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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참된 기독교와 영지주의는 서로 배타적인 믿음 체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기독교 영지주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영지주의의 원칙은 기독교와 모순됩니다. 그러므로 몇몇 형태의 영지주의가 기독교라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는 전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영지주의는 아마도 처음 3세기 동안 초기 교회를 위협했던 가장 위험한 이단이었을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두 가지 그릇된 전제를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 정신과 물질에 관한 이원론입니다. 영지주의자는 물질은 본래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전제의 결과로 영지주의자들은 몸으로 행한 일들은 아무리 지독한 죄라도 실제 삶이 존재하는 영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둘째, 영지주의자들은 특정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는 "더 높은 진리", 곧 향상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영지주의는 "안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 단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더 높은 지식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지식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신비한 존재로부터 얻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더 높고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특권 계층에 속하여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와 영지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주요 교리를 비교해야 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영지주의는 어둠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성한 지식 습득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원래 가르침을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모순됩니다. 예수께서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으십니다. 구원은 오직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은 특별한 계시를 얻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거저 허락된 것입니다(요 3:16).

기독교는 진리의 근원은 하나라고 주장하며,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오류가 없는 말씀, 곧 성경이며, 이것만인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흠 없는 규정이라고 믿습니다(요 17:17; 딤후 3:15-17; 히 4:12). 성경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로서 결코 사람의 생각, 사상, 저술, 또는 비전에 의해 대체되지 않습니다. 한편, 영지주의자들은 영지주의 복음서로 알려진 소위 “성경의 잃어버린 책들”의 모음집이라는 다양한 초기의 이단적인 글들을 사용합니다. 감사하게도 초대 기독교 교부들은 영지주의적인 책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하나님과 다른 모든 중대한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거짓 교리들을 담은 사기 위조의 글들이라고 거의 만장일치로 인정했습니다. 영지주의적인 "복음서들"과 성경 사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충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을 인용할 때조차도 그들은 그들의 철학과 조화시키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변개시키는데, 이는 성경이 엄격하게 금하고 경고한 일입니다(신 4:2, 12:32; 잠 30:6; 계 22:18-19).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기독교와 영지주의는 크게 다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육체는 실제가 아니라 단지 육체적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의 영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에게 내려왔다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처형되시기 직전에 떠났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참된 인성뿐만 아니라 속죄까지도 파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이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대신할 수 있는 대속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실제로 고통 당하고 죽으신 (육체적으로 실제) 사람이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히 2:14-17).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그분의 충만한 신성뿐만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인성을 확언합니다.

영지주의는 진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전혀 새롭지 않은 신비주의적이고 직관적이며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접근을 하며 또한 그 바탕에 서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어떤 형태에 있어서는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에 질문을 던지며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짓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으면서”(벧전 5:8) 똑같은 일을 합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성경을 의심하도록 요구하면서 순진하고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과 혹은 특별하고 독특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개인적인 계시를 찾는 사람들을 그물로 사로잡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여야”(살전 5:21)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일들을 점검하며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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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1)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늘 우리를 괴롭혀왔다.


아주 오래 전에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라”(욥 23:3)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은 단지 욥뿐만은 아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왜 이렇게 행하시는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는가?”

 

내가 아는 한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은 암에 걸린 교회 목사님이 완쾌되도록
몇 달 동안 기도했으나, 결국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이렇게 말했다. 
“온 교인이 기도에 매달려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그 젊은 목사님을 고쳐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종류의 부탁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리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죠? 저는 또 실망하기 싫어요.

 

” 이 젊은 그리스도인처럼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이를 악물고 굳게 붙들어야 하는 때가 있다.

나는 이해하기 힘든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모든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감히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이 고통과 슬픔의 문제로 몸부림치면서 깨달은 실제적인 지혜들을 제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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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2)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다!

 

우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분이 모든 것들을 통제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예상을 뒤엎는 일이 일어나서 그분을 놀라게 하는 경우는 없다.
반면 우리는 주권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놀라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도 나처럼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통제권을 잃어버리신 것처럼 살아간다.
우리는 그분이 저 먼 우주 밖으로 나가시고 우주가 저절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아니면 우리는 그분이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번 뛰어보세요”라고 말하면
그분이 “얼마나 높이 뛸까?”라고 물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오해한다면, 그분께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그분은 주권적인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종종 그분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법으로 개입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개입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편의성에 따른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주권적 선택과 선하심과 은혜에 따른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방법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정하신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눅 7:28)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는 가혹한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라고 묻게 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2,23)라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메시아가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일들을 예수님이 행하시지 않자
그분이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꼭 우리가 예상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권자는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시다.
고난과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 중 한 가지가 있을 뿐이다.

원한을 품고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아니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생의 모든 것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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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올바른 체벌을 하기 위하여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2장 15절


* 올바른 체벌 원리

1. 하나님께서 자녀를 징계하고, 
    회초리를 들어 훈련시키고, 따끔하게 처벌해서 아이를 바로 잡으라고 하셨다.

2. 아이에게 매를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죄의 결과는 아픈 것임을 꼭 가르쳐 준 다음 매를 거두도록 한다.

3. 십계명을 아이의 마음 가까이에 두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다 우상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4. 하나님과 함께 매를 들라.
    매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 아이에 눈물에 속지 않고
    그 분물 뒤에 숨은 죄를 집어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체벌을 하기 전 기도

하나님, ________ 가  오늘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버렸습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서 ________ 와 같은 잘못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맞을 때 ________ 처럼 아파서 울기도 합니다.

하나님,  ________ 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________ 마음을 지켜주세요.

이제 제가 ________ 때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매가 ________ 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깊은 교훈으로 남을 수 있도록 주께서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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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리 알아야 할 것들 


◈ 진리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며 그 원본에 있어서는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는다 .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외에 또 다른 하나님 말씀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초는 성경이다.

(딤후 3:16. 벧후 1:21. 잠 30:5-6 )


◈ 하나님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 하시며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또한 변함이 없으시다.

(출.34:6-7. 신6:4. 마28:19. 요 4:24, 10:30. 행 5:3-4. 고후 13:14. 히 1:8-12 )

 

◈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는 동정녀를 통하여 무죄하게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으 며 인간의 연약을 가지시고 사셨으나 범죄치 않으셨으므로 죄가 없으시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성도의 대제사장으로 앉아 계신다.

(마1:21-23. 요 1:1.14. 행 1:9. 롬 1:3-4. 고후 5:21. 히 1:8. 4:14-15. 7:25. 벧전 2:24, 3:18)


◈ 성령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듭난 자들 안에 거하셔서 구원에 대한 보증이 되신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시며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 하신다.

(마 28:19. 요 16:8. 롬 8:9-16. 고전 12:13. 엡 1:13-14 )

 

◈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으며 죄가 없는 자였으나 그는 죄를 범해 죄인이 되었고 인간의 조상으로서 그 모든 후손들에게 죄의 본성을 물려 주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 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또한 죄를 범하여 죄인이다. 하나님의 구원 없이는 인간들에게 소망이 없다.

(창1:27, 9:6. 롬 5:12. 엡 2:1)

 

◈ 죄

 

죄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죄는 또한 의를 행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죄의 값으로 사망 즉 죽음을 요구하셨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사 53:6. 겔 18:24. 롬 3:23. 약 2:10, 4:17. 계 20:11-15)

 

◈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죄 용서함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며 율법 준수나 선행으로 얻지 못한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모두 영생을 얻는 다.

(막 1:15. 요 1:12-13. 행 4:12. 롬 10:9-13. 고전 15: 1-4. 히 9:22)

 

◈ 교회

 

우주적인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부터 휴거 때까지 구원 받은 모든 자들로 이루어진다. 각 지역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축소형이다. 지역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며 모여서 함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며 또한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지역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 하도록 목자들에게 맡기셨다(장로들, 감독들, 목사들, 목자들은 성경에서 모두 같은 자을 말하고 있다). 각 지역 교회에는 또한 실질적인 면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집사들이 있다.

(행 2:42-47. 고전 12:12-13, 27. 엡 1:22-23, 5:24-25,30. 행 6:3-6. 딤전 3:1-13. 히13:17)

 

◈ 예식

 

교회에는 두 가지 예식이 있다. 하나는 침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만찬이다. 물 속에 잠기는 침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것을 상징하며 물에서 나올 때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만찬은 신자들이 주님의 고난 받으심 과 죽으심을 기념하며 예배하고 또한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맨 처음에는 매일 떡을 떼었으며 나중에는 매주 주님의 날에 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마 28:19-20. 눅 22:19-20. 행 2:42-47, 10:47-48, 20:7. 고전11:26)

 

◈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또한 그의 죽으심과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시기에 충분하며 죄를 속하기 위한 다른 노력이나 선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엡1:7, 2:8-9. 고후 5:21. 벧전 3:18)


◈ 구원의 확신과 안전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히 안전하다.

(요5:24,10:28-29. 롬 5:1. 딤후 1:12. 요일 5:13 )


◈ 그리스도인의 삶과 우선순위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혼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데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지 말라고 명하시고 주를 신실히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보상을 약속하셨다.

(마 6:19-34. 막 8:34-35. 고전 3:12-15. 벧전 1:15-16. 요일 2:6)


◈ 성령의 은사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날 때 각자에게 주님을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고유한 권한으로 주신 것이며 사람이 바라거나 기도함으로 주시지 않는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적인 은사가 있으며(사도, 선지자) 병 고침이나 능력 행함,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과 같은 이적의 은사가 있고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즉 변환기에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기초적인 은사나 이적의 은사들은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끝났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병을 고치실 수가 있고 방언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기도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한 것이며 은사로 주신 것은 아니다.

(롬 12:6-8. 고전 12:7-11, 14:22. 고후 12:12. 엡 2:20, 3:5, 4:11-12. 히2:3-4)

 

◈ 장래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시대를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가지시고 또한 다스려 오셨다. 각 시대 마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믿음 뿐이었다. 현 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다. 교회는 은혜시대 이전 에는 존재하지 않았었고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은혜시대 끝에는 교회의 휴거가 있고 그 후에는 대환란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천년왕국과 불신 영혼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 받은 자들에 대한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이다.

(마 24:21, 29-30, 25:46. 롬 6:14. 고전 10:32. 엡 3:2-6. 골 1:25-27. 살전 4:13-18, 5:4-10 히 7:18-19. 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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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병철 회장님의 질문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답변

 

오래전 고 이병철 삼성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카톨릭교 신부에게 질문한 내용이 중앙일보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 회장님께서 삶을 마감하기 직전에 사춘기 청소년 같은 솔직하고 평범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질문을 하셨기에 이에 대해서 나도 나름대로 답해보고 싶었다. 물론 고 이회장님께 답해드리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도 이회장님과 같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 자신에게 답해보고 싶은 것이다.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신은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세상사(섭리)를 보면 신이 있고, 신은 이미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고(세상사를 통해서) 있다.

따라서 신은 보고자 하면 보이고, 보고자하는 마음자세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눈에 공기(하나님)와 바람(섭리)이 부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세상사)을 보면 공기(하나님)의 존재와 바람(섭리)이 부는 것을 보는 것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 데에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나?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時. 空. 靈魂의 한계물)은 없을 것이다.

창조주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피조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창조주 즉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창조주 외에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존재하는 피조물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3. 창조와 진화 중에 어느 것이 맞는가?


창조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자구에 묶여서 협소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창조를 넓게 해석해야 한다. 나는 창조과정에 진화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진화는 변화이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창조이야기는 비유와 상징의 표현이다. 몇십만년 전의 원시인류의 화석이 발견되는 데에 성경처럼 6천년 전에 인류가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시대에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비록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이것 또한 신의 창조인 것이다.


4. 과학이 발달하면 무병장수의 시대가 올 것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피조물의 한계를 넘지는 못한다.

무병장수는 축복이아니라 끔직한 재앙이다. 사는 목표가 죽음인데 죽음을 없애면 무엇을 목표로 해서 진지하게 살겠는가?

죽음을 근본적으로 의식하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며 자식들을 사랑하고 잘 키우려고 애쓰며 희망의 끈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다행인 것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이 죽을 날을 비밀에 부쳐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죽을 날을 미리 안다면 이 또한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어 갈 것일 텐데...

아무튼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마치 ‘하급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계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5.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왜 고통과 불행과 아픔을 주었는가?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아픔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주인이 되시는 신의 마음대로이다. 이것은 현실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고통과 불행과 아픔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 원래 고통과 불행과 아픔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 신의 관점과 피조된 인간의 관점이 정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이 바로 고통과 불행과 아픔 자체이지, 신은 자신의 자식인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과 아픔을 주지 않으신다. 이런 문제는 신과 자신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고통과 불행과 아픔은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이다.

이런 것들이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교향곡을 구성하는 악보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인간에 대한 신의 신묘막측한 사랑(배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진정으로 원숙한 인간이라 할 것이다.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선.악을 포함한 신의 창조와 섭리는 인간이 따질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부모님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따지는 것보다 더 불경스럽고 어리석은 질문이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다. 선과 악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神은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춰가며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오늘도 섭리하고 계시며 그 와중에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행.불행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히틀러도 어린 시절에는 하나님을 갈망했던 믿음을 동경한 신실한 소년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신의 섭리에는 선.악이 그리고 선인과 악인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7. 우리가 죄를 짓도록 버려두다가 결국 예수의 대속에 의지해야만 하게끔 만들었는가?


時空안에 있는 피조물은 원천적으로 죄의 소산이고 죄를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이 제일 우선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하나님도 예상하시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피조물들 간의 조화를 원하셨지만 그 사랑의 뜻이 인간의 상징인 아담의 욕심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구원책으로 신이 친히 예수의 형태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들의 죄악의 환부를 수술하여 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악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러므로 예수의 대속에 의해서만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일심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받을 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다. 인간이 혼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의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8.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성경은 원래 수많은 사본이 존재하고 원본은 없는 책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어떻게 관여(섭리)하고 계신지를 예를 들어 설명한 책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쓴 신앙의 기록들 가운데서 가장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들만 추려서 발간한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자는 따로 있지만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오늘의 이회장님 같은 탁월한 분들도 의심을 가지는 인간과 인생에 관해서 명확한 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출현한 책이 성경이다.


9. 종교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묻는 질문이다. 종교는 진리이고 현실이다. 종교라는 말 대신에 ‘현실의 진리’라는 말을 쓰면 이해가 될 것이다. 종교는 현실과 동 떨어져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현실문제 자체이다. 종교(신)가 가장 1차적이고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현실이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이다. 그러므로 하드웨어인 육신은 망가져도 소프트웨어는 존재한다. 靈魂중에서도 혼은 살아오면서 생각한 마음의 이력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의해서 죽은 후에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영은 영원한 것이다. 이 영을 통해서 창조주와 연결되는 것이고, 육신은 죽어도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인 靈은 본질상 피조된 물질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기에, 없어질 수(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은 원래의 고향인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모든 종교는 존재의 진리를 찾는 것이다. 즉, 인간과 세상의 본질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종교는 보는 관점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나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결코 타 종교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싶지 않다.


12. 종교를 갖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가?


종교를 갖지 않아도 자신이 유한한 피조물임을 자각하고 따라서 전지전능한 신을 인정하며 신을 위주로 살아간다면 천국이나 극락에 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현실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고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교만으로 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피조물의 한계를 자각하지 않고 산 사람은 신이 가장 낮은 등급으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모님을 무시하고 혼자 산 자식과 같기 때문이다.


13. 종교의 목적은 착하게 사는 것인가?


종교의 목적은 자신이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 착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것이 직접목적은 아니다.

물론 종교에 심취할수록 이전보다 더 착하게 살게 되는 것은 부수적이며 필연적 현상이다.


14. 인간의 영혼이 죽은 후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맞는가?


인간의 영은 창조주께로부터 왔기에 魂.肉과 달리 원래의 자리인 창조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군대에서 제대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魂(사는 동안 가졌던 마음의 이력서)과 육은 이 세상에서 산 흔적이지만 靈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소프트웨어는 원래 있던 곳인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 지?'는 죽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이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믿음대로는 살아야 한다. 그 성적표는 나중에 받아볼 수 밖에 없다.

이왕 한 세상 사는 것, 후회없이 살도록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봐야하는 것일 뿐이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주는 교훈은?

 

신앙과 세상살이와는 별개이다. 각자가 받은 재능이 다르기에 신앙이 없어도 이회장님 처럼 대 성공을 거둘 수가 있다. 그러나 신은 각 개인을 필요에 따라서 창조하고 사용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이회장님이 온 힘을 기우려서 사업을 한 결과, 이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섭리였다. 이 회장님이 누린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신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이회장님이 죽을 때, 살아있을 때에 벌었던 것을 가지고 가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돌아가실 때까지 몰랐다면 실망이다.

하나님은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을 자신의 뜻대로 창조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부인해 봤자 하나님께 불효만 하는 것이다!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유했는데에 그러면 부자는 악인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무슨 마음으로 부자가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사업을 일구고 부자가 되었고, 이런 부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면 물고기가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당연하듯이 당연히 부자도 천국에 들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도 세리 삭게오의 중심을 보셨지 그의 사회적인 평판을 보시고 구원하신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17. 종교와 범죄는 상관이 없는가?


성경은 아담이후에 사람은 원래 악한존재(성악설)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입 속에 넣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종교가 범죄를 점차적으로 줄일 수는 있어도 종교국가라고해서 범죄가 현저히 감소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국민들이 진심으로 종교인이 아닌 이상, 종교의 범죄예방효과는 크지 않지만, 점차적으로 범죄감소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교도소를 백 개 짓는 것보다는 예배당 하나를 짓는 것이 유익한 것이다.


18. 신앙인이 광인처럼 되는 이유?


여기에는 바람직한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바람직한 면은 정말로 은혜로 충만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현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는 이단 종파에서 보듯이 독단적인 아집에 빠져서 사회의 빈축까지 사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자신의 현세에서의 한풀이나 내세에 대한 보장에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광인처럼 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게 된다.


19. 종교와 정치는 별개인가?


종교는 인간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대신에 국가 권력과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과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종교와 정치는 별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래서 주님도 바리새인의 교묘한 질문에 "하나님의 것은하나님께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라고 답하셨지 않은가?

정치는 현실이고 종교는 현실이 목표로 하는 원대한 개념이기에, 정치와 종교가 합해지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성이 될 것이다. 선도 악도 아닌 어중간한 돌연변이가 될 것이다.


20. 우리니라에 교회가 많은 데에 왜 그렇게 범죄가 많은가?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과정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조급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 중에 참 신앙인이 많아진다면 분명히 범죄와 사회적 시련은 점차로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 던지는 이회장님의 꾸지람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21. 로마교황의결정에는 잘 못이 없다는데?


로마교황도 사람인 이상 잘못이 있겠지만 일반인들 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분이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잘못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교황을 한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이해해 드려야 한다.

 

22. 종교는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가?


기독교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기독교의 이상과 배치된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모든 교인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마 이것이 기독교적 이상일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숙제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기업가를 중히 쓰시는 것을 보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때에 따라서는 자본주의도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본다.


23.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모든 피조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 거대한 우주도 피조물이기에, 가엽게도 시작과 끝이 있는 데에 지구에 왜 종말이 없겠는가?

다만 종말은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하계가 태어나고 성장하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듯이...시작과 끝은 언제나 맞물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은 우리가 알고자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후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위대한 기업가이신 고 이병철 삼성회장님도 죽을 때가지 인생의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번민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 같은 범생들로 하여금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군요.

교우 여러분! 사는 끝 날까지 영.육간에 건강히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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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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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Q&A] 그리스도, 그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가복음 16:15)입니다. 이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4:12)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분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의 생애와 교훈은 누구보다도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계는 그의 탄생으로 년도를 기록합니다. 그의 교훈은 인종, 문화, 국가의 장벽을 넘어 호소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교훈을 구분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예수처럼 사람을 가르친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랑을 한 일이 없습니다. 세계사에 예수와 비길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그와 비교할 대상은 없습니다.

   

그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이 대답은 모두 틀린 것 입니다. 예수는 계속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6:13-18을 보시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셨습니다. 그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신문을 받을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예수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네가 말한대로니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했다. 마태복음 26:63-68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송사했다. 예수 외에 누가 감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한복음 5:21-23)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사도요한은 그이 복음서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고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한복음1:14)한 분이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정도 밖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한복음14:9)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군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1:15-17)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로새서2:9),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는 성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인간은 모두 공통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3:22,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3:10). 죄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6:23.)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브리서9:27). 아무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라디아2:16)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하셨나니”(디도서3:5). 그대가 스스로의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셔야 했을까요?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2:21)” 라고 답합니다.

 

그대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당신 대신 죽으신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6-8). 예수는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고,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를 행위로 보이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오한14:10). 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구원에 자신을 던지셨다.

 

십자가의 도는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린도전서15:3)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십자가는 전도의 절반이고, 부활이 있어야 완성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15:4).

 

예수는 요한복음10:17, 18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10:17,18). 아무도 이런 선언을 할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과 동물을 쫓아 내실 때,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을 몰랐습니다(요한복음2:19, 21). 나중에 그는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12:39,40)라고 말씀하시며 이적을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12제자에게와 그 후에 5백여 형제에게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15:5-8).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눈으로 본 증인들이다.

 

사도들은 이 도를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 전파가 금지되었지만, 그들은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을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친히 보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구언하는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부활의 거짓 증인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짓을 전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전시할 수만 있다면, 부활을 전하는 입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예수의 시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나셨습니다. 그는 구주시고, “나는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으리라”(계시록1:18)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어찌하려는가

 

예수는 당신의 구주신가? 당신은 그를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로마서1:16)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전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지진이 나고, 간수는 죄수들이 탈옥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처벌이 두려운 간수는 주의 종에게 나아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고,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답한다(사도행전16:31).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예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 말씀하신다(요한복음 6:4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1:10-13).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단지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마치 죠지 와싱튼이나 어떤 역사적 인물을 믿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기본 진리를 알고, 그리스도인이라 시인합니다. 그들의 이론은 옳고, 교리적으로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개인의 구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9,10)라고 말 합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적이 없다면, 오늘 그를 부르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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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구속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구속(救贖, 죄를 대속하여 구원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연 상태는 죄책감으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를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구속의 유익은 영생(계 5:9-10), 죄 사함(엡 1:7), 의(롬 5:17),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갈 3:13),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딛 2:14; 벧전 1:14-18), 하나님과의 평강(골 1:18-20), 성령의 내주하심(고전 6:19-20)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구속을 받는다는 것은 용서를 받고, 거룩하여지며, 의롭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양자가 되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참조, 시 130:7-8; 눅 2:38; 행 20:28).

 

구속이라는 의미는 "값을 치르고 사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이 용어는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뚜렷하게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됩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전 상태는 노예 상태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사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또는 구약의 법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4장 5절은 ‘구속’에 대해 은유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속 개념은 몸값이라는 단어와 관련됩니다. 예수께서는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기 위해 대가를 치르셨습니다(마 20:28; 딤전 2:6).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삶과 교환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구속이 그분의 피, 곧 그분의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골 1:14).

 

하늘의 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 받고 용서 받고 자유롭게 된,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는 이전의 포로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죄에 노예였던 자들이 성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임 당한 구속자를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계 5:9).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정죄 받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 및 죄의 영원한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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