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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땅을 공간에 다신 하나님

 


 
이웅상
 
「종교와 과학」이란 과목을 강의하고 나오는데 한 학생이 따라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교황이 성서의 오류를 시인하면서 갈릴레오를 복권조치 했다는 기사를 읽어보셨습니까?' 이에 나는 '아직 못 봤습니다. 복권조치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성서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라고 대답하며 그 학생이 들고 있는 신문을 건네 받아 관련기사를 읽어보았다.

11월 3일자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난에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애'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파문 당한 갈릴레오를 천주교에서 성서의 오류까지 시인하면서 진실을 옹호한 데에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또한 이에 대해 11월 7일자 기독신보에서는 갈릴레오뿐만 아니라, 1518년 이단으로 규정하고 1520년 파문시켰던 마틴 루터도 복권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논박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따지자면 중세 암흑시대에 종교재판에 의해 희생된 유명 무명의 진정한 신앙인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에 와서 이들에게 교황이 절을 하며 사죄하고 복권조치를 한다고 해서 감사하며 카톨릭에 복귀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그렇지 않아도 물질주의와 과학만능주의에 세뇌되어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마음을 더욱 닫게 하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데 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타락과 갈릴레오가 주장한 지동설이 옳다는 것은 현대인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갈릴레오의 희생은 성서의 오류 때문이 아니다. 천동설은 이집트의 천문학자 프톨레미(Clandius Ptolemaeus)가 제안한 이론으로 16세기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즉  이 당시까지만 해도 지구가 태양계의 고정된 중심으로 태양과 그 외의 혹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최초로 지동설이 제안되었으나 천동설의 견해가 당시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에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뒤를 이어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지지하며 나오자 교황이 그를 파문시킨 것이지 성서가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천동설을 주장하고 지동설을 부인하는 구절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과학자들이 16세기까지 믿어오던, 지구가 무엇엔가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있다. 욥기 26장 7절에 보면 욥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지구가 어떤 것에 고정되어 태양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떠있는 것임을 정확히 묘사하고있는 말씀인 것이다. 뉴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까지 어찌 인간의 지혜로 이 놀라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욥기 26장 10절에는 '수면에 경계(원)를 그으셨으되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지구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근 모양임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잠언 8장 27절에도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원)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바다의 수평선이 원으로 되어 있다는 말씀은 지구가 둥근 모양으로 되어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지구의 모양뿐만 아니라 지구가 공중에 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나, 당시의 천동설로 인해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지구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또 하나의 오류는 지구의 기둥에 대한 성경의 언급에 관한 것이다. 욥기 9장 6절은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을 흔들리며' 라고 말씀하고 있고, 사무엘상 2장 8절에는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일부학자들은 성경이 지구가 기둥이나 지주 위에 놓여 있다는 히브리인들의 전설을 근거로 해서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경 본문의 '기둥' 이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무드(ammud)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단어는 '기둥' 이란 뜻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초' 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욥기 9장 6절은 '기둥'이 흔들린다는 표현이 아니라, 땅속의 '기초'가 흔들린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될 때 이 말씀은 이미 언급한 욥기 26장 7절의 '허공에 지구가 떠 있으며', 욥기 38장 7절의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는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오히려 '지구의 기둥'에 관한 말씀들은 지구의 중심부에 대한 놀라운 정보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들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지표면 속에는 맨틀이 있고 그 속에는 외핵과 내핵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물질로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지구 자장으로 미루어보아 자장을 만드는 니켈과 철로 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예레미야 31장 37절에는 이에 대해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모순들이 성서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과학의 영향을 받은 인간의 잘못된 해석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과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대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과학의 모든 이론은 가정에서 출발한 것으로 끊임없이 변해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분명히 말씀하시길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말씀)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이처럼 자주 변해왔고 또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겸손히 과학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한다.

둘째로, 성경 자체를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올바른 성경관에 기초한 신앙서적 등을 참조하여 한 개인의 잘못된 경험과 편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때로는 지나간, 수정된 과학적 이론과 자료들에 의존함으로 인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은 성령이시며 성도들의 교사되신 분 역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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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끔은 발걸음을 멈추고 지나간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현주소를 확인해 보곤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과연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서 일까요? 때로는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지나간 시간들이 그랬듯이 그것은 어느날 문득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공허와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하고 거대한 우주 공간속에서, 그리고 영원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했을때 우리들의 삶은 정말 왜소하고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와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와 권력과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말년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장2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2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이처럼 귀하기에 우리는 단 한번의 기화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 생명을 보다 가치있고 행복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와 돈과 권력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무리 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 밀려오는 인생에 대한 공허와 불안과 두려움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품을 떠난 인생은 마치 어머니의 품을 떠난 아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떠난 아기가 아무리 다른 좋은 것들을 준다고 할지라도 불안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품을 떠난 우리 인생도 불안과 두려움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시는 것일까요? 과연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는 것 일까요? 과연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은 끝나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그렇습니다.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살아 계셔서 온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분명 저 세상에는 천국과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나고 배우고 경험한 이 세상이라고 하는 틀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

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우물속에 갇혀서, 이 세상이라고하는 껍데기속에 갇혀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한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세상의 교육을 받고,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규범과 과학과 문화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려 들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思考)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무의식속에서 진행되어 어느 사이엔가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저 세상의 틀속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때 사람들은 믿을 수도 없었고, 믿으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가 돌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믿건 말건 지구는 바로 그 순간에도 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믿건 말건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십니다. 단지 그들이 알지 못할 따름입니다.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이 깨닫지 못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논리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알지 못하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발견(또는 발명)하려면 고정관념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지식과 경험의 껍데기를 벗어던져야 합니다. 저는 이 지면을 통해서 바로 그 작업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무지로 세상속에 갇혀있는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과 은혜의 속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돕고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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