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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성 목사 영성일기/ 사이버 공간에 만든 수도원

 

1. 지난 6월 영성일기를 쓰는 이들을 돕기 위하여 영성일기 앱을 만들었습니다. 영성일기 앱은 1년 전 오엠 선교훈련원 이사 모임에서 요청받았던 것입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께서 PC에서만 아니라 스마트 폰으로 영성일기를 쓰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면 일기 쓰고 나누기가 훨씬 편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의 요청이 주님이 명령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1년 후 영성일기 앱이 만들어져, 스마트 폰에서 자유롭게 쓰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2. 저는 이 영성일기 앱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사이버 공간에 수도원이 생긴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영성일기를 쓰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 바라보며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이버 공간이 있기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3. 저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수도원의 접수창구를 담당하는 직원입니다. 이번 브라질, 파라과이, 미국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선교사님, 목사님, 교인들 마다 영성일기를 소개하고 들어오시도록 안내하였습니다.

 

4. 저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아닙니다. 누구도 영성일기 수도원의 원장이 될 수 없습니다. 종신 수도사도 따로 없습니다. 수도원장의 역할을 하는 이가 있다면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입니다. 저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한 사람의 수사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주님과의 교제라고 무시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사이버 공간에서 성도의 교제라고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실제적인 인간관계보다 사이버 상의 관계를 더 깊이 맺는 것이 여러 가지 부작용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청년 학생들에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6. 그러나 사이버 상의 관계 형성이 신체상의 격리,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기보다 가지각색의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이루어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새로운 시대로 우리는 들어섰습니다. 사이버 환경은 어쩔 수 없는 추세가 되었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이제는 사이버 상의 관계 형성이 더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7. 주일 아침 예배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토요일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한 사람 보다 자신을 더 잘 알 것 같습니까? 이미 우리는 예배당 저쪽에 앉은 모르는 사람 보다 사이버 공간의 모르는 사람들과 더 직접적이고 친밀하게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미 시대가 변했습니다.

 

8. 사이버 상의 교제의 문이 열리므로 세계 오지의 선교사님들과의 매일 매일의 교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연합할 길이 열렸습니다. 도무지 현실적인 여건에서는 매일 매일 만나고 교제할 수 없는 이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친밀해진 교제가 가능해졌습니다.

 

9. 교회 안의 소그룹 공동체의 교제에서도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직접 만나야만 성도의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주간에 한번만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매일 마음까지 서로 나누며 교제하다가, 한 주에 한번 모임을 통하여 만나 교제할 때, 훨씬 깊고 가까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10. 제가 영성일기 앱을 궂이 수도원에 비유하는 것은 약간의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무슨 규칙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수도원 생활이 규칙이 있는 생활이듯이 영성일기에도 규칙이 있는데, 규칙에 유익함이 있습니다.

 

11. 규칙의 원어에는 ‘곧은 막대, 버팀목’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즉 식물이 하늘을 향해 똑 바로 자라도록 대 주는 막대기와 같은 것입니다. 혼자 서지 못하는 식물도 버팀목을 대 주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성일기에 약간의 규칙을 둔 것은 영적 성장의 틀을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규칙들 때문에 주님을 향하여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더 높이 뻗어 나아가고,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과 더 친밀히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 저는 사이버 공간에 수도원을 만든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안내 직원이 된 것만도 감사합니다. 영성일기를 통하여 우리는 일생생활 속에서 수도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을 다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 이미 많은 구도자들이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눈이 뜨이고,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을 겪고, 익숙하지 않아서, 기대만큼 즐겁지 않고 힘들어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실제 수도원에서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14. 앞으로 영성일기 수도원이 어떻게 진행될지 저는 모릅니다. 오직 주님이 이끄시는 데로 나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유기성 목사 영성일기] / 사이버 공간에 만든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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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유기성목사 / 십자가에서 사랑에 눈뜨다


어느 교인이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주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하신 기도가 저를 향한 기도로 믿어졌습니다.”
그 고백이 감사했습니다. 그가 십자가의 예수님 만났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알지 못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주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모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깨달아지는 것이 바로 알지 못하고 지은 죄들입니다.
어느 교인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말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이제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어느 교인은 또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만 알았지 저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말이 안된다고 느꼈고, 그럴 필요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믿습니다. 저도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살았습니다"
이 고백을 하시면서 눈에 눈물이 핑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난주간의 은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알지 못하고 죄었던 죄가 얼마나 많았는지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죄인 줄 모르고 지었던 가장 큰 죄는 사랑하지 못하는 죄일 것입니다.

오늘 새벽,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비로서 제 죄가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지 못한 죄입니다.
중국 가정교회의 일화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을 때, 중국 가정교회는 하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서로를 통해 위로받고 기뻐하고 신뢰하였습니다. 출옥한 후에도 함께 복음을 위하여 일했고, 모든 일에 연합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지고 외국 교회와 선교단체로부터 지원이 오고 신학서적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가정교회들이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1,2년 사이에 12개로 조각나 버렸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중국 가정교회 각 분파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모임이 있기 전 날, 한 형제가 주님의 마음을 받았습니다. 모이자 마자 곧바로 토론에 들어가지도 말고 처음부터 함께 기도하려고 들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분파의 지도자가 다른 분파 지도자들이 들어오면 무릎을 꿇고 한 사람씩 모두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모임이 시작되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더니 급기야 시장판의 회의처럼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문제를 가지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의 상처들이 다시 드러났고, 분파 간의 거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모든 대화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각자 기도하고 일어섭시다.
그 때 가장 큰 분파의 지도자가 눈을 감은 채 기도를 하고 있는 옆의 형제 앞에 무릎을 꿇고 살며시 그의 신발과 양말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뜬 형제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씻어주는 형제를 뜨겁게 끌어 안았습니다. 곧이어 그의 아내도 따뜻한 물동이를 가지고 와서 형제의 아내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무릎을 꿇은 채 껴안고 울었습니다. 13년간 쌓여온 쓰라림과 시기심과 그릇된 소문이 씻겨 나갔습니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구했습니다. 지도자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 은혜의 방바닥 곳곳에 눈물의 웅덩이가 생겼습니다. 그날부터 이들은 기능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함께 사역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가슴을 온전히 점령한 것입니다.
교회 건물 건축을 마무리해야 했을 때, 주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건축보다 건축 이후를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진짜 교회를 세웠는지 아닌지는 건축 이후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교회 중심에 십자가가 있는지, 정말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인지는, 교인들이 자기가 알지 못하고 짓는 죄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깨달았는지를 보면 됩니다.
만약 교인들이 서로의 허물을 탓하고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그 교회는 타락한 교회입니다. 여전히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면 비난하고 정죄하는 말이 사라집니다.
진짜 사랑에 눈이 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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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유기성목사 / 약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저는 말도 잘하지 못합니다.

글도 잘 쓰지 못합니다.

카리스마가 있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도 없고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저의 깊은 열등감이었습니다.

저는 제 약한 모습이 늘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약해서 어떤 일도 제대로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약하면 죽는 알았습니다.

어려서 뼈져리게 느낀 것은 목사도 약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약하면 가족들도 고생이고, 교인들도 불쌍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하면 저도 죽고 가족도 죽고 교회도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약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저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진리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약한 자를 택하여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저를 약해서 택하셨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날,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 후 제 안에서 약한 것으로 인하여 속 썩는 일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약하지만 그것을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것은 저의 유능함도, 박식함도, 지혜로움도, 빼어난 인물도, 소유의 많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제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제 안에 거하시는 온전한 하나됨이었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을 쓰십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2017년은 정치 사회 경제 전 분야에 걸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것은 영적인 어려움입니다.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배소 교회는 이단과 잘 싸웠지만 영적으로는 너무나 거칠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지금 한국 교회가 이와같은 모양입니다.

열심은 있었지만 주님과 친밀함은 사라졌습니다.

핸리 블랙가비 목사가 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가만 서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저기,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인가 좀 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말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좀 가지자!”

주님과 친밀하지 않은 사람은 다 무너질 것입니다.

불의에 무너지고, 죄의 유혹에 무너지고, 세상 흐름에 무너지고, 사람들의 말에 무너지고, 영적 메마름에 무너질 것입니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한 자가 아니면 앞으로 닥칠 시험들을 견딜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약한 것은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닙니다.

약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과 더욱 친밀히 동행하기만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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