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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일 수요저녁예배설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능력이 있는 기도는  

성경/빌1:3-5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 빌립보서를 살펴보고 있는데 빌립보서는 두 가지의 별칭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썼다 하여 “옥중서신”이라는 것과 그 주제가 “기뻐하라”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하여 “기쁨의 서신”으로 불리 웁니다. 신앙의 능력, 믿음의 능력은 바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에 있음을 빌립보서가 보여줍니다. 그 기쁨의 뿌리가 은혜와 평강임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기도”라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계시록 5:8, 8:3을 보면 기도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라고 합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8:3)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능력 일 뿐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참 많은 부분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 무기력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하면 능력 있는 기도로 만들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능력 있는 기도는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한 기도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이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서에서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서두에 인사말을 하면서 반드시 기록하는 것이 감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3절“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인데,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향기는 감사의 향기입니다. 이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좋은 것들이 주어진 뒤에 하는 기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의 기도는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더불어 바울은 빌립보서4:6에서 반드시 감사로 기도할 것을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다니엘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사람이나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넣을 것이란 (다리오) 왕의 어인에 찍힌 금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도 여전히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 그렇다고 사자 굴에서 벗어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감사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아 버리십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모든 상황들이 180도 바뀌거나, 문제들이 없어지고, 대적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의 기도는 나의 대적이 나를 넘어뜨릴 능력이 있어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요? 내가 나를 너무 잘 아니까? 하지만 믿음의 눈을 나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면 감사의 내용들은 참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합니다.

 

 

▶▶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잘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들을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Think와 Thank의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자꾸 생각해 냄으로 감사의 기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요단강 가운데서 12개의 돌을 취하여 길갈에 세우라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요단강에 건너게 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 더불어 감사의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고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실 때에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12바구니가 남은 다음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먼저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심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3-24)

 

 

둘째로 능력 있는 기도는 기쁨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능력 일 뿐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기쁨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절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기쁨으로 간구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한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기 힘든 노동중의 노동입니다. 그것만큼 힘든 일도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면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있는 기도는 기쁨으로 기도할 때 나타납니다.

 

 

▶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행16:25)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며, 찬미했을까요? 억울해하며? 가슴을 치고 분해하며? 아마도 그들은 기쁨으로 기도하며 찬미했을 것입니다. 매를 맞았기 때문에 온 몸이 쑤시고 아프지만 예수님 때문에 당한 고난은 기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일 -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나를 믿어준 사건)

 

 

바울과 실라가 기쁨으로 기도한 기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막았던 옥문이 열리고, 손과 발을 묶었던 착고가 풀려지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우리를 붙잡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열리고 풀려질 것을 믿습니다.

 

 

● 말씀 정리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참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 속에서 능력 있는 기도, 곧 응답받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본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먼저는 감사가 있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감사의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고. 주실 줄로 믿고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능력있는 기도는 기쁨으로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즐거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능력있는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늘 감사하며, 늘 기뻐하며 항상 기도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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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기쁨의 근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근원

성경/빌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들어가기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하는 말씀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빌립보서와 관련되어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빌립보서는 오늘날 그리스의 북동부에 있는 옛 도시입니다.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서 금과 은이 풍부하고,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주요지점으로 상업과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뒤에 오늘날 유럽인 당시의 마게도냐로 건너가 도착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첫 번째 성도가 되었고,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준 사건으로 인해 당시의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이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날 밤 지진이 나고 모든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간수가 자결하려고 할 때에 바울이 말리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을 듣고 간수와 그 가족들 모두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배경의 빌립보서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옥중서신이라는 별명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또 다른 별명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4장으로 이루어진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통하여서 어려운 시대 가운데 기쁨의 파도를 타는 성도들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그럼 왜 바울은 빌립보서를 썼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로마의 옥에 갇힌 바울을 위로하려고 에바브로디도라를 선물과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있는 동안 심한 병을 얻게 되어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빌립보로 돌아가는 일이 오랜 시간 지연되므로 그로인해 빌립보 교회에로부터 에바브로디도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하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써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붙입니다.

 

 

둘째로 빌립보서를 쓴 이유는 바울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빌립보 교회가 앞장서서 바울을 도와주었기 때문(빌1:5, 4:15, 고후8:1)에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세 번째로 빌립보 교회에 “유오디오와 순두게”라는 중요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막고(빌4:2), 거짓교사들(빌3:2)로 인한 교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옥중에 갇힌 것은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 이러한 빌립보서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이라고 정의 하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신앙생활에 대해 정의하기를 “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축제가 무엇입니까? 즐거움 아닙니까? 기쁨 아닙니까? 고로 신앙생활이란 기쁨 속에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모든 예배 시간에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신앙이 좋지 않고야 예배와 기도와 전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말할 때는 고난이 와도, 난관에 부닥쳐도,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상황인데, 힘든 상황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원망을 할 만한 일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앙의 힘입니다. 그 감사함 속에 그 기쁨 속에서 현재에 닥친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는 것. 그게 신앙 아니겠습니까?

 

 

▶ 지금 사도바울은 죄인이 몸으로 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한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 가운데 당하게 되는 고난이고 핍박입니다. 그런 속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하는 말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빌립보서가 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때 기뻐하라고 한다면 말씀의 힘이 약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려움 상황인데 그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한다면 그 삶은 능력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즐거워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런 삶을 통해 나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일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러한 기쁨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기쁨의 뿌리가 무엇이겠습니까?

 

 

● 오늘 본문을 통해서 2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우리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가 왜 구원받았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가서요? 아닙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 가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짐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 뽕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우리가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인생가운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기쁨 속에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인생가운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둘째는 우리의 사역에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장,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셋째는 우리의 문제에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그 가정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삶의 문제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해결의 역사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두 번째로 우리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평강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평온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 가능합니다. 돈 없는 사람이 돈이 있으면 평강해 집니까? 느부갓네살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왕입니다. 그에게는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해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단2:1) 그래서 시편127:2에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쾌락을 누리려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보다 갖고 싶은 것은 “평강”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강은 잠시 잠깐뿐입니다. 사도행전1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옥에 잡혀 사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잠을 잡니다. 얼마나 평안하게 잠을 자는지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사형을 앞두고 그런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향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 기쁨을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도록 기도하므로 어떤 모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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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교회의 시작과 기원(행2:1-13)

성경/행2:1-13    제목/교회의 시작과 기원

● 오늘 본문은 성경의 역사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며

- 교회가 탄생했으며

- 예수님의 약속대로 믿는 자들의 육체와 성령이 하나 되는 역사가 있었고

-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전무후무한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몇 군데 기록 되어 있습니다. 행4:8, 24-31. 행8:15-17, 행9:17, 행19:6에 기록이 있지만 본문과 같은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순절과 같은 역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순절에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현상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이러한 현상 속에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3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방언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5절부터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8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각자 자기가 태어난 곳의 말로 듣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을 듣습니까? 11절 “(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하고)”그런데 이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니 어떤 힘에 붙들려서 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 말씀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시작과 기원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들어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행동하는 곳입니다. 본문 2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교회의 출발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행동에서부터 교회는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 권세자들이 배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했는가? 행4:13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다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보통사람들이다. 무시하는 발언.

초대교회 당대의 제자들, 믿는 성도들의 특징 - 배운 것이 없다. 영향력도 없다. 권세도 없다. 돈도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고, 학문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되고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3천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기 때문이다.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교회의 출발이고,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신다. 주역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동이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가 있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모습입니다. 비록 120명의 성도들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역사하신 곳이고,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두 번째 요소는 변화입니다.

● 교회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제자들을 변화 시키셨습니다. 본래 제자들은 겁 많고, 소심하고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용사로 변화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쓴 팡세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줄 아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철학자들의 하나님, 사상가들의 하나님, 점쟁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 이삭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 야곱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변화 시키고 있다.”라고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찌 사람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만나는데 어떻게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 가면 데스밸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덤가에 가더라도 그곳에 풀이 있는데, 데스밸리에는 풀 한포기 없을 정도의 죽음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데스밸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곳에 비가 왔습니다. 비가 오니 풀들이 돋아납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몇 개월, 몇 년 동안 묻혀 있다가 물을 만나니 싹을 내며 자라며,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이게 변화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는 죽은 곳 같은 곳에서도 생명을 만나니까 살아나고,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 심령이 데스밸리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심령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게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명은 변화의 힘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변화가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아직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숙함이 없이 늙어 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전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걸어 잠근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니 그들은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걸어 잠그었던 문을 열고 나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활동하십니까? 우리는 얼마나 변회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살아게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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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일 수요예배설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습니다. 

행8:9-25   

 

 

●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교회의 큰 핍박, 그리고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는 일들로 인해서 교회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수많았던 성도들이 사도를 빼고는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어서 성도들을 담대하게 하고, 복음의 가치와 예배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하고, 무엇보다 사도행전 1:8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 중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렇게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구체적인 한 사건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우리가 마술사 시몬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립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성직 매매자”란 단어가 시몬(simon)이란 이름에 "iac"를 붙여서 "simoniac"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본문에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시몬이란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그의 장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첫 번째 그의 장점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몬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9-11절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마술사라는 것 때문에 시몬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습니다. 성경 속에서 마술사 하면 오늘날 무당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종교적 사회입니다. 모든 것들을 종교적으로 풀려고 했던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종교인이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때론 법을 집행하기도 하고, 때론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마술사 시몬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9절에서는 “사마리아 백성들을 놀라게 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10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10절c “이 사람이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자이다.” 이런 일들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11절 “오랜 전부터 있었습니다.”(“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한마디로 시몬은 사마리아의 영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술사 시몬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빌립집사님이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됩니다. 12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그런데 13절을 보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닙니다. 빌립을 따라 다니면서 빌립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랍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 마술사 시몬은 비록 자신이 행하는 것이 거짓인줄은 알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명예도 얻고, 권력도 얻고, 돈도 얻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서 빌립에게로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방해를 놓고, 겁을 주어 빌립을 사마리아를 떠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을 감추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 들였습니다. 빌립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전하는 것은 거짓이고, 빌립이 전하는 것이 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닙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겸손한 모습, 열린 마음으로 가지고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나름대로 교회에서 위치가 올라가면 이런 마음들을 잃어버립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세미나가 있었는데, 강사가 젊은 목사님이셨습니다. 강의 시간이 되어서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경직목사님이 맨 앞줄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런데 강의 시간에 안 늦으시려고 일찍 나오시는 바람에 양말을 신지 못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젊은 목사님이 한경직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목사님 제가 젊은 목사라서 무시 하시는 겁니까? 왜? 양말도 안 신고 오셨습니까?” 아마 다른 목사님 같으셨으면 그 정도 위치에 계신 분이라면 얼굴을 붉히고 일어나서 강의실을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이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강의에 안 늦으려고 빨리 오는 바람에 양말 신는 것을 잊었습니다. 지금 가서 신고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나가셔서 양말을 신고 다시 돌아와서 맨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한경직 목사님의 이러한 겸손의 모습 때문에 한국 교회뿐 만 아니라 그분을 아는 모든 분들께 존경을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 둘째로 시몬의 장점은 실망스런 상황을 잘 극복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 들였다는 소식이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자들에게 안수를 합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런 장면을 보고 시몬이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됩니다. 18-19절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시몬은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합니다. 이런 시몬의 모습에 베드로가 화를 내면서 그를 책망합니다. 20-23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시몬에게 돈과 함께 망하라고 합니다.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저주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였으니 회개하라”고 소리칩니다.

▶ 이런 상황 가운데 빠지면 사람은 욱할 수 있습니다. 싫으면 관둬라하고 소리치며, 화를 내면서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을 돈으로 산다고 하는 것 생각과 행위 자체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 잘못으로 사마리아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 자신이 그런 욕을 먹는 다는 것,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 일겁니다.

그런데 시몬은 어떻게 반응합니다. 24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베드로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며 바로 잘못을 인정합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 중에 하나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실수하고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때때로 질책을 받습니다. 질책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사람이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그 상황이 어떠하든 사람은 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말로 들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상황 실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참고 인내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7장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 앞에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예수님은 그 여인을 개 취급합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그런 인정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 여인의 딸에게 귀신이 떠나갑니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7:29-30)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그렇게 표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 때론 조롱당하는 일들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 마지막으로 시몬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잊지 않고 조심해야 할 부분인데 그것은 시몬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시몬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이런 시몬의 모습은 예수를 믿는데 사는 방법은 세상적 방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세상적인 방법을 취한다면 마술사 시몬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몬과 같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목표와 방법은 세상적일 수밖에 없고, 자기 욕망을 이루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회심이 덜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욕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회심이란 목표와 방법이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것에서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들이 이루어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연륜으로 인해 리더가 된다면 교회를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게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간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시몬이란 마술사와 연관된 사건입니다. 마술사 시몬이란 인물은 우리에게 좋은 인상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열린 마음입니다.

그는 비록 사마리아의 영권을 지배하던 사람이었으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을 정도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실망적인 상황을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 가운데 여러 실망스런일들, 특히 자존심이 상하거나, 조롱의 일들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그의 단점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방법은 세상적인 것으로 취한다면 우리역시 시몬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언제나 우리 심령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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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예수님의 십자가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헤드린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처형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산헤드린의 속사정을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산헤드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1절). 산헤드린의 주된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주동자라면 가룟 유다는 결정적인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한통속이 된 것은 그들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했습니다(요12:6).

산헤드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위선자라 할 수 있습니다(마23:13).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그 어떤 죄,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대접 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부자들과는 억지로라도 친구가 되려 했어도 가난한 자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누가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할 저들은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든 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도, 이방인도,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이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유대인도 사마리안도 심지어 로마인도 찾아가 만나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찬송하고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는 따스함은 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커가는 데 자신들은 작아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산헤드린은 군중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 부활입니다. 2017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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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무기력한 부활신앙

요한복음 20장 11~18절

 

본문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울고 있습니다(요 20:11). 그녀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있던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13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보살피고자 하는 여인의 착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려고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것(막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곧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20:18∼19).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물이 되기로 작정하고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였고 죄악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찬양하는 대신 울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면 무덤이 비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다면 안심하고 울지 않았을까요. 말씀이 이뤄진 현장에서 오히려 감격하고 기뻐해야 될 자리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불신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낙심하여 울고 있는 여인처럼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무덤에 찾아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만남은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코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절망하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울고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우리들에게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지난 허물을 들추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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