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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협성신학교와 별도로 운영해오던 여자신학교를 합해 감리교 신학교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조직은 19053월 처음으로 개강하게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로서의 견실한 틀을 갖추어 가면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언더우드, 클락(곽안련) 등이었다. 이들은 19076월에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이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해서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했다.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성경공부와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명실상부한 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7년 가을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는 살펴보면 대한예수교장로교는 1907년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함으로 시작된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을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 열을 강하게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이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선교까지 이어졌고 만주와 중국선교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도까지도 복음의 열정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곳은 중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간도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국교회가 이곳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여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선교에 힘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흘린 복음의 선혈이 이런 선교의 열정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에 빚진 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에 빚진 자이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지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유라시아로 출발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이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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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선교사, 이기풍 목사

 

1. 기독교 박해자에게 열렬한 신자로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
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
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
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
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
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2. 제주도에서 선교활동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
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
의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청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
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
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
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
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 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3. 도서벽지를 통해 복음전파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
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
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
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비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
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
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4.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순교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
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
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
노회 산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 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
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그의 유
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
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
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
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스왈른 선교사를 도우며 열심히 전도를 하던 이기풍은 청일전쟁이 끝난 후, 스왈른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은 마포 선교사를 찾아가 자기가 과거에 집안으로 돌을 던지고 턱에 상처를 낸 난봉꾼이었다는 것을 낱낱이 고하고, 그 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노라고 흐느끼며 자기 죄에 용서를 구했다. 마포 선교사는 감격스럽고 기이한 사실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릴 뿐이었다.

이후 이기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서 1907년까지는 스왈른 목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업무를 돕는 조사(helper)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포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3년경(연도가 정확하지 않다)에 입학하게 된다.

이기풍의 신학교 생활은 스왈른 선교사와 마포 선교사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이기풍은 복음을 전하고 성경공부를 시켜야 했던 권서 경험을 통해 해박한 성경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여, 목사후보생으로 추천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신학교에 입학한 이기풍은, 대부흥운동이 절정에 달하였던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서경조, 한석진, 길선주, 양전백, 송린서, 방기창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 목사 안수를 위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노회가 설립되었으며, 목사 안수 다음날 속회된 노회에서, 마포 선교사는 이기풍 목사에게 회중을 대표하여 참회기도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3일째 회의가 열린 9월 19일에는, 7인의 목사가 탄생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전도위원회의 결의를 만창일치로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기풍 목사는 우리 나라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평양의 술 주정꾼이 마포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쳤으나, 회개하여 목사가 되어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미국 장로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교회사> 첫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최초 외지 선교사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

이기풍목사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절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게 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선교활동을 몹시 방해하던 혈기방장한 사나운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예수님이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놀란 이기풍은 끈질긴 전도를 하던 소안련(스왈른) 목사를 찾아가서 고백하고 1894년 마침내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1888년부터 1901년까지 스스로 성경을 들고 기독교가 척박한 함경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런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던 마펫은 이기풍에게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내 1901년 장로가 되고,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1907년에 먼 훗날 3·1독립운동 33인의 대표로 활약하였던 길선주, 양전백 등과 함께 장로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제1회 장로신학교 신입생은 이기풍을 비롯하여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 7명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던 해 독노회를 조직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독노회 결의에 따라 이기풍이 외지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되니,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13년동안 제주도에서 개척전도한 교회는 성내교회를 비롯해 성안, 금성, 성읍, 조천, 모슬포, 용수, 중문, 삼양, 한림, 법환, 세화교회 등 여러교회를 설립하였고 1918년에는 광주 제일교회(당시 북문교회)와 순천중앙교회의 초대목사로 부임했다.
이기풍 목사님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심으로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존립을 흔드는 중대사였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강한 신앙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시다가 목사 안수받은지 35년이 되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순교하심으로 그의 강한 믿음을 입증해 보이셨다. 그는 자신의 명리보다 성도들의 영혼생명을 위한 깊은 사랑으로 참 목자의 삶을 사셨으며, 목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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