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다-옥한흠목사




(마태복음 9장 35절-38절)


35.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35절-38절)


오늘의 설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다 -옥한흠 목사






오늘의 추천찬양


찬양 : 십자의 전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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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런 자를 도우신다 -옥한흠 목사- 







(역대하 32장 1절-8절)


1.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취하고자 한지라

2.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3.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에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하매 저희가 돕더라


4.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로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5.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퇴락한 성을 중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성의 밀로를 견고케 하고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6.군대 장관들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게 하고 성문 광장 자기에게로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여 가로되


7.너희는 마음을 강하게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8.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

(역대하 32장 1절-8절)










오늘의 추천 찬양


사명 : 찬양사역자 이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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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0-28 )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 애남 목사 / 헤브론 교회

 

찬양으로 오늘도 은혜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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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 찬양 받으실 왕


눅19:28-40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37.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39.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김 애남 목사/ 헤브론교회

 

은혜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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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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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신분 변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 설교)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15절)


예수 믿을 때 상상 뛰어넘는 변화 다가와
그리스도를 모시면 새로운 피조물·국적·생명 돼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계시면 평안과 행복 얻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보는 아주 매섭고 사나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았고 그로 말미암아 돈도 많고 부자였습니다. 또 성경은 그가 유대인의 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학자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율법을 지키고 관원생활을 하고 유대교의 선생이었지만 그 마음속에 황량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르게 마음이 텅 비었습니다. 허무하고 무의미하고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데 앉은뱅이가 걸어 나가며 장님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듣는 것을 보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 그는 밤이 어두울 때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랍비여, 랍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고는 이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또 태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으로 난 사람은 아무리 잘 먹여도 육이고 잘 입혀도 육이고 교육을 잘 시켜도 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에서 변하지 않습니다. 소는 언제나 소입니다. 닭은 닭이고, 개는 개고, 말은 말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언제나 육입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와 통하지 않습니다. 육과 영이 어떻게 통합니까? 안 통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죽은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과 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니고데모가 물으니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서 뱀에 물린 사람마다 바라보고 낫게 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높이 들려서 속죄제물이 될 터이니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거듭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모두 피조물로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데 아담과 하와는 영혼이 죽었습니다. 영혼이 죽고 나니까 이제는 육체가 온 몸과 마음을 다스립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지 않고 육적인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상태로 육은 감각적인 세계에 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캄캄한 밤 속에 사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헤밍웨이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을 필요조차 없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지고 전기가 흐르지 않는 텅 빈 전구와 같다”고 말하고 사냥총으로 머리를 쏴서 자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감각적으로 살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의 가장 중심인 영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을 다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도 지키고 관원이 되어 높은 지위도 얻고 돈도 가지고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도 텅 빈 마음, 공허한 마음, 무엇인가 잃어버린 심정, 고독한 마음, 이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노벨상을 타도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우리 본체인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결코 평안함이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쾌락을 가져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체를 잃어버리고 어떻게 평안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고 입술로 시인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과 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육은 영과 통하지 않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언제나 육이요, 하나님과는 절벽으로 담이 쌓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굽니까? 우리의 고향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야 비로소 행복합니다. 돈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쾌락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권력이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명예가 행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옛날 삶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옛사람은 장례지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영적으로 통한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도 영의 세계와 통하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영적 세계로 통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겠지만, 약하면 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하늘나라와 통합니다. 교통이 있습니다. 교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혀 모르던 하늘나라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술 먹고 담배 피고 부인을 때리고 마약 중독자인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고 변화됐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조롱했습니다. “야! 너 교회 가고 가정 중심으로 됐다는데 한번 물어보자. 성경은 누가 적었느냐?” “몰라” “교회는 누가 세웠느냐?” “몰라” “목사님은 무슨 설교를 하더냐?” “몰라” “봐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교회를 간다고 야단하냐?” “한 가지는 내가 알아” “뭘 아는데?” “술과 마약이 싫어졌어. 그리고 마누라를 때리고 애들을 겁주던 그 생활이 사라졌어. 마누라하고 애들하고 있는 시간이 좋아. 그리고 교회 가는 날이 기다려져. 나는 그것이 변화된 것을 알아. 그 이외에는 아직 아무 것도 몰라” 그렇습니다. 교리를 모르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 마음속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남이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국적 


 제가 며칠 전에 프랑스 여인으로서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이다도시 자매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프랑스 여자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지만 한국 남자하고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얻었다. 나는 국적이 한국이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눈도 파랗고 얼굴도 하얗고 머리도 노랗고 완전히 프랑스 사람인데 국적이 한국인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 모양새나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국적이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분은 더 이상 프랑스 법에 적용받지 않습니다. 한국 법 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몸무게가 무거운 사람이 말라서 빼빼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귀 나라 백성이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나라 백성일 때는 동물적인 인본주의로 살기 때문에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따라 살고 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부패하고 부정하고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옛사람과 얼굴도 같고 옷도 같이 입고 말도 같이 하고 몸무게도 같고 키도 같지만 국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 백성이 되면 예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고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를 주고 병에서 고쳐주고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시켜 주고 죽음과 절망에서 건져내주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면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꿈을 얻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되고 자화상을 갖게 되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어느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 하나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껄껄 웃었습니다. “다 낡은 바이올린이 줄도 다 헐었으니 누가 사겠느냐?” 그런데 어느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좀 달라고 하더니 바이올린을 켜는데 기가 막힌 음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전부다 감탄할 정도의 아름다운 연주가 있은 뒤에 경매장 주인이 “이 바이올린을 살 사람은 손드세요”하니까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사겠다며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바이올린도 줄도 다 낡았지만 실력있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잘 타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소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바이올린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우리를 마귀에게 맡겨 놓으면 도둑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받아서 멋지게 연주하는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일류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에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류이기 때문에, 일류의 손에 우리가 들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학교 교육을 잘못 받았어도 집안이 좋지 않았어도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도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누군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 되신 예수님은 무력한 분이 아닙니다. 저 하늘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3. 새로운 생명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날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나의 불의와 추악을 걸머지고 내 병을 짊어지고 내 저주를 짊어지고 내 죽음을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체험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로 6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함께’입니다. 나 혼자 죽고 나 혼자 장사지낸바 되고 나 혼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하늘에 앉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은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전능한 능력으로 우리의 짐을 같이 짊어지심으로 함께 시련도 통과하고 고난도 통과하고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삶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값 주고 나를 사셨으니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에게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로 죄 없는 분이 죄를 대신하고 부패하지 않는 분이 부패한 우리를 대신하고 병 없는 분이 병 있는 우리를 대신하고 저주받지 않은 그분이 저주를 대신하고 죽지 않은 그분이 죽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고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주인은 누굽니까?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살려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마귀가 주인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남편도 주인이 아니고, 아내도 주인이 아닙니다. 날 위하여 죽으시고 날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의로움이 됩니다. 내가 값을 지불하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없어도 값도 없어도 그냥 주님이 의로움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성결입니다. 나는 깨끗하지 못합니다. 항상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더러운 수렁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성결하게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들었든 불구자든 아프든 그것은 나의 체험이고 성경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예수님은 나의 건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건강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잘나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이 물러가고 저주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영생이 되십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영생이기 때문에 예수를 내 구주로 모셔 들이고 내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부활이므로 예수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부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와 같이 계시면 나는 이미 부활과 생명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니?” 그러니까 애들이 “꽃바구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바구니에 꽃 대신 비린내 나는 생선을 잔뜩 집어넣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바구니니?” “생선 바구니에요” “똑같은 바구니인데 왜 전에는 꽃바구니라고 하고 이제는 생선 바구니라고 하니?” “전에는 내용물이 꽃이고 지금은 비린내 나는 생선이니까요” 맞습니다. 세상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이고 천국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 사람인 것입니다.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깨끗하게 만들었으면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중생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가 있어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가 있어야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을 알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됐으니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났으니 거듭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니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새로운 국적을 얻었으니 새로운 국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영원한 영광 중에 살게 됩니다. 예수를 꼭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를 놓치면 천국도 놓치고 생명도 놓치고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텅 비고 공허하고 허무하고 맹랑한지 체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난 다음에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은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를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을 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거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고 비가 올 때 우산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고 변화 받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 되고 하늘나라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아직 예수를 모시지 않은 사람은 이 육체를 떠나기 전에 예수를 빨리 모셔서 절망적인 고독과 허무와 공허와 좌절과 고통 가운데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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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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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히브리서 31~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히브리서 3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한 평생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후 유대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로마 정부의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 존재이며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31절은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면 아무도 주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44절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56절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우리는 구원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런 조건 없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4:1).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책의 저자 안희환 목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중학교 때 신문 배달하다가 사고를 당하게 되어 왼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 팔이 없음을 절망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사람 만들어 달라는 것, 공부 못하지 않게 지혜 달라는 것,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기울었던 가세가 살아나게 되었고, 사고 때문에 한 학년 유급해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공부가 재미있어지며 전교 1등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 현재는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절망하거나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사람들에게 왼팔 없는 목회자 안희환 목사는 이렇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가난해도, 못 배웠어도 많은 실패를 경험했어도 몸에 장애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마음을 고쳐먹으면, 사람이 변하면, 나머지 것들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능력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날마다 기도 여행을 떠난다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거룩한 형제들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과 구별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11절은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거룩케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과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26절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과 말씀으로 구별된 거룩한 형제들답게 세상에 물들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을 다스리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우리의 믿음의 대상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신앙고백의 대상이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사도이십니다. 요한복음 638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요, 그가 하신 표적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시므로 그의 말씀과 행동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귀신이 떠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입고,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길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절은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한 길을 가고 있는 나귀 선교사권병희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서울대 농학과 박사학위를 마치고 농업 전문가로 일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가 쓰시겠다는 부르심에 묵묵히 끌려가던 벳바게의 나귀처럼 그는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 방글라데시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가나안농군학교의 분교를 세우고 오직 복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기경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10년 동안이나 척박한 땅을 묵묵히 기경한 방글라데시를 떠나 다시 새로운 땅 캘커타를 향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도 캘커타를 향해 떠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교사가 되면 어떻게 될 거라는 계산도 없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삶은 내가 계획하고 꿈꾸던 것보다 훨씬 보람되고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걸음만 앞서 가시면 곧장 따라가겠다고 결심하고 순종했더니 주님의 귀한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늘 나보다 한 수가 높으신 주님께 그저 감사와 함께 항복의 손을 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소외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에서 피 흘려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단번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12절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죄에서 자유를 얻습니다(4:1415).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지만 가시관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비방과 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가난과 비난과 배신과 버림받는 아픔과 고통을 다 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사 우리를 도우십니다.

 

히브리서 72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어떤 절망과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대사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해 주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생각하는 삶

 

 

하나님의 자녀가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절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의 1차 수신자들은 유대교의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대교와 타협하거나 유대교로 복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눈을 돌려 환난과 핍박 가운데 고난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예수님께 영적 시선을 집중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12:23).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삶을 점령하시도록 예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그리할 때 환난을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를 체휼하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마음을 쏟을 때 담대한 믿음이 생겨 어떤 환난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넉넉히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살았던 것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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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5장3절-4절]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5장 3절과 4절 말씀 가지고 “고난의 유익”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고난의 유익” “고난의 유익”.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잘 살고 성공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기치 않은 고난이 다가옵니다. 문제가 다가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우리 삶 속에 어려움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때때로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자녀들이 속을 썩이기도 하고 사업이 곤두박질하기도 하고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환난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위대한 승리자 예수님을 붙잡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이 고난을 잘 극복해 나가야 될 것이냐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이 고난을 맞이하고 어떻게 이 고난에 잘 대처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삶
 첫째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하기를, 로마서 5장 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누구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환난 중에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어요? 문제를 만났는데 어떻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 이 말씀은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어떠한 환난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어려움이 다가와도 고통이 다가와도 마음에 염려, 근심, 걱정,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주시려고 하는 축복을 바라보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을 바라보고 문제를 바라보면 낙심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서 평안함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까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고통도 괴로움도 슬픔도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희망의 새벽은 밝아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장 겨울밤에 추울 때가 동트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만 지나고 나면 환하게 아침 새벽이 밝아오듯이 아무리 고난이 힘들고 어렵고 깊은 밤 속에 있는 상황인 것 같을 지라도 곧 희망의 새벽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위대한 선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이 모든 것이 다 얽혀져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먼 훗날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이루셨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밝은 색깔만 가지고 그리지를 않아요. 어두운 색깔, 밝은 색깔이 어우러져서 나중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고 문제를 만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신 후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러분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돼요.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명령형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기뻐할 수 없어도 기뻐하라. 바빠서 기도할 수 없어도 기도해라. 감사할 수 없어도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대긍정의 믿음을 갖고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위대한 찬송작가 파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눈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만 치료를 제대로 잘 못 받았어요. 치료하는 분이 잘 못해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패니 제인 크로스비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 단 한 번도 자기를 잘못 치료해 준 분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 그때 제대로 날 치료를 해줬으면 눈이 정상적인 눈이 되었을 때 평생 고통을 주었다고 그런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아니하고 주 앞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했더니 하나님께서 장수의 복을 주셨어요. 1820년에 태어나서 1915년까지 95세를 살았어요.


그리고 찬송을 짓는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찬송가를 가사를 9,000편이나 지었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찬송가에 21곡이나 들어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는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또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 아주 주옥같은 은혜의 찬송들을 그분이 다 지었습니다. 누가 와서 그런 질문했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처한 상황이 정말 절망할 수밖에 없고 원망과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감사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그때 고백을 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이 놀라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동안 감사를 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만 문제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또 억울한 일 당하면 정말 낙심하고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괴로워도 감사하고, 답답해도 감사하고, 슬퍼도 감사하고, 몸이 아파도 감사하고, 억울해도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실 것이에요.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만을 바라보지 말고, 문제보다 크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2. 인내하는 삶
 둘째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인내라고 하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들이 가장 큰 약점이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부싸움을 잘하는 분을 가만히 보면, 두 분 다 인내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열심히 싸우는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사역할 때 아주 부부싸움만 했다하면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싸움하는 분이 있는데 30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싸우시더라고요. 나중에 왜 싸웠냐고 했더니 그 부인되시는 분이 남편이 고집불통이어서 내손아귀에 안 잡혀서 싸운대요. 남편분은 뭐라고 하면 저 사람이 걸핏하면 신경질을 잘 내고 화를 잘 내가지고 그걸 못 견뎌서 싸운다는 거예요. 30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싸우는데 어느 날 은혜 받고나서 그들이 변화됐어요. 인내하지 못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인내하지 못하니까 소리를 지르고, 인내하지 못하니까 화를 내고, 인내하지 못하니까 결정적일 때 실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절로 3절에 이와 같이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를 합니다. 서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시편 37편 7절에,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누가 그런 질문을 한 거예요. “아니 저 악한 사람은 저렇게 멀쩡하게 잘 다니고 잘 먹고 잘사는데 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됩니까?” 그런데 주님 말씀하시기를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저들은 푸른 채소같이 금방 쇠하여 질 것이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잡초는 빨리 자라지만 한번 베어버리면 금방 시들어 버린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왜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이렇게 사람들은 질문하는데 하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한번 확 심판의 날에 칼을 드시면 잡초는 빨리 자라지만 쉬이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참고 기다려야 돼요. 하나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사울 왕이 참지 못해서 큰 실수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과 이제 전쟁을 해야 하는데 전쟁을 하기 전에 꼭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사장 사무엘이 와서 예배를 드려줘야 하는데 제사를 드려줘야 되는데 일주일째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급해서 제사장이 드릴 제사를 자기가 드려버렸어요. 그 후에 사무엘이 도착을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될 텐데 급해요. ‘아휴, 전쟁에 나가야 되는데’ 사무엘은 오지 않고. ‘내가 대신 드릴께’하고 제사장이 할 일을 왕이 대신 해버렸어요. 하나님이 그 때로부터 사울 왕의 마음을 돌려버리시고 2대 왕으로 어린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 한 번의 실수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어요. 그 위대한 모세가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가나안을 보기만 하고 못 들어갔어요. 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모세가 화가 나서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챘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 반석을 두 번이나 쳤어요. 하나님이 슬퍼하셨어요. 네가 나를 위해서 40년간 충성을 했지만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80세에 부름을 받아서 120세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가나안 땅을 느보산에서 내려다만 보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질 때가 있는 거예요. 하루 한번 돌아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을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번을 더 돌아서 무너진 것입니다. 단번에 무너뜨렸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처음에 무너뜨릴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냥 한번 손짓하시면 여리고 무너집니다. 그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주일을 돌아라.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그러니까 모두 열세바퀴를 돌고 열세바퀴를 돌았을 때, 소리를 외치매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때는 75세입니다. 너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언제 이루어 주셨느냐? 100세에 이루어 주셨어요.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겁니다. 그 100세 때까지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해서 중간에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어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라 자기 아내의 몸종을 불러서 아이를 낳아가지고 그 아이 후손이 중동의 아랍족속이 되어가지고 계속 후손들끼리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중동의 문제인 것입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요셉이 거룩한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이 이루어 질 때까지 13년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때까지 13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9년 후에 그 꿈꾼 그대로 형들이 와서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때가 있는 거예요.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고시 합격한 청년들의 신앙이야기>라는 책이 나왔는데요. 여기에 53회 사시에 합격한 정선열 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선열 자매는 너무너무 힘들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셨고 어머니가 나가서 아픈 다리로 살림을 꾸려나가셨는데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1차 고시를 패스했습니다. 그런데 2차 고시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어머니가 대수술을 받게 되시고, 사고가 나서 아버님은 상태가 위독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그가 교회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절대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열심히 준비하고 다시 도전해라.” 그래서 그때부터 그 전에는 사법시험 공부한다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었는데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되고 시간이 부족할텐데도 열심히 구역예배 참석하고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매달렸어요. 그래서 드디어 그가 사법고시 2차를 패스 합니다. 그러고 이런 간증을 합니다.


“시험 당일, 연습 때와 달리 모든 문제를 시간 내에 다 쓸 수 있었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날 도우셨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때와 내가 바라는 때가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과 내가 원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셨고, 교만한 저를 회개시키셨으며 이기적인 재물의 욕심도 버리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겸손한 판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저를 성숙시키는 도구였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고난의 때에 참고 견디고 기다리면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기적으로 응답과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의 선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3. 연단 받는 삶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 인내 할 뿐 아니라 연단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 4절에,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우리가 참고 견디면 우리가 잘 훈련받아서 하나님의 준비된 일꾼으로 잘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연단이라는 것은 우리를 다듬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준비된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완성된 그러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이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을 때부터 여러 가지 부족한 것도 많고 문제가 많은 그대도 예수 믿은 거예요.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다듬으시는 거예요. 우리 삶속에 불순물들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도 제거하시고 고집도 또 내 마음 속에 있는 인간적인 모든 정욕과 탐욕도, 또 내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의 모습도 또 내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도 주님이 다듬어서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또 내 마음속에 있는 불순종의 모습도, 또 내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도 주님이 다듬어서 깨트리시는 겁니다. 욥이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렐루야. “주님이 나를 단련하셔서 내가 순금 같은 그러한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해봤어요. 순금같이 되라는데 금이 인류 역사상 화폐가치로 지금까지 계속 가치의 중심이 되어있는데. 금이 어떻게 나오느냐. 이 지각이 균열될 때 기체와 액체가 충돌해가지고 거기에서 그것이 퇴적되어서 금이 되는데 금이 계속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가서 모래 속에 섞인 것이 사금이라고 그러고 그 광맥 속에 있는 금을 산금이라고 그러는데 이 금광맥을 찾아가지고 그걸, 금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돌을 떼어내서 그것을 잘게 부셔가지고 먼저 물로 가벼운 돌을 떠나보내게 하고 나머지 것을 용광로에 처리를 합니다. 그 중에 여러 가지 것이 함께 섞인 동광석이 있어요. 이 동광석은 세 번 1,000도에 되는 용광로에 집어넣는데 첫 번째 1,000도에 집어넣어 가지고 거기서 동이 나오고 두 번째 1,000도에 집어넣으면 은이 나오고 마지막 세 번째 1,000도에 집어넣으면 이제 금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불같은 연단을 세 차례나 받은 후에 순도 99%의 금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런 순금같이 정금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고난의 용광로에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그 고난의 용광로에서 우리가 활활 성령의 불에 타서 우리의 욕심도 미움도 내 잘못된 성격도 과거의 상처도 다 태워지고 우리는 정금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면 우리를 훈련시키고, 훈련시키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야곱은 좀 사기꾼적인 기질이 있었어요. 형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서 형 옷을 입고 들어가 가지고 대신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이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가서 20년 동안 그 외삼촌 밑에서 살았는데 얼마나 연단을 받았는지 자기가 남을 속인 죄로 외삼촌이 계속 품삯을 또 바꾸고, 바꾸고, 바꾸고 하면서 연단시키고, 연단시키고 연단시켜서 20년을 연단시키고, 20년 후에 돌아올 때 마지막 얍복강 나루에서 완전히 깨어져가지고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일군으로 세워주셨어요. 그 형 에서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죽이려고 칼을 들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다가 자기 동생이 다리를 절름절름 절면서 초췌한 모습으로 오는 것을 볼 때에 20년의 미움이 싹 녹아지고 자기 동생을 부둥켜안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다시 형제간의 사랑을 회복한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온 가족들이 다 잡혀서 아마 노예처럼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 하나 깨어지니까 온 가족도 다 살고, 그가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깨어지고 낮아지면 그러한 은혜가 임합니다. 많은 연단 속에서 유명한 크리스천 작가가 된 캔 가이어(Ken Gire)가『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괴롭히든지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이 뭔가를 만들어내시는 원재료이다. 조각가가 돌을 깎아 작품을 만들듯 하나님도 우리 안의 자아를 깨트려 그분의 명작으로 완성하신다. 예수님이 장차 누릴 기쁨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할 것을 믿고 나아가면 기쁨으로 고난의 길을 갈 수 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래서 시편 119편 71절,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내가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말씀을 따라 하나님 영광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요즘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시대가 되어서 우리나라에 여성대통령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만은 이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이 사관학교 졸업생이 최우수 졸업생이 여자 생도들입니다. 그런데 올해 육군사관학교의 수석으로 졸업한 양주희 생도는 들어갈 때 꼴찌로 들어갔어요.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그가 학교를 다닐 때 육사학생들이 와서 학생들을 모집하는 설명하는 것을 보는데 너무나 그 육사생도가 잘생기고 멋있어가지고. ‘나도 육사가야겠다.’ 그래가지고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예비번호를 받았어요. 누가 등록을 안 하면 대신 들어가는 거예요. 하여간 예비번호 1번을 받고 있다가 등록을 안 하는 바람에 들어갔으니 꼴찌로 들어간 거예요. 꼴찌로 들어갔는데 4년 후에 수석졸업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게 된 것은 4년간 학업과 체력을 단련하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육사에서 소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힘들 때마다 달리기를 하며 마음과 체력을 추슬렀고, 고난은 제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는 마음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훈련소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준비된 일꾼으로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소망을 이루는 삶
 마지막 네 번째로 고난은 결국 우리를 소망을 이루게 만들어주십니다. 소망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4절에,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꿈을 이루게 합니다. 요셉이 그 꿈을 이룰 때까지 당한 그 연단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가 13년을 인내하고 연단 받았습니다.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노예로 팔려갔지요. 노예에서 또 억울하게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갔지요. 그 고난, 그 연단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어요. 17년 젊은 나이에, 한창 꿈을 꿀 그때에 붙잡혀서 13년 동안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밑바닥 인생을 살았으니 누가 그 삶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참고 견디고 또 견디고 훈련받고 훈련받아서 다 준비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어요.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후에 우리는 우리 주위에 고난당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의 사도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나처럼 고난당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할 때 아무도 날 보살펴주지 않아서 얼마나 때때로 외롭고 낙심했습니까?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렇게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우리 주변에 아직도 그런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With You 당신에게 힘이 될께요』라고 하는 손경미 사모님의 책을 최근에 읽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강원도 평창 산골에 태어나서 음악적으로는 재능이 있었어요. 그래서 본인이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그 마을에서 1호, 대만유학생 1호로 대만에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러 갔다가 그만 그분을 보고 반한 그 중국인의 청혼을 받아서 결국 결혼하게 됩니다. 예수 안 믿으면 결혼 안한다고 하니까 열심히 또 교회를 다녀가지고, 그래서 결혼을 했는데 이제 자기가 중국사람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사는 것이 참 쉽지가 않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적인 습관도 다르고, 참 말할 수 없는 연단을 겪고, 그 다음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요. 하나님이 그 연단 속에 은혜를 주셔가지고 남편이 자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는데 나중에 목사가 되었어요.


목사가 되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하는데 두 번째 교통사고는 좀 크게 당해서 입원을 했는데 “고난당한 것이 네게 유익이라 그랬어요.” 왜냐하면 교통사고로 들어가서 검사를 받다가 암이 발견된 겁니다. 암이 발견되었는데 여섯 번 암수술을 합니다. 너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지냅니다. 지금도 머릿속에 콩알만 한 뇌종양이 있어요. 그런데 그 고난을 당할 때 왜 내가 한국 강원도 산골에서 대만에까지 가게 되었고, 대만에서 또 중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중국 사람과 만나서 미국까지 오게 되었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통해서 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어요. 그것은 본인처럼 이 암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웃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에 ‘아시안 암 환우회’라고 하는 조직을 설립하고 지금 아시아 사람들 중에 암 걸려서 고통당하는 분들을 만나서 위로해주고 같이 기도해주고, 본인이 암환자여서 지금도 암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이 금방 마음의 문을 열고 그냥 눈물 펑펑 쏟으면서 같이 손 붙잡고 기도해서 다시 꿈과 희망을 갖고 암과 싸우고 믿음으로 일어나고, 할렐루야. 그래서 많은 고난당한 이웃들에게 주의 사랑을 전하고 있어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처음엔 원망과 충격과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내가 작아지는 순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단지 암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암 환자에게 다가가 진실된 소통을 하며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커튼 뒤에 진짜 행복을 숨겨두셨습니다” 할렐루야. 고난 중에 우리 주님을 바라보세요. 주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영어 성경에는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라 그랬어요. 예수님께 딱, 초점을 맞추라. 고난의 때에 사람 바라보지 말고,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내 자신 바라보지 말고, 딱,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어려움 당한다고 슬픔당한다고 낙심하고 주저앉지 마세요.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이 지나고 난 후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절망이 끝이 아닙니다. 절망의 끝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낙심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영광의 내일을 바라보며 믿음의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난의 때에 감사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감사합니다. “아! 하나님이 이를 통하여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구나. 이를 통해서 나를 더 깨뜨리시고 낮추시고 이를 통해서 우리교회를 더 튼튼하게 만들고 견고하게 세워주셔서 더 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이끌어주시는구나.”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주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미래를 바라보고 꿈과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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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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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6장 24-28절] 

오늘 저는 에스겔 36장 24절로 28절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을 뒤돌아볼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 오늘 이 시간 이 자리까지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고 마음에 평안함을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게 다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무엇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여러분들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생명도 선물로 받았고 건강도 선물로 받았고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 대한민국도 다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도 감사요, 둘째도 감사요, 마지막도 감사라. 감사의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전 재산을 잃고 열 자녀를 잃고 건강을 잃고 아내는 떠나가고 친구들은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욥기서 1장 21절에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야훼시요 거두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할렐루야. 얼마나 위대한 신앙입니까? 고난 중에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슬픔 중에 원망 불평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함께 했기 때문에 절망 중에서도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일생 다가도록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신 그 내용입니다.


1.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


첫째로,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고아같이 혼자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채워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4절에,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포로생활 하고 있을 때 저들을 인도하여 내어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비해주신 가나안 땅으로 저들을 이끌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보면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타국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지내면서 노예생활 하던 때고, 그 다음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약 70년간 포로생활을 하며 노예의 삶을 살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절망 중에 처한 저들의 모습을 잘 아시고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셔서 저들을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과 8절에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할렐루야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하나님이 건져내셔서)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하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아멘.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절망 가운데 처했을 때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주님이 보시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이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그 절망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왔는데 그로부터 약 800년 정도 지나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을 당했어요.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70년 동안 포로생활 하게 됩니다. 바벨론에 끌려가서 저들이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 그들의 노래가 시편 137편입니다. 1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울었도다, 여러분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그러죠. 그것도 먼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그 삶이 절망적이겠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입니다. 이 ‘나부코’라는 말은 이탈리아 말인데 느부갓네살 왕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바꾼 것이 ‘나부코’입니다.


베르디가 두 번의 오페라 곡을 만들어 냈다가 엄청난 실패를 거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와 두 아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이 고난 중에 부른 찬송에 영감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 이 유명한 오페라 ‘나부코’입니다.


1842년 4월 9일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졌는데요. 그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자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제 3막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올 때 감동하여 이 날 기립박수를 하고 이 오페라가 그들 국민의 노래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980년 이 오페라 제 3막에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불려지고 난 다음, 그때 토스카니가 지휘를 했는데 온 청중이 일어나서 30분 동안 기립박수를 30분.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수가 좀 인색하잖아요. 잘 안 쳐요. 그런데 30분 동안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어요. 그만큼 큰 감동을 준 그 합창이 이 오페라 속에 들어 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오, 사랑하는 나의 잃어버린 조국이여
 소중한 추억과 불행한 기억이 있는 곳
 예언의 시인들의 황금 하프여
 왜 버드나무 위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우리 가슴 속 기억에 다시 잃어버린 불을 붙여
 옛 시절 이야기를 들려다오
 예루살렘의 잔혹한 운명을 위해
 쓰디 쓴 비탄의 노래를 들려다오
 아니면 우리가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주님께 노래를 청해다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도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화 했을 때 36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정처 없이 살던 많은 우리 선조들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황성옛터’, ‘타향살이’ 그런 노래들이 고국을 잃은 슬픔에 불려진 노래들이고 동요가운데서는 ‘울밑에선 봉선화’, ‘오빠 생각’ 다 그것이 그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모른척하신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1편 21절로 22절에, “야훼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우리의 간구하는 그 부르짖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절대로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해 주저앉지 말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어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죄의 모습에서 정결케 만들어주십니다. 얼룩진 모든 죄를 예수의 보혈로써 정결케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게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2.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


둘째로,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에스겔 36장 25절에,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이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70년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절망 가운데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들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의 삶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면 물질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여러분이 가진 그 무엇을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권세이든지, 명예든지 그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나의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상을 다 내려놓게 하시고 주의 보혈로 씻어서 말씀으로 정결함을 받아서 변화 받은 모습으로 새로워진 모습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요한일서 1장 9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나왔는데도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또 세수를 해야 돼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먼지가 많이 묻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와서 말씀 듣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씻음 받아도 세상에 나가서 알게 모르게 죄의 먼지가 묻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죄고, 듣는 것이 죄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죄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이 말씀의 물에 자신을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이 말씀엔 예수님의 피가 방울방울 적셔져 있어서 말씀 읽을 때 예수 피가 우리 마음에 뿌린바 되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치료하고 용서하고 회복시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주의 말씀으로 깨끗하여 졌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5장 5절로 6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늘 자신을 살펴서 주님 앞에 정결함을 받고 귀하게 아름답게 쓰임을 받는 주님의 일꾼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 성경을 붓으로 써서 말씀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박재현 작가를 소개합니다. 구약 39권을 열세 살부터 37년간 붓으로 써서 5,300여장에 달하는 성경을 썼는데 쌓아놓은 높이가 4미터랍니다. 말씀서예가. 그가 평생 말씀을 쓰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사심으로 엄마가 집을 나가셨어요. 그때 나이 일곱 살입니다. 일곱 살에 혼자 버려졌을 때에 어느 날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를 가게 됩니다.


거기서 친구가 성경을 주는데 그 성경을 받고 너무 감동해서 일주일동안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버렸습니다. 자기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어요. “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여기 계시구나. 어떻게 내가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할까?”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며 성경을 붓글씨로 써나가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에게 배운 그 서예실력으로 열세 살 때부터 성경을 써나갑니다. 그런데 너무 집이 어려워서 열여덟 살 때 학교도 못 가고 도자기 공장을 다녔는데 어느 날 몸이 너무 힘들고 계속 기침이 나와서 병원에 가니 폐결핵 중증이에요. 얼마 살지 못한다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이때 죽으면 죽으리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하루에 열여덟 시간까지 성경을 붓으로 써나갔어요. 그렇게 성경을 쓰는 동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곧 죽는다는 그가 성경을 쓰면 쓸수록 자꾸 새 힘이 나요. 새 힘이 솟아오르는데 말씀을 쓸 때 예수의 피가 또 적시고 또 적시고 또 적셔져서 병원에 가서 조사해보니 병이 깨끗이 나음 받았어요. 할렐루야.


너무 감사해서 더욱 더 열심히 성경을 쓰기 시작했고요. 1993년에 창세기부터 아모스까지 쓴 성경에 불이 나서 다 사라졌는데도 또 다시 쓰기 시작해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성경을 쓰는 동안에 은혜를 주셔서 2000년도에는 서예월드컵으로 불리는 중국 국제서법대전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대상을 받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에 특선작으로도 올랐습니다.


전국 미자립 교회 32곳과 국제선교선 ‘로고스 호프’호에 ‘말씀의 벽’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전 재산을 바쳐 글 쓰는데 헌신하니까 좋은 집도 마련해 주시고요. 이제는 신약성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신약성경을 다 쓴 후에 통일을 준비할 것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휴전선 근처에 ‘모든 벽을 성경 말씀으로 채운 교회’를 세우고 싶어요. 통일을 기도 하면서요!”


할렐루야. 꿈이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치료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의 말씀 묵상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말씀의 정결함을 받을 때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 마음이 사람들은 철저히 부정적 이예요. 그래서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을 비판합니다.


칭찬하는 데는 굉장히 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남을 험담하고 나쁘게 얘기하는 것은 시간이 안 걸리고 그냥 듣자마자 옮깁니다.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전하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이 악성루머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새 마음을 가지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절, 27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주님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여주시고 변화시켜 주셔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셔서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삶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됩니다. 내 입으로 예수를 믿으려 하면 힘듭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 우리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 받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이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마음이 자꾸 굳어집니다. 상처를 받고 나면요 마음이 다쳐요. 마음이 다치고 나면 쉽게 부정적인데 영향을 받고, 또 마음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잘 내고 다투고 그래서 문제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만들어주시고 미워하고 다투며 살지 않게 하시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분노로 굳어진 마음, 미움과 상처로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7절로 8절에,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완고하게 하지 말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을 깨뜨리고 회개해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베드로가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시편 51편 1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고 약속을 했다가도 어기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3절로 4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할렐루야!


부산에 거하시는 집사님 한 분 계신데 이분은 참 돈이 많은 회사 사장님이신데요. 우리교회에서 1979년부터 성경학교를 시작했는데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오셔서 우리 교회 와서 성경학교, 성경대학을 다 졸업을 하셨어요. 근데 하루는 저한테 와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왜냐? 제가 가장 가까운 친구한테 돈을 빌려줬다가 돈도 잃고 가장 가까운 친구도 잃었습니다.” 돈을 빌려줬는데 이 친구가 힘들고 어려워서 못 갚겠으면 와서 솔직히 얘기를 해야 되는데 사라져버린 거예요. 그 가까웠던 친구가 돈을 갚지 못하니까 잠적해버렸어요.


그래서 너무나 그 때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절대 내가 돈 빌려줘서 사람도 잃고 돈도 잃지 않아야 되겠다.” 그래서 누가 도와달라고 오면요, 돈 빌려달라고 오면 비서를 시켜서 알아봐요. 그래서 집이 어렵다고 하면 쌀도 사다주고 또 그냥 쓰라고 생활비도 줘요. 그러나 빌려주진 않아요. “아 이것 당신 쓰게. 나중에 돈 생기면 당신보다 어려운 사람 또 도와줘.” 그때 이후로는 믿는 사람들끼리 돈을 빌려 주고 빌려 받고 하는 일을 안 해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빌려갈 때는 “아~ 내가 일주일만 쓸게.” 가서는 일주일이 한 달 되고, 한 달이 일 년 되고. 그래서 그 마음에 상처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바뀌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인도해주십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오베다이아 치솜(Thomas Obediah Chisholm, 1866-1960) 목사님 간증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미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독학으로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됐는데 건강이 악화되어서 교사직도 내려놓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몸이 아파 쉬고 있다가 27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무디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한 다음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계속 아파서 1년만 목회를 하고 그만 더 이상 사역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낙심 가운데 있을 때에 1923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 23절 말씀이 마음에 팍 뛰어 들어왔습니다. “야훼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할렐루야!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데 주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영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날마다, 날마다 나에게 새로우니 내가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할렐루야!
너무 감동을 받고 이것을 찬송 가사를 만들어서 곡이 붙여진 다음 이 찬송이 불리기 시작하는데 무디 신학교에서는 학교의 교가로 불려 질 정도로(비공식 교가로) 모일 때마다 이 찬송을 불렀고요, 그 때 총장이었던 학톤 총장은 이 찬송을 너무 사랑해서 자주자주 불렀고 장례식 때도 그 찬송이 불려 졌다고 합니다.


또한, 빌리 그래엄 전도단의 유명한 성악가 조지 베버리 쉐아 선생이 이 곡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이 찬양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치솜 목사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아세요? 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건강이 나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목사님이 찬송을 지을 때마다 건강을 주시고 또 건강을 주셔서 94세까지 살면서 1200편의 찬송을 지었습니다. 할렐루야!


몸 건강 안 좋으신 분 오늘부터 열심히 찬송 부르시고 열심히 찬송을 지으세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건강이 나빠서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함과 놀라운 보살핌’을 이 찬송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할렐루야!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봄철과 또 여름 가을과 겨울
 해와 달 별들도 다 주의 것
 만물이 주 영광 드러내도다
 신실한 주사랑 나타내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내 죄를 사하여 안위하시고
 주 친히 오셔서 인도하네
 오늘의 힘 되고 내일의 소망
 주만이 만복을 내리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인도해주시고 여러분을 정결케 만들어주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여러분에게 불어넣어주시고 날마다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변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주님 믿고 의지하고 약속의 말씀 붙잡고 나아가길 원하오니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케,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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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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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갖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짧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큰 은혜, 큰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없습니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뀝니다. 마귀의 노예, 저주받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녀, 축복받은 인생으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 받은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죄와 절망가운데 살았지만은 예수를 믿고 나서 새사람이 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한때는 예수님을 몰랐을 때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지만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 후에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그의 일생의 가장 귀중한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 붙잡고 일생을 다가도록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그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내 삶에서 존귀케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참 기쁨을 누리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1. 내가 죽는 신앙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내가 주님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는 신앙으로 먼저 주님께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 다시 말하면 내 옛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죄에 속한 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생각해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그 순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죄 속에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제는 죄의 종노릇 하지 마십시오. 알고 있는데 잘 안 되요. 내가 미워하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쉽게 화내면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속상해하고 답답해하면 안 되는데, 아는데 잘 안 되요.


왜?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옛 사람이 살아갖고‘자기가’, ‘자기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다 보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도‘아 잘 죽는다.’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완전히 그 삶이 바뀌어졌어요. 그는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는데 그것을 다 내버리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빌립보서 3장 8절에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이와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를 십자가에 다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누가 귀에다 대고“야, 이 나쁜 놈아”욕해도, 발로 걷어차도, 송곳으로 찔러도 반응이 없어요. 왜? 죽었으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옛 사람이 죽었으면 누가 뭐라고 그래도“못 들었습니다. 난 죽었어요.”누가 뭐라고 그러면 막 분노하고, 사실 확인하기도 전에 막 혼자 속상해하고, 밥 먹다 얹히고, 잠 못 자고,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여러분,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 고집과 교만과 불순종과 하루에도 몇 번 씩 욱하고 화내는 것과, 다 죽은 거예요. 죽은 사람은 실망할 것도 없고, 불쾌할 것도 없고, 섭섭해 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어요. 죽었으니까. 문제는 어디 있습니까? 내 자신입니다. 이 내 자신이 죽은 것 같은데 또 살아나가지고, 또 미워하고, 또 속상해하고, 또 화내고, 또 소리 지르고, 그래서 이 내가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따라하세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할렐루야.


이 죽는‘나’는 뭐냐, 옛 사람. 미워하고, 분노하고, 속상해하고, 죄 짓고, 불의하고, 방탕한 이 사람이, 옛 사람이 날마다 십자가에 죽어야 되요. 그래서 우리는 새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옛 사람의 모습에 끌려 살면 또 죄 짓지요, 또 미워하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 욕심덩어리예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지려고 그래요. 뉴스 보셨지요? 땅에다가 돈을 27억을 묻어 놓고, 그 중에 4억을 빼 쓰고 잃어버렸다고 신고했다가 그 돈을 다 압수당했어요. 참, 좋은 일에 써야지, 땅에다 묻어놓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욕심덩어리예요. 자꾸 가지려고 하고. 잘못 도박에서 돈을 벌어갖고 이게 드러나면 안 되니까 밭에다 파묻어놓고. 사람마다 다 가서 밭을 파 볼지 모르겠네요. 뭐가 있나 하고. 여러분, 욕심덩어리예요. 그런데 죽어지면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고백해야 되요.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내가 분노하던 옛사람도 죽었습니다. 미워하던 옛 사람도 죽었습니다. 속상해 하던 옛 사람도 죽었습니다. 늘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던 옛 사람도 죽었습니다. 밤 잠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에 분노와 원한으로 가득 차 고통하던 그 모습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을 했어요. 그분의 책「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의 무능을, 무능력을 깨닫고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힘이 내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따라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인 진리라고 말해요. 내가 죽어야 살아요. 살고자 하면 죽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내가 살고, 내가 죽어야 내 가정이 살고, 내가 죽어야 이웃이 살고, 내가 죽어야 이 사회가 살고, 내가 죽어야 이 나라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늘 내 자신이 문제덩어리가 되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가정에서도 늘 소란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웃과의 관계가 그렇고, 내가 살아있으니까 이 사회 속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나시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스스로가 죽을 수가 없어요. 주님이 함께 나를 도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실 때에만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어요.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 우리는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내가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놀라운 은혜가운데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붙들고 기도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놀라운 일을 베풀어주십니다.


앤드류 목사님의 또 다른 책「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그 글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거나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의 삶은 너무나 고귀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그 모양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성령으로 친히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살게 하실 때 가능하다.”


주의 성령이 임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어떻게 화나는 것을 다스려요? 못 다스려요. ‘화내면 안 되지’생각하고 있지만 벌써 화 대고 있거든요. ‘내가 소리 지르면 안 되지’하면서 벌써 소리 지르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하셔야 되요.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야 되요. 성령이 나를 사로잡아서 내 입술을 다스리고 내 생각을 다스리고 내 삶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나를 사로잡아주시옵소서. 내 삶 속에 주님이 역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2.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둘째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장 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누가 사신다고요? 그리스도께서.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옛 사람, 옛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분명하게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도다. 따라하세요.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셨어요.


그래서 비즈니스를 해도 그 비즈니스의 사장님, 회장님이 내가 아니라, 이름은 나로 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그 회사의 회장이고 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사서 들어갔을 때 등기에는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공부를 해도, 좋은 데 취직을 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그 자리는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요, 주님이 높이심을 받으시는 자리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오직 주께 영광. 운전을 할 때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는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최봉석 목사님은 일제 시대 때 아주 능력이 많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신 목사님이 되셔서 이름이 별명이 ‘최권능’ 목사입니다. 그런데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를 끌어내서 형사가 조사를 합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몽둥이를 갖다가 때립니다. “왜 이 늙은 영감이 말이 없어?” 하고 ‘탁’ 때리니까 “예수” “어, 이것 봐라.” ‘탁’ 때리니까 “예수”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입만 열면 “예수”, 걷어차도 “예수”, 때려도 “예수”. 그래서 기가 막혀서 “어디 예수뿐이야, 이 영감탱이야!” 소리를 질렀더니, 이 목사님이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 몸 속에는 예수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무리 때려도 예수 밖에 나올 것이 없소."


할렐루야. 여러분 그 신앙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가운데 예수님 밖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나를 아무리 흔들어도, 나를 짓밟아도, 나를 때려도, 나를 무시해도, 나를 멸시해도, 내 삶 속에서 예수님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할렐루야.


로마서 14장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을 위하여서.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심으로 말미암아 내 삶 속에서 주님이 영광을 받아야 됩니다.


주님이 내 삶 속에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날 의롭게 만들어주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주시고, 기쁨의 근원되신 예수님으로 오셔서 내 맘에 기쁨이 넘쳐나게 만들어주시고, 사랑과 용서의 근원으로 오셔서 예수님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가 넘쳐나게 만들어주시고, 치료자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모든 병에서 치료하여 주시고, 형통케 하시는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생활에서 형통케 만들어주시고, 영생의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영생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연세대 영동 세브란스 병원의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박사님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희대 박사님이『희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책이 다시 재출간되어서 도착이 되었어요. 제가 이 책을 받아들고 그 날로 다 읽었어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분을 만나서 같이 예배를 드린 적도 있는데 2003년도에 대장암이 발병이 되어가지고 지금까지 8년 동안 병과 싸우고 있는데 대장암을 비롯해서 온 몸에 암이 전이되어서 열 번 이상 재발을 하고요, 수술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현재 암세포가 간과 골반 뼈에 전이되어 암4기, 말기 암 상태이지만은 아직도 그는 절대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붙잡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어요. 본인이 암센터 소장이에요. 본인이 암을 몸 여러 곳에 갖고 있으면서, 암4기는 암 말기입니다.


그런데 암말기라는 말을 안 써요. 이분은 “암4기 다음에 생명의 5기가 있다.” 그래가지고 절대 죽음을 선고받고도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전진해 나갑니다. 조용기 목사님께 두 번 기도 받고요, 사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목사님의 그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늘 고백합니다. 그래서 암이 분명히 있는데 일반 상식적으로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계세요. 원래 말기 암 환자가 3개월에서 6개월 선고 받거든요, 8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암이 허락 없이 와서 돈도 안내고 전세 살고 있다고.” 암과 싸우는 거예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암은 하나님을 만나게 채 주었기 때문에 저에겐 차라리 축복이었습니다. 기독교 학교도 나왔고 성경을 접한 적도 있었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암을 통해서 철저히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저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03년 6월에 저는 이미 4기였습니다. 말기입니다, 말기. 그때 죽는다, 죽는다 했더라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적인 치료 외에 영적인 치료를 허락하셔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믿음으로 암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의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많은 암 환자들이 이분의 권면을 받고 암과 싸워서 이기고 죽음의 병상에서 일어나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이 주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날마다 죽어지고 내 삶 속에서 주님만이 높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내 삶속에서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의 옛사람은 쇠하여야 하리라. 오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신앙


세 번째로 우리는 이제 내가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마세요. 문제를 바라보지 마세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세요.


히브리서 11장 6절에 이와 같이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보세요.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리시고 희생하셨어요. 그 희생의 사랑에 감동되어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다가오고, 어떤 절망이 다가오고, 어떤 고통의 순간이 다가와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갖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육신의 질병이 있습니까? 자녀의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국 대학생 선교회를 창립하시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셨던 김준곤 목사님께서 2년 전 향년 85세로 소천 하셨습니다. 그분의『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라는 책이 있는데, 2009년 8월8일자 국민일보에 마지막 글을 남깁니다. 그분이 따님이 세 분이신데 둘째 딸 신희가 세상을 떠나는 그 일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1982년 4월 26일 화창한 봄날에 사랑하는 둘째 딸 신희는 세 살, 다섯 살 난 두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만 2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암 수술을 받은 날부터 167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신희는 전주 예수병원 병실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날 아침에도 기도를 해주고 병실을 나왔는데 딸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병원 응급실에 달려갔는데 이미 호흡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다들 이 병실에서 좀 나가달라고 그러고 딸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 사랑하는 딸이 눈앞에서 호흡이 멈춘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꼭 붙잡고 있는 신희의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며 차가와지고 있음을 느꼈다. 종잇장 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같이 잔잔하다. 지상의 산 사람 얼굴 중에 이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제로점에 선 것이다(Be nothing, Do nothing, Say nothing). 십자가상의 주님을 쳐다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주님의 제로와 나의 제로, 주님의 고통과 내 고통, 주님의 죽음과 내 죽음, 신희의 죽음이 만나고 있는 것일까.


잠시 뒤에 생각했지만 나는 주님이 섭섭했던 것이다. 그리도 가냘픔 아이에게 그리도 가혹한 고통을 주시다니. ‘주여...’하고 부를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요, 그, 그 죽음 앞에 가만히 멈춰선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윽고 내게는 한 기적이 일어났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듯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심령 속에서 주님 앞에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내 대신 부른 찬송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셨다. 그때 그곳에도 나와 함께 내 위에 계셨다. 성령의 대송이다.”


여러분, 지금 죽을만한 그러한 고통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절망도, 어떠한 문제도,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괴로움도, 어떠한 슬픔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강물을 이루어서 우리의 상처 난 곳을 적시고, 우리의 절망적인 환경을 적시고, 우리의 문제 있는 가정을 적시고,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적셔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낙심하지 말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절대 뒤로 물러가지 말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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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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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3장]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3~11)

 

복음성가 158장 ‘날마다 숨 쉬는 순간 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린도후서 1장 3절로 11절 말씀을 가지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모든 위로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다 그 마음속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적치유세미나’라고 마음에 상처 입은 주님의 백성들을 치료하는 그런 세미나가 있는데 가서 얘기를 나눠보면 참석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상처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상처의 기억들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 나이가 50세가 다 된 분이 3살 때, 4살 때 상처 받은 걸 기억해요. 7살 때, 8살 때 받은 상처, 다 30년, 40년 지난 상처들인데 그 상처들을 잊지 못하고 그 마음 한 구석에 갖고 있다가 그 아픔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라날 때 부모에게 받은 상처, 또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받은 상처,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잘해야 되겠다’ 그러한 생각을 했어요. 또 부모님들도 어린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상처받을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 부모가 화났을 때 막 쏟아내는 얘기들이 아이들 마음에 그대로 다 상처로 남아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화났을 때는 정말 우리가 말을 잘 다듬어야 되겠다. 말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성장해서 믿던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 결혼생활에서 온 상처, 뭐 많은 상처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누군가 와서 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고 치료해 줄 분이 필요한데, 세상 사람들의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치료자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께 나아올 때만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함 받을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자살입니다. 자살문제입니다. 대통령 직속의 사회통합위원회 2012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요 OECD국가 가운데 인구대비 지금 자살률 1위를 8년째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우울증 통계를 보니까 4년 사이에 우울증 환자가 12.4 퍼센트가 증가했고요, 특별히 젊은 층 가운데에 우울증 환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지금 또 하나의 사회 가운데 큰 문제는 고등학교 중퇴한 학생들이 28만 명입니다. 어디선가 지금 사회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중퇴하고 나니까 갈 길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쉽게 타락의 길로 갑니다. 이런 많은 문제를 우리가 안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 마음에 가진 깊은 상처 때문에 그들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와 방황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올 때만이 이 같은 치료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들을 치료함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1. 위로의 하나님
 먼저 위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할렐루야.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저는 성경을 묵상하다가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몰라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아시는 우리 주 하나님. 염려할 것이 없어요. 걱정할 것이 없어요. 복음성가에도 있잖아요. “내 눈물 씻어 주시는 예수 복된 예수”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어요, 걱정할 것이 없어요, 슬퍼할 것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평생 주님 일 하는 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서른 살 까지는 승승장구, 정말 전도유망한 청년입니다. 좋은 가문에, 좋은 학벌에, 좋은 배경에, 그래서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에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 같은 기관인데, 그 당시 유대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기관입니다. 거기서 아주 차세대 주자로, 지도자로 뽑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을 앞세워서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그 일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를 무너뜨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사건이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됐어요. 그때까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었는데, 그날 이후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보통 그가 60세를 살았다고 보는데, 처음 30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은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유대교 지도자들이 볼 때는 변절자입니다. 배신자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의 일을 얼마나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고, 계속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하는 모든 일을 방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환란 가운데, 모든 절망 가운데, 사도 바울이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어요. 1장 4절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본인이 환난 당하는 것에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이 환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 주위에 우리처럼 고난당하는 사람, 슬픔 당하는 사람을 우리가 위로할 수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요,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고난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나니까 주님이 주신 위로가 풍성하여서 그 위로함으로 새 힘과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길 때, 때때로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믿지 않는 집에 시집 가가지고 핍박을 당하고, 제삿날 되면 늘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었지만은, 때가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고난이 변하여서 축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게 되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복된 가정으로 변화되는 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뒤에 다가올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토요일만 되면 우리 성도님들 자제분 주례를 많이 하는데, 그 웨딩마치 딴딴따단 하면 이제 신부가 들어오잖아요. 그 웨딩마치를 들을 때마다 “아, 고난은 웨딩마치 같은 것이다.”, “고난은 축복의 전주곡이다.” 그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그날 제일 아름다운 거예요. 그날 이후론 또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신부가 들어오는 모습을 신랑이 흐뭇해가지고, 어저께 그 신랑은요, 기다렸다가 맞이해야하는데 중간까지 데리고 들어오더라고요. 아직 걸어 들어올 시간이 있는데도, 버적버적 가가지고 가서, 급하긴 참 급해요. 뭐 좋아서 뭐 빨리 가서 손을 잡고 들어오는 거니까 결혼식 때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중요한 것은 고난은 그런 웨딩마치같이 우리에게 축복을 예고해주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의 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낙심하지 마세요. 슬퍼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세요. 고난 뒤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누가 와서 흔듭니까? 누가 와서 문제와 어려움을 가져다줍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좋은 일이 일어나려는가보다.” 주님 앞에 감사하세요. 영광을 돌리세요. 그 믿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고난을 당한 사람이, 고난당한 사람을 이해해요. 병원에 누워 본 사람이, 환자의 마음을 압니다. 오래 병중에 있으면요, 사람 성격이 예민해져요. 아주 성품이 유하고 좋은 사람도, 6개월, 1년만 병실에 있다 보면 굉장히 날카롭고 예민한 분이 되요. 이해해야 되요. 그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만 낸다고, 아픈데 짜증까지 낸다고. 그게 아니에요. 아프면 짜증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게 되니까, 고난을 당했을 때 고난을 당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다 실패해봐야,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 거예요.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내 잘못도 아닌데, 부도가 나가지고 연쇄반응으로 내 사업이 무너질 때 그 마음을 누가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까? 실패의 경험들, 우리나라는 또 입시라는 게 있어가지고 참, 한번 시험 쳤다 떨어지면 재수한다고 그래가지고, 그 1년 동안 그 마음의 고통을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고난당하면, 고난당한 이웃들을 기억하고 주의 사랑으로 보살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일생 당하는 모든 고난을 우리 예수님이 앞서서 미리 당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히브리서 4장 15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 없으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대신 당하셨는데,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멸시받는 모습으로 주님이 고난 당하셨어요. 이사야서 53장 2절, 3절에요, 우리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는가 보세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렸다는 표현은 뭐냐 하면요, 예수님을 나환자, 문둥병자같이 취급을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예수님이 그 모습이 상했던지, 예수님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 상한 모습은 모든 사람이 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온 몸이 채찍으로 맞아 등이 갈기갈기 찢어져 온 몸에서 피가 흐르고, 얼굴은 부어서 멍이 들고 피멍이 들고, 머리부터 머리 면류관에서 피가 쏟아지고, 그 비참한 모습,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 그 고난을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고난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사야서 53장 4절로 5절에, 이어서 설명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할렐루야. 일찍이 많은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친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교수님은 예일대학교의 그 교직을 내려놓고 정신박약아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들은 섬기다가 1996년 9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는데요, 상처 입은 치유 자에 대해서 책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뭇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며 가족들로부터 거절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살이 찢겨지는 상처를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커다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원망불평하지 않고, 자학하지 않았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치유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온 인류의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그 분이 온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받은 인생을 이해하십니다.”우리의 모든 슬픔, 아픔, 상처를 우리 주님이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119편 71절에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2. 고난을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감사한 것은 둘째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견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1장 6절로 9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아멘. 누구만 의지해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십니다. 얼마나 고난이 심했던지 죽기 직전까지 이른 사형 선고받은 모습이 되었다고 그랬어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너무나 고난이 심하면, “주님 좀 빨리 데려가 주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가 있어요. 엘리야를 보세요. 갈멜산 상에서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멸하고 난 다음 3년 동안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고 비가 쏟아지게 만들었는데,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이 “너 내일 그 사람들처럼 죽을 거다”라는 그 말 한마디에 무너진 거예요. 그래가지고 바로 광야길 들어가서, 로뎀나무 밑에서 이런 기도를 했어요. 열왕기상 19장 4절에,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야훼여 넉넉하 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이제 내가 일을 다 했고, 저는 이제 피곤하고 지치고, 더 이상 무엇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 목숨을 거둬가 주세요. 모세도 얼마나 고통이 심했던지 민수기 11장 15절 보니까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같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우리가 처했을 때, 그때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옵소서. 이대로 나는 그저 죽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시고 이 절망의 자리에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 이 슬픔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내 맘에 평화와 위로함이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옵소서.”여러분, 온 몸에 암이 가득 차도요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주님이 치료해주세요. 그러나 몸에 조그마한 병이 들어와도 “아이고, 나 죽네.”하고 쓰러지면 그것이 큰 병이 되는 거예요. “주여 나를 살려 주옵소서. 주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주여 나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고난당한 것이 우리의 유익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자신의 잘못된 모든 모습을 고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믿음이 더 자라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그 심한 환란을 다 통과하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할렐루야. 고난을 통과한 다음에 욥이 자신의 스스로 의롭다 한 그런 영적 교만을 회개했어요. 욥기 42장 5절로 6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러분, 고난당할 때 회개하세요. 그러면 더 큰 은혜 가운데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고난은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다 같이 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아멘. 미국 휘트워스 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인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 목사님이 계신데, 아 참 이 목사님 얘기하려면 마음이 아파요. 고속도로에 가족이 차를 타고 나갔는데 역주행하는 차와 정면충돌해서 그 차에 타고 있던 아내, 장모, 자녀들을 다 잃었어요. 여러분, 이러한 충격, 이러한 고난은 보통 믿음 갖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그 고속도로에 미친 사람이 뛰어 들어와서 그 차를 거꾸로 몰고 들어와서 정면 충돌해가지고 아내, 장모, 아이들이 다 한꺼번에 죽으니까 그 충격, 그 고난은 괴로워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참 위대한 분이예요.“삶이란 평탄치 않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오히려 삶은 어렵고 냉혹하고 잔인할 때가 많다. 그러나 결국은 잘될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고 세상을 당신이 본래 의도했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지금도 신비롭게 일하고 계신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대단한 믿음이에요. 여러분, 어떠한 고난이 다가와도 이런 절대긍정의 믿음을 갖고 주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셋째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1장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어제 우리를 절망 가운데서 건지셨고, 오늘도 건지시고, 일생 다가도록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저는요 절대긍정, 절대감사를 우리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너무나 감사해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결국 잘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마라.” 엎드려 기도만 하면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사람들은 몰려와서 얘기를 합니다. “어휴, 큰일 났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네네” 속으로는 ‘별 일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절대로 별일 없습니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 갑자기 뭐 큰일이 나서 뭐가 다 안 되는 것 같고 무너지는 것 같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잘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두운 세력이 교회를 흔든다고 하면 오히려 교회는 더 부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부정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 없습니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고 잘 될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지, 어렵다는 소문이 들어올 때마다 더 부흥을 주시고 더 우리 성도들이 잘되게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시편 71편 20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예수님은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고 난 후에 부활의 영생 그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고린도후서 4장 14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광에서의, 저 천국에서의 새 출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환란과 핍박과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슴을 피고 주님의 그 영광의 내일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괴로움도 우리는 넉넉히 싸워 이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고난의 때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고린도후서 1장 11절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성도님들이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때, 주의 종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를 붙드시고, 주의 종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염려할 시간에 찬양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보세요.


베드로가 붙잡혀 사형집행 당하기 직전에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옥에서 베드로를 꺼내신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사형집행 하려고 보니까 베드로가 없어요. 그래서 그를 지키던 모든 그 간수들을 다 사형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넘치는 감사로 나아가십시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전신마비 장애가 와서 참 절망의 삶을 살았던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기적을 노래하는 ‘바퀴달린 성악가’로 불리는 이남현 씨. 키가 192센티미터 이구요,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의 건장한 성악을 전공하는 한 청년이었습니다. 2004년도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그만 떨어져서 수영장 벽에 목을 부딪쳐 목뼈가 부러지면서 목 아래로는 쓸 수 없는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다가온 고난 앞에서 ‘하필이면 왜 저입니까? 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근데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버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현아,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야.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돼.” 부모님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로 다시 믿음을 갖고 자기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고 도전해 나갔습니다. ‘내가 가진 달란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니 내가 찬양을 통하여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겠다.’ 전신마비가 온 장애인이 노래를 부른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제대로 복식호흡 하기는커녕 기침이 자꾸 나오고 온 몸이 경련이 나서 노래가 안돼요. 그러나 재활치료를 하면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을 합니다. 한참 재활치료 하고 난 다음에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옥타브를 노래를 할 수가 있어요.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숨이 차서 한 곡을 끝까지 잘 못 부르는데도 온 몸에 힘을 다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노래하고 노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온 몸에 장애를 갖고도 대학교, 대학원을 전공해서 졸업을 하고 이제는 여러 곳에 나가 찬양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는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참 귀한 분이에요. 이런 간증을 했어요. “비록 풍부한 성량이나 화려한 테크닉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저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그리고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제 인생의 목표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셨으며,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제 삶에 ‘감사’하며, 저를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먼저 흘러나옵니다. 참 신기하면서도 이 또한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쉽지 않아요. 목뼈가 다쳐서 온 몸 다 마비가 돼서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그런 장애인이 어떻게 감사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보면 우리들은 참 문제가 좀 있어요, 그쵸? 문제가 많다고 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멀쩡한 몸을 가지고 감사보다 불평이 먼저 나올 때가 많잖아요. 제가 오늘 손들어보라고 하지 않겠지만 마음속으로 회개하셔야 돼요. “주님 내가 아무 것도 아닌데 불평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짜증냈습니다. 남 탓 했습니다.” 꼭 문제만 생기면 누구 때문에 그랬다고, 누구 때문에 그랬다고. 그 옛날에 노래에도 “그건 너” 그런 노래가 있는데 밤낮 남 애기만 하고요. 여러분, 따라하세요. “다 내 탓입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오래참고 살겠습니다.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면 기적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축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은혜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는 감사하며 살게 하시고,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용서하며 살게 하시고,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잘 견디고 싸워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는데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계절에 주님 우리 삶 속에는 감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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