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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와 부목사

 

한국 개신교회에서 직분을 바라보는 관점이 계서적(Hierarchy)인 관점으로 굳어진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목사, 장로, 집사는 평등한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더구나 목사, 장로, 집사의 수는 피라미드 구조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구조는 자연히 성도들에게 목사는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이고, 그 다음은 집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준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일반적으로 장로의 수와 집사의 수를 비슷하게 함으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여 왔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직분 안에서도 서열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목사 안에는 원로목사, 공로 목사, 담임목사, 수석 부목사, 부목사, 교육목사로 분화 되고, 장로 안에서도 선임장로를 정점으로한 서열이 매겨지며, 집사에도 안수집사와 서리집사로 구분되었다. , 단순하게 목사, 교사(신학교수), 장로, 집사라는 단순한 개혁주의적 직분이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그냥, 현대 교회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로마 카톨릭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안게 될 수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종교개혁 당시, 로카 카톨릭 교회 안에는 수많은 직분들이 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사제, 등등. 개혁가들은 이러한 것이 성경에 전혀 맞지 않다고 공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게 된 단순한 직분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특히 직분과 관련하여 그들은 적어도 2가지 가장 근본적인 주장을 참된 교회에 확립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직분의 평등"이다. , 목사와 장로 집사는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다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시킨다면,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집사가 장로가 될 수도, 나중에 목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집사는 집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장로는 장로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목사는 목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교회에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목사직 자체에도 적용이 된다. 목사직 역시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목사직 안에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사들은 다 동등하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다. 이것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엄격하게 적용시킨다면, 목사 안에 담임목사, 부목사, 협동 목사가 계서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목사직을 복잡하게 함으로 종교개혁 이전시대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목사에 대한 개혁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목사는 반드시 교인들의 선출에 의해서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개인적 소명은 교회의 소명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로마 카톨릭에서는 주교가 성직 임명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주교의 임직은 교황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목사의 임직을 교인들에게 돌려 준 것은, 직분론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목사를 보도록 하자. 부목사를 교회에서 청빙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교회에 있어서 담임목사가 거의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물론 당회의 허락과 제직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거의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목사는 그냥 담임 목사가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한다.

 

더구나 담임 목사는 부목사를 해임시키는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된 상황을 이해는 할 수 있다. 부목사가 자기 편을 만들어 언제든지 교회를 분열하게 만들 위험이 있으니 그 위험의 싹을 처음부터 자르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부목사로 하여금 교인들을 위한 목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를 위한 목사가 되게 한다. , 부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담임 목사의 의중이지, 교인들의 생각이 아닌 것이다. , 이것이 로마 카톨릭교의 주교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개혁가들은 바로 일반 성도들을 위한 목사직의 확립을 위해 그토록 싸웠는데, 오늘날은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담임 목사든, 부목사든, 목사는 교인들의 부르심을 받아 청빙되어야 함이 개혁신학의 근본원리이다. , 부목사는 담임목사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우리교회는 이 원리를 가능한 한 살리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상 담임 목사의 의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교인들이 청빙하는 것도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교회의 헌법도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부목사는 교회의 전부 보다는 어떤 한 기관을 맞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회에서 부목사를 철저하게 심사하여, 섬기게 될 기관에 속한 성도들에게 물어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면, 중고등부 담당 부목사를 청빙한다면, 부목사의 지원자 중에서 당회가 잘 심사한 다음, 담임 목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을 2명 정도 선정한다음, 최종적인 선택은 중고등부 담당 교사들과 학부형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담임 목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현 교단 헌법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개혁교회의 근본 원리를 거스리지 않으면서 또한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긴장관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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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사 개요 

 

1세기 - 가톨릭 교회가 시작된 것은 성령 강림 때이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그분은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 승천하셨으니 그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라"하는 것이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나날이 신자들이 늘어나고 사도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자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각각 형성되었다.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 중 특히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 로마 교회가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 후 바울로(바오로)의 열성적 전교에 힘입어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을 융성하나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다.

2세기∼3세기 - 이때는 이미 12사도들이 사망하였으므로 사도 후 시대(100∼300년)가 시작되는데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교회 관습이 유대교적 색채를 띠며, ②교계제도가 확정되어 주교, 신부, 부제 등의 등급이 생겼고, ③그리스도 신학이 정립되었으며, ④로마의 영토 확장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었고, ⑤그 후 그 발전을 견제하기 시작하여 로마 황제들로부터의 박해가 200년간 계속되었다.

4세기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가톨릭 교회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①수도회가 창설되고, ②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문제를 협의하고, ③전례가 발전하였으며, ④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어갔다.

5세기 -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가 멸망하였다. 게르만 민족 특히 프랑크 왕국의 문화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되어 중세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게르만 민족의 회개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대사회 제2기 [312-604년] 

 

콘스탄틴 대제부터 그레고리오 대교

    

제1절 콘스탄틴 轉換

콘스탄틴의 개종

Constantinus는 로마군 장교 Constantius Chlorus와 Helena의 아들, 285년경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나이수스(Naissus)[1]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시안 궁전에서 보냈다. 모친Helena는 旅人宿 주인으로서 콘스탄시우스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당시의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93년에 콘스탄시우스는 로마 제국 서부지역의 막시미안(286-305) 제2정제(正帝,August) 치하에서 제2부제(副帝, Caesar)로 임명되어 Gaul 지방과 Britannia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당시 동부지역의 제1정제는 Diocletianus(284-305)였고 제1부제는 Galerius(305-311)였다.[2] 이 때에콘스탄틴의 부친은 副帝가 되는 조건으로 막시미안 정제의 의붓딸인 Theodora Fausta와 결혼해야 했기에아내와 헤어졌다. 콘스탄틴은 296년에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티나에서 장래의 敎會史家이며 체사레아의 주교가 될Eusebius(260-340)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305년 5월에 두 정제인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은퇴를 선언하였을 때에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제1정제가 되고 자신은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제2부제로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인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제2정제, 두 副帝로는 Maximinus Daza(305-313)와 Severus(306-307)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Gaul지방의 불로뉴(Boulogne)로 갔다가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건너가Galedonia 전쟁에 참전했다. 306년 7월 콘스탄시우스가 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지방과 브리타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이로써 로마 제국에서는 디오클레시안이 제위 계승의효과적 방법으로 수립한 4인 정치체제의 질서가 붕괴되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군사력을 통해서 310년에 에스파냐를 정복하여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서부지역은 콘스탄틴과Maxentius(306-312)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동부지역은 Licinius(311-324)와 막시미누스 다자가지배하였다. 당시 콘스탄틴은 동방의 리치니우스와, 막센시우스는 막시미누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그의 부친처럼관용정책을 시행하였고 리치니우스도 이에 동조하였다.

  

312년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시우스와의 정권투쟁을 계획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에게 자기의 누이동생인 콘스탄시아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후, 막센시우스의 영지인 이탈리아로 出征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Turin, Milano, Verona 등지에서 저항군을 격퇴하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의 티베르강에 놓여 있는 Milvio橋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전투 전에 발현(또는 꿈)을 통하여 그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神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교 신의 이름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밀비오橋 전투의 승리는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312년 10월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최고통치자로 영접하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했다(315년에 완성).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을 보호신으로 공경하기에 이르렀고, 후일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大勝戰과 그리스도교 귀의에 대한상이한 기록과 두 견해가 논란되고 있다.

 

 첫째 문제는, 밀비오교 전투 직전에 있었던 콘스탄틴의 체험이다. 락탄시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에서 그의 군인들의 방패에 神의 천상 표시를 붙이고 싸우라는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첫 글자인 ‘ ’를 십자 표시인 ‘+’에다가 윗 부분을 약간 구부려 ‘f'로 바꾸어 방패에 그려 넣어 그리스도인의 신을 보호신으로 삼고서 전투에 나가 승전하였다. 기적적 사건 기술이기보다는 황제의 꿈은 쉽게 이행될 수 있는 着想을 일으켜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황제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의 보호 하에 전쟁에 나갔으며 승전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이러한 결심을 일으켜주었고, 보호신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콘스탄틴의 친구인 에우세비오는 황제 자신이 겪은 체험을 듣고 황제의 사망 후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황제가 실제로 발현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전쟁의 勝算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느 날 오후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였을 때 그의 군인들과 함께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싸워라”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노그램(Χ와 Ρ의 조합문자)이 그려진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두 기록 중에서 오늘날 학자들은 락탄시우스의 실사적 진술을 에우세비오의 기적적 진술보다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문제는, 콘스탄틴의 전환에 대한 동기(動機)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① 내적인 마음의 변화 즉 종교적 체험의 영적 결과로 보기보다는 순전히 황제의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는 견해 - 그 증거로, 그의 재위기간 내내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았고, 전임 황제들이 지니고 있던 대사제(Summus Pontifex)의 황제 칭호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음을 든다. ②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내적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일신교적인 미트라(Mithra :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에 대해 내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콘스탄틴은 일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3세기 로마 제국의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Summus Deus)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 콘스탄시우스가 바로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그는 신도들에 대한 박해령을 무시하고 관용정책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콘스탄틴 가정에는 이복 여동생 Anathasia가 그리스도교 신자(또는 유다교 신자)였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교 신자로 간주되었다.

 

 帝國敎會의 창설

밀비오橋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은 로마에서두 달 동안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누이동생 콘스탄시아와 동부지역의 황제 중의하나인 리치니우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황제는 이른바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동부로마 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기존권을 그리스도교에도 승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동부 황제 다자는 박해자로서 이 포고령을 수행하는 데장애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리치니우스는 313년 4월Adrianopolis에서 M. 다자와 싸워 승리한 결과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6월에 니코메디아에서 밀라노 관용령을 시행하라는 포고를 내렸다. 이제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완전히종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서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 대해 우호적 정책을 실시하였고, 312년 말 자기 군대의 군기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는 재위기간중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 교황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하여 그곳에 라테란 대성전(성 요한 대성당)을 건립하고, 320년경에는 베드로 대성전을, 이어 예루살렘 무덤 성당,베들레헴 예수 성탄 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교도의 종교 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12년, 이교도 제관들에게 부여했던 면세특권을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부여하였고 특히 주교에게 국가의 사법권을 이양(移讓)했다. 또 성당이 죄인의 도피처(逃避處)가 되는특권도 부여했다. 국사범 용의자는 교회를 피신처로 삼을 수 있었으며 주교는 이 특권으로 국가의 결정을 무시하고 성당을 정치범의 보호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황제는 315년에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主日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로 공인하였고,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황제는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 조치를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相續權)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신자들이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히 방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90-604) 이후 교황청에 흡수되었으며, 증여물과 기부금에 의해 생긴 재산은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이들을 돕는 구호단체가 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로마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가 324년에反교회 정책을 시행하자 콘스탄틴은 크리스폴리스 전투에서 리치니우스를 격퇴시키고 全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 역시 로마 제국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25년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니체아에 제국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최초의 공의회를열도록 했고, 33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수도로 건설하였다.

 

  그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였고,그의 가족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337년)에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 흰 領洗服을 입은 채 세상을떠났다. 동방교회는 대제를 ‘13번째의 사도’, ‘준사도’로 공경하고 있다.

  

대제를 계승한 세 아들, 콘스탄틴 2세(337-340), 콘스탄스(337-350), 콘스탄시우스 2세(337 -361)는 부친의 교회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였고, 동시에 이교 사상과 종교 행사를 탄압하였다. 콘스탄시우스 2세는341년에 미신행위와 우상숭배를 금하였고, 346년 콘스탄스와 함께 로마 제국 전역에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로마 제국은점차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대제의 이복형제의 아들인 율리아노(361-363)가 황제로 등극하자 잠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고 과거의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다시 일으켰다.그러나 그가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戰死함으로써그의 이교 사상의 부흥작업도 끝맺게 되었다.Jovianus(363-395)는 제국에서의 특권적 위치를 교회에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로마 황제들, 특히Theodosius 1세(379-395)가 그리스도교 정책의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로서 388년에 로마 제국을 통일하였는데, 그의 시대에 교회와 국가가제휴관계를 이루어가기 시작하였다. 380년 2월 황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반포하여 동부지역의 국민들에게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신앙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고, 동시에 모든 국민이이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선언하였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설정됨을 시사한 것이다. 황제는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게는 교회 설립과 종교 행사를금지시켰고 정통교회로 돌아오도록 강권을 발동하였다. 그는 1년 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의칙령을 법으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시까지 이교도의마지막 보루이며 피난처였던 원로원도 로마 신에 대한신봉을 포기해야 했다. 392년에 또 하나의 법령을 반포, 모든 그리스도교 이단의 가르침을 대역죄에 해당되는 벌금형에 처하고 이교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모두重刑에 처하는 금령을 내리고, 이교도 제관과 여신을섬기는 童女들의 수입금과 함께 이교 神殿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反이교정책과 親그리스도교 정책 이후로 이교 신앙은 국민의 공적 생활에서 점차로 사라지고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되었다. 이러한 政敎一致로 국교 시대의 주교들은 자기지방의 행정권까지 갖게 돼 지방에서의 주교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국민의 보호자로서 권력가들의 압박과관리들의 수탈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는 임무를완수했다. 또한 주교들은 황제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미쳤고 그의 시행착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전환기의 문제성

 

 교회와 국가의 이 같은 밀접한 관계에 대해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으니,어떤 이들은→ 감사와 기쁨에 넘쳐 그것을 국가의 그리스도교화로간주(에우세비오)하였고,어떤 이들은 → 교회의 ‘俗化’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중세 교회개혁 문헌→ 콘스탄틴 이전 ‘원시교회’(Ecclesia primitiva)만이 개혁의 전형으로 보았다

즉,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으로부터의격리가 원시교회의 특징으로서, 그것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① 교회는 이러한 특징으로 돌아가야 한다(11, 12세기피오레의 요아킴 요구)

② 13, 14세기 프란치스코회 엄격주의자들 → 콘스탄틴 이후 교회에서 쇠퇴밖에는 보지 않았다.

③ M. Luther,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교황직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 이후 ‘쇠퇴이론’이 프로테스탄트 역사 서술에 성행하게 되었다.

계몽시대 → 모든 악의 원인이 사제직의 지배욕에서 비롯되는데, 사제들은 박해가 끝나면서부터 황제의 총애를 누리고, 권세욕에 물들고, 복음의 순수성을 그들의이기적 관심으로 희생시켰다.

콘스탄틴 이후 : 제국교회 → 자진하여 국가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배반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러한 잘못된 발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 19세기와20세기에 이르러 이견 지닌 이들 생겼다.

① 부패가 벌써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

② 초기 그리스도교의 호교가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희랍화로 시작되었다는 이들

③ 콘스탄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이 있었다.

 

 주요 비난은 언제나 콘스탄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국가 질서에배열시킨 것은→ 의심 없이 하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그러나 콘스탄틴은 즐겨 자신을 ‘동료주교’로 불렀고,니체아의 축연에서 겸손하게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였다. 얼마 안 가 그는 주교직을 그의 관직처럼 지배하고, 비록 순 교회 사정에 관계되는 일일지라도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예 : 아타나시오 335년 황제에 의해 추방됨). 그 후 콘스탄틴은 교회 내의 생활에 더욱 심하게 간섭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 → 신학 지식의 깊이와 그리스도교 구원 신비의 궁극적인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부족했다는 것이었다. 그 예로, 아리우스파의 분규 시초(324년)에, 그는 양측 대표자인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 주교를 화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양 파의 대립 문제를 지엽적인 것으로 판단했는데 실제로 이 문제들은 그리스도교의 존립문제와 상관되었고, 또 구원 교리자체가 문제시 된 사실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은 니체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신앙문제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우스와 그의 신봉자들을 파문한 공의회의 결의에 처음으로 국가적인 추방을 뒤따르게 했고,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의 지속적 간섭은 그 이후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예) 황위 찬탈자인 Maximus(383-388)는 스페인과 갈리아의 금욕운동의 창립자인 스페인 평신도 프리스킬리안을 385년 트리어에서 그의 6명의 伴侶와 함께 처형시켰다. 여기에는 정치적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대표자들인 투르의 마르티노,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로마의 시리치오 교황은 위의 이 잔학한 행위를 아주 맹렬하게 단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처형의 편을 든 주교들도 있었다.

 

  이 같은 국가와 교회의 공생, 둘의 적극적인 상봉이란획기적 사건은 많은 신자들에게, 이제 교회는 자진해서국가의 자유에 맡겨야 하고, 국가의 임무에 적극적으로협조해야 함 생각했다.

 

  승리의 도취감 → 세속과의 격리가 급속화되고

 

                → 일종의 세계 개방적인 문화 낙관주의로변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자신 → 주교와 신부들에게 권한과 전권 위임하고, 교회에 많은 영예를 부여했으나,

주교, 신부들 → 국가와 교제하는데 있어서 전혀 경험이 없었다.

 

             → 그동안 박해에는 잘 대응했으나, 국가의 호의적 태도에 대해 미숙했다.

 

형편에 따라서는 호의적인 것이 적대적인 것보다 더 위험스럽다는 사실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교회로 몰려든 군중은 교회에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확신에 차 있고,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의 엘리트의 교회에서 → 정치적으로 야심이 있고, 종교적으로 무관심하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온 대중의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종교의 평범화 및 이교적·미신적인 것의 침투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의世俗化나 남용이 교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위험들을 극복하였던 것일까?

 

  만일 우리가 예수의 肉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교회를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예수의 삶의 계속으로인식한다면, 우리는 그 理想을 본래 주어진 형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의 역사적인 발전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교회의 특성은진정한 역사성이다.

 

  교회는 시대와 떨어져서, 시대와 나란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 안으로 들어가고, 시대 안에서 자신을시간화한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는 정지될 수없다. 교회는 본래 개개의 문화에 대해 중립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문화에 대한 개방과접근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든 시대와 문화 안으로 끌고 들어가, 그 안에서 형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세상을 향한 개방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세상으로의 접근과 세상으로부터의 격리 사이에 있는 큰 변화의 넓은폭이 교회의 품안에서 성인과 죄인, 승리와 패배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한 시기의 부정적인 면에 이론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비학문적이고, 비신학적일 것이고, 긍정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 역시 비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일 것이다.

 

  당시의 포교열(布敎熱), 종교문제를 토의하고 신학문제를 해결한 그 정열, 특히 수도생활의 발전과 성인의큰 숫자는, 콘스탄틴 이후의 시기가 지닌 여러 가지 약점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활기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충만했던, 교회사상 한 위대한 한 시기의 성격을부여하는 것이다.

 
[1])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Nis지방


[2]) 당시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제1정제는 Nicomedia에,  제1부제는 Sirmium에 정주하였고, 서부지역에서는 제2정제가 Milano에, 제2부제가 Trier에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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