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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에서귀감이 되는 주남선 목사님  


 

주남선 목사는 오직 한 길,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하게 일하여 참된 목회자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생애 여정은 선한 목자의 길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한 표준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기에 그는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기억되어야 할 목회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그는 기독교 전래 초기에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권서인(勸書人)으로 부르는 매서 전도자로 일한 바 있다. 또 독립 운동에도 가담해 3·1 운동 당시 투옥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해 5년 동안 옥중에서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으로부터 제헌 국회에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사명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독립 유공자로 포상하려 했을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도리인데 ‘그것이 어찌 상 받을 일이겠는가’라며 포상을 사양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남선 목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훌륭한 점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오직 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하게 일하고 참된 목회자의 귀감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인생 여정은 선한 목자의 길이었고, 세상적인 명예나 명망에는 무관심한 삶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 분명한 표준을 갖고 살았던, 이름 그대로 ‘선한 목자’였다. 따라서 그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목회자로 남아 있다.

가정 배경과 입신 및 신앙 활동
주남선(朱南善)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에서 한학자 주희현(朱喜賢)과 최두경(崔斗卿)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릴 때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으나 아버지는 그가 15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거창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농사를 돕던 그는 경남 안의에 있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고, 한때 지방 관청에 등용돼 군수의 비서로 일한 적도 있다.
농업에 종사한 주남선은 1908년 친구 오형선(吳亨善), 조재룡(曺在龍)과 함께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신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지역 교회를 설립키로 하고 죽전(竹田)에 위치한 초가 한 채를 매입했는데, 이것이 1909년 10월 10일 설립한 거창교회였다. 1911년 12월에 호주 선교사 맹호은(Rev. F. J. L. Macrae)에게 학습을 받고, 이듬해 1912년 6월에 역시 맹호은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3년에 권서가 되어 1916년까지 활동했는데,1 그 기간 동안 약 6,000여 권의 성경을 거창군 일대에 반포했다.2 그 기간 중에도 거창교회 집사로 활동했다. 즉 1914년 4월에 집사로 임명되었는데 그것이 거창교회의 첫 집사 임명이었다. 그해 5월 10일에 의령 남병현 씨의 2녀인 남술남(南述藍)과 혼인했다.3 그는 집사로 임명 받은 후 교회에서 봉사하던 중에 복음을 더욱 깊이 깨닫기 위해 1917년 3월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하고 1919년 졸업했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주관하던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해 2월 28일에 오형선에 이어 거창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되었는데, 그때 그는 31세였다.

 

독립 운동에 참여함
그가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장로가 되던 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리 깊었던 그는 지방의 독립 운동에도 가담했다. 즉 거창 지방에서 3월 20일 만세 운동이 있었는데 오형선, 고운서 등과 함께 독립 시위를 주도하면서 그때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주남선은 형인 남재(南宰)와 동생 남수(南守)와 함께 만세 운동에 가담했는데, 그 형제들은 그해 8월에 있었던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도 관여했다. 1919년 8월에 이덕생(李德生), 김태연(金泰淵), 오형선 등과 함께 독립군 자금과 의용병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일로 주남선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에 1921년 12월 29일 부산감옥 진주분감(晋州分監)에서 가출옥했다.4
그의 출생과 성장기는 우리나라 역사의 변혁기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기독교가 소개되는 역사의 길목에서 그는 당시 민족과 신앙의 강(江)에 두 다리를 적시고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가 독립 운동에 관여한 것은 기독교에 입신해 집사, 장로가 되고 경남성경학교를 수학한 후였는데, 그는 민족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독립 운동은 당연한 의무로 여겼고 그것이 신앙 운동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점은 독립 운동이나 민족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한상동과 큰 차이를 보여 준다. 그는 출옥한 후 1922년에도 짧은 기간 동안 권서로 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서공회 측 자료에 기록이 없다.

 

신사참배 반대와 해방 후 활동
주남선은 만세 운동과 군자금 및 의용병 모집 건으로 체포되기 전에 이미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재적하고 있었고 1930년에 평양신학교를 제25회로 졸업했다.5 그가 학교에 재적하고 있던 동안 거창교회 전도사(1922. 1~10),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홍식 목사 후임으로 거창교회 교역자로 부르심을 받고, 1930년 10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다. 1931년 2월에 거창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을 때6 그는 43세였다.
주남선 목사의 목회 생활은 길지 못했다. 1935년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주 목사는 1938년 이래 거창 지방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을 주도했다. 그 일로 그는 거창교회를 사면하게 되었다. 동 교회 제223회 당회록에 “회장이 부득이한 사졍에 의지하야 본교회 시무 사면을 졔출한고로 회중회에셔 쳐결하는 되로 하기로 가결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 여기서 ‘부득이한 사정’이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외부의 압력이었다. 주 목사는 1940년 7월 16일 소위 일제 검거 때 체포돼 약 5년간 투옥되었다가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주남고(朱南皐)였으나 옥중에서 주남선(朱南善)으로 개명했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교회 담임 목사로 다시 청빙을 받고 1945년 12월 거창으로 부임했다. 해방 후 경남 지방에서 교회 쇄신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도 그는 바른 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한상동과 함께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개혁주의적 신학 교육 기관으로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했다. 주남선은 고려신학교 운영과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려신학교의 험난한 항해에 설립자로서의 짐을 회피하지 않았다.

 

목회와 목회 활동
앞서 언급한 대로 주남선은 1908년 기독교에 입신한 후 권서인, 집사, 장로로 봉사했다. 그리고 1930년 6월 거창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이후 1938년 말까지 약 7년과 1945년 말에서 1951년 3월까지 약 6년을 합해 총 13년 동안 거창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동안 주 목사는 목회 활동을 통해서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주남선 목사는 여러 일들에 관여했으나 자신은 오직 순전한 목회자이기를 원했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는 욕심뿐이었다.

 

기도 생활
주남선 목사는 영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는 그의 목회를 이끌어간 힘의 원천이었다. 영적 지도력과 감화력 그리고 신앙과 삶의 일치는 다른 목회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해 싸울 때는 특별히 인간적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시련을 이겼고, 출옥한 후에 한 번도 자신의 신앙 투쟁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단상에 오른 주 목사는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향해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에서 바깥 세상 일을 생각지 않고 주님만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6년이 지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포용과 여유도 그의 신앙적 인격을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8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제와 맞서 싸운 그 자체로 자기 의에 빠지지 않았다.
주 목사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기도는 본래 아성을 세워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는 목회 활동에서 기도 생활의 모범을 보였고, 새벽 2시에 교회에 가면 오전 9시나 10시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그를 가까이 대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진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배어 있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9 그는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실로 기도에 의지한 목회자였다.

설교
주남선 목사는 성경에 대해 부분과 전체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무오성 그리고 최종적 권위를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이고 전폭적인 순종을 생활화했다. 그런 신앙이 신사참배에 대항했던 힘이었고, 목회와 설교의 바탕이었다. 그에게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성경 전부’(tota scriptura)였다.
그의 설교는 요란하거나 잡다하지 않았고 오직 성경을 ‘단순하게’ 가르치려고 했다. 구변이 능하지 않았고 인간적 기교도 없었다는 점에서 ‘평범한 설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설교는 자신의 신앙적 삶에 근거한 진실한 것이었기에 많은 은혜를 끼쳤다고 한다. 한때 거창교회에서 함께 섬겼던 전성도 목사는 주 목사에 대해 “생활로 모범을 보여 주는 무언의 설교자”라고 평했다.10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지 않고 열변도 아니며 단순하고 조용한 선포였다.11 그저 자신이 믿고 깨달으며, 체험한 바를 전하려 했다. 오병세 박사는 주 목사의 설교에 대해 “그의 설교에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도 아니었으나, 한 가지 특징이 있고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든지, 훤하다는 것은 없어도 참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있었다”12고 회상했다.

 

목회 일반
주남선 목사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때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외유내강한 사람이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현실 초월적인 도량과 신앙적 인격을 겸비했다. 따라서 그의 삶의 여정이 목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그는 목회 활동에서 심방을 중시했다. 1946년 8월 당시 거창교회의 주일 평균 출석수는 270명이었는데,13 그는 성도들의 가정을 알뜰하게 보살피고 성도들의 가정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해결하려 힘썼다. 어느 해 여름 장맛비가 심하게 내려 수해가 나고 집이 침수되는 등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한밤중에 등불을 들고 성도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험에서 구했다고 한다. 자녀 없이 살던 한 노파가 친정에 가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 세 분과 함께 먼 길을 찾아가 손수 장례를 치러 주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14
6·25 동란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돌보았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의 장례식에서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발생하자 일주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후 피난을 단념하시고 동역자들을 역방(歷訪)하시면서 교회와 양떼를 사수하기를 권장하시며, 폭탄과 총탄이 비오듯 하는 때라도 아직 남아 있는 교인이 있지나 않나 하여 집집이 찾아다니셨다”고 추도했다. 또 그는 이와 같은 성도들의 심방을 위해 “8월 29일 함양 지방으로 순회하시던 중에 개평교회에서 복음 진리를 힘써 증거하시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구금을 당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놓임을 받으셨다”고 일화를 소개했다.15 이처럼 그는 성도들을 보살피고 교회 일에 관심이 많았던 자상한 영적 아버지였다.
그는 공사석에서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는 일이 없었고, 자신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지도 않는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상한 아버지같이 교회를 돌보고 치리했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었던 그는 선비적 자태로 교회를 섬겼다.

 

목회자적 신앙과 인격
주남선 목사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의 삶의 태도, 신앙적 면모, 인격 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 목사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산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기에 자신의 명예나 영광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사진 한 장, 글 한 편 남기기를 원치 않았다. 그 약한 몸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 숱한 고초를 겪고도 해방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후유증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될까 봐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요” 혹은 “나 같은 죄인이 그런 귀한 체험을 하였지요”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다.
둘째, 주 목사는 건실한 교회 건설자였다. 그의 생애에서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다. 신사참배 반대,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고려신학교 설립, 목회 활동 등 모든 것은 한국 교회를 정화하고 바로 세우려는 일념에서 행한 일이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 건설의 일환이었다.
셋째,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의 소유자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았던 사람이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겸손히 의지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살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거창 지방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던 주남선 목사의 영적 지도력, 신앙적 인격, 겸손하고 자상한 성품,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했던 분명한 목회자적 철학 등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모범이 되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목사다운 목사’라고 회상한다. 비록 좋은 목사에 대한 기준이나 표준은 다를 수 있어도,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겸손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한 목회자 상은 우리 시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어둠의 세월을 보냈던 중세에 나온 유명한 경구가 더욱 마음 깊이 다가온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
불행하게도 주남선 목사의 봉사의 날은 길지 못했다. 민족상잔의 가슴 저미는 전화(戰禍)의 와중인 1951년 3월 23일(금요일) 오후 6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그는 생시에 끝까지 거절했으나 사후 1977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1996년에 대전의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의 겸손한 사역자였다는 사실이다.

주석
1) 「대한성서공회사 Ⅱ」(유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 1994), p.408.
2) 위의 책 p.593. 이 책에 주남선의 권서 활동에 대한 켈리(J. T. Kelly)의 1915년 기록이 소개돼 있다. 장희근은 주남선이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5년간 활동한 것 외에 진주 지방에서 권서인으로 8년간 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근거는 없는 상태다. 「한국장로교회사」(장희근, 아성출판사, 1970), p.285.
3) 후일 슬하에 경중(璟重), 경도(璟道), 경효(璟孝), 경세(璟世) 4남과 경순(璟順), 경은(璟恩) 2녀를 두었다. 부인은 1973년 7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4) 釜山監獄晋州分監長 朝鮮總督府典獄補 布村茂隆명의의 大正 10년 12월 29일자로 발행된 <假出獄證票>에 근거한다. 「해와 같이 빛나리」(심군식), p.304 참고.
5) 「장로교신학대학 70년사」, p.193.

 

- 출처 : 두란노 빛과 소금(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36040)

[출처] -이달의 인물- 주남선 ' 한국 교회사에서 찾는 좋은 목사님'|작성자 더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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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선교사, 이기풍 목사

 

1. 기독교 박해자에게 열렬한 신자로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
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
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
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
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
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2. 제주도에서 선교활동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
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
의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청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
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
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
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
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3. 도서벽지를 통해 복음전파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
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
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
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비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
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
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4.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순교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
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
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
노회 산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 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
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그의 유
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
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
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
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스왈른 선교사를 도우며 열심히 전도를 하던 이기풍은 청일전쟁이 끝난 후, 스왈른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은 마포 선교사를 찾아가 자기가 과거에 집안으로 돌을 던지고 턱에 상처를 낸 난봉꾼이었다는 것을 낱낱이 고하고, 그 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노라고 흐느끼며 자기 죄에 용서를 구했다. 마포 선교사는 감격스럽고 기이한 사실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다.

이후 이기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서 1907년까지는 스왈른 목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업무를 돕는 조사(helper)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포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3년경(연도가 정확하지 않다)에 입학하게 된다.

이기풍의 신학교 생활은 스왈른 선교사와 마포 선교사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이기풍은 복음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시켜야 했던 권서 경험을 통해 해박한 성경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여, 목사후보생으로 추천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기풍은, 대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서경조,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린서, 방기창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 목사 안수를 위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노회가 설립되었으며, 목사 안수 다음날 속회된 노회에서, 마포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에게 회중을 대표하여 참회기도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3일째 회의가 열린 9월 19일에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전도위원회의 결의를 만창일치로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기풍 목사는 우리 나라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평양의 술 주정꾼이 마포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쳤으나, 회개하여 목사가 되어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미국 장로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교회사>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최초 외지 선교사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

이기풍목사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절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게 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선교활동을 몹시 방해하던 혈기방장한 사나운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예수님이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놀란 이기풍은 끈질긴 전도를 하던 소안련(스왈른) 목사를 찾아가서 고백하고 1894년 마침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1888년부터 1901년까지 스스로 성경을 들고 기독교가 척박한 함경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런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던 마펫은 이기풍에게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내 1901년 장로가 되고,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1907년에 먼 훗날 3·1독립운동 33인의 대표로 활약하였던 길선주, 양전백 등과 함께 장로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제1회 장로신학교 신입생은 이기풍을 비롯하여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 7명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던 해 독노회를 조직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독노회 결의에 따라 이기풍이 외지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되니,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13년동안 제주도에서 개척전도한 교회는 성내교회를 비롯해 성안, 금성, 성읍, 조천, 모슬포, 용수, 중문, 삼양, 한림, 법환, 세화교회 등 여러교회를 설립하였고 1918년에는 광주 제일교회(당시 북문교회)와 순천중앙교회의 초대목사로 부임했다.
이기풍 목사님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심으로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존립을 흔드는 중대사였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강한 신앙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시다가 목사 안수받은지 35년이 되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순교하심으로 그의 강한 믿음을 입증해 보이셨다. 그는 자신의 명리보다 성도들의 영혼생명을 위한 깊은 사랑으로 참 목자의 삶을 사셨으며, 목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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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장로교회의 개척자 서상륜(徐相崙) 피택장로
 

 


  하나님은 우리나라 복음화를 위해 두 번째 나라로 스코틀랜드 선교사를 동원하셨다. 이에 동역자로 활약하신 분이 서상륜(徐相崙)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자 성경 번역의 협력자였으며, 메서인 권서인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피택 장로가 된 인물이다.


   1848년 7월 26일 평북 의주에서 양반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13세 때 조실부모하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31세 때 봉천 영구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장티프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메킨타이어 선교사(Mc Intyre)를 만나 구호를 받은 후 완쾌되었으며 이 기간 복음을 전해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로스 (J.Ross)목사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첫 눈에 의기 투합하여 서상륜을 어학선생으로 삼았으며 로스는 서상륜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1897년 세례를 주어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세례를 받은 서상륜은 중생의 체험에 감격하였고 로스목사의 권유로 성경번역과 출판 사업에 참여 하였다.


   그는 고향 친구인 이성하(李成夏)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과 함께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2년 가을 쪽복음 형태로 <예수 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간하였다. 이어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말코복음>을 봉천(심양)의 문광서원에서 발행하였고 1887년에는 <로스역셩셔> (Ross Version )라 불리우는 <예슈성교젼셔>를 간행하였는바<누가복음젼셔>는 장로교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2년 전에 이미 출판하였다.


   이 성경들을 번역한 교재는 중국어 성경이었고 성경을 출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반포하는 일을 시도하였다. 1883년 번역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려다 성서가 금서로 규정되어있던 상황에서 성서반입이 중국관원에 적발되어 의주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의주부 집사요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서 장로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나 성서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아시고 성경 10권을 돌려받아 밤중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귀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의주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동생 경도와 함께 고향을 떠나 삼촌이 살던 황해로 장여군 솔래(松川)마을로 이주 하였다. 이때는 1884년 봄이었다. 한국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게 5개월 전이요 18885년 4월에 내한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입국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교회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이리하여 1887년 서울 새문안 교회가 설립될 때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몇 달 뒤 로스 목사가 당시 인천세관 고문관으로 일하던 뮐렌도르프를 통하여 보내준 6천권의 성서를 받았으며 만주에서 귀국한 이성하와 함께 힘을 다해 복음과 성경을 전했다.


   서상륜 장로는 백홍준과 함께 최초로 장로 피택을 받았다. 그는 피택된 장로마저 사양하고 평신도로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1891년 게일, 마펫 등 선교사들이 서울을 떠나 의주, 심양, 강계, 함흥 등지의 오지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길 안내자로 동행하였으며 단독으로 여행할 때는 권서인 답게 휴대품 중에 반드시 쪽복음, 금계람, 감자씨 등을 휴대하였으며 그의 전도로 의주, 선천, 평양을 비롯하여 장연, 서울, 경기도 일원에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가 설립되자 언더우드는 자신이 “복음의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거두러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만년에는 솔래 교회로 내려가 전도하다가 1926년 1월 별세하였고 장로교 총회장으로 엄수되었다. 1936년 9월 제 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기념 사업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져 그의 전도사업의 공로를 기리게 되었다.(2004. 2. 14.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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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특집다큐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 [영상보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이수정

 

 1882년 미국과 영국에 이어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알렌이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질러, 스크렌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르 한다.

 1,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며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관의로 조선에 입국한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이 아니므로 조용히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급진적인 개화파인 김옥규느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을 등에 업고 쇄국정책을 내세우는 보수파이며 지권당을 제거하려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살아남은 박영효와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보수파인 민영익과 친분이 있는 이수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이려고 이수정이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한 요인이 된다.)  일어나고 이 때 민비(명성황후)의 친척이며 보수파인 민영익도 자객의 칼에 7군데 맞아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긴 혈관은 한의들이 할 수가 없었다. 뮐렌도르프의 소개로 알렌은 민영익을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석달이나 성심껏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민영익 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엇고 그 결과 광혜원(은헤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지어줌.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 광혜원자리는 갑신정변 떄 죽은 홍영식의 집이었다) 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언더우드(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침), 스크렌톤, 앨러스(의료 선교사)모두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렌 선교사는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달은 유럽나라들처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와서 조선의 잇권을 빼앗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국의 손, 발이 되어 일을 함으로 지금도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2,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알렌이 1884년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들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0살이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남자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남달랐던 형제는 자기전에 늘 기도했다. 다른 학생들이 놀림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던 형제를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릉 학생들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숫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의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며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미 신학교 재학 중 인도선교 준비를 하였으나 아펜젤러를 만남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탔고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라는 음성을 듣고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을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신혼여행도(명성황후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양과 결혼함)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로 평화의 사도로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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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 / 조덕삼장로와 이자익목사 이야기

​​​​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살때 아버님을 잃고 여섯살때에는 어머님도 잃었다. ​

친척집에서 늘 쇠꼴베러 나가는 삶이 싫어 열 두 살때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에 이르고 금산까지 오게 된다.

금산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을 이자익도 듣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금산에서 거상으로 유명하면서도 넓은 땅을 가진 조덕삼 댁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그 곳에서 자신을 마부로 받아주어 생활하게 되었다. ​

​이자익은 머슴으로서의 삶이지만 집안 아이들이 한문공부하는 것을 들으며 천자문을 익힐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이런 때에 테이트의 방문으로 조덕삼과 이자익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금산교회를 함께 섬기게 된다.

'한명은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한명은 머슴'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바로 '유명한 일화인 금산교회 장로선출' 이 있게 된다. ​

교회의 장로를 세우는 선거였다.

조덕삼은 김제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울만큼의 부자였고 금산교회 운영에도 많은 후원을 하고 있었다.

조덕삼은 이자익보다도 15살이나 많았고

금산교회의 설립자였으며 인격적이나 신앙적으로도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장로로 선출된 사람은 주인 조덕삼이 아니라 마부 이자익이 된 것이다. ​

아마 이 결과에 조덕삼과 이자익도 놀랐겠지만 선출에 참가한 선교사들도 놀랐다.​

갑오년(1894)에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강한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주인이 떨어지고 종이 장로가 되었으니 ​

"이를 어쩐다?"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또 한 번 일어났다.
그 때 조덕삼이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했다.​​

"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충격적인 발언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행동인 것이다. ​

​집에서는 주인과 종으로 교회에서는 교회를 책임지고 나아가는

장로와 평신도로서 반대되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자익도 훌륭한 분이지만 나는 조덕삼도 참 훌륭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교회의 신분문제로 서울 승동교회는 아픔( 양반들이 북촌 안동교회를 세워 분리해 나감 )을 겪기도 했고 ​

여전히 신분제, 권위적인 유습들로 인해 교회내의 차별이 여전하던 때였다. ​

그런데 조덕삼은 15살이나 자기보다 어린 이자익을 장로로 잘 섬기는 것은 물론 

후일 이자익의 목회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보내고​ 학비 전액을 지원해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훗날 본인이 장로가 되었을때

자신의 종 마부 출신 이자익을 목사로 초빙해​

금산교회의 담임목사와 장로로 함께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

오늘날 한국교회가 한 없이 다시 되새기도 또  되새겨도 지나치지 않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

​그런 환경 속에서 이자익목사는 시골 금산교회 목회자이면서도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다. ​

이자익목사님 같이 그렇게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하신 분은 다시는 없었다.

혹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

"만약 이자익 목사님이 조금만 더 오래 사셨다면 한국교회의 분열은 없을 수도 있었다.  ​

그 만큼 그 분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과 위치는 높았던 것이다.

                                               (김제 금산교회 종탑)

 

                                     

                                                  (금산교회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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