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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단과 교파에 관한 이해
 

 

 기독교에는 많은 교단(denomination) 혹은 교파가 있습니다.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구세군, 성공회, 루터교, 하나님의성회, 침례교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서로 다른 교단들이지만 원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면에서 하나이며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복음(신학에서는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재림)을 믿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등에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단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 정치체제, 신조, 신학적 바탕 등에서 조금씩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런 차이점은 마치 한 부모의 자식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생김새는 달라도 부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자식임은 불변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이제 이들의 차이점을 간략히 살펴 볼까요.

 

   1) 성결교회 :

 

성결교회는 성결교회 홈페이지인 본 싸이트의 외쪽 상단에 링크된 [헌법][역사]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편의상 몇가지만 언급하면 성결교회의 신학적 바탕은 요한 웨슬레이며, 정치제도는 초기에는 감리교처럼 감독제를 가지다가 후에 대의제도를 선택했습니다. 대의제도는 쉽게 말해 장로의회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사중복음(중생(거듭남),성결,신유,재림)이며 성결교회의 시작은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정빈,김상준이란 분이 1907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데서 부터입니다. 일제시대에 재림사상 때문에 교단이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 재건 되었는데 이 폐쇄 기간 때문에 선교의 어려움이 있어 교회 성장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다른 교단과는 달리 해방 후 다시 시작된 후발주자로서 오늘날 손꼽히는 유수의 교단이 된것 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단신학교는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대학교입니다.  한국의 성결교회는 크게 본교단인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있는데 이 둘은 한 뿌리이며 신학적 바탕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성의 학교는 안양에 있는 성결대학교입니다. 기성과 예성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대한 입장차이로 분열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타 성결교회로는 나사렛성결회(아산,나사렛신학대학)가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신학적으로 감리교와 같이 웨슬레안입니다.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하면 1)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따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중시한 것입니다. 2) 장로교의 예정론과 달리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의 은총 3) 구원의 순서(대략, 선행은총-의인-성화-영화)에 따른 강조  4)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기대하시는 하나님 이해 등이 특징입니다.

  웨슬레의 성만찬 이해 :  상징설(감리교와 성결교, 구세군 등이 이에 따릅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례전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표적(sign)과 인증(seal)으로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성례전을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믿음이나 행위의 표적으로 보려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의 입장과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인 표현인 동시에 은혜로 용서받은 인증으로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를 견고케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WorksⅦ, 148 ; SermonsⅠ, 242)
  이 성만찬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시던 그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 찢겨지고 피를 흘려야 하는 대속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며 주신 교훈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님께서 당하신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성만찬은 그의 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 현재은혜(present grace)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만찬은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적이면서 또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의미하는 모든 은혜를 이 성만찬에서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Letters Ⅰ, 118)]
  웨슬레는 유월절과 성만찬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표적으로서의 어린 양의 살이 이제는 그리스도이신 어린양 예수의 피와 살을 통해서 구원의 표적과 인증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의 표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며 이를 확증케 하는 인증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웨슬레의 입장은 단순히 기념설을 말하는 쯔빙글리나, 한편 성만찬을 통하여 기계적으로 은혜를 받는다(ex opere operato)고 말하는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다릅니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만찬은 현재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회심케 하는 은혜", "성결케 하는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다른 말로 바꿔서, 성만찬에서의 떡과 잔은 구원에 관한 전체적인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보느느 것입니다.

 

  (3) 천국의 보증과 인증
  웨슬레는 더 나아가 성만찬을 천국의 보증(a pledge of heaven)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즉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잔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마라나타" 곧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웨슬레는 성만찬을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보았습니다.웨슬레에 의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근거한 모든 은혜를 현재 여기에서 전달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렇게 해서 웨슬레는 성만찬이 단순한 "기념"이라는 해석을 반대합니다. 따라서 합당한 수찬자가 믿음으로 받을 때 그는 자기의 필요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도의 교제의 인증
- 설명 생략 -
  정치 제도: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2) 감리교회http://kmc.sbr.net/  :

 

감리교회는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요한 웨슬레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올더스게잇이란 곳에서 회심을 체험하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동생과 몇몇의 동지들과 함께 Holy Club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성공회) 내에서의 교회 혁신 운동을 해 나갔으나 국교회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후 1740년 남26, 여48명이 론논 파운드리에서 모여 메도디스트 협회를 조직하였고 1784년 미국에 보낼 성직자 안수문제로 국교회와 결별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1884년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한국에 선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리적, 신학적 특징은 위의 성결교회 부분(사중복음 강조를 제외)을 참고하십시오.
   감리교도 몇개의 교파가 있는데 기독교 대한 감리회(감리교신학대학), 예수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대한 자유감리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의 신학적입장은 같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제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계급의식이 강한 측면이 있어 상명하복의 관계가 개신교 안에서는 짙은 편입니다.
    정치제도 : 감독회장-연회감독-감리사-목사

 

   3) 장로교회 :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측 http://www.yejang.or.kr/, 개혁측 http://www.reformed.or.kr, 통합측 http://www.pck.or.kr/, 고신측 http://kpm.org/, 대신측, 고려 http://www.coramdeo.net, 재건 http://www.jaegun.or.kr/  등 이 대표적인 교파로 조사에 의하면 약 270여개의 파로 나눠져 있다합니다.)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 http://knp.or.kr/)가 있습니다.
    이들의 출발과 차이점 등은 99.11.19일자 국민일보 25면을 보시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글 후반부에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의 신학적 바탕은 16세기 제네바의 개혁자 죤 칼빈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란 것을 교단의 신조로 받아들입니다. 장로교회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주장하며 정치적으로는 의회정치를 채택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에게 있는 장로제도는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 영적임재설
   기념설을 주장한 쯔빙글리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어떠한 육체적인 임재도 거부하면서도 믿음으로 실제적인 임재를, 비록 영적이긴 하지만 받는다고 분명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뿐 아니라 비록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은 우리들에게 들어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퍼뜨리시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고, 장소적으로 제한을 받으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성물 가운데 육신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성찬에서 육신적 임재가 꼭 필요한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성령이 제한적 존재가 아니시므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을 한데 결합시키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자들은 성령의 중재를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은 소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We must beware of being led into a kindred error by the terms, somewhat too extravagant, which ancient Christian writers have employed in extolling the dignity of the sacraments. We must not suppose that there is some latent virtue inherent in the sacraments, by which they, in themselves confer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upon us, in the same way in which wine is drunk out of a cup, since the only office divinely assigned them is to attest and ratify the benevolence of the Lord towards us; and they avail no farther than accompanied by the Holy Spirit to open our minds and hearts, and make us capable of receiving this
testimony, in which various distinguished graces are clearly manifested. For the sacraments, as we lately observed, (chap. 13 sec. 6; and 14 sec. 6, 7,) are to us what messengers of good news are to men, or earnests in ratifying pactions. They do not of themselves bestow any grace, but they announce and manifest it, and, like earnests and badges, give a ratification of the gifts which the Divine liberality has bestowed upon us.]
   정치제도 : 총회-노회-교회
   이들의 학교는 총신대학교(합동), 총회신학교(개혁), 장로회신학대학(통합), 고려신학대학(고신) 안양대학교(대신) 고려신학교(고려) 한신대학교(기장)등이 있습니다. 이들 대다수 교단의 분열 또한 신학적 차이보다는 정치적인 면 때문입니다. 물론 합동측은 ncc에 가입하지 않고 통합측은 ncc에 가입했다든지, 기독교장로회는 다른 교파보다 진보적이라든지 하는 차이들이 있습니다.

 

    4) 침례교회http://kcm.co.kr/kbfmb/  :

 

침례교는 카톨릭 다음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입니다.  침례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설립된 것은 1608년입니다. 암스텔담으로 쫓겨온 영국 분리교도들이 본래 영국교회의 목사였던 죤 스미스의 지휘아래 설립하였습니다. 침례교의 특징은 침례(온 몸을 물에 잠그는 세례)를 유일한 세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장로제도가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침례교는 특별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몇가지 특징은 1) 개교회의 독립성 인정 2) 교회와 국가의 오나전 분리 3) 유아세례 반대 등입니다.
   침례교는 한국에서 일제시대에 동아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선교되다가 일제에 의해 교단이 폐쇄되었다가 해방후 재건되었습니다.

   5) 루터교회http://www.lck.or.kr :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합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공재설(Consubstantiation):성찬 참여자는 떡과 포도주 안에서(in), 떡과 포도주와 함께(with), 떡과 포도주 아래서(under)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한다. 떡과 포도주의 물질요소 자체는 불변한 채 있지만, 성별의 기도를 마친 후에 여기에 참여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성찬 참여자에게 상징적으로 전한다.) 3) 세례에 의한 중생:세례는 성령께서 주시는 중생의 은사를 받게 하는 것 4)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학교는 용인에있는 루터신학대학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합니다.

 

   6) 성공회http://anck.peacenet.or.kr/kindex.htm

   성공회는 아시다시피 영국에서 축발했습니다. 이 교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웁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 은 카톨릭에 가깝습니다. 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컷는 종신직 신품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입니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감독에 의해서였습니다.
    학교는 역곡과 서울 사이에 있는 성공회대학입니다.
 

   7) 구세군http://soback.kornet21.net/~sally/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뿌드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합니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합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평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합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하고 있습니다.

   8) 순복음, 하나님의교회(성회)http://www.ag.or.kr 등의 오순절 계열 :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합니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한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것을 중시합니다.  학교는 순신대학교(순복음), 한영신학대학 등이 있습니다.
 

   몇개의 참고서적을 소개합니다.

   세계 기독교회사 - 대한기독교서회
   한국 기독교회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종파의 유래 - 대한기독교서회
   한국교회교단형성사 1,2 - (주) 임마누엘
   청교도신앙 -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정신 - 기독교문서선교회
   한국성결교회사 - 기성출판부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헌법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문답해설 - 한국복음문서연구회출판부. 1974
   한국감리교회사 - 기감 교육국
   감리교의 유래 - 생명의말씀사
   교리와 장정 - 기독교대한감리회
   죤 웨슬리의 신학 - 전망사
   요한 웨슬레의 신학 - 대한 기독교출판사  etc.

 


부록 : 99.11.19일자 국민일보 25면(믿음의 유산 - 분열과 극복, 이승한) :장로교회들의 배경과 분열원인 등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 1백14년,우리나라는 기독교 복음에 의해 엄청난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다.신교육으로 가치관과 인성이 변화됐으며 유교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설 수 있었다.유능한 인재들이 교회를 통해 배출되고,그들은 유학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에 공헌했다.

 교회는 또한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독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교회는 그래도 사회의 소외계층과 억압된 자의 대변자 노릇을 했으며,정의의 칼날을 세워 공동체의 평화와 평등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몸인 교회가 분열됨으로써 교파주의와 이기주의,물신주의,성공주의,성장제일주의 등 세속화의 부정적인 길을 열어 놓은 것은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분열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90년대 들어와 급속히 확산됐으나 아직은 결실이 미미하며 21세기 한국교회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게됐다.
 ◆분열=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억압으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크게 네 갈래의 입장으로 갈라진다.하나는 교회의 정통이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 편입됨으로써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운동이다.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에 갇혔던 인사들이 해방후 출옥,교회재건에 나선다.바로 재건파교회이다.이들은 극우파로 기존교회를 거부하고 46년부터 별도의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서는 김린희전도사(선천),남한에서는 최덕지전도사가 중심인물이었다.재건교회는 곡간등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해 곡간교회라고도 불렸으며 평신도들이 많이 참여해 주상수 강상은 염애나 등이 평신도의 대표적인 인믈로 부상했다.
  다른 하나는 기성교회의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었다.당시 80%의 교회들이 바로 이 운동에 참여한다.또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지만 하나로 통합되었던 한국교회를 교파로 분열시키지 말고 그대로 지속하자는 운동이었다.그러나 일제하의 교회에 대한 윤리적 신앙적 자책과 회개의 심도가 있느냐는 비판이 일면서 감리교가 회의에서 퇴장하면서 무산됐다.

   마지막으로는 기성교회에 들어가 회개를 촉구하고 개혁을 해보자고 했던 중도우파의 운동이다.이 가운데 혁신복구파로는 이기선목사가 북한에서 활동했고 남한에서는 한상동 송양원 주남선목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한 인사들은 고려신학교를 만들어 경남노회를 통해 회개를  촉구했다.

   이처럼 네 갈래로 대립되었던 한국교회의 입장은 결국 교단의 분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기성교회의 질서에 들어가 회개를 촉구했던 장로교의 혁신복구파들은 수에서 밀려 추방당하는 형태로 1948년 장로교단에서 분열됐다.이들이 현재 예장고신과 예장고려교단이다.

   1940년 조선사람들에 의한 신학교육을 표방하며 승동교회에서 시작된 조선신학교는 1948년 김재준의 성서해석학 등 신학논쟁으로 갈등을 겪다가 1954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총회에서 김재준 송창근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정죄를 당함으로 교단에서 탈퇴했다.이들은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김재준을 중심으로 교단을 창립했다.이 교단이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이다.
  신사참배의 회개를 촉구하던 인사들을 축출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자들을 쫓아낸 장로교단은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등 에큐메니컬 노선의 차이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전중앙교회에서 치러진 44회 총회에서 갈라선다.WCC가입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했다.이 총회가 장로회신학대 출신의 인사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다.WCC가입을 반대하고 복음동지회(NAE)운동에 찬성하는 인사들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했다.이 총회가 총신대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다.

 50년대 세계 냉전체제의 구도속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러시아정교회가 가입되어 있는 WCC의 가입을 둘러싼 의견차이로 분열되어 결국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냉전체제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신학적 차이로,또한 이념적 차이에 따라 3개교단으로 분열됐던 장로교는 1979년 교권과 지역갈등으로 예장합동교단에서 정규오목사를 중심으로 한 호남권 인사들이 탈퇴,개혁교단을 설립하면서 핵분열을 일으켜 한국교회 분열의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만다.

 교단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활발해지면서 한국장로교협의회가 결성됐으며 이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로 개칭되어 장로교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또 13개교단의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98년 결성됐으며,평신도들도 한국장로회총연합회를 만들어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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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기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2 세기는 박해(PERSECUTION)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손으로부터 박해의 파도는 쉬지 않고 교회를 때렸다.

I. 2 세기의 박해들

주님의 교회는 대환란의 시대에서 2세기로 들어갔다.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여 성장했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1. 끊임없는 전파

믿는이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진지하게 수행했다. 그들은 참된 신념을 가졌다.

 

2. 복음의 배타성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들만이 진리를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독교는 "단지 또다른 종교"라고 믿지 않았다.

 

3. 회중 생활(congregational life)

이들 성도들은 복음을 살아냈다. 곧 그들이 선포한 바를 그대로 실행했다.

박해의 다른 효과는 박해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재고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renounce)". 이는 후에 교회에 몇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98년부터 211년까지 Trajan, Hadrian, Antonius Pius, Marcus Aurelius, Commodus,
Septimus Severus 등의 6 황제에 의한 잔혹한 박해가 있었다.  

 

II. 2 세기의 타락들

사도들의 생애동안 심겨졌던 오류의 씨앗들이 이 기간동안 열매를 맺기 시작함

A. 교회 실행의 변화
주로 유대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교회내에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 성직자주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급화하는 것임 :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kleros"는 '택한자들'을 의미함; "laos"는 '백성'을 의미함)신약은 감독의 직무가 교회내 지도권의 하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거만한 성직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가 베드로 전서 5:3에 주어졌다.

신약의 가르침을 넘어선 목양자들의 특권(prestige), 권능(power), 및 권위(authority)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카리스마(charisma), 강한 개성(strong personality), 또는 "영웅 숭배"를 통하여 두드러지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간적 본성에 흥미를 끄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 하든지, 신약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이러한 특성은 구약에 호소함으로 (구약의 레위 성직자제도와 이에 수반되는 권능 및 특권의 올가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백성의 몸(body)과는 별개의 특별한 성직자제도의 개념 및 제도는 수반되는 개념인 희생물과 희생단과 함께 유대교와 이교를 기억나게하는 유사한 것들로 기독교의 교회 안으로 알아챌 수 없게 귀속되어 갔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이 변화는 2 세기에 발생하였으며, "믿는이의 성직자직분"이라는 신약 교리를 벗어난 것이다.
a. 이그나티우스 (117년) :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감독과 장로와 집사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하는 자는 양심에서 순결하지 않다"
b. 로마의 클레멘트 (110년) : 그가 신약교회와 레위 성직자직분을 비교할 때, 처음으로 평신도(layman)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2. 비속화(卑俗化)(Sophistication)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형상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복음의 단순성과 순결이 잊혀져 갔다. 더욱이 사람의 타락한 죄성인 상상력에 의해 이러한 보조 기구는 급격히 인간 고안품의 잡동사니로 타락해 갔다. 

"2세기 중간 또는 말기에 심각한 심볼의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예술에서 시작되었음을
보게 된다...이러한 심볼의 근원은 종교적 진리의 상징을 가지려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적
욕망에서 발견되어짐에 틀림없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십자가 성호가 2 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터튤리안은 "십자가 숭배"의 고소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타 초기 기독교 심볼로는, 비둘기, 배, 닻, 등이 있다. "이들 심볼로부터는 단지
도상학적 표현의 측면에서 한 발자국의 진보가 있었을 뿐이다"고 샤프는 말한다
물고기 심볼은 2 세기 중반부터 유래되었는데, 그 근원지는 알렉산드리아로 여겨진다.

 

3. 성찬 중시주의(Sacramentalism)

2 세기 초에 중요성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보일 것이다. 실체(substance)와 상징(symbol) 간에 성경적 균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밥티스마의 규례가 크게 강조되었다.

 

a. 밥티스마의 부속물

먼저 규례에 의식(儀式)주의가 첨가되었다. 곧이어 다음 사항들이 뒤따랐다. 

(1) 도입부(Introduction)가 길어짐 - 교리문답
(2) 마귀 거절 설명서
(3) 신조(Creed)의 암송
(4) 삼중 잠김(Trine Immersion) - 간혹
(5) 형제의 입맞춤(Brotherly Kiss)
 

b. 밥트스마와 구원의 혼란
많은 교부들 가운데 켐벨주의와 유사한 견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의식에서 마술적인 것을 보지 않았지만, 밥티스마를 믿음의 행위로,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는 은혜(saving grace)의 전달자로 보기 시작했다

 

(1) 순교자 저스틴 (100-165년)

(2) 헤르마스(Hermas) (115-140 년)

 

B. 기독교 교리의 변화

일세기에서 두번째 주요 이단이었던 그노시스주의는 2 세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노시스주의는 창조의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너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는 선하고 얼마는 악한 많은 중간 신들에 의해 우주를 다스린다고 가르쳤다.

III. 2 세기의 명사들

A. 저스틴(100-165 A.D.)
B. 이레니우스(115-200 A.D.)
C. 터튤리안(160-230 A.D.) 
       

IV. 2 세기의 발전

교회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 신약 정경이 형성됨. 2 세기 초에 발생하였다. 신약의 최종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시대에도 신약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골 4:16)(살전 5:27)
(벧후 1:15, 3:1,2) * 딤전 5:18 과 마 10:10을 비교할 것  성경기록을 수집하고 편집한 곳 (4 곳)

팔레스타인 - 마태, 야고보, 히브리서
소아시아 - 요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서부터 계시록까지

그리이스 -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카전후서, 누가, 디도서
로마 - 마가, 사도행전, 로마서 

지리적인 분리 때문에 초기의 정경 수집은 완전하지 못했다.교부들의 글에서 신약성경의 정경화에 관한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주로 전달과 유포의 어려움 때문에 몇 가지 책들에 대한 작은 논쟁이 있다. 412년 까지논쟁이 되었던 책으로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 일서, 요한 이서이다 -
대체로 이단들을 정죄한 책들이다. 

 

 

 

V. 2 세기의 저항자 - (Monatanists)

몬타누스파의 출현. 대부분의 교회역사에서 몬타니스트들은 이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들의 신조와 실행들을 주의깊게 연구하면 그들이 정통이였음이 밝혀진다.몬타니즘은 교회의 순결과 영성에서 조류를 거스리는 첫번째 일반 저항이다

 

A. 지도자
그들이 몬타니스트라 불리운 것은 몬타니우스라는 사람의 선포때문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는 Cybele의 이교도 사제였으며 약 150 년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B. 위치
몬타니즘은 소아시의 중앙 프리기아에 있는 Ardabau라 불리우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신속하게 유럽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몬타니즘은 177년에 로마와 프랑스의 리용에서도 발견되었다.

 

 C. 시작

몬타니우스는 150년에 그의 관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명의 여자 명사인 맥시밀라와 브리스가를 포함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D. 몬타니스트 운동의 이유들
사도시대이후 곧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눈에 띄일만한 변화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들 중 몇 가지로는,
 

1. 의식주의(儀式主義)화 경향        
2. 성직자 계급의 등장
3. 영성의 부족
4. 기율과 교회회원의 기준이 헤이 해지기 시작함

 

E. 몬타니스트의 사명
몬타니즘은 실제에 있어서 교회를 그들의 영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는, 신약의 기초로 돌이키려는 개혁운동이였다.
몬타니우스는 믿는이들과 교회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복음에는 성직자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음을 표명했다. 그는 철학과 종교의 반대자였다.

 

F. 몬타니스트의 교리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과는 별개로 몬타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신조와 실행들을 지켰다.

1. 교회의 회원으로 거듭남을 강조함
2. 믿는이의 밥티스마

그들은 교제의 순결을 실행했으며, 제도권 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다. 그들은 오직 물에 잠그는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2 세기에는
이 밥티스마 외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3. 삶의 거룩함

 "그들은 과학과 예술, 모든 세상적인 교육 또는 삶의 화려한 형태를 피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이교주의에 속했기 때문이었다"(Christian Op. Cit. p. 42)그들은 재혼, 방종한 금식, 박해를 도피하는 것에 반대했다.

4. 교회 기강
"도덕적 죄에 대항하여 교회는 그 죄를 범한 자를 올바르게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나갔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함은 단순히 그 일원의 거룩함이기 때문이다(Christian Op. Cit. p. 43)"

5. 삼위일체 신학
6.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몬타니스트들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기록들을 전수하였다. 

7. 전천년주의 종말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다시 오셔서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러한 전천년주의 견해는 또한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몬타니스트들이 인기가 없었던 것이 전천년주의의 소멸에 기여했던 것 같다.

 

G. 몬타니즘에 대항한 변화
몬타누스파 교회들은 제도권 교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들에 관해 언급한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부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최근의 역사가들은 몬타니즘의 대적자들 편을 들었으며, 그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고소하였다.  

 

1. 가장 일반적인 고소
이는 몬타니스트들이 "고대의 Holy Roller (열광적인 종파의 신자)"라는 것이다.
몬타니우스가 위로자(Paraclete)이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의 계시를 초월하여 주장하였다고 고소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것 같다. 몬타니스트 교회의 영성과 삶은 제도권 교회들의 형식주의 및 무감각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a. 루터교 역사가 모헤임은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위로자라고 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 번역자 맥클린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스스로 성령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실수였다." (Church History. Mosheim, Volume I. p. 188) Armitage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몬타니우스는 자신을 성령과 동등시하였다고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은 단지 비방에 불과하였다"(Armitage, T. History of The Baptists. p. 175)

b. Jarrel은 "ecstasy"에 관한 터툴리안의 해설을 인용하면서 아마도 그가 다윗이 말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c. 터툴리안은, 이상(vision)과 초성경적 계시를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성경을 읽거나, 시편을 노래하거나, 강연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들은 이상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들이다"라고 했다. 어떠한 비성경적인 것도 없다!!
 

d.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제도권 교회의 교리들을 수용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 그들의 차이는 강조와 실행에 있다. 

2. 몬타누스파의 지나친 점들
비록 단호하게 입증되지 않을 지라도, 일부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다음과 같은 확실한 비성경적 실행들을 지켰을 가능성이 있다.

a. 여자의 임명
몇몇 교회들은 성령의 선물들이 모든 조건과 성에 차이가 없이 분배되었다는 그들의 신조로 인해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b. 삼중 밥티스마(Trine Immersion)일부 몇몇 몬타누스파 교회에서 실행되었다.
c. 목양자의 독신주의 - 아무런 규칙이나 또는 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박해의 때에 실제적인 예방조치였다. (예 고전 7:26,29 와 8,9 절)
d. 엄격한 금욕주의
e. 엄격한 교회 기강

 

 H. 몬타니즘의 결과
1. 터툴리안은 몬타니스트 사상으로의 전환자로 알려졌다. 그는 이 가르침들을 잘 정리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북 아프리카 지역(터튤리안파)에 유증으로 남겼는데, 후에 도나티즘으로 나타났다.

 

2. 이 운동에 대하여 수차례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공식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였다.
3. 이 운동의 영향은 노바티안파, 도나티우스파, 아르메니아와의 점촉, Paluician의
출현 등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역사가들 중에 몬타니스트를 옹호하는 역사가들이 있는데 그들 중 몇몇을 인용하면,

 

a. 초기 역사가인 W.R. 윌리암 박사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교리적 오류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들의 감정의 표현은, 훨씬 후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다른 교사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은혜의 참된 경험은 믿는이의 삶에서 분명하다는 그들의 믿음에서 유래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b. 도너 박사는 그들의 운동에 대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교회 몸의 지배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역자주:성직자계급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적 반발이였다고 썼다.

c. Schaff-Herzog 종교 백과사전의 기고자인 몰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몬타니즘은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며 몬타니스트는 새로운 종파가 아니다. 오히려 몬타니즘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가운데 안락하게 안주하려는 그 시대의 두드러진 경향에 대항한 단순히 고대 초기 교회의 반발이었다."  (Grimith, J. W. A Manual Of Church History: Vol. II.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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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8,9)


아무리 믿음이 연약한 신자라도 영혼은커녕 생명도 없는 돌, 철, 나무 같은 조각상이 우주만물과 인생만사를 주관한다고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그럼 이 둘째 계명은 시효가 초과되어 현대인에겐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영원한 진리가 됩니다. 본문은 오늘날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아마도 고대인들도 깎아 만든 우상 자체가 신이라고 여길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신들을 인간 스스로 만들어 각기 의미와 능력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또 그렇게 고안해낸 신들의 특성을 적절히 상징, 전시, 대체할 수 있는 형상(image)을 만든 것입니다. 허공에다 대고 절하려니 어색하고 경건하지 않은 것 같아 가시적 형체를 만들고서 그에 적합한 온갖 예배 절차를 제정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고안해낸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둘째 계명이 단순히 형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는 종교 형식적 차원이 아닙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상을 만든 인간의 의도가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기 만족을 자기 방식대로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하나님과 전혀 무관할 뿐 아니라 당신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의식하든 못하든 동일한 잘못을 수없이 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 안전, 만족, 행복 등을 보장해주는 대상을 한분 하나님 외에서 추구하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돈, 권력, 명예, 외모, 건강, 학벌, 심지어 자식의 성공 등이 삶의 유일한 목표 내지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으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는(골3:5) 말씀의 뜻도 그런 것들이 인생사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탐하여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서 그것들을 받았어도 자신의 중심이 여전히 자기 유익만 위한다면 탐심인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오히려 하나님마저 우상 숭배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한데도 미처 모르고 지나칩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발안한 칼 마르크스는 독일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경건하고도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 배경에서 자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루터교인이 많은 도시로 이사하자 부자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순전히 사업적 유익을 도모하고자 루터파 개신교로 개종해버렸습니다. 한참 감수성이 강하고 종교적 관심이 많던 시기였던지라 아들 마르크스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결국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여서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라고 비꼬면서 ‘공산당선언’을 집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대교와 루터교가 여호와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은 동일하게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선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에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신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계명을 순전하게 해석 적용하면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오직 “자기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스스로 만들어 믿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그분을 우상숭배한 셈입니다. 마침 본문 말씀대로 부모의 죄로, 사실은 그 본을 받아서 하나님을 배역하는 같은 죄를 범하였기에 당연히 기다리는 것은 엄중한 심판뿐이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 같은 신자가 과연 한둘에 불과할까요? 예컨대 한국에선 전혀 믿음이 없다가 이민 와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는 중요 이유가 바로 사업상 정보와 유익을 얻기 위한 것 아닙니까?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죽이셔서 죄에서 구원해준 하나님을 오직 자기 편의만을 위하여 자기 방식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그나마 기독교에 관해 아직 잘 몰랐기에 충분히 이해해줄 소지가 있습니다. 또 그런 경위로도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한국 있었으면 전혀 예수 믿지 않았을 사람인데도 외롭고 고달프며 스트레스 많은 이국땅에서 기댈 곳이란 하나님뿐임을 절감케 되어서 진정으로 겸비해집니다. 또 주일설교와 성경공부 같은 교회 활동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면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정작 문제는 오래된 신자들입니다. 분명 성령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현실적으로 힘들면, 세상과 교회에서 상처 받아 자존심 상하면, 자식이 자기 뜻대로 자라주지 않으면, 배우자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으면, 등등의 핑계로 오직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분은 반드시 내가 기대하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고안해 낸 신을 믿습니다. 그 중심은 분명 하나님을 믿으나 결과적으로 그분을 우상으로 격하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26:8-10)

여호와의 이름을 사모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떤 크고 위엄이 넘치는 형상이든, 아무리 경건하고 엄숙하며 감동적인 형식과 절차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영혼으로 그 이름 즉,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를 지금 어떻게 대하시는지 철저히 깨달아서 그에 온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에서 구원 받은 바탕 위에서 그분과 거룩한 교제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당신만 섬기라는 첫 계명을 주시기 전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6절)고 했습니다. 당신을 당신 본래의 성품과 권능대로 온전히 알면 자연히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 외에 다른 대상을 찾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고안해내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은 은총을 입지만 의를 배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심판의 길에서 그분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을 오직 자기를 위하여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 전혀 찾지 않고 오직 세상의 유익만 추구해도 하나님은 당장 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를 결코 입을 수 없기에 가만 두어도 궁극적 심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의인은 어떠합니까? 비록 세상에선 은총을 입지 못하더라도 그분의 의를 배우고 그분의 위엄을 높여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를 위하여 그분을 내 방식대로 디자인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의를 위하여서 내가 어떤 모습이 되던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요컨대 하나님마저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잘못을 온전히 제거해 내는 것이 참되고 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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