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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금주·금연운동

 

 

초기 선교사들, ·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5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10월부터 연 1구세신문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2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이상규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6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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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의료활동과 병원의 설립

 

복음 실은 현대의술로 조선인 마음을 잡다

 

학교의 설립과 함께 의료활동은 기독교의 값진 봉사였다. 아아(亞阿)제국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시약소의 설치, 환경위생 교육, 병원의 설립 등 의료활동은 선교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책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1830년대를 전후하여 의료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에게서 예시되듯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학을 통해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현대의학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한국 선교는 병원과 함께 

한국에서의 의료활동은 한국 선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다른 교파에서도 의료선교는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은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 폴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했고, 고종의 윤허로 서울에 설립된 광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병원이었다. 북감리회의 스크랜턴, 북장로교의 헤론 의사가 이 병원에서 일했고, 1886년에는 부녀과를 신설하여 엘러스(Annie J Ellers)가 진료를 맡았다. 후에는 홀턴(Lillias Horton)이 이 일을 계승했다. 알렌의 뒤를 이어 헤론(J Heron), 빈톤(C Vinton), 하디(R A Hardie), 에비슨(O R

Avison) 등이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북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William Scranton)은 서울 정동에서 1885년 9월 민간병원을 설립했는데, 고종은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1886. 6). 1888년 12월에는 아현동과 상동에 분원이라 할 수 있는 진료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미 감리회는 남녀를 한 병원에서 진료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과 어린이만을 위한 진료소를 개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여성만을 위한 병원이었다. 명성황후는 ‘보구녀관(保救女館)’이라는 병원 이름을 하사하였다. 하워드(Meta Howard),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Cutler), 해리스(Lillian Harris), 에른스버거(Emma Ernsberger) 등이 이 병원에서 봉사했는데,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각 지역의 선교병원  

 

의료활동은 서울에서만 아니라 각 선교부에 의해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평양에는 래드병원(Ladd Hospital)을 설립했는데 평양기독병원으로 개칭되었고, 후일 감리교의 기홀병원과 합병하여 1923년에는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되었다. 부산에서는 1891년 12월 브라운(Hugh M. Brown)에 의해 시작된 시약소가 어빈(Charles Irvin) 의사 등의 봉사로 정킨기념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으로 발전하였다. 대구에서는 1899년 존슨(W O Johnson) 의사에 의해 시작된 진료소가 동산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또 선천(미동병원), 강계(계례지병원), 원산(원산구세병원), 해주(구세병원), 개성(남성), 원주(서미감병원), 전주(예수병원), 진주(배돈병원), 심지어는 간도(용정, 제창병원) 등지에도 선교병원이 설립되었다. 특히 대구, 부산, 광주에 나병환자들을 위한 보호시설(병원)을 설립하고 가련한 이들을 보살폈다. 그래서 1913년까지 전국에는 3개의 진료소를 포함하여 33개의 선교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다(표 참고). 

 

1884년 알렌 의사의 입국 이후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내한했다. 1907년에는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The Korea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어 의료선교사들 간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1938년 당시 의료선교사 수는 328명에 달했다.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교 84명, 남장로교 44명, 북감리회 59명, 남감리회 32명, 성공회 31명, 캐나다연합교회 22명, 안식교 10명, 독립선교사 35명 등이었다. 한국에 왔던 의료선교사 중 헤론, 홀, 랜디스(Eli Barr Landis), 오웬(C C Owen) 등은 격무와 과로로 순직하기도 했다. 

 

의료선교가 끼친 영향 

 

의료선교는 궁극적으로 복음 증거를 위한 방편이었으나 한국의 의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의료선교 사역이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첫째로 시료(施療)와 시약(施藥)을 통해 한국인들의 육체적·정신적 혹은 심리적 아픔을 치료하고 재활, 재생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준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의료실태가 경험적 의술의 일종인 한의학 외에는 비과학적 샤머니즘과 관련된 무속신앙과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의료수준에 머물고 있었음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렇다. 둘째, 서양의술의 전파를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셋째, 의학교육과 의료인의 양성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에비슨 박사는 초기 의료선교가 남긴 공헌을 5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로 호열자나 각종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의료선교사들의 시약, 시료, 종두 등 예방과 치료활동을 통해 병이 미신과 악신(惡神)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미신적 공포에서 해방한 점, 둘째로 종두(種痘)의 보급에 의한 어린이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 셋째로 이웃을 돕는 사랑의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구제사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 점, 넷째로 예방, 시약, 치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 각종 의료활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고 수용된 점, 다섯째로 의학교재의 번역 및 의료관계 저술을 통해 한국의 과학교육 혹은 의학교육에 영향을 준 점을 지적하였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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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1884 - 1900)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는 가속화 되었다. 감리교는 아편젤러와 스크렌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고,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편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이 입국하여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그 후 ·1889년에 호주 장로교가, 1890년 성공회가, 1892년에는 남장로교가 1896년에는 남감리교와 침례교의 전신 동아 기독교가, 그리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러시아 정교회, 플리머스 형제단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1907년에는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가, 그리고 그 이듬해 1908년에는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이리하여 한국은 알렌이 입국하던 1884년부터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하던 1908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개신교을 대표하는 장,감,성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한국선교를 동시에 착수하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로즈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개 한 지도자 ”였으며, 스피어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편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터박사, 테일러 박사와 나란히 전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1884년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금해 같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속속 입국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얼마 후 1885년 6월 의하 헤론부처가 입국했고, 1887년 7월 4일에는 후에 벙커의 아내가 된 앨러스가 입국해 한국에 이북구한 북장로교 선교사는 7명으로 늘어났다. 1887년 앨러스가 입국할 때,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세 사람, 헐버트, 벙커, 그리고 길모어도 입국했는데 이들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파송한 선교사들로 후에 한국선교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개혁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프린스톤신학교,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토론토대학, 그리고 호주의 신학교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드루신학교를 비롯해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카우만이나 길보른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 이들이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매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기독교 개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내의 개화파들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한국내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는 열국에 의해 한반도는 전에 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가 강대국들 사이의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과 한반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너무도 작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은 더 강력한 이웃 국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강대국의 국제적인 권력 투쟁에서 힘없이 볼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을 둘러싼 열국의 한국 쟁탈전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반강제적으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그와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열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개항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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