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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변호한 7명의 사람들         
 
예수님께서 3년간 사역하실 때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편에서 그분을 변호한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믿지 못하게 방해하였고 사람의 교리와 교단을 변호했다

​우리 중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얼굴에 손찌검이나 침 뱉음이나 채찍질과 피흘림을 당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주님을 이 모든 것에 더해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기까지 하셨다

그 사랑의 깊이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다 당하셨으니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보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제자다운 삶일 것이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듣고 ①침묵하고 관망한 사람들 ② 그분을 따르고 변호한 제자들 ③바리새인처럼 거절한 사람들이 있다

수 천년에 걸친 메시아의 약속이 성취되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그런 일이 반복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은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 5:34)

주님은 자신을 증언하는 이로 세례 요한을 거론했지만 궁극적으로 더 큰 증거는 아버지께 두셨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요 5:36)

예수님을 변호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듦에도 몇 가지 유사한 사례가 있다

1. 세례 요한의 변호

사람들도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요한은 그 어떤 표적도 행하지 않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요 10:41)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증언했다

2. 대제사장의 아랫사람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냈다 (요 7:32)

아랫사람들은 성전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냥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습니다" 보고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3. 니고데모의 변호

아랫사람들이 보고하는 자리에 니고데모가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말하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니고데모의 이의에서 바리새인들이 대답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니고데모의 합리적인 변호에 대해 궁지에 몰린 바리새인들은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내세웠다

그러나 갈릴리에서도 요나, 호세아, 나훔, 아모스, 엘리야,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이 나왔다

4. 지혜로운 서기관

서기관 중에서도 주님께 칭찬받은 사람이 있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질문에

주님께서는 두 계명을 말씀하시자

서기관이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2~33)

예수님께서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5. 베드로의 증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주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이 말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고 다시 주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 6:65~69)

슬픈 장면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이 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 편에 섰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6. 표적을 보고 변호한 무명의 사람들​

만약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이슈는 "그가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쟁점이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며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오갔다

그들에게 지혜가 있었더라면 ①예수님의 출생 장소가 어디였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또한 ②세례 요한의 증언과 ③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했어야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이런 통찰력이 그들에게 없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일부는 이렇게 말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유를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표적이라도 보고 믿은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어떤가?

다시 오실 주님을 알아보는 영적 통찰력이 있는가?

우리는 이 세대에서 주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을까?

예언의 말씀들과 징조들과 메신저들의 나팔 소리를 듣고 깨어났는가!

전무후무한 지혜를 가진 솔로몬이 발견한 것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을까?

진리를 발견하려면 먼저 우리가 가진 사람의 교리나 말을 버려야 한다

먼저 그릇에 있는 불순물이 비어지고 깨끗해져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때라 온갖 더러운 내용물을 그릇에 담는다

사람의 말에 쉽게 감동되어 아무것이나 양식으로 삼지만 지혜롭고 충성된 종은 진리의 말씀을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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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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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목사님의 유머


 

 


 유머는 우리 삶의 윤활유로 사람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고 때로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중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니고데모는 신분이 세리였고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설교가 은혜가 있어 그런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설교했다.

 “그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사는 동네에 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보고싶어 나아갔으나 키가 작아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설교가 이쯤 되자 성도들이 “와”하고 웃어버렸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당황되고 얼굴도 화끈거렸다. 그렇지만 목사님은 순간 재치를 발휘했다.

“그때 삭개오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그 자리는 내 자리야. 빨리 내려와.”

 

유머는 멋이고 기쁨이고 실수를 부드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삶의 윤활유다.

한국의 목사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유머다.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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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분 변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 설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15절)


예수 믿을 때 상상 뛰어넘는 변화 다가와
그리스도를 모시면 새로운 피조물·국적·생명 돼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계시면 평안과 행복 얻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보는 아주 매섭고 사나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았고 그로 말미암아 돈도 많고 부자였습니다. 또 성경은 그가 유대인의 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학자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지키고 관원생활을 하고 유대교의 선생이었지만 그 마음속에 황량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텅 비었습니다.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데 앉은뱅이가 걸어 나가며 장님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을 보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 그는 밤이 어두울 때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랍비여, 랍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고는 이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사람은 아무리 잘 먹여도 육이고 잘 입혀도 육이고 교육을 잘 시켜도 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소는 언제나 소입니다. 닭은 닭이고, 개는 개고, 말은 말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언제나 육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와 통하지 않습니다. 육과 영이 어떻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죽은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과 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니고데모가 물으니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서 뱀에 물린 사람마다 바라보고 낫게 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높이 들려서 속죄제물이 될 터이니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거듭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모두 피조물로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데 아담과 하와는 영혼이 죽었습니다. 영혼이 죽고 나니까 이제는 육체가 온 몸과 마음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육적인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로 육은 감각적인 세계에 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캄캄한 밤 속에 사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헤밍웨이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조차 없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지고 전기가 흐르지 않는 텅 빈 전구와 같다”고 말하고 사냥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살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의 가장 중심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을 다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도 지키고 관원이 되어 높은 지위도 얻고 돈도 가지고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도 텅 빈 마음, 공허한 마음, 무엇인가 잃어버린 심정, 고독한 마음, 이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노벨상을 타도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우리 본체인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결코 평안함이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쾌락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체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고 입술로 시인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과 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육은 영과 통하지 않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언제나 육이요, 하나님과는 절벽으로 담이 쌓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굽니까? 우리의 고향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야 비로소 행복합니다. 돈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쾌락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권력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명예가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옛날 삶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옛사람은 장례지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한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도 영의 세계와 통하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영적 세계로 통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겠지만, 약하면 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하늘나라와 통합니다. 교통이 있습니다. 교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혀 모르던 하늘나라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술 먹고 담배 피고 부인을 때리고 마약 중독자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변화됐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조롱했습니다. “야! 너 교회 가고 가정 중심으로 됐다는데 한번 물어보자. 성경은 누가 적었느냐?” “몰라” “교회는 누가 세웠느냐?” “몰라” “목사님은 무슨 설교를 하더냐?” “몰라” “봐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교회를 간다고 야단하냐?” “한 가지는 내가 알아” “뭘 아는데?” “술과 마약이 싫어졌어. 그리고 마누라를 때리고 애들을 겁주던 그 생활이 사라졌어. 마누라하고 애들하고 있는 시간이 좋아. 그리고 교회 가는 날이 기다려져. 나는 그것이 변화된 것을 알아. 그 이외에는 아직 아무 것도 몰라” 그렇습니다. 교리를 모르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 마음속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남이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국적 


 제가 며칠 전에 프랑스 여인으로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이다도시 자매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프랑스 여자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지만 한국 남자하고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얻었다. 나는 국적이 한국이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도 파랗고 얼굴도 하얗고 머리도 노랗고 완전히 프랑스 사람인데 국적이 한국인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 모양새나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국적이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프랑스 법에 적용받지 않습니다. 한국 법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말라서 빼빼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귀 나라 백성이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나라 백성일 때는 동물적인 인본주의로 살기 때문에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따라 살고 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부패하고 부정하고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옛사람과 얼굴도 같고 옷도 같이 입고 말도 같이 하고 몸무게도 같고 키도 같지만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 백성이 되면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고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를 주고 병에서 고쳐주고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고 죽음과 절망에서 건져내주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면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꿈을 얻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되고 자화상을 갖게 되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어느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 하나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껄껄 웃었습니다. “다 낡은 바이올린이 줄도 다 헐었으니 누가 사겠느냐?” 그런데 어느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좀 달라고 하더니 바이올린을 켜는데 기가 막힌 음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감탄할 정도의 아름다운 연주가 있은 뒤에 경매장 주인이 “이 바이올린을 살 사람은 손드세요”하니까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겠다며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이올린도 줄도 다 낡았지만 실력있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잘 타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소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바이올린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우리를 마귀에게 맡겨 놓으면 도둑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받아서 멋지게 연주하는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일류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에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류이기 때문에, 일류의 손에 우리가 들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학교 교육을 잘못 받았어도 집안이 좋지 않았어도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군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 되신 예수님은 무력한 분이 아닙니다. 저 하늘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3. 새로운 생명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날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나의 불의와 추악을 걸머지고 내 병을 짊어지고 내 저주를 짊어지고 내 죽음을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체험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6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함께’입니다. 나 혼자 죽고 나 혼자 장사지낸바 되고 나 혼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하늘에 앉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은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전능한 능력으로 우리의 짐을 같이 짊어지심으로 함께 시련도 통과하고 고난도 통과하고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삶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값 주고 나를 사셨으니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에게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로 죄 없는 분이 죄를 대신하고 부패하지 않는 분이 부패한 우리를 대신하고 병 없는 분이 병 있는 우리를 대신하고 저주받지 않은 그분이 저주를 대신하고 죽지 않은 그분이 죽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주인은 누굽니까?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살려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마귀가 주인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남편도 주인이 아니고, 아내도 주인이 아닙니다.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날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의로움이 됩니다. 내가 값을 지불하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없어도 값도 없어도 그냥 주님이 의로움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성결입니다. 나는 깨끗하지 못합니다. 항상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더러운 수렁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성결하게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었든 불구자든 아프든 그것은 나의 체험이고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건강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잘나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이 물러가고 저주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영생이 되십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를 내 구주로 모셔 들이고 내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부활이므로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부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와 같이 계시면 나는 이미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니?” 그러니까 애들이 “꽃바구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바구니에 꽃 대신 비린내 나는 생선을 잔뜩 집어넣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바구니니?” “생선 바구니에요” “똑같은 바구니인데 왜 전에는 꽃바구니라고 하고 이제는 생선 바구니라고 하니?” “전에는 내용물이 꽃이고 지금은 비린내 나는 생선이니까요” 맞습니다. 세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이고 천국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 사람인 것입니다.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깨끗하게 만들었으면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중생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가 있어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을 알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됐으니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니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니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새로운 국적을 얻었으니 새로운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 중에 살게 됩니다. 예수를 꼭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를 놓치면 천국도 놓치고 생명도 놓치고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텅 비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맹랑한지 체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를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을 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거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고 비가 올 때 우산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고 변화 받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아직 예수를 모시지 않은 사람은 이 육체를 떠나기 전에 예수를 빨리 모셔서 절망적인 고독과 허무와 공허와 좌절과 고통 가운데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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