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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 이 부흥운동은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양 시내 네 교회 연합집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교회 장소가 협소하여 여자 교인은 자기 교회에, 남녀 중학생과 소학생들은 자기 학교 강당에 모였고, 남자 교인들만 2천여 명이 장대현교회당에 모였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 목사가 없어 부흥회는 선교사들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한 주간 동안 길선주 장로(당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음)는 한국 최초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큰 은혜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했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교인들의 회개가 터져나왔다. 1주간 내내 회개가 계속되자 소문을 들은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경찰)가 흉악범을 잡으러 집회에 참석했다 자신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일화도 있다.

무르익은 집회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N. Blair)의 설교로 절정에 달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 말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가 끝나고

 수백 명의 성도가 통성으로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구체적으로 자복하며 눈물로 회개했다. 반목과 질시하던 자들이 껴안고 화해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런 감동적인 회개 역사는 새벽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목격한 한 여자 선교사는 "입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상상할 수 없는 무섭고 추한 죄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 지붕이 젖혀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또,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역사는 화요일 아침 숭의여학교에서, 수요일 아침에는 숭덕학교에서도 일어났다. 김찬성 조사가 설교할 때 어린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고 수업을 중지한 채 오후 1시까지 통회 자복의 기도회가 지속되었다. 각 곳의 여자중학교와 부녀자들의 모임에서도 이런 역사는 계속되었다.

선교사들만 모이는 정오 기도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기도회를 30분간 연장하여 오후 2시까지 할 정도였다. 이 놀라운 평양 대부흥회는 그 해 봄 길선주 장로의 서울 집회에서도 나타났고, 이런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과 더불어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 : 교회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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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1907년 평양서 일어난 대부흥

 

길선주 친구 돈 사취고백이 대부흥 불 댕겨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1월에는 평양 대부흥으로 발전하였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figcaption class="wp-caption-text">19071월 평양 대부흥의 불을 지핀 길선주 목사(앞줄 중앙)와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그래함 리(이길함) 선교사()</figcaption>

 

 

그해 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에서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907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집회가 계속 되는 중 16일 저녁 집회에는 무려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뜨거운 집회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낮에는 분반으로 나눠 성경을 공부하였고, 저녁에는 대중집회 형식으로 모였다. 16일부터 시작된 저녁 집회에는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집회는 계속됐다.

 

사경회가 회개기도회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12일 밤 블레어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은 더욱 분명했다. 영적 분위기가 회중을 압도했고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14일에는 정오기도회를 열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 이 고백이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켰고, 평양대부흥의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였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부터 죄의 고백은 계속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은밀한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개의 기도는 바다에 이는 파도소리 같았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인간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함 리는 115일자로 기록한 보고서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했다.

 

조지 맥쿤 또한 115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모임이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이라고 썼다.

 

 

 

1907년 대 부흥은 뜨거운 구령(救靈) 운동으로 이어져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지까지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사진은 1907년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 모인 성도들이다

 

죄 고백이 행동으로 옮겨가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선포된 말씀에 응답하여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이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죄가 고백되었다.” 블레어는 이 당시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라고 보았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의 부흥사에서 예시된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퍼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로 그리고 학교로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다.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고, 부흥의 역사는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부흥은 1907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 성숙을 가져왔고,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사회변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03년 이후 1907년 대부흥은 교회연합운동을 가능케 했고, 한국교회의 성격을 주형하였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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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기독교 전파와 초기 수용자들

 

 

·하층 중심 전도가 기독교 대중화 이끌어

 

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천주교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문규현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의 2가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武士) 계급으로 유입돼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는 중·하층민으로 유입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상승운동을 통해 상류층으로 확산됐다. 물론 소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상류층보다 중·하층민이 타깃

 

이런 점은 당시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성경번역도 그러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 성경을 발간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순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상류층의 입교자가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중·하층민이 선교의 주된 대상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도 제목 중심의 간명한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바르넥은 특정 계층을 주된 선교 대상으로 하는 것은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하여 이상적인 정책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한국에서의 경우 중·하층민 중심의 교회가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세기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상황이었다(고전 1:2629 참고). 독일의 파피루스 학자인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초기 기독교는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에 따르면 어떤 집단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은 그 집단의 종교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하층 계급의 집단일수록 새로운 사상, 이념, 종교에 보다 수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이 서울·경기 등 중부지방보다, 서울·중부지방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 복음에 대해 더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회적 신분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도구

 

초기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중·하위 계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소수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이 주로 개화지향적 민족자강론자들이었다. 급진 개화론 혹은 온건 개화론(東道西器論)의 전통을 잇는 이들은 기독교를 서구문화에 대한 도관으로 보아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인식은 청일전쟁(189495) 이후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기독교를 근대성(modernity) 혹은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인식했다. 이런 인물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같은 엘리트들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입헌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이들도 기독교를 도구로 인식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독립협회는 다수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안창호, 길선주 등은 평양지부에 속한 인물이었다. 1898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중심인물이 투옥되었는데, 이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신흥우 김정식 등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개화지향적인 혹은 민족자립과 독립을 추구하던 조만식 김구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대표적인 두 집단은 다수의 중·하위 계층과 개화지향의 민족자강을 추구하는 엘리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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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1909년 전주교회에 종을 설치하기 위해 소달구지로 종을 나르고 있다. 수직성을 확보한 종탑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전주시의 시간이 성화(聖化)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옥성득 교수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 글쓴 이 / 옥성득(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90세의 김창근 집사님 39년 거제 어구교회 종지기


뎅그랑 뎅! 뎅그랑 뎅! 김창근
집사님이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어구교회 종을 울리고 있다. 병 색이 엿보이나 그래도 종지기로 서의 소명의식만큼은 철저하다. 새벽 4시 반 여명을 깨우는 교회 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부 드럽게 포구를 감싼다. 마을을 돌아 나온 종소리는 이내 남해 바다를 건너 갯내읍을 타고 이순신의 섬 한산도까지 뻗어나간다. 한산도까지는 뱃길로 15분 바닷가를 따라 70여 호가 옹기종기 몰려있는 작은 포구 경남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바로 39년 종지기 김창근(90년 은퇴) 집사님이다. 1967년 마을에 어구교회가 들어선 지 39년, 교회를 거쳐 간 목사가 10명이 넘지만 종지기만큼은 늘 집사님 몫이었다. 김 집사님은 과연 몇 번의 종을 칠까? 이전에는 매일 정확히 50번 씩 종을 쳤다. 그러나 집사님 귀가 어두워지면서 요즘은 70번, 100번을 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없다. 270여명의 주민 중 교인은 30여명에 불과하지만 교회 종소리는 이미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시계도 없던 가난하고 힘겨웠던 주민들에게 김 집사님이 치는 교회의 새벽종소리는 논밭일의 시작과 출어(出漁)를 알리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김 집사님은 어구교회 설립 성도 중 한 사람이다. 1967년 그 때는 종 대신 산소통을 소나무에 매달아 두들겼다. 1999년 새 교회당을 짓고 종을 철거하려했으나 집사님은 자식들이 준 쌈짓돈 70만원을 내놔 오히려 종탑까지 세웠다. 그런데 요즘은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집사님 건강 때문이다. 머지않아 집사님이 천국으로 떠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후계자가 없다. 하지만 김 집사님이 힘을 다해 쳤던 교회당 종소리를 주민들은 ‘천국의 소리’로 기억할 것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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