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600만명이 살해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본문말씀에 "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답변입니다.

해 아래의 부조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과 같이 인간의 지식과 기대와 형상에 제한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나뭇조각으로 조각된 신상이 아닙니다.

유한한 형상이 무한한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가들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스스로 숨어 계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동행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0:21). 하나님의 계신 암흑은 바로 죄인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중세나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성화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주위에서부터 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점차 어둡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하나님의 범접할 수 없는 신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십자가신학을 부르 짖었습니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을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 권능. 지혜, 선함만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도 물론 창조세계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46"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 신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이 아니라, 영광의 신성의 정반대인 인간예수의 모욕, 가난, 고통, 번뇌, 어리석음, 약함 그리고 죽음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도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소경인고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이 세상에서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곧 무능과 비천함 속에서 계시된다. 이미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 예언처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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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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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영어: Calvinism) 또는 개혁주의(영어: Reformed Theology), 장 칼뱅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1] 종교 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어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잡은 사상을 가리킨다.[2] ‘칼뱅주의란 말은 칼뱅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나 이는 매우 드물다.[3] 다만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 칼뱅이 미친 지대한 영향에 칼뱅주의란 이름이 연유한다. 칼뱅주의가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영어: Reformed Church)가 발생하였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뱅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뱅주의를 말할 때에는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별칭들이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개혁 침례교회가 대표적이다. 칼뱅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4]

 

역사적 배경[편집]

 

종교 개혁[편집]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바꾸고자 한 종교 개혁은 결국 개신교회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에는 다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 칼뱅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장 칼뱅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5]

 

장 칼뱅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그리고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뱅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뱅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6]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7]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 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포함하여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편집]

 

개혁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네덜란드)이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신앙고백은 침례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가지들[편집]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질서를 바벨탑 이야기에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적인 성서해석이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진짜 의미에는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는 개혁파 교회 교리의 악용으로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책고백을 실천하였다.[8]

 

핵심 교리[편집]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파와 칼뱅주의를 구분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편집]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언약신학[편집]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가지 언약이 결국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구속 언약 (covenant of redemption):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며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이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된 것으로 본다.

행위 언약 (covenant of works):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이 왔다고 본다.

은혜 언약 (covenant of grace): 아담이 실패한 이후로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5대 강령[편집]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편집]

 

칼뱅주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서 예배를 성경, 기도, 찬송, 헌상, 성찬 과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르는데, 어떠한 것들이 은헤의 방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방도들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에 계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 구절에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예배하지 말라"[9]이다. 둘째 계명이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10]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가 성경 출애굽기 324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칼뱅주의[편집]

 

칼뱅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뱅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전적 타락'설에서 언급되었듯이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든지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냐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이러한 칼뱅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의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지을 수 있다:

합력설(sy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단독설(mo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르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다.) 18세기에는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합력설/단독설과 관련해서 잘 알려진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을 들 수 있다.

 

 

그 누구라도 구원을, 아무리 작은 일부분이라도, 사람의 자유의지와 연관짓는다면, 그는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

마틴 루터(Martin Luther), Bondage of the Will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엇이라도 우리가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

존 오웬, Works of John Owen, Vol.3, p.433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자유의지는 있으나 천국으로 가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힘을 만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

   

죽은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아마 죄인이 자기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것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 (하나님의 주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멸망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주권과 맞선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우리의 영혼에 대한 주권에 습복하는 것입니다; 곧 그 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강퍅케 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분으로서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2, The Banner of Truth Trust, Reprinted 1995, pp.849-854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편집]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대상과 속죄의 유효성과 범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칼빈주의는 복음의 유효성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 동시에 제한적 속죄를 말한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계량적인 뜻만이 아니라 한정적(definite) 또는 특정적 (particular)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인류에 대한 복음의 유효성과 제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량적으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예배의 전통과 형식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초기 종교개혁 시대의 전통을 고수한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자체를 극단적 칼빈주의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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