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한국에서 기독교 부흥 배경
기독교와 민족주의
앞에서 한국에서의 급속한 기독교 성장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1895년 이후의 급속한 성장은 청일전쟁 이후 민족자강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교회 성장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한국이라는 동일 문화권에서조차도 지역에 따라 기독교 수용 정도가 달랐다는 사실은 이 점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으로 다음의 몇 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설명이 ‘선교정책설’인데,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 선교사들의 고유한 선교정책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복음전도와 함께 시행된 교육, 의료 활동이 영향을 끼쳤고, 1890년대 이후 채용된 네비우스 정책과 선교지역 분담정책이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라고 말한다. 소열도(Stanley T Soltau), 왕영덕(Alfred W Wasson), 곽안련(Charles A Clark) 등 선교사들이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김양선 김재준 강근환 등도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정대위(鄭大爲)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정책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한국교회 성장을 한국의 기층문화인 샤머니즘, 곧 무교적(巫敎的) 세계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결과로 주장한다. 그는 예일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혼합 현상’(Religious Syncretism in Korean Society, 1959)에서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샤머니즘과 기독교와의 종교혼합 현상의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박봉배, 스펜서 팔머(Spencer Palmer)도 비슷한 입장이다.
한국교회 성장의 몇 가지 원인
이와는 달리 감리교적 배경의 윤성범, 유동식 등은 한국인의 심성(心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사회학자 정재식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은 19세기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고, 정치적 환경에서 조성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은 종교적 욕구를 강화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쉬리어, 왓슨(Alfred W Wasson), 서고도(William Scott), 라토렛(K. S. Latourette) 등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역사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환경론(歷史環境論)과 동일하다.
정치적 정황론이 정치적 상황이라는 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역사환경론은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지만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적 전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일제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지만,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한국은 점증하는 일제의 침략 하에 있었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1876)을 통해 조선 진출의 발판을 확보한 일제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 세력을 물리쳤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만주사변(1931), 상해사변(1932),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거쳐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 수용되어 갔다. 말하자면 일제의 강압적 식민 지배와 수탈 과정에서 기독교는 서구 문화나 교육, 의료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아아(亞阿) 제국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기독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반(反)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반민족적 행위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약 300여년간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성격이 있는데, 첫째는 반 외자(外資)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반대적 상황이었다. 우리는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융합될 수 있었다. 일제에게 우리는 수탈을 경험했으나, 기독교는 우리에게 수혜자였다. 기독교 신앙은 반일적 국민의식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때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는 민족과 유리된 배타적 집단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동반자였다.
선교사였던 존스(G. H. Jones)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질적 집착보다 더 강력한 애국충군의 보루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을 만큼 서양인의 눈에도 이런 현실이 읽혀지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을 형성하게 된다. 김세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고, 일제 지배 하에서도 기독교가 건재할 수 있는 힘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역사에서의 일제의 현존은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배후세력이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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