄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709월에 이스라엘은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나라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1948년에 독립하게 된다. 이스라엘인은 약 1500만 정도인데 이스라엘 본토에는 약 300만 명이 살고 있다. 우리도 사도행전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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