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국교회사] 1907년 평양서 일어난 대부흥

 

길선주 친구 돈 사취고백이 대부흥 불 댕겨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1월에는 평양 대부흥으로 발전하였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figcaption class="wp-caption-text">19071월 평양 대부흥의 불을 지핀 길선주 목사(앞줄 중앙)와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그래함 리(이길함) 선교사()</figcaption>

 

 

그해 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에서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907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집회가 계속 되는 중 16일 저녁 집회에는 무려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뜨거운 집회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낮에는 분반으로 나눠 성경을 공부하였고, 저녁에는 대중집회 형식으로 모였다. 16일부터 시작된 저녁 집회에는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집회는 계속됐다.

 

사경회가 회개기도회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12일 밤 블레어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은 더욱 분명했다. 영적 분위기가 회중을 압도했고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14일에는 정오기도회를 열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 이 고백이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켰고, 평양대부흥의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였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부터 죄의 고백은 계속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은밀한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개의 기도는 바다에 이는 파도소리 같았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인간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함 리는 115일자로 기록한 보고서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했다.

 

조지 맥쿤 또한 115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모임이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이라고 썼다.

 

 

 

1907년 대 부흥은 뜨거운 구령(救靈) 운동으로 이어져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지까지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사진은 1907년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 모인 성도들이다

 

죄 고백이 행동으로 옮겨가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선포된 말씀에 응답하여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이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죄가 고백되었다.” 블레어는 이 당시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라고 보았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의 부흥사에서 예시된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퍼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로 그리고 학교로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다.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고, 부흥의 역사는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부흥은 1907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 성숙을 가져왔고,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사회변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03년 이후 1907년 대부흥은 교회연합운동을 가능케 했고, 한국교회의 성격을 주형하였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부흥의 불길(19031906)

 

대각성 불길, 원산개성평양목포로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의 내한 이래 첫 10년간은 고투의 날들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수적 성장을 보이더니, 1900년 이후 도처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의 아픔이자 좌절의 시기였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조선인의 절망을 보았다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암울한 역사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뒤엉킨 1900년대 첫 10년 동안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형태의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3년부터 1907년에 이르는 신앙부흥,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救靈運動)이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인데,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부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나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로 정의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성장(growth)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고 한다면, 부흥(revival)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으로서 혁명적인 요소가 있다. 부흥은 영적 각성과 함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웨일즈부흥(1859) 기간 중에는 부흥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라는 말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부흥이 1900년대 한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 시원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회의 화이트(Mary Cutler White)와 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원산에 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8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강의하던 중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었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이 작은 시작이 1903년 이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변화와 각성의 시작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1903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스웨덴에서 온 프란슨 목사(Rev F Franson)가 원산에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에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부흥

 

이런 부흥의 역사는 1904년 봄 원산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이때의 초교파 사경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과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부흥은 곧 개성 송도로 확산되었다. 그해 3월 서울에서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9월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이었다.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부흥을 경험했는데, 크램(W G Cram)은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1906826일부터 9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디가 요한1서를 설교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평양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 선교사연례대회(9. 29)가 개최되었다. 미국에서 온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경회)과 죄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19069월경부터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1909년 전주교회에 종을 설치하기 위해 소달구지로 종을 나르고 있다. 수직성을 확보한 종탑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전주시의 시간이 성화(聖化)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옥성득 교수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 글쓴 이 / 옥성득(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90세의 김창근 집사님 39년 거제 어구교회 종지기


뎅그랑 뎅! 뎅그랑 뎅! 김창근
집사님이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어구교회 종을 울리고 있다. 병 색이 엿보이나 그래도 종지기로 서의 소명의식만큼은 철저하다. 새벽 4시 반 여명을 깨우는 교회 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부 드럽게 포구를 감싼다. 마을을 돌아 나온 종소리는 이내 남해 바다를 건너 갯내읍을 타고 이순신의 섬 한산도까지 뻗어나간다. 한산도까지는 뱃길로 15분 바닷가를 따라 70여 호가 옹기종기 몰려있는 작은 포구 경남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바로 39년 종지기 김창근(90년 은퇴) 집사님이다. 1967년 마을에 어구교회가 들어선 지 39년, 교회를 거쳐 간 목사가 10명이 넘지만 종지기만큼은 늘 집사님 몫이었다. 김 집사님은 과연 몇 번의 종을 칠까? 이전에는 매일 정확히 50번 씩 종을 쳤다. 그러나 집사님 귀가 어두워지면서 요즘은 70번, 100번을 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없다. 270여명의 주민 중 교인은 30여명에 불과하지만 교회 종소리는 이미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시계도 없던 가난하고 힘겨웠던 주민들에게 김 집사님이 치는 교회의 새벽종소리는 논밭일의 시작과 출어(出漁)를 알리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김 집사님은 어구교회 설립 성도 중 한 사람이다. 1967년 그 때는 종 대신 산소통을 소나무에 매달아 두들겼다. 1999년 새 교회당을 짓고 종을 철거하려했으나 집사님은 자식들이 준 쌈짓돈 70만원을 내놔 오히려 종탑까지 세웠다. 그런데 요즘은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집사님 건강 때문이다. 머지않아 집사님이 천국으로 떠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후계자가 없다. 하지만 김 집사님이 힘을 다해 쳤던 교회당 종소리를 주민들은 ‘천국의 소리’로 기억할 것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한국교회사 / 한국교회 부흥운동(1900 - 1910)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주변의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열국이 한국을 가운데 두고 벌인 각축전은 정치, 사회분야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 라토렛이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있어서 번성과 쇠퇴는 부분적으로 내외적인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빗나간 평가가 아니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도,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전에 없는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청일전쟁 이후 일기 시작한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1903년에는 하디를 통해 원산부흥운동으로 촉발되었고, 이것이 다시 원산부흥운동의 저변확대와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발흥으로 이어져 한국교회에는 조나단에드워즈로 대변되는 미국의 제 1차 대각성운동, 웨일즈부흥운동, 인도의 부흥운동과 견줄 수 있는 놀라운 영적대가성운동이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2년후 1909년 일종의 전도운동인 백만인구령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영적 대각성 운동은 세 가지 면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는 이 대각성운동이 당시 세계기독교계에서 일고 있는 부흥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포스터가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강대국들이 노리고 있는 “나봇의 포도원”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의 패권주의로 인한 정치적 위기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리이고, 셋째는 한국의 부흥운동은 일차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된 사경회 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1907년 한국교회에는 복음이 전래된 이후 알렌이 “놀라운 부흥 운동”이라고 말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03년부터 간단없이 줄기차게 이어져 온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렀던 놀라운 성령의 임재와 함께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흥했다. 평양대부흥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이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에 발흥하기 시작했다.

 

1907년 북장로교 보고서가 밝힌 대로 과거 죄악의 공포를 깊숙이 깨닫지 못했던 한국인들은 이번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의 무서운 결과, 죽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악을 통회했다. 그러나 단순히 통회로만 끝나지 않았다. 스왈른이 증언한 대로 사람들은 그 다음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했다. “그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왔다. 도둑맞은 돈도 되돌아왔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이 전반적으로 바로잡혀졌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 제임스 게일이 표현한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한국인 공동체를 움직인”이 같은 영적 변화는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그곳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장대현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평양 시내 전역, 더 나아가 한국교회 어느 곳에서나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평양에서 열렸던 열흘 동안의 북장로교 선교부의 사경회가 끝난 다음이 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다른 교우들에게도 전해 주었다. “이 소문이 각처에 전파됨에 따라 신령한 체험을 맛보고자 하는 열망과 기대는 지방 신자들의 마음속에 간절하여졌다.” 어떤 부흥도 회개의 역사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그 원리는 동일할 것이다. 이 땅 가운데 다시 한번 평양대부흥과 같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에 이어 “부흥운동의 두 번째 기간”으로 알려진 백만 인구령 운동은 한국 민족 100만 명에게 복음을 전해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공동의 목표를 이룩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회가 힘을 결집하여 전국적으로 추진한 민족복음화 운동이었다. 로이 스위러가 백만인 구령운동을 가리켜 “전도운동”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백만인구령운동은 기울어 가는 국운 앞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통해 흩어진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지위와 연령, 교파와 교단,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전국의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실패한 운동이 아니었다. 한국교회는 원산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해 일제의 무력적 탄압과 강요에 흔들리지 않고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거족적 집단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1911년 제 5회 장로교 독노회는 1912년을 기해 총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 하였고, 그 해 가을에 열린 장감 연합공회 총회도 1912년에 장감 6개 선교회와 각 성서공회, 그리고 성공회가 참여하는 연합공회로 확대 개편할 것을 결정했다. 그 동안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전국적인 규모의 총회와 연회 조직을 통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했고, 양 교파를 대변하는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도 신학교로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전국적으로 발화되면서 만주와 소련과 일본과 하와이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노력들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이러났다. 이처럼 백만인 구령운동과 그 앞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 복음화라는 거대한 비전과 꿈을 한국인들에게 깊숙이 심어 주어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다지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임스 부스컬크가 지적한 것처럼 대부흥운동은 무엇보다도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한일 합방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정치적인 암흑기를 극복하고 민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다지게 만들어 준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대만큼 우리 민족이 암흑의 시대를 걸었던 적도 드물었지만 가장 암울했던 이 시대, 일련의 놀라운 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시고 섭리하셨던 것이다. 돌이켜 볼 때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죄로 무든 이 백성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였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한국교회는 대부흥운동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적 각성운동, 사회개혁운동, 전도열과 놀라운 교회 성장, 그리고 복음주의 연합운동은 이 시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가져다 준 두드러진 결실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부흥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는 없었다고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그렇게 부흥이 일어난 이유는 세계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나님의 크심, 그 광대하심을 느끼고 그 위엄에 굴복하는 은혜가 본서를 요약하면서 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역사 가운데 역동적으로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로 축복이다. 특히 원산 대부흥 운동을 시발로 평양 대부흥 운동과 100만인 구령 운동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증거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광대하심과 세밀함을 경험케 한다. 본인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한편, 그 때가 아니고 21세기 한국에 보내신 이유는 그 역사의 부흥이 단지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도 동일하게 부흥 운동이 요구된다. 아니 부흥이 필요하다. 물론 그 어느 시대가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불필요하겠는가마는 온갖 이단의 사상이 넘실거리고, 윤리적 도덕적 판단의 준거를 잃어버린 이 시대에 너무나 절실히 요구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흥 운동은 철저한 회개를 그 바탕으로 한다. 원산 대부흥도, 평양 대부흥도, 100만인 구령 운동도 찢어지는 심령을 하나님께 토설하며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는 아픔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서 있는 것.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