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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말씀]사망의 양면(장례) 

 

 

          

 사망의 양면(장례)

  눅 16:27-31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후에 당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택한 백성의

     축복은 이루 형용할 길이 없다. 성도를 구별하여 택해 세웠고 또 택한 백성

     은 언제나 간섭하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여 주시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나간다.  성도는 세상을 떠날 때 웃음으로 세상을

     이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소망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1. 불신자가 보는 사망

          ① 내세를 모르기 때문에 공포가 쌓인다.

          ② 누구든지 사망을 싫어한다. 죄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다.

          ③ 슬퍼한다. 믿지않은 책임으로 처벌이 있기 때문이다.

           

          2. 신자의 입장에서 보는 사망

          ① 죽음은 사는 길이다.

          불신자는 울고오고 울고가지만 성도는 기쁨으로 간다.

          ② 안식세세로 들어가는 길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지만 이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안식세게로 들어간

     다.   ③ 죽음은 부활의 길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사는 축복이 있으

           니 웃음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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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드리는 기도문 

 


1.아침에 드리는 기도

                             *
 낮의 해와 밤의 달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지난밤 주님 품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고 건강한 몸으로 새아침을 맞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길을 걷게 하시고 악한 삶을 살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모든 일 가운데서 주의 뜻을 나타내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내 이득만을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게 하옵시고 남의 짐도 대신 질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옵소서. 슬픔을 당한 이웃을 만나면 위로의 말을 주고, 억울함을 당한 이웃을 만나면 함께 울며 기도할 마음을 주옵소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으로 소망을 보여 주며 이웃들 앞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진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을 시작할 때도 기도로 시작하고, 신앙양심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껴 쓰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돈을 허비하거나 낭비하지 말게 하옵소서.  건강을 위하여 절제 있는 생활을 하게 하시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유익한 삶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길을 걸을 때나 차를 탈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저녁에 드리는 기도

                          * 
  서산으로 해가 지고 천지가 고요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

  주 앞에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도 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허락해주시고 주안에서  하루를 평안히 지낼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하루를 반성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게 하시니 더욱 감사드립니다.

  말에 실수가 많았고 행위가 진실하지 못했으며,  불신자들 앞에 빛도 소금도 되지  못했습니다.

  불의와 부정 앞에서 잠잠하였고, 악과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밤에 쉴 곳이 없는  나그네들,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

  괴로움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
 
  고통과 고민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도 많은데,

  저희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심으로 위로를  받으며 쉴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쉴 곳이 없는 이들에게 안식처를 주시고
 
  괴로움 가운데 허덕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믿음 소망 사랑의 꿈을  선물하옵소서.
 
  이 밤도 단잠을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크신 은혜로 충분히 휴식하게 하여 주옵소서.
 
  잠자리에서도 악한 영의 시험이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야곱과 같은 비전의 꿈을  꾸며 잠들게 하옵소서.

  저희 가정과 우리 교회  교우들을 지켜 주시며, 이 국가와 민족을 지켜주옵소서.

  그리하여 내일 축복의 아침을 맞게 하옵소서.
 
  기쁜 날로 이어지는 평안을 내리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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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혼인 주례식에서 목사들은 주로 다음의 성경 구절로 예식을 마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7). 오늘날 이 구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혼인식 마지막에 첨부되는 한 구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혼인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 의해서 나뉘어 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주의 말씀과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러한 말씀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천생연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구절이 한국 교회에서 그 강조점이 본문의 의도와는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세상 사람들의 "천생연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가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주셨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준" 배우자를 위해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본문의 강조점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혼인의 엄숙성"이라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사의 주례로 짝이 지어지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례자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감독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혼외 정사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롬 1:23)"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부부의 사랑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남편이 실직을 해서 경제적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아내가 정신병이나 불치병을 앓고 있어도, 심지어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왜냐하면 혼인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 19:7은 혼인을 앞둔 청년이나 혼인식의 주인공들에게도 적합한 말씀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불가피한 경우"로 인해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있는 부부이다.  혼인식을 막 치룬 부부들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는 말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 아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불신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 서류를 앞에 둔 부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교회당 안에서) 혼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혼은 사람 앞에서 (법정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혼의 거의 불가능성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혼한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숫자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어떤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남편은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고 자녀 교육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에 남편은 생을 자포자기하고 아내에게 오히려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평생동안 성의 즐거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내에게 엄청난 짐이다. 남편이 자기 스스로가 이혼을 요청할 때, 아내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을 했는가?"이다. 그들은 혼인식에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겠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자들이다.  "배우자가 건강하고 부유할 때"라는 조건이 혼인에 붙는다면, 우리는 혼인을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혼인의 본질을 계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이 없다. 100번을 혼인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혼인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음행"에서만 나온다. 요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이 음행을 확대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라.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그렇게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행 보다 가정 폭력이 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이 이혼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에도 어느 기간 동안 별거를 하든가 아니면 그 남편을 법에 호소하여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혼이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방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부부생활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이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허락"이지 "장려"나 "권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배우자 중 한 명이 음행을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오해이다. 어떤 교인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혼하기 위해 의도적인 음행(비록 자신이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된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편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부부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비록 이혼하더라도 . .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의 연고(불신자의 핍박)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이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 10, 11)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다.  1)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엄격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  2) 이 말씀은 혼인을 앞에 둔 사람이나 이혼을 이미 한 사람들이 아니라 혼인을 이미 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3) 강조점은 역시 이혼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에게 만일 이혼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안 된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심하여야 한다: 독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전 남편과 화합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이러한 결단 없는 이혼은 교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은 우리 임의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혼만큼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교회 안에서의 이혼은 재 결합을 전제로 한 이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사도 바울은 "갈릴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시 전 배우자와 화합하라고 명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본문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가 상대방 배우자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우리는 이혼은 혼인의 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이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하나됨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나뉨은 사람에 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왜 "이혼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는가?  하나의 대답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나눈 것"과 "하나님이 나눈 것"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누고 계시는가? 이혼과 나눔의 동일시 할 때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두 배우자가 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혼인식)이 필요로 하듯이, 두 사람이 나누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은 바로 죽음(장례식)이다.  한 배우자가 죽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혼인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 (고전 7:39). 그렇다면 상대편이 죽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들에게조차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다음에 바로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혼인 적령기를 앞두고 있는 청년에게 권하는 독신(7:32-34)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상처한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일차적인 권면은 재혼이 아니라 독신이며, 따라서 독신의 복됨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상담학과는 구별되는 말인가?

        이혼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권면하신다. 하나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다. 혼인의 끝이 될 수도 없다. 혼인의 끝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한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한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 기간 동안 원수사랑의 훈련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기간은 원수인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또한 자신을 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다시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기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원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록 그 사람에게 뼈아픈 시간이 된다 할 지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복 있는 자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이혼자들이 교회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교회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혼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듯이 이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혼한 사람들만큼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이혼하더라도 무조건 다시 합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 말씀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전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즉, 전 배우자가 회개하거나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든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나뉨을 허락 받을 때까지, 즉 상대방이나 자신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결국 이혼 기간 동안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합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혼인의 엄숙함에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0)"라고 불신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지만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오직 귀 있는 자만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장기려 박사님을 한 번 보자.  그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홀로 두고 이남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끝가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부부로 살 것이라는 기대를 늘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갔다. 결국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분은 독신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부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재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혼은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합할 가능성을 현저하게 막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재혼은 혼인이 아니라 간음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간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재혼을 옹호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남편이 폭행이 심하다고 하자. 그 남편이 평생동안 그렇게 폭행이 심할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돌이키셔서 정말 훌룡한 남편으로 바꾸실지 누가 알겠는가?

        재혼이 더 나은 혼인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재혼한 가정의 85%가 이전 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재혼은 부모들의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혼과 재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좋은 혼인 생활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도 곤란하다.  혼인의 일차적이 목적은 두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만 있다면"이란 말을 교회는 삼가야 한다.  "좋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전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혼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혼과 재혼의 문을 쉽게 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문을 쉽게 열어 버린 미국 교회들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평신도는 고사하고 교회의 저명한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으리라. 어떤 분은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가정을 떠났기 때문에 재혼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목회나 신학 교수를 포기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병든 아내와 도망간 아내, 그리고 목회와 신학 활동,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그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와 동거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목회자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라.  목회나 성도는 포기해도 된다. 당신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돌들을 일으켜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포기한다면 누가 그녀를 보호해 주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음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간음하는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간음하게 하는 죄", 즉 아내를 버리는 죄를 짓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혼과 재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전 남편(아내)과 다시 화합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도저히 서로 같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인간적 상황!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넓은 길은 존재한다.  이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왔을 때, 목사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답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료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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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인터넷상에 있었던 내용입니다.(참고하시고 직접 한글코란을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슬람의 13 교리'라는 것인데 이것을 그대로 믿으면

이슬람은 반인륜적이고 폭력적인 종교라고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중동지역의 선교사로 사역했던 김동문 선교사는

최근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에서 코란에는

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며 해당 구절을 소개하면서 조목 조목 반박했다.

아래는 김동문 선교사가 <뉴스앤조이>에 올린 글이다. <편집자 주>

 

 

1. 사춘기 시작 안 한 여자 아이를 강간, 결혼 그리고 이혼해도 된다?

 

제시한 본문과 이 주장 사이에 어떤 상관성도 없습니다. 1번 그림(사진)은 코란 암송 대회 장면인데, 이것을 어린아이와 결혼하는 장면으로 서술한 경우입니다.

 

(코란 65:4) 생리 기간이 끝나 버린 여성이라도 너희가 의심할 경우는, 그녀들을 위해 정해진 기간은 석 달이며, 생리에 이르지 아니한 여성도 마찬가지라. 또한 임신한 여성의 기간은 출산할 때까지로, 알라를 두려워한 자 알라는 그의 일을 편하게 하여 주시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기간은, 이혼 또는 재결합을 위하여 검증이 필요한 기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인의 임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기간을 뜻합니다. 이 본문을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은 여자 아이를 강간하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2. 다른 사람을 성 노예와 노동 노예로 만들어도 된다?

 

(코란 4:3) 만일 너희들이 여자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면, 너희의 선택으로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네 번도 좋으니라. 그러나 너희들이 그녀들을 공평하게 대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면, 다만 한 여인이나 네가 소유한 포로 (또는 종) 가운데서 하라. 그것이 너희들이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막아 주고, 더 적합할 것이다.

 

(코란 4:24) 이미 결혼한 여성과도 금지되나, 너희들의 오른손이 소유한 것은 제외라. 이것은 알라의 명령이다. 이외에는 너희를 위해 허락이 되었다. 간음이 아닌 합법적 결혼을 원할 경우, 지참금을 지불해야 된다. 너희가 그들과 결혼함으로서 욕망을 추구했다면, 그녀들에게 지참금을 줄 것이다. 그 의무가 행해진 후에는, 쌍방의 합의에 의한 것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죄악이 아니다. 진실로 알라는 만사형통하심이다.

 

(코란 5:89) 알라는 너희 언약보다는 너희의 의도와 마음을 계산하신다. 그의 속죄로써 열 명의 불쌍한 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라. 이는 너희 가족들이 먹는 음식이다. 또한 그들에게 입을 옷을 주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는 것도 된다.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삼 일간 단식을 하라. 그것이 내가 언약한 속죄이다. 그러나 너희 언약은 지켜야 한다. 이것이 너희에게 계시한 알라의 말씀이니, 너희는 감사하라.

 

(코란 33:50) 예언자여, 진실로 알라가 너에게 허용하였나니, 네가 이미 지참금을 지불한 부인들은 알라께서 전쟁의 포로로써 너에게 부여한 자들로, 너의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이들과, 삼촌의 딸들과, 고모의 딸들과, 외삼촌의 딸들과, 이주하여 온 외숙모의 딸들과, 예언자에게 스스로를 의탁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여성들과 예언자가 결혼하고자 원할 경우, 너에게는 허용된다. 그렇지만, 다른 믿는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알라는 그들의 부인들과 그들 오른손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관하여 믿는 자들에게 의무화한 것도 알고 있다. 이는 너에게 어려움이 없도록 함이니 진실로 알라는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다.

 

(코란 58:3) 그러나 지하르 형태로 아내와 이혼한 자가 그들이 말한 것을 취소할 때, 그들은 그녀와 동침하기 전에 한명의 노예를 해방시키라. 너희가 충고를 들었거늘 진실로 알라는 너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코란 70:30) 그러나 아내들과 그들의 오른손이 소유한 자들은 허락된 것이되

 

코란 58:3'지하르' 형태의 이혼은, 이슬람 이전 아랍 사회의 악습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은 나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말하며 아내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이혼하는 관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른손이 소유한 것'이라는 표현은, '전쟁 포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사회에서 전쟁 포로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3. 노예와 아내는 때려도 된다?

 

(코란 4:34)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알라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써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적으로 남성을 따를 것이며, 남성이 부재 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다. 순종치 아니하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도다.

 

코란 안에는 당시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인 관행처럼, 남존여비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그런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처벌 조항은, 여성이 순결 또는 정조를 훼손하였다고 간주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노예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4. 강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4명의 무슬림 남성이 필요하다?

 

(코란 24:4) 순결한 여성들을 중상하는 자들이 네 명의 증인을 내세우지 못할 경우, 그들에게 여든 대의 채찍형을 가하되, 그들의 증언도 수락해서는 아니 되나니, 이들은 사악한 죄인들이다.

 

5.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슬람으로 안 바꾸면, 그들을 죽이든지 세금을 내게 한다?

 

(코란 9:29)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선지자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책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하고 그들 스스로 초라함을 느낄 때까지 그들을 죽이라.

 

13가지 주장 가운데 그나마 이 5번째 명제가 사실에 근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조차, 전쟁 상황에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무함마드 당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의 개종을 목적으로 전쟁이 수행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6.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든지, 손과 발을 절단시켜라?

 

(코란 8:12) 너의 주께서 천사들에게 말씀으로 영감하여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니, 신앙인들에게 확신을 줄 것이며, 내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치고 그들의 각 손가락을 쳐라.

 

(코란 47:4)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을 쳐라(*죽이라). 너희가 완전히 그들을 제압했을 때는 그들을 포로로 취하고, 그 후에 은혜로써 석방을 하든지, 아니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그들을 보석금을 받고 풀어주도록 하라. 그렇게 하라. 너희에게 명령이 있었다. 알라께서 원하셨다면, 그들에게 고통을 내렸을 것이다. 그분은 너희를 다른 자들에 비유하여 시험하고자 하심이다. 그러나 알라의 길에서 살해된 자 있다면, 그분은 그의 행위가 결코 손실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

 

본문에서 "목을 쳐라", "손가락을 쳐라"는 말은 "죽이라", "완전히 굴복시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쟁 중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위 코란 본문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문장은 없습니다.

 

7. 무슬림이 아닌 사람을 죽이면,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상으로 받는다?

 

(코란 9:111) 알라는 믿는 자 가운데서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재산을 사시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라를 위해 성전하고 투쟁하며 또 순교하리니, 그것은 모세오경과 인질과 코란에 약속된 것이다. 알라보다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 누구이냐 너희가 알라와 성약한 것에 기뻐하라. 그것이 영광된 승리라.

 

언급한 코란 본문은 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코란 본문 어디에도 이 같은 언급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일부 과격 무슬림 선동가들이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코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8. 이슬람을 떠나는 사람은 죽여라?

 

(코란 2:217) 그들(*쿠라이시 부족들)은 성스러운 달 동안에 (*벌어진) 살생에 관하여 너(*무함마드)에게 물을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기간에 살생은 죄악이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알라의 길을 방해하고, 알라와 하람 사원에 가까이 있는 것을 방해하는 것과, 그곳으로부터 그의 주민들을 추방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며, 교사하고 박해하는 것은 살생보다 더 나쁜 죄악이다. 그들(*쿠라이시 부족들)은 너희가 너희의 종교(*이슬람)를 배반할 때까지 너희들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중에 믿음의 배반자가 되어 죽는다면, 그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불지옥의 거주자가 되어 그곳에서 영원히 거할 것이다.

 

(코란 4:89) 그들이 그랬듯이, 너희도 불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너희가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는 그들이 알라를 위해 떠날 때까지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친구로 택하지 말라. 그럼에도 그들이 배반한다면, 그들을 포획하고 그들을 발견하는 대로 살해할 것이다.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친구나 후원자로 삼지 말라.

 

코란 4장 본문의 배경은, 625년 우흐드 전투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위선자, 불신자는 탈영병 무리를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발견하는 대로 살해할 것이며"라는 말이 오해될 수 있지만, 이것은 전쟁 중의 탈영병이 저항하는 경우에 살해할 것을 명령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위선자나 불신자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9.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목을 배어 죽이라?

 

(코란 47:4)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들을 쳐라. 너희가 완전히 그들을 제압했을 때 그들을 포로로 취하고, 그 후 은혜로써 석방을 하든지 아니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그들을 보상금으로 속죄하여 주라. 그렇게 하라. 너희에게 명령이 있었다. 알라께서 원하셨다면, 그들에게 고통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로 하여금 성전하도록 하였으니, 이로 하여 너희를 다른 자들에 비유하여 시험코자 하심이다. 그러나 알라의 길에서 살해된 자 있다면, 그분은 그의 행위가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이 구절은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10. 알라를 위해 죽이고 순교하라?

 

(코란 9:5) (*전쟁이)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하라. 그리고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 주라. 진실로 알라는 관대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이 본문은, 631년경 전쟁과 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평화로울 때의 경우도 아니며, 도시에서의 조항도 아닙니다. 본문에는 알라를 위해 불신자, 타종교인을 죽이라는 명령도, 알라를 위해 순교하라는 명령도 나오지 않습니다.

 

11.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을 위협하라?

 

(코란 8:12) 너의 주께서 천사들에게 말씀으로 영감하여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니, 신앙인들에게 확신을 줄 것이며, 내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치고 그들의 각 손가락을 쳐라.

 

(코란 8:60) "군대와 말로써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다. 그것으로 알라의 적과 너희들의 적들과 그들 외의 다른 위선자들을 두렵게 하라. 너희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알라는 그들을 아신다. 너희가 알라를 위해 바친 하찮은 것이라도 정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위 본문은, 624년 바르드 전투에서의 승전을 배경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다른 위선자들'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일부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12.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의 것들을 훔쳐라?

 

이 부분은 '코란 8'이라도 되어 있을 뿐, 인용 출처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13. 이슬람을 강화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라?

 

(코란 3:26) 말하라. "권능의 왕이신 알라여 당신은 당신의 뜻대로 권능을 주시기도 하고 권능을 빼앗기도 하시며 또 영광과 천함을 주시나니 당신의 손 안에 모든 영광이 있나이다. 진실로 당신은 모든 일에 전지전능하시도다

출처 : 뉴스앤조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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