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을 말하다  ( The Lord's Prayer )

 

 

 

 

 

주기도문, 익숙한 데서 벗어나라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처럼 기도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골간을 이루는 주기도문(마 6:9-13)을 최고의 본보기로 삼아 거기서 무얼 믿고 훈련할지 뽑아냈다. 루터의 고전적인 편지들도 그렇지만 칼뱅의 [기독교 강요] 역시 예수님이 본보기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한 줄 한 줄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관련된 지면(제20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적인 주석과 해석학적인 저작들뿐 아니라,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글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적어도 한 군데씩은 적잖은 분량을 배정해 주기도문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부터 이 위대한 스승들의 사상을 통해 주기도문을 살피면서 기도라는 주제에 관한 그들의 지혜를 온전히 끌어내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깊이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인류 역사상 주기도문만큼 자주 되풀이되며 입에 오르는 성경 구절이 또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데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몫하는 듯하다.

 


당신이 난생처음 철길 옆에 사는 지인을 찾아갔다고 생각해 보자.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온다. 앉은 자리를 고작 몇 미터 상관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일어나며 소리친다. "저게 도대체 뭐지?" 하지만 주인인 친구는 되묻는다. "뭐가 뭐야?" 다급하게 대꾸한다. "저 소리 말일세! 난 뭐가 벽을 뚫고 둘어오는 줄 알았어!" 친구는 그제야 태평스럽게 설명한다. "아, 저거? 그냥 기차야. 난 이제 익숙해져서 가는지 오는지 신경도 안 써." 상대는 말문이 막힌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은 신령한 체험을 갈구한다. 예수님은 몇 마디 말을 주셔서 그 도구를 삼게 하신다. 이를테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이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 아버지와 날마다 마주 앉아 그분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놓고 그분이 귀 기울여 듣고 사랑해 주시는 경험을 하고 싶은가?" 우리로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다. "예!"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주기도문 속에 모두 들어 있단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라는 듯 반문한다. "어디 ... 들어 있다고요?" 너무나 익숙해서 거기엔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 안에 다 있다. 어떻게 하면 '익숙함'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성찰하고 훈련하면서 주기도문의 깊이를 가늠해 왔던 이 위대한 세 스승의 말을 유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을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는 부르는 말이고, 사실상 간구는 아니다. 칼뱅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입양되지 않는 한, 누가 감히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루터도 이 구절은 곧장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도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위치를 자각하려는 부름말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 그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평안해 하는 믿음을 마음에 심어 주시길"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칼뱅 역시 "주님은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모든 불신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말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현대인들로서는 첫 번째 간구를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거룩히 여김을 받다'라는 동사가 요즘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며 세속화된 사회에서 '거룩'이란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루터가 지적했듯 논리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는 건 도대체 무얼 기도한다는 얘긴가? 주님의 이름이야 이미 거룩하지 않은가?" 루터는 곧바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항상 거룩한 건 아니다"라는 답을 달았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열방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시기를" 소원하는 어거스틴 기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루터는 또 다른 의미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온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전반적인 기조를 같이하면서 내면 깊숙이 새기고 있던 생각 하나를 덧붙였다. "은혜를 짓밟는 행위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면, 그만큼 가당찮은 짓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주께 배은망덕하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면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며 경배할 리가 없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어거스틴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마땅이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권'과 관련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이는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게 하시고, 명령하신 것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루터는 여기에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덧댔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갖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세 번째 간구의 의미를 더없이 생생하고 솔직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 이처럼 담대하게 말하기엔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주기도문 첫 구절이 갖는 중요성만큼은 또렷이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슴 깊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감히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십상이다. 네 살배기 아이는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해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갖가지 금지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저 믿고 따를 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고 의지할 때만 인내하고 감사하며 어려움을 견딜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더러 하나님이 정말 믿을 만한 분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지독히 참담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고백하셨다는 사실이 답이 될 수 있겠다. 주님은 스스로의 욕구를 좇는 대신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은 그가 해 주신 일보다 더 힘든 일을 하라고 물어보시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어거스틴의 뒤를 이은 루터는 이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신공격과 중상모략, 뒤에서 몰래 하는 험담 ...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저주 따위를 피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조작하며,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일을 몰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통제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기에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주기도문 앞쪽 세 구절에 담긴 간구를 살펴보았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은 하나같이 위치, 즉 이 세 가지 기원이 초반에 배치된 사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기도의 도입부는 모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의 필요나 문젯거리가 기도를 지배하게 두면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이 온 천지에 드러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길 갈망하며, 온전히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염원하는 걸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이러한 진리를 함축해서 아름답게 표현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주님의 뜻을 향해 굽어지니,

완전히 들어맞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찬양과 감사(하나님 중심)가 우선이다. 시선이 자신을 향하여 시야를 왜곡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기도는 절반을 넘긴 셈이고 시각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로잡히고 명쾌해졌으니, 이제 우리와 세상의 필요를 향해 흐름을 바꿔도 좋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초반에 하나님을 참다운 양식이요, 재산이요, 행복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세 가지 간구를 드렸다. 이제 필요를 채워 주시길 구하는 '기도 제목'을 새로 짜인 마음의 틀에 맞춰 정리하신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어거스틴은 온전한 기도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말고, 너무 부유해서 주님을 잊어버리지도 않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잠언 30장 8절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크리스천들은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며 필요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먼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 기도에 사회적이 차원을 더했다. 누구나 빠짐없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취업률이 높아져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루터는 불의한 짓을 하는 이들을 향해 여기에 내재된 능력을 역설하며 음울한 경고를 보낸다. "교회가 중보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려 주고 ... 주기도문의 이 기도에서 배제당하지 않도록 조심시켜야 한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다섯 번째 간구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적으로 죄와 용서의 문제를 두고 치열한 씨름을 벌인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으면 ... 이 간구와 마주서서 자신을 살피게 하라. 자신이 남보다 나을 게 없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높이 낮은 문을 지나 용서의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아울러 루터는 이 간구를 교만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실상에 대한 검증으로 규정했다. 회개나 고백하는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며 ... 복음에서 확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꼬박꼬박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데도 삶 가운데 확신과 기쁨이 점점 커지지 않는다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직결시켜 판단하신다. 이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거나 편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뿐만 아니라,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칼뱅은 그런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마음에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앙갚음할 궁리를 하거나 어떻게든 해코지할 기회를 골똘히 찾고 있다면, 더 나아가 원수처럼 여기는 상대가 보여 준 호의에 보답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온갖 배려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드려 봐야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꼴이 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중요한 구분을 지었다.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 실험하고 검증한다는 의미의 시험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성경은 고난과 환난을 심령의 숱한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서' 더 건강한 자기 인식과 겸손, 참을성과 믿음, 사랑을 갖게 하는 도가니로 풀이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칼뱅은 '오른편'과 '왼편', 두 범주로 나누어 시험을 열거한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 권력, 명예' 따위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몰아가는 유혹이다.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가난, 수치, 멸시, 고통'처럼 절망하게 하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고, 분노에 차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시험이다. 번영과 역경이 모두 쓰라린 시함이 될 수 있으며 제각기 주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에 집중하며 살도록 유혹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칼뱅은 이 구절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와 한데 묶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간구로 취급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루터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내면에 잔존하는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하는 게 여섯 번째 간구라면, 일곱 째는 외부의 악,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찬양에 해당하는 구절이 남았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언급조차 않는다. 초기 성경 문서나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에 칼뱅은 "라틴어 판에 없는" 문절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두는 게 지극히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베풀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소서, 우리를!"

칼뱅이 주기도문 해설을 마무리하며 결론은 참으로 유익하다. 루터가 [단순한 기도방법(A Simple Way to Prayer)]에서 그랬던 것처럼, 칼뱅 역시 주기도문을 대하는 크리스천은 어구의 특정한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내용과 기본적인 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판박이처럼 똑같은 단어를 동원해 기록하지 않았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강조점과 주제, 목적과 정신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요약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도에 사용되는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기도를 드리든 끝없이 갈고 다듬어 그 안에 주기도문을 새겨 넣어야 한다. 자유롭게 간구하는 기도로 가기 전에, 루터가 했던 것처럼 하루에 두 번씩, 주기도문을 자기 식으로 바꿔 기도하는 연습은 더없이 유용한 도구다.

 


주님이 이 기도문을 복수형으로 주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공개적이어서 ...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 사이의 교제가 깊어지게 해야 한다." 미국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은 "공적인 사역이 개인의 경건을 빚어 갈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칼뱅의 지적을 부각시킨다. 칼뱅은 기독교회의 공동 예배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의 틀을 단단히 잡아 주길 바랐으므로 공중기도와 성례전을 규정하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오롯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함께 모여 예배든 비공식적인 자리든, 힘닿는 데까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는 데 기도의 본질이 있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게 그 목적이라면 공동체 안에서 여럿이 어울려 간구하는 형태가 가장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C. S. 루이스는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가 모여 이룬 공동체를 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교우 관계를 되짚어 보면, 한 친구가 가진 인성의 일부 면모는 다른 벗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잘 알 수 있었을 첫 번째 친구의 일면을 놓쳐 버린다. "혼자 힘으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전모를 드러내려면 나 외에 또 다른 빛들이 필요하다." 평범한 한 인간을 알아 가는 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면, 수많은 이웃들은 물론 예수님을 알아 가는 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료들과 더불어 기도하면, 예전엔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다양한 풍모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루이스는 이사야 6장에서 천사들이 서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외쳤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제각기 한 면씩 목격하고 동료들과 공유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게 집단적이고 누적 가중되는 일이라면, 기도와 찬양 역시 공동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양식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팀켈러의 기도'에서 발췌(158-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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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해설-3
'주기도문'(主祈禱文, Lord's prayer)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VIII.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1.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마 6:13a)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청원 기도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 아니하신다. 사도 야고보는 다음같이 말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에 의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예수님은 40일간 인간이 당하는 빵의 시험, 명예의 시험, 세상 영화의 시험을 당하시고 말씀으로 그것들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성정을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예수님은 악마의 시험을 받으시고 이김으로써 시험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악마는 "참소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형제들을 고발한다."(요 12:10) 구약의 욥기에서 보면 마귀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9-11) 하나님은 마귀가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하시나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라고 명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우리 눈을 그리스도 은혜 안에서 항상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고정시켜야 한다. 3세기 교부 키프리안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원수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정성, 그리고 우리의 눈길은 모두 마땅히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패할 수밖에 없으나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있다.

 

2. 마귀의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어야 한다.

 

마귀의 시험이 올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 낸다. 마귀의 큰 시험의 경우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결국 이겨내나 그 극복 과정에서 우리는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인격적으로 더욱 성숙해지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어진다. 좋은 포도주가 되려면 포도즙이 발효해야 하는 것처럼 시험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낮아지고 고통을 당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 인격은 정화되고 변화된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정화(淨化)하고 포기하고 고통 가운데서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성숙과 온전으로 가는 길이다. 하나님은 시험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고 통과하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는 섰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넘어지지 않을까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말씀의 묵상과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교만과 명예와 세상의 영화가 주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청원해야 한다.

 

 


 

IX. 저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1. 악의 네가지 종류

 

"악에서 구하소서."(마 6:13b) 주기도의 마지막 청원기도는 바로 앞의 청원 "않게 하소서"라는 부정문을 "하소서"라는 긍정문으로 바꾼다. 악이란 무엇인가? 첫째, 악이란 비도덕적인 것, 비윤리적인 것이다. 탐욕, 불신앙, 범죄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경우 악이란 인격적 존재가 자기 정체성에서 이탈하거나 교만하거나 과욕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둘째, 신체의 병듬, 질병이다. 질병이란 건강한 몸과 정신의 상실로서 자연적 건강의 파괴다. 이 경우 악이란 비인격적 물리적 신체적 비정상 상태이다. 셋째, 사회적 불의한 구조나 제도이다. 인신매매, 성매매, 갱 조직, 마피아 조직 등이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권력의 전체주의적 패권(오늘날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IS), 알케에다 등) 등은 악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구조적인 악에는 인간이라는 인격적 존재가 연류되어 있다. 넷째, 자연재해가 가져오는 폐해(악)이다. 태풍, 지진, 폭우, 화산의 폭발, 토르네이도, 엘리뇨와 나니요, 기후의 변화 등이다. 이 경우 악이란 자연적인 조화 상태의 상실로서 비인격적 존재다. 이처럼 악이란 비인격적 존재일 수도 있고 인격적 존재일 수도 있다. 두가지가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악이나 악의 상징 배후에는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사에 해를 끼치는 마귀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이러한 악은 개인의 몸과 마음,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 사단이 준동하여 욥의 아들 딸들을 급속히 닥친 재난으로 희생시키고, 욥을 심한 피부병에 허덕이도록 하고, 다윗을 부추겨 욕망을 만족시키러 간통을 저지르게 하고 살인까지 범하도록 하고, 군사적 안정을 도모하러 인구조사를 하도록 한다. 인간 개인의 범죄, 단체의 범죄, 국가의 범죄의 배후에도 악의 원흉인 마귀의 준동이 있다.

 

2. 악은 십자가로 이미 제압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러한 악에서 우리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악의 세력과 공격은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인 우리 주변의 인물과 환경을 통하여 악은 우리를 시험하고 우리를 파멸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악의 준동에 결단코 절망하거나 이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악마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며, 악의 권셰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한 섭리에 악은 사용되고 봉사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악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떠한 악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b) 예수의 십자가로 악의 세력은 이미 제압되었다. 개선의 날은 아직도 오지 않았으나 이제 우리는 개선의 날을 대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천명한 기독교 종말론의 "이미-아직"(already-yet)의 긴장관계다.

 

사도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유 17절)고 경고하면서 이러한 자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8절)고 예언하고 있다. 사도 유다는 마지막 시대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절)

 

 


X.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1. 송영은 삽입된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 6:13c) 주기도의 이 구절은 나중에 삽입된 구절로서 짧은 형태의 주기도인 누가복음(11:2-4)에는 없고 긴 형태인 마태복음(6:9-13)에 전승되어 왔다. 긴 형태의 주기도는 그 자체로 이미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상당히 고정된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2세기 첫 무렵의 교회 규범에 보면 벌써 13절에 예배를 마무리짓는 송영이 덧붙여 그만큼 더 길어진다.

 

이 송영은 다윗이 솔로몬에 의해 건축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예물을 드리면서 올리는 감사기도: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역대상 29: 10-11)를 본뜬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는 이 송영이 신약성경의 나중 사본들에서도 마태복음의 주기도를 맺는 말로 나온다.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이를 마태복음 6장 13절 하반절에서 괄호 안에 넣었다.

 

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주권자 하나님에 귀속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인간 왕이거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로지 창조주와 섭리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귀속된다. 풍성한 성전 건축예물을 드리고 다윗이 감사기도를 드린 구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는 우주의 창조자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주권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왕이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그 정신이 되돌아 온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어귀도 이와 비슷하다: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 그리고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을 섭리를 계시받으면서 드리는 사도 바울의 송영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는 간구에서 송영으로 나아간다. 송영은 기도의 절정이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영혼의 찬양이다(끝).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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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해설-2
'주기도문'(主祈禱文, Lord's prayer)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V.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1. 하나님 나라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기도의 청원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 6:10a)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지 삶의 목표를 제시해 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다. 역사적으로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고 사회적 평등을 무력과 독재와 인권유린으로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는 1989년 동구의 민주화와 그 종주국인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이라는 공간적 의미보다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내면 속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속에 머물지 않고 외면적으로 확산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비가시적인 통치적 실재는 내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와 헌신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 개인,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생태계, 우주 속에서 외면화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2. 복음주의적 이해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칼빈주의의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개인의 변화에만 집중하나 사회적 변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상의 억눌린 자와 불행한 자를 돌보는 일은 여태까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74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ent) 이후 복음주의는 복음전파와 사회적 참여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신앙적 발상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김영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신학적 성찰," 「개혁주의 이론과 실천」,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편, 2014년 제6호, 11-49.) 이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인 칼빈주의자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칼빈주의적 이해

 

칼빈주의(calvinism)는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체계다. 칼빈주의는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the worldforming Christianity)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2nd ed. 1994; 홍병룡 역,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2007, 1장.) 칼빈주의는 부조리한 사회 질서와 구조를 개혁해서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개혁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사회적 불의에 의해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서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약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다. 이런 기독교라야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만다. 이것이 칼빈이 발견한 기독교였고 이것을 칼빈주의라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사회변화에 소극적 이었으나 그보다 26년 후에 태어난 칼빈은 적극적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는 어거스틴적이고 중세적인 회피적 기독교로서 내세 지향적이었다.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면화에만 주력했으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내면적 기독교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사회 구조 개혁에 힘을 쏟았다.

 

4, 신칼빈주의적 이해와 해방신학적 이해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인 기독교철학자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칼빈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사회변혁을 추구한 두 신학 사조를 탐색한다. 그것들은 칼빈주의를 보다 사회변혁적으로 변형시킨 신칼빈주의와 해방신학이다. 전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신학이요, 후자는 20세기 후반기 남미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주교회의 즉, 메데인 회의(1968년) 후 남미 카톨릭에서 유래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영향을 준 신학이다. 신칼빈주의(neo-calvinism)는 문화 개혁과 관련하여 우상숭배를 배척했고, 경제 성장을 궁극적인 선으로 취급하는 세계 체제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한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지배 및 착취와 관련하여 인간 해방을 주장하면서 탐욕과 권력욕에 추동되어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지배하는 세계 체제를 부조리한 구조요 죄라고 규탄한다. 해방신학의 시각에서 보면 신칼빈주의는 성장 우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전략은 제시하지만, 스스로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려고 싸우는 집단들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주의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평가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한계는 해방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보지 않고 지상의 이상향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는 결단코 인간이 구현하는 지상 위의 이상향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종말론적 단서(eschatological proviso)가 도외시 되었기 때문이다.(고범서 편역,

 

 

 

 

VII.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 용서는 상처 받음과 보복 악순환 해결의 길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 6:12)

이 청원 기도 대목에서 예수님은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허물, 잘못과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 인간의 삶은 가정, 친구, 직장,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회생활에서 인간들 사이에 불가피한 관계의 손상이 발생한다. 이는 욕심이나 탐욕으로 인하여 의도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무의도적인 행위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남에게 죄를 저지름으로써 죄과가 쌓이게 된다. 그리하여 상처를 준 잘못이나 죄과에 대한 보복의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보복하게 되면 당한 자는 다시 이에 대한 보복을 하게 되며 상처 받음과 보복의 악순환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해결의 길을 제시해주고 계신다. 상대방이 나에게 범한 죄과에 대하여는 보복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하여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죄는 복수를 통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용서로써만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범죄한 피조물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용서는 복음서 전체를 통관하고 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다음같이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분쟁하는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2. 용서의 힘은 예수로부터 온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회수를 철폐하시면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3-35)를 가르치신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약 5천 데나리온이다, 마 20:2)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는 것을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빚 전부를 갚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동료와 타자에게 의도적으로 부지 중에 허물과 죄를 범한 우리들은 먼저 우리에게 허물과 죄를 범한 우리 동료과 타자들의 허물과 죄과를 용서해야 한다.

 

죄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죄가 가져온 상처와 파괴는 성찰하고 치유함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용서하라는 것은 피해를 당하고 상처받은 일에 대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살하라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는 값이 든다. 당한 자가 그 악을 자기 안에서 사랑으로 태워 없애고 스스로 새로워 져야 한다. 이 과정에 그 잘못한 사람을 끌어 들이고 그에게 용서를 선언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악을 용서라는 선으로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용서해 줄 수 없고 오직 인간으로 오신 예수만이 용서해 줄 수 있다. 라인홀드 슈나이드는 말한다: "악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얼굴은 하나뿐이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론적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고난 속으로 내려와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하시고 기도하신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이러한 청원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용서라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예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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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해설-1
'주기도문'(主祈禱文, Lord's prayer)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를 가르치신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기도를 통하여 열리고 지속된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은밀하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보시는 주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시면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공동으로 함께 기도해야할 내용들을 가르쳐 주신다. 필자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주기도문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면서 새해 초두 우리의 기도가 더욱 깊어지기를 원한다.

 

I.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

 

주기도문은 산상 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이다. 주기도문의 각 구절에 마음을 열고 이 기도의 정신에서 살아 나갈 때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은밀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하드라도 기도를 공동으로 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문을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a; 눅 11:2)

 

마태에 의하면 예수님은 먼저 기도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면서(마 6:5-8) 주기도문을 기도의 길잡이로 가르치신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 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의 기도하는 법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주기도문"(Vaterunser, Lord's Prayer)이라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드리는 기도다. 누가가 기록한 전승된 주기도의 내용을 마태는 7가지 청원기도로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처음 3가지와 끝에 첨가된 1가지 청원은 하나님과 직접 관련되는 내용이고 중간에 이어지는 4가지 청원은 우리와 관련되는 부분이다. 주기도를 구성하는 두 부분의 상호관계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사이의 관계에 비교된다. 십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으뜸 계명을 펼쳐 놓은 것 같이 주기도도 하나님 사랑와 이웃 사랑의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다.

 

3세기 교부 키프리안(Cyprian)은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과 진리 안에서'(요 4:23) 예배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분은 이 말씀들을 우리에게 선물하셨고 이 말씀들로 우리에게 성령을 선사하신다."(De dominica oratione, 2, in: Thasci Caecilii Cypriani Opera omnia, CSEL II, 1, 265-294.) 주기도는 개인적 기도인 동시에 신앙공동체의 기도다. 주기도는 가족이나 사회계층, 남녀노소와 모든 문화와 국가와 인종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다. 이처럼 주기도는 모든 경계를 뛰어 넘어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만든다.

 

II.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πατήρ u,mw/n)라고 부르도록 인도하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b)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요구하시면서 제자들을 자신이 갖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끌어 들이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린이가 가장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인 "아바"(αββα, abba)라고 호칭하였다. "아바"(막 14:36)는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아람말이지만 우리말 "아빠"하고는 다르다. 우리 말 "아빠"는 어린 아이의 친밀성을 표현하지만 존경감은 없지만 "아바"는 천진난만한 친밀성과 아울러 존경하는 마음이 배제되지 않는다.("아바" 용어 해설, Stuttgarter Erkläungsbibel. 해설 관주 성경전서, 3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보통 쓰이는 용어는 '아브'인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당시 하나님 관념으로는 파격적이었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πατήρ σου, your father)요 "우리 아버지"(πατήρ u,mw/n, our father)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을 하나의 새로운 토대 위에 세우시며 동시에 그들을 특별히 은총을 입은 자들과 사명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결속시키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치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게 구하듯 신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누가는 이 좋은 것을 "성령"(the Holy Spirit, pneu/ma αγιος)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 되시는 분이시다.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기꺼어 내어 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게 하신다. 우리 기도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복이라는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기도란 우리의 소원을 정화하고 바로 잡는 법을 배워가는 길이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 즉 그의 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Reinhold Schneider, Das Vaterunser, Kolmar: Alsatia, 1941; Freiburg: Herder, 1947, 1979(6. Auflage)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빌립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에게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시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하여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첫째, 아버지는 창조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우주만물과 모든 유형과 무형의 존재는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은 그의 형상으로 진흙에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나의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유일하신 독생자이신 예수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호칭하며 우리는 입양된 형제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우리 아버지"라고 호칭할 수 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είκὼν tou/ qeou/, image of God, 고후 4:4; 골 1:15)이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의 모습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의 가르침을 좇음으로 성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은 나의 육신의 소욕은 죽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III.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1.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가 우리 기도의 대상

 

주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난다. 우리 기도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인격 그 자체가 주 대상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마 6:9c) 제자들이 청원해야 할 본래적인 첫째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비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가 세상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 스스로가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 "거룩하게 하다"는 거룩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을 뜻한다. 예언자 에스겔은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38:23)

 

2. 여신상은 성경적 하나님 상에 배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아니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여성적 비유는 있으나 여신은 없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의 모성적 성품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rahamim)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히브리어 단어 '라하임(rahamim)은 본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 하나님의 자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모태는 어머니와 아기의 긴밀한 연결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육체에서 빌려온 이 상징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품고 있는 그분의 마음을 깊이 이해시켜 주는 선물이다.

 

여신(goddess)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교회의 주변에 많았다. 여신들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상징은 성경의 하나님상(像)에 배치(背馳)된다. 여신들은 범신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다. 이런 사고에서는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처럼 세상과 사물과 인간은 존재의 태(胎)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기도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주권성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은 여신들을 배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피조물에 대한 초월적인 주권을 나타낼 수 있었다. 신구약 성경에서 "모성애"라는 표현은 상징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나 "어머니"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호칭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여신(a female diety)이라는 단어는 없다.

 

 

3.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이 청원 기도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신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구약성경에 신의 이름이 직접 언급될 경우는 주로 야웨(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웨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등장한다. 성경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출애굽 사건 이전까지 고대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엘(El)이라는 최고신을 섬기고 있었으며 그 신의 이름이 '엘로힘'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에는 '엘 샤다이'(El Shaddai·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출 6:3), '엘 엘리욘'(El Elyon·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19), '엘 로이'(El Roi·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등 '엘'에 대한 다양한 호칭이 나온다. 이처럼 엘로힘은 야웨라는 이름(神名)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엘 신을 폐기하고 야웨 신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엘이 야웨 안으로 통전적으로 교체되었던 것이다. 야웨라는 이름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Elohim)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Yahweh)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a) 모세는 그의 민족을 구출하러 그를 이집트로 보내시는 하나님에게 이름을 묻는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יהוה , Yahweh, Jehovah, YHWH)시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탁월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이름, 하나님의 고유명사, 또는 4자음의 이름 즉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4자음 YHWH를 말한다) 등으로 불렀다. 히브리 구약성경을 전수한 유대 맛소라 학자들은 성경을 베껴 쓸 때에 이 거룩하고 신성한 이름을 나타내는 네 자음을 그대로 쓰기는 했지만 그것을 발음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 네 글자의 하나님 이름(YHWH)이 나올 때마다 그냥 '주' 또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모음 부호인 '아도나이'(אֲדֹנָי, adonai)를 발음했을 뿐이다. 19세기 히브리어 학자 게제니우스는 "아도나이"(Adonai, 주)와 "엘로힘"(Elohim,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대체하는 모음자는 이러한 대체 발음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마소라 본문에 의해 삽입되었다고 선언하였고 이러한 추측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H. W. F. Gesenius, Gesenius's Hebrew-Chaldee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9[1847]), 337)

 

오늘날 개역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은 본래의 자음들과 대체모음들의 혼합물이다. 70인경(the LXX)은 모세오경을 번역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발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주'(主)라는 뜻의 '퀴리오스'(ὁ Κύριος, kyrios)로 번역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야웨(여호와)로서 모양도 없고, 신화가 없고, 성(性)이 없는 인격적인 존재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 동사 '하야'(hayah) 동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동사의 본래적 의미는 떨어지다(fall), 생기다(befall), 되다(become), 생존하다(be, exist) 등이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과거부터 시작해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즉 과거 언젠가 다른 신으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며 결코 창조된 적이 없는 하나님을 의미한다(출 3:14). 이 이름을 이사야서에는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고 했으며, 신약성경에서도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자"로 소개하고 있다(계 1:8).

 

4. 하나님 이름을 헛되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신명기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목적으로 또는 남을 속일 목적으로 또는 농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욕설로 사용하는 것도 이 계명에 걸린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며 우리 삶과 생각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감찰하시며 현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시 139:1-5)

 

5.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윤리와 도덕을 도외시한 사업 번영이나 출세의 길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게한다.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하려고 할 때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욕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에서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저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것이 선행이요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주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 우리의 말이 소박하고 품위가 있어야하고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서 성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같이 권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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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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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主祈禱文, Lord's prayer)이란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이라고 하면 '주님이 하시는 기도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니,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방법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눅11:2-4)과 산상수훈의 일부(마6:9-12)에서

이 기도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사도신경과 함께 초대교회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 주기도문 전문(全文)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주기도문 해석(解釋) *

 

이 기도는 7가지 희망으로 이루어졌는데, 앞의 3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뒤의 4가지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이렇게 기도하라'라는 것은 똑같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나'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신앙 공동체)의 기도이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은 장소의 의미가 아니라,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증거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요14:20)

저 밖의 하늘 꼭대기 어디가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아버지'와 구별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모든 성도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약속(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께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도하면 된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을 위하여 먼저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름'이란 '하나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존재, 위엄, 권세, 속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신다(계4:11).

 

3. 나라이 임하옵시며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으로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것은 나의 삶이 주님의 다스림의 영역에서 통치 받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순간,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내 안에 와 계신다(마12:28;눅17:21).

 

4.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과(요6:40)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살전4;3).

나아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하늘에는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5.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복음)으로 거듭나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이다.

나아가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나라를 의미한다.

 

6.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오늘날'이라고 한정한 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란 먹을 양식만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기를 요구하신다(마6:34).

사실 우리는 하루(오늘)의 생명을 하나님께로 허락 받았을 뿐이다.

 

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성도들이 다른 형제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마18:21,22).

하나님께 대한 죄의 결과는 영원한 멸망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으면 나는 하나님의 용서의 통로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마6:14,15).

 

8.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때때로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그들은 연약해져서 다시 정욕을 좇아 살 때가 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짓는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는 것을 말한다(요일1:9).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이란 사단이 우리 마음 속에 좋지 못한 생각을 갖게 하여 넘어지게 하는 내부적인 유혹을 의미이다(마13:22).

따라서 죄의 본성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의 연약함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10.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고통을 주는 외적인 사단의 공격을 의미이다(눅6:45).

따라서 예기하지 못한 사고나 악의 활동에서 지켜 달라는 기도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0-17).

 

11. (대개)

'왜냐하면'이란 뜻으로 기도를 하는 이유를 드러내고자 하는 말이다.

"대개"라는 말은 원래 "이는.... 때문입니다"라고 번역을 하면 가장 원문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 말이 "대개"로 번역이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0년대에 우리말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에는 한문성경을 참조해서 번역을 했다.

중국어 번역본에서 초기엔 헬라어 ‘호티’를 ‘大槪", 大蓋’로 번역을 했는데,

우리 말 성경에서 이를 참조해서 번역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최근의 중국 성경은 이 말이 옳지 않다고 해서 ‘以’, 또는 ‘因爲’로 개역을 하여 그 뜻을 바로 잡았다.

 

12.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나라'는 주권을 말한다.

모든 주권은 우리 아버지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통치자를 세우신 왕 중의 왕이다.

'권세'는 능력과 힘을 말한다. 모든 능력과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13.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세상의 권세와 나라는 일시적이다.

그들은 일어났다가 또 즉시 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14.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를 의미한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신앙의 목적을 확인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바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께 있다는 것이다.

 

덧붙임

1. '주기도문'을 속사포 같이 빠르게 암송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말씀 하나 하나를 묵상하며, 기도해야 한다.

2. '주기도문'을 예배의 마침 기도로 오인하는 것은 잘못이다.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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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s Prayer. (주기도문)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The Apostles Creed (사도신경)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He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the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christian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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