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세력'에 해당되는 글 2건

반응형

이슬람의 어원과 역사 (islamic history)

 

<어원>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싸리마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역사>

 

이슬람은 서기 610년 무함맏(마호멧)40세에 최초로 알라(유일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래 약 23년간에 걸쳐 계시 받은 꾸란(코란)이 그 경전이다.

 

초기 이슬람은 무함맏이 그의 출생지이며 최초 계시를 받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그와 몇몇 소수의 교우들에 의해 포교되기 시작했으나 다신교적 분의기의 지역 부족들이 그들의 정치, 종교, 경제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박해한다.

 

이 박해를 피해 서기 622년 메디나라는 도시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이를 "히즈라" (성천,聖遷)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슬람력 (히즈라력)이 생겼습니다.히즈라 이후 메디나에서 교세를 확장한 이슬람은 다시 메카로 진격하고 사우디 반도를 통일한다.

 

무함맏은 그의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계승한 칼리프 (계승자) 시대가 시작된다. 칼리프는 실제로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만장일치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되지 않았다. 선출에 의한 칼리프가 나라를 다스린 시기를 4대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후 칼리프의 구가는 동서 칼리프로 나누어지며 세습에 의한 왕조의 형태로 변질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북으로 시리아를, 서로는 마그립(지금의 모로코)까지 진출하며 다시 바다를 건너 스페인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동으로는 이라크 지역과 페르시아, 다시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슬람의 급격한 확장에 자극받은 중세 유럽은 1096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후 1365년까지 아홉 차례, 25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이슬람에 일격을 가한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은 그 확장세가 뚜렷이 둔화됨은 물론 과학과 철학, 동서 교역 등등 찬란히 발달했던 그들의 문화도 사그라진다. 물론 이슬람 문명은 암흑기 중세 유럽에 인본적 사상과 과학문명을 전하여 르네상스를 촉발 시키고 유럽 시민 문화와 산업 발달의 단초를 제공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은 소아시아(터키) 지역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을 정복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에는 파키스탄과 이집트까지 확대되어 실질적인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이집트를 근거로 했던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이양받은 오스만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과 흑해 연안까지 점령하고 지중해 해상권까지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17세기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데 유럽 국가의 남진 정책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 아랍 각 지역의 반 오스만 운동과 이슬람 부흥 운동, 이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조 성립등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점령과 식민 정책 이후 오스만은 현저히 쇠퇴 하였으며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아랍 지역에 대한 분할 통치가 실시된다.

 

20세기 이슬람은 2차 대전 후 각 아랍국의 독립과 이스라엘의 건국 등으로 아랍.이슬람 세력과 이스라엘.서구의 세력 대결 구도로 편성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 석유 개발에 따른 미국과 유럽, 옛소련의 대결로 세계의 전장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앞세운 미국과 아랍국 간의 수차에 걸친 중동 전쟁, 그로 인한 석유 무기화, 1,2차 석유 파동 등 이슬람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 지역이 되고 만다. 결국 석유를 둘러싼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미국의 대 아랍. 이슬람 정책이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 오면서 미국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과격 테러로 이어지며 걸프 전쟁, 911 사건, 이라크 침공 등 분쟁이 계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부산 이슬람 사원)

1. 한국을 향한 이슬람의 다와’(선교)

 

한국 내 이슬람의 성공적인 확장 

 

이슬람세력의 세계정복 전략 중 아시아지역 이슬람화의 전초기지로 지명된 한국은,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하겠다는 그들의 목표대로 정치·경제·문화·외교적 수단이 총동원되어 매우 활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쿠웨이트 정보부에서 전 아랍권으로 발행하는 월간 아랍어 잡지 알아라비(Al-Arabi)의 올해 4월호에 의하면 이슬람권은 한국의 이슬람 확장을 환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미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이슬람국가를 방문해 한국 내 이슬람포교를 위해 교류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을 동방에서 이슬람의 횃불을 밝히는 한국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4월에는 한국 이슬람 선교 5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기념대회가 이집트에서 열리기도 했으며, 인천시 청라경제자유구역에는 아시아 최초의 중동문화원이 세워져 오는 1022일 개관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 처음 이슬람이 들어온 것은 1955년 한국전쟁의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터키 군대에 의해서였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현재, 이슬람 측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무슬림 숫자는 2005년 말 현재 15만 명이라고 한다. 그들은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 중앙 성원을 비롯해서 부산, 전주, 인천, 광주, 안양, 파주, 부평, 등지에 대규모 성원을 건축하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이슬람 예배처소가 있으며, 이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슬람권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아 온 한국인 무슬림 박사들이 23명에 이르며, 그들은 한국 내에 이슬람을 알리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슬람의 한국 침투상황을 월간 <선교타임즈>가 지난 9월호에서 특집기사로 다뤘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이만석, “이슬람의 한국 침투 전략선교타임즈 20079월호 )

   

한국 정부의 이슬람 지원= 한국 정부는 엄청난 석유를 생산해 내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에게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때는 한국 이슬람중앙성원을 짓는데 한남동의 시유지 1,500(5,000 평방미터)을 희사했다. 그리고 잠시 대통령직을 감당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19805월 사우디아라비아를 공식 방문했을 때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는데 적극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2개월 뒤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용인에 있는 국유지 43만 평방미터(13만평)를 이슬람 대학 부지로 헌납했다. 

 

아랍어를 통한 선교전략= 무슬림들은 국제화 시대에 외국어 교육의 붐이 일고 있는 한국의 현상과 산유국들의 장점을 잘 이용하여 아랍어를 가르치고자 한다. 그리고 아랍어는 꾸란의 언어이기 때문에 아랍어를 배우려면 자연히 이슬람 강의를 들어야 하고, 이것은 효과적인 선교전략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2002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아랍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교육법이 바뀌었다. 물론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무슬림들이 얼마나 노력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