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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우리는 참 하나님과 자기의 하나님을 분명히 구별해야 하며 참 예수님과 거짓예수를 분별해나가야 합니다. 무엇이 성경적인 진리인지, 유사 진리인지 알아가야 하며 무엇이 교회인지 무엇이 교회가 아닌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인지? 어떤 일이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거짓된 교회 개념에 세뇌 당한 채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인 교회 개념을 정확히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충성하고,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교회(Ecclesia=에클레시아)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혹은 "불려 내어진 무리"라는 뜻입니다.(무리, 공동체라는)

 

사람이외의 그 어떤 것도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흔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교회건물은 교회당일 뿐이지 정확한 의미에서 교회당은 교회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제도 역시 .. 그 자체가 교회는 아니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대치적 교회구조일 뿐, 결코 교회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뿐 아니라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민화된 증거이자, 무지의 소치이며, 반성경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당 건물을 "주님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곧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3:9,16,6:19,고후6:16엡2:1,딤전3:15,히10:21)

건물 성전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며 폐지되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나 건물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을 건축해야 한다!!" 는 성경적 근거를 찾아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성경적 근거가 있기는 고사하고 성전에서 행해지던 피의 희생제도와 제사장직도 이미 지나갔으므로 이제 교회는 건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성경은 명백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7:44절~60절을 보면 스데반은 건물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다가 순교했습니다.(성경에는 십일조제도가 있다. 마23:23) 초대교회에는 오직 연보만 존재했었는데 그때 연보를 건물이나 회당 건축용도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당 건물들을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연보)를 건축으로 낭비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모였고, 성령의 친교 (Koinonia)로 개방적이었으며 영적 은사를 행사함으로 세포 분열 방식으로 정신없이 성장해 갔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세시대에서는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건물에 비중을 두게 됩니다. 기득권의 탐욕과 명예를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으며 강단에서 비진리가 진리 인냥 선포되었고, 부와 명예, 권세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극심한 부패와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중세는 기독교 역사상 *암흑기*로 불리 워 집니다.

교회 건물은 성공과 부와 명예를 상징하게 됩니다. 큰 교회일수록 성공과 부와 명예는 더 커집니다. 개 교회 건물들은 곧 바로 건물 지상주의, 계급주의, 제도주의, 교권주의, 물질만능주의, 차별주의, 배타주의로 연결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의 한국교회 역시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탐람하여, 크고 화려한 건물과 성공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어 일제히 빨리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중세시대 성도들이 자신들의 오류나 맹종을 눈치 챘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愚)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회 건물도 기능적(Functional)이여야 하며, 수단일 뿐이어야 하며, 결코 목적(an end)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이고 올바른 교회관은, 우리 믿음의 집을 짓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 영혼과 교회가 중세기의 암흑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건물이나 제도나 감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객이 전도된 채, 헛된 노력을 경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넘치는 지혜와 분별력으로 건물을 세우려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2)우리 자신이 성전입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분(마12:6)이신 예수께서는 왜? 성전을 허무시고(행6:14).. 또 왜?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실 성전으로 삼으셨을까요?(요2:21, 고전3:16)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사람과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숨어계신 하나님"(사45:15)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소 (Habitation of God)는 (거주지 혹 임재장소)

 

▶① 성막(Tent)에서

▶② 성전으로 (Temple)

▶③ 인간의 육체로 변해왔습니다.

하박국 2:20절 에서 ☞고전 3장 16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던 구약의 건물성전을.. 인간의 몸으로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이어야 했던 "건물성전"에서 행해지던 제사장직과, 희생제도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장막의 모형도 십자가에 의해 실체로 완성 되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7:4)는 새 계약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육체에 임하시며"(행 2:17)"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자신이)"(행4:21)영(Spirits)과 진리(Truth)로 아버지께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요4:24)"

 

너희가(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고 사도바울은 반문하며, 이 중요한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문(문서 법)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3:6)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벽돌로 지어진 건물(교회당이나 건물성전)에 임하시지 않으며... 오직 사람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다시 말하면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2:20)가 실제와 사실로써 체험되지 않는 믿음이란 부질없는 말(입술)만의 믿음이요..공허한 이론(지식)에 불과합니다."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저희를 알며"(요10:27)"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마음 문을 열면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함께 거하시겠다고(계3:20)주 예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관계가 기독교 믿음의 핵심이며 또, 사람 자신(개인)이 곧, 성전이 되고, 교회가 되는 이유입니다.

 

몬1: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롬16:5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교회, 또는 성전은 오직 사람들을 말하며, 교회는 선택된(chosen), 순례하는 (pilgrim), 계약의(covenant)증거 하는(witness), 거룩한(holy)백성들입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재차 강조하며 중요시하는 이유는..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게 될 때 비로소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들이...참 진리를 모른 채 고전3장11절~15 말씀처럼.. 금이나 은이 아닌.. 낡아지고 태워지고 무너져갈(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헛된 공력으로)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3)교회건물을 성전이라 부르지 마세요.

 

교회건물과 교회라는 의미는 다릅니다.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그 당시 권력 화되고 건물을 신성시하는 카톨릭이 성경에도 없는 개념을 넣는 것을 경계해서 분명히 밝힌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용어가 교회의 큰 건물이라는 겉모양을 자랑하는 인간의 못된 심성을 따라 다시 생긴다는 것은 중세시대개념으로 돌아가는 시대 퇴보적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용어를 바로 써야겠습니다. 교회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에클레시아), 즉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건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적 신앙을 같이 합력하기 위한 공적이면서 부수적인 도구이지, 그 자체가 공동체나 성전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실체가 아니라 모형이요. 그림자 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교회를 구약의 물리적인 성전과 동일시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런 구약의 희생제사와 제사장을 똑같이 세우고 제사해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그 성전과 희생제사의 실체가 예수그리스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상징한다는 것이 신약의 기본원리입니다.(요2:21, 계21:11 고전3:16)

 

교회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와 모임, 성례의 집행 장소로써의 부수적인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지금 성전은 우리 신자 자신이죠. 즉 크리스챤입니다. 즉, 물리적 성전은 사도시대 이후로 신약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영적인 의미로 상징화나 더 풍성히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성전을 가지고 자랑하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했습니다.(마24:1-2)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위선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이제는 물리적 건물로써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본질적 성전이 세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을 잘 나타내는 사건이 AD70년 로마 디도장군의 예루살렘함락과 더불어 된 성전 무너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구약적 물리적 성전의 시대가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교회건물을 통해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인간의 사고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66:1 행7:48, 17:24) 솔로몬도 성전을 지으면서도 그런 것을 백성들에게 경계시키고 있습니다.(왕상8:27-49)

 

그리고 사실 초대교회 때 핍박 받을 때 권력자들의 핍박을 피해 소규모의 가정규모의 교회들이 있거나, 여러 군데 동굴을 파놓고 군인들을 피해 여러 군데 도망 다니면서 예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그런 교회모습은 물리적 성전과는 확실히 거리가 멉니다.

 

지금 너무 겉 숫자만 늘어서 건물가지고 성전이라고 자랑하는 사역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 범했던 우를 똑같이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 속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겠지만, 그것이 건물자체에 성스러움이 있어서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4) 내 몸이 성전이라

 

고전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또 성전이 된 내 몸의 모습은 어떤 상태이어야 하는가?

우리 몸은 어떤 몸인가?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상 사석 같은 자리에서 똥내 나는 몸으로 예배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시면서 모세당시 레위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을 때 몸 상태를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사사 이후부터 제사장직무를 맡은 레위지파들은 철저하게 제사장 본연의 임무를 직무유기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레위를 으뜸이라고까지 했습니다.(대상9:34)

 

제사장 직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해주는 한 대목이기도합니다. 글쎄 레위가 제사장직은 고사하고 싸움질하는 전쟁 놀음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대상12:26-28)

이런 몰지각한 레위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나왔습니다.

 

대상13:10에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이것이 개인을 향해서 치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 성경을 보는 많은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내가 제사장인데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성전 된 내 몸을 도대체 얼마나 관리하고 있는지....그런 성전(법궤)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다윗처럼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상13:8에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 하니라.

이후에 웃사가 죽고 베레스 웃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요시야 왕 때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보수하면서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 책의 말을 듣자 옷을 찢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 18년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왕하23: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왕하23:25에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마음뿐이 아니고 보이는 내 육신도 깨끗이 하라는 말씀

 

우리의 모든 생활이 사람의 행실이 아니고 짐승의 행실이 나올 때 나 자신은 모릅니다.

성경이란 거울을 통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사단이라는 또 하나의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어 놓게 만드니까? 사도 바울 조차도 이런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치는 한마디를 하십시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은 오직 마음이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에게만 거하십니다.*

오직 성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심령만이 하나님의 처소입니다.(고전3:16,6:19,고후6:1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어야합니다.

복의 개념이 세상 사람과 같아서는 행복 할 수가 없습니다.

죄지은 인간의 심령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새 생명을 받아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중생)

 

주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리였다.

신앙 양심에 걸리는 것을 찾아내야합니다.

말씀을 배척하면 빛난 과거의 은혜 생활은 간곳이 없고

비극이 찾아드는 어둠만 있을 뿐이다. 말씀은 새겨야한다.(렘31:33)

 

믿음과 은혜는 하나님의 것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2:9)

 

여기서 "너희"(성도)가 바로!!! "교회"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바로!!! "성전"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가르치는 자들은 영적으로 어리고 무지한 자들에게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자의 모임' 그 자체입니다. 보이는 건물은 그저 단순히..예배당일 뿐입니다."

 

이는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찌라"(에베소서4:13~15)

 

우리는 가끔식 어떤 일에만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범사(모든 일)에 그에게(예수 그리스도)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5) 교회의 본질

 

신약성경은 교회라는 개념을 나타낼 때‘에클레시아’란 말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kaleo' 즉 ’- 으로 부르다‘와 ’ek' 즉 ‘밖으로부터’에서 취해진 합성어이다. 그것은 ‘- 로부터 불러 낸 자’(to call out from)라는 뜻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교회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도록 불러내었다는 뜻이다.

 

그 부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끔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의 뜻을 마땅히 순종해야 할 백성이 교회라면 교회는 세계 선교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라고 그 본질을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무엇이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교회론은 철저하게 성경으로부터 정의되고 정립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세워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의 터 위에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초대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의 제자들이 그 부활 사건을 증거 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대와 예수님이 영광중에 다시 재림하실 소망을 안고 한 자리에 모이면서부터 교회는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던 증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이 사도들의 증거와 사역 위에 세워졌다. 사도는 교회의 시작이며 영구한 기초석이 되었다. 이런 근거에서 교회는 사도적인 것이다. 교회가 사도 적이라는 말은 사도 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스 큉에 의하면 이 사도성은 교회의 본질을 결정하는 다른 모든 속성-즉 다양성 중에 통일성, 개체성 중의 보편성, 죄 성 중의 거룩 성-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사도적인가의 여부에 따라 그것이 성경적인 교회인가의 여부를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교회가 하나 되고 거룩하고 보편적일 수 있는가? 참된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과연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데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 교회가 사도 적인가 하는데 있다”

 

우리는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입니다. 범죄로 깨어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신령한 건축가들입니다. 그 일은 바로 내 믿음의 순금등대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거룩한 성전으로 재건될 때, 나의 앞날을 밝히는 소망의 등불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십자가 종탑이 있는 건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건물은 교회라는 말보다는 예배당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란 거룩한 성도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그 단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룩한 성도, 즉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란1>주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3>구원받은 사람들의 단체입니다.

4>세상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교회=(헬)에클+레시아=밖에서(세상) + 불러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건물이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이 볼 때 때때로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 중에서 위선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아직 참된 교회로 변화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입니다(빌레몬서1장2절 참조)예수님이 오시기전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교회였으나 예수님이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부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교회이며, 주위에 보이는 건물은 교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 건물인 것입니다.교회들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과 하나님과 교재 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하나님은 광대하시기에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더 알기위해 그리고, 주일성수를 위해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기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 예배당은 단지 편의시설일 뿐, 교회도 성전도 아니다.******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를 두고 한 말이며,

예배당은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를 특정 건물로 만들고, 그 장소를 신당이나 혹은 무슨 사원처럼 꾸며놓고, 그 건물 혹은 장소에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직자를 구별해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바치게 함으로 그곳이(장소) 당당한 교회로 인식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 하면, 일단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60년대만 해도 예배장소에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써 붙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부착한 교회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라고 했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장소)에 나가는 사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교회 교인 혹은 그 교회 성도, 그 교회 집사, 권사, 장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성도, 즉 교회를 위해 예배당(장소)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예배당을 위해, 성도(교회)가 필요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 주께서 피 흘려 부여하신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건물에 빼앗긴 채, 건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혹은 예배당과 교회를 혼동한 채 열심만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때려 부수고,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까요? 그것은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자랑삼는 소위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앞장 설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역사를 보면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주의 미국남부교회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는 것을 봐서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사람)는 예배당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보다는 예배당(건물)을 섬기는 것이 우선 되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主客顚倒)되었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당과 교회를 혼동하기 때문이랄 수 있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란 한계설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현상일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그 장소를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도들에게 인식을 시키고, 그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고, 소중하게 인식을 시켜, 교회당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당(神堂)에 신을 모시고 사는 이방 종교인들이 행하는 짓을, 성령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어둠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것은 우리 자신들이 곧 교회라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방 신은 신당에 모셔두고 신당을 찾아 섬기지만, 크리스천은 우리 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성전이라 한 것입니다.(고전3:16, 6:19, 고후6:16)

 

이 소중한 일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왜곡해서 예배당을 교회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된 것은 신당문화의 영향과 성직자(목사)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을 사제(司祭) 혹은 제사장이나 승려와 같은 중재자의 신분을 취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피 흘려 사신바 된 주의 백성(참 교회)들이 교회당이란 곳에 묶여, 목사 한 사람의 왕국을 위해서 혹은 목사기업 기능을 위해서 충성 봉사를 다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흑암권세의 포로들이 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교회당에 빼앗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들을 신자(교회)각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고, 그 신분이 각 사람에게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참 교회가 회복되는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의 주장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서, 오늘의 신자들의 처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두고, 사탄의 회란 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집단에 불과한 중세 교회를 떠나 개혁교회를 출발시켰지만, 지금의 교회 상황은 중세 카톨릭보다도 더 사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시대의 성전에 관한 인식문제는 개혁의 중심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이 성전이란 이름에 모아지고, 문제의 발생도 성전이란 이름에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말한 것은 가시적 혹은 영적인 것을 포함한 성전 전체 개념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여기서 "성전 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란 것을 확인시킨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은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비유, 등으로 설명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기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안식일,

둘째가 법궤,

셋째가 성전이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실체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친 모형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눅6: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1:14 / 법궤는 말씀)

"성전 된 자기 육체"(요2:21, 계21:22)

 

이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되고(성전 휘장이 갈라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을 완성하신(다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개혁을 말하게 된 것은 땅에 다시 성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포장된 신종 율법의 노예로 전락되어 땅의 건물(성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교회가 없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강단에 올라갈 수 없다고,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란 의식 때문이죠. 이 같은 의식을 가진 분들의 생각은 그와 같은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 지금도 예배당을 신성시하거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처소나 집처럼 인식을 시키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일은 하루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행위요, 하나님나라의 반역행위요, 주께서 피 흘려 진리로 자유케 한 백성들로 종교(성전)의 노예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 흘리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 임재 처소였다는 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막을 대신해서 지어진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란 점에서 성전이란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된 것이고,(요2:21) 성전 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분의 영(갈 4:6)이 오순절 성령으로 강림 하셨는데, 그 영(성령)이 임한 곳이 곧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디로 임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17절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 "모든 육체에" 부어준 것이라 증거 함으로, 믿는 자의 몸(마음)에 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4:6)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고전3:16)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령이 임하신 믿는 자의 각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을 지어놓고, 혹은 지으려 하면서 성전이란 말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게 되면, 순진하기만한 신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 노릇을 한다 해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로부터 부인(否認)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마7:22-23) 일개 건축물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먹이며 성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이끄는데 그 사안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수만 명, 수십 만 명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단히 거창하게 하기를 원하심이 아니요, 비록 사람들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마7:21, 마25:34-4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것도

사람을(성전)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배당의 조직이나 제도, 건물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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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론

 

(제1권 15장)


제15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창 2 : 7, 18 : 27). 왜냐하면, "흙집에 살며"(욥 4 : 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우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 : 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 : 46)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 : 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 : 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 : 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 : 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 : 25)이라고 불렀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 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 : 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 : 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 : 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20 : 28; 눅 12 : 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 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 : 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 : 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이다(행 23 : 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 27).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더(Osiander)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 : 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 : 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 : 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喩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 : 18).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 : 7)이라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 : 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고 해서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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