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예배설교 ♡기쁨의 근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근원

성경/빌1:1-2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들어가기

 

 

빌립보서를 본문으로 하는 말씀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빌립보서와 관련되어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빌립보서는 오늘날 그리스의 북동부에 있는 옛 도시입니다.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서 금과 은이 풍부하고,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주요지점으로 상업과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뒤에 오늘날 유럽인 당시의 마게도냐로 건너가 도착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첫 번째 성도가 되었고, 점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준 사건으로 인해 당시의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이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날 밤 지진이 나고 모든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간수가 자결하려고 할 때에 바울이 말리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을 듣고 간수와 그 가족들 모두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배경의 빌립보서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옥중서신이라는 별명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의 또 다른 별명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4장으로 이루어진 빌립보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통하여서 어려운 시대 가운데 기쁨의 파도를 타는 성도들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그럼 왜 바울은 빌립보서를 썼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로마의 옥에 갇힌 바울을 위로하려고 에바브로디도라를 선물과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있는 동안 심한 병을 얻게 되어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빌립보로 돌아가는 일이 오랜 시간 지연되므로 그로인해 빌립보 교회에로부터 에바브로디도가 비난을 받지 않도록하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써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붙입니다.

 

 

둘째로 빌립보서를 쓴 이유는 바울의 모든 선교 사역에서 빌립보 교회가 앞장서서 바울을 도와주었기 때문(빌1:5, 4:15, 고후8:1)에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세 번째로 빌립보 교회에 “유오디오와 순두게”라는 중요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막고(빌4:2), 거짓교사들(빌3:2)로 인한 교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옥중에 갇힌 것은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 이러한 빌립보서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이라고 정의 하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신앙생활에 대해 정의하기를 “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축제가 무엇입니까? 즐거움 아닙니까? 기쁨 아닙니까? 고로 신앙생활이란 기쁨 속에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모든 예배 시간에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신앙이 좋지 않고야 예배와 기도와 전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신앙이 좋다."라고 말할 때는 고난이 와도, 난관에 부닥쳐도,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상황인데, 힘든 상황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원망을 할 만한 일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앙의 힘입니다. 그 감사함 속에 그 기쁨 속에서 현재에 닥친 고난과 난관을 극복하는 것. 그게 신앙 아니겠습니까?

 

 

▶ 지금 사도바울은 죄인이 몸으로 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한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 가운데 당하게 되는 고난이고 핍박입니다. 그런 속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하는 말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빌립보서가 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때 기뻐하라고 한다면 말씀의 힘이 약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려움 상황인데 그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한다면 그 삶은 능력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즐거워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런 삶을 통해 나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일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러한 기쁨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기쁨의 뿌리가 무엇이겠습니까?

 

 

● 오늘 본문을 통해서 2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우리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가 왜 구원받았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가서요? 아닙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집에 가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짐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 뽕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우리가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인생가운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기쁨 속에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인생가운데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둘째는 우리의 사역에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장,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셋째는 우리의 문제에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그 가정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삶의 문제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해결의 역사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두 번째로 우리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평강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평온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 가능합니다. 돈 없는 사람이 돈이 있으면 평강해 집니까? 느부갓네살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왕입니다. 그에게는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해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단2:1) 그래서 시편127:2에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마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쾌락을 누리려고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보다 갖고 싶은 것은 “평강”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강은 잠시 잠깐뿐입니다. 사도행전1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옥에 잡혀 사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잠을 잡니다. 얼마나 평안하게 잠을 자는지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쳐서 깨울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사형을 앞두고 그런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향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 기쁨을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도록 기도하므로 어떤 모습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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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교회의 시작과 기원(행2:1-13)

성경/행2:1-13    제목/교회의 시작과 기원

● 오늘 본문은 성경의 역사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며

- 교회가 탄생했으며

- 예수님의 약속대로 믿는 자들의 육체와 성령이 하나 되는 역사가 있었고

-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전무후무한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몇 군데 기록 되어 있습니다. 행4:8, 24-31. 행8:15-17, 행9:17, 행19:6에 기록이 있지만 본문과 같은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순절과 같은 역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순절에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현상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이러한 현상 속에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3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방언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5절부터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8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각자 자기가 태어난 곳의 말로 듣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을 듣습니까? 11절 “(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하고)”그런데 이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니 어떤 힘에 붙들려서 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 말씀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시작과 기원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들어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행동하는 곳입니다. 본문 2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교회의 출발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행동에서부터 교회는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 권세자들이 배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했는가? 행4:13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다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보통사람들이다. 무시하는 발언.

초대교회 당대의 제자들, 믿는 성도들의 특징 - 배운 것이 없다. 영향력도 없다. 권세도 없다. 돈도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고, 학문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되고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3천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기 때문이다.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교회의 출발이고,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신다. 주역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동이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가 있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모습입니다. 비록 120명의 성도들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역사하신 곳이고,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두 번째 요소는 변화입니다.

● 교회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제자들을 변화 시키셨습니다. 본래 제자들은 겁 많고, 소심하고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용사로 변화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쓴 팡세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줄 아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철학자들의 하나님, 사상가들의 하나님, 점쟁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 이삭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 야곱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변화 시키고 있다.”라고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찌 사람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만나는데 어떻게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 가면 데스밸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덤가에 가더라도 그곳에 풀이 있는데, 데스밸리에는 풀 한포기 없을 정도의 죽음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데스밸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곳에 비가 왔습니다. 비가 오니 풀들이 돋아납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몇 개월, 몇 년 동안 묻혀 있다가 물을 만나니 싹을 내며 자라며,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이게 변화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는 죽은 곳 같은 곳에서도 생명을 만나니까 살아나고,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 심령이 데스밸리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심령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게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명은 변화의 힘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변화가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아직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숙함이 없이 늙어 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전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걸어 잠근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니 그들은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걸어 잠그었던 문을 열고 나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활동하십니까? 우리는 얼마나 변회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살아게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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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둘째주일 수요예배설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습니다. 

행8:9-25   

 

 

●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교회의 큰 핍박, 그리고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는 일들로 인해서 교회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그 수많았던 성도들이 사도를 빼고는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어서 성도들을 담대하게 하고, 복음의 가치와 예배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하고, 무엇보다 사도행전 1:8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 중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렇게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구체적인 한 사건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우리가 마술사 시몬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립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성직 매매자”란 단어가 시몬(simon)이란 이름에 "iac"를 붙여서 "simoniac"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본문에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시몬이란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그의 장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첫 번째 그의 장점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몬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9-11절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마술사라는 것 때문에 시몬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습니다. 성경 속에서 마술사 하면 오늘날 무당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종교적 사회입니다. 모든 것들을 종교적으로 풀려고 했던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종교인이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때론 법을 집행하기도 하고, 때론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마술사 시몬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9절에서는 “사마리아 백성들을 놀라게 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10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시몬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10절c “이 사람이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자이다.” 이런 일들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11절 “오랜 전부터 있었습니다.”(“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한마디로 시몬은 사마리아의 영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술사 시몬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빌립집사님이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됩니다. 12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그런데 13절을 보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닙니다. 빌립을 따라 다니면서 빌립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랍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 마술사 시몬은 비록 자신이 행하는 것이 거짓인줄은 알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명예도 얻고, 권력도 얻고, 돈도 얻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서 빌립에게로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방해를 놓고, 겁을 주어 빌립을 사마리아를 떠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을 감추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하게 진리를 받아 들였습니다. 빌립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전하는 것은 거짓이고, 빌립이 전하는 것이 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닙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겸손한 모습, 열린 마음으로 가지고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나름대로 교회에서 위치가 올라가면 이런 마음들을 잃어버립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세미나가 있었는데, 강사가 젊은 목사님이셨습니다. 강의 시간이 되어서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경직목사님이 맨 앞줄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런데 강의 시간에 안 늦으시려고 일찍 나오시는 바람에 양말을 신지 못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젊은 목사님이 한경직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목사님 제가 젊은 목사라서 무시 하시는 겁니까? 왜? 양말도 안 신고 오셨습니까?” 아마 다른 목사님 같으셨으면 그 정도 위치에 계신 분이라면 얼굴을 붉히고 일어나서 강의실을 나갔을 겁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이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강의에 안 늦으려고 빨리 오는 바람에 양말 신는 것을 잊었습니다. 지금 가서 신고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나가셔서 양말을 신고 다시 돌아와서 맨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한경직 목사님의 이러한 겸손의 모습 때문에 한국 교회뿐 만 아니라 그분을 아는 모든 분들께 존경을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 둘째로 시몬의 장점은 실망스런 상황을 잘 극복한다는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 들였다는 소식이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자들에게 안수를 합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런 장면을 보고 시몬이 그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됩니다. 18-19절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시몬은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합니다. 이런 시몬의 모습에 베드로가 화를 내면서 그를 책망합니다. 20-23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베드로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시몬에게 돈과 함께 망하라고 합니다.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저주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였으니 회개하라”고 소리칩니다.

▶ 이런 상황 가운데 빠지면 사람은 욱할 수 있습니다. 싫으면 관둬라하고 소리치며, 화를 내면서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을 돈으로 산다고 하는 것 생각과 행위 자체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 잘못으로 사마리아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 자신이 그런 욕을 먹는 다는 것,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은 참기 힘든 일 일겁니다.

그런데 시몬은 어떻게 반응합니다. 24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베드로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며 바로 잘못을 인정합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 중에 하나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실수하고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때때로 질책을 받습니다. 질책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사람이 자존심이 상하게 되면 그 상황이 어떠하든 사람은 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말로 들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상황 실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참고 인내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7장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 앞에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예수님은 그 여인을 개 취급합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그런 인정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 여인의 딸에게 귀신이 떠나갑니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7:29-30)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그렇게 표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 때론 조롱당하는 일들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 마지막으로 시몬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잊지 않고 조심해야 할 부분인데 그것은 시몬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시몬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습니다. 이런 시몬의 모습은 예수를 믿는데 사는 방법은 세상적 방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세상적인 방법을 취한다면 마술사 시몬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몬과 같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목표와 방법은 세상적일 수밖에 없고, 자기 욕망을 이루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회심이 덜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욕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회심이란 목표와 방법이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것에서하나님의 은혜로 그 일들이 이루어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연륜으로 인해 리더가 된다면 교회를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게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간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시몬이란 마술사와 연관된 사건입니다. 마술사 시몬이란 인물은 우리에게 좋은 인상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열린 마음입니다.

그는 비록 사마리아의 영권을 지배하던 사람이었으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을 정도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둘째로 그는 실망적인 상황을 잘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삶 가운데 여러 실망스런일들, 특히 자존심이 상하거나, 조롱의 일들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그의 단점은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방법은 세상적인 것으로 취한다면 우리역시 시몬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언제나 우리 심령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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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예수님의 십자가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헤드린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처형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산헤드린의 속사정을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산헤드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1절). 산헤드린의 주된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주동자라면 가룟 유다는 결정적인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한통속이 된 것은 그들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했습니다(요12:6).

산헤드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위선자라 할 수 있습니다(마23:13).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그 어떤 죄,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대접 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부자들과는 억지로라도 친구가 되려 했어도 가난한 자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누가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할 저들은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든 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도, 이방인도,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이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유대인도 사마리안도 심지어 로마인도 찾아가 만나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찬송하고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는 따스함은 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커가는 데 자신들은 작아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산헤드린은 군중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 부활입니다. 2017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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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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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인생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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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종자의식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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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Auguest, Wednesday Evening Sermon)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마태복음 27장 27~32절

 

살다보면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밥,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공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효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운동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도와야 합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입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 축복받은 시몬을 통해 은혜 받으시는 고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원해서 십자가 지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십자가 지셨지만, 억지로도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려 세상에 오셨지만, 막상 지려니 끔찍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저주와 지옥의 형벌을 너무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지려 하니 고민되어 죽겠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를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자원해서,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지로 주님 지신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을 얻었고, 성령 받았고, 죄용서 받았고, 병고침 받았고, 평강을 누리며, 지혜를 얻었고, 만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보면 거기에 만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집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근처 ‘구레네’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다 너무 힘들어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시더니,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로마 군인이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힘 꽤나 써 보이는 시몬에게 “너 이리 와!” 해서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줍니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 억지로 졌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덕분에 시몬의 가문이 대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언제나 순종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야말로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지고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시몬은 그 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다 믿고,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 기족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가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몬과 그 부인을 자기 부모로 모셨습니다(롬 16:13).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받고 존경 받게 된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가야 합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내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억지로 시작한 일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마음 상해도 중단해버리는 시대에, 억지로 교회 다니고,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그게 최고의 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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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고난의 길을 가라 (Wednesday Evening Sermon)

고난의 길을 가라  

사무엘상 23장 1∼14절

 

사무엘상 23장에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던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난 그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다윗은 순종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땅은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의 호미곶이나 울산의 간절곶 같은 곳입니다.

사울이 찾아내기 힘든 외진 곳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숨 죽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일라 지역으로 블레셋이 침공한 것입니다. 정부군을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몫은 당연히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하라고 응답하십니다. 그일라 땅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나 대전 정도가 됩니다. 내륙지방인 것이죠. 다윗의 처지에서 이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상식 이하의 선택입니다. 블레셋 민족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동시에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본문 3절을 보면 참모들이 반대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응답에 확신이 있어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뒤 참모들이 예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3장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사울의 인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순종의 결과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14절에는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나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은혜는 ‘목숨 보존과 도망’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그일라 전투에 나갔지만 결국 사울에게 쫓기게 될 줄 알았을까요?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윗이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고도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성도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대가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난 받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요 복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나옵니다. 사도들의 신앙의 자세를 보면 다른 것이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하고 고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은혜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로 부름 받은 것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원하여 고난 받는 삶과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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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사랑합시다 (Wednesday Evening Sermon)

사랑합시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사전에 보니 ‘사랑’은 ‘어떤 상대를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의 희락이며 또 상대를 돕고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며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은혜와 축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내려주십니다. 다음의 말씀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6) 수고하는 농부는 축복을 먼저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먼저 많이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도 많이 받습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기적이 일어나고 천국이 열릴 것입니다.

둘째, 가족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8)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권력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명예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가족을 버리지 않고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사랑이 없어 불화로 해체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탈선하고, 깨어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간 사랑 안에 용서와 희생과 헌신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지파인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웃의 영혼을 그 죽음에서 건져내준다면 이것처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2017년은 우리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을 마음껏 사랑하고 섬기시길 기원합니다. 직장과 사업과 학교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넉넉히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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