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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종교개혁자들
 
 

<16-17세기>

1. J. Calvin(1509~1564)

- 1536~1559 <기독교강요>: 1권)신론, 2권)기독론, 3권)성령론, 4권)교회론

- 1537 <기독교신앙안내>, 1542 <제네바교회문답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성경전체를 주석했다.

- 칼빈의 신학사상은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재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사도신경)의 기초 위에 있는 어거스틴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단,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유일무오, 예정,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타락, 신앙칭의, 구원의 단계, 교회제도 등은 칼빈만의 독특한 교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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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 Beza(1519~1605)

- 제네바아카데미 초대원장이자 칼빈의 후계자로서 칼빈 이후 40년간 제네바의 정통신앙의 입장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했고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 1570 <신앙고백>, 1575 <기독교의문답서>외 100여 편의 저술 및 논문(예정론도표)

 

3. J. Knox(1513~1572)

-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540년에 목사 안수 받음. 칼빈을 만나기 전부터 개혁주의적 신앙과 사상을 견지함. 1554년~1567년까지 스위스로 망명생활.

- 1555년 제네바에서 피난민교회를 담임하면서 칼빈을 만나 제네바아카데미에서 수학.

- 1560년 스코틀랜드의회가 낙스와 윌로크 등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고 낙스가 세운 개혁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함. 이후 스코틀랜드는 로마카톨릭주의를 버리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국교로 정함.

- 1561년 <권징서>에서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과 교회의 직제를 규정하여 장로교회의 기틀을 쌓았다.

 

4. Zanchius(1516~1590)

- 이탈리아 알차노 태생.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학. 1551년 제네바레 9개월간 체류하며 칼빈의 설교와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크대학(1553-1556),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1568-1577)로 재직.

- 1566 <혼합>에서 개혀파적 관점에서의 기독론과 성만찬론, 성도의 견인론을 저술하고, 1572년 <삼위일체의 엘로힘>과 <하나님의 본성>에서 칼케돈신조의 정통신앙적 입장을 철저하게 논술했고, 1591 <영적 교통>에서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루터파의 개념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인성의 유한성을 주장.

- 그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즉 개혁파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해설하고 변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스콜라철학의 작품들을 활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려고 했고, 토마스주의와 칼빈주의를 조화시키는제 노력했다.

 

5. Polanus(1561~1610)

- 개혁파신학의 초기 형성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베자와 도르트회의의 진행과정에서 논의된 정통 개혁파의 신앙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교리적 사ㅓㄹ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예정론의 논문과 로마서 주석을 썼다.

- 그의 <기독교 신학통론,1609>은 개혁파 신앙에 대한 광범위한 변증서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파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했다. 그는 인간의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행위 계약에 관해 최초로 거론한 인물로서 계약신학(Feteral Theology)의 기초가 되었다.

 

6. Gomarus(1563~1641)

- 스페인 태생의 개혁파 목사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 조직신학 교수,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수 역임

- 1618년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하고 칼빈주의를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신학은 베자와 플란키우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타락전 선택설과 이중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로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며 '당신의 말씀은 빛입니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7. Wollebius(1568~1629)

- 독일 태생의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 바젤에서 폴라누스의 문하생으로 신학공부. 1611년 목사 안수(43세). 1518년 바젤에서 구약 강의.

- 1626년 <기독교신학개론> 저술로 일약 유명세. 이 책은 기독론이 특징이며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교리에 관한 정확한 해설을 했다. 그는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했다.

 

8. Voetius(1588-1676)

-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수학. 평생 아르미니우스와 논쟁하고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를 정죄했다.

- 1648-1669년 <신학논쟁전집>, 1663년 <교회정치>, 1664년 <수도 또는 경건의 연습>을 저술했다.

 

9. Turretini(1623~1687)

- 제네바의 목회자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폴리안더와 부티우스에게서 수학.

- 대표적인 저서는 <논쟁신학강요, 1670-1685>이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법을 채용하여 개혁파신학을 체계적으로 진술했다. 이 책은 1812년부터 1871년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될 때까지 약 100년간 프린스턴대학의 교과서로 체택되어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0. John Owen(1616~1683)

-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 1654년 논문 '성도의 견인'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비판했고, 1657년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674년 <성령론>에서 개혁파신학의 입장을 증명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여 성령의 내주를 각인시켰다.

 

<18세기>

 

11. Jonathan Edwards(1703~1758)

- 13세 이전에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터득하고 철학 관련 논문을 쓴 천재. 1720년 예일대 졸업, 1722년 대학원 수료한 후 26년까지 모교에서 강의하고, 1726부터 50년까지 메사추세츠의 노샘톤의 회중교회에서 목회. 휫필드의 영향을 받아 대각성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1758년 프린스톤대학의 총장에 취임한지 한 달 만에 천연두 접종의 후유증으로 사망.

- 그는 칼빈주의 정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철학자로서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수호자요 18세기 미국 개혁주의의 중심이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차단키 위해 <원죄론>을, 지나친 부흥운동의 열정을 경계키 위해 <종교적 정서>를 저술했고 그는 19세기의 노예폐지, 선교주의, 윤리적 개혁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활약으로 국교회가 비국교회가 되었다.

- 그의 후계자들, 조셉 벨라미, 사무엘 홉킨스, 조나단 에드워즈 2세, 에몬슨, 테일러 등이 뉴잉글랜드 신학파를 형성했다. 위필드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를 변호한 것이 100년 동안 미국 땅에 알미니우스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평가했다.

 

<19-20세기>

- 미국의 정통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은 장로교회와 화란 개혁파의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구)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역할로 말미암아 계승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12년 개설된 프린스톤신학이 오염되자 메이첸, 반틸, 머레이 등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 따로 칼빈주의 신학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정통신학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2. Alexander(1772~1851)

-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턴)의 위더스푼(1723-1794)과 윌리엄 그라함(1746-1799)에게서 수학한 미국 북 장로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로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의 대가이다. 아쉬벨 그린, 사무엘 밀러와 함께 프린스턴 설립자 중의 한 사람으로 교수 취임식 설교에서 '성경을 찾으라'고 역설하여 큰 감흥을 일으켰고, 이후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등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 그는 이신론에 대항하여 참된 지식은 이성과 종교적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고, 성경영감론을 성령의 감독과 성령의 암시, 성령의 상승으로 구분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증명키 위해 객관적인 외적 기준을 찾는 한편 종교적 체험과 성경의 내적 증거를 정립하는데 주력했다. 저서로 <기독교의 내적 증거, 1825>, <종교적 경험론, 1841>, <인생의 본질>이 있다.

 

13. C. Hodge(1797~1878)

- 투레틴의 영향을 받았고 알렉산더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이자 스콜라적 칼빈주의자로서 19세기 프린스톤신학교의 지도적인 신학자였으며 그의 조직신학 전3권(1871-1873)은 투레틴의 <논쟁신학요강>에 이어 프린스턴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시대적으로 진화론과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훼손될 무렵, 성경의 초자연적 축자영감과 무오를 주장하여 정통적 칼빈주의를 수호했다.

- 저서로는 <로마서주석, 1835>, <미합중국장로교회 조직의 역사,1840>, <생명의 길,1841>, <다윈주의란?,1873> 등이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단연 <조직신학 전3권>이다.

- 그의 아들 에이 하지는 1877년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으며, 부친이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신학내용을 문답식으로 간결하게 편찬한 <신학개요,1879>는 불후의 교리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 1881년 워필드와 공동으로 <장로교회 평론>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성경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분명히 선포하여 성경무오설을 지키는 보수주의 장로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4. Thornwell(1813~1862)

- 19세기 남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를 들자면 돈웰, 댑니, 지라르데우(1825~1898, 콜럼비아대 교수)를 꼽는다. 돈웰은 사우스 캐롤라니나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와 앤도버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35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1847년 35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미국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으며, 1861년 장로교회가 남과 북의 총회로 분리될 때 남장로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1873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가 되어 1855년까지 윤리학을 가르쳤다. 이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실천신학과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보편실재론적 사고방식을 사회와 자연을 하나의 통일적 세계로 이해하는데 적용하였다. 그는 자연의 성장 발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개혁도 하나님 뜻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신자 개개인은 이에 적합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 그의 신학체계는 지라르데우가 완성했고 지라르데우의 조직신학은 콜럼비아대의 신학교재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설립한 사무엘 피터 풀톤(Fulton, 1865~1938)이 그의 문하생이며, 풀몬의 제자가 일본 개혁하신학자의 대표자인 오카다 미노루(1902~1992)이다.

 

15. Dabney(1820~1898)

- 남 장로교회의 목사, 신학자, 정치가, 사회평론가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고 모교에서 교회사와 교회정치를 강의했다. 그는 인본주의적 알미니안주의를 강도높게 비판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을 그의 신학적 방법론으로 채용했다. 저서로는 <19세기 감각주의 철학>, <조직신학, 1878>이 있다. 이 책은 887족 분량에 7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73장의 '국가의 위정자론'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하여 주목을 받았다. 유니온신학교는 그의 조직신학을 신학교재로 사용했다.

 

16. B. Warfield(1851~1921)

- 프린스톤에서 찰스 핫지에게 수학하고 라이프치히대학에서 2년간 유학(1876-77)한 다음 웨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으면서 디다케연구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이후 프린스턴에서 스승의 후임이 되어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성경의 외적 증거(학문적 논증)과 내적 증거(주관적 체험의 요소)를 다같이 중요하게 여겼고, 당시 미국에서 성행하던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고등비평적 연구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며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영감성과 무오성을 확증하여 강력하게 변증했다. 그는 유니온신학교의 자유주의신학자인 Briggs, Smiths등과 오앳동안 논쟁했다. 그는 칼빈의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원죄, 제한적 속죄를 주장했다. 특히 장로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수정논의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고 신앙고백서를 함부로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하여 그 논의를 중단시킨 바 있다. 약 100권의 저서를 남겼다.

 

17. A. Kuyper(1837~1920)

- 바빙크와 함께 화란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1880년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 추임강연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영역주권의 원리를 제창하여 유명한 '일반은총론'이라는 이론을 생성했다. 일반은총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영역임을 말하고,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적 부패에 대하여 섭리적으로 어느 정도 억제케 하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지속되게 하셨다고 주장했다.

- 카이퍼는 루터의 출발점을 인간론적 이신칭의에 있다고 보았으며, 칼빈 사상의 출발점은 포괄적이며 보편적이며 우주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칼빈의 세계관적 입장에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인각관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이 동등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특히 그의 <성령론,1900>에서 제1은총과 제2은총을 논했는데, 제1은총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제2은총은 성령을 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23권의 저술을 남겼다.

 

18. H. Barvink(1854~1921)

- 카이퍼의 후계자. 화란개혁파신학교의 교의학 교수. 1904년 자유대학의 총장 취임하고 1908년 프린스턴대 초청강연에서 '계시철학'을 발표.

- 그의 신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튼튼한 성경신학의 기초 위에서 역사신학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밖의 신학체계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개혁파신학 자체의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새롭게 정리하고 체계화하려는 종합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개혁신학 내의 이견으로 양립되었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경우 다 같이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어느 쪽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예정에는 선후가 없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인간의 영혼의 기원관에 있어서 창조설과 유전설의 문제도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또 성경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성경 저자들의 인격 뿐만 아니라 문자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과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사실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 그는 정치와 교육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으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으며 대표적 저술로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 <개혁파 교의학 전 4권>이 있다.

 

19. G. Vos(1862~1949)

- 화란 태생의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 프린스턴에서 신학교수 역임.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에 진학하여 모세오경을 연구한 다음, 독일 베를린대학과 스트라스부루그대학에서 유학하고, 1888년 귀국하여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 주경신학 교수를 역임했고, 1893부터 프린스톤에서 성경신학 교수로 생을 마쳤다.

-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903>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예언된 사실을 실현시킨 분이임을 상기시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계시 사이에 역사적 통일성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범위와 중생된 인간의 모습에서 찾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가 아니면 참된 인간의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로서의 하나님나라'(the kingdom as the church)를 주창했다. 또 <예수님의 자기계시, the self-disclosure of Jesus, 1926>에서는 정통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 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치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중보자의 다양한 명칭들을 구약적 맥랙에서 주석하였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의 죽음에 대해 메시야적인 해석을 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역에 있어서 메시야로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종말론,1930>에서는 바울의 종말관을 구원관과 연관지어 검증을 시도했다. 그는 바울의 종말관이 바울사상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했다.

- 보스는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에 대한 포괄적이며 정통적인 개혁파 성경신학을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즉 보스 이전까지 개혁파 신학은 특별계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성경적 이해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이에 보스는 <성경신학-구약과 신약, 1948>을 출판하여 보수주의 개혁파 성경신학을 완성시켰다. 그는 여기서 구원사적인 방법에 의한 성경신학적 구조를 고안하여 발전시켰는데 성경의 계시사상과 예언사상은 구약과 신약을 일관하여 통일적으로 유기적인 관점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또 기존의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된 네 분류의 신학범주를, 주경신학을 단순히 성경을 주석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신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봄으로서 주경과 성경신학을 따로 분류하게 되었다.

 

 

20. G. Machen(1881~1937)

- 존스 홉키스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하지, 패톤, 워필드에게서 수학한 다음, 독일 마르부르그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요한네스 바이스, 빌헬름 헤르만, 부셋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수학했다. 이 때 배운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잠시 갈등했지만 암스트롱과 패톤 등의 도움으로 8년 만에 회복했다. 이후 프린스턴에서 1906년부터 1929년까지 신약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점점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적인 방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달아 그 때부터 자유주의의 입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프린스톤 내에 마찰이 생겨 1929년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Oswald Allis, R.D.Wilson, C.Vantil 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 1937년까지 학장 겸 교수로 역임했다.

- 그는 개교강연을 통해 두 가지를 분명히 강조했다. 첫째,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책으로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둘째, 프린스턴은 이제 더 이상 복음주의의 입장이 아니므로 이제 웨스트민스터가 그 권위를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 그의 신학사상은 기독교 변증론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해설하는 일과 기곡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저서로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 바울종교의 기원, 1925>, <기독교 인간관, 1965>, <동정녀탄생,1967>등이 있다.

 

21. C. Van Til(1895~198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변증신학자이다. 프린스턴에서 보스, 카스팔 핫지, 윌슨, 오스왈드 알리스, 메이첸 등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8년에 프린스턴에서 변증학을 강의하다가 사임하고 메이첸과 함께 WM에서 변증학을 가르치다가 생을 마감했다.

- 그는 전제론적 방법이라는 새로운 변증학적 방법론을 체계화했다. 기존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합리적인 논증으로 불신자들을 설득하여 기독교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다른 사상에서 증거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나, 밴틸은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인간은 하나님께 반응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이미 영감된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경 이외의 어떤 인간의 사상에서 기독교진리를 변증하기 위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지나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에서 논증과 논거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밴틸은 철저하게 성경적 기독교 진리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저서에 'In Defence of the Faith'(신앙의 방어에 있어서)라는 표제를 달았다. 그이 제자인 William White는 밴틸을 소개하는 책자에 '신앙의 방어자 밴틸'이라고 소개해 화제를 낳았다. 밴틸의 저서 <조직신학 서론>, <변증학>, <험증학>, <신앙의 방어>, <기독교 인식론>, <칼빈주의의 변호>, <복음의 지적 도전>, <신근대주의> 등은 오늘날 개혁파 신학의 주요한 지침서가 되어 있다.

 

22. L. Berkhof(1873~195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목사로서 20세기 초 신정통주의와 지유주의 신학의 조류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위대한 신학자이다. 칼빈신학교에서 보스와 뵈커 하에서 수학했고, 1902-1904까지 프린스턴에서 워필드와 보스 등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이후 칼빈신학교에서 1906년부터 14년까지 신구약을 가르쳤고, 1937년에 <성경해석의 원리>를 집필했다. 다시 1928년부터 44년까지 칼빈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 그는 많은 경우 헤르만 바빙크의 영향을 받았다. 바빙크의 용어와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복사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직신학, 1941, 58, 60, 63>은 칼빈, 풀러, 루이즈빌, 남침례신학, 고든, 웨스턴, 밥 존스, 무디신학교 등에서 교과서가 되었고, 한국은 신복윤 박사에 의해 1958년 <기독교신학개론>으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교들의 교과서로체택되고 있다. 한편 신복윤 박사는 벌콥의 <기독교교리사,1937>를 1979년에 번역하기도 했다.

- 그는 무엇보다 체계있는 조직신학을 설립한 공로가 크다. 수많은 자료를 이해하고 그 주요한 내용들을 잘 분류하여 함축된 형태로 재생시키는 능력을 가진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이 대표적 저서인 <조직신학>은 분명하고, 간결하고 조리있게 저술되었으며 천성적으로 논쟁을 싫어하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실천했다. 그의 이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투레틴의 <논증신학강요>과 함께 개혁파신학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23. Jhon Murray(1898~1975)

-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개혁파 목사이며 신학자. 1923년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핫지, 윌슨, 보스, 메이첸 등에게서 수학했다. 당시 미국의 사정은 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치면서 '성경의 완전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의 다섯 가지를 부인하는 이른바 "오번확인서(1924)"가 출현했는데, 여기에 장로교 목사 1,292명이 찬성하는 서명을 했고, 급기야 프린스턴은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지로 개편되고 말았다. 그는 메이첸, 밴틸 등과 함께 프린스턴을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하고 1966년 은퇴할 때까지 강의했다. 이 때 그의 동료인 R.B.Kuiper, B.Stonehouse, Paul Wooly, Allan MacRae 등이 함께 가세했다.

- 그의 일관된 신학적 특색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경건함과 진지한 태도로 성경 원문을 정밀하게 해석함을 근거로 하여 신학적 연구를 더하면서 조직신학적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는 보스의 영향을 받아 주경신학에서의 성경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구원론,1955>과 <로마서 주석,1959>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을 죄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논술하고 있다. 이외 <칼빈의 창조교리,1954>와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칼빈의 견해,1960>를 발표했다.

 

24. 박형룡(1897~1978)

- 프린스톤에서 메이첸과 보스 등에게서 수학하고 평양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현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며 한국의 정통 칼빈주의의 확립에 공한한 신학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교리와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영감교리를 주장했다. 저서로는 <교의신학 전7권>외 14권의 주요 저서들과 100여 편의 주요 논문이 있다.

 

25. 박윤선(1905~1988)

- 웨스트민스터에서 메이첸, 밴틸, 에드워드 영 등으로부터 언어학과 변증학을 배우고, 화란 자유대학에서 신약학을 연구했으며, 고려신학교를 설립했으며, 총신대와 합동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인 최초의 주석집인 <신구약성경 주석>과 <성경신학>, <교회헌법주석>외 250여 편의 논문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칼빈주의 정통 보수주의 주경신학을 확립하고 계승함에 있어서 혁혁한 공헌을 한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26. 오카다 미노루(1902~1992)

-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사무엘 풀튼에게서 신학을 수업받은 후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 특히 워필드로부터 영향을 받음. 일본 코베개혁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일생을 헌신하며 일본의 개혁파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개혁파교리학교본,1969>이 있다.

 

27. 최순직(1923~1999)

- 평양신학교를 거쳐 총회신학에서 박형룡으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운 후 코베신학에서 오카다 미노루에게서 수학하고 탈봇에서 공부했다. 특히 미노루 교수의 신학을 그대로 전수했다. 대한신학교(현 대신대학원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기독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 <6일의 신학-기독교 노동론>, <플러스의 인생>, <크리스찬의 생활규준-복음 하의 율법>이 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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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1.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서설

 

1) 칼빈은?

1517년 로마 카톨릭에 대한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이란 종교개혁이 있은 후,

칼빈(1509-1564)은 이를 더욱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했다.

 

따라서 ‘루터 없이 칼빈 없고, 칼빈 없이 루터 없다’는 평가가 따르는 것은

“루터는 바위산을 폭파한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깬 바위에 글을 새긴 사람”이란

찬사를 받는다. (Philip Schapp)

 

그의 작품으로는 <기독교 강요>(1536초판과 1559년의 최종판; 평생 보완)

<주석> <설교> <신학논문> <편지> <예배서> <교리문답> 등이 있다.

 

이같은 저술에 나타난 칼빈의 성경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상, 칭의관, 교회관,

성례론, 기도론, 목회원리 등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 웨스트민스

신앙고백, 존 낙스 등에 영향을 끼치고 네덜란드에 최초의 개신교 국가가 세워지며

17세기 교리 지상주의에, 18세기 영성운동에, 19세기 자유주의에 영향을 준다..
 

2) 칼빈주의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1884년 최초로 이 땅에 미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1885년 미북장로 목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목사인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들어왔다.

 

그 후 1890년 평양신학교 마포삼열이 세워지고, 주기철, 이기선, 손양원, 박관준

안이숙 등 시대적 환경에 따른 순교자들이 잇따랐으며,

칼빈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로 박형용, 박윤선, 명신홍 등 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3) 칼빈주의 교리는

⓵ 오직 말씀 (Sola Scriptura)

⓶ 오직 은혜 (Sola Gratia)

⓷ 오직 믿음 (Sola Fide)

⓸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o)

⓹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a Deo Gloria) 이었다.
 

2.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와의 비교
 

1) 신학의 2대 사조

기독교 역사 속에서 논쟁이 되고 정의되어 왔던 어울릴 수 없는 2개의 신학사조가

존재한다. 오늘날은 칼빈주의는 정통, 알미니안 주의는 이단으로 치부되어 있다.

2) 2개 사조의 비교


칼빈주의 5대교리 (TULIP)
 
 
알미니안 주의 5대 교리
 

전적 부패 혹은 전적 무능력

Total Depravity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1)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지. 정. 의

모두가 무력해져 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롬3:10-12, 엡2:1-3)

2) 전적으로 부패하여 무능력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요8:44)

3)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함을 얻을 수 있다.(엡2:4-9)
 
1)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전적 무력해진 것은 아니다.


2) 인간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다.


3)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택할 수 있다.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2. 조건적 선택
 

1)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여하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그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예정되고 결정된다.

 

2)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3)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신 것으로

예정에 따라 구원이 이루어진다.

 
 
1) 인간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셨다.

 

2) 하나님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되며

제약된다.

 

3) 믿음은 오직 인간 의지의 결과이다.

4) 구원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므로 이루어진다.
 

3. 제한 속죄 혹은 특별구속

Limited Atonement
 
3. 일반 속죄 혹은 보편구속


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절대적 예정으로 선택된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다.

2) 그리스도의 속죄는 특별히 택한

자들의 죄를 사하신다.

3)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모든 택한 백성에게 믿음으로

구원함에 이르도록 한다.

(마1:21, 10:5-6, 눅19:10)
 
 

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

2)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이른다.

3)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할 때에 유효하다.

4. 불가항력적 은총 혹은

성령의 효과 있는 부르심

Imesistible Grace
 
4. 성령은 실제로 거스러질 수 있다.
 
1) 인간의 외적 소명은 때때로 거부될

수 있으나, 효과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통해 내적으로 부르시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2)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에 의해

거부되어질 수 없다.


3) 성령은 인간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시키며,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케 한다.


4) 이와 같은 성령의 은총은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이며, 마땅히

순종하기에 이른다.
 
1)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성령의

부르심을 거스릴 수 있다.

2) 성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

그를 중생시킬 수 없다.

3) 우리가 믿음으로 중생이 가능하게

된다.

 
4) 인간의 자유의지는

성령의 구속사역을 제한한다.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5.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1) 하나님에 의해 책정되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때때로 시험에 빠질 수는 있으나, 영원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없다.(한번 구원은 영원구원)

 

2) 성령의 사역은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르도록 하며,

성도는 이와 같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끝까지 인내하게 한다. (딤후4:18)


 
1) 참 믿음을 소유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지 못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

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다.


3) 과연 칼빈주의는 무오한가?

 

칼빈이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곧 예수님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 당시의 선지자들에 의해 쓰여짐으로써

교훈(교리)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에 그 무오성이

인정된다.(딤후3:16)
 

하지만 칼빈주의나 알미니안 주의 등 시대흐름에 따른 신학과 사상은 하나님 말씀을

대신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오늘날에는 하나는 정통이고 또 하나는 이단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는 더욱

위험한 발상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성경에 비추어 진정 성서적 교리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 뜻에 합당한지를, 무엇을 받아들이고 버려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고전1:18),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1:7-8)


3.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한 성서적 고찰

 

1) 제한 속죄와 무조건적 선택---> 예정론과 결부된 논쟁

당시 예수님은 예정에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제한적 속죄론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나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도한 ‘타락 전 예정설’에 대해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요, 계속이요, 마침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자율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일방적으로 선택에 의하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한 존 웨슬리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인하여 비록 어두워지고 약화되어

스스로 선을 택하고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하게 되었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항변하였다.

 

2) 도르트 종교회의-개혁교회의 종교재판이라 칭한다.

1610년 알미니우스를 지지하는 46명의 개혁교회 목사들은 5개 신조를 공인해줄

것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에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은 즉시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3) 성서적 고찰과 사견

 

로마서 8장 말미에 ‘미리 정(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는 어디까지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요 지혜이시며 긍휼하심이다.

 

또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합2:4, 롬1:17

갈3:11, 히10:38) 「믿음에서 난 의」요(롬9:30-32) 선택이기에, 그에 따른 선한

행위가 있음으로 온전해지는 것 아닌가!? (약2:22)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여호와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아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시37:3) (롬12:2) (엡2:10)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극단적인 예정론을 고집하여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은 성도를 견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을(롬9:13)

극단적인 하나님의 선택(예정)이고 유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린 성경을 읽음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기 관점에서 자기를 위해 읽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칼빈의 5대 교리는 하나님 중심의 하나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이고,

알미니안의 5대 사조는 실제 하나님의 예지와 은혜 속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창조주로부터 자유의지를 허락받은 인간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인본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알미니안 주의에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모든 자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대속이고, 이를 믿고 응답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이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4. 결어

 

칼빈의 5대 교리에 대해서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기에 그분께서 자신이 예정하시고, 또한 부르시고,

또한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도 확신한다. (롬8:30)

 

다만 지나친 칼빈주의자들로 자신들만 옳고 정통이며, 나머지는 다 이단이라고

배격하는 것은 현 한국 교회에 은혜와 덕이 되지 못한다.

 

지금도 OOO에 의한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도 피해자들은 농성 중이고

​5대 교리 중 한번구원은 영원구원이라는 무조건적인 구속과 구원 후 죄를 지어도

끝까지 견인해 영광에 이르도록 한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

 

더더욱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타 종교에 본이 되지 못하고,

나만 예수 믿어 천국 가면된다는 이기적 논리는 이제 맘먹고 믿어 보려고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초보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염증을 느끼게 하여

믿음의 뿌리도 내리기 전에 떠나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WCC 등 다원주의에 동참하고 특히나 예수회 학자들의 기독교학계의

침투와 물타기 작전에도 영적 분별력을 키워 철저히 대비하고 척결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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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자유라고 하는 개념과 예정이라는 교리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경륜이 깊어 갈수록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생각하기에는 벅찬 주제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문제를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터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고 한다.
자유(ejleuqeriva, Freedom)라는 말은 매우 흔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면서도 우리가 잘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디까지 자유한 것인지를 밝히 앎으로써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豫定)

예정론은 신학적인 교리로서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 중에는 궁극적인 구원과 인간의 유기(遺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예정 교리는 수많은 복음적 교회들의 신조들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와 국가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예정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나타나 있는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란 전세계 대부분의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에 있어서는 권위 있는 신조(信條)이다. 또한 영국 국교회와 미국의 감독 교회는 39개항의 온건한 칼빈주의 신조(信條)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수많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저서들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회의 처음 3세기 동안에 교부들의 글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주로 미 개발된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이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고 했다. 중세 시대에 안셀름(Anselm)과 롬바르드(Peter Lombard)와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소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랐으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개괄적으로 섭리하고 통치하는 것과 어느 정도 동일시됐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인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Huss)는 엄격한 예정론적 견해들을 주장했다.
개신교 종교 개혁 시대에는 이 예정 교리가 루터(Luther)와 칼빈(Calvin)과 쯔빙글리(Zwingli)와 멜랑크톤(Melanchthon)과 낙스(Knox)와 그 당시의 모든 탁월한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런데, 멜랑크톤은 이후에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고, 그의 지도를 받은 루터 교회는 이 예정 교리를 반대하게 되었다. 루터의 주요한 저서인 [의지의 굴레](The Bondage of the Will)와 [로마서 주석](the Commentary on Romans)에는 루터가 칼빈과 같이 이 예정 교리를 충성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예정 교리를 분명한 논리로써 강조한 사람은 칼빈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 교리는 '칼빈주의'라고 명명되었으며 개혁 신학 체계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교리가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미국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계약파들(the Covenanters)과 불란서의 위그노들(the Huguenots)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근래에 이 예정 교리는 휫필드(Whitefield), 핫지(Hodge), 댑니(Dabney), 커닝햄(Cunningham), 스미드(Smith), 쉐드(Shedd), 스트롱(Strong), 카이퍼(Kuyper), 워필드(Warfield)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이 교리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지극히 거룩하신 계획에 따라 장차 되어질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게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는 것도 아니요, 모든 피조물들의 의지가 강압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제 2인자(因者)들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성립하는 것이다".
예정 교리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유한한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오직 그 뜻의 영원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의 운행을 지시하시며 역사의 진행을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뜻은 영원 불변하고,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미래 모든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foreknowledge)의 근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이나 미래 사건들 자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면, 그 이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결정을 했던 것이 분명하고, 우리의 예지(豫知)는 우리의 결정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뒤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의 예지는 우리의 결정에 근거한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미래를 예지하고 계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예정 교리가 나타나 있는 몇몇 성경의 참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 .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 . .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행4:27, 28), ". . .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2:23)등이다. (행13:48; 롬8:29, 30; 9:11, 12, 23; 고전 2:7; 엡2:10; 시139:16참조)
심지어는 인간의 범죄 행위조차도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범죄 행위도 예견되고 허용되어 정확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통제되고 다스려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못박히심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확히 꼭 필요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행2:23; 4:28)
선택(選擇)교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서, 일반적인 예정 교리를 특별하게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예정의 교리가 죄인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경은 일차적으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자연히 특별한 곳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선택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만 약 48회 나온다. 이 선택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차이점과 공로보다 앞선 것으로서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뉜다. 즉 그 한 부류는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자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사망에 버려지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만한 절대적인 호기(好機)를 가졌지만 그것을 놓쳐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타락의 결과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그릇되어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모든 권한을 상실해 버려서, 모든 타락한 천사들처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인류의 한 부류인 선택받은 자들은 죄와 죄책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거룩함과 축복의 상태에 들어간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파멸된 그들의 이전 상태대로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근거 없는 처벌은 아무 것도 받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지 사람으로 취급하실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로 취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선행(good works)이란 구원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 . "(요15:16)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열매요, 증거이다.
칼빈주의자들 간에도 신적 계획 속에 있는 사건들의 순서에 관하여 서로 다른 몇 가지의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문제점은 이것이니,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피조물들을 그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창조하신 인간들을 모두 동등한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타락 후 선택설 학자들(Infralapsarians)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일부분만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1)창조하시고, (2)타락을 허용하시고, (3)이 타락한 사람들 중의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나머지 타락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시며, (4)선택자들을 위해서 구속주를 예비하시며, (5)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뒤따르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 학자들(supralapsarians)의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1)창조될 인간들 중 일부는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일부는 파멸하기로 선택하시고, (2)창조하시고, (3)타락을 허용하시고, (4)선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5)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앞선다.
그리고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롬9:21). 즉 선택받은 자와 선택 받지 못한 자가 원래는 동일하게 불행에 처한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예정(豫定)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정을 하셨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묻고싶어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폭이 두 사람도 피할 수 없이 좁은 예정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유가 없다면 거기에는 책임도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숙명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협소하고 협착한 예정을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정(豫定) 즉 제한(制限)은 극히 작은 부분이고 인간에게 주신 자유(自由)는 충분(充分)하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치도록 부여받은 자유를 누릴 때에는 그 후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로 인도하는 문은 언제나 좁아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이 협착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우선 보기에 넓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는 자유가 있고 갈수록 넓어지고 자유롭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많이 찾는 그 넓어 보이는 문은 들어갈 때는 넓어 보이나 갈수록 협착해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도 없는 곳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에는 막힌 곳에 당도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 밑이 빠지면서 밑이 없는 갱속(無低坑)으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온 우리가 걸어 갈 수 있는 길의 폭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자유롭고 넓다. 우리가 허락하신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좌편으로 걸어 갈 수도 있고 우편으로 걸어 갈 수가 있다. 결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비좁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천천히 갈 수도 있고 부지런히 갈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 갈 수도 있고 빈둥빈둥 놀면서 갈 수도 있다. 사치하면서 갈 수도 있고 근검 절약하여 남을 도와 가면서 갈 수도 있다. 겸손히 걸어갈 수도 있고 교만한 걸음으로 갈 수도 있다. 불평 불만과 원망을 토로하면서 갈 수도 있고 찬송하면서 갈 수도 있다. 위를 쳐다보면서 걸을 수가 있고 땅만 보고 걸을 수도 있다. 앞을 보고 걸을 수도 있고 계속하여 뒤를 돌아다보면서 걸을 수도 있다.
진리를 따라 살수도 있고 욕심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유행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계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기분대로. 제멋대로 살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이 속박되거나 억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 인한 책임 때문에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솔로몬의 일생을 보면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솔로몬이 걸어갔던 자유로운 길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타락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의 구원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었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셨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類로 전과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8-16)
다윗이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 . . . . . 하리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作定이며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는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었는지는 사람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作定속에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37. 요6:44. 요6:65)
이 말씀들은 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에 제자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원치 않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을 잘 새겨서 들어보아야 한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44절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올 수 없으며
65절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이를 정리하면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시고. 오게 하여 주시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롬 9:16)
원하는 자라고 되는 것이 아니오 힘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어서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잠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作定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作定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단05: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作定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눅22:22 인자는 이미 作定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作定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작정하신 사람은 우리가 전도하기 전에 이미 작정되어 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가서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나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아직은 바울이 전도를 하지도 않아서 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 때였다 누가 아직 중생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 때도 아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물론 바울은 누구누구가 주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에는 주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가는 것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전도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도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교리들 중에 예정론은 많은 사람들의 찬성과 반대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교리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거의 이러한 교리적인 논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예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거의 공통적인 것 같다.


이 논의는 본래 에베소서 1장3-14과 로마서 8장29-9장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예정이 확실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정론의 원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셔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지성(Omniscience)과 전능성(Omnipotence)은 미래에 이루실 모든 일을 예정하셨다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이론은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의 선포는 연역법적인 방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초기에 이 예정을 말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기 시작한 학자는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게 되었고 학문적인 이론으로 주장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
이 예정론이 다시 보강되어 완성된 것은 그 후 천년의 세월이 지나서 칼빈에 의하여 완성된 이론이다. 그러나 근대를 넘어서 현대인들은 거의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보수적인 입장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없이 예정론을 고수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도 예정론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교리를 신봉하려는 자세는 마치 바리새인들의 교리와도 같았다. 율법의 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고수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정이라는 말만 듣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자세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수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다 잘못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조용히 덮어둔 교리처럼 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교리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까다로운 것은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단들이 성도들을 독특한 교리를 조작하여 유혹하면서 자기들을 추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는 예정론과 같은 교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교회사적으로 경험된 대부분의 이단들은 예정을 부인하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에 기초한 신학은 네델란드와 스코트랜드에서 정착되었고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 기초가 닦아졌기 때문에 대부분 이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 중에 극단적인 예정론을 슈프라랖싸리안(Supralapsarians)이라 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와 멸망될 자가 이미 다 예정되었다고 본다. 죤 칼빈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정론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 이론을 신봉한다. 에베소서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예정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1619)의 결정은 이러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를 요약하면.
1. 무조건적인 선택
2. 제한된 속죄
3. 완전 타락
4. 불가항력적인 은혜.
5. 보존의 확실성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교리였다

다소 온건한 입장의 예정론은 예정의 시기를 타락한 후라고 본다. 이를 인프라랖싸리안(Infralapsarians)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타락을 허용은 하셨으나 그것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셨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멸망을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단지 함께 타락한 후에 그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뿐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죄 된 그대로 버려 두신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이론의 핵심이 되는 예정된 자의 경로는 .
1. 타락 2. 선택 3. 부르시고 4. 의롭다 하시고 5. 영화롭게 하신다. 이러한 이론은 다 로마서 8장29절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데 이들은 이 경로는 변경할 수 없는 황금사슬(Goldn Chain)이라고 부른다.
어거스틴은 이 이론의 대표자가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많이 수용하는 이론이다.
제 삼의 예정론(Predestination)은 위의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조화시켜서 수정한 이론인데 이를 수브랖싸리안(Sublapsarin)이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들만 선택을 입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예정론이 다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한 편만이 진리라고 잘라서 확정하기는 어려운 난제에 속한다.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가 감격 속에서 충성하는 자세로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 능력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성서의 교리를 예정론이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은혜로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예정이라는 말이 쓰여 있지 않으나, 신약에는 로마서 8:29-30 과 에베소 1:5, 11에 나와 있다.
예정의 예(豫, 이전)란 어떤 논리적, 시간적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9:11-13에 이 하나님의 선택, 선행규정에 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전에, 선도 악도 행하기 전에, 에서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동생 야곱 아래 종속되어야 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칼빈의 신학에도 보여진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예정론은 미리 예정되어 도저히 변경할 수 없다는 관점이 아니라,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영원한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계획과 가장 세밀한 점까지 그 마음 속에 미리 결정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까지 미리 내다보셨다는 것이다. 시간은 이 계획을 온전히 실행시킬  뿐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선택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상벌간 그 결과는 각 사람의 영혼에 돌렸다. (롬 2:1-16)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은 그 원죄 때문이 아니라 선택과 신뢰가 관계되는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 (갈 1:15)에 대한 순종 (고전 9:26)과 구원을 위한 노력 (빌 2:12)을 권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그 사랑 안에서 행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무조건이 아니다. (엡 1장, 골 1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인간의 역사도 예정을 넘어서 그 사랑 안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한 운명은 조상의 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를 거절하는 불신앙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이다.
(사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사 30:14)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사 41:25)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같이 밟을 것이니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렘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렘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렘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처음에 주신 자유
창조하신 후에 우리를 에덴에 두실 때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으로 창조하시고 그 인격의 기초를 자유 위에 세워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주의하면 완전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거기는 선악과 외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 것은 거기 한가지 제한이 있었다는 것을 잘 유의해야만 한다. 그 후에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결국 그 제한의 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사람들은 제한의 선을 넘어 설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한된 선을 넘지 않은 쪽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요 제한의 선 건너편은 훨씬 좁은 자유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 할 수만 있다면 남은 이론은 아주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제한 된 선 너머에 있는 자유를 탐내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제한의 선을 넘어서 보고야 깨닫는 것은 그 선을 넘지 않았을 때가 훨씬 더 자유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본래의 곳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처음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유가 충분한 자유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자유가 주어졌음을 깨닫는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고 임의로 행할 수 있게 하였다. 다만 한 가지의 제한을 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넘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완전한 자유란 제한이 없는 자유가 아니라 제한이 최소화된 자유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의 제한마저도 없는 완전한 자유를 주실 수 없었을까?. . .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 자유가 주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관계에서는 제한이 따른다. 만약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라면 거기에는 서로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고 또한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러한 존재는 인격도 아니고 방향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만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였다. 의지의 자유를 다른 말로는 자유의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고 뱀의 말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였다. 선택의 자유를 가졌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유선택(自由選擇)의 한계(限界)
1.내가 나의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다
2.내가 나의 어머니를 선택할 수 없다.
3.내가 나의 형제 자매를 선택할 수 없다.
4.내가 사의 성(性)을 선탤할 수 없다.
5.내가 태어나는 시대(時代)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
6.내가 나의 태어나는 민족(民族)과 장소(場所)를 선택할 수 없다.
7.나를 나되게 하는 선생님을 대학가기 전까지는 선택할 수 없다.
8.내가 나의 성격(性格)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없다.
9.내가 나의 환경(環境)을 약간 개선할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10.내가 나의 외모(外貌)를 성형수술을 할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11.음성(音聲)도 내가 선택할 수가 없다.
12.지능(知能)이나 예능(藝能)이나 체능(體能)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
13.체질(體質)도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하지만 제한적이다.
14.직업(職業)은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되지 않는다.
15.배우자(配偶者)를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상대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허사다.
16.친구(親舊)를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친구가 나를 친구로 받아줘야만 가능하다.
17.취미생활(趣味生活)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성격자체가 이미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다.
18.종교(宗敎)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제한적이다.
19.나의 죽는 날도 자살(自殺)을 하지 않은 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20.천국(天國)과 지옥(地獄)도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는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이 많고 실제로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을 시작하신 분이 나 자신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시되 때에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겸손이란 내 멋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젊은 날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와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와 나를 종신토록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겸손이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제한된 선을 넘어가서는 결국 제한 없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권세 아래 팔리게 되었다. 죄 아래 팔린 인격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제한되고 있었다. 죄는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를 제한한다.
"모든 것을 임의로 하되 하나님을 믿지는 말아라!"
믿는 날에는 정녕 살아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사탄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든지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종교든지 제한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을 알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지 않으면 만사가 자유이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가르쳐서 기독교인들 보다 더 선하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도록 살게 하여 마치 광명의 천사와도 같이 가장하게도 한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사탄의 열심을 보게 되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탄은 그야말로 열심이 특심하고 또한 그 끈기와 인내와 뻔뻔스러움에 있어서는 추종도 모방도 불허한다.
그리고 변신과 둔갑의 천재여서 온 천하를 꾀는 자다. 사탄이 젊은이들을 꾀이는 기상천외의 방법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性 自由'(Free Sex)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러한 올무에 걸려들면 성 자유가 아니라 성의 노예. 죄의 종이 된다. 사탄은 그것을 '성 자유'라는 용어로 미화시켜서 젊은 영혼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그러한 사탄의 올무와 죄의 장벽에 사로잡혀 일생을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우리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어렵던 성경이 그냥 보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1-36)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 되신다는 뜻을 우리가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상당히 포괄적인 말씀이다. 단지 죄 용서 받고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었다.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범죄 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나쁜 놈이라고 정죄하기가 쉽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어 죄에게 눌려서 죄를 이길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을 보실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두 가지 길이 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 속에 숨어 있는 사욕. 즉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사욕을 죽이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멸망을 받게 된다. 그 멸망은 처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뱀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야 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 말은 잘 들어보아야 한다. 뱀은 서투르거나 어리석은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뱀이 말하기를 "그 열매를 따서 나에게 제사를 지내라! 이는 내가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야겠노라!"하고 말했다면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을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네가 따서. 네가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네가 너 자신을 위하여 살아라"고 했다. 사탄은 지금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사탄은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그래서 때로는 人本主義. 人道主義. 人間主義의 탈을 쓰고 나타나게 된다. 휴매니즘이라는 이념 뒤에서 사탄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람을 위하는 척 하면 거기 쉽게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지성인들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 즉 사욕을 좇아 육신대로 사는 것이 곧 실질적으로 현명한 삶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성경은 그러한 인간을 두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利己主義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결국은 죽음만이 사람들을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젖소가 만약 우유를 짜서 자기가 다 마셔버린다면 그런 소는 푸주간으로 끌려가게 된다. 암탉이 달걀을 낳아서 번번이 자기가 깨어 먹어버린다면 그런 닭은 그날로 폐계 처분해버릴 것이다. 인간도 자신만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면 그런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3-1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신다. 그 길이 곧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6-23)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지 않았다면 소유는 고사하고 목숨이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안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고 욕심에서 해방되면 죄로부터도 자유 하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한 자유를 주시고 진리를 알아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욕심과 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시는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신다. 우리가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있다.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장되는 자유이다. 우리가 만사에 자유하다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필요한 자유를 충분하게 누릴 수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 나라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와 지고 선진국이 되며 문명과 문화가 창달되고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고 윤리가 바르게 세워지며 범사에 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치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관적으로도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거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자율(自律)이라는 양심의 법을 부활시켜 문자적이거나 제도적인 타율에 저촉을 받지 않는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에 자유를 주어도 사고가 생기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참 자유란 결코 정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자율(自律)이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 할 때만 주어진다. 만약 자율이 없는 곳에서 제한 없는 자유가 주어지면 그것은 자유한 상태가 아니라 무법천지(아노미아=ajnomiva)가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3:4)

 

예정과 책임
예정(Predestination)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마땅히 자유에 대한 책임도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으로 지으시고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예정 속에서도 우리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자유롭게 예정하셨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욕심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예정되신 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 자신의 몸과 재능과 재물을 드려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여 예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예정을 숙명론과 혼돈하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별한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이 다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매우 불경스러운 자세라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속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염려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우리가 염려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옳지 않으심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실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귀하게 쓸 그릇을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다. 반면에 임시로 당분간만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목수가 한 나무를 가지고 어떤 부분으로는 문짝을 짜고 어떤 부분으로는 기둥을 다듬고 다른 부분으로는 거푸집을 제작하여 임시로 쓰다가 불태워버릴 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하여 불신자들이 항의 할 것이라고 염려를 한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불신자들은 예정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 마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불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불신자가 목사를 찾아와서 "왜 하나님은 나를 예정하지 않았느냐?"고 시비를 걸어 온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진정한 토기장이가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인간의 몸으로 쓰이지 않은 남은 흙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우리들만 소외시키십니까 ?!"하고 항의하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우리는 실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도 있고 천하게 쓰실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곧 나의 사명이며 그 사명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인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지혜를 구한다.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장성해도 영적인 성장이 없이는 지혜가 없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인생의 실패는 예정하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어리석고 게으르고 불충한 사람의 잘못이기 때문이 일생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파탄된 사람은 구제불능이다.
1.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2.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
3.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
4.거듭나지 못하는 사람
5.영적으로 죽어서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
6.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7.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
8.전도자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예정과 선택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 성도들이 명심할 일은 아무런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이러한 깊은 교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해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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