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016년

필리핀에서 한상호, 신정희 선교사 부부 사역하시는 빵아랍교회 소개합니다

 

필리핀 메트로마닐라의 외각지역에 위치한 Caloocan (깔로오깐) City의 Pangarap Village (빵아랍 마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마을은 도시 빈민들이 사는 마을로서 철거민 또는 강제 이주민들과 각 지방에서 마닐라드림을 품고 도시로 왔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입니다.

 

이마을은 한달 수입이 $100 (약 12만원정도)도 안되는 가정이 많이 있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가정이 숯불이나 나무를 때서 밥을 하고있고 수도물이 아예 들어오지 않아서 비가오면 빗물을 받거나  우물이나 펌프를 묻어서 물을 얻어 빨래를 하고 식수는 물차가 들어오면 그때그때 물을 사서 사용을 합니다. 당연히 몸은 주변의 개울에 가서 씻는 경우가 많은데 그나마 우기철이 끝나면 물을 얻기가 힘들때가 많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기는 들어왔으나 경제적인 사정으로 연결을 못하고 밤이면 석유 등잔을 사용하는 가정도 많습니다.

당연히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하는 가정도 많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을에 2005년 1월에 빵아랍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빵아랍은 필리핀 말로서 꿈, 소망을 뜻합니다.

 

빵아랍 마을에 있기도 하거니와 비록 가난하고 삶은 힘들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갖기를 소원하며 빵아랍 교회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한상호, 신정희 선교사 부부가 와서 처음 개척하였고 인천시 강화의 한재화장로님과  안효순 권사님이 아들 한기성의 이름으로 헌신하여  건축되어서 현지인 목회자 2명 그리고 신학생 3명과 함께 지금까지 계속 사역을 하고 있는 가운데 올해부터 신윤철, 장계숙 선교사 부부가 합류하여 팀사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전도, 기도훈련, 성경공부등 교회의 본연의 사역과 함께 주변 환경에 맞추어 필요한 사역이 이루어 지고 있으며 신앙과 교육을 통해서 성장할수 있게 하는 일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취지로 유치원 운영을 하고있으며 미취학 아동들에게 장학금(PAMS 장학금)을 지급하여 공부할수 있게 돕고있으며, 신학생 3명을 후원하고 있고 목회자 훈련원에서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교회에서 우물을 파서 주위의 가정들에게 물을 공급해주고, 밥을 굶는 가정을 위해 사랑의 쌀을 나누기, 지역 방역, 빵을 나누는 빵사역, 직업훈련사역 등등 지역사회를 위해서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일들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장래의 주의 일꾼을 양성하는 일과 함께 교회의 자립을 이루고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를 할수 있는 교회로 성장하여 빈민을 대상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성공한 모델교회가 되기위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며 성장해 나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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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라이따이한의 아버지

 

베트남은 수난의 역사로 얼룩진 나라다. 한때 중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베트남 전쟁을 치뤘다. 식민 지배와 치열한 전쟁을 치룬 나라지만, 호치민 시는 한때 동양의 파리라 불렸을 만큼 그 풍경이 아름답다. 열대 몬순 기후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다.

휴멘 직업 기술학교는 호치민 시 깡남탕땀 거리에 있다. 학교 규모나 시설 또한 호치민 시에 있는 기술학교 중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학생들 역시 스스로 공부하기 위해서 찾아온 만큼 미래에 대한 설계가 야무지다. 실업률이 심각한 베트남 사회에서 이 학교를 다니는 한인 2세의 취업률은 100%다. 휴멘 직업 기술학교의 이 같은 위상은 바로 김영관의 열린 교육관이 자양분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열린 교육의 목적은 베트남 한인 2세들에게 아버지의 나라를 정확히 알리는 데 있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규모로 치러진 전쟁이다. 미국과 사이공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베트남을 지켜내려 했고 베트콩은 사회주의를 고수해서 남북 베트남을 통일시키려 했다.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 역시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맺어졌다. 약 35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이 자유수호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전쟁터에 파병됐다. 세계 최강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막대한 화력과 병력을 쏟아부었다. 10년이나 계속됐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그것은 곧 베트콩의 사회주의와 그들이 희망했던 민족 독립운동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 10년 동안 35만 명의 군인이 파병됐고, 동시에 수많은 산업 전사들이 베트남 전쟁터에서 외화를 벌어들였다. 10년 동안 약70만 명의 한국 남성들이 베트남을 드나들었고, 수천 명의 한인 2세들이 태어났다. 한가지 주목할 건 한인 2세의 80%가 군인이 아닌 일반 근로자의 혈육이라는 사실이다. 종전 후 힘닿는 대로 자신들의 2세를 구했던 미국과 달리 한국은 그 어떤 대책도 없이 그들을 남겨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베트남 전쟁통에 태어난 한인 2세들은 어느새 30대 전후가 됐다.

김영관이 이들을 알게 된 건 10년 전이다. 말로만 듣던 라이따이한들과의 만남은 김 목사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예상외로 그 수가 많았고 그들 대다수가 곤궁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김영관도 아이를 낳아 키운 사람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을 때, 어떤 책임이 따라야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아버지는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한인 2세들이다. 돕고 싶었다. 그래서 이들의 아버지가 돼서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품에 보듬어 안고 내리 사랑을 나눴다. 누구를 도울 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으로 건너와 한인 2세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친아버지와의 화해, 그 출발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김영관은 마흔이 넘도록 무역 회사를 다니며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다. 아무 불편도 불만도 없었지만 그 편안함이 오히려 숙제처럼 여겨졌다. 마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그 좋아하던 술 담배를 끊고 신학 대학에 입학했다. '왜 사는가?', '다른 삶의 방식은 없는가?'라는 의문을 신앙으로 풀고 싶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베트남에 왔다가 한인 2세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게 됐다.

1990년 2월에 마침내 김영관은 아내와 함께 베트남으로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삶을 보내고 싶었다. 당시에 베트남과 한국은 국교정상화 전이었다. 더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선교 활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입국 목적은 선교 활동이 아니었다. 바로 방치된 듯 살아가는 한인 2세들을 돕고자 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김영관 부부는 그렇게 베트남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10년 전 베트남 호치민 시는 암흑의 세계였다. 세 시간 간격으로 전기가 나갔고, 휴지는 물론이고 비닐 생산조차 못했다. 한인 2세 가족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당장 오늘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는 집이 대다수였다. 2세들의 교육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김영관은 한국 선교 단체에 이 사실을 알리고 후원을 간절히 부탁했다.

한인 2세들을 찾기 위해서 베트남 남부 지역을 떠돌았다. 그렇게 해서 1,400명이나 되는 한인 2세들을 찾아냈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를 돕는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돕는 자의 선의가 절대적이라 해도 받는 입장에선 쉽게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발로 뛰어다니며 찾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리고 아직도 베트남 남부 지역 전화번호에 매년 빠지지 않고 한인 2세를 찾는 광고가 실리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한인 2세들을 찾아낼 때마다 족보를 만들었다. 한인 2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근거로 가족사와 생활 형편들을 파악해서 족보에 꼼꼼히 기록했다. 김영관의 이 같은 작업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피붙이를 찾아달라는 아버지의 편지도 한국에서 날아왔다.

김영관은 학교 안에 교실 한 켠을 막아 살고 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과분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옛날에는 부엌도 없는 방 한 칸을 얻어 생활했다. 밥은 숯불을 피워서 했으며 밥상이 없어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날그날 끼니를 이어갔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훨씬 많았다. 마음고생에 몸 고생까지 겹쳐 아내는 병을 얻었다. 베트남에서 급한 대로 수술을 받았으나 병원 시설과 의료 수준의 낙후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그래서 응급처지를 하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 목숨을 건 시련도 겪어야 했다.

악조건은 고루 다 갖춘 상태에서 김영관은 학교 건립을 추진해 나갔다. 처음엔 교실 하나 달랑 벌려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편으로 학교 건립을 위해서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결과는 늘 똑같았다. '자선을 빙자한 돈벌이다.', 'cia의 스파이다.', 온갖 중상 모략이 뒤따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베트남 공안 당국에 불려 다니며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게 해준 건 세월이다. 오랜 시간동안 김영관을 지켜본 베트남 공안 당국은 결국 김영관을 돕기 시작했다. 우선 호치민 시 깡망탕땀 거리 700백여 평의 땅을 학교 부지로 기증했다. 베트남에선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반공립, 반사립 형태의 설립 허가도 내줬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베트남은 외국인들에게 영주권을 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3개월에 한번씩 비자를 재발급 받아야 체류가 가능하다. 그러한 베트남 당국이 김영관 부부에게 영주권을 발급해줬다. 영주권 발급은 김영관에 대한 베트남 당국의 믿음을 상징한다.

학교 부지는 호치민 시 재개발 예정 지역이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지어서 이곳을 휴멘 복지타운으로 만들고자 했던 김영관의 장기적 계획이 이곳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된다. 호치민 시가 기증한 땅에 건평 600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 5층 건물을 올렸다. 공사비는 한국에 있는 베트남 사회복지 선교회와 백문현 감독, 그리고 뜻을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김영관은 그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교 이름을 인간적인 사랑을 뜻하는 휴멘이라고 지었다.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는 자유롭다. 개인마다 전공은 다르지만 모든 직업 과정을 고루 학습함으로써 사회 진출의 폭을 넓혀 놓았다. 열린교육을 통해서 한국계 베트남 2세들의 사회 진출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학교 생활은 사회주의식 교육의 특성인 엄격한 규율과 동시에 김영관이 추구하는 공동체 정신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끊임없는 인성교육을 통해서 학생들 모두에게 주인의식을 갖도록 한다. 그 교육을 통해서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함과 희생 정신의 겸허함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한다.

김영관이 찾아낸 1,400여 명의 라이따이한이다. 친아버지가 못한다면 뜻 있는 민간인이라도 나서서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라이따이한이란 피가 섞인 한국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김영관 은 이들을 한국계 베트남 2세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버지의 책임,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친 김영관은 한국계 베트남 2세 1,400여 명 아이들의 아버지다.

 

엠파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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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탄자니아 김정환 선교사 부부는

2017년도 국가 학력평가 고시에서 1%권에

드는 곳으로 성장시켰답니다.

선교사의 사역이

성적위주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성경과 영영 옥스포드 사전을 주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영적 지혜를

풍부하게 지닐 수 있도록 인도하고 가르치고 있답니다.


선교사님 내외분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선교사님 두분의  후원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엡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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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여러분의 두 손과 무릎의 희생덕분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장마와 폭염의 고통에도 여러분의 헌신에 최선을 다하지만 부족함은 여전합니다.

고국의 소식은 가끔 지나서 듣고 있습니다. 고국의 폭염은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일40도에 체감온도는 더 높게 느끼면서 사막한가운데 떨어뜨려놓은 주님의 계획에 묵묵히 그리고 감사하며 이기고 있습니다. 그 힘과 능력은 주님이시지만  후원의 손길인 여러분이 있기에 더욱 힘이 됩니다.

이곳은 이스라엘민족의 대부분 40년 광야생활이 요르단 땅이기에 체험하며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70년간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통과도로 요르단,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고난의 길목입니다 구약의 역사와 신약이 공존한 땅입니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이 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명 자들과 함께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 들이기에 주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을 믿습니다. 모두들 영과 육이 강건하시길 두 손 모읍니다.  요르단광야에서 (죤.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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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필리핀 여러분교회입니다.


아시다시피, 필리핀은 카톨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카톨릭 신자들의 비율이 높은 나라입니다.

 

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

즉 자신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보혈로 얻는 구원을 저희 교회에서는

태권도와 여러 방법으로 현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빈민촌에 성전을 건축하고, 현지 목회자들을 후원하고 교육하며,

빈민촌 사역지에 들어가 경제적으로 힘들어 잘 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닭죽을 전달하며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자비량선교로서 필리핀 여러분 선교센터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선교지는 점점 부흥하여

교인들이 많이 증가하고 교회들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제1차성전~제13차성전)

그러나 한국 유학생들이 줄어서 선교비용을 충당하기에 어려운 현실에 있습니다.

 

성도님들 !

저희 선교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1. 선교지를 이끄시는 김광섭 목사님, 이한나 목사님께서 영육 간에 강건하시길!

2. 선교센터 어학원에 학생들이 많아서 세워진 현지 목회자들과 TIA(태권도 선교팀)가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전할 수 있도록!

3. 선교센터 어학원을 통해 연수생들이 더욱 믿음 안에서 단단히 서고 향상된 영어실력과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필리핀 여러분 선교센터 어학원은 연수생들이

매일 저녁 QT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영어홈스테이로 빠른 언어 구사력을 키우며,

매일 아침 영어예배와 매주 목요일에 드리는 영어 기도회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영어를 접합니다.

 


매주 토요일에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지역인 빈민촌에 가서

닭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의 역할도 감당하게 합니다.


한국에서 온 연수생들 중에 저희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훈련받으면서

구원을 확신을 얻고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미국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생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희 교회와 어학원이 하나님의 복된 축복의 통로가 되길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선교지를 알고 싶으시면 방문해주십시오!

■ 선교센터홈페이지에 방문하시면 많은 선교보고가 있으니,

방문하여 확인하시고 꼭 기도 부탁드립니다

홈페이지(http://cafe.daum.net/speakjesus) * 이메일(speakjesu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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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선교 라디오방송 (꺽이지 않는 꿈)

 

 

 

박만호 오영인선교사의 선교방송 2017년 06월 22일 - 인도네시아에서 날아온 비둘기 *

 


* 아래 링크 주소를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youtu.be/iOpgw6a4UAc

선교사님 두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사명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출처 : 문화선교 자비량선교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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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출발은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지금은 많이 부르지 않지만 예전에 참 많이도 부르며 위로를 얻었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복음 찬송이다.

이 찬송의 가사 내용에서처럼 때때로 힘들어 지쳐 있을 때,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어려운 일들을 해쳐 나갈 용기를 얻는다. “내가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매님을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어요.”

이런 말 한마디는 듣는 자로 하여금 영적 기력을 회복하게 하는 보약이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핍박과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가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에베소서1:16, 빌립보서1:3,9, 골로새서1:3, 데살로니가전서1:2)는 사실을 늘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신앙 생활의 현장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에 버거워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사도로서의 배려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도바울 선생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고만 하시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에베소서6:19)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요청하셨다.

이것은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요청인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기도로 교통합시다!”라고 우리가 서로 인사하듯이 서로를 향한 위대한 영적인 교제의 고속도로를 여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해 주는 것을

성경에서는 ‘도고’(禱告), 영어로는 ‘Intercession’(NIV)라고 부른다.

이 ‘도고’라는 기도 용어는 사도바울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디모데전서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그런데 요즘에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타자를 위한 모든 기도를 ‘중보기도’라는 용어로 통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어서 그렇지 ‘중보기도’라는

이 용어는 기도신학적으로나, 중보사역에 대한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신학적인 혼란을 야기 시킬 수 있어서 좀 더 성경적으로 용어정리를 제대로 하고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용어이다.

 

어쨌든지 그것이 ‘도고’이든 ‘중보기도’이든 간에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기도의 요청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그가 쓴 ‘기도’라는 책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중보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기도야 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또한 “자기를 위한 간구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로 기도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무게 중심을 우리 자신의 필요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로 옮기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는 자신을 내어 주는 기도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라고 했다. 그의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중보기도)에 대한 이 표현은 공감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생각 한다.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을 다르게 표현 한다면 그것은 그냥 ‘선교’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선교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고쳐서 직역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선교의 출발은 기도하는 것이다.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다.  
출처 : 이동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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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colaus Ludwig von Zinenborf)

 

 

<선교사 열전>의 저자루스 터커(Ruth Tucker)는18세기 개신교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독일의 진젠도르프를 선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는 교회연합운동을 시도하였고 모리비아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루스는 진젠도르프가 개신교에 끼친 공헌을 죤 웨슬리(John Wesley)나 죠지 휫트필드(George Whitefield)에 필적한다고 평가했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 부유한 귀족의 집에서 태어나서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길에서 아루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1719년까지 결단을 내리기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여행 중 한 미술품 전시회에서 도메니코 펫(Domenico Fet)의 작품인 ‘이 사람을 보라’를 보게 되었다. 이 그림은 그의 인생의 항로를 바꿔놓았다.

그는 그림 속의 그리스도께서 마치 “이 모든 고통을 나는 너를 위하여 겪는데, 이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은 영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백작으로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세주께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이다.

 

1722년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영지 헤린후트(Herrnhut)에 기독교 피난자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인해 모라비안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많은 종교적 피난자들은 계속 몰려와 그의 영지는 집과 상점들이 건축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5년이 지난 1727년 이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영적 부흥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다 주게 되었고 그것이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끊임없는 기도운동은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감리교의 창설자 죤 웨슬리(John Wesley)가 모라비안들의 영성과 기도생활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웨슬리는 1738년 직접 헤린후트를 방문하였고, 그 후 모라비안들이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을 시작하도록 도왔다.

진젠도르프는 일선 선교사라기 보다는 훌륭한 선교 지도자로 헌신한 것은 사실이 있지만 그 자신도 선교 현장을 방문하여 현지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 사역에 동참하였다.

그는 선교회 지도자로서 현지 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피고 후원하기 위해 33년간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진젠도르프는 그의 아내 에르무트(Erdmuth)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유럽이나 해외로 자주 여행하였으며 그 기간이 때로는 10년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서로간에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결혼생활 마지막 15년 동안에는 이름만의 부부생활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진젠도르프는 매우 비통해 했으며, 선교로 인해 가정을 소홀히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에르무트에 대한 슬픔이 가시자 그는 농부 출신인 안나 니취만(Anna Nitchman)과 결혼했는데

그녀는진젠도르프의 선교여행에 동행하였다고 한다.

안나는 비록 신분이 낮은 여자였지만 매우 헌신적인 성도로서 진젠도르프에게 영적인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나중에 선교사역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백작과 모리비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모라비안 성도들은 자신들이 형편없는 존재라고 비하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모라비안인들의 유별난 집착은 복음적인 기독교의 전통에 벗어나게 되었고

선교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신앙의 실제적인 역할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로인해 모라비안의 선교활동은 몰락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백작이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했다.

백작은 영적 상태가 심히 어둡게 된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처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지도자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대한 진젠도르프의 최대의 공헌은 그가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 증거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다는 것이다.
출처 : 노영환선교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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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의 여명: 모라비아 교도의 선교


16세기 카톨릭 교회는 반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일으키며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했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루스는 그의 저서 <선교사 열전>에서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정치적, 군사적, 교리적 공세를 막아내고 유럽에서의 발판을 마련하기에 급급했을 뿐 해외선교에 헌신할 인물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당시 해외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해외선교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고 안전한 여행을 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루스는 또한 개신교의 신학적 이론 역시 해외 선교에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회개의 절박성만을 강조하였고,

칼빈(Calvin)의 신학노선은 구원 받을 사람들에 대한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의하여 해외선교의 중요성은 간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7세기에 이르러 개신교의 선교활동은 다소 활기를 띄게 되었으나

미국 식민지에서의 선교사역을 제외하고는 큰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루스에 의하면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개신교의 선교의 문이 활짝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원동력은 진젠 도르프 백작의 주도하에 일어난 모라비아 형제회(The Morarian Brethern: Unitas Fratrum)의 선교활동이었다.

18세기 동안 모라비안들은 버진제도(Vigin Islands, 1732), 그리인랜드(Greenland, 1733), 북아메리카(1734), 남아메리카(1736), 라브라도(Labrador, 1771) 등에 선교기지들을 구축하였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평신도들의 선교사에 대한 비율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1:60의 비율, 즉 60명의 교인 중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으로 개신교의 전체 비율이 1:5,000인 것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루스는 모라비안들이 이렇게 높은 비율로 선교사들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자급선교(Self-Supporting)를 권장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모라비안 중에 기술공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해외선교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장사도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라브라도 선교에 있어서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장사를 하여 남긴 돈으로 에스키모인들의 생활 필수품까지 무료로 공급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만 전하였을 뿐 아니라 배와 상점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에스키모인들의 생산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수 있었다.

그들의 경제력은 선교사업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결과 모라비안들은 18세기의 선교를 주도할 수 있었다.

모라비안들은 지상명령의 비젼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 아니라

19세기 현대 선교의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는 데 지렛대 역활을 하였다고 루스는 말한다.


18세기의 선교를 주도한 모라비안들의 선교방법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려는 선교에 열정과 소명감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윌리암 댄커(William Danker)는 모라비안들이 남긴 최대의 공헌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통하여 복음전파를 하고 선교사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모라비안의 선교사역을 깊히 연구해 보면 설교자, 교사, 의사뿐 아니라 사업가도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2회에 걸쳐 모라비안 선교사로서 18세기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Count Nicolaus Ludwig von Zinenborf)과

게오르그 슈미트(George Schumidt)의 선교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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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  Underwood‘s Prayer for Korea Mission

 

언어두드 선교사님의 기도를 동영상으로 보시고자 하시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여기]

 

Horace Grant Underwood‘s Prayer for Korea Mission.
 
Lord, nothing is visible at this moment.
Lord, you have planted us on this barren and poor land,
where not even a single tree can grow tall enough.
 
It is such a miracle that we could come to this land across the wide Pacific Ocean.
Nothing is visible, though, in this land on which we seem to have been dropped off by your hand.
 
Only stubbornly stained darkness can be seen.
Only Korean people chained with poverty and superstition can be seen.
They don't even know why they are chained, what suffering is.
They just distrust us and express anger to us as we tell them how to take away their suffering, which is not suffering to them.
 
The thoughts of Korean men are not visible.
The mind of this government is not visible.
We are afraid that we may not have any more opportunity to see the women commuting on Kamas(-a cart carried by men).
And we do not see what to do.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져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 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읶쎼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고 출발하는 과정에는 극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했다.
언더우드가 작성한 '회고'에 따르면, 올트만스(일본선교사)에게 조선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의 선교지는 인도였다. 그런데 일 년 뒤, 그는 조선으로 파송해주기를 바라는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다.

언더우드는 이수정(한국 최초로 주기도문을 번역했던 성경번역자)의 글을 읽기 몇 달 전까지도
자신의 선교지가 어딘지를 모른채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고 한다.
그때 미국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주기를 바라는 이수정이 쓴 글이
1884년 1월 26일 자 The Illustrated Christian Weekly를 통해 미국에 처음 소개됐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의 글을 읽고 자기를 조선으로 부르는 음성으로 여겨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했고,
언더우드는 11월 11일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교단을 옮겼다.
그는 뉴욕에서 출발하기 전, 미국을 시찰 중인 일본 군사시찰단을 우연히 만났으며,
군사시찰단과 같이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항하는 우편 증기선 '시티 오브 뉴욕'에 승선해
1885년 1월 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 한국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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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지금은 비행기로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그 당시는 배로 몇 달 걸려 태평양을 건너 조선땅까지 왔다고 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에서 나타난 조선의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의 조선이 지금은 선교사님들로 말미암아
선교대국이 되었고,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되었다고 해도
아무도 부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여러나라에 선교사로 나가서
우리가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하지 않을까요

 

요즈음 캄보디아,라오스, 태국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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