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 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 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 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 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ㅉ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 ,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 ㄷ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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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 천주교 언제 한국에 본격 소개됐나


‘종교’라기보단 ‘西學’ 인식 17세기 실학파들 영입운동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체류하던 천주교 신부가 내한하기까지 했으나 천주교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중국 선교의 대표적 인물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다. 그는 1582년 마카오에 왔고 이곳에서 중국어와 중국의 역사, 풍습을 연구하면서 중국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 본토 입국이 가능해지자 1601년 베이징으로 가 천주당을 설립하고 서역의 과학 및 천주교 서적을 역간하며 포교에 힘썼다. 그의 선교방법은 흔히 ‘적응론’이라고 말하는데, 중국의 고유한 문화나 풍습에 기독교신앙을 적응시키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유교와 기독교를 절충하여 그 문화적 충격을 제거함으로써 유교적 배경의 중국인들로 하여금 입교과정의 이념적 차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유교는 불교와는 적대적이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던 그는 기독교가 유교적 가치를 훼손하기보다는 보완해 준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이었다. 이미 마카오에서 한문 3만자를 터득했던 마테오 리치는 1603년 중국어로 ‘천주실의(De Deo Verax Disputatio·天主實義)’를 저술했다. 문자적으로 ‘하늘의 주인에 대한 참다운 교리’라는 의미였다. 이 책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유교적 용어로 표현하면서 기독교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의 갈등을 피하려고 했다.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읽힌 교리서인 이 책이 이수광(芝峰·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과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을 통해 17세기 초에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 선교사들의 작품들은 종교라기보다는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학을 받아들였던 대표적인 인물이 앞의 두 사람 외에도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성호사설(星湖歲說)’을 쓴 이익(李瀷), 그리고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齋家) 등이었다.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쓴 안정복(安鼎福)이나 이헌경(李獻慶) 등은 서학을 비판한 바 있으나 천주교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천주교는 천주학(天主學), 서학(西學) 혹은 양학(洋學)이란 이름으로 소개된 것이다. 말하자면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을 징검다리로 실학파들의 천주교 영입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 때 이를 학문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첫 인물이 허균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프랑스의 달레 신부는 그보다 후대 인물 홍유한(洪有漢)이 첫 천주교 신앙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이징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서도 천주교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던 사신들은 서양선교사와 접촉하게 되는데, 정두원(鄭斗源)은 그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조 9년(1631) 진주사(陳奏使)의 자격으로 베이징에 갔던 그는 이탈리아 선교사 로드리게스(J. Rodriquez· 陸若漠)를 만났고 그를 통해 천리경, 자명종 등과 과학서적을 얻어 귀국한 바 있다. 그 후에는 이신명(1720), 홍대용(1766) 등이 중국에 체재하던 선교사들과 접촉하는데, 이들의 관심은 서양 문명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결과로 중국에 인질로 잡혀갔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이와 달랐다. 1637년부터 1644년까지 8년간 심양(瀋陽)에서 지내다가 1644년 청이 명(明)을 정복하고 베이징으로 천도할 때 함께 베이징으로 옮겨간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독일인 신부 탕약망(蕩若望·Adam Shall·1591∼1666)과 접촉하게 된다. 그를 통해 천주교로 개종한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26일 베이징을 떠나 이듬해 2월 18일 귀국하였으나 70여일 후 학질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 자신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천주교를 한국에 소개하지는 못했다. 

이상과 같이 일본과 중국을 통한 여러 차례 천주교와의 접촉이 있었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영세를 받은 인물은 이승훈(李承薰)이었다. 권일신·권철신 형제, 정약전·정약용 형제, 그리고 이벽 등과 함께 경기도의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비밀히 천주학을 연구했던 이승훈은 1783년 그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동지사(冬至使)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갔다. 그곳에서 예수교 선교사 그라몽(Louis de Grammont)과 접촉한 그는 기독교의 오묘한 교리와 도덕적 교훈에 끌려 1784년 2월 영세를 받았다.

그해 3월 여러 교리서를 가지고 귀국한 그는 이벽, 권철신, 권일신, 김범우 등에게 영세를 베풀었고, 서울 명례동(明禮洞) 김범우 집에서 종교적 목적의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보통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때를 보통 1784년 말로 추측하는데 천주교는 이때를 한국천주교가 설립된 해로 공식화하고 있다. 이 모임은 후에 적발되어 해산당했는데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모여 첫 종교집회를 가졌던 명례동 김범우의 집터에는 지금의 명동성당이 서 있다. 1984년의 한국천주교 200주년은 이때로부터 산정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내한한 것도 이때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이라 불리는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오늘의 교회로 발전하고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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