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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지식] 신앙이란?

 


 성경말씀과 신앙


신앙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과 나 사이 살아있는 인격적 관계이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살아 있나? 없나? 입니다. "호세아서 6장6절말씀

<내가 원하는것은 번제나 제사보다 너의 마음을 원하노라>

안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하여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아는 것이다.

구약의 안다라는 말 야다라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안다 모른다 차원이 아니고 상대방의 마음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마음이 공유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그토록 주님은 어느 번제보다 예배당보다 그런 야다의 사랑을 하시며 그런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사야서 29장 23절 말씀

인격적인 관계에서 마음 떠나면 다 떠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나의 마음을 잃어 가는 것이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첫 사랑의  마음을 다시 찾는 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주님만이 우리의 깨어진 마음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는 그런 사랑을 깨닫고 다시 그런 첫사랑을 회복되기를 우리 주님은 바라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2장 16절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를 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그 마음을 회복케 하여 주신다. 로마서 5:5

 

십자가 앞에서 나를 처절히 깨뜨리고 영접해야 한다. 그토록 아끼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심은 무슨 의미인가? 나의 죄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 십자가 앞에서 직면하여 회개하여야 한다. 결정되지 않는 두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결코 주님 만나 주시지 않으신다. 오직 한마음이어야 한다.

 

주님 나의 생명이 되어 주시옵소서 이제야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심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나의 온 마음을 바쳐 기도드리오니 저의 기도를 받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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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금주·금연운동

 

 

초기 선교사들, ·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5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10월부터 연 1구세신문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2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이상규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6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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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 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 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 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 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ㅉ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 ,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 ㄷ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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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이 없는 기도

 

시 38:15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H. G. 웰즈의 단편 ‘성직자의 죽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저녁 예배당에서 열성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몇 년간 빠지지 않고 기도를 드리는 성직자를 보고 사람들은 정말로 믿음이 좋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직자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기도를 드리던 순간 갑자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
“아들아, 내가 듣고 있다.”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지만 성직자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너무 놀라 죽고 말았습니다. 항상 응답을 바란다고 말로는 고백하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기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듣고 응답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위해 먼저 기도하십시오.
큐티/김장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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