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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란 무엇인가?

 

1.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공동 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하니까, 교단의 어떤 분은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좌익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셨는데, 본래 이 용어는 개인주의와 대립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용어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어휘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늘 불완전한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사회체제나마 이를 수용하고 신앙의 눈으로 늘 이를 개혁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양식입니다. 또 본인은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2.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이 세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세워지고 경험되는 영원히 현재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 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反影), 복사(複寫), 거울, 즉 피사체(被寫體)입니다, 교회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 전조(前兆)이요, 그 나라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신앙과 희망의 대상인 하나님의 나라는 1.정치적 독재-억압이 없는 민주주의적 정치, 2.경제적 독점-착취가 없는 사회주의적 경제, 3.차별-소외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 4.자연의 지배-착취가 없는 공생주의적 생태계, 5.죄책감과 심판과 무의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과의 교제 안의 영원하고 복된 생활을 지향하는, 성서의 중심되는 구원개념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 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충설명: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임재)하는 곳 혹은 형식은 1.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 28,18 이하), 2.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전 11, 23 이하), 3.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 18, 20), 4.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25,31 이하; 교회 밖의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익명적 그리스도인!), 5.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 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보충설명: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 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 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 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2.그리고 교회는 시간대(성부 시대- 성자 시대-성령 시대 혹은 구약 시대-신약 시대-교회사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사명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6개)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6개)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12개).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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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우리는 참 하나님과 자기의 하나님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며 참 예수님과 거짓예수를 분별해나가야 합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진리인지, 유사 진리인지 알아가야 하며 무엇이 교회인지 무엇이 교회가 아닌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인지? 어떤 일이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거짓된 교회 개념에 세뇌 당한 채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인 교회 개념을 정확히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충성하고,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교회(Ecclesia=에클레시아)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혹은 "불려 내어진 무리"라는 뜻입니다.(무리, 공동체라는)

 

사람이외의 그 어떤 것도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흔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교회건물은 교회당일 뿐이지 정확한 의미에서 교회당은 교회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제도 역시 .. 그 자체가 교회는 아니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대치적 교회구조일 뿐, 결코 교회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뿐 아니라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민화된 증거이자, 무지의 소치이며, 반성경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당 건물을 "주님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곧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3:9,16,6:19,고후6:16엡2:1,딤전3:15,히10:21)

건물 성전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폐지되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나 건물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을 건축해야 한다!!" 는 성경적 근거를 찾아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성경적 근거가 있기는 고사하고 성전에서 행해지던 피의 희생제도와 제사장직도 이미 지나갔으므로 이제 교회는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성경은 명백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7:44절~60절을 보면 스데반은 건물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다가 순교했습니다.(성경에는 십일조제도가 있다. 마23:23) 초대교회에는 오직 연보만 존재했었는데 그때 연보를 건물이나 회당 건축용도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당 건물들을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연보)를 건축으로 낭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모였고, 성령의 친교 (Koinonia)로 개방적이었으며 영적 은사를 행사함으로 세포 분열 방식으로 정신없이 성장해 갔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세시대에서는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건물에 비중을 두게 됩니다. 기득권의 탐욕과 명예를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으며 강단에서 비진리가 진리 인냥 선포되었고, 부와 명예, 권세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극심한 부패와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중세는 기독교 역사상 *암흑기*로 불리 워 집니다.

교회 건물은 성공과 부와 명예를 상징하게 됩니다. 큰 교회일수록 성공과 부와 명예는 더 커집니다. 개 교회 건물들은 곧 바로 건물 지상주의, 계급주의, 제도주의, 교권주의, 물질만능주의, 차별주의, 배타주의로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교회 역시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탐람하여, 크고 화려한 건물과 성공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어 일제히 빨리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중세시대 성도들이 자신들의 오류나 맹종을 눈치 챘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愚)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회 건물도 기능적(Functional)이여야 하며, 수단일 뿐이어야 하며, 결코 목적(an end)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이고 올바른 교회관은, 우리 믿음의 집을 짓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 영혼과 교회가 중세기의 암흑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건물이나 제도나 감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객이 전도된 채, 헛된 노력을 경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넘치는 지혜와 분별력으로 건물을 세우려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2)우리 자신이 성전입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분(마12:6)이신 예수께서는 왜? 성전을 허무시고(행6:14).. 또 왜?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실 성전으로 삼으셨을까요?(요2:21, 고전3:16)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사람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숨어계신 하나님"(사45:15)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소 (Habitation of God)는 (거주지 혹 임재장소)

 

▶① 성막(Tent)에서

▶② 성전으로 (Temple)

▶③ 인간의 육체로 변해왔습니다.

하박국 2:20절 에서 ☞고전 3장 16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던 구약의 건물성전을.. 인간의 몸으로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이어야 했던 "건물성전"에서 행해지던 제사장직과, 희생제도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장막의 모형도 십자가에 의해 실체로 완성 되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는 새 계약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육체에 임하시며"(행 2:17)"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자신이)"(행4:21)영(Spirits)과 진리(Truth)로 아버지께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요4:24)"

 

너희가(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사도바울은 반문하며, 이 중요한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문(문서 법)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3:6)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벽돌로 지어진 건물(교회당이나 건물성전)에 임하시지 않으며... 오직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다시 말하면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2:20)가 실제와 사실로써 체험되지 않는 믿음이란 부질없는 말(입술)만의 믿음이요..공허한 이론(지식)에 불과합니다."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저희를 알며"(요10:27)"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마음 문을 열면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함께 거하시겠다고(계3:20)주 예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관계가 기독교 믿음의 핵심이며 또, 사람 자신(개인)이 곧,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되는 이유입니다.

 

몬1: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롬16:5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교회, 또는 성전은 오직 사람들을 말하며, 교회는 선택된(chosen), 순례하는 (pilgrim), 계약의(covenant)증거 하는(witness), 거룩한(holy)백성들입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재차 강조하며 중요시하는 이유는..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게 될 때 비로소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들이...참 진리를 모른 채 고전3장11절~15 말씀처럼.. 금이나 은이 아닌.. 낡아지고 태워지고 무너져갈(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헛된 공력으로)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3)교회건물을 성전이라 부르지 마세요.

 

교회건물과 교회라는 의미는 다릅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그 당시 권력 화되고 건물을 신성시하는 카톨릭이 성경에도 없는 개념을 넣는 것을 경계해서 분명히 밝힌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용어가 교회의 큰 건물이라는 겉모양을 자랑하는 인간의 못된 심성을 따라 다시 생긴다는 것은 중세시대개념으로 돌아가는 시대 퇴보적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용어를 바로 써야겠습니다. 교회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에클레시아), 즉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건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적 신앙을 같이 합력하기 위한 공적이면서 부수적인 도구이지, 그 자체가 공동체나 성전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실체가 아니라 모형이요. 그림자 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를 구약의 물리적인 성전과 동일시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런 구약의 희생제사와 제사장을 똑같이 세우고 제사해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그 성전과 희생제사의 실체가 예수그리스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상징한다는 것이 신약의 기본원리입니다.(요2:21, 계21:11 고전3:16)

 

교회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와 모임, 성례의 집행 장소로써의 부수적인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지금 성전은 우리 신자 자신이죠. 즉 크리스챤입니다. 즉, 물리적 성전은 사도시대 이후로 신약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영적인 의미로 상징화나 더 풍성히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성전을 가지고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했습니다.(마24:1-2)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위선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이제는 물리적 건물로써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본질적 성전이 세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을 잘 나타내는 사건이 AD70년 로마 디도장군의 예루살렘함락과 더불어 된 성전 무너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구약적 물리적 성전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교회건물을 통해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인간의 사고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66:1 행7:48, 17:24) 솔로몬도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런 것을 백성들에게 경계시키고 있습니다.(왕상8:27-49)

 

그리고 사실 초대교회 때 핍박 받을 때 권력자들의 핍박을 피해 소규모의 가정규모의 교회들이 있거나, 여러 군데 동굴을 파놓고 군인들을 피해 여러 군데 도망 다니면서 예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그런 교회모습은 물리적 성전과는 확실히 거리가 멉니다.

 

지금 너무 겉 숫자만 늘어서 건물가지고 성전이라고 자랑하는 사역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 범했던 우를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 속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겠지만, 그것이 건물자체에 성스러움이 있어서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4) 내 몸이 성전이라

 

고전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또 성전이 된 내 몸의 모습은 어떤 상태이어야 하는가?

우리 몸은 어떤 몸인가?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상 사석 같은 자리에서 똥내 나는 몸으로 예배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시면서 모세당시 레위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을 때 몸 상태를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사사 이후부터 제사장직무를 맡은 레위지파들은 철저하게 제사장 본연의 임무를 직무유기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레위를 으뜸이라고까지 했습니다.(대상9:34)

 

제사장 직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해주는 한 대목이기도합니다. 글쎄 레위가 제사장직은 고사하고 싸움질하는 전쟁 놀음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대상12:26-28)

이런 몰지각한 레위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나왔습니다.

 

대상13:10에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이것이 개인을 향해서 치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 성경을 보는 많은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내가 제사장인데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성전 된 내 몸을 도대체 얼마나 관리하고 있는지....그런 성전(법궤)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다윗처럼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상13:8에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 하니라.

이후에 웃사가 죽고 베레스 웃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요시야 왕 때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보수하면서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 책의 말을 듣자 옷을 찢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 18년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왕하23: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왕하23:25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마음뿐이 아니고 보이는 내 육신도 깨끗이 하라는 말씀

 

우리의 모든 생활이 사람의 행실이 아니고 짐승의 행실이 나올 때 나 자신은 모릅니다.

성경이란 거울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사단이라는 또 하나의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어 놓게 만드니까? 사도 바울 조차도 이런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치는 한마디를 하십시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은 오직 마음이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에게만 거하십니다.*

오직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만이 하나님의 처소입니다.(고전3:16,6:19,고후6:1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어야합니다.

복의 개념이 세상 사람과 같아서는 행복 할 수가 없습니다.

죄지은 인간의 심령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새 생명을 받아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중생)

 

주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리였다.

신앙 양심에 걸리는 것을 찾아내야합니다.

말씀을 배척하면 빛난 과거의 은혜 생활은 간곳이 없고

비극이 찾아드는 어둠만 있을 뿐이다. 말씀은 새겨야한다.(렘31:33)

 

믿음과 은혜는 하나님의 것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2:9)

 

여기서 "너희"(성도)가 바로!!! "교회"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바로!!! "성전"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가르치는 자들은 영적으로 어리고 무지한 자들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자의 모임' 그 자체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그저 단순히..예배당일 뿐입니다."

 

이는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찌라"(에베소서4:13~15)

 

우리는 가끔식 어떤 일에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범사(모든 일)에 그에게(예수 그리스도)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5) 교회의 본질

 

신약성경은 교회라는 개념을 나타낼 때‘에클레시아’란 말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kaleo' 즉 ’- 으로 부르다‘와 ’ek' 즉 ‘밖으로부터’에서 취해진 합성어이다. 그것은 ‘- 로부터 불러 낸 자’(to call out from)라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교회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불러내었다는 뜻이다.

 

그 부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끔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의 뜻을 마땅히 순종해야 할 백성이 교회라면 교회는 세계 선교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라고 그 본질을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교회론은 철저하게 성경으로부터 정의되고 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세워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의 터 위에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초대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의 제자들이 그 부활 사건을 증거 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대와 예수님이 영광중에 다시 재림하실 소망을 안고 한 자리에 모이면서부터 교회는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던 증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이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 위에 세워졌다. 사도는 교회의 시작이며 영구한 기초석이 되었다. 이런 근거에서 교회는 사도적인 것이다. 교회가 사도 적이라는 말은 사도 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스 큉에 의하면 이 사도성은 교회의 본질을 결정하는 다른 모든 속성-즉 다양성 중에 통일성, 개체성 중의 보편성, 죄 성 중의 거룩 성-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사도적인가의 여부에 따라 그것이 성경적인 교회인가의 여부를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교회가 하나 되고 거룩하고 보편적일 수 있는가? 참된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과연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데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 교회가 사도 적인가 하는데 있다”

 

우리는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입니다. 범죄로 깨어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신령한 건축가들입니다. 그 일은 바로 내 믿음의 순금등대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거룩한 성전으로 재건될 때, 나의 앞날을 밝히는 소망의 등불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십자가 종탑이 있는 건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건물은 교회라는 말보다는 예배당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란 거룩한 성도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그 단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룩한 성도, 즉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란1>주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3>구원받은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4>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교회=(헬)에클+레시아=밖에서(세상) + 불러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건물이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이 볼 때 때때로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 중에서 위선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아직 참된 교회로 변화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입니다(빌레몬서1장2절 참조)예수님이 오시기전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교회였으나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부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이며, 주위에 보이는 건물은 교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 건물인 것입니다.교회들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과 하나님과 교재 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기위해 그리고, 주일성수를 위해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기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 예배당은 단지 편의시설일 뿐, 교회도 성전도 아니다.******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를 두고 한 말이며,

예배당은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를 특정 건물로 만들고, 그 장소를 신당이나 혹은 무슨 사원처럼 꾸며놓고, 그 건물 혹은 장소에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직자를 구별해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바치게 함으로 그곳이(장소) 당당한 교회로 인식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 하면, 일단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60년대만 해도 예배장소에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써 붙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부착한 교회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라고 했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장소)에 나가는 사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교회 교인 혹은 그 교회 성도, 그 교회 집사, 권사, 장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성도, 즉 교회를 위해 예배당(장소)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예배당을 위해, 성도(교회)가 필요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 주께서 피 흘려 부여하신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건물에 빼앗긴 채, 건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혹은 예배당과 교회를 혼동한 채 열심만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때려 부수고,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까요? 그것은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자랑삼는 소위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앞장 설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역사를 보면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주의 미국남부교회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는 것을 봐서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사람)는 예배당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보다는 예배당(건물)을 섬기는 것이 우선 되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主客顚倒)되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당과 교회를 혼동하기 때문이랄 수 있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란 한계설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현상일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그 장소를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도들에게 인식을 시키고, 그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고, 소중하게 인식을 시켜, 교회당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당(神堂)에 신을 모시고 사는 이방 종교인들이 행하는 짓을, 성령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어둠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우리 자신들이 곧 교회라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방 신은 신당에 모셔두고 신당을 찾아 섬기지만, 크리스천은 우리 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성전이라 한 것입니다.(고전3:16, 6:19, 고후6:16)

 

이 소중한 일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왜곡해서 예배당을 교회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된 것은 신당문화의 영향과 성직자(목사)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을 사제(司祭) 혹은 제사장이나 승려와 같은 중재자의 신분을 취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사신바 된 주의 백성(참 교회)들이 교회당이란 곳에 묶여, 목사 한 사람의 왕국을 위해서 혹은 목사기업 기능을 위해서 충성 봉사를 다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흑암권세의 포로들이 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교회당에 빼앗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들을 신자(교회)각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고, 그 신분이 각 사람에게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참 교회가 회복되는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의 주장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서, 오늘의 신자들의 처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두고, 사탄의 회란 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집단에 불과한 중세 교회를 떠나 개혁교회를 출발시켰지만, 지금의 교회 상황은 중세 카톨릭보다도 더 사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시대의 성전에 관한 인식문제는 개혁의 중심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이 성전이란 이름에 모아지고, 문제의 발생도 성전이란 이름에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말한 것은 가시적 혹은 영적인 것을 포함한 성전 전체 개념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여기서 "성전 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란 것을 확인시킨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은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비유, 등으로 설명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기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안식일,

둘째가 법궤,

셋째가 성전이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실체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친 모형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눅6: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1:14 / 법궤는 말씀)

"성전 된 자기 육체"(요2:21, 계21:22)

 

이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되고(성전 휘장이 갈라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을 완성하신(다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개혁을 말하게 된 것은 땅에 다시 성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포장된 신종 율법의 노예로 전락되어 땅의 건물(성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교회가 없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강단에 올라갈 수 없다고,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란 의식 때문이죠. 이 같은 의식을 가진 분들의 생각은 그와 같은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 지금도 예배당을 신성시하거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처소나 집처럼 인식을 시키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일은 하루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행위요, 하나님나라의 반역행위요, 주께서 피 흘려 진리로 자유케 한 백성들로 종교(성전)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 흘리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 임재 처소였다는 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막을 대신해서 지어진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란 점에서 성전이란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된 것이고,(요2:21) 성전 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분의 영(갈 4:6)이 오순절 성령으로 강림 하셨는데, 그 영(성령)이 임한 곳이 곧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디로 임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17절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 "모든 육체에" 부어준 것이라 증거 함으로, 믿는 자의 몸(마음)에 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4:6)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고전3:16)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령이 임하신 믿는 자의 각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을 지어놓고, 혹은 지으려 하면서 성전이란 말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게 되면, 순진하기만한 신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 노릇을 한다 해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로부터 부인(否認)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마7:22-23) 일개 건축물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먹이며 성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이끄는데 그 사안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수만 명, 수십 만 명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단히 거창하게 하기를 원하심이 아니요, 비록 사람들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마7:21, 마25:34-4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것도

사람을(성전)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배당의 조직이나 제도, 건물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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