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을 말하다 ( The Lord's Prayer )
주기도문, 익숙한 데서 벗어나라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처럼 기도를 가르친 위대한 스승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도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산상수훈의 골간을 이루는 주기도문(마 6:9-13)을 최고의 본보기로 삼아 거기서 무얼 믿고 훈련할지 뽑아냈다. 루터의 고전적인 편지들도 그렇지만 칼뱅의 [기독교 강요] 역시 예수님이 본보기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한 줄 한 줄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관련된 지면(제20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적인 주석과 해석학적인 저작들뿐 아니라,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글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적어도 한 군데씩은 적잖은 분량을 배정해 주기도문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부터 이 위대한 스승들의 사상을 통해 주기도문을 살피면서 기도라는 주제에 관한 그들의 지혜를 온전히 끌어내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깊이를 더듬어 보려고 한다.
주기도문 속에 길이 있다
인류 역사상 주기도문만큼 자주 되풀이되며 입에 오르는 성경 구절이 또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기도의 곳간을 여는 열쇠로 이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자원이 방치되다시피 하는 데는 지극히 익숙하다는 사실도 한몫하는 듯하다.
당신이 난생처음 철길 옆에 사는 지인을 찾아갔다고 생각해 보자.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기차가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온다. 앉은 자리를 고작 몇 미터 상관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일어나며 소리친다. "저게 도대체 뭐지?" 하지만 주인인 친구는 되묻는다. "뭐가 뭐야?" 다급하게 대꾸한다. "저 소리 말일세! 난 뭐가 벽을 뚫고 둘어오는 줄 알았어!" 친구는 그제야 태평스럽게 설명한다. "아, 저거? 그냥 기차야. 난 이제 익숙해져서 가는지 오는지 신경도 안 써." 상대는 말문이 막힌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은 신령한 체험을 갈구한다. 예수님은 몇 마디 말을 주셔서 그 도구를 삼게 하신다. 이를테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이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 아버지와 날마다 마주 앉아 그분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놓고 그분이 귀 기울여 듣고 사랑해 주시는 경험을 하고 싶은가?" 우리로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환영이다. "예!"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주기도문 속에 모두 들어 있단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라는 듯 반문한다. "어디 ... 들어 있다고요?" 너무나 익숙해서 거기엔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 안에 다 있다. 어떻게 하면 '익숙함'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성찰하고 훈련하면서 주기도문의 깊이를 가늠해 왔던 이 위대한 세 스승의 말을 유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을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는 부르는 말이고, 사실상 간구는 아니다. 칼뱅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행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입양되지 않는 한, 누가 감히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루터도 이 구절은 곧장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도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처지를 되새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된 위치를 자각하려는 부름말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 그분을 아버지로 여기고 또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평안해 하는 믿음을 마음에 심어 주시길" 구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칼뱅 역시 "주님은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모든 불신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말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현대인들로서는 첫 번째 간구를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거룩히 여김을 받다'라는 동사가 요즘 흔히 쓰이는 말이 아니며 세속화된 사회에서 '거룩'이란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다. 루터가 지적했듯 논리적인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는 건 도대체 무얼 기도한다는 얘긴가? 주님의 이름이야 이미 거룩하지 않은가?" 루터는 곧바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항상 거룩한 건 아니다"라는 답을 달았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지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열방 가운데서 영화롭게 되시기를" 소원하는 어거스틴 기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루터는 또 다른 의미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온 세상 방방곡곡에 두루 퍼지며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전반적인 기조를 같이하면서 내면 깊숙이 새기고 있던 생각 하나를 덧붙였다. "은혜를 짓밟는 행위로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다면, 그만큼 가당찮은 짓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주께 배은망덕하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면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며 경배할 리가 없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어거스틴은 한사코 눈을 뜨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사방이 암흑 천지인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세상을 통치하시지만 그분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인간은 창조주를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마땅이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두고 섬기면 영적, 심리적, 문화적, 심지어 물질적인 문제들이 줄을 잇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칼뱅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데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정욕을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각들을 빚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주권'과 관련한 간구다.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이는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게 하시고, 명령하신 것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루터는 여기에 외면적이고 미래적인 관점을 덧댔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날 뿐이지만,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실현될 것이다. 온갖 고통과 상처, 가난과 죽음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는 미래의 삶을 갈망하는" 간구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세 번째 간구의 의미를 더없이 생생하고 솔직하게 설명한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했다.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 이처럼 담대하게 말하기엔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주기도문 첫 구절이 갖는 중요성만큼은 또렷이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슴 깊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감히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십상이다. 네 살배기 아이는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해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갖가지 금지 명령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저 믿고 따를 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고 의지할 때만 인내하고 감사하며 어려움을 견딜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더러 하나님이 정말 믿을 만한 분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 누구도 마주한 적이 없는 지독히 참담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기도문의 이 부분을 고백하셨다는 사실이 답이 될 수 있겠다. 주님은 스스로의 욕구를 좇는 대신 아버지의 뜻에 따랐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예수님은 그가 해 주신 일보다 더 힘든 일을 하라고 물어보시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어거스틴의 뒤를 이은 루터는 이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앉아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 복수하려 들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인신공격과 중상모략, 뒤에서 몰래 하는 험담 ...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저주 따위를 피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지 못한다면 한줌의 평화조차도 느낄 수 없다. 인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조작하며,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일을 몰아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통제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기에 칼뱅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건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주기도문 앞쪽 세 구절에 담긴 간구를 살펴보았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뱅은 하나같이 위치, 즉 이 세 가지 기원이 초반에 배치된 사실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했다. 기도의 도입부는 모두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스로의 필요나 문젯거리가 기도를 지배하게 두면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이 온 천지에 드러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길 갈망하며, 온전히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염원하는 걸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이러한 진리를 함축해서 아름답게 표현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주님의 뜻을 향해 굽어지니,
완전히 들어맞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찬양과 감사(하나님 중심)가 우선이다. 시선이 자신을 향하여 시야를 왜곡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기도는 절반을 넘긴 셈이고 시각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쪽으로 바로잡히고 명쾌해졌으니, 이제 우리와 세상의 필요를 향해 흐름을 바꿔도 좋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초반에 하나님을 참다운 양식이요, 재산이요, 행복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세 가지 간구를 드렸다. 이제 필요를 채워 주시길 구하는 '기도 제목'을 새로 짜인 마음의 틀에 맞춰 정리하신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어거스틴은 온전한 기도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도 말고, 너무 부유해서 주님을 잊어버리지도 않게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잠언 30장 8절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크리스천들은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며 필요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먼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이 기도에 사회적이 차원을 더했다. 누구나 빠짐없이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하고, 취업률이 높아져야 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루터는 불의한 짓을 하는 이들을 향해 여기에 내재된 능력을 역설하며 음울한 경고를 보낸다. "교회가 중보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려 주고 ... 주기도문의 이 기도에서 배제당하지 않도록 조심시켜야 한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다섯 번째 간구는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적으로 죄와 용서의 문제를 두고 치열한 씨름을 벌인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누구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남들을 멸시하는 이가 있으면 ... 이 간구와 마주서서 자신을 살피게 하라. 자신이 남보다 나을 게 없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높이 낮은 문을 지나 용서의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아울러 루터는 이 간구를 교만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실상에 대한 검증으로 규정했다. 회개나 고백하는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며 ... 복음에서 확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꼬박꼬박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데도 삶 가운데 확신과 기쁨이 점점 커지지 않는다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직결시켜 판단하신다. 이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스로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상대를 용서하거나 편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뿐만 아니라,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칼뱅은 그런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마음에 미워하는 감정을 계속 붙들고 있다면, 앙갚음할 궁리를 하거나 어떻게든 해코지할 기회를 골똘히 찾고 있다면, 더 나아가 원수처럼 여기는 상대가 보여 준 호의에 보답해서 거기에 어울리는 온갖 배려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이 기도를 드려 봐야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꼴이 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중요한 구분을 지었다.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가선 안 된다는 기도다." 실험하고 검증한다는 의미의 시험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성경은 고난과 환난을 심령의 숱한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서' 더 건강한 자기 인식과 겸손, 참을성과 믿음, 사랑을 갖게 하는 도가니로 풀이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칼뱅은 '오른편'과 '왼편', 두 범주로 나누어 시험을 열거한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 권력, 명예' 따위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몰아가는 유혹이다.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가난, 수치, 멸시, 고통'처럼 절망하게 하고, 소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고, 분노에 차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시험이다. 번영과 역경이 모두 쓰라린 시함이 될 수 있으며 제각기 주님을 향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나 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에 집중하며 살도록 유혹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칼뱅은 이 구절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와 한데 묶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간구로 취급했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루터는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내면에 잔존하는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청하는 게 여섯 번째 간구라면, 일곱 째는 외부의 악,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지막으로 마무리 찬양에 해당하는 구절이 남았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어거스틴은 이 부분을 언급조차 않는다. 초기 성경 문서나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에 칼뱅은 "라틴어 판에 없는" 문절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두는 게 지극히 타당하므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천은 결핍과 역경, 한계 따위에 깊이 들어갔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온전히 채워 주신다는 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베풀어 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소서, 우리를!"
칼뱅이 주기도문 해설을 마무리하며 결론은 참으로 유익하다. 루터가 [단순한 기도방법(A Simple Way to Prayer)]에서 그랬던 것처럼, 칼뱅 역시 주기도문을 대하는 크리스천은 어구의 특정한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내용과 기본적인 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판박이처럼 똑같은 단어를 동원해 기록하지 않았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강조점과 주제, 목적과 정신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요약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도에 사용되는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기도를 드리든 끝없이 갈고 다듬어 그 안에 주기도문을 새겨 넣어야 한다. 자유롭게 간구하는 기도로 가기 전에, 루터가 했던 것처럼 하루에 두 번씩, 주기도문을 자기 식으로 바꿔 기도하는 연습은 더없이 유용한 도구다.
주님이 이 기도문을 복수형으로 주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공개적이어서 ...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 사이의 교제가 깊어지게 해야 한다." 미국의 신학자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은 "공적인 사역이 개인의 경건을 빚어 갈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칼뱅의 지적을 부각시킨다. 칼뱅은 기독교회의 공동 예배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의 틀을 단단히 잡아 주길 바랐으므로 공중기도와 성례전을 규정하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오롯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함께 모여 예배든 비공식적인 자리든, 힘닿는 데까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대화를 이어가는 데 기도의 본질이 있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게 그 목적이라면 공동체 안에서 여럿이 어울려 간구하는 형태가 가장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C. S. 루이스는 개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가 모여 이룬 공동체를 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스스로의 교우 관계를 되짚어 보면, 한 친구가 가진 인성의 일부 면모는 다른 벗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잘 알 수 있었을 첫 번째 친구의 일면을 놓쳐 버린다. "혼자 힘으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의 전모를 드러내려면 나 외에 또 다른 빛들이 필요하다." 평범한 한 인간을 알아 가는 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면, 수많은 이웃들은 물론 예수님을 알아 가는 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료들과 더불어 기도하면, 예전엔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다양한 풍모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루이스는 이사야 6장에서 천사들이 서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 외쳤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제각기 한 면씩 목격하고 동료들과 공유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게 집단적이고 누적 가중되는 일이라면, 기도와 찬양 역시 공동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양식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팀켈러의 기도'에서 발췌(158-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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