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의 심각성

 

기독교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타종교도 기독교와 대등한 종교로 인정하는 정도이지만,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혼합종교의 형성을 유발하고 촉진한다. 한국에 종교다원주의가 확산되고 혼합종교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심각하다.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열린 WCC 총회에서 무당굿을 하며 해방신학에 초점을 맞춰 읊은 정현경의 초혼문(招魂文)의 내용을 보면 실로 황당할 뿐이다.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검둥이 여종,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렁렁렁” 하는 말로 시작하여,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의 군사들에 살해당한 남자 아이들의 영, 잔 다르크의 영, 마녀사냥으로 말미암아 불타 죽은 중세기 여인들의 영, 십자군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의 영, 기독교가 식민주의 시대와 이교도 세계에 대한 우월 의식을 지니고서 선교하던 시대에 학살된 토착민들의 영을 차례로 불러들인다(미출판된 자료집: WCC, 천주교, WEA 관련자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려), 7).

KNCC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버젓이 올려있는 모 기독교대학의 교수이며 서울 모 교회 교육목사가 작성한 “생명의 강 살릴 종교 여성 공동기도문”을 보면 혼합종교화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다.

 

오, 하느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건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조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
 

나무아미타불, 아멘.

 

그뿐 아니다. 2009년 6월 18일의 한 시국 성명에는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봅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1,024명의 목사들이 서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

 

지난 50년의 역사를 보면 WCC 지도부의 교회 통일에 대한 이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WCC 신학은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즉 탈기독교적인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해 왔으며 그것이 세계 교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1960대 초반에 한국에서 선교적인 차원에서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던 이들이 1990년대에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입으로 종교다원주의는 토착화 신학의 종착점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것은 혐오스런 일이긴 하나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적인 예수를 부정하고 칼케돈 신조를 폐기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WCC가 추진해 온 사회 참여와 사회봉사만 하더라도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견지에서 추진하는 것이어서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가진 교회들은 따르기 힘들다.

 

역사에 사신 나사렛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고 교회에서 축출함으로 교회의 성결을 지키라는 말씀은 외면한 채 교회더러 하나가 되라는 말씀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말씀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모순이다.

 

WCC의 회원이 되고 있는 교회에는 복음적이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WCC도 그러하지만 그 어떤 단체나 기관을 불건전한 신앙과 사상을 가진 개인이나 지도부가 관장했을 경우 그 단체나 기관은 대체로 지도자나 지도부의 지도를 받고 따르게 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의 경우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으로 학교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역사와 우리의 주변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우리는 안쓰럽고 통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오늘에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성령 충만’과는 다른 개념인 ‘영성’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의와 교파 교회들이 가진 신앙고백을 외면하거나 폐기하고 그 대신에 모든 교회들에 통할 수 있는 막연한 ‘영성’을 강조하는 WCC 신학의 영향이다.

 

‘영성’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종교성’과 같은 말로 모든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이다. 좀 더 좁혀서 기독교에 국한하여 좀 더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영성’은 성령에 호응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이 가진 영적 속성이라거나 영적 상태 혹은 영적 분위기 정도의 개념을 가진 말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이 즐겨 쓴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우주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로 유도하는 말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박형룡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이 일찍이 WCC의 신학과 목적을 직시하고 경고를 발해 준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혜안과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지도력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분립의 아픔을 무릅쓰고 그들의 경고에 호응하여 WCC에 대치하는 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보수해 온 선배 목사님들을 치하하며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노략하는 이리떼들로부터 지키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씀(행 20:27-31)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 8)고 하는 경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배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

 

문화를 배경으로 기독교 교파 교회들을 넘어서서 모든 종교들과 연합하여 엄청난 세력으로 몸을 불리고 있는 WCC에 대항하거나 그것과 경쟁하려면 연합 전선을 펴야 하고,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통적인 정통 신앙을 표방하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단들은 명분 없는 분열과 분립을 지양하고 교단들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며 선교에서 협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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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연합과 에큐메니칼 운동(WCC)에 대한 소고


 

김영재 교수(합동신학원)

 

 

시작하는 말

 

2013년 세계기독교연합회(WCC)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일을 앞두고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회원 교회에 동참을 권유하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어서, 이러한 요청에 한국 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협의회에 속한 교단 교회는 기독교 장로회(기장), 예수교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정교회, 순복음교회(기독교하나님의성회)의 8개 교단이다.

KNCC와 양립하는 교회 연합 조직으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다. 거기에는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이 속해 있으나, 통합측 장로교단과 기독교하나님의성회가 양 기관에 다 회원이 되어 있으므로 한기총이 WCC에 반대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여러 교단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WCC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것은 KNCC에 속하지 않은 교회 사람들 가운데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된다는 뜻이다. 보수적인 교회 교단 사람들도 꽤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 연합의 명분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소원하시고 명하신 것이며, 사도 바울도 교회에 관하여 말씀할 때 간곡이 부탁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하나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WCC를 반대하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명분으로 반대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1.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교회들이 분립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하는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하는 서방교회로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진 원인은 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하나로 싸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 교회는 15세기에도 하나가 되려고 회의를 열어 노력하기도 하였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각기 유지해 오던 중, 16세기 종교개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서방 교회는 여러 교파와 국민 교회들로 분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들이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분열된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이 알아듣든 말든 라티어로 예배하고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 허용하였다. 그러한 처사는 교회를 하나로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무지에 내버려둠을 당하였으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교회는 서로 다시 연합해 보려고 더러 시도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교황주의 및 사제주의와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개신교 교회들이 다시 연합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부흥이 교파를 초월하여 확산 되고,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직 교회 전통이 없는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더 교회 연합에 대한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파를 초월한 선교회들이 서게 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 회개, 중생,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등의 교리는 실은 모든 교파 교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신앙이다. 분수를 두고 말하자면 공통분모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 연합의 이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많은 선교 단체들이 교회 연합을 모색한 결과 드디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WCC 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세계에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 연합에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WCC가 출발할 때부터 안게 된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시인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는 인정하고 윤리적인 교훈 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2. 1950년대의 한국 교회와 WCC

 

한국에서는 WCC가 있기 이전, 즉 1924년 9월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어 복음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의 시련을 당하면서부터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나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946년 10월 9일 제1회 한국기독교연합회총회를 열었다.

거기서 KN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에 장로교회의 김관식 목사와 엄요섭 목사, 감리교회의 변홍규 목사를 파견하여 참석케 하였다. 진보적인 기장측은 처음부터 WCC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KNC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WCC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주도해 오고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공고히 한 분이 조직신학자 박형룡 목사님과 성경신학자 박윤선 목사님이다. WCC에 대하여 제일 먼저 경종을 울린 이는 박윤선 목사님이다. 이미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한국 교회는 어디로?’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대한 위반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

세계기독교연합회에는 신신학자(新神學者),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그 주동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 회의 주요한 목적은 세계 교회의 사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진로(進路)를 교도(敎導)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급속히 처음부터 각 교파의 교리를 그들의 그릇된 주장대로 통일하려는 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적으로 먼저 교회 실권(교회 정치력, 다대한 사람 수 내지 국가의 권력) 잡기를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런 실권을 잡은 후에 그것으로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 합니다. 사태가 결국 그렇게 되는 때에는 세계 교회의 각 교파는 성경과 교리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런 세계 교회 운동의 실권에게 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그 이후 8년이 지난 1958년 초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글을 씀으로써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글은 장로교회뿐 아니라 다를 교파 교회에도 WCC의 정체를 관망하던 사람들에게 각자의 견해에 따라 헤쳐 모여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형룡 교수는 글을 맺는말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 합동과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총회에 남한 총회의 대표가 가서 참여하고 그 후 WCC의 지부인 대한기독교연합회(NCC)의 일원이 되어 오므로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회의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을 충실히 보수하여 오는 입장에 있으니 이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방심하고 무조건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지도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합동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

1957년 제42회 총회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여 우리 교회는 이 운동의 교회친선과 사업협동에만 참여하고 교파합동에는 반대한다는 결의를 지었다. 이것은 상술(上述)의 대책에 적응하는 결의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교회는 세계적 교회친선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나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어떤 날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 탈퇴할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세 교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에 분립한 고신측과 1953년에 분립한 기장측이 있었다. 그리고 1959년에 총회측이 WCC 회원으로 잔류하기를 찬성하는 통합측(연동측)과 반대하는 합동측(승동측)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윤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정보가 정확했으며 그 운동의 진로에 대한 예측은 적중했는가?

 

3. WCC의 역정(歷程)

 

WCC는 제1차 총회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는 정치적 및 사회적인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공산주의를 용납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교리나 신앙고백은 덮어두기로 했다.

제2차 총회에서도 일치된 선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각 교파와 교회의 전통과 특성을 부인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도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보다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제3차의 뉴델리 총회에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가 제안되었으며 ‘우주적 그리스도’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68년의 제4차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강조되어 교회의 사회 참여가 첨예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학적인 통찰을 기독교 신학에 적극 수용하였으며,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을 정당하고 가능한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비폭력적 혁명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해방신학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 주장이었다.

이어 1969년 3월 WCC의 주최로 제네바 근방의 까르티니(Cartigny)에서 22명의 회교도와 기독신자들이 모임을 가졌으며, 197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국(對話局)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975년의 제5차 나이로비 총회에는 90개국에서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등이 옵서버로 참석하였으며 영성의 문제를 두고 각 문화의 전통적 경건과 극단적 성령 운동의 체험, 동양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 요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혼합 종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제7차 총회는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온 지구를 구원하는데 성령 현존의 중요성 또는 영성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였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에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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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WCC

 

- 문병호 목사,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이 원고는 2013년 합신총동문회수련회 특강 원고이며 “우리는 왜 WCC를 반대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합니다. 1. 한국교회와 WCC. 2. 아홉 차례 총회를 중심으로 본 WCC의 정체성. 3. WCC 에큐메니칼 신학. 4. WCC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허구. 5. WCC의 가시적, 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 편집자 주>

 

1. 제10차 부산 총회의 실상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제10차 총회가 2013년 10월 말부터 약 열흘간 부산 벡스코에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사 42:1-4)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다.

 

 

부산 총회는 140개국 349회원 교회에 속한 5,00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모이는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유엔총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임에서 15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차기총회 때까지 수행할 주요정책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마당’이라고 부르는 몇몇 행사들을 선보일 것이다.

 

 

부산 총회는 ‘생명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지구촌의 생태 문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극복할 경제정의 실현 문제, 새로운 동서간의 냉전 기류를 극복할 군비축소 문제 등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취지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의 의의와 준비”라는 그들의 문건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WCC에서는 폭력극복 10년 운동에 연이어 가난퇴치와 기후변화를 위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자는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부산총회는 이 새로운 운동의 발전과 함께 하나님이 주인이신 생명중심의 문명(Life-giving civilization)을 건설하기 위한 선교적 행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중심의 문명은 우주공동체를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의 생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아시아적 사고로 신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실천하는 기본 방향이 될 것이다

 

이렇듯 부산총회가 주제로 삼고 있는 “생명의 하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명’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폭력을 뿌리뽑고, 가난을 퇴치하며, 기후변화를 되돌려 지구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의 능력에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롬 14:17; 고전 4:20).

 

 

그들이 말하고 있는 “우주공동체를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의 생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아시아적 사고”는 무엇인가? 혹시 그것이 서로간의 원한을 풀고 함께 살아가자는 일부 토속 종교의 상생해원(相生解寃) 사상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은 무엇인가? 혹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동양적 범신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WCC는 제10차 총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2012년 5월 22-25일 ‘부산 커뮤니케이션 선언문’(Busan Communication Statement)을 채택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 전부를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로 여긴다. 그리고 복음을 “커뮤니케이션(소통)”으로, 복음전파자를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 전달자)”로 정의하고, 생명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선언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창조는 커뮤니케이션의 행위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커뮤니케이션은 창조의 행위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모든 생명체들은 무수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세포들이야말로 자기들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다. 동아시아와 여러 토착 민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전체이자, 서로 연관된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우리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이야 말로 생명의 핵심인 것과 인간들은 모든 창조물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낯설고 급진적인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WCC는 “동아시아와 여러 토착 민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거론한다. 여기에는 창조의 하나님도, 생명의 하나님도 없다. 다만 ‘세포’와 ‘유기체’로 표현된 자연이 있을 뿐이다. 성경은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치는데(요 1:4), 어찌 그들은 피조물의 ‘커뮤니케이션’이 생명의 핵심이라고 말하는가?

 

부산 총회가 다룰 주제인 “생명의 하나님”은 단지 자연적인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생명을 돌보시는 분일 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의 영생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철학적 개념들인 ‘통전성’(通典性, wholeness)과 ‘공동 선’(common good)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방식을 따르는 커뮤니케이션이란 통전성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빌립보 2:7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 말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 고난 받는 이들, 차별 받고, 연약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편드셨다는 뜻이다. 정의를 위한 의사소통자들은 자기 자신을 비워 복음의 종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하더라도.

 

WCC는 예수를 무리의 지도자로, 그 무리를 억압에 반항하여 일어나는 민중으로, 지도자와 민중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복음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그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과연 여기에서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생명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WCC는 부산에서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면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가 “타종교와 평화로운 공존과 협력을 해 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과연 이러한 이유가 설득력이 있는가? 한국교회의 제일 특성은 일체 타협 없이 십자가의 도만을 믿는 성도의 믿음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부산 개최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가 공존하며 협력적이라는 점”을 든다. 그러나 실상 개혁주의 보수신앙에 바로 서 있는 많은 한국교인들은 오순절 신앙을 오히려 거부해 오지 않았던가?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은 다른 신을 멀리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인정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굳게 믿는다(고전 1:18, 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전혀 오류가 없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WCC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있는 몇몇 국내 회원교단들이 성경적인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정서를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WCC는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것들을 부산 총회를 통하여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의 정서를 고려하여 어떤 것은 아예 감추고 어떤 것은 덜 드러내려고 하겠지만, WCC 본래의 색깔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일회적 행사와 의식(儀式)에 미혹되지 말고, 예리한 시각을 갖추어 모호한 언어에 숨어있는 그들의 사상을 꿰뚫어보도록 해야 한다.

 

2. WCC를 반대하는 한국교회의 입장

 

WCC는 처음에 147개 회원교회들로 출발했으며 현재 8개 권역으로(유럽,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중동, 남미, 카리브지역, 태평양 지역) 나뉜 140개국 349개 교단에 속한 5억 7천만의 회원들을 두고 있는 초대형 단체이다. WCC에는 정교회를 비롯해서 성공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연합교회, 오순절 교회 등 20개 이상의 다양한 교파들이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다. 그 중 정교회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속한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가입했다. NCCK에 속한 구세군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정교회한국대교구는 WCC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회원으로 가입은 하지 않고 있다.

 

WCC 문제는 한국교회 장로교 교단 분열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를 찬성하는 측과, 51인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이를 반대하는 측의 대립으로 인하여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되었다. 합동측은 WCC가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단일한 교회를 추구하고,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며, 특정 정치 이념에 빠져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서 반대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제44회 총회(1959년, 대전중앙교회-승동교회)에서 “WCC와 그 노선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우리 교회의 거룩함과 또 그리스도의 합일의 속성을 저해함을 확인하였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이에 WCC에 항구히 탈퇴하고 그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계치 않기로 함을 총회에 선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45회 총회(1960년, 승동교회)에서는 “WCC를 탈퇴하고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고”라면서 이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목사들이 “WCC 및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이고 위태로운 것”이라고 서약하게 한 후 목회하게 하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당시 보수신학을 대표했던 죽산 박형룡 박사는 WCC를 “자유주의 광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무분별하게 사회복음을 끌어들이고 경계를 넘어서 타종교와의 교통을 추구한다고 비판하였다. 죽산은 교회가 아닌 세속적 기구를 통하여 교회의 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 간파하고 WCC가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이 아니라 하나의 모양내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WCC 제10차 총회의 부산 개최가 결정되면서 한국교회에는 다시금 이 기구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의 회오리가 일고 있다. 행사를 유치한 측에서는 이를 한국교회 전체가 경사로 여길 “기독교 올림픽”이라고 자축하고 있으나, 반대편에서는 WCC 자체를 순수한 기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부산 유치를 몇몇 교단의 합작품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이 시점에 한국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세우고 이를 계기로 교회의 진정한 연합과 부흥을 도모하고자 “WCC대책위원회”(위원장 서기행 목사)를 구성해서 중앙위원회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그 결실로 2010년과 2011년에 「WCC 신학 비판」과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하여 총회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2012년 총회를 통하여 「‘교회의 하나 됨’과 ‘교리의 하나임.’ WCC의 ‘비성경적,’ ‘반교리적’ 에큐메니즘 비판: 정통 개혁주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라는 제목의 책과 이를 쉽게 풀어 쓴 본서를 함께 배포할 계획에 있다.

 

본 대책위원회가 주도하여 2010년 1월 25일에 19개 교단이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 모여서 채택한 다음의 결의문은 한국교회 전반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함께 동참한 교단은 다음과 같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고려), 예장(합신), 예장(대신), 기성, 예성, 예장(웨신), 예장(개혁국제), 기침, 예감, 예장(재건), 예장(합동중앙), 예장(합동진리), 예장(고려개혁), 예장(합동총신), 예장(합동동신), 예장(보수합동), 예장(합동보수).

 

1. 우리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믿음만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라고 굳게 믿으며, 한국교회 보수 교단들은 힘을 합해 공동으로 한국교회 정체성을 사수하며, 한국교회를 보호할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는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본주의 신앙이므로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초혼제 등 무당굿을 신앙의 행위로 정당화하며, 이를 용납하는 그 어떠한 단체나 기관과의 연합도 단호히 거부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3. 우리는 한국교회 극히 소수의 교파(NCCK)가 참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 개최를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유치하는 대회로 과장 보도하고, 이를 한국교회 올림픽이라고 선전하는 것에 매우 유감을 표하며, 자제해 줄 것을 주최 측과 언론 등에게 엄중히 주문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말씀에 집중해서 교회를 회복하자는 소망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을 거스르는 WCC 부산 총회가 세속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를 확산시켜 한국교회가 서구교회와 같이 몰락의 길에 접어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WCC 총회의 부산 유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WCC의 과거 행적이나 교리적인 성향이 비성경적이라는 점을 이유로 든다. 반면에 유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시대적, 문화적, 인류적 필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WCC 가입 문제로 한국교회는 교단이 분리되는 큰 아픔을 이미 경험하였다. 금번 부산 총회 유치로 그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3. 마치는 말

 

에큐메니즘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교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만 구현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모양과 다름없다.

 

‘에큐메니즘’(ecumenism)은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나온 말로서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와 의미가 통한다. 그것은 ‘우주’ 혹은 ‘전 세계’를 뜻하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진리’ 혹은 ‘질서’를 뜻하는 원리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말뜻에 비추어 본다면, 에큐메니즘 혹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를 떠나서는 논의될 수도, 추구될 수도 없다.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말씀의 진리에 서서 하나님의 시대적 섭리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된다. 대다수 한국교회 교인들은 성경무오(聖經無誤)를 믿고 참 교리의 터 위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WCC는 신학적, 신앙적 모호성에 물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순수한 열심을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입버릇 같이 ‘WCC 반대자들은 잘 몰라서 그럴 테니까 직접 와서 체험해 보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WCC의 실체를 바로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교회가 WCC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 기구가 성경의 진리에 바로 서 있지 못함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WCC 문제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문제이다. 이를 먼저 해결하지 않은 채 그저 와보라고 재촉만 하고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마치 분파주의나 되는 듯이 매도하는 것 자체가 진리와는 무관한 WCC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다음 말씀을 잘 새겨보고 자신의 입장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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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는 각 종교는 각각의 구원의 길이므로 서로 개방성과 존경심을 가지고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수억, 수천만 명, 수백만 명의 경건한 신도를 지닌 종교들은 모두 참 종교라고 한다. 특정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멸하는 진리 체계를 독점할 수 없고, 특정 종교의 가치 규범을 가지고 타종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의 진리 담론이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가 제시하지 못하는 구원을 이슬람, 불교, 힌두교가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헌신하면서도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을 모색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장


미국 클레아몬트신학교의 존 힉(John Hick) 교수는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라고 주장한다. ‘우주적 실재’는 한 분이지만 그 분의 이름은 문화마다 서로 다른 명칭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언어 구조가 상이한 하나님의 이름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헬라인은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하고, 유대인은 ‘야훼’(여호와), ‘엘로힘’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아트만’ 혹은 ‘달마’ 혹은 ‘비로자나불’이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은 도, 천리, 천명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알라’, 한국인은 ‘하늘님’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궁극적 실재라고 하는 이명동신설(異名同神說)을 주장한다.


존 힉에 따르면, 오랜 세월 동안 종교들이 자신의 종교를 세계사의 중심에 놓고, 다른 종교를 자기 주위를 도는 행성 정도로 생각해 왔다. 기독교는 자기를 절대화하고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한다. 예수 중심의 기독교는 행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독교의 우월성 또는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기독교는 ‘예수 중심 모델’에서 보편적 신앙 모델인 ‘신 중심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역사에 출현한 모든 종교는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아홉 개의 행성과 같고,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은 모두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세계사 속에 출현한 다양한 종교는 ‘하나의 신적 실재’를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르게 응답한 결과라고 한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상이하고도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들은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응답이며,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형성된 다양한 인식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가 아니며, 특수한 전통 종교인식이 낳은 ‘우주적 실재’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한다.


존 힉은 ‘하나의 신적 실재’가 과연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에 답하지 못한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역사적, 문화적 상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해석학적으로 의존적 존재라고 본다. 칸트의 인식론을 기초로 한 트뢸치(E. Troeltsch)의 ‘역사적 상대주의’를 반영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이념, 가치, 조직체계는 상대성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 위에 정초하고 있다.


인간이 작은 붓 대롱으로 본 하늘이 하늘의 전부라고 우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붓 대롱으로 본 하늘 역시 하늘인 것은 틀림없다. 존 힉은 이 점을 간과한다. 기독교가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접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리이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영적 암매(暗昧) 가운데 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붓 대롱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특별계시는 인간이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붓 대롱이다.

 

“일곱 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 주장


인도 태생 가톨릭교회 사제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종교다원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개별 종교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무지개 이론을 펼친다. “인류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은 신적 실재라는 순백의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에 투과되어 나타나는 무수한 색깔과 같다. 그 광선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를 통해 굴절된다”고 한다.


백색 광선은 ‘궁극적 실재’이고, 일곱 가지 색깔을 띠고 나타나는 무지개의 색상은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들이다. 세계의 각 종교는 곧 한 개의 ‘신적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반응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역사적 종교는 그것이 불교든, 이슬람교든 신도교든 기독교든 간에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발생시키는 파장들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고 한다. 각 종교가 가진 고유소(固有素), 다양성 그 자체가 다른 종교의 그것들과 더불어 신적 실재를 더욱 완전에 가깝게 드러낸다.


파니카에 따르면 특정 종교의 유형적 특성이 타종교를 판단하는 규범적 잣대가 될 수 없다. 다른 종교 안에는 우리가 믿는 구원 내용이 없으므로 종교로 인정할 수 없다든지, 그 종교 안에는 구원이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이 개별 종교마다 나름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무지개 색상의 하나인 빨강색이 보라색에게 “너는 색깔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고, 무궁화 꽃이 들국화를 향하여 너는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백만 송이의 가짜 장미는 한송이의 진짜 장미와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진짜 장미는 인조장미를 향하여 “너는 꽃의 모양은 갖고 있지만 살아 있는 꽃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 파니카가 진짜 꽃과 진짜 꽃을 대조한 것은 아날로지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진짜 꽃과 가짜 꽃을 대조해야 옳다.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한 생명의 종교, 계시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유사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등잔 모양은 다양하지만 비쳐 나오는 불빛은 동일하다”고 한다. 각 종교의 의례, 상징, 교리체계, 성직제도, 윤리적 계명은 다양하고 서로 다르지만 추구하는 내면의 가치는 동일하다고 본다. 상대주의를 전제로 한 신념이다.

 

“산의 등정로는 다양하지만 호연지기는 서로 통한다” 주장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은 구원관에 있다. 각 종교는 구원에 대한 실질적 이해와 체험을 갖고 있다고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종교에도 그것은 있다고 한다. 구원은 해탈, 모크샤(moksa), 진인(眞人), 지복직관(至福直觀)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각각의 종교에서 나름대로 참 구원의 모습에 도달한 사람들은 공통의 특징을 보인다. 구원을 받은 참 종교인은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실재 중심 혹은 생명 중심의 존재로 삶의 지향성이 변한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전체 생명과 더 높은 진리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생사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을 하나로 꿰뚫을 줄 안다.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한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불국토(佛國土) 혹은 대동세계를 실현하는 데 힘쓴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등정로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 있다고 본다. 등정로마다 산의 풍광이 다르고, 산세나 기후 변화도 달라 어느 길로 산을 오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한다. 등정로가 달라도 일단 정상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통하는 것처럼 어느 종교를 통하든지 절대자 궁극적 실재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구원종교이다. 인격적, 공동체적, 역사종말론적 개념의 구원을 제시한다. 죄 사함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신비한 개체적 몸의 부활 신앙과 영원한 생명을 구원으로 제시한다. 한편 불교는 니르바나(해탈)의 경험을 구원으로 본다. 기타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이라고 일컫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이 영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대비시켜 동일시하는 것은 범주착각의 오류이다. 성경과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서 보면 종교다원주의는 명백한 이단이다.


주목할 것은 종교다원주의가 자유주의 신학과 신신학에 개방된 태도를 취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건전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교단, 이단자들을 제재하지 않는 교단과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은홍  기자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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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주의 종교주의 도전에 직면한 21세기 교회/ 종교의 연합과 일치/ 에큐메니칼 /변종 나르시즘

 

혼합주의·종교주의 도전에 직면한 21세기 교회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의 공격방향은 전방위적이다. 사방이 적군들로 싸여 있다. 교회의 배타성에 대한 일반종교나 사회의 시선은 예전에도 곱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위협받는 절대 진리


진리의 유일성과 구원에 대한 오직 예수는 기독교의 존립기반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종교의 연합과 일치, 교회 안에서의 에큐메니칼을 넘어 타종교와의 에큐메니칼을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폭이 넓어지고 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의 보도, 영화와 인터넷의 왜곡된 정보의 재생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누룩보다 더 빠르게, 광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일부 진보주의나 다원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고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한 구원의 주장은 언론들이나 타 종교에서 매우 좋아하고 흐뭇해하는 메뉴들이다.


한국교회에서 얼마 전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 진보그룹의 여성신학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가부장적 아버지로부터 억압당하는 여성들이나 남성들이 아버지로 소개되는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사회문화적인 권위 가운데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었다.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변해야 하는 쪽으로 주문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돌리는 곡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구원에 대한 왜곡


그러나 하나님만 왜곡한 것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부분도 왜곡시켰다. 감리교의 변선환 학장의 사건은 종교다원주의의 단적인 예다.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은 여러 방법이 있다는 논리로 구원에 접근한다. 일반은총 가운데 하나님이 다른 종교에서 다르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주장이 옳다고 했을 때 한 하나님이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해놓고, 다른 종교에서는 다른 방법의 구원을 제시하는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나님이 말하고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만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신이 한 입가지고 두 말하는 이중성과 거짓말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의 핵심은 기독교를 종교로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종교가 아니다. 굳이 종교로 분류할 때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만, 일반 종교가 세워지는 과정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21세기는 그런 기독교의 독특성을 거부한다. 자기들의 종교와 비슷하거나 동일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종교단원주의와 포스트모던에 부응하는 신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 중에 하나다. 성경이 독특한 영감성을 부인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다양한 길과 하나 되는 종교


미국의 경우도 성 윤리 논란이나 구원의 다양한 길에 대한 수용 폭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미국성공회는 지난 2월 불교선수행자인 케빈 듀 프레스터는 북부 미시건 교구 주교로 선출했다. 또한 4월 초 시애틀 교구의 앤 홀름스 레딩 신부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지만 또한 무슬림이라고 밝힌 뒤에 자신의 직임을 사퇴하기도 했다.


미국 성공회의 이런 경향은 점차 심해질 것으로 신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웨이드 클라크 루프 종교학 교수(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대학교)는 “혼합주의와 관련해 성공회의 문제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며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 자신의 종교에서보다는 다른 믿음체계에서 영적지혜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미국성공회는 2003년 동성애 주교를 선출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혼합주의 확산은 교회 안에 점점 동성애의 문제나 각종 성윤리 문제에 대한 허용이 미국을 넘어 각 나라로 확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동성애 대한 시각은 점점 선이 흐릿해지고 있다.


동성애를 질병의 차원으로 보기시작하면서 모든 동성애자들에 대한 시각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죄를 인권과 질병으로 몰아가고, 포장하다보면 절대 선을 넘어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동성애를 죄라고 지적하는 이들을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폄훼한다는 점에서 참기 힘들고 버티기 힘든 사회적 정죄가 깊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석화 되는 기독교


개신교의 경우도 교회는 딱딱한 껍질로 쌓여진 종교화로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종교생활은 암흑시대라고 하는 중세시대의 교회로만 족할 수 없을 만큼 21세기 교회는 종교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교회의 조직을 위해 이뤄지는 설교가 있고, 봉사가 있다. 사회의 안전망을 위한 노력과 봉사에 분주한 교회가 많아지지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지역교회들이 뛰어든 노인복지에 대한  부분도 한 편으로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해결이 동기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만큼 솔직한가 묻고 싶다.


교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기보다 후원확보를 위한 개인적인 역량과 아이디어를 발휘하는게 옳은가 자문해야 한다. 21세기 교회가 싸워야 할 것은 외부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겪는 복음의 본질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서 있지 않은 가운데 외부의 강력한 도전을 이길 힘은 없을 것이다.


혼합주의, 다원주의, 포스트모던의 도전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하나님 되심의 포기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면 기독교의 진리와 핵심을 잃는다. 다른 것은 변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변종 나르시즘

 


그러나 미국에서 나타나는 ‘변종 나르시즘’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자신에게 효과 있는 믿음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는 종교적 성향이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날 여지가 충분하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할 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복을 주실 것인가를 저울질 한다. 교회 출석은 선택사항이다. 이 선택 사항은 타종교에도 문을 열어놓고 환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령의 인도와 회개케 하는 구원의 역사는 미미하게 일어난다.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공식을 외듯이 믿고,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적이고 의지적인 영접은 매우 위험스러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성공회가 다른 교단보다 혼합주의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긍정의 신학은 미국 교회를 덮고 있다. 자기계발서 같은 설교와 주장이 미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은 “내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는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면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생각’을 ‘믿음’으로 환치했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전자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긍정의 신학을 환호하고, 교회 교육의 주요 메뉴로 가져왔다. 매우 위험한 사상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혼적인 능력은 매우 활발한 문화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가인이 놋 땅에 거하면서 이룩한 눈에 보이는 것들처럼 말이다.


누룩의 성령 역사


그러나 영적인 성령의 역사는 눈에 그다지 띄지 않는다. 매우 느려 보이며,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확산된다. 성격이 급한 이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선동하고, 주장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뭔가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당장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이 없이 감정적인 충만을 성령의 충만으로 오인하면 어떡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누룩을 택해야 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인도하심에 의지하는 의존적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개입하고 통치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권리의 포기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를 향한 도전은 20세기와 다른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전략을 짜기 전에, 대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전에 우리의 순결과 본질적인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21세기에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파도를 넘길 수 있는 힘은 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한 선언 가운데,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앞장서서 나가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그리고 그분만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혼합과 다원의 요구 속에, 우리의 이 답변은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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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요한23세 종교간 대화/ 배타주의 포괄주의/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위기고찰과 대응자세


현대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시대이다. 아득한 인류의 기원 이래 인간의 의식이 확대되고 그 의식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각각 그 자신의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해왔다. 다양한 종교의 공존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수세기 동안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이 세계사에 긴장을 조성해 왔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종교 자체의 본질과 종교들간의 상호작용,나아가 현재 팽배해지고 있는 다원주의적 경향속에서 종교의 역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기독교 절대주의 (Christion absolutism)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위한 주제가 된 동시에, 다원주의는 기독교인에게 큰 도전과 위협이 되었다.


기독교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유일한 종교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인류는 어느 특정종교 하나가 제시하는 신념체제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없도록 다원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논리들이 혼란하게된 다원주의 시대속에서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과 다종교 시대속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과 주요사상,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반응,내제하는 문제점등을 살펴봄으로서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A.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


아담과 하와 이후 부터 지금까지, 종교다원화의 문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 왔다. 구약 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 문제,교부시대의 기독교와 고전문화의 관계문제,그리고 현대의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절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에 의하면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최근 한국에서 퍼져가는 종교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다원주의와 때를 같이한 신학이다. 이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또한 종교다원주의의 발생점으로 본다.  한편,과학의 발전도 들수 있겠다.

 
가. 선교사들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게 되며 데오도시오스 황제 치하(379-395)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로마 제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었다. 이에 따른 18,19세기의 기독교 선교정책은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이었다. 서구의 종교가 동양의 나라를 점령하면,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점령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확산에 도움을 주지만,정복식의 선교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그 후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선교상황이 이론과 실제 양면 모두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자,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와 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비교종교학자들


비교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치(Ernest Troeltsch,1865-1923)가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했으며,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렇듯,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다원주의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다.

       

 

다. WCC

 

WCC안의 다원주의적 동향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한 제2차 세계선교 협의회(IMC)에서 이미 폴(K.T.Paul)과 차오(T.C.Chao)에 의하여 나타났다.

 

그리고,종교다원주의적 관심은 1938년 탐바람에서 개최한 제3차 IMC대회에서 크래머(H.Kraemer)와 충돌을 격은 후 잠잠해 졌다가,1950년에 타종교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61년에는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3차 WCC총회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총회에서 인도신학자 더바너난단(P.Devanandan)은 피조물의 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타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체험을 혼돈함으로써 쟝교뎌?隙瑛퓔? 수립하려고 했다.

라. 과학의 발전

 

과학의 발전도 종교적 다원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고 볼수 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롬부스,마젤란등의 탐험으로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기독교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역사,인류학,과학 연구가들이 인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되자,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서구의 기독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긴급하게 일어났다.

 

B. 종교다원주의의 중심사상

       

가.종교의 상대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사상이다.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상대성을 띈다는 것은 기독교와 큰 차이점이 될수 있다.

 

트뢸치는 "역사주의에 의한[순전한 상대주의 ]역사주의의 극복"에다 초점을맞추었다.   뢸취의 역사주위에는 세계에 내재할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초월적이기도 한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즉 하나님의 실재를 배제한다. 그리고,그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실질적인 근거를 오직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적 혹은 "과학적" 관찰에서만 온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순전한 상대주의의 심각한 가능성과 싸워야 했다. 그의 "역사의 형이사학"에도 불구하고,그의 최후의 말은 "상대성 속에 있는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트뢸취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순전한 상대주의에서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트뢸취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나. 신념의 동일성

 

세계 60억 인구중에서 15억만이 예수를 믿고있다. "나머지 45억은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물음들 속에서 모든 종교는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만약,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 다면 시간과 공간,문화와 상황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며,깊이 관찰해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단지 모든 문화와 상황 배후에는 하나의 신,즉 공동의 본질이 있고,이것에 도달하는 방법이 각 종교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의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것이 되버린다.


다. 심리학적 기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의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같은 학자들이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서 모든 종교를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성을 부정한 것이 된다.          

 

 

C.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의 반응


가. 기독교

 

기독교는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혹스러한 문제였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주장은 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근거해 왔다. 그것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조에 의하여 교회는 스스로 모든 진리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는 고립된 생활을 자랑스럽게 영위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하면서 다른 종교와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슬로건을 공포한 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화를 겪게되었다. 다른 종교 전통들과 대화를 시작했고,'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포기되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만남에 대한 반응은 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1)폐쇄적인 배타주의

 

바르트는 모든 종교를 은총에 의한 계시의 경험과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기독교를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2)개방적인 포괄주의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독특성,규범성을 주장한다.

   

①  칼 라너(Karl Rahner)

 

칼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 라너는 다음의 네가지 명제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한다.

 

첫째,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절대적인 종교로서 자신을 이해하며,그러므로 어떤 다른 종교도 그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복음이 한 개인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비기독교적인 종교는 그 개인을 위해서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은총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셋째,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성원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서 대할 것이 아니라,익명의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넷째,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로서가 아니라,오히려 역사적인 선구자,다른 종교에 숨어 있는 실재로서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4가지 명제를 통하여 라너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은 은총과 그것에 대한 명백하고 완전한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동시에 수용한다. 결  라너의 입장은 타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된다는 교회 중심주의적 입장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타 신앙인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밝히고,타신앙도'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세계의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려한 것일까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② 폴 틸리히(Paul Tillich)

 

폴 틸리히는 유한적인 현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계시 경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고,모든 종교에는 계시와 구원 능력이 있다.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 의해 수용되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며,따라서 신비적,예언자적,세속적인 종교비판이 가능해진다. 틸 히는 다른 종교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타종교들로부터의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예로 제시한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대신 자기 비판과 대화를 모색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는 역사상의 모든 종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열등한 다른 종교들을 배재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최종적인 계시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타종교를 관계를 맺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관계적 절대성(relational absoluteness)'이 입증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종교적 다원주의

       

① 존 힉(John Hick)

 

힉은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오늘날 서구 신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과 상이한 신 중심적 모델을 제안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인이나 힌두교인,혹은 유태교인들을 "익명의 기독교인(an anonymous Christion)"으로 간주하는 칼라너와 같은 신학자도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위치시킨 해

묵은 교회안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그래서 우리는 경건하고 독실한 비기독교인들을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의 기독교이거나,혹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힉은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유로 들어 그의 입장을 전개시켰다. 프롤레마이로스의 천동설에서는 지구를 다른 혹성들이 그 둘레를 공전하는 태양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프롤레마이오스 시대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종교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주위를 맴 도는 것으로 여겨지며,기독교와의 원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힉은 그러한 프롤레마이스적인 접근이 다른 종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힉은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힉 신학은 칸트적 배경위에 있다. 하느님은 인간 경험에 의해 구조화된 선험적인(a priori) 관념이다. 그러나 잠재된 문제는 힉이 "신"이란 용어를 불교인이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불이일원론)의 힌두교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선험적인 것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② 파니카(R.Panikkar)

 

파니카는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대화의 삶을 살아왔다. 로마 카톨릭 내에서,파니카의 저술은 종교간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종교들 사이의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범 세계적'일치운동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종교적 차이는 생동적인 힘을 발휘하며,'근본적인 종교적 사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각각의 이름들은 '순수하게 초월적'인 것만도,순수하게 내재적인 것만도 아닌 그 신비를 풍요하게 규정한다.

 

파니카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의 진정한 영역 차원이 기독교적 사상안에서 함께 만나는 접합점이다.                       

 


D.종교다원주의에 내재하는 문제점

          

가.선교 활동

 

어려움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자가 자신의기준을 타자에게 부과하는 문제가 타자를 개종시키려는 노력으로 지속되면서 발생하는 선교 활동에서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확신을 타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어려움은 자신의 설교나 가르침을 타자에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과 방향성이 투쟁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될때,그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다원주의는,우리 자신의 특수한 종교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늘 요구해 올것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는 표현 방법과 규정내용 및 의식이 다를 뿐이지 결국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또는 다른 명칭의 조물조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서,어떤 종교든지 열심히 그리고 종교가 요구하는 율법과 교리를 성실하게 준행하기만 하면,구원을 받게 된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한편 또다른 주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데,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문화권에서 믿고 있는 종교를 성실하게 믿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불교도나 회교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나. 평등

 

현대의 종교다원주의에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평등"에 대한 헌법상의 진술(미국과 인도의 헌법속에서 발견되는)과,개인의 이해에 있어 각 개인들을 영적인 깨달음의 다양한 단계들에 걸쳐 있는,따라서 평등하지 않은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는 종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러한 갈등이 생길때,평등과 요청은 힌두교와 같은 종교의 교훈과 관행들을 합법적으로 짓밟고,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다원주의에 의해 야기된 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전통및 인식과 세속적인 전통및 인식이 서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다. 배타주의

 

종교다원주의의 창조적 기여에 대한 한 가지 위협은 때때로 몇몇 종교인들이 다원주의의 도전에 투쟁적인 배타주의로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대응은 현대 이란이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보통 영적인 침체와 "종교적 폭력"을 야기시킨다는 점에서 항상 유감스러운 것이다. 가정에서처럼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차이의 수용은 선을 위한 강력한 촉매가 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마음은 항상 파괴적이며,어떤 종교 전통에서는 진정한 종교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E.종교다원주의에서의 기독교의 대응책

       

가. 기독교적(성서적)인 자세

 

한스 큉(Hana Kung)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감신대의 변선환 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함으로,기독인만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이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은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또 홍정수 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한다."라고 말을했다.

 

이와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인도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우선,"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의 질문에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 존 힉(John Hick)은 "예수를 성육하신 성자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한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진술인가? 그 의미는 문자적인가,비유적인가,상징적인가,신화적인가,아니면 시작인가? 그리고 그는 예수가 사람이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원이 사각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과 주장들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성자 하나님이 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계시며,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특성을 지니게 되셨고,그 양자가 그분의 신적인 인격의 통일성 속에서 '유지되고'결합되었다.그러므로 그분은 한 인격으로서 참 하나님이시며,참 사람이시다. 또한,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라고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영역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또 다른 주장인 본질은 하나이고 이름만 다른 하나님이란 주장에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출20:#i  너희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찌니라"(출23:24),"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시96:5),"너희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는니라"(사44:6)

 

하나님께서 만약 타종교와 같은 신,이름만 다르지 동일한 신이라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겠는가? 다른 한편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몇 교수들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여 큰 혼란을 야기 시켰는데 성경은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4:12),"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8)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하며,이렇듯이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2:8)라고 말씀하신다.

       

 

나. 대화의 자세

 

한스 큉은 [세계 도덕성의 과제]라는 책을 선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다. 종교 평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종교대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결국 추구되어야 할 세계도덕은 서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로 부터 비로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교진리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광신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종교적 평화는 하나의 참된 종교에 의하여 달성되고 보장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배타주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종교가 기독교에 의해서 "완성"혹은 "보다 성숙"되어질 수 있다면,기독교도 타종교에 의해서 "보다 더"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대화를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대화하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자기 신앙을 감추고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대화에 이르는 길에서 신의 보편성과 종교의 특정 진리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향한 인간적 욕구가 모두 강조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 다른 빛을,그것을 필요로 하는 영혼의 서로 다른 세계에 비추어줄 수 있는가?" 라  타고르가 제기한 물음이 함축하고 있듯이 서로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대화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보다 나은 기독교인으로 영적인 깊이를 더해야 되겠고 사랑과 봉사의 헌신적 삶을 통하여 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것이다.

       

 

다. 선교에서의 자세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선교관은 성경적인 선교관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원주의적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므로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는 요청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개종을 목적으로 선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전도와 하나님께로의 회심이 아니라,오히려 탈기독교적 탈고백적,탈사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선교에서 우리는 먼저 상황인식을 먼저 해야된다. 복음은 어느 선교지에서든지 현지문화와 충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려면 선교현지의 문화를 보면(물론 문화 자체를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기독교 문화 보다 열등하다. 그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그 문화속에서,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진리인 복음의 메시지가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른 즉,다양한 "포장"을 하고 전달될때 선교지의 상황은 쉽게 파악될 것이다.

 


둘째,복음의 순수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복음의 순수성은 먼저 성경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그 내용의 정확성과 무오성을 믿으며 크리스챤의 신앙과 삶에 있어 최선의 기준과 척도가 된다는 것을 믿어야하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문화나 상황에서도 수정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메시지이며,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영적인 원리이다.                        


결론

       

현대의 다종교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간의 갈등이 있어서는 않되고,종교 사이의 평화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해 긴요한 조건임에도 종교간의 갈등이 전쟁과 다툼을 유발시키는 어두운 현실임을 보아왔다.

 

종교는 개인은 말할것도 없이 집단과 사회 더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평안과 화목,행복등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임을 안다. 그래서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 갈등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대화를 통해서 극복해야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타종교를 이해하고,또한 타종교에게 우리의 종교를 이해시켜야 한다.

 

다종교들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는데,타종교들이 말하는 신(god)은 우리 기독교의 신(God)과 비교될 수 없을 뿐더러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우리 기독교의 독특성과 당연한 진리들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취급하여 갈등을 일으켜서도 않된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도 타문화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속에 살며 그 문화속에서 서서히 문화와의 충돌없이 전해야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또,기독교의 구원은 타종교들의 구원의 개념과 다름을 알고있다. 원죄로 인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굴레속에서 해방되어,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며,"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는 주장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많은 논쟁들 속에 성경은 답을 주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14:6),"다른 이로써는"(행4:12)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종교 상황속에서 기독교는 흔들리지 말고 진리를 보존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넓게 전해야한다.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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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정 수. [다종교와 기독교]. 서울:조명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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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wegung. Frankfurt:Dialog mit andern Religlonen,1972

Karl Rahner, Christianity and the Non-Christion Religions. in Chris-

              tianity and Other Religious,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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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old,Coward. 한국종교연구회역.[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서울:서광사,

                                   1990.

Gustav Menshing. 변선환역.[불타와 그리스도].서울:종로서적,1987.

차 옥 승."종교다원주의 세계에서의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 관한 연구",[신

                             학사상].1990.여름.

박 광 철."토착종교와 기독교선교",[목회와 신학].1991.9.

김    진."현실과 요청",[신학사상].1991.겨울.

유 동 식."한국종교와 타종교",[기독교사상].1966.

위 거 찬."종교간 대화를 지향한 종교사 신학의 연구".미간행 박사학위 논

                   문. 서울:서울 대학교,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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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의 흐름

 

현대인은 싫든 좋든 다원주의 사회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최대의 난점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에 대한 도전을 어떻게 수용할까하는 점이다.


  

다원주의를 언급함에 있어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과 종교적 다원성(religious plurality)는 구분되어야 한다. 다원주의와 다원성은 같은 것은 아니다. 다원성은 단순히 기술적인 용어(descriptive term)이다. 이 용어는 많은 종교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다원주의는 하나의 정책이나 계획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사실을 진술하는 것에 자기 자신을 제한 시키지 않는다.  종교적 다원성은 문화적 다원성과 같은 것으로, 그 안에서 불가피하게 피할 수 없이 종교와 문화(혹은  오히려 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가 만나게 되고, 이들은 합께 살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는 곳은 어디든지 종교 다원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원문화주의처럼 종교다원주의는 같은 마을이나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주장되는 사회적 이론으로, 인간은 종교적 가치를 포함하여 서로의 가치를 수용해야하며, 그들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원주의의 기본전제는 모든 종교는 동등하거나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애서 출발한다. 이것은 각종교의 창시자나 그 종교의 배후에 있는 인물들이 동등하게 타당하거나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직면한 오늘의 기독교를 페린더(Geoffrey Parrinder)는 제3의 종교개혁으로 보고 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대하여 일으켰던 개혁과 19세기의 신학적인 물결을 제2의 종교개혁으로 보고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와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을 제3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명되어진 종교다원주의의 배경을 살펴 보도록한다.

 

 

종교다원주의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1. 에른스트 트뢸치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한계가 있고 진리와 실재를 바라 보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인식을 정직하게 한 기독교의 종교 사학자는 트뢸치 였다(1865-1923). 그는 본 대학, 하이델베르그 대학, 베르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가장 위대 했던 종교 사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트뢸치는 종교적 역사적 다원주의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러한 다원주의의 실재가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관해 배운 바와 어떻게 충돌하는가를 실감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시대의 징조”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교는 부적합성과 맹목적 신앙의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트뢸치는 그의 시대의 역사적 의식과 그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들 속에서 인식할 수 있었던 바,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위임 및 가치들에 대한 필요성, 이 양자 사이의 갈등과 주로 씨름 하였다.


한편으로 19세기의 지적 계시 및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의식이 있었다. 인간은 단지 이성적, 사회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또한 “역사적” 존재 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여러 분야의 학자들은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것과 인간이 생산해 내는 모든 것은 그의 역사적 콘텍스트에 의하여 한계 지워지며 역사적 발전의 법칙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콘텍스트는 하나로 획일화되지는 않으며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콘텍스트 내의 모든 것들은 -인간의 문화와 지식 전체를 포함해서- 제한적이고 동시에 변화 한다. 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이러한 것은 다른 역사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그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인간적 업적들의 역사적인 성격은 모두 절대적인 것들, 즉 “하나이며 유일한” 혹은 불변의 진리를 배제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확실한 불변적 진리는 역사적 의식 및 그것이 부과하는 상대성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트뢸취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갈등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역사적 상대주의 상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트뢸치는 신은 실로 초월적이며, 유한자 보다 크시고 유한자와는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적 현존은 유한한 역사의 전개 속에서 발견 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그의 생명을 갖고 있다고 본다. 신성 혹은 절대자는 역설적으로 역사를 초월한 동시에 역사 안에 존재한다.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는 참여, 연속성, 그리고 공유의 형식이 있다. 트뢸치에게 있어서 신은 “역사와 인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트뢸치는 이것을 인간의 정신적 내부에 있는 “종교적 아프리오리”-인간 본성 속에 새겨져 있는 바 신성에의 선천적 정위 또는 신적인 경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트뢸치에게 있어서 이러한 종교적 아프리오리, 즉 신성한 것을 향한 타고난 충동은 단지 개인의 내적 경험 속에서만 -다시 말해 오로지 개인과 신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만- 인식되고 실재되는 것은 아니었다. 트뢸치는 개인의 중요성을 고창한 것 못지 않게 우리는 본질 적으로 오직 역사 내에서만 존재 할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을 경험 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임을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아프리오리는 오로지 역사적 과정 안에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고 경험 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들이 등장한다. 종교들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의 신에 대한 느낌이 역사 내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띄게 되는 바 매개체들이다. 종교들과 종교적 아프리오리 사이에는 상호 의존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 되어 있는 종교적 아프리오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 종교적 아프리오리는 종교들 없이는 구체적으로 존재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뢸치의 입장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모든 인류 속에 작용하고 있는 보편적 계시의 구체적이며 독립적이고 다양한 현현인 것이다. 트뢸치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은 공통적인 그 무엇, 즉 신의 현존 또는 신의 계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종교는 그 현존의 서로 다른 역사적 현현이기 때문이다.


트뢸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는 그의 저서 ꡔ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종교사ꡕ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절재적 종교가 아니며, 어떤 주어진 시점에 그것의 환경을 구성하는 역사적 조건들로 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유일회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종교의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의 불변적, 최종적, 무조건적 실현이 아니다. 다른 위대한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그 역사의 매 순간에 있어서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며, 모든 개별적 역사 현상이 직면하게 되는 모든 제한에 종속되어 있다”


트뢸치는 이렇게 종교의 상대성을 말하였는데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교의 우월성 내지는 규범성을 주장 하였다. 트뢸치가 주장하는 종교의 우월성의 기준은 두 가지 였다. 첫번째 기준은 그 종교가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는데 성공 하였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기준은 영성과 관계있는 것이었다. 이 기준을 적용 함에 있어서 트뢸치는 원시 종교와 윤리적 영적 위대성을 가진 종교들로 나누 었다. 트뢸치는 전자는 최고의 종교적 가치들의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후자의 범주는 다시 구분하여 궁극적 존재를 다시 비인격적 존재로 보는 종교들(동양종교들, 힌두교 그리고 특히 불교)과 인격적으로 보는 종교들(유대교,그리스도교, 이슬람교)로 나누었다.  이 두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임을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그는 또한 대담하게도 종교사 속에서 인격주의적 종교들의 보다 우월한 가치를 가리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격주의적 구원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의미있게 발달된 종교적 삶의 세계이다’라고 했다.


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트뢸치의 견해를 따를 경우 기독교의 핵심적인 확신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 즉 나사렛 예수는 역사 내에서의 신의 유일회적 성육신이요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라고하는 확신과 상충함을 알 수 있다.


트뢸치는 모든 종교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 주로 윤리적인 면에서 종교의 우열을 주장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토인비

 

토인비는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분명하고 떳떳하게 역사가로서의 그의 작업에 신학적, 혹은 종교적 관심을 이입 시켰다.


토인비는 종교는 본질과 역사 안에서 그 역할에 대한 분석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시작했다. 각개 종교 안에는 “본질적인 권고와 진리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비본질적인 의식과 명제가 있다”고 그는 보았다 즉 모든 종교에는 각기 공동의 본질이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독특한 특징을 소유하기도 한다고 본 것이다.


토인비는 7개의 중요한 세계종교(소승불교,대승불교,힌두교,유대교,이슬람교,그리스도교 및 배화교)에서 발견한 공통적인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1)우주가 궁극적으로 신비적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부터 나온다. 세계의 의미는 단순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인간성 안에 내포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2)우주의 의미는 절대적 실재 안에서, 그리고 우주 안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주와 동일시되지는 않는 현존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3)그리고 이러한 현존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갈망하는 선도 포함 한다. 그래서 인간성은 이러한 실재를 경험하려고 할 뿐만이 아니라 이와 조화 하려고 한다. 4)이러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들은 스스로 그의 내적 자기 중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각 종교들의 중요한 차이들은 종교의 비본질적인 것들 안에서 발견되어지는데 다음과 같이 그것을 열거 한다. 거룩한장소들, 제의, 금기들, 사회 관습들, 그리고 특별히 신화들, 교리들, 신학 학파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토인비의 보다 중요한 주장은 이러한 비본질적인 것들은 항상 재평가하고 폐기하고 대치하고 조정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라야 종교는 항상 변하고 있는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또한 종교에 있어서 공동의 목적이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그는 모든 종교의 기원은 악에 대한 인식, 즉 인간의 자기 이익이 세상 위에 초래케 할 수 있는 황폐성에 직면하는데 기초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느 종교도 다른 종교들과의 참된 교류 없이 문화적으로 고립된 채 자기의 길만을 가는 경우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오히려 토인비는 다양한 세계의 종교들을 “어느 점에서도 우위성을 가질 수 없는, 종교 수만큼의 세계적인 디아스포라들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세계 도처에서 서로 혼합 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서로 다른 문화적, 영적 유산들은 점점 “전인류의 공동재산”이 될것이라고 보았다.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토인비와 일치하여 종교 안의 공동의 핵을 인정하는 사람들로서는 칸트, 쉴라이에르마허, 오토(Rudolf Otto), 하일러(Friedrich Heiler), 호킹(Ernest Hocking), 슈리 라다크리슈난(Sriadhakrishnan) 등이 있다.


토인비는 종교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본질적인 것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서 그것은 늘 폐기되고 재조정 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심리학적-인간학적 사실과 상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어떤 구체적인 형태 혹은 상징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든 종교 안의 보편적인 것은 단순히 취해지기 쉽게 거기 그냥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그체적인 현현을 통해-보편적인 것이 설혹 항상 어떤 구체적인 표현의 구속력을 깬다고 하더라도-그 자신을 현시화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공통적 본질을 지닌다고 본 토인비의 종교 보편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규범성,궁극성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신념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기도 한다.


토인비를 비롯한 종교 보편론자들이 가졌던 역사적 특수종교의 배타성을 비판한 점은 높이 살만 하지만 역사적 종교로 하여금 특유한 생명력과 고유한 유형적 특징을 제거해 버린 과오를 범했다고 할 수 있다.

 

 

3.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적 종교 다원주의

 

인간의 ’마음‘이라고 포괄적으로 부르는 ‘정신’(Psyche)의 바다 심연에 모든 종교의 공통적 원형이 해저의 금광맥 처럼 놓여 있다고 주장한 것은 스위스의 분석 심리학자 칼 융의 인간 심성론은 특히 그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론에서 집약적으로 표현 된다.


칼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개혁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 났으나 곧 그리스교에 대한 그의 아버지와의 신앙심을 끊었다. 융의 연구의 결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동본질’과 ‘상대성’ 그리고 세계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을 일관성있게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칼 융의 무의식론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프로이드가 초기에 생각 했던 것처럼 의식으로 부터 억압되어 생긴 것만으로 구성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으면서 의식에 의해 그것이라고 인식되지 못한채 정신 작용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특히 개인의 출생이후 특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 무의식’과는 다른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성격을 띄게하는 ‘집단적 무의식’ 또는 ‘보편적 무의식’  을 강조 하였다.  무의식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기도 한데 만약 무의식이 각 개인 속에 존재하는 보다 깊은 우물이나 샘으로 간주 될 수 있다면, 모든 개인적인 우물들은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곹통의 지하수로 합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가지의 근원적 유형(원형,Archetype)들에 의해 구성 된다. 근원적 유형 또는 원형이란 지리적인 차이,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계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 유형을 말하는데, 이것은 신화를 산출하는 그릇이며 우리의 마음 속의 종교의 원천이기도 한것이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 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신관념은 심리학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무의식과 그 안에 담긴 신의 이미지의 현존으로 부터 기존 종교의 본질, 그것들의 차이, 그것들의 유사성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내면서 모든 계시가 개인적, 집단적 무의식 속에 그 기원을 가지며, 최소한 그 기원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것 때문에 계시는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이다. 계시는 안으로부터 말하는 신 체험이며, 본질적으로 이것은 모든 인간존재에게 있어서 동일하다고 한다.


윌리암 제임스도 융과 같이 공통의 심리학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종교들은 광범위하고도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종교의 모든 영역을 살펴 보면 거기에 편린되어 있는 사상체계는 상당한 다양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행동은 거의 비슷하다. 왜냐하면 스토아 철학, 기독교, 불교의 성인들은 그 실천 면에서 보면 그 삶에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원에 대하여 마르틴 부버와 다른 많은 신학자들은 융이 초월적인 신을 인간의 한계 안에 가두어 놓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부버의 견해로는 융이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 시켰다는 것이다. 즉 신은 신성에 대한 능력과 느낌과 의식, 자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융은 신과 유한자는 각각 안에서 두 존재를 가진다고 보고, 또 이들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가 없이는 실재할 수 없다고 본다.


종교에 대한 융학파의 접근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는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에 의하여 제기 되었다. 즉 이들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이며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융의 관점은 예수가 구원을 이룬 것은 주로 그가 무엇을 행함에 있어서가 아니라(예를 들면 신의 빚을 갚는 행위 같은)무엇을 계시함으로써-인간을 깊이 감동 시켜서 그들이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의 이미지와 삶의 비전을 보여 줌으로써 -라고 보아서 전통적인 구속론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대로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 공동본질 그리고 심리학적 기원 주장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 통찰과 관심을 제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너무나 단순하고 획일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종교를 상대적으로 파악한 트뢸치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도록 촉구하고, 우리를 갈라 놓았던 문화적, 역사적 장벽들을 극복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들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기독교의 핵심적 확신중 하나인 나사렛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너무 단순하게 상대화 시켜 버릴 수 있다.


공동 본질을 주장하는 토인비와 그의 지지자들은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의 차이, 신앙과 집적된 전통의 차이, 혹은 종교의 내적 중심과 신조, 법전, 의식에 나타난 그 외적 표현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차이는 정당하며 사실상 불가피 하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 본질적인 것을 찾기 위하여 비본질적인 것을 간과 한다면 잘못하면 본질적인 것마저 잃어 버릴 수도 있게 된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현현을 통해서만 자신을 현시화하는 것이다. 종교의 공동본질에 대한 모든 경험과 모든 진술은 일정한 비본질적인 것들과 관계하고 있는데 이들 공동본질학파는 이를 간과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융에 의해 발전된 신과 무의식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인들에게 신과 세계 사이의 이원론을 인식하고 극복하라는 도전을 했다. 그러나 이들 융과 종교심리학과는 그들의 주장이 일종의 환원주의(reductionism)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현대 종교 다원주의의 토양을 준비해온 우리 시대의 정신적 상황을 트뢸치, 토인비, 칼 융을 통해 살펴 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태동하기 시작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나타난 반응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를 살펴 보도록 한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입장

 

1. 보수 배타주의

 

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태도, 특히 보수적인 입장에 대하여 말할 때에 복음주의를 빼 놓을 수 없다.


“복음주의적 부흥”이라는 말은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의 감리교 운동, 북미의 대각성 운동 등에 의해서 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발흥된 광범위한 운동을 포함하는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 그 말은 금세기에 접어 들면서 근본주의의 형태로 형성된 새로운 그리스도교 형태를 가리킨다. 한편 근본주의는 1910년과 1915년 사이에 ꡔ근본주의ꡕ라는 제목의 12권 분량의 총서가 수백만 부가 팔려 나가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격을 시작함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계열 속에서 분열이 일어 났다. 1940년대,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근본주의의 신학적 확신에 동참했던 사람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신학자와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논쟁 지향적 심성,반지성주의,사회적 무관심에 반기를 들었다. 1941년 이들 반항자들은 “미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결성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기본적인 신학적인 관점들을 공유했다: 1)성서의 문자적 영감설,무오성,절대 권위, 2)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며, 인격적 신앙 경험을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 3)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킬 절박성에 대한 단호한 위임, 4)현대신학, 특히 역사비판적인 성서해석 방법에대한 불신 등이었다.


이러한 복음주의도 다시 분열 되었다. 1960년대, 특히 1970년대 이래 복음주의자들은 현대 세계와의 보다 적극적인 조정을 요구하여 왔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움직임은 이른바 “신복음주의”운동을 탄생 시켰다. 이들의 관심은 세가지 영역으로 집중 된다: 1)이들은 교회일치에 대해  개방적이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 한다. 2)성서의 절대 무오성에서 벗어나 오히려 성서의 ’제한된 무오성‘혹은 ’제한된 무오류성‘을 역사나 과학의 문제에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의 실천적인 문제에서 확신한다. 3)이들은 과거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단순했고 그들 자신이 압박의 현상 유지를 위한 수호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분열된 복음주의의 각 계열은나름대로의 주장을 가지고 분열을 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노선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부류의 집단은 복음주의 내의 아주 중요한 발전을 함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의 복음주의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들은 신과 인간의 샹태에 관한 지식의 절대적 출처로서 성서가 가지는, 성서가 무오한 것으로 간주되든 안 되든,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수한다.이들은 또한 세계의 유일한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보편적 주 되심과 그의 구원의 능력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필요성을 선포한다. 끝으로 이들은 선교를 통해서 모든 백성들에게 주 예수를 증거 함으로써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게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른종교들의 이해에 대한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의 일반적인 모습은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프랑크푸르트선언”(Frankfurt Declaration)에서 분명하고도 힘있게 표현 되어 있다.


이 선언의 입장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제1차적인 참조의 틀은 성서이고, 오직 성서일 수만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른 종교들에 대한 성서의 판단이 제시 된다. “구원은 단 한번, 영원히 인류를 위해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십자가 사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구원은 “오직 신앙의 참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 세계관들도 그리스도 신앙과 유사한 구원의 길들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은 거부한다”이것은 그리스도교 교회와 다른 종교들의 사이에는 “본질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거칠고도 비타협적인 성격은 1974년 7월16일에서 25일까지 스위스 로잔에서 모인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약화 되었으나 그 기본적인 메세지는 재확인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성서의 절재적 권위,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그리고 그에 따른 복음주의의 절박한 요청을 강하게 재확인 했다.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들 혹은 이데올로기들을 통해서도 똑 같이 말한다고하는 일종의 절충주의나 대화를 일체 거부 했다. 다른 종교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은 분명하게 거부 되었다. 이 대회는 “그리스도교의 사회적인 책임성”을 인정하고 “성의 있게 들음으로써 이해에 도달하려는 대화의 방법”의 필요성을 인정 했다.


1989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로잔대회(Lausanne Ⅱ in Manila)는 세게의 급격한 변화를 의식하고 오늘의 사회와 타종교, 이데올로기의 변천상황과 그들의 도전을 토의하고 그에 따른 신학 정리도 하였다. 이 대회를 통하여 로잔 신학은 타종교와 연관 시킨 어떠한 상대주의나 혼합주의도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마닐라 선언은 “다른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또 다른 길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영성은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이른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한다. 또한 마닐라 선언은 기독교가 선교전선에서 “타종교 신앙인들에대한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왔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회개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자도 모든 사람이 설혹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개방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언급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때문에 흔히 갖기 쉬운 배타적이고 소외적인 태도를 지양하려고 마닐라 대회는 애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닐라 선언은 “타종교와 대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음 그리고 부활에 나타난 그의 유일성을 적극적으로 증거 하면서 결코 타협조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의 선민의식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같은 태도를 지니는 타종고들과의 마찰로 인한 전쟁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기독교 국가 설립을 목적으로 비기독교인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통치자의 기반을 구축해 줄 염려가 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뜨거운 확신과 선교 열정, 성서에 대 영적 신뢰와 복종, 기독교의 고유한 초대교회 케리그마 언어 속에 표현된 메세지를 지키고 보존하며 손상 없이 전수 시키려는 전통에 대한 충실함, 또 무엇보다도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주적 주권에 대한 고백 등은 종교 다원적 세계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에 공헌 했다고 볼 수 있다.

 

2. 개방적 포용주의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에 관한 계시 체험을 동반하지만, 구원계시의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포용주의는 타종교들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대화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포용주의를 크게 개신교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카톨릭의 노선, 이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카톨릭의 태도는 개신교의 태도 보다 더 진보적인 형태를 띄고 있으며 종교 다원주의를 향해 나가고 있다.


이 유형은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 독특성, 규범성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신학자는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칼 라너이다.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론에서 하나님이 보편적 구원의지와 구원을 위해 교회에 소속해야할 필요성을 동시에 받아 들인다. 이를 위해 라너는 전 인류를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 한다. 여기에서 비그리스도교인들도 선험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 됨으로써 이들에게 특정한 그리스도교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너는 중세의 ‘자연과 은총’이라는 도식을 끌어 들인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로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 시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신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자기 전달은 신이 자신을 알릴 수 있고 신의 자기 전달을 받아 들일 수 있는 피조물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을 그의 계시 속에서 인지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를 실질적으로 ’그리스도교성‘의 동일한 평면 위에 세운다. 그러나 교회 소속성과 상이한 등급을 강조 함으로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을 보존하고자 한다.52)  그러나 교회 소속성의 등급들이 각각 다르게 규정되더라도 모든 인간은 교회에 속한다. 결국 라너의 입장은 타 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 된다는 교회 중심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라너는 타신앙인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밝히고 타신앙인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뜨리려고 했다.


개신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성령의 편재적 활동에 근거를 둔 개방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유한적인 현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계시 경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모든 종교에는 계시와 구원의 능력이 있다.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 의하여 수용되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며, 따라서 신비적, 예언적, 세속적 종교 비판이 가능해진다 고   보았다.  틸리히는 다른 종교들을 비판 하면서 동시에 타종교들로 부터의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예로 제시한다. 또한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대신 자기 비판과 대화를 모색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자기 비판과 대화의 목적은 종교들의 습합이나 어떤 힌 종교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의 종교의 심층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틸리히는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독특성이 영적인 자유로 스며들고, 인간 실존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다른 표현들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현존의 비젼으로 스며들 수 있는 지점이 있다”58)고 이다. 이처럼 틸리히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는 모든 종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종교사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출현으로 본다. 그리스도교는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종교이지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틸리히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열등한 다른 종교들을 배제 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종적인 계시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타종교와의 관계를 맺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관계적 절대성’(relational absoluteness)이 입증 된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틸리히의 타종교에 대한 우호적인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절대성에 대한 주장은 타종교와의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3. 다원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넘어선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를 궁극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인간 반응으로 보며 모든 종교는 진지한 상호간의 대화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종교를 성숙 시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는 이미 트뢸치의 역사적 상대주의, 토인비의 종교 보편주의, 칼 융의 원형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을 통해서 태동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급진적인 종교 다원주의자 존 힉은 오늘의 세계 신학은 ‘신학적 사고’(theological thinking)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거치고 있다고 보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중세의 우주관의 변화에 혁명을 가져 왔듯이 신학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주의로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궁극적 신비로서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삶의 양식의 다양성에 따라 그에 대한 인간의 체험과 반응도 다양하다고 본다.


또한 힉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신화로 이해 함으로써 하나님을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참으로’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가 모든 다른 인간 존재들을 위한 중심 혹은 규범이라고 주장하지 않고도 예수가 그들의 삶을 위한 중심과 규범이 됨을 선언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폴 니터는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과 동시에 그 필연성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파니카는 종교 다원주의를 근본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세가 모델을 제시한다.  첫째는 물리적 모델이다. 여기서 그는 무지개 자체의 빛과 프리즘에 나타나는 그 색을 대비 시켜 말한다. 우리는 무지개 빛을 프리즘을 통해 빨강에서 보라까지의 색으로 구분해서 말한다. 그렇지만 파니카에 의하면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빛의 색은 사실 농도의 차이는 비록 있겠지만 서로가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즉 여러 색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빛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파니카는 이 빛을 실재에, 색들을 제 종교에, 프리즘을 인간 경험에 각기 연관 시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제 종교들을 하나의 실재(절대자, 신, 또는 절대종교)에 대한 여러 상이한 인간 경험의 구체적인 서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기하학적인 모델이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제 종교들을 기하학적인위상의 변형으로 이해 한다. 이 위상은 근원적인 인간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파니카는 결국 여러 상이한 종교들을 근원적인 경험이 시.공 속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변화된 채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인류학적인 모델이다. 여기선 언어를 예로 들고 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언어들이 있다. 그들은 제 각기 자신의 고유힌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언어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실재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더욱 정확히 할 수 있고 잘못된 생각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에 있어서 특정 언어가 다른 언어 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특정한 종교가 다른 종교 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 종교들은 다원주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계시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보는데 이들은 대부분 신 중심적 모델(Theocentrism)을 취하고 있다. 신중심적 모델이란 종래의 교회중심적인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 방법을 지양하고 신학의 초점을 신을 중심으로하여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기존의 교회 중심적인 신학 방법과 모든 신학의 규범을 그리스도에게 설정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부터 “신 중심주의”에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 중심적 모델은 배타주의의 성서영감설에 바탕을 둔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회성은 물론, 라너에 의해 제기 되었고 한스 큉에 의해 발전된 포용주의의 간접적인 구원과 계시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들은 여러 다른 신앙을 통한 구원과 계시의 보편성을 말한다.

 

 

종교다원주의의 기독론 비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5)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형태 로 우리의 주변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응답이 신학의 다양성을 가져 왔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기독교를 상대화하고 절대적 계시종교에에서 보편적 종교로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 제기 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함으로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 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하여 복음주의는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도록 하겠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그리스도론

 

1. 존힉의 그리스도론 : 보편적 그리스도


영국의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존힉은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오늘날 현대 서구 신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 방법과는 상이한 신 중심적인 모델을 제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힉은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는 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구세주들에 비해 반드시 유일회적이거나 규범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회적인 구세주로서 계속 확신할 수있는 해결책을 모색한다. 힉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를 말씀의 성육신으로 그리고 신의 아들로 말하는 것은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이 예수가 자신들에게 주었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많은 상징적, 신화적 모델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힉의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인간 예수이다. 예수는 철저하게 신의 현존과 범위 안에서 일생을 산 존재라는데서 힉의 그리스도론은 출발한다. 그는 오랜 기간을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보냈다. 항상 자신을 신의 대행자(God'S Agent)롤 묘사 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인류를 위해 고통을 받는 주님의 종에 관한 예언에 비추어 삶을 살았다.


예수의 이와 같은 신중심적인 태도는 제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제자들은 예수의 신을 그들의 아버지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비전으로 인해 제자들은 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고, 결국 예수를 그들의 살아 있는 주님으로 선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예수를 공개적으로 입증할 만한 타당한 칭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교자들이나 당시의 청중들은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까닭에 그 칭호가 메시아가 되는 것이 불가피 했다. 이 메시아는 신이 아니었다. 다만 특수한 신분을 가진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의 아들”이라는 새 칭호가 그에게 덧붙여 졌다. 당시 이 칭호는 유대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의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말아었으며, 이 문화권에서 한 위대한 인물을신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은 통상 있는 일이었다.  힉은 왕들을 신의 아들로 이해했던 유대교의 전통(시2:7,삼하7:14)을 근거로, 다윗 왕의 자손이며 참된 이스라엘 왕으로 여겨진 예수가 “신의 아들”로 불리는 것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 이동해 가면서 위대한 인물로서의 “신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는 성육신이라는 유일회적 신성화의 개념으로 굳어져 갔다. “신의 아들”로 부터 형이상학적 “성자”,즉 “삼위일체의 제2격”에로의 매우 중대한 전이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10:30), 따라서 “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14:6)등의 표현으로 반영되고 있다. 공관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러한 표현은 역사적 예수에게 소급되지 않은 1세기 말엽 교회 신학의 반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신의 아들로 부를 때 이들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예수가 그들을 구원 했다는 것, 예수는 그들이 신을 알게해 주는 수단이라는 것, 예수는 전적인 위임의 대상이며, 그들의 삶을 변혁한 계시라는 데에 힉의 초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본다면, 신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에수 안에서 “참으로”만나질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가 다른 모든 인간 존재들을 위한 중심 혹은 규범이라고 주잔하지 않고도 예수가 그들 삶을 위한 중심과 규범이 됨을 선언할 수 있다고 본다.


힉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관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종교간의 대화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있다.

 

 

2. 레이문도 파니카의 그리스도론: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파니카는 스페인계 로마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 났다.75)  그는 종교들 사이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범세계적’ 일치 운동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전통적 종교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독점하고 있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고 말한다. 또한 다른 종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되었다거나 혹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전제하는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보편성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이해를 재해석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재해석해야 한다. 새로운 해석의 제안은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사이의 구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하였다는 것은 긍정한다. 즉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체성은 그의 보편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실재는 그것의 독특성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점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과 별 차이가 없으나 그는 다음의 주장에서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있다. 즉 그는 성육신이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발생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파니카에 의하면 “구원의 보편적 상징인 그리스도는 객관화 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적 인물로 구체화될 수 없다. 이것은 구세주 그리스도가 단순히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로 변형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파니카는 역사적 예수의 한계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필요성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에서의 특수한 구체적 중보자들의 필연적 역할을 인식하고 있는 파니카는 어느 누구도 대화를 위해 예수를 극소화 하거나,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중심적 확신을 간과함으로써 초점을 흐리게할 권리가 없다고 경고한다. “무수한 형태로 주되심을 나타낼 수 있는 이러한 ‘주’(그리스도)는 나에게는 나사렛 예수와 불가분적으로 연결 되면서 궁극적인 형태를 갖추었다.”는 파니카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형태라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지만, 이말은 곧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모든 종교는 일정한 방식으로 이러한 그리스도(라마, 크리슈나, 이스바라, 푸루샤,타타가타 등)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수긍할 수 있고 수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나카는 기독교인들에게, 궁극적 진리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속에서 다른 기독교인들이 똑 같이 경험하는 동일한 신비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3.스탠리 J 사마르타 : 모든 계시의 상대성

 

사마르타는 우리시대의 요청으로서 세계 종교간의 대화를 주창하여 왔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포함해서 어떤 종교도 자기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고 강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화를 위해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반에서 벗어나 신 중심적인 토대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계시를 경직화 시키고 진리를 독점하는 소유의 배타성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자유롭게한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봉헌은 주변을 향해 문을 걸어 닫지 않고 신앙의 중심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대화를 “우리 자신의 유산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정신적인 유산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 한다.


사마르타는 오늘날 다원주의 세계에서 기독교인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대화의 방법이지 “신학적 우격다짐”(theological bull-dozing)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화만이 각 종교의 독특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각각의 종교가 변화 하도록 기여하게 한다고 본다.


파니카와 마찬가지로 사마르타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궁극성과 보편적 규범에 이의를 제기한다.  모든 종교적 특수한 인물과 계시들을 상대화 함에 있어서 사마르타는 파니카와 마찬가지로 그 필연성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공통분모로 환원 시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신비적 타자는 특수한 중보자를 통해 우리와 만나져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사마르타는 “모든 특수성들은 똑같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특수성도 보편성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또한 사마르타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침투되어 예수를 절대화시킨 후 그를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 인물”로 바꾼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을 경고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신은 성육신에서 그 자신을 상대화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마르타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 일원론적 접근 대신 예수 자신의 원초적인 메세지에 보다 충실하게 될 신 중심적 접근 방법을 주창한다.


복음주의적 응답

 

1. 종교다원주의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응답

 

우리는 위에서  전통적인 기독론 (Vere Deus et Vere homo)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은 ‘종교 다원주의’와 그에 근거한 ‘상대적 세계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칼빈도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의 씨(religionis semen)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든지 종교에 노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종교심 때문에 모든 종교는 보편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의 출발점을 성서에 두고 있지 않다. 그들은 비교 종교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접근하기 때문에 정당한 그리스도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둘째, 타 종교와 대화해야하는 이유로서 오늘날 도래하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를 들고 있는데 이것도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면밀히 연구한 성서학자나 조직신학자라면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그 당시에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기성 종교들이 많이 있었음을 인정 할 것이다. 이미 신약성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주의나 로마의 황제숭배, 유대주의, 헬레니즘 등의 수 많은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순교의 위협 가운데서도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신의 아들이며 인자이고 메시아요,주(主)요, 왕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로마인의 박해로, 희랍인의 논리로, 유대인의 반대로, 비판과 취사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수정되고 다듬어진 것이 니케아 신조이며 칼케돈 신조인데 그것들이 형성되기 까지는 400년이나 걸렸으면서 그 당시 지성을 총동원하여 교회의 신앙을 분석하려 하였으나 실패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오히려 확인되고 정리된것이 그리스도론이라할 수 있다.


세째,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은 아 프리오리(a priori)론이 아니고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론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 기자들이 유대교의 묵시 문학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론과 엣세네파의 종말론을 종합하여 어떤 틀을 미리 만들어 놓고 예수를 신의 아들, 사람의 아들,메시야로 묘사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나 성서의 기자들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그러한 작품을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 앞에 전개되는 엄청난 사건들을 확실히 체험한 후 제자들이 모여 종합해 본 결과 그는 그들이 믿는 구세주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추상적인 교훈을 통한 종교가 아니라 삶의 광장(Sitz im leben)에서 우러나온 종교이다. 신학은 어떤 사상의 체계가 아니라 체험의 고백인 것이다.


네째, 신본주의적 그리스도론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리스도론을 분해하고 군주신론을 개현시키려는 운동이다.  신성이 제거된 그리스도론은 없다. 예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합일되어 존재 한다. 신성이 없이는 예수론은 가능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론은 불가능하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신중심의 그리스도론은 결국 군주신론의 재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종교 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타종교와 대화를 하라고 한다. 예수의 신성을 제거해 버리고 다르마나 석가나 마호멧과 같은 차원으로 내려가서 대화를 하자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성을 상실하게 된다. 자체의 주체성 없이 타자와 대화를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교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양극이 신비적 조화를 이룸으로서 형성된 종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될 때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다워질 수 있다고할 수 있다.


신성이 배제된 그리스도교는 인물론이나 역사에 그칠것이며 인성이 배제된 그리스도교는 추상적 철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론을 통하여 가능해질 것이다.

 

 

2. 통전적 그리스도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조금도 손상 시키지 않고 어떻게 오늘날의 이 다원화 사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할 것인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시대가 요청하는 통전적 그리스도론의 정립은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종성 교수는“통전적 그리스도론은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고백한 모든 신조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학의 형성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기간인 제2세기부터 제7세기까지의 에큐메니칼 교회 회의가 결정한 모든 신조를 기본 신조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신조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조가 교회 생활에 지침이 되었으며 신 이해에 근본 구조를 밝혀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신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모든 신조는 시대의 제한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든 절대화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조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인에 의하여 고백되고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인에 의해서 성서의 시대적 해석과 이해에 맞춰서 재해석하고 보충되어야한다.


세째, 그리스도론을 우리의교회의 토양에 토착화하고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서는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외국교회가 작성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성서와 전통적 그리스도론과 우리의 주체적인 결단에 따라 전통적 그리스도론을 토착화해야하는 것이다.


네째, 통전적 그리스도로네 있어서 그리스도의 한 단면을 다른 면보다 더 강조해서는 안된다. 취급 방범에 있어서는 선후가 있을 수 있으나 가치의 경중을 두어서는 안된다. 특히 최근의 급진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토대로한 새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통전적 그리스도론은 그러한 편파적인 그리스도론을 지양하고 언제든지 삶의 현장에서 나와 삼위일체 신과의 실존적 만남과 주체적 결단을 통해서 이해되는 통전적이고 통합적 그리스도론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통전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성서가 가르친 범위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그리스도론은 그의 통치권을 개인과 교회와 역사에만 국한 시켰다면 이제는 피조물 모두를 그리스도와 관련지어서 생각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성서의 입장

 

성경에는 그리스도교와 타종교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있는가하면(행4:12), 타종교와의 연속성을 시인하면서도 기독교를 절정으로 이해하여 예수의 규범성을 긍정케하는 구절이 있다(고전10:4). 때로는 타종교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 표시 되었는가하면(마12:30), 반대자에 대하여 관용을 베푸는 구절도 있다(막9:40). 심지어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원을 받는 특수한 예가 마태복음에 나타남을(25:31-46) 지적하면서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규범성까지도 가볍게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면을 볼 때에 구원의 대상으로서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었던 것이지 이방종교에 대하여서도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앙태도

 

유대-기독교는 세계 여러 종교들 가운데 유일신교로 지칭 된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다른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유일신교이다. 종교사에서 신관의 변천과정을 살펴 볼 때에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여러 신들이 함께 존재하는 다신교(Polytheism), 다음 단계는 그 중의 한 신만이 주(主)신으로 인정되는 단일신교(Henotheism)로, 마지막 단계는 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유일신교(Monotheism)로 발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다른종교들 간의 관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처음으로 시작 되었다. 모세오경의 다양한 전승들은 이스라엘이 가난안에 정착하기 전에 에돔 족속, 겐 족속, 미디안 족속, 들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히브리인들의 야훼종교의식이 처음 소개 되었을 때에 그곳에도 역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착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신인 야훼가 가나안에 소개 되었고 서로 다른 종교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착의 신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만이 참 신이라고 선포하게 되었다. 즉 야훼가 오랜동안 국가적인 신으로서 여겨지게 되었고 오랜동안 그는 주도권을 잡고 토착민의 신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정복자 이스라엘의 신을 섬길 것인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차로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이 확립되어 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일찌기 유일신 신앙이 강조 되었다. 십계명 제1계명에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20:3)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을 언급했고 여호와 외에는 천상 천하에 어떤 신적인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유일신 신앙이 명실상부하게 공인된 때는 다윗왕조 때(주전 1000년대)로 본다. 다윗왕은 당시 중동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승자 였다. 정치 경제와 군사 모든 면에서 월등 했음으로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제압했을 뿐아니라 교역을 통하여 그의 강한 실체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실체도 이웃 사람에게 소개 되었고 그들에 의해 인정 되었다. 당시 명실상부하게 여호와는 유일신으로 인정케 된 것이다.


그러나 그후 이스라엘 사회가 혼탁하고 부패하여 여호와를 망각했을 때 호세아 같은 선지자는 유일신 신앙을 재천명 했다(호13:4). 포로기의 예언자도 같은 유일신적 신앙을 강조 했다(사40:25). 이 때가 가장 유일신 신앙이 강조 되었던 시기이다.  그 후 바벨론 포로 중에 있던 다니엘도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했고(단2:20), 느브갓네살 왕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신의 신으로 말하고(단2:47) 이러한 유일신 신앙은 신명기 6:4절에서 쉐마교리(Shema Doctrine)로서 정착 되었고 신약성경에서도 지속되고 있다(막12:29ff,요14:6,요17:3,행4:12,롬3:30,16:27,고전8:4-6,갈3:20 등등).


본래 구약성경은 유일신 사상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분으로 전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사는 오직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전능하신 분인가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magmanila Dei)과 업적에 초점이 모아지고 았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주 내용은 아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베푸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양들이다.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유일신적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포로기와 같은 상황에서 타종교에 동화될 가능성이 많은 때에 주로 언급 되었고 여호와 신앙의 위기때에 주로 강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존의 기반이 약화 되었을 때에 유일신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존재를 구축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유일신 신아의 문제점은 배타성으로 지적 된다. 구약성경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배타적인 성격은 강하지 않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명하신다. 더우기 예수 그리스도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존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단지 배타적인 요소가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상치되는 신적인 요소에 관해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신적인 존재는 우상이다. 엘리야 시대의 바알 신과 앗세라 신과 그들의 제사장들은 질시의 대상이 되었지만 바알 신이나 앗세라 신을 섬기던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자요 구원의 대상들 이었다(욘4:11).신약시대 베드로도 복음의 보편성을 깨닫고 그의 민족적 배타성을  청산하고 가이사랴에서 이방전도의 문을 열었다(행10장).


 신약성서에 나타난 신앙 태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도 세계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공동체를 가지기고하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초점은 만인의 ‘주’로서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함을 보여준다(롬10:14-17).


윌슨(S.G.Wilson)은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배타주의”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의로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바울의 복음에 의해서 신학적인 이해를 바꾸지 아니하고서도 구원을 얻게 할 것이라고 한다. 윌슨은 바울의 시각은 다원적 종교 공동체 가운데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종교 안에서 역사 하시나 진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메시야적 왕국에 대하여 선포 하였다(눅11:20, 17:21). 그의 메세지는 구원과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의 사상 역시도 유일신앙에 대한 강조 였다(고전3:23, 15:28).


신약은 말씀이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되었음을 단언한다(요1:14).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등 특별한 역사적 계시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주(Lord)라는 명칭 속에서도 나타난다(빌2:12). 신약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최종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결정체 이다.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이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그의 주권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적 배타주의”는 오늘날의 종교 다원적인 상황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져야 한다.  마태복음28:16-20절에 나타난 명령은 보편적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와 구원의 새로운 공동체에 결합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준다.


바울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 진다고 주장한다(롬3:21-26).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모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정직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롬3:9-20) 인간의 불성실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지 못한다(롬3:3-7) .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인간의 불성실하심을 극복하게 하심을 명백히 보여준다(21-26).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하나님의 의로 부르셨다.  바울은 이러한 관점에서 9-11장에서 말하기를 이스라엘은 믿음에 대하여 실패하였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인간이 부정직하고 책임성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믿는자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예수를 ‘하나뿐이신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10:9,12).


로마서 5:12-21과 7:7-11, 8:19-22에는 각기 다른 전통에 근거한 보편적인 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편적인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새 아담”으로서 첫번 아담의 불순종을 돌이켜 순종하고 죄와 사망의 결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로마서1:18-3;23절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죄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아담에게 순종하고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게 될 때에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롬6:1-14).


또한 성경에 나타난 로고스 전승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전승은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로서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구속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이세상 안에서 활동하는데 이 예수는 (1)하나님의 형상 (지혜서7:26)이며 (2)처음 난 것이며(잠8:22,25) (3)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소유 하고(잠8:27-30) (4)세상이 그에 의해 창조 되었으며 (5)하나님의 광채(지혜서7:28)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표현은 하나님과 관계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에 찬 찬양이다(고전1:15-20, 히1:3-4,요1:1-18).이러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주로서 그리스도를 화신케해 주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능력이 그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보여진 것이다(요1:14,18).


신약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언한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거부한다. 사마르타는 예수의 독특성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주장 속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주적 그리스도가 타종교 안에서 익명으로 역사 한다고 가정한다.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감추어지거나(hidden) 혹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unknown)이다. 말씀의 신비가 역사적 성육신의 독특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발견 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수긍할 수 있다.  성경은 초월이 역사에 들어 왔을 때 그 분은 자기를 비우셨으나, 그 독특성은 손상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세상에는 익명의 하나님이 있을 분, 그 분이 낮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성육신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도 기독교의 개방적인 태도를 고무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주재하는 신이라는 관념은 그대로 신약성서에 유입 되었다. 따라서 마태도 예수를 육화한 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보자로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예수는 결코 편협하고 배타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진실한 신앙심을 가진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존경심을 표시 하였다.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한 예수의 견해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개방적인 기초가 마련된다.


이와 같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 중심의 편협한 사상 흐름과 좀 더 개방적인 흐름이 모두 나타나 있다. 하나는 배타적이고 하나는 포용적이라고할 수 있다. 이방종교와 우상숭배에 관하여서는 배타적이라고 한다면 비록 이방인이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개방적이며 포용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성경해석 비판

 

다원주의자들의공통적 구원관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새로운 피조물은 구원의 목표라고하며 변선환 교수는 이 “새인간성”회복은 불교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동식 교수도 역시 종교의 목적을 “인간화” 내지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하고, 구원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의 괴로움을 없이하며 기쁨을 나누는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교다원주의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보편주의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구원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보편주의, 그리고 세상과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주제로 글을  쓸 때에 많이 사용되는 성경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요1:1,로고스이신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초기의 변증가인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로부터 칼 라너, 한스 큉, 그리고 존 힉등  현대 신학자에 이르기 까지 로고스(logos)라는 용어는 어느정도 감추어진 모습으로 이긴 하나, 모든 종교와 철학에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존힉은 “만약 우리가 인간을 향해 일하시는 로고스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모든 종교내의 모든 구원은 그 로고스의 사역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기술함으로서 로고스를 보편화 시키는 것을 알수 있다.


헬라어 로고스를 번역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헬라어에서 로고스라는 명사는 원래 ‘말하다’(legein)라는 의미에서 비롯 됐는데, 이것은 일상적인 담화와 대화(lalein)와 대조되는 중요한 진술이 발언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발언을 계시하고 완성하는 말씀의 구약적인 배경에 반하여, 요한은 서론에 하나님과 로고스(따라서  하나님을 세상에 계시할 자격을 가진)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과시한다. 나아가 요한은 1장 1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자로서 로고스를 말한다.   요한이 서론에서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묘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신화적인 혹은 철학적인 구상을 덧 붙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한은 더 나아가 이 복음서에서 로고스이신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20장 31절에 확언 되어 있다.


힉은 요한복은 1장1절을 석의 함에 있어서 ‘인간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모호하게 묘사함으로서 로고스를 비인격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삼중 관계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아버지와 관계하여 그리스도는 이렇게 소개된다.


선존재이심 : 태초에 계시니라(en arche).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와 밀접한 교제를 가짐:하나님과 함께(pros ton Theon).


하나님이심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Theos en ho logos).


미완료 직설법 ‘있었다’가 세 구절 모두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게속적이고 영원한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절은 아버지와의 이 관계가 영원하고 밀접한 것임을 강조한다.


둘째, 세상과의 관계는 3절 이하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의 창조주시다. 3절에서 헬라적, 영지주의적 개념들(즉 물질은 영원하며, 세상을 창조하는데 천사가 사용되었다는 생각)은 반대를 받는다.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만이 창조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피조물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피조물과 로고스에 대하여서는 두개의 다른 동사가 사용 되었는데 로고스에 대하여서는 “계셨고”(to be), 피조물에 대하여는 “지은바 되었다”(to become)라는 말이 사용되어 둘을 구별하고 있다.


계속해서 4절은 중요한 진술을 담고 있다. 먼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는 진술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전치사는 “통하여”가 아니라 “안에”이다. 따라서 생명이 항상 말씀 안에 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 말씀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4절 후반부에서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다. 5절에서 이 빛은 어두움에 의하여 정복당하지 않고 어두움 속에 비친다. 7-9절에서 요한은 이 빛에 대해 증거하러 왔다. 그러므로 이 빛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며, 불가불 그리스도와 관련되며, 심지어는 동일시되는 것이다. 요한의 글에서 생명과 빛은 관련이 있으며, 강한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핸드릭슨은 ‘생명’이 ‘하나님의 실체의 충만’을 가리키며, 모든 육체적 영적 삶의 원인이자 보존자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진술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는 진술이다. 3절에서 언급된 창조의 사실, 4절에서 포괄적으로 언급된 사람, 그리고 5절에 최소한도 암시되어 있는 타락을 근거로 할 때, ‘사람들의 빛’은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가리킨다. 로고스가 이 세상 속에 충만한 빛으로 오셨지만 그가 오신 근본 목적은 구속이다. 라너, 큉, 힉 등이 가르친바와는 반대로 일반계시에는 구속적이고 구원적인 기능이 전혀 없다. 인류의 통일성, 일반계시의 사실은 물론, 사랑이라는 신적인 속성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을 불필요하거나 ‘상징적’인 것이 되지 못하게 한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세째, 세상과의 관계이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14절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다”라는 말은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한 로고스는 빛이며 모든 사람들은 다 어둠에 있지만 바로 빛인 로고스에로 오도록 초청 받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행 17:22, 바울의 진술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저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17:22).

 

사도행전 17장 22절에 나오는 ‘종교성’은 헬라어로 데이시다이모네스테루스(deisidaimonesterous)로서 에보트-스미스사전(Abbot-Smith Lexicon)은 ‘신을 공경하는, 종교적인’이라는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아덴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며 많은 신들을 섬겼다. 도시 전체에, 공적인 장소이건 사적인 장소이건 신전들과 신들이 가득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에 대해 매우 종교적이라거나 혹은 신들에 열심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이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와 그렇게 많은 위하는 것들(23절,sebasmata)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Unknown God)'이라고 새겨진 단을 발견하였음을 언급한다.134)


다원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어 있는 종교성을 인정하고 또한 성경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23절의 진술은 현대의 보편주의를 바로 잡는 매우 중요한 진술이다. 아덴 사람들이 새겨 놓은 글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메세지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agnoountes-무지하다, 알지 못하다, 여기에서는 현재분사형)을 확언해 준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무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보편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를 성실히 숭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한 분의 초월적인 하나님을 숭배함을 나타낸다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르치지도, 암시하고 있지도 않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3. 엡1:10과 골1:15절, 우주적인 그리스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 게하려 하심이라”(엡1:1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만물이 완전히 주님의 권세 아래 있게 될 때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 이곳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을 문맥에 따라 해석하지 아니하고 어느 한 구절 만의 의미를 가지고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에베소서 1:3-14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풍성한 복을 찬송하고 있다. 여기서는 오직 신자들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의‘(1절)이라는 말과 크리스찬들이 선택 받고(4절), 예정 되었으며(5절), 구속과 죄 사함을 받았고(7절), 특별계시를 전달 받았고(8-9절), 영광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13-14절).


10절에서 ‘통일되게하다’는 헬라어 아나케팔라이오사타이(anakephalaiosathai)를 번역한 것으로‘종합하다’,‘통합하다’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는데, 로바서 13장 9절에서 모든 계명을 사랑의 계명이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종합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는 또한 그리스도가 만물의 머리가되신다(kephalaion)는 사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교훈은 1장 20절부터 22절에서 강조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들어갈 것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만물의 복종은 세상 끝날에 성취되고 실현될 것임을 알게 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리스도으 인격과 사역은 서로 나뉠 수 없는 연관을 지닌 것으로 묘사 된다. 15-20절에서는 성자의 선재적 탁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며 그 분의 유일한 인격이 의문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분은 피조물 보다 지고하신 분이며(15절), 창조의 행위자 이시며(16절), 만물이 그를 위해 창조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영원하시며 그 분에 의해 모든 피조물이 유지된다. 그런데 이 창조의 주님은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주 예수께서 모든 만물 중에 뛰어나게 되시는 것이다.

 

 

4. 고전 15:24-28, 보편주의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 나와 있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라는 구절을 들어서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의 그리스도와 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보편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문맥을 들어서 살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복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여기서 그리스도를 성육하신 성자, 그리서 신인(God-man),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 생각하지 않을 경우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친히 우리를 다스렸지만, 승천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중보자에게 주사(마28:18) 그를 통해 다스리신다. 이 우주적인 권세는 중보자로서 직책을 지닌 그리스도께 주어졌다. 그는 이 중보적 왕권으로 모든 원수를 멸할 뿐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북돋으며, 다스리시고, 보호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일단 사역을 완수하면, “아들 자신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될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완성 되었으므로 삼위 하나님 내에 기능적인 경륜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다스리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안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의 구절만을 가지고서 해석을 가하는 것은 오류를 낳게 됨을 알 수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성경적이어야할 것이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는 성경관에 따라 달라진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며 따라서 원칙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로마서 5장 19절의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즐겨 인용한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말하지만 동시에 만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디모데전서 2장 5절의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고린도후서 5: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골로새서1장20절의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는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보편적 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해석에 대하여 복음주의에서는 만인 구원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이 균형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기록 되어 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을 성취시켜줄 이름이 없다는 것이며,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 줄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나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간과 화해 하셨으나(롬5:10-11), 모든 인간을  즉시 자동적으로  구원하셨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롬 10:9).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6)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구원의 계시는 이러한 맥락에 있어서 타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개방적이다(창12:3, 사56:6-7, 말1:11, 마8:11). 이것은 구원을 문제 삼는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배타성과 포용성을 넘어서는 “초청의 파라다임”(paradigm of invitation)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앞에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그들의 주장하는 바와 배경을 살펴 보았다. 종교 다원주의란 문화적 상황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여러 상이한 구원의 종교적 체계가 있다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특히 기독교적 신학의 독선적 배타성을 거절하며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1)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론 중심 신학을 신 중심적 사고로 대치할 것을 주장하며, 2)그리스도교적 신론의 독특성인 인격적 신론의 개념보다는 초월적 절대적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의 개념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3)기독교 신의 자기계시 차원보다는 신을 경험하는 인간의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의 길의 다원성을 개방시켜 놓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궁극적 실재’인 신이 인간의 문화적 존교적 환경과 맥락에 따라 상이한 종교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반응으로는 첫째 배타주의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하나의 참 종교가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진리는 오직 한 종교 안에만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므로 타 종교에는 진리의 가능성이 철저히 배제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을 종교적 진리의 유일한 혹은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대표적인 학자로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헨드릭 크뢰머가 있다. 둘째는 개방적 포용적 입장으로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의 계시 체험을 동반하나 구원계시의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라고하는 입장이다. 타종교도 하나님이 현존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보지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기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세번째 다원주의의 압장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여러개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모든 고등종교는 다 신으로 부터 너온 것이요 각기 진리의 일면을 지니고 있으며 고등종교를 통해 주어진 계시의 내용과 정도는 다를지라도 그 원천은 같은 것이라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그리스도론을 보면 그 주된 내용이 존 힉이 주장 하였던 바처럼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에서 벗어나서 신 중심적인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전통적 입장은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였다고보며 이것은 초대교회로 부터 체험과 고백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함을 알 수 있었다.


종교 다원주의는 19세기 성경 비평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 성경을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심판 받아야할 역사적 문서로 본다.여기서 본문(text)보다는 상황(context)이 우선하기 때문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앙과 신학의 수정이 불가피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은 존립의 여지가 불가능하다.


복음주의는 기독교가 성경을 낳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독교를 탄생 시켰다고 믿는다. 물론 ‘역사적 기독교’는 오류와 허물이 있으나 진리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신적인 기구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독론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기독론 부재의 신학이다. 19세기 서구의 자유주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점을 제기 하였는데 20세기의 다원주의는 너무 많은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여 신앙의 혼란과 상대주의를 초래한다(요일4:1-6).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인정되지 않은 그리스도교는 철학이며, 권위가 인정되지 않은 성경은 위인전이나 다름 없다고 할 것이다. 다원주의 상황 아래서 가장 효과적인 대화를 하기 위하여서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교는 영적 다이나믹을 상실하며 나아가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될 것이다.


선교 2세기의 발걸음을 내딛는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경계해야하며 잘 준비해야 할 것은 다원주의의 도전이라고 할 것이다. 다양화된 세계는 오히려 더 많은 대화와 상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이 때에 종교간의 대화 역시도 이에 못지않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기독교가 싸워 왔던 것이 그릇된 교리의 해석으로 무장한 이단의 세력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기독교의 가장 큰 상대는 기독교와 그리스도를 보편화 하려는 보편주의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원화 사회를 살아 가면서 성경을 통하여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대화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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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2010년 8월 31일 스위스 제네바 에큐메니칼센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2) (WCC) 중앙위원회가 7년마다 열리는 '2013년 WCC 10차 세계총회’의 개최지를 부산으로 결정하자, 한국 교회는 크게 환호하는 그룹과 크게 우려하는 그룹으로 나뉘어 자명한 입장을 포명하고 있다.

세계 110여 개국 350여개 개신교회의 대표들 5,000여 명이 부산 벡스코에 모여들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세계 속에서 한국기독교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일부 교단은 일찍부터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으나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신', '예장백석'등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교단들은 한국교회의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한국교회에 종교다원주의가 만연해지고 혼합주의가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다각도에서 WCC 총회를 반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2010년 5월 31일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을 비롯한 160개 보수주의 교단들과 28개 보수적인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여 'WCC 총회유치 반대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2013년 WCC 부산 총회 개최를 저지하기로 결의한 후 결의문과3) 성명서를4) 발표하였다.5)

그리고 2010년 8월 31일 WCC 부산 총회유치가 결정나자 보수성향의 한기총은 반대입장을 명확히 하고 가시적 활동을 펼치기 위해 최근 범교단적인 '한국기독교 WCC 대책위원회(위원장 홍재철, 이하 대책위)'를 구성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적 성격이 강한 4개 교단을 중심으로 연합해 만들어진 대책위는 얼마 전 사단법인으로 등록됐다. 대책위는 WCC 신학의 종교다원주의, 종교대화주의, 종교혼합주의, 사회구원지상주의, 용공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로마가톨릭주의, 가시적 교회일치주의, 신앙고백 형식주의, 성경불신주의 등을 10가지 반대이유로 들었다.6)

이미 1959년 WCC가입 문제로 한국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고, 이어서 1960년 대한예수교성결교회가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체험했다. 무엇보다도 WCC가 선교적 차원에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타종교를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1963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선교사파송을 중지한 것은 한국교회의 분열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WCC를 반대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에 필자는 WCC의 타종교 선교정책에 관하여 NCCK의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II. WCC의 타종교 선교정책

1. ‘모라토리움’ 선언

1973년 방콕 선교대회는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라는 선교정책을 내놓은 첫 번째 선교대회이다. 1972년 12월 29일부터 1973년 1월 9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96개국 330명의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CWME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세계선교와전도위위원회)7) 제2차 회의가 열렸다.

특별히 1973년 방콕대회의 명칭은 “오늘의 구원에 관한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on Salvation Today)”였다.8) 이는 시대적 상황이 필요로 하는 교회론과 선교론에 따른 사회구원을 강조한 대회였다.

1973년 방콕대회의 주제 선정에 있어서 이미 1971년 토마스 위서(Thomas Wieser)에 의하여 발표된 논문 “오늘날의 구원체험(The Experience of Salvation Today)”에서 토마스는 성경과 다른 종교들의 전통들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구원 기능적 역할은 오늘날 구원의 매개체 중 단지 한 집단으로써 이해된다고 하였다.9)

이처럼 1973년 방콕 선교대회의 ‘구원’개념은 1971년 토마스 위서에 의해 재 정의된 사회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적 상황만을 중시한 비복음적 구원관인 것이다.

비록 방콕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개인의 회심과 교회의 성장, 교회의 다양성 속의 일치성이 강조되었지만 ‘모라토리움’ 선교정책을 내놓은 배경 또한 ‘바르바도스(Barbados)’섬에서의 인디언 해방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1973년 방콕대회는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을 제시하였다.10)

1972년 “중국혁명가운데 나타난 구원관 (Salvation in the Chinese Revolution)”등 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방콕대회가 이야기 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이 아닌 무비판적 상황화에 근거한 ‘구원’이었다.

그러므로 방콕대회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전혀 비성경적이며 인본주의적 인간화를 위한 것 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인간화를 소망하고 있지만 참다운 인간화는 신본주의적 구원의 결과물로 얻어진다는 것이다.11)

1952년부터 WCC내에서 팽창된 새로운 선교사상(Missio Dei)아래 선교비를 해방운동보조비나 제3세계 유학생 교육비등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선교사 파송과 후원을 위한 선교비 지원을 중단한 것이 ‘모라토리움’이다.12) 1971년 1월 ‘바르바도스’섬에서 인디언 해방을 목표로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이들은 선교에 대하여 “식민주의 이념이 종교적 가면을 쓰고 인디언 문화를 배척하고, 인디언을 선교 대상으로 굴복시키고 과소평가하며, 선교사들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자기를 실현하고, 식민주의를 행했다.”13)는 내용으로 ‘바르바도스’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하여 1973년 방콕 대회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여 피선교 교회들의 우위성과 동질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선교비 및 선교사 보내기를 중단하게 된 것이다.

1973년 방콕대회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배경으로 우리는 남미의 해방신학적 배경을 간과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밝혀야 할 것이 ‘해방’이란 무엇인가이다.

해방신학적 범주에서 ‘해방’이란 전인과 만인의 포괄적 해방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사람의 삶에 있어서 모든 차원의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14)

여기서 ‘해방’이란 개념은 성경과 기독교 교회가 전통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구원관과 동떨어진 상황 중심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가 해방 개념 또는 해방 운동에 대한 세 가지 차원을 정의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구티에레즈가 정의한 첫 번째 단계의 해방은 압제받는 대중과 사회계급의 염원을 표현한 것으로써 강대국의 제국주의적인 지배와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단계의 해방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인간을 자기 운명을 의식하고 책임지는 존재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인간성, 그리고 질적으로 변혁된 사회를 추구하는 노력의 주체라는 것이다.

끝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해방’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불의와 압제와 근본적 죄로부터 해방되므로 이기심을 극복하고 참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있게 하는 의미로서의 해방을 뜻한다.15)

그러나 구티에레즈가 정의하고 있는 세 번째 단계의 성경적 ‘해방’이란 구티에레즈가 전제하고 있는 ‘죄’의 개념과 성경적 ‘죄’의 개념이 다름을 이해할 때 구티에레즈가 정의 하고 있는 ‘해방’이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신학 태동의 배경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분석의 이론적 도구와 역사 철학으로써 해방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부르주아와 프로레타리아, 억압자와 피억압자,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석했다. 해방 신학은 현실 분석을 통해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으로부터 도입했다.

해방 신학이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석하고 계급 투쟁이나 폭력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었다.16)

마르크스는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우리는 악하게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류의 악은 계급 투쟁에 의해서 형성된 속박적인 사회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을 괴롭히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계급 투쟁이 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계급 투쟁은 인간이 서로에게 과하는 모든 살인, 원한, 증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범죄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17) 마르크스의 첫 번째 핵심 이론은, 모든 사회는 계급 투쟁에 의해서 얽혀 있으며, 이 계급 투쟁이 인간 죄악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해방신학의 정의를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신학은 197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치, 경제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신학이론이다.

전통신학이 개인의 영혼구원을 교회의 중요한 사명으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해방신학자들은 현실사회를 조직적인 억압사회로 규정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18)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와 제3세계 나라들에서 발생한 운동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과 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준거점으로 삼는 신학운동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제3세계의 빈곤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적 과제의 새로운 급진주의적 접근법으로써, 억압을 떨쳐 버리고자 하는 그들의 투쟁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신학이다.19)

이처럼 해방신학,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WCC는 1970년부터 1986년까지 17년 동안 약 250만 불을 ANC, SWAPO, PAC20)와 같은 반백인통치 투쟁단체들에게 지급하였고, 전세계 30개국의 100개 이상 기관에 모두 700만불을 지급하였다.21) 원

조를 받은 나라들과 단체들은 마르크스주의 영향권 아래 있는 행동주의 단체들이었으며 이막대한 재정은 WCC의 예산과 후원기금과 1973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결정한 ‘모라토리움’의 결과로 축적된 선교비로 지불된 것이다.22)

2013년 제10차 WCC총회의 주제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사42:1-4)” 이다.23) 우리는 WCC의 지난역사와 신학적 입장을 고려하여 2013년 WCC총회가 구현하고자 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규명이 필요하다.

해방신학적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선교사파송과 지원을 중단했던 WCC가 교회일치와 연합을 앞세워1910년 에딘버러에서 시발된 순수 교회연합운동인 에큐메니칼 정신을 계승하고자 나선다는 것은 복음주의 선교신학적 입장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에 많은 복음주의적 교단들이 우려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제선정과 관련하여 중앙위원들은 ‘정의’ ‘평화’ ‘생명’ ‘일치’를 WCC 총회 주제에 넣기 위해 다양한 제안을 내놨다.

필리핀의 한 중앙위원은 “WCC가 설립된 1948년부터 지금까지 총회 주제에 정의나 평화란 이름이 사용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올라프 트베이트 WCC 총무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됨으로의 부르심”이라고 중재해 합의를 이끌었다.

또한 총회 주제와 관련해 WCC 중앙위원이자 기획위원인 시리아정교회 소속 모르 로함 교부는 “이번 주제는 전 세계와 관련된 것”이라며 “이 주제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까지 다양하게 읽혀질 것”이라고 말했다.24) 이번 WCC총회 주제선정에서 중앙위원들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정의와 평화를 통한 연합과 하나됨”이 2013년 제10차 WCC 총회의 목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주제선정과 관련하여 다루어진 내용들과 언급들을 살펴보면 WCC의 연합정신은 지금까지 WCC가 추구해왔던 사회적 ‘교회연합’으로써2010년 에딘버러에서 주창된 순수 교회연합정신의 범주를 넘어 사회연합적 성격임이 확실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분열을 부산 총회 성공희생 제물로”25)라는 낙관적인 한국교회의 대응은 실로 내실이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가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2013년 WCC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함으로 한국교회의 복음의 능력을 WCC에 전하고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주역으로 설 수 있도록 하자는 입장이 있으며, 또 다른 입장으로는 이미 결정된 2013년 부산 WCC 총회에 대하여 번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회개최를 방해할 수는 없으나 대회참가는 거부하겠다는 입장이 복음주의 내에서 정리되지 못 한 채 한국교회의 내적반응으로 보고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NCCK는 진보적 성향이 강한 단체로써 WCC신학의 문제점들을 간과하고 성공적인 대회를 위한 조직구성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장 백석의 경우에는 “WCC 부산총회 비판적 지지”를 공개 표명하고 나섰는데, 장종현 백석학원 설립자는 “한국교회는 WCC가 주도적으로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개인구원을 약화시킨 사회복음주의,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원리의 포기와 인본주의 성경관과 각종 비평학설의 수용, 성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이해의 포기, 이신칭의 교리의 로마 가톨릭적 이해, 선교무용론에 대한 혐의 등에서 벗어나도록 개혁을 유도하는 게 시급하다”고 밝혔다.26)

2. “대화” 프로그램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1971년 사마르타에 의하여 시행된 “Dialogue Program” 이다.27)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대화”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화”는 1928년 폴(Paul)과 차우(Chao)에 의하여 제2차 IMC(세계선교협의회)대회에서 처음 도입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1928년 거론되었던“대화”는 타종교와의 대화가 아니라 서양의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힌두교, 불교, 유교의 종교들이 연합하여 대화하자는 것이었다.

1938년 탐바람 선교대회에서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화는 클래머(H. Kraemer)와의 충돌로 잠시 주춤하다가 1950년대에 다시 활발하게 거론되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화가 1961년 인도신학자 데바난단(P. Devanandan)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세상과 화목하시려고 오셨으므로 더 이상 인간 사이에도 분쟁과 다툼이 없는 평안만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원주의적이 입장에서 기독교 진리를 다양한 타종교의 종교철학적 체계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데바난단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화”는 1967년 스리랑카에서 막스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본격적으로 WCC 내에 "Dialogue Program"이 형성되기 이전에 1970년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아잘톤, 베이루트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종교 의식을 갖았다.

이 의식을 통하여 그들은 말하기를 “아시아의 범신론적 영성에 기독교의 진리가 용해됨을 느낀다.”라고 하였다.28) 데바난단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성을 아시아의 혼합주의적인 범신론적 영성에 희석시키고 기독교의 진리의 유일성을 거부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하였다.

본격적으로 WCC내에 대화프로그램 (Dialogue Program)이 생긴 것은 1971년이다. WCC는 인도신학자 사마르타(S. J. Samartha)에게 대화프로그램을 일임하였다. 사마르타 역시 힌두교의 범신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하나님을 해석하였다.

그는 “경계선이 불안해 진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타종교와의 연합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기독교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타종교의 철학 속에서도 얼마든지 계실 수 있으므로 선교는 타종교의 철학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을 확대하여 잘못해석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인간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화목하고 또 인간 사이에 화목케 하여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평화 -“샬롬”-이 오게 하는 것이 곧 종교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기독교는 진리의 유일성을 배제하고 타종교와 주체대 주체로서 다양한 대화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선교라는 것이다.29) 사마르타는 이와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진리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대화 방식을 거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배제한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포괄적 성령론”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론에 대한 정면적인 대응이다. 그가 말하는 성령은 아시아의 범신론적 혼합주의 영성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는 타종교의 다양한 영적 체험을 성령으로 간주하여 “포괄적인 성령론”의 입장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이끌어나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무의미 하고 “샬롬”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모두가 평안하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WCC의 종교다원주의 운동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유동식 박사에 의하여 1990년 1월 19일 20일에 걸친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종교와 신학적 과제”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타종교의 존재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문제가 다루어 졌다.30)본 학술대회의 서문에는 이에 대한 변선환 박사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종교다원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변선환 박사는 더 이상 한국교회는 타종교를 전도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대화를 통하여 타종교와 연합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타종교를 대화의 주체로 보아 서로가 진리를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종교철학적 체계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31)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대화”는 197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제7차 WCC 총회에서 혼합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부각되어졌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총회에서 현경32)은 주제 강연을 맡았는데, 한국무속의 모티브를 빌려 마치 무당처럼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무슬림, 정신대에 끌려가 죽은 할머니,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군인 등인류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을 부른 다음 해원을 시켜주는‘초혼제’를 지냈다.

그러면서 “성령은 바로 이렇게 한에 맺혀서 울부짖는 울음을 듣고 그 울음을 치유하고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끌어주는 삶의 에너지이자 생명력”이라고 메시지를 건넸다.

기독교의 성령이 보통 서양미술사에서 보면 서양 남자의 얼굴로 그려지잖아요. 저는 아시아 여성이 보는 성령의 얼굴을 ‘관세음보살’로 잡았어요. 어짜피 성령은 눈에 잡히지 않는 것이고 사람은 자기 무의식의 세계를 반영하는 가장 자비로운 치유자의 얼굴로 성령을 표현하잖아요. 제가 여성적인 관세음 보살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내가 아시아 여성으로서 느끼는 성령의 아이콘이다.’라고 선언하니까 그런 불교 이미지를 본 기독교인들이 모두 뒤로 넘어갔죠.33)

이와 같이 WCC의 종교다원주의적 “대화 프로그램”은 WCC의 혼합주의를 태동시켰다. 타종교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타종교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러한 다원주의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WCC 중앙위원회 위원장 이었던 인도 신학자 토마스(M. M. Thomas)의 혼합주의에서 더욱 확고해졌다.34)

이미 1973년 방콕대회에서 힌두교인은 종교를 바꾸거나 새로운 종교 공동체로 이동해 갈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그 자신의 문화 공동체 안에 그대로 있으면서 ‘기독교적 힌두’가 될 것35)이라고 주장했던 토마스는 2년 후 나이로비총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주장했다.

이에 정현경은 토마스가 주장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아주 잘 실현한 에큐메니칼 학자인 것이다.

정현경은 그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경계를 넘나드는 자’ ‘다리를 놓는 자’ ‘문화 통역가’로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것들을 통털어 ‘살림이스트(Salimist)’라고 하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살림이스트’란 순수한 한국말 명사 ‘살림’에서 온 말이다. ‘살림’은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는 말이다.36)

“무당 같다고요? 전 그 말이 최고로 영광스런 찬사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에는 모두 ‘신적인 생명력’ 즉 우주의 창조력이 있어요. 그리고 신적인 생명력의 씨를 싹트게 해야 할 의무도 있고요.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신(神)나게 사세요!’ 하고 인사하는데요. 마음껏 신기를 발휘하면서 살아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거든요. ‘꼴리는’대로 살라는 말도 방

종이 아니라 ‘존재이유’를 찾으라는 그런 의미죠.37)

현경은 미국 케임브리지 젠 센타에서 숭산스님을 만나 ‘대광명’이라는 불명을 받고 계룡산 신원사에서 삭발 동안거에 들어가는가 하면 히말라야 산속에서 ‘옴 마니 반메 훔’만트라를 외우고 베트남의 틱낫한에게서 명상을 통한 수행을 배우는 등 신학자로서의 자기만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제단(altar)을 만들것을 그의 책에서 제안하고 있다.

너의 방이나, 네 방이 없다면 공원의 한 구석이나 어는 한 장소를 너의 성지(Holy Place)로 정하고 그곳을 네가 성스럽게 여기는 ‘파워 오브젝트(Power Object)'들로 꾸며봐.성경책, 불경, 예수님, 부처님, 여신들의 사진, 혹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닮고 싶은 사람들의 사진, 아니면 아름다운 조약돌, 깃털, 꽃, 초, 향물, 음악 등, 무엇이든 네게 힘을 주는 오브젝트들로 성스러운 제단을 만들고, 그 구석에 앉아 네가 되고 싶은 너 자신, 너의 가장 와일드한 꿈들,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하며 너 자신에게 마술을 걸어봐. 그래서 그 가장 이상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네 모습을 관찰하는 거야. Enjoy it!38)

이처럼 정현경이 보여주고 있는 WCC신학은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선교의 본질인 복음전도가 전혀 요구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적 혼합주의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NCCK는 2013년 WCC 부산총회가 성황리에 모든 교단과 교회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복음 선교적 차원에서 거론되어졌던 교회연합차원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의미를 상실한 채세계선교가 아니라 교회연합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인류연합 운동 즉, 세계 평화공동체 형성 그 자체가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2013년 WCC 부산 총회를 위하여 취해야할 NCCK의 입장은 손님을 맞는 한국교0회로서 예의를 갖추어 손님접대에 최선을 다하되WCC의 신학동향과 문제점을 바로 인식하고 한국교회가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적 경향에 편향되는 일이 없도록 WCC 신학 알리기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한국교회들은 아직까지도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무시한 채 대회유치와 성공만을 기원한다면 대회이후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신학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혼동과 분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다행인 것은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NCCK와는 별개로 일부 보수교단의 WCC 총회 비판 움직임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국내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WCC 대책위원회(위원장 서기행 목사)는 30일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란 책을 전국 총대, 교회, 주요 기관에 발송했다.

이 책은 기독론, 교회론 등 WCC의 실체를 비판하는 교단 산하 신학교 교수 12명의 논문을 실은 것이다. 서기행목사는 논문집에 대해 “WCC 신앙노선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논문집을 통해 교단 소속 목회자들부터 WCC가 신앙적·신학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39)

III.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앙 간증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40)

2011년 1월 28일 스위스 제네바 WCC본부에서 WCC와 WEA41)와 로마교황청이 공동의 선교 문서를 발표했다. 2013년 WCC 총회의 한국유치와 더불어 2014년은 WEA의 한국대회가결정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WCC와 WEA의 공동 선교문서발표는 향후 한국선교신학의 방향에도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또한 지난 2011년 10월 1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WCC 총회 준비위원회 모임에서 롤프 힐레(64)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에큐메니컬위원회 위원장과 박성원 WCC 중앙위원(영남신대 석좌교수)이 만나 보수교단이 우려하는 WCC의 신학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았다. 튀빙겐대 신학대 학장을 역임한 힐레 위원장은 1986년부터 2008년까지 WEA신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이 WEA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은 상호 보완적이며, 세계적으로 양 진영이 서로의 합치점을 찾아가고 있는 새로운 상황에 있다”면서“전혀 새로운 운동에 직면해있기 때문에 한국교회도 과거의 이분법적 구도에 함몰되지 말고 대화에 나서는 게 좋을 것” 이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그는 “WCC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귀띔했다.42) 그러나 실상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로 교단의 분열과 신학적 분리를 일찍이 경험한 한국복음주의 교단이 받아들이기에는 힐레 위원장의 이같은 견해가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칼 진영과의 대화는 이전에도 있어왔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복음주의도 다양한 입장중의 하나로 받아드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복음주의적 입장은 성경에 근거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신학적 검증단계를 거치지 않고 대화를 통한 상호보완을 논의하는 것이 상당히 부적절해 보인다.

또한 힐레 목사는 “70년대와 달리 오늘날 에큐메니컬과 복음주의는 양극단을 달리던 구도에서 상당히 다른 상황에 와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에반젤리컬화 되고, 에반젤리컬이 에큐메니컬화 된 성향을 보이고 있다. 상당한 방향 전환이 있었고 배움으로 서로 많이 융합이 된 상태다. 과거의 에큐메니컬 운동과 전혀 다른 운동이라고 생각해도 좋다.”43)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WCC의 신학노선은 WEA의 신학노선과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앞서서 보았듯이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WCC의 많은 프로그램들과 WCC 홈페이지 웹사이트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타종교를 통한 구원의 개연성은 절대적으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받아드려질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특별히 지난 1월 28일 공동으로 WCC와 WEA와 로마교황청이 발표한 선교 문서이다. 다음은 선교 문서 지침사항중 제 2, 3조항이다.

2. 모든 종교인들과 존중과 신뢰의 관계를 정립하고 특별히 교회와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단체적 차원에서 계속적인 타 종교 간의 대화를 다른 기독교적 활동과 더불어 해 나가야 합니다. 수년간의 긴장과 대립 속에 깊은 의혹을 쌓고 신뢰를 잃은 단체 간의 상황에서는, 종교 간의 대화가 대립을 완화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상처를 치유한 기억과, 화해와 평화 증진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3.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이되,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기독교인들을 격려합니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필자가 선교문서 내용 중 제 2, 3조항을 언급하고자하는 것은 특별히 제2조항은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으며, 제3조항은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조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화’의 전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WCC의 입장에서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입장에서 대화를 하게 될 것이고, WEA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대화를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3조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타종교가 지지하는 시각’이 무엇인지 구원관에 관한 시각이라면 WCC의 종교다원주의적 혼합주의 구원관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WEA(The World Evangelical Alliance)의 기원을 살펴보면, 1846년 EAG(The Evangelical Alliance of Great Britain)이 창설되고 이와 함께 영적 일치와 기도에 합심하여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격려하며 부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WEF(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특별한 동기가 없었고 미국 남부 노예제도에 대한 합일점을 찾지 못한 채 활동이 멈추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복음주의자들의 교제권을 다시 형성하려는 바람이 있게 되어서 1951년에 EAG와 새롭게 만들어진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U.S)와 21개 국가의 대표자들이 모여 WEF를 다시 구성하게 되었다.44)

정흥호 교수는 2010년 12월 13일 한국연합선교회 주최학술대회에서 “WEA의 신학노선과 방향”에 대하여 발제를 바치면서 결론에서 “크게 복음주의란 차원에서 본다면 WEA의 신학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로잔 1차 선언(1974)인 Lausanne Covenant나 2차선언 (1989)인 Manila Manifesto, 3차 로잔대회의 The Cape Town Commitment(2010)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5) 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1월 28일 WCC와 WEA와 로마교황청이 공동으로 발표한 선교 문서에서는 무엇보다도 선교문서 작성 배경 중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중시하면서 1번 조항46)에서 “타 종교 간의 기도 (1997-1998)”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WEA가 크게는 복음주의적 선언문들과 같은 맥락에서 있는 듯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이나 활동면에서 좀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IV. 결론

한국교회는 지금 WCC 2013년 부산 총회를 맞아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진영의 우려와 NCCK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축제분위기가 엇갈리고 있다. 물론 이미 총회개최가 확정된 마당에 총회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없지만 WCC신학의 문제점들을 매스컴과 교회교육들을 통해 알리면서 WCC신학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히고 한국교회가 WCC신학의 유입으로 인하여 복음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선교의 열정이 식는 일이 없도록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이에 최근 1월 28일 WEA와 WCC, 그리고 로마교황청이 공동발표한 선교문서는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진 공동문건이라는 차원에서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본론 부분에서 다룬 ‘모라토리움’선언과 ‘대화 프로그램’은 WCC의 선교정책을 대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선교정책들이다. 해방신학적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모라토리움’ 선언은 WCC의 ‘일치와 화해’ 혹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외면적인 용어 사용만 보아서는 WCC가 추구하는 내용들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지 가늠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WCC의 과거 활동사를 통하여 종교다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WCC의 선교정책을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무엇보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전제로 한 ‘대화 프로그램’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대화’에 대한 선입견을 낳았으며 마치 복음주의자들이 전혀 타종교인들과 대화하지 않는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난 1월 28일 공동발표한 선교문서에서는 타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 지지가 촉구되었다. 그러나 타종교 간의 대화에 관한 전제조건이 구원의 상대성을 인정하는데 있는 것인지 어떤 지가 불명확하고 무엇을 위한 대화인지 WCC 홈페이지에서 보여주고 있는 WCC의 대화프로그램에 대한 선행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디 2013년 WCC부산 총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의 영향으로 표류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면서 이번기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WCC의 실체를 알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복음주의, 에반젤리칼, 교회연합주의, 에큐메니칼, WCC, WEA,대화, 모라토리움, 해방, 구원

각 주

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 이하 WCC

3)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764408&cp=du, 2011년 10월 2일. (결의문)

1. 오늘 모인 160개 교단 지도자들과 28개 선교단체장들은 12개 항목의 성명서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WCC의 비기독교적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

2. 36년간 일제침략과 6.25 사변의 격동기에도 오직 예수로 순교자적 피흘림의 발자취를 지켜온 우리 개혁주의 신앙의 지도자들은 WCC의 한국진출을 철저히 배격한다.

3. WCC의 부산총회 유치가 마치 한국기독교 전체의 축제인양 언론매체를 통하여 홍보하여 1,200만 성도들의 복음의 열정을 꺾어 버리려고 우롱한 극소수의 몇몇 교단과 한국교회 분열을 가져온 몇 몇 목회자들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를 바라며 향후 한국교계 분열의 책임은 그들과 그들의 교단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며 오늘 모인 우리 개혁주의 보수교단 지도자들은 끝까지 WCC 부산 총회를 반대하기로 결의한다.

주후 2010년 5월31일

한국 기독교 WCC 반대 대책위원회

160개 교단장 및 28개 선교단체장 일동

4)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출판국, 『WCC 무엇이 문제인가?』(서울: 총회출판국, 2010),

241-243.

(한국 기독교 WCC 반대 대책위원회 성명서)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가 기독교 복음전파에 역행하고, 교회건설 사명을 방해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반성경적, 비기독교적 단체이기에, 이 단체의 한국총회(2013년) 개최를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제시하는 바이다.

1. WCC는 성경이 신앙의 행위의 유일한 최종적 규범이라는 것과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2. WCC는 성경의 기본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치를 추구하며, 이단과 적그리스도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규제하지 않고, 교회의 변증적 사명을 무시한다.

3. WCC는 개신교회의 토대인 전통적인 구원관, 특히 이신칭의 시낭을 약화시키거나 상대화하며, 인간 해방과 혁명을 구원 행위로 본다.

4. WCC는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다고 하며, 종교 다원주의를 표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당위성을 포기한다.

5. WCC는 성령을 정령과 동일시하는 초혼제를 용납하고, 성령을 물활론적으로 해석하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방조하였다.

6. WCC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선교에 도입하여 인간화, 화해, 사회참여 등을 선교의 지상과제로 보며,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전도의 긴박성과 구령사업을 저해한다.

7. WCC는 통전적 선교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빈곤퇴치와 사회활동과 구조악 철폐 등에 치우친 선교를 하고 있다.

8. WCC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일치를 추구하고 정교회를 회원으로 가입시켜, 선교유예를 시행하도록 하여, 성경적 복음 진리 전파를 방해한다.

9. WCC는 마르크스주의와 해방신학과 궤를 같이하는 좌파 성향의 용공주의 태도를 지녀왔고, 공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 생명 박탈, 신앙의 억압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10. WCC는 교회의 연합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성찬중심의 교제단체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실상 교회의 본질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포기한다.

11. WCC는 신학적 다원주의와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며, 교리는 분열시킨다고 하면서 기독교 교리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쇠퇴시킨다.

12. WCC의 외형적 기구 일치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진리안에서 일치된 신앙고백 공동체, 즉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분열시킨다.

2010년 4월29일

한국기독교 WCC 반대 대책위원회

5)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764408&cp=du, 2011년 10월 2일.

6) http://www.unionpress.co.kr/news/detail.php?number=98520&thread=01r02r01, 2011년 10월 1일.

7) 이하 CWME.

8) 본 논문의 1차 자료는 WCC의 홈페이지 (http://www.oikoumene.org) 를 참조하였음.

9) Roger E. Hedlund revised and enlarged, Roots of The Great Debate in Mission : Mission in Histor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India, Bangalore : Theological Book Trust, 2nd. edition, 1993), 258.

10) Roger E. Hedlund revised and enlarged, Roots of The Great Debate in Mission : Mission in Histor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259.

11) Hassing, "Salvation Today", 256. Roger E. Hedlund revised and enlarged, Roots of The Great Debate in Mission : Mission in Histor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에서 재인용.

12) P. Beyerhaus, Bangkok'73, Anfang oder Ende der Weltmission? (Neuhausen- Stuttgart, 1973), 102, 108. 이동주, 『현대선교신학』(서울 :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8), 201에서 재인용.

13) K. Bockmuhl, Herausforderung des Marxismus (Giessen, 1979), 128. 이동주, 『현대선교신학』, 201에서 재인용.

14) L. 보프,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서울 : 분도출판사, 1984), 131.

15) 구르사보 구티에레즈,『해방신학』성염 옮김, (서울 : 분도출판사, 2000), 57-58.

16) 목창균, 『현대신학 논쟁』,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5), 337.

17) 계급 투쟁은 수세기 동안 사회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접전을 일으켜 왔다고 말하며, 그는 자신이‘생산 관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구분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계급의 분류가 역사의 장을 따라 분명하게 구획되어진 것은 아니나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는 이 선들이 명백하다. 자본가 - 소유자는 부르주아 계급이고,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규정되며, 이것이 모든 악을 조장하고 모든 사회 관계들을 규정하는 투쟁을 일으키게 된다고 주장한다.

18) 박영호, 『해방․민중신학 문답』(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19.

19) 스탠리 그렌츠․로저 올슨, 『20세기 신학』신재구역, (서울: IVP, 1997), 341.

20) ANC (African National Congress0, SWAPO (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zation), PACC (Pan Africanist Congress on Azania).

21) E.W. 레훼버,『암스텔담에서 나이로비까지』전호진 역,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1), 201.

22) 이동주,『현대선교신학』, 202.

23) 국민일보 2011년 10월 7일자 29면.

24)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673524&cp=du, 2011년 10월 2일

25) 국민일보 2011년 10월 7일자 29면.

26)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542828&cp=du, 2011년 10월 2일

27) http://www.oikoumene.org/en/programmes/interreligiousdialogue.html 참조

28)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0-12.

29)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2-14.

30 이동주,『현대선교신학』, 9.

31)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0..

32) 현경의 본명은 정현경 이다. 한국여성들이 벌이고 있는 호주제 폐지운동을 지지하기 위하여 저자는 그의 책,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출간을 계기로 그녀의 이름을 현경으로 바꾸기로 했다. 어머니가 세 분이므로 그 성들을 이름 앞에 붙이면 오강장정현경이 되기 때문에 아예 더 평등한 방법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을 다 빼기로 했다.

33). 박윤희, “파격적인 언행과 새로운 여성신학관으로 주목받는 세계적인 신학자 현경”「여성동아」, 2002. 7.

12. newsroom@donga.com. 소윤정, “정현경의 혼합주의적 신론에 관한 비판적 연구 - 성령론을 중심으로 -”,『복음과 선교』Vol.9 (2008), 217에서 재인용.

34)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5.

35) K. Bockmuhl, Herausforderung des Marxismus (Giessen, 1979), 142. 이동주, 『현대선교신학』, 15에서 재인용.

36). 현경,『미래에서 온 편지』,(서울: 도서출판 열림원, 2003), 232, “살림이스트 선언”. : 살림은 한국여성이 매일 하는 가정일을 일컬음. 예를 들면 나무하기, 물긷기, 음식하기, 빨래하기, 베 짜기, 아이 키우기, 병간호, 노인 돌보기, 꽃․나무 가꾸기, 우물 지키기, 소․닭․개 키우기, 그리고 집의 영(靈)들을 돌보기 등. 살림은 또한 망가지는 것(냄비, 신발, 그리고 가슴 등)을 고치는 일을 일컬음. 한국 사람들이 “저 여자 살림꾼이네”하고 말하면 그것은 그 여성이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기술, 예술 전문성이 있음을 말함.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을 배부르고 행복하게 먹이는 것,가족의 평화, 건강, 풍요함을 끌어내는 것(이때의 가족은 모든 종류의 생명을 포용하는 큰 가족 개념을 의미), 아름다운 삶의 환경을 만드는 일 등.

37). 박윤희, “파격적인 언행과 새로운 여성신학관으로 주목받는 세계적인 신학자 현경”『여성동아』,newsroom@donga.com, 2002, 7, 12.

38). 현경『미래에서 온 편지』,, 28.

39)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308981&cp=du, 2011년 8월 31일

40) http://www.worldevangelicals.org/resources/source.htm?id=288, 2011년 10월 8일, 공동 선교문서 <부록> 참조.

41) 세계복음주의연맹

42)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422579&cp=du, 2011년 10월 8일

43)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422579&cp=du, 2011년 10월 8일

44) David M. Howard,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World Missions. ed. by Scott Moreau (Grand Rapids, Mich, : Baker Book House, 2000), 1027-28. 정흥호, "WEA의 신학 노선과 방향“,『WEA와 WCC의 신학과 선교』, 한국연합선교회 학술대회 자료집 (2010.12.13), 11.

45) 정흥호, "WEA의 신학 노선과 방향“,『WEA와 WCC의 신학과 선교』, 21.

46) 1. 오늘날 세계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간에 협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PCID와 WCC 내 종교 간 대화와 협력(IRDC)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협력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PCID 와 WCC-IRDC 가 과거에 협력한 문제들의 예로는 타 종교인들 간의 결혼 (1994-1997), 타 종교간의 기도 (1997-1998), 그리고 아프리카의 종교성 (2000-2004) 등이 있습니다. 본 문서는 이 협력의 결과물입니다.

<부록>

한국어 번역본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앙 간증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수행 지침

서론

선교는 교회 존재의 중심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세계에 증거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일을 모든 인류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복음의 방식에 따라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지거나 기독교 신앙 간증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진 인종과 집단들 간에 긴장감이 존재한다는 인

식 하에, 교황청 종교간대회평의회(PCID), 세계교회협의회 (WCC), 그리고 WCC가 초청한, 세계복음연맹(WEA)은 지난 5여년간의 교류를 통해 기독교인의 신앙 간증 행동 지침으로써 사용될 본 문서를 집필했습니다.

이 문서의 목적은 선교에 관한 신학적인 선언을 하고자 함이 아니며, 다종교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 간증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습니다. 이 문서의 목적은 교회와, 교회 협회들, 그리고 선교 단체들이 현재 행하는 선교 방식들을 회고하고, 이 문서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무종교인들을 향한 그들의 고유의 전도와 선교 방식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준비하는 데 활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문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는 그들 고유의 행동 양식에 있어 말과 행동 모두로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 간증의 기초

1.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그들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를 온유함과 경외를 가지고 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요, 기쁨이다. (베드로전서 3:15)

2.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최고의 간증이다. (요한복음 18:37) 기독교인의 신앙 간증은 하나님나라, 이웃에 대한 섬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지라도 자기 자신을 전부 내어주는 자기 비움의 선포 형식을 띄는 간증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신자들도 말과 행동에 있어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선교지에 보내진다.

3.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 교회의 본보기와 가르침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가이드가 되어야 마땅하다. 200여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나눔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것을 추구해 왔다. (누가복음 4:16-20)

4. 다종교 세계의 기독교 신앙 간증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참여 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도행전 17:22-28)

5. 어떤 상황들에서는 복음을 실천하고 선포하는 것이 힘들거나, 이러한 활동이 박해받거나 심지어는 금지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있어 서로가 연합하고, 신실하게 증거

를 계속해나가는 것이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사명이다. (마태복음 28:19-20; 마가복음 16:14-18; 누가복음 24:44-48; 요한복음 20:21;사도행전 1:8)

6. 기독교인들이 속임수와 강제적인 수단에 의지한 부적합한 방법으로 선교를 행하고 있다면 그들은 복음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회개를 요하며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가 필요한 것을 상기시킨다. (로마서 3:23)

7.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간증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지만, 개종은 온전히 성령에 의한 것 임을 확신한다. (요한복음 16:7-9; 사도행전10:44-47)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인간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칙

기독교인들은 적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루는 것을 추구하며, 다음의 원칙들을 고 수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는 특별히 다종교 간의 맥락에서 더욱 그렇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라고 믿으며 그들의 신앙 간증의 행위 안에서도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믿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 삼는다. 기독교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과, 그리고 특별히 신앙 간증의 행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본보기와 가르침을 따를 것이 요구된다.

3. 기독교인들의 도덕성. 기독교인들은 성실, 자비, 연민, 그리고 겸손으로 행동할 것이며, 모든 종류의 교만과, 타인을 업신여기는 행위, 그리고 차별을 극복할 것이 요구된다.

4. 섬김과 정의 실천. 기독교인들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미가 6:8)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섬기고 그 섬기는 형제 자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교육의 제공, 의료 제공, 구제, 정의의 실천, 시민단체 활동 등의 섬김의 실천은 복음을 증거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이다. 기독교인들의 전도 활동에 가난과 노동 착취의 현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들은 섬김에 있어 금전적인 동기나 보수를 미끼로 사용하는 모든 방식들을 철폐해야 한다.

5. 치유사역에 있어서의 분별력. 복음 선포의 중요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사역을 실천한다. 치유사역을 행하면서 인간 존엄성에 경외함을 가지고 사람들의 연약함과 치유에 대한 필요가 남용되지 않도록 분별력을 가질 것이 요구된다.

6. 폭력의 배제. 기독교인들은 신앙 간증의 힘을 남용한 모든 종류의 폭력, 심지어는 심리적인 또는 사회적인 폭력들을 배제해야 한다. 예배당,종교적 상징 또는 경전의 파괴를 포함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권력에 의한 폭력, 불공정한 차별과 억압을 배제해야 한다.

7. 종교와 믿음의 자유.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종교를 선포하고 행하고 전파하고 전도하는 권리를 포함한 종교적 자유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데에 근거한 인간의존엄성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정치적인 목표에 종교가 사용되는 곳 또는 종교적 탄압이 일어나는 곳에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이들을 규탄하는 예언적 증거에 참여해야 한다.

8. 상호 존중과 협력. 기독교인들은 상호 존중의 자세를 가지고 헌신하는 것이 요구되며, 정의,평화와 공동의 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종교 간의 협력은 이런 노력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9.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 기독교인들은 복음이 문화에 도전을 주는 동시에 문화를 증진시킨다는 점을 직시한다. 복음이 문화의 어떤 부분에 도전을 줄 경우,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요구된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자신의 문화에서도 복

음에 의해 도전 받는 부분들을 잘 분별해야 한다.

10. 거짓증거의 철폐.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또한 책임감 있게 말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 양식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많이 들어야 하고, 그들 안에 진실되고 좋은 것들을 인정하고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의견과 비판적인 자세는 상호존중의 분위기에서 이뤄져야 하며, 다른 종교에 관한 거짓 증거를 피하도록 분명히 해야한다.

11. 개인적 분별력 의 확보.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의 종교를 바꾸는 일은 중대한 일이며, 이는 개인의 자유를 확신하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회고와 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하는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12. 다른 종교간의 관계 증진. 기독교인들은 보다 더 깊은 상호 이해, 화합과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다른 종교인들과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지침

WEA, PCID의 도움으로, 그리고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 (가톨릭, 정교, 기독교, 복음주의와 성령주의) 의 참여로 WCC가 주최한 본 제3차 컨설테이션은 에큐메니컬 협력의 정신으로 이 문서를 교회, 국가와 지역의 신앙 고백적 공동체와 선교 단체들, 그리고 특별히 종교 간 관계에서 사역하는 이들에 의해 고려되도록 준비해 왔으며, 다음을 권면합니다:

1. 각 상황에 적용 가능한 이 서류와 기독교 증거에 관한 정식 행동 지침 상의 이슈들을 연구하십시오. 가능할 경우 이는 다른 종교 대표들의 자문을 통해야 하며 초교파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2. 모든 종교인들과 존중과 신뢰의 관계를 정립하고 특별히 교회와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단체적 차원에서 계속적인 타 종교 간의 대화를 다른 기독교적 활동과 더불어 해 나가야 합니다. 수년간의 긴장과 대립 속에 깊은 의혹을 쌓고 신뢰를 잃은 단체 간의 상황에서는, 종교간의 대화가 대립을 완화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상처를 치유한 기억과, 화해와 평화 증진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3.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이되,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기독교인들을 격려합니다.

4. 다른 종교 단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익을 위한 범종교적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는 일에 협력하여야 합니다.

5. 많은 나라들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억제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교 자유가 적당하고 포괄적으로 존중되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에 요청하도록 합니다.

6. 주변 이웃들과 그들의 복지를 위해 기도하고, 또한 기도가 기독교인들의 선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에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 중요한 부분임을 인지합니다.

부록: 본 문서의 배경

1. 오늘날 세계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간에 협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PCID와 WCC 내 종교 간 대화와 협력(IRDC)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협력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PCID 와 WCC-IRDC 가 과거에 협력한 문제들의 예로는 타 종교인들 간의 결혼 (1994-1997), 타 종교 간의 기도 (1997-1998), 그리고 아프리카의종교성 (2000-2004) 등이 있습니다. 본 문서는 이 협력의 결과물입니다.

2. 오늘날 세계에도 다른 종교 간 폭력, 인간 생명의 상실을 포함한 갈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다른 원인이 이러한 긴장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때로는 본의가 아니거나 또는 본의를 가지고 핍박하거나 폭력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도 이런 갈등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PCID 와 WCC-IRDC 는 기독교 신앙증거 행위에 관한 지침을 공동으로 만드는 협력 과정에 참여하여 이 문제들에 대해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IRDC 는 이 과정에 WEA가 참여하도록 초대하였고, 이 초대는 기꺼이 수락됐습니다.

3. 처음에는 두 번의 컨설테이션이 열렸습니다. 첫번째 모임은 이탈리아의 라리아노에서 2006 년에 ‘현실의 평가(Assessing the Reality)’라는 주제로 각기 다른 종교의 대표들이 그들의 개종에 대한 관점과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이 컨설테이션의 성명서의 한 부분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의 이해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종교적 감성을 침해해서는 안되는 것을 확실시 한다. 종교의 자유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종교 외의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확증하는 목적으로 다른종교를 부정하거나, 비방하거나, 잘못 전하지 않아야 하는 우리 모두가 타협해서는 안되는 책임을 포함한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4. 두 번째 모임은2007년 프랑스 뚤루즈에서 기독교인들 간의 공동의 이슈들을 논의하기 위해서 개최됐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Family and Community), 타인 존중 (Respect for Others), 경제 (Economy), 마케팅과 경쟁 (Marketing and Competition), 그리고 폭력과 정치 (Violence and Politics)에 관한 질문들이 상세하게 토론됐습니다. 이 주제에 관련된 목회와 선교적인 이슈는 신학적인 회고의 배경과, 또한 본 문서 안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된 원칙을 세우는 데 배경이 되었습니다.

5. 세 번째로는 2011년 25일부터 28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기독교인 들 간의 컨설테이션에 참석한 이들이 이 문서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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