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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장 15~22절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종종 자녀나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생각을 올바르게 가져야 행동도 올바르게 나타난다.” 선한 생각은 선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뿌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이런 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사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악이 만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본문 말씀과 같이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첫째,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늘 그리스도 예수를 영적 주인으로 영접하고 우리 마음을 세상의 생각과 구별되는 성결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하고 있으나 이 교육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영혼의 문제에까지 세상 가르침은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세상은 어지러운 것입니다. 인간 영혼에까지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모든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삼을 때만 가질 수 있는 것이요,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선한 양심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릅니다. 여기서 선한 양심은 세상적 양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기독교적 선한 양심을 가질 때만 온전한 선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선한 행동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본문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선한 양심을 갖고 있다면 그 증거로 ‘고난이 따르는 선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의 처지를 어렵게 하는 세상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통한 축복을 더욱 크게 받는 고난입니다. 기독교인의 선한 행동은 세상을 올바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원동력의 주인공입니다.

끝으로 선한 양심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선한 양심은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선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을 맺습니다. 이 결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열매입니다. 선한 양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한 믿음입니다. 믿음을 올바르게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로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주님을 증거한다면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길의 역할을 잘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안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최한얼 안성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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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기도는 힘든 것인가 ?    


누가복음 11장 1∼4절

여러분들은 기도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순서라도 맡으면 부담을 느끼고 예배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께선 “목사님 저는 아무개 장로님처럼 은혜롭게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저 기도시키지 말아주세요”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기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라며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눅 11:2)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작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린이가 아빠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아빠를 부르듯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핵심입니다.

 

유창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은혜롭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절망스러우며 어느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아버지’라며 간절히 고백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허례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며 온 만물을 창조하시고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시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세 살짜리가 아버지에게 “능력 많으시고 인격자이시며

훌륭하신 아버지여 과자 하나만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기도는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나의 마음을 담아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마르틴 루터의 명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은 하늘을 향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당신 개인의 필요와 관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다!”라며

하나님의 계명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중언부언하는 것’(마 6:7),

다시 말해 뜻 없이 말만 늘어놓거나 쓸데없이 중얼거리며

시간을 채우려는 잘못된 기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9절부터 더욱 적극적인 기도 생활을 강조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이며 기도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찾게 하실 것입니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고

늘 응답받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경회 제자들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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