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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이상촌과 김용기 / 전정희

 

일제강점기 경기도 남양주 기독교공동체 봉안이상촌의 성소였던 봉안교회. 일가 김용기 장로는 젊은 시절 이 봉안이상촌을 모델로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다. 지난 19일 찾은 예배당 외벽에는 담쟁이가 무성했다.

조국이여 안심허라이상촌 꿈꾸다

한국기독역사여행, 봉안이상촌과 김용기

 

지난 19일 새벽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407번길 봉안교회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팔당댐을 지나 양수리 방향으로 향하자 다산 정약용 생가 마재마을을 안내하는 팻말이 이어졌다. 이제 수도권 사람들에게 다산 생가는 유명관광지가 됐다.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마재마을의 생태자연환경과 다산의 반듯한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김용기 장로(1909~1988)

 

봉안교회는 다산삼거리에서 2.5더 가면 자리한다. 능내리 봉안마을이다.

 

일가 김용기(1909~1988) 장로는 바로 이 봉안마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운동으로 한평생 산 크리스천 선각자다. 1954년 경기도 하남시(당시 광주군)에 성서에 기반한 생활 및 의식 개혁 지도자 양성소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는 한국사회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 받는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양평 두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김용기는 세계 최빈국으로 꼽혔던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제일 목표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개척적이고 진취적인 인재를 농군학교를 통해 길러내 민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한 그의 방향은 1960~70년대 조국근대화라는 박정희 정부의 정책과 맞아떨어졌다. 그 시대 가나안농군학교라는 고유명사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언어가 됐다.

 

가나안농군학교의 뿌리 봉안이상촌

 

그런데 크리스천이 일반인보다 깊이 들여다봐야 할 김용기의 사상은 하나님 나라였고 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고향 봉안촌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종살이를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세주 예수를 기다리면서 믿음 생활에 힘쓰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봉안이상촌건설은 이러한 믿음으로 시작됐다.

 

이날 찾은 봉안교회는 참 신앙을 찾아 서부를 개척한 청교도들이 제일 먼저 교회와 학교를 세운 것과 같은 회당이었다

 

남양주 일제강점기 봉안이상촌 그림지도

 

봉안교회는 1912년 설립됐다. 김용기의 아버지 김춘교가 남양주 용진교회의 한 교인이 전해준 전도지를 보고 예수를 믿은 후 마을에 기도처를 둔 것이 출발점이었다. 마을 안동김씨 문중은 김춘교를 축출 결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김용기는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미션스쿨 광동학교에 입학했다. 양평 군 양서면 신원리에 있던 이 학교는 몽양 여운형(1886~1947·독립운동가)이 고향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이다. 김용기는 나룻배를 이용해 두물머리를 건너 통학했다. 김용기 사상의 밑바탕이 됐던 곳이 광동학교인 셈이다.

 

김용기는 이 학교에서 신앙인의 자세와 민족의식을 교육 받았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면 근로 봉사 희생이라는 예수의 정신이 이 땅에서 생활로 실천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에덴향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저서 나의 한길에 나타난 이상촌에 관한 대목.

 

나라를 빼앗긴지 20여년, 일제의 수탈정책에 농토마저 빼앗겨 가던 암담하던 그 시절안창호 선생이 모범촌을 계획했고, 이승훈 선생이자면회를 조직했으며, 춘원은 소설 ’, 심훈은 상록수를 써 흙에 대한 사상, 곧 잠자는 의식을 일깨웠다. 내 젊은 피도 잠자고 있을 수 없었다. ‘상록수에서처럼 모범 이상촌을 계획했다.”

 

봉안이상촌 건설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공사판에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당시 청량리-양평을 잇는 중앙선(1939년 개통)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봉안촌 인근으로 그 철로가 지나갔다. 그는 인부들에게 음식과 잡화를 팔아 3500원이란 거금을 벌었다. 이상촌 건설에는 토지 79338(24000)가 필요했고 총 5000원의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김용기는 부족한 금액을 쉽게 벌기 위해 폐광이나 다름없는 광산을 인수, 돈만 날리고 만다. 그는 땀 흘리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평생의 교훈을 얻었다. 김용기 부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9917(3000)의 토지를 매입, 개간하는 것으로 이상촌의 첫발을 디뎠다.

 

식민지 기독청년의 고뇌와 비전

 

19382월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식민지 기독청년의 고뇌와 비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용기보다 열 살 적은 평생 동지 여운혁(2014년 작고)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여운혁은 중앙선 공사장을 찾은 손님으로 여운형과 육촌지간이다. 서울서 공부하던 그는 요양차 고향 신원리에 내려왔다가 김용기의 뜻에 반해 이상촌 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둘의 사진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30년대 말 이상촌 마을 풍경

 

祖國이여 安心허라’.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무단통치와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된 시점에 겁 없는 젊은이들이 조국 운운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 것이다.

 

이상촌 건설은 본격화됐다. ‘중앙에는 예배당이요, 언덕 아래는 한강물이 유유히 흐른다.12년 전 두 청년이 이 황무한 구릉에 찾아와 성심과 땀으로 싸워온 것이 오늘날 피어난 이 이상적인 마을이다.’(이일선 당시 서울 신일교회 목사 저서 봉안이상촌)

 

이상촌에선 산양키우기, 비료와 연료 개선, 고수익 과실농사, 고구마 재배, 양봉 등을 통해 농업발전을 꾀했다. 혼식장려, 의생활 개선, 조혼 개선, 청결 강조, 금주금연운동, 건전오락 보급, 야학운영, 서울 유학 권유 등 생활 전반에도 혁신을 꾀했다. 이일선 목사 등 수많은 기독교 엘리트들이 이상촌을 도왔다. 당시 40~60명에 이르는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였다.

 

그 봉안촌의 오늘 풍경은 그저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다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좌우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터널과 터널을 잇는 공중 다리(봉안대교)가 마을의 풍경을 바꿔 놓았을 뿐이다. 고속화도로가 된 6번 국도다.

 

이날 봉안교회 위 반듯한 농가주택에서 이 교회 김영구(64) 장로를 만났다. 평생 고향 봉안을 떠난 적 없는 토박이다.

 

김용기 장로님이 제 작은할아버님입니다. 그런 선대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죠.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김영구 장로는 옛 교회자리, 일제 탄압으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을 숨겼던 곳, 여운형 선생 회갑잔치집터 등을 소개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마을 집들 대개가 폐허가 돼 이상촌 건설 당시의 한옥 원형 건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거부, 공출 거부 등이 이어지자 이상촌은 요시찰 지역이 됐어요. 더구나 항일독립운동 마을로 알려지면서 봉안교회에 부임하는 교역자조차도 없었지요. 집사였던 작은할아버지를 장로장립해 교회를 이끌어야 했지요.”

 

1970년대 봉안교회 앞에서 찍은 김용기 장로(왼쪽에서 세 번째)와 그 아들들

 

그 장로장립예배에서 김용기는 황군장병무운을 비는 묵도를 거부했다. 그 결과 양주경찰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생전 김용기는 경찰서 차석은 홍상혁이란 자였는데 물 먹이기와 공중 매달기, 손톱 밑 찌르기, 손가락 사이 막대끼워 비틀기 등을 해댔다고 증언했다.

 

1940년대 들어 이상촌에는 여운형을 비롯, 애국지사와 학병징집 거부자 등이 은신을 위해 찾아왔다. 김용기는 그들을 고구마 창고와 기도굴 등에 숨겼다. 항일투사 전사옥에게는 미치광이 흉내를 내도록 가르쳐 보호했다.

 

김영구 장로는 산자락을 가리키며 기도굴의 위치를 설명했다. 해방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독립운동가, 징용 징병 거부자들은 산에 숨어 필리핀에서 방송하는 맥아더의 단파방송을 들으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시각 김용기는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도 그 영광을 주리라는 믿음으로 봉안교회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들 김평일 교장이 기억하는 이상촌

 

-“군인이 군인 노릇 잘해야 한다부친,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면”-

 

 

김용기 장로의 아들 김평일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이 아버지가 막사이사이상 수상식 때 입은 삼베옷을 보여주고 있다.

 

“19625·16직후(5·16군사정변)62일 당시 국가재건회의 박정희 의장이 하남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했어요. 일행이 30여명이었죠. 그들은 종일 머물며 잘살기 위한 방법을 아버님께 물었어요. 여론을 들어보니 김용기 장로를 만나보랬다는 거죠. 제가 군 제대 후 아버님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어요. 아버님은 군인이 군인노릇 잘해야 한다고 권면했어요.”

 

 

1966년 막사이사이상 수상식에서의 김용기.

 

지난 18일 경기도 양평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만난 김평일(75) 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가나안농군학교를 이끌던 김용기 장로로부터 영감을 받아 실현됐다고 강조했다. 박정희는 그날 찐 고구마와 감자, 호박잼을 바른 식빵으로 식사를 했다. 박정희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선생은 많이 이루었다그런(가나안농군학교 교육 내용) 방식으로 하면 나라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했으나 김용기는 안 도와주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식민지 청년의 결의를 담아 찍은 사진에 조국이여 안심허라글귀가 인상적이다. 신앙공동체의 주역 김용기(왼쪽)와 여운혁.

 

김용기 장로 연보(1909~1988)

1929년 양평 광동학교 졸업

1931~45년 남양주 봉안이상촌 운동

1950년 용인 에덴향 개척

1954년 하남 가나안농장 개척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

1966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1973년 인촌상 수상, 원주 농군학교 설립

1988년 별세, 농민단체 농민장

(2017.9.22. 국민일보/ 남양주·양평=·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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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금주·금연운동

 

 

초기 선교사들, ·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5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10월부터 연 1구세신문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2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이상규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6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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