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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희화화한 '죽어야 사는 남자', MBC 공식사과

시청자 과잉반응일까? 몰이해로 인한 실수일까?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 관습과 문화를 희화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흥미롭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의 관습과 문화를 폄훼한다면 사디즘적인 취미랄 수 있다.

 

이슬람 문화와 관습을 놓고는 특히 그렇다. 수년 전부터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시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자연스럽고 재밌는 소재라고 넘어갔었지만 근래 이슬람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그들을 의식한 과잉반응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타인의 문화와 관습에 공감을 못하더라도 그들을 우리의 시각만으로 과장되게 표현하고 폄훼하는 것은 부주의한 면도 없지 않다.

 

MBC 수목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극본 김선희 연출 고동선)가 이슬람 문화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 SNS 상에서 논란이 되자 MBC는 지난 2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했다.

 

'죽어야 사는 남자'는 히잡을 쓰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 등으로 인해 이슬람 문화를 희화화했다는 비난에 휩싸인 바 있다. 또한 무슬림 남성이 코란을 펴놓고 그 앞에서 다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에 대해선 “무슬림에게 코란은 몹시 소중하다”며 “제대로 된 조사도 안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의 포스터도 도마에 올랐다. 코믹한 연출의 배우 모습들에 최민수 앞에는 코란이 펼쳐져 있는데 이는 이슬람 아랍 세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란 것이다. 무슬림들도 코란을 만질 때는 꼭 손을 깨끗히 씻고 만져야 하며 코란을 읽다가 잘못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할 만큼 성스런 것인데 포스터부터 금기사항을 건드렸다는 지적이다.

 

이에 '죽어야 사는 남자' 제작진은 공식사과문을 통해 “'죽어야 사는 남자'는 가상의 보두안티아국을 배경으로 제작되었으며, 등장 인물, 인명, 지역, 지명 등은 픽션”이라며 “아랍 및 이슬람 문화를 희화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할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촬영 과정에서 부족했던 점을 엄밀하게 검증하고 더욱 주의를 기울여 제작에 임하겠다.”고 사과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hosabi55/221057728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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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신문지상에 아랍과 중동지역으로 많은 기업체들이 할랄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할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글로벌 금융에서 이슬람이 차지하는 비율 18%. 

 세계인구 1/4 이슬람. 글로법기업들이 이슬람시장을 주목하고 있어요.

현재 74억중 18억이 2050년에는 96억 중 26억명이 된다고 하네요.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으나 모든 종교문화의 용광로인 영국 런던에서

2013년에 '이슬람경제포럼' 을 개최해

2조 달러에 달하는 이슬람시장 이슬람채권발행 추진을 했어요.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그렇다면 할랄은 무엇일까요

할랄(Halal)은 이슬람 율법 용어이고  '허용된' 이라는 뜻이에요.

그들의 율법은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 라고 하여 무슬림은 할랄음식만 먹어야 해요.

부모님이 무슬림이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무조건 이슬람.

그 어떤 종교보다 율법이 강한 무슬림은 어릴때부터 먹는 재료가 다 할랄이어야 해요.

먹는 것이 정해져 있는 거에요. 그들의 경전인 꾸란에 규정된 할랄은

기본적으로 알코올, 돼지고기는 먹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특히 고기가 중요한데요, 할랄고기란, 육류에 전기충격을 전혀 가하지 않고,

경동맥을 끊어서 고통없이 단칼에 죽은 고기만 먹어요.

도축날짜가 반드시 적혀있어야 하고 그러하기에 신선해요.

이런 할랄방식의 고기는 맛이 좋고 다른 고기보다 훨씬 부드러워요.

생명존중사상에서 시작된 이슬람식 도축법으로서,

​식물조차 난도질해서 죽이면 안 된다는 게 할랄입니다.

그래서 할랄식품은 안전하다고 평가받아요. 그리고 할랄의 개념은 비단 먹는 것에 그치치 않고 광범위해요.

이슬람이 애용하는 슈퍼마켓의 모든 제품은 할랄제품(할랄마크, 할랄인증을 받아야 한다.)이에요.

할랄화장품은 젤라틴과 알콜성분이 들어있지 않은, 까다로운 성분 검사를 받은 제품이에요.

무슬림 여성은 할랄화장품만 사용해야 하고요. 깨끗하고 위생적이라는 것이 할랄인 거죠.

알토올이 포함됭 향수조차 못 써요. 이슬람센터에서 검증된 제품만 사용해요.

또, 할랄관련 제품은 별도로 관리하는 유통이 따로 있어요.

대박!  전용 콘테이너를 통해서만 유통해요.

여기에 사용되는 돈도 투기를 금하고 이자 개념도 없어요.

저도 이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근데 요즘 이 할랄음식이 종교를 넘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어요.

종교와 무관하게 '브릭 레인' 에 음식을 즐기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요.

런던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뉴욕커에게 할랄푸드는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이며 안전하고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웰빙식품이기 때문이에요.

할랄마켓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더 큰 가치를 만드는 대명사가 되고 있는 거에요.

햄버거조차 건강하고 맛있는 할랄식품으로 재탄생되면서 할랄푸드가 돈이 되고 있어요.

 
이슬람들에게는 할랄인지 아닌지에 대한 어플리케이션도 따로 있어요.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최대의 무슬림국가에요.

할랄인증 없이 판매도 없어요.  슈퍼마켓 상품도 할랄마크는 필수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똑같은 상품도 할랄상품으로 다 바꾸어야 해요.

코카콜라 등 거대 글로벌 기업들은 무슬림 시장의 중요성을 알고는, 네슬레는 공장중 1/3이 다 할랄공장으로 바꿨어요.

이렇게 할랄식품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할랄시장은 커지고 있어요.

네델란드 로스테르담도 요즘, 25개의 식당이

인테리어에서 음악에까지 터키를 그대로 갖다놓은 것 같이 해놓곤,

골라서 먹을 정도로 할랄 레스토랑이 많이 늘어났어요.

건강식으로도 각광받기에 무슬림보다 비무슬림 손님들이 더 많고요.

아이스크림도 할랄인증을 받은 것만, 할랄의 긍정적 이미지를 사업에 계속 적용하고 있는 추세에요.

특히 태국 방콕이 이슬람시장에 대해  적극적인데요,

불교국가 태국정부가 불교를 헌법조항에서 삭제한 후,

날로 변하는 국제환경에 적응하고자 방콕쇼핑몰에는 무슬림을 위한 기도소까지 마련돼 있다고 해요.

태국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 덕분에 할랄과학센터와 식당이 생겼는데,

최신 설비가 갖춰져 있고, 화장품, 의학품, 백신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할랄시장의 상당부분을 점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 연구소에서 개발된 할랄샴푸는 이슬람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고 하니 할랄이 뭔지!


그럼 우리나라는 어디쯤 와 있을까요?

인도네시아에는 우리 마요네즈 식품의 공장이 있어요.

마요네즈를 할랄방식으로 생산하는데요. 마요네즈의 원료가 되는 계란을 ,

할랄방식으로 사육되고, 수의사들이 직접 검사한 닭이 나은 계란을 사용한다고 해요.

할랄인증이 없으면 입고자체가 안 되기에.

국내에서도 이 시장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구요.
 

세계 무슬림 관광시장인  할라 식품시장을 위해 우리 정부도 적극 나서고 있어요.

기업들에게 할랄 시장을 소개하고 우리제품에도 할랄인증이 있는 제품이 늘어나고 있구요.

농식품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하는데, 할랄식품은 그야말로  블루오션인거죠!

그렇습니다.
할랄이 무슬림이 먹어야 하는 식품이라면 할말이 없겠지만
그것이 웰빙이니 건강식이니 하면서까지 할랄을 권장하는 것을
이슬람을을 알리고 그로인하여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이 생겨날까 하는 마음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며시 걱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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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 한달을 마침을 보면서


이슬람에서 ‘신성한 달’로 여기는 기간인 라마단에 벨기에, 아프가니스탄, 영국 등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했으며
이슬람 달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은 이슬람 신자들이 해가 뜬 시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기간으로
지난달 27일부터 오늘 6월27일까지 일것이다..

 
라마단이 시작되는 날인 지난달 2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나 십여 명이 숨졌으며
3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차량 및 흉기 테러가 일어나 7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쳤고,
7일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소행의 테러가 일어나 최소 12명이사망했다
12일에는 파키스탄, 18일에는 이집트, 19일에는 프랑스에서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테러는 20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
용의자는 범행 직전 아랍어로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쳐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다고 한다.

‘피의 라마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기간에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IS가 조직원들에게 라마단 기간에 테러를 일으킬 것을 부추기기 때문.
IS는 라마단이 신성한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순교(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침)를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하는 이슬람교리때문일까?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에게 라마단은 매우 신성하고 중요한 달입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알라(이슬람의 신)로부터 첫 번째 계시를 받은 달이라고 믿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정해진 시간에는 철저히 금식(음식을 먹지 않음)을 하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
되도록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IS는 라마단에 테러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걸까요?
무슬림들은 라마단에 좋은 일을 하면 몇 배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이용해 IS는 테러가 이슬람에 이로운 ‘지하드(성스러운 전쟁)’라며 라마단에 테러를 시도해 보상을 받으라고 꾀는 것이지요.
지난해에도 라마단에 사흘에 한 번 꼴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목숨을 빼앗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분명 이슬람교의 교리에서 어긋나는 잘못된 일입니다.
IS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악용(나쁘게 이용함)해 테러를 일으키고 있으며
테러로 사람들의 공포심을 커지게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넓히려고 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이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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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개요] 이슬람 by 무슬림 -4

 

10세기 전후 법학파와 신학파의 관계

 

하나피파는 마투리디 신학파에 흡수되었고, 말라키와 샤피이 학파는 아샤리 신학파에 흡수되었으며, 한발리파는 법학파이면서 동시에 신학파로 발전했다.

 

예언자들에 대한 믿음

 

예언자들의 수는 보통 28명인데, 쿠란에 언급되지 않더라도 무함마드 이전에 활동했다면 사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천사에 대한 믿음

 

천사에 대한 믿음은 일반 대중의 신앙에서 큰 역할을 했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천사는 가브리엘이었는데 성령 혹은 신뢰할만한 영으로 불렸다. 그는 하느님의 지시를 예언자에게 전달한 존재였다. 한편 미가엘은 자연현상과 식량의 분배를 관장하는 천사로 여겨졌고, 이스라필은 모든 피조물을 심판에 불러모으는 천사였으며, 이즈라일은 죽음의 천사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천사들이 일곱 영역으로 조직되어 인간사에 개입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천사의 性에 대해서는 무함마드는 언급하지 않았다.

 

Jinn에 대한 믿음

 

진은 성격이 불확실한 영적 존재이다.

 

이블리스

 

이블리스는 악마, 마귀로 일반적으로 타락한 천사 또는 진으로 인식되었다. 이블리스는 아담에게 절하는 것 서부하여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철저한 유일신론의 대표자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블리스는 하느님에게 절대적으로 적대적인 존재가 된 적은 없다. 그것은 사탄을 하느님의 도구로 생각한 셈족 전통의 오랜 관념과 관련된다.

 

최후심판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행위를 저울질하는 것으로, 그 때 인간의 행위를 기록한 장부가 사용된다. 심판의 날 하느님은 사람들을 각각 달리 취급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유일성을 믿는 사람 중에서 지옥에 남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될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일치하지 않았다.

 

초기 이슬람철학

 

알 파라비(950 사망)는 철학과 이슬람의 계시가 하나라고 주장했고 이 세계는 하느님이 思考를 통해 창조했다고 가르쳤다. 이븐 시나(1037 사망)는 하느님은 제일원인이며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지식 속에 본질적으로 선재한다고 했다. 그는 알-가잘리의 비판 을 받았다. 이 세상의 것들이 태초부터 하느님의 지식 속에 본질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의 영원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불멸성 부정한 것도 비판

 

철학적 지식과 신적 계시가 일치한다는 사상

 

이븐 루쉬드(1198 사망, 서구에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짐)는 철학은 예언자가 전한 진리를 세련된 형태로 설명해야 하며, 인간은 각자 자신이 지닌 이해력에 따라 이 방법, 혹은 저 방법이든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중의 진리'라고 잘못 번역되어 유명해지고, 그로 인해 비판받았다.

그는 물질에는 시작이 없으며 창조는 매순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인간존재의 목적은 물질적 이성이 능동적 제일 이성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앞서가는 정신들은 이렇게 불멸성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최초의 사회학자라 불리는 이븐 할둔(1406 사망)은 아사비야(무리의 혼, 공공의 호라기, 혹은 집단정신) 개념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사회,심리학적 요소로, 이것이 종교적 열정과 결합되면 한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과 의학

 

그리스 유산을 번역, 재구성, 확장하여 근대적 정밀과학의 초석을 놓았다. 아비센나의 의학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사용되었다. 수많은 과학용어, 별자리 이름, 수학용어 들을 정립했으며, 광학, 기하학도 이슬람의 유산이다.

 

신비주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논리적 입장보다는 직접적, 현실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다섯기둥의 실천과 종교의식의 거행, 예배의식과 일상생활에서 알라의 '약속 및 위협'을 통해 알라의 현존을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것, 알라를 진정으로 믿는 인간의 삶과 인격 속에서 이슬람의 생명력과 현실성을 확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인격적, 감정적 체험의 욕구룰 반영한다.

 

초기 신비주의자들

 

초기의 신비주의자들은 이슬람이 시리아로 확산될 무렵 출현했다. 신약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 신비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 측면이 강했다. 수피 Sufi(수프, 양모)란 양털로 된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의미했다. 이는 금욕적 성격의 운동이었음을 반증하는 명칭이다. 수피들은 8세기에 출현했는데, 지옥의 공포에 대한 영향으로 참회, 금욕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중심 개념은 나프스(저급한 영혼)와 끊임없이 씨름하는 지하드(聖戰)였다. 이 나프스와의 투장은 가난, 단식, 침묵, 지속적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일일이 또 끊임없이 통제하는 기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으로 연마되어 개인의 삶 전체를 완전한 이흘라스(순수한 헌신)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체계적 명상을 실천했으며, 금욕주의는 메소포타미아, 이란 동부 호라산 지역에서 발전했다. 동부지방 최초의 금욕주의자는 이브라힘 이븐 아드함(777년 사망)이다. 그는 종교적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타와쿨)라고 믿었다.

청빈주의도 중심주제였다. 파크르(가난)에 대해 "나의 가난은 나의 자랑이다."(파크리 파흐리) 라고하면서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소유도 멀리할 것을 요구했다. 후대에는 이 타와쿨, 파크르 모두 내면화된다. 즉 "가난이 완벽해지면 곧 하느님이다."라는 관념이었다. 따라서 파크르는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는 의미로, 더 나아가 저승에 대한 바람과 희망을 포기하는 의미가 되었다. 절대적 가난 속에 있는 피조물은 그의 모든 것이 되어주는 창조주의 영원한 풍요로움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은 명예와 칭송에 대한 애착도 부정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신경 쓴다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리다(만족), 즉 무엇이 주어지든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수피즘은 쿠란에 근거하지만 철학적 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 조직적 면에서는 기독교 수도원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정기적 명상과 철야기도, 금욕적 생활 하다가 12세기에는 독특한 음악과 의식 갖춘 공동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의 관심은 현세에서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무슬림 둘-눈 알-미스리 Dhul-Nun al-Misri(859 사망)의 영향도 컸다. 그는 "이집트에서 온 어부"라 불렸는데, 인간은 신비적 합일에 의한 결혼으로 알라에게 먹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미스리와 추종자 수피들은 영혼이 알라에게 먹히기 위한 준비단계를 상정했다. 수피는 진리로 향하는 길을 가는 순례자이다. 회개,금욕,자제,가난,인내,알라에 대한 신뢰,만족의 단계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진리와 지식의 초월적 영역에 도달하면 알라의 자비를 확신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도취의 체험을 한다.

 

사랑의 신비주의

 

바스라의 라비아(801년 사망)로 대표된다. 그는 물동이와 횃불을 들고,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희망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기도하도록, 지옥에는 물을 붓고, 천국에는 불을 질르겠다고 선포했다. 즉 지옥의 형벌이나 낙원의 기쁨과 무관한 절대적 사랑을 추구한 것이다. 라비아 사후 1세기 반 경과하며 사랑의 이론 더욱 정교화되고 확대되었다.

 

다양한 신비주의자들

 

바그다드의 심리학자 무하시비(857년 사망)는 냉철하게 자신의 영혼(무하시바)을 탐색했고, 하라즈(896년 사망)는 신비주의적 신앙고백으로 "오직 하느님만이 '나'라고 말할 권리를 지니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포괄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후기의 타우히드(하느님의 유일성 고백), 즉 "하느님 외에는 달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말의 기초를 닦았다. 둔-눈(859년 사망)은 마리파(그노시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를 언급했고, 자연을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증거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피조세계의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수피였다. 바예지드 비스타미(874년 사망)는 페르시아 출신으로 수브하니(나에게 찬미를, 나의 위엄은 얼마나 위대한가!)를 외쳤다.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결별한 인간의 神化를 표현한 것인데 인도 베단타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브라흐만과의 합일에 이르기까지 아트만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모든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편 자신이 체험한 황홀경을 묘사함에 있어 천상으로의 여행이라는 상징을 최초로 사용했고, 파나를 향한 갈구, 자신의 체험끝의 알 수 없는 실망감을 시적 언어로 그려냈다. 여기에서 파나는 우선 윤리적 개념이다. 즉 인간적 요소가 점차 소멸하고 영성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윤회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아니다. 즉 니르바나와 무관하다. 오히려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피조물의 노력과 관련된다. 바그다드의 주나이드(910년 사망)는 정신의 신비주의를 주창하여 이란과 후기 수피주의, 특히 마그립(북아프리카) 지역의 수피 전통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불교의 영향으로 무신론적 신비주의도 존재했다. 이런 입장은 자아 헌신이나 진정한 존재에의 완전한 몰두를 궁극의 목표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보수적 무슬림들은 무신론적 신비주의자들 zindig 과 극단적 수피들 ecstatics 까지 이단으로 취급하여 박해했다.

 

알-할라즈 al-Hallaj

 

페르시아의 수피로 922년 체포되어 "나는 진리이다" al-Haqq 라고 외치며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알라와의 신비적 합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하느님과 자신 사이의 베일 거두어주기를 청했다. '키탑 앗-타와신'이라는 시에서 등잔불에 자신을 던지는 나방의 비유를 구사했다. 그는 드디어 "나는 신이다, 나는 진리(하크)이다."라고 외쳤다. 할라즈의 죽음은 主意主義的 신비주의라 할 수 있는 1기 고전적 수피주의 시기를 마감한 사건이었다. 그후 온건한 수피들은 다음 2세기동안 수피의 입장이 쿠란과 하디스에 근거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며 정통주의자들과 타협을 추구하며 수피즘을 체계화했다.

 

후기 수피 시인들

 

잘랄 알-딘 루미 Jalal al-Din Rum는 쿠란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 그는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했고, 어떤 종교이든 근본적 문제는 종교적 체험이라고 확신했다.

 

알-가잘리 al-Ghazali

 

신비주의자들이 내재성과 편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정통주의자들이 알라의 초월성 전능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상반되므로 절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것을 대표한 사람은 알-가잘리이다.

무이 알-딘 Muhyi al-Din(종교부흥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 알-가잘리는 페르시아에서 1058년 출생하여 샤피 학파의 법학을 공부했고, 알-아샤리를 추종하는 이맘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했다. 아샤리의 사상이 지배적인 니잠이야 Nizamiyah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4년간의 강의 중 정신적 위기 맞아 회의주의를 거쳐 수피즘에 빠져들었다. 그후 대학을 떠나 시리아로 가서 2년간 명상과 기도를 했으며, 정통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수피 신비주의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헸다.

알-가잘리는 무함메드가 받은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한 법과 이성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성과 역사, 실천의 용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시적 상징적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직관적인 통찰력의 타당성도 주장했다. [알-문키드 민 앗-달랄](과오로부터의 구원자)은 철학, 스콜라학, 바티니야 등 당대 신학사조와의 정신적 투쟁이었으며, [이흐야 울룸 앗-딘](종교학문의 부흥)은 하느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삶울 제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절대복종(이슬람)과 이만(신앙) 외에도 이흐산(하느님을 대면하듯이 그분께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고, 극히 비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때도 하느님께서 항상 자신 앞에 계시다는 느낌을 가져야 함을 주장했다. 마지막 40장은 죽음을 맞이하는 구도자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이다. 한편 [미슈카트 알-안와르](빛을 위한 벽감)은 기존 수피주의에는 다루지 않았던 이슈라크(빛)의 신비주의를 표방했다. 알-가잘리의 빛의 신비주의는 1191년에 처형당한 수흐라와르디에 의해 명료화되었다. 그것은 영혼이 자신의 망명지인 서방 물질세계로부터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정신세계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슬람사상의 부흥]에서는 우주는 영원한게 아니라 알라의 창조적 의지를 통해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인간과 창조주, 인간이 사는 세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체험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논리적 이성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겸손한 영혼은 쿠란의 상세한 해석이나 신학을 몰라도 충분히 종교적일 수 있다고 했고, 수피들의 자기 훈련과 명상의 방법이 적절히 수행되면 대단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했다. 다섯가지 기둥도 올바른 정신상태와 올바른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서 준수되어야만 하며, 그 때 비로소 최후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다. 그는 쉬아의 비의 사상과 철학자들의 합리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순니 주류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지성우월주의와 보수학풍에데 비판을 담고 있었고 주관적 종교체험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종교에 대한 지식 일므 ilm 과 실천적 행동 amal 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지식과 정서, 행동의 인과적 상호작용 주장한 것이다. 이는 순니의 형식주의를 공격함과 동시에 수피적 영적 상태가 이단으로 향하는 것을 방지했다. 알 가잘리에 의해 수피 사상은 순니 신학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수피교단(타리카)

 

수피즘의 교단은 압둘 카디르 알-질라니(1166 사망)와 더불어 시작했다. 그는 한발리파 설교가로 그의 제자들이 형제단을 조직했다. 공식적 이슬람의 교리주의와 율법주의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 무슬림들이 갈구하던 감성적 종교성이 수피교단으로부터 얻어졌다. 수피 교단은 공동예배, 음악행사를 실천했으며 엄격한 스승(피르) 제자(무리드) 관계를 특징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디크르 전통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일정한 양식의 말을 정기적으로 수천 번씩 반복하는 영적 기술이었다. 예를 들면 '알라'라는 단어나 신앙고백문, 주에대한 찬미, 주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식이다. 스승의 의무는 제자에게 그의 영적 수준에 적합한 디크르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성한 명칭을 수천번씩 반복하는 경우 심리적으로, 심한 경우 생리적으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수피 교단의 종교적 실천은 대중운동으로 성장했다. 대중은 교단 창시지의 기일-성인의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 된 '결혼 기념일'-에 열리는 축제(우르스)에 참여했다.

수많은 교단이 압둘 카디르 질라니를 기원으로 하는 카디리야 교단을 모형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카다리야 교단은 현재도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한다. 그 창시자는 49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점에서 금욕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라 쉬코흐(1659년에 처형) 는 무갈제국의 후계자로 카다리야 단원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이슬람과 힌두교의 만남을 제시했다.

리파이야 교단의 창시자는 아흐마드 알-리파이(1183년 사망)이다. 이 교단은 디크르를 큰 소리로 외치는교단이어서 '괴성을 지르는 더비쉬들'로 알려져 있다. 자해행위와 기괴한 기적행위를 주로 실천했다.

수흐라와르디야 교단은 정치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낙슈반디야 교단은 디크르를 침묵 속에 행했다. 쿠브라위야 교단의 창시자 는 나즈무딘 쿠브라(1220/21 사망)로 수피들이 수행 중 체험하는 색깔에 관한 심리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메블레비야 교단은 잘라루딘 루미(1273 사망)의 아들이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활동한 교단이다. 회전무 더비쉬로 알려져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음악적 디크르였다. 하지만 체제순응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도시민, 중상층을 주 추종자들로 삼았다. 벡타쉬야 교단은 쉬아적 요소를 수용했는데 오스만 정예군(예니체리)의 종교적 대들보 역할을 했다. 이 교단은 단순하나 강렬한 음률적 시를 특기로 했고 회합에 여성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치슈티야 교단은 무이누디 치슈티(1236 사망)가 창시했는데 현재 인도에서 가장 활동적 교단 중 하나로 음악과 시에 뛰어나다.

이처럼 다양한 수피 교단들은 이슬람 지역 변두리에서 이루어진 개종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13세기의 수피주의는 몽골 침략과 그로 인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수피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후기 수피주의

 

후기 수피즘의 최고의 거장은 스페인 태생의 이븐 아라비(1240 사망)이다. 그는 메카에서 영감 얻어 [푸투하트 알-마키야](메카의 계시)를 저술했다. 그는 와흐다트 알-우즈드(존재의 융합) 개념(본인이 직접 사용한 용어는 아님)으로 유명하다. 그를 범신론자로 보는 경향도 있었지만 아라비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의심한 적이 없다. 하느님의 본질은 단일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숨겨진 보물이었으니, 알려지기를 원했느니라.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했느니라.",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묘사하는 속성이며,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존재가 객체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하느님이 필요한 반면, 하느님에게는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

 

신비주의의 체계화

 

잘라루딘 루미(1207-사망연도 불명)는 신비주의 신학자였던 아버지 바하우딘 왈라드 사망 후 아버지의 한 제자를 통해 신비주의 전통에 입문했다. 그후 1244년 동년배의 더비쉬 샴수딘 만나 신비적 사랑을 체험했다. 그러나 샴수딘은 루미와의 관계를 시기한 루미의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후 금은세공가 살라후딘 자르쿠브(1258 사망)과의 우정을 나눴고, 제자 후사무딘 첼레비(1284 사망)과 교류했다. 그는 첼레비의 요청으로 26,000 소절에 달하는 신비적이고 교훈적인 이행시 [마트나위]를 남겼는데, 13세기 모든 신비적 관념과 사상 총망라한, 예언자를 찬양하는 내용의 신비주의 시들이었다.

 

수피주의의 특징

 

수피주의는 쉬아파와는 달리 순니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수피즘은 순니 신앙의 엄격함과 울라마들의 냉담한 율법주의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신의 계율을 준수하는데 소홀함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셀주크조와 오스만 제국 통치 아래서는 수피들의 반란이 있기도 했다.

 

쉬아의 분파

 

쉬아파 the Shiites

 

657년 시핀 전투는 이슬람 교리 발전의 출발점이자 여러 종파 출현의 계기였다. Shia는 "알리 추종자의 무리"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무함메드의 직계 자손만이 합법적 칼리프이며 이슬람의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알라는 알리와 그 자손을 후원하며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어서 언젠가는 쉬아파를 승리로 이끌 메시야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또한 알리에게 초자연적 지위를 부여했다. 쉬아파의 교리는 알라와 무함마드와 그의 가르침, 쿠란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쿠란의 오류없는 해설자로서의 이맘의 존재를 믿었다. 쉬아파는 알리에 반대하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지금도 금요예배 의식에서 저주하고 있다. 쉬아파는 우마이야조에 대항한 압바스조의 반란을 지원했지만 압바스조는 쉬아파를 우대해주지 않았으므로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6대 이맘 Jafar al-Sadiq 시기에는 이맘들은 법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순결성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스 nass의 원칙에 입각해 선임 이맘이 다음 이맘을 임명했다. 한편 일름 ilm의 원칙은 권력을 행사하고 규율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지식이었다. 쉬아파에는 메시야 기대가 있다. 이맘 가운데 한 사람이 알라의 명으로 메시야 mahdi로 출현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만큼 이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 쉬아파는 박해나 탄압에 대한 taqiyah(신앙을 감추는 행위)를 인정하며, 순니파와의 적대관계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에 동조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쿠란의 영원성을 믿지 않으나 자유의지는 인정했다. 또한 알라는 정당하며 인간은 오직 자신의 행위에만 책임지면 된다고 믿었다.

 

자이드파 the Zaidites

 

순니파와 가장 비슷한 입장이다. 나스의 원칙이 초자연적 의미 지닌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칼리프로 선출 된 것 당연한 처사였다고 주장햇다. 무함마드에 의한 알리의 후계자 지명을 부정하고, 이맘위는 상의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알리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맘위의 세습권과 이맘의 완전무결성을 부인했다.

 

12이맘파 the Twelvers

 

쉬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파이다. 12대 이맘 무함메드 알-문타자르 Muhannad al-Muntazar에서 유래했다. 알-문타자르는 878년 다섯 살 때 바그다드의 강 상류의 사마라 Samarra의 모스크에 있는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12이맘파는 '숨은 것'으로 이해하며, 마흐디로써 도아올 것이라고 믿음. 그의 대리인은 샤 shah 라고 생각한다. 12이맘파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숨은 이맘에 대한 믿음에 바탕해 있다. 그가 부재중인 동안 그의 신학적 입장은 종교학자(무즈타히드)들에 의해 해석된다고 믿는다. 12이맘파는 이즈마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스마일파 the Ismailites 또는 일곱 이맘파

 

현재는 온건한 집단이다. 과거에는 여러 분파를 파생시켰다. 여섯 번째 이맘의 첫째 아들 Ismail에서 유래했다. 이스마일은 폭음을 이유로 다음 이맘직을 박탈당했는데, 이를 이스마일파는 음모라고 믿는다. 이들은 이스마일은 죽은 것이 아니라 숨었으며 마흐디로 다시 나타날 것이며, 이스마일은 알라의 화신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의 근거를 찾기 위해 쿠란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비의적 교리를 도출했다. 이스마일파는 페르시아나 기독교 및 유대교 배경을 가진 마왈리 Mawali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이들은 정통주의, 칼리프를 부정했고 산발적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에서 파생한 분파들로는 멕카를 공격하고 유혈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 콰르마트파 Qarnatians, 무슬림 통치자들을 암살한 암살단파, 11세기 알-다라지 al-Darazi가 조직한 드루즈파가 있다. 드루즈파는  파티마조의 칼리프 al-Hakim이 알라의 마지막 화신이며, 곧 마흐디로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쉬아파에 속한 모든 종파는 일반적으로 초대에서 3대까지의 칼리프를 거부(타바라)한다. 그 이유는 알리에게 예정된 칼리프 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순니파와의 지속적 분열의 핵심 원인이다.

 

쉬아파 요약

 

쉬아파의 특징은 한편으로는 교의의 정착을 위해 순니파보다 더 광범위하게 철학의 범주 개념과 변증법을 필요로 한 반면, 한편으로는 이맘위에 대한 믿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선결조건을 내세운 대한 다른 모든 종교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매우 과민하여 피해의식 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맘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순교자의 무덤을 성지로 받들어 순례지로 격상시킨 점은 순니파 모두에게 아직까지 반발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쉬아파는 순니파의 신조(알라의 전능성과 쿠란의 영원성)에다 진정한 신앙의 보증자로서 이맘을 세 번째 신조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쿠란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영원하다는 두 번째 신조를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현재 쉬아파가 중심인 국가는 이란으로 사파위조 시대(1501-1722) 이란족 절대 다수가 순니에서 쉬아로 개종했다.

 

이슬람의 주요 특징

 

데르위쉬 the Dervishes

 

데르위쉬란 "문 앞에 오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걸식 행각을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신비체험에 열중했다. 이들은 12세기 이후 조직을 형성했다.

 

카다리야 Qadariya

 

바그다드에서 아브드-알-카디르 알-질라니 Abd-al-Qadir al-Jilani(1077-1166)가 조직했다. 동쪽으로는 자바, 서쪽으로는 알제리까지 영향을 끼쳤다.

 

Rifaiya(Howling Derrishes)

 

12세기 후반 아마드 알-리파이 Ahmad al-Rifai가 조직했다.

 

Maulawiya(Whirling Dervishes)

 

Jalal al-Din Rumi의 추종자들이 조직했다. 의식을 행할 때 시와 음악도 사용했다.

 

극단적 고행을 하는 데르위쉬도 있었고, 평신도도 단체에 수용했다.

 

성인숭배

 

무슬림 초기 문헌의 왈리 wali (복수는 waliya)는 "감정상으로 가까운" 사람을 지칭했고, 종교적 문맥에서는 '알라의 친구'를 의미했다. 수피들에게 왈리는 성인, 즉 알라에게 지핀 사람을 의미한다. 성인은 예언자와는 다르다. 왈리는 알라와의 합일 체험 후 몸소 알라를 보여준 사람이며, 기적 karamat를 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관념은 쿠란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슬림은 무슬림 성인의 묘지를 방문하여 선물 바치고, 기도하며, 축복 barakah를 빈다. 성인의 묘지는 대개 모스크 주변에 있다. 죽은 성인 숭배는 쿠란에 위배되지만 법학자들 대부분은 이런 행위를 묵인하며 스스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는 이슬람 공동체의 의견 ijma가 설득력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성인숭배 풍습은 이슬람 이전의 원시적 관념과 뒤섞여 있었다. 한편 지방 신령들이 성인들 속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한 경우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전문화(불임, 시험, 미친 경우 등등)되었고, 성인의 묘는 주로 샘이나 동굴, 고목 근처에 위치한다. 무슬림들은 그 입구나 주위의 나뭇가지나 창살에 맹세의 천이나, 제물들을 갖다 바친다. 특히 북아프리카는 과거의 풍습과 관련하여 성인숭배가 매우 활발하다. 인도에서는 유서 깊은 힌두교 성소가 무슬림 영묘로 둔갑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인의 묘소 근처에서 행해지는 행위는 주술에 가갑다. 쉐이크의 주 업무 중 하나가 부적 만드는 일이다. 이와 함께 유품 숭배도 성행했다. 예언자의 머리카락은 영험이 있다 하여 선망의 대상이었다. 수년 전 카슈미르 지방의 스리나가에서 있었던 예언자의 머리카락 도난 사건은 심각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언자나 알라의 발자국도 신성시되었다.

 

무슬림의 축제와 절기

 

축제

 

라마단 금식 기간 마지막에 거행하는 소축제 Id al Fitr와 대축제(희생의 축제) Id al-Adha가 있다.

 

절기

 

무하람 Muharram은 신년 초에 행하는 것으로 카르발라의 야간 전투에서 죽은 알-후세인과 그의 아들을 추모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예언자의 출생을 기념하는 마울리드 안-나비 Mawlid an-Nabi, 예언자의 밤 여행을 기념하는 라일랏 알-미라즈 Lailat al-Moraj가 있다.

 

현대의 이슬람

 

보수주의와 복고주의

 

18세기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Wahhabi 운동

 

사우디 가의 지원으로 일어난 복고주의로 초기 한발리 학파와 14세기 이븐 타이미야 Ibn Taymiya의 반수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 Ibn Abd al-Wahhab가 창시했다. 그는 무함메드와 쿠란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무함메드 사후 메디나 공동체에서 결정된 사항만 제외하고 ijma를 통해 결정된 모든 수정적 요소를 거부했다. 수피주의를 혐오했으며, 부족간 갈등을 저주하고, 술,담배를 금지했으며, 무슬림의 평등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덤이나 모스크 예배의식에서 수피의 요소를 배격했고 성인숭배도 다신교로 간주하여 배격했다. 집과 의복을 간소화했고, 농담, 음악, 금 장식등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 같은 게임도 금지시켰다. 와하비 운동은 북아프리카,인도,동부인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피

 

개인적 종교체험,직관,성인숭배의식과 같은 특유의 종교의식을 계속 전파했고, 이란,터어키에서 왕성하다.

 

예언자운동과 혼합주의

 

아마디야 Ahmadiya

 

인도에서 미르자 굴람 아마드 Mirza Ghulam Ahmad of Qadiyan(1908 사망)가 창시했다. 그는 19세기 말 마흐디로 자처했는데, 성서를 읽은 후 자신이 재림주라고 생각하고 1904년에는 크리슈나의 화신이라고 선언했다. 평화주의이면서 열렬한 선교를 했지만 여러 분파로 나누었다. 그중 Qasiyani 지파는 의도적 혼합주의를 표방했다.

 

바하이 Bahai

 

쉬아파의 미르자 알리 무함메드 Mirza Ali Muhammad는 1844년 자신이 무슬림들을 위한 "문"이라 선포하고, 자신을 바브-우드-딘 Bab-ud-Din(신앙의 문)이라고 하여, 그의 추종자들은 Babis라 불림, 그는 후에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 개혁운동을 완성시킬 것이라고 주장, 1850년 사회질서를 해친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그의 추종자 Bahaullah(알라의 영광)가 자신이 바브가 말한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신의 통일성과 모든 예언이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견해를 지녀 종교통합을 주장했다. 인류는 신 아래 하나이며 모든 사람이 바하이교를 신봉하면 신을 통해 인류는 통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급진적 예언자 운동으로는 미국의 흑인 무슬림 운동 the Nation of Islam이 있다.

 

이상의 이슬람 이야기는

이슬람이 종교적 신념의 복합체가 아니라 삶의 양식이며, 예술, 철학, 문학을 포함한 포괄적인 문화복합체임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J.B Noss, 윤이흠 역, [세계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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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개요] 이슬람 by 무슬림-3


조직

 

움마(공동체)는 신자들로 구성된다. 심판의 날 무함마드가 "움마티 움마티"(저의 공동체를, 저의 공동체를(구해주소서))라고 외치면서 공동체를 위한 샤피(중재자)로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슬람의 확산

 

무함마드 사후 예언자의 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으로서 마지막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후계자 Caliph는 무함마드로부터 예배와 전쟁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일, 계시에 따라 판결하는 일을 집행한다.

 

아부 바크르와 아라비아의 통합

 

무함메드 사후 칼리프 선정 문제 논란이 있었다. 무함메드의 가까운 동료들인 Muhajirin(이주자) 또는 Ansar(돕는자)들은 자신들이 칼리프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주의자들은 계승의 세습 원칙 지지하며 파티마와, 사촌이며 사위인 Ali지지했고, Ummayads(무함메드 부족의 지도자들)는 자신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nsar 들이 주도권 잡고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무함마드 사후 자유분방한 베두인들이 이슬람의 조세제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아부 바크르가 진압했다. 아부 바크르(632-634 재임)는 2년간 칼리프로 있다가 사망했다.

그 후 전투를 통한 부족 통합이 이루어졌고, 통합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 공격이 이루어져 시리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틴 남부까지 진출했다.

 

우마르와 정복

 

두 번째 칼리프 우마르(634-644 재위, 이븐 알-하탑)는 Khalid ibn al-Walid를 보내 635년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정복했다. 이 정복은 헬레니즘 지배체제에 불만 가졌던 지역민의 협력에 힘입었다.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640년에는 가이사리아를 정복했다. 639-641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1세기 후에는 스페인까지 진주했다. 동쪽으로는 사산조의 페르시아까지 정복(640-649)했다.

승리의 원인은 우선 피정복지 거주자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내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능수능한한 기마술과 재빠른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사들의 강한 열성과 종교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리품의 5분의 4는 전사들의 몫이며, 전투에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권력투쟁

 

정복으로 인한 아라비아의 무슬림들은 경제적 부를 누렸다.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이 가열되었다. 우마르가 기독교인 포로에 의해 644년 살해된 후 정치적 분쟁이 시작된다. 무함메드의 동료이자 사위인 우스만 Uthman(우스만 이븐 아판)이 칼리프로 선정(644-656)된 후 대다수 고위직에 자기 부족원(우마이야 가 : 원래 우마이야가는 무함마드 탄압에 앞장섰던 가문) 임명으로 물의를 빚어 반대파 무슬림들에 의해 메디나에서 656년 쿠란 읽고 있던 중 살해된다. 이 우스만은 쿠란의 편집 완결지었다.

Ali(무함마드의 백부 아부 탈립의 아들이자 파티마의 남편)가 656년 다음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그는 우미이야가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대결에서 피동적 자세를 취하다 반대파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시핀 전투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무아위야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수용해서 격분한 무슬림 일파(이들이 하와리즈파(이탈자들))가 분리하고, 661년, 하와리즈파 무슬림이 알리 살해한 것이다.

 

개괄적 정치사 661-1900

 

알리 살해 후 우마이야 부족이 칼리프직 장악하고 무아위야가 자신을 알리의 계승자라고 선포(661)하고, 우마이야조 the Ummayad caliphate를 설립했다. 이것은 아랍적 통치술과 기사도 정신이 주도한 왕조였다. 우마이야조 통치자들은 시리아에 거주했으므로, 메디나는 독실한 신자들이 모이는 도시가 되었다. 691년 우마이야조 무슬림 군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출했고, 711년에는 지브랄타 해협을 건넜다. 그리고 같은 해 트란스옥시아나 지방(파키스탄 남부)과 인더스 계곡 하구 신드 지방을 정복했다.

680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즉위한다. 이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패권에 도전했다가, 정월 10일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 전투에서 살해 되었다. 쉬아파는 오늘날까지 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고, 이 전투에 대한 추모에서 마르티야(悲歌)가 생겨났다. 쉬아파는 자기 몸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추모행렬, 수난극 공연을 하고 있다.

한편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메카에서 칼리프 도전자 나타났는데, 무함마드의 동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684 사망)가 우마이야조에 반기를 들었다. 알리의 당파(쉬아트 알리)가 강력한 정치세력 형성하고 있던 이라크에서는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다. 알리 가문의 인물이 장차 돌아올 것이라는 사상이다. 아랍 정복자들과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 사이의 갈등이 이라크에서 싹텄다. 쿠란이 보장한 신자들 사이의 평등을 요구했고, 이러한 흐름이 하나의 정치적 운동 형성하고, 칼리프 위는 무함마드 가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라크, 이란 지방의 친 알리 정서를 이용한 혁명을 성사시킨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예언자의 삼폰인 압바스의 한 후손에게 넘김(749년)으로써 압바스조 the Abbassids가 우마이야조를 스페인으로 몰아내고 바그다드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알리 가문 추종자들은 다시 실망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움마야드 후손들이 독자적 칼리프제를 확립했다. 우마이야 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도주하여 756년 그곳에 왕국을 세우고 아랍문명을 꽃피웠다. 스페인 우마이야 왕국은 압두르 라흐만 3세 재임시(921-961)에 전성기를 이룬다. 이 시기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 사이의 문화적 협력 이루어졌으나, 그 후 수많은 소왕국으로 분열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 이곳을 지배했다. 존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슬림 왕국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바누 아흐마르 왕국뿐이었다.

압바스조는 종교적 율법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우마이야조가 아랍적었다면, 이들은 이슬람적 제국을 지향했다. 756년 바그다드 천도 이후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이 침투했다. 9세기 말 칼리프 권력 쇠퇴하게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터키 출신 용병과 전쟁 노예(맘룩)이 정부를 보호하다 결국 각기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바그다드의 전성기는 천일야화로 알려진 하룬 알 라쉬드(786-809) 재임시였다. 하룬의 아들 마문(813-833)은 그리스 철학서와 과학서적의 번역 사업을 장려했다. 후에 이 학문적 유산이 스페인 번역사들의 소개로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

압바스 제국 변방 영주들이 독립하여 각각 통치 지역을 차지했다. 이들은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 사용한 통치자는 페르시아계 쉬아파 왕조인 부이조를 건국한 무이즈 앗-다울라로 945년 바그다드의 실질적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칼리프는 상징적 존재로만 명목을 유지했다.

이집트에서는 두 개의 터키계 왕조가 압바스가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 파티미조에 의해 969년 멸망했다. 동쪽에서는 터키계 술탄 가즈나의 마흐무드가 인도, 아대륙으로 확장되었다. 1026년 라호르는 인도 가즈나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 문명이 벵갈, 데칸 지역까지 진출했다.

아랍어가 이슬람 세계의 신학 용어로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발칸반도에서 벵갈만에 이르기까지 주로 페르시아어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그후 무슬림 제국이 여러 자치지역으로 분열되며 쇠잔 시작했다. 팔레스틴과 이집트 인근에서는 무함메드의 딸 파티마에 연원을 둔 시아파 Shiite의 파티마조 Fatimid가 909에서 1171까지 통치했다. 11세기에 셀주크 터어키인들 Seljuk Turks가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장악 후 이집트, 비잔티움 국경까지 진주했다. 1055년 셀주크족 영주 투그룰 벡은 쇠퇴한 압바스 칼리프의 수호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철저한 순니 무슬림으로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1071년 비쟌틴군을 대파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진출할 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십자군이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무슬림의 반격이 이어졌다. 순니파 Sunnute 살라딘 Saladin이 이집트 파티마조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1187)했다.

1220년 몽골인들이 침입 이슬람 문명 파괴하고, 압바스 제국을 굴복시켰다. 마지막 칼리프는 1258년에 목숨을 잃고, 바그다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몽골인들은 이집트의 맘룩조 the Mamelukes에 의해 추방되고, 이들은 1세기 남짓 이라크와 페르시아 등지에서 살다가 주로 수피즘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몽골 세력 쇠퇴 후 4개의 이슬람 제국이 출현했다. 옥서스 Oxus 강 분지의 우즈백조 Uzbek, 페르시아의 사파이조 Safawi, 인도의 무갈조 Mughal, 소아시아의 오토만조 Ottoman가 그것이다.

13세기 소아시아에서 흥기한 오토만 터어키인들은 1453년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점력후 16세기에는 비엔나까지 진격하였다가 퇴각,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장악한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존속했다.

 

초기의 무슬림 사상

 

Hadith의 편찬

 

하디스는 무함메드 자신, 또는 동료들이 보고한 무함메드의 언행 수집한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전승들이 무함메드 생존시 확립된 관습, 관례, 선례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무함메드 사후 2세기가 지나면서 신빙성 있는 전승(순나)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기준은 전승의 전달자가 지닌 권위에 의해 순수성, 정당성, 빈약성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어었다. 이스나드(연결고리)는 전승 자료 전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무함마드나 그의 동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를 통해 여섯 개의 전승집 편찬 후 보편성을 인정했다. 예언자의 전승은 그 자체로 일종의 쿠란 해설서가 되었다. 이중 가장 권위있는 것은 페르시아 무슬림 알-부크하리 al-Bukhari(870 사망)의 전승집이다. 7,300여 편을 선별했는데 실제 숫자는 약 3000편이었다. 부크하리와 동시대 인물 무슬림(875 사망)도 비슷한 작업을 했다. 이 두 학자가 작성한 하디스 모음은 사히흐(건전한, 흠없는) 하디스로 불리우며 쿠란 다음가는 권위를 누렸다. 이 외에도 귄위있는 전승집들이 다수 존재(Ahmad ibn Hanbal의 [무스나드]Musnad 등)했다.

하디스는 '일화', '이야기'의 뜻으로 다양한 하디스가 나왔다. 9세기에는 수만 편의 하디스가 유통되었다. 현대 무슬림 중 일부는 쿠란의 절대적 권위 강조하며 하디스를 부정하기도 한다. 순나에 반하는 것은 비다(혁신)로 불리우며 공동체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첫 번째 논쟁

 

확고한 정통의 기준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질문들이 있었다. 죄를 짓고도 여전히 무슬림일 수 있는가? 신앙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허용될 수 있는가? 정치적 동기로 편법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이슬람의 원칙을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하는가, 알라의 뜻에 맡기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등이다.

분리자들, 암살자들 the Kharijite은 칼리프는 꼭 어떤 집단에서 나올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움마야드 부족은 극단적 청교도 운동을 탄압했다.

the Murjites는 추후의 판정을 옹호한다. 진정한 무슬림과 그렇지 않은 무슬림의 판단은 알라만이 할 수 있다. 이들의 입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Sunnis와 Sharia

 

이슬람의 확산으로 인해 주로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에서 복잡한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을 수립하게 된다. 우선 메디나에서 무함메드가 했던 행동, 실천 sunna,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에 의존하고, 이것이 불충분한 경우 무함메드 죽은 직후의 sunna와 메디나 공동체의 의견 ijma 참조하며, 그래도 결정이 안 날 경우 쿠란이나 하디스의 선례에 명시된 원칙에서 유추 qiyas해서 적용하거나,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사유(라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 아래 행동하는 무슬름들을 순니파 Sunnis라고 부른다. 일반적 입장 결정시 순니파들은 알라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한 법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법을 지칭하는 sharia는 종교의 진정한 길을 의미한다. 대신 일반적인 법 지칭은 fiqh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ulama (학자들)는 법 준수를 감시한다. mufitis (법학자)는 재판관(qadis)의 법적 견해를 조정한다. 쿠란에 합당한 법적 결정 불가능할 경우 이성과 상식 ijtihad에 의해서 결정한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계시와 전승을 연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이슬람 법학파

 

하니파학파 the Hanifite

 

법학적 측면에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페르시아인 Abu Hanifa(767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시되었다. 이라크의 상황이 무함메드가 살던 상황과 유사한 경우 쿠란 그대로 적용하고, 다를 경우 유추해서 적용했다. 다른 학파에 비해 인간의 사유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더 넓게 열어놓았다. 유추에 의한 결정이 일반적 정의에 어긋날 경우 공공이익을 위한 판단 istihsan에서 나오는 '신중한 의견' 또는 '인정된 정의'를 참고로 다시 결정했다. 압바스조, 오스만 터어키가 이들의 입장을 따랐다.

 

말리크 학파 the Malikite

 

메디나에서 말리크 이븐 아나스 Malik ibn Anas(753-795)가 창시했다. 쿠란과 하디스에 의해 법, 의식 해석하고, 애매한 경우 메디나의 '합의된 의견' ijma에 의존했다. 하디스의 정밀한 분석과 엄정한 비판을 통해 신뢰성을 고양시켰다. 해석이 어려운 경우 유추법 사용하고, 이것이 ijma와 상충할 경우 공공이익을 감안하여 결정했다. 이 학파는 보수적 성격을 가졌으며, 꾸란에 배치되는 예언자의 관행을 과감히 배척했다. 현재 북아프리카, 남부 이집트, 동부 아라비아에서 지지되고 잇다.

 

피 학파 the Shafiite

 

법학을 체계화한 학파로, 페르시아 출생 아랍인으로 쿠라이쉬 부족 출신 알-샤피이 al-Shafii가 창시했다. 그는 말리크의 제자로, 독자적인 법률과 전통 관습의 조화로운 절충을 통해 합리적 법학 이론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 학파는 법의 네 근원을 구분한다. 알라의 계시 쿠란, 예언자의 언행 하디스, 법학자들에 의해 표명된 무슬림 공동체의 여론 ijma, 이성에 의한 유추 qiyas가 그것이다. 그중 끼야스 적용에 명백한 규정과 한계를 두었다. 네 근원의 배열에서 이성의 사용을 부차적 요소로 두었다. 쿠란과 하디스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했는데, 때로는 하디스에 더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독자적 해석'도 거부했고 이즈티흐산(선호)을 부정한다. 현재 동부 인도, 북부 이집트(카이로), 동부, 남부 아프리카, 남부 인도에서 지지되고 있다.

 

한발리 학파 the Hanbalite

 

아흐마드 이븐-한발 Ahmad Ibn Hanbal(855 사망)이 창시했다. 그는 알-샤피이의 제자이지만 '독자적 해석'에는 스승보다 더 비타협적인 순수한 전통주의자였다. 꾸란과 예언자의 관행, 즉 순나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현재까지도 샤리아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신앙공동체로 지속되고 있다. 끼야스를 샤리아 법원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가장 배타적 입장을 취했다. 무타질라파에 반대했는데, 무타질라파가 쿠란의 창조성을 주장할 때, 이에 단호히 맞서 쿠란의 영원성을 주장했다. 첫째는 쿠란, 둘째는 하디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Hijaz와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서지지되고 있다.

 

기타

 

자히르 법학파

 

4대 법학파에는 들지 못하나 중요한 학파이다. 쿠란의 외면(자히르)적 의미를 강조했다. 법률해석에서 꾸란과 순나의 언어적 의미에 크게 의존한다. 다른 학파의 견해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 고립적 해석태도 견지한다. 그러나 이성, 유추, 유효 istishab, 모방 taqlid 반대한다. 이 학파는 이라크에서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909 사망)가 창시했고, 이븐 하즘(1064)이 발전시켰다. 이븐 하즘에 의해 유독 스페인에서 성행했다. 후에 신지학적 수피즘의 대가 이븐 아라비(1240)에도 영향을 미쳤다.

 

법학파들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

 

마드하브(법학파) 통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견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징표라는 하디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법학파 간 차이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다.

 

이즈마

 

11세기에 마드라사(신학교) 설립하여 네 개 법학파 모두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이즈마(공동체의 합의) 정신에 따랐는데,이즈마는 쿠란, 전승, 유추에 이어 네 번 째 法源이 되었다. 초기 이즈마는 다른 지역의 관례나 전통 받아들여 새로운 방안 모색하는 창조적 역할 했으나,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경직화되어 변화 억제 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즈티하드(法源)의 문은 닫혔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 결과 이즈마가 고착되며 적응력울 잃기 시작했다.

 

샤리아(넓은 길, 곧은 길)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신자들의 의무조항으로, 이것의 유일한 입법자는 알라이다. 이 샤리아는 법전화된 적이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종교적 가르침이 지닌 실천적 면을 형성하며, 또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세세대대로 전수되었다. 종교판사(카디)는 그 이행여부를 감독했고, 무프티는 어떤 행위가 율법에 준하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적 소견서(파트와)를 제출했다.

 

피크(통찰)

 

샤리아를 다루는 학문으로 신학에 바탕을 두고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샤리아 중 사법적인 부분은 1869년 오스만 제국의 메젤레 속에 법전화되었다. 모든 행위를 다섯 범주로 분류했다. (의무적 행위, 바람직한 혹은 추천할만한 행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행위,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금지된 행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쿠란은 동정녀 출산을 인정힌다. 예수는 무함마드 이전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인류의 병을 고치는 치유자였고, 신성한 지위를 탐하지 않는 사랑과 가난과 겸손의 사표였다고 여긴다. 마리아는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네 여인 중의 하나로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쿠란은 인정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이 없으므로 대속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의 예수 본성에 대한 문제는 이슬람의 교리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예수의 호칭 로고스는 쿠란에 대해서 영향을 미쳤다. 즉 쿠란을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으로는 쿠란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책이 되었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함마드를 움미(이교도들에게 보내진 예언자 라는 의미의 용어인데, 문맹이라는 의미로 해석)라는 칭호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외부적 지식으로 때묻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쿠란에 대한 존경이 무함마드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와리즈파(하라자-떠나다,이탈하다-에서 유래)

 

알리에 대항했던 집단이다. 알리가 하느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술책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반발했다. 행위가 없으면 신앙도 없다는 입장 고집하는 윤리지상주의자들로 선행에 의해 신앙이 커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중죄를 범한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했다.

 

순니파(순나와 자마아의 백성들, 신자들의 무리)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집단으로 주로 무르지아파(판단을 유예한 사람들)에 의해 견지되었다. 이 집단은 신앙심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앙은 행위를 통해 증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불신자가 아니며, 따라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타질라파 the Mutalzilites

 

무타질라파는 히즈라 1세기 경 하와리즈파와 무르지아파 사이에서 생성했다. 이 집단은 헬레니즘의 철학적 요소를 도입하여 정의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이슬람을 해석했다. 압드 알 자바르 Abd al-Jabbar(936-2035)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중죄인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즉 중죄인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적 문제에서는 이성에 호소했지만,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카다리야파(결정하다, 카다르에서 유래)와 입장을 같이 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된 관심사는 이란으로부터 들어온 이원론적 영향 막아내는 것이었다. 특히 마니교의 침투에 저항했다. 이러한 이원론에 맞서기 위해 하느님의 유일성(타우히드) 믿음을 공식화했다. 타우히드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절대 불가함을 의미한다. 쿠란의 신인동형적 용어(예 : 하느님의 얼굴) 등은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아들)를 강조했다. 즉 "하느님은 정의롭게 행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선을 악으로 되갚으시지 않는다. 동물조차도 이 세상에서 당한 부당함을 다른 세상에서 보상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했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운 반면, 하느님은 자신의 정의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신학적 위험에 직면했다.

무타질라파는 움마야드 칼리프 시기 시리아, 이라크에서 출현했다. 이들은 그리이스,유대교,기독교,조로아스터교의 사상에 친숙했던 무슬림들이다.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합리적 논증 kalam을 수행했다. 쿠란에 나오는 알라의 "약속과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알라의 도덕적 요구에 대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쿠란에 근거한 신학적 교리도 이성의 시험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이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어떤 교리도 이성적 논리에 적합하지 않으면 진리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성은 알라의 정의에 대한 통일성을 주장하게 하며, 알라는 인자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와야 한다는 내적 필연성 보여준다. 그러나 쿠란이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는 부인

했다. 무타질라파는 따뜻한 인격적 신앙을 지적 사변으로 대체했다고 평가됨

그후 무타질라파는 정치적 이유로 압바스조 칼리프 al-Mamum의 지원을 받았다. 827년 알-마뭄은 쿠란의 영원성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특히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박해받았다. 그러나 20년 뒤 새로운 칼리프는 오히려 무타질라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성적 해석방법으로 쿠란의 신인동형론을 비판했고, 알라의 시도나 특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알라의 통일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쿠란의 묘사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합리적 설명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결과였다.

무타질라파는 10세기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시아파를 통해 이들의 사상 이어지고, 진보주의자들은 무타질라파의 입장을지지했다. 이들의 쇠퇴는 보수적인 순나의 옹호자들이 무타질라파 논박을 위해 합리주의적 방법을 채택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븐 한발의 강력한 전통주의의 가르침과 아샤리를 정점으로 한 새로운 신학이론의 발전이 있었다. 아샤리는 '논리적 원칙' ilm al-kalam에 근거한 이성적 논쟁 방식은 많은 법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확산되었다. 무타질라파는 쉬아 신학의 형성에 공헌한 반면, 순니 세계에서는 영향력이 소멸했다.

 

알-아샤리 al-Ashari의 사상

 

아불 알-하산 알-아샤리 Abul al-Hasan al-Ashari는 히즈라 후 250년 경 바그다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샤피 학파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무타질라파의 가르침 배우며 옹호하다 40세 경 갑자기 이들과 결별했다. 그의 사상적 의의는 신학과 법학의 접목이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알라의 일곱가지 신적 속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든 삶, 모든 지식, 힘, 의지,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은 알라의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를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일의 원인은 알라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전통 교리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내면과 외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알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쿠란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알라를 생각하에 결정한 것도 알라이다. 쿠란의 천국,지옥 표현도 실재에 대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즉 천국을 믿는 사람은 실제로 옥좌에 있는 알라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bi-la kayf 그저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라의 모습을 피조물의 모습과 비유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쿠란의 말은 영원하나 그 글자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알라는 선과 악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인간의 행위는 미리 예정되어 있지만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죄나 정의를 얻으며, 그리하여 좋건 나쁘건 미리 예정된 행위를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 중 하나는 '획득이론'이다. 인간의 행동은 비록 신의 뜻으로 창조된 것이지만, 그 책임은 인간이 획득한다는 주장이다.

알-아샤리는 이븐 한발의 신학이론에 토대하여 순니 교의를 확립했다. 첬제, 자구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경직된 꾸란 해석에서 벗어나 그것이 담고 있는 신의 속성과 영혼의 말씀으로 꾸란을 해석했다. 이는 이성보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와 숙명론과 관련하여 획득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定命 사상 개념이다. 그 외에도 중재를 위한 신학의 전형을 제시했고, 하느님은 인간적 사고의 범주를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샤리파의 견해에 따라 신앙의 강령은 점차 딱딱해졌고, 신학적 용어도 스콜라식으로 세련되어 갔다. 이런 입장에 대해 한발리 학파와 샤피이 학파 일부가 반대했고, 말리키 학파는 신학적 논쟁을 경원시했으며, 알 모라비 왕조는 신학의 가르침을 금지하기도 했다.

 

알-마투리디 Al-Maturidi(944 사망)

 

알-마투리디는 인간의 죄는 알라의 뜻에 의해 생기지만 알라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알라는 불신앙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불특정적'으로 의도했다. 그러나 알라는 인간에게 불신앙을 명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교도로 하여금 신앙을 갖도록 명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자유의지가 신의 전능과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을 제기했다. 인간의 행위가 신의 권능에서 비롯되지만, 인간의 죄악조차도 신의 즐거움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쿠란의 비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발음은 창조된 것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하나피 학파를 중심으로 수용되었고, 셀주크조 세력의 서진과 함께 크게 확산되었다.

 

아샤리 신학과 마투리디 신학의 관계

 

경쟁, 적대관계는 형성되지 않았고, 후일 양자는 순니의 틀 속에서 조화롭게 수용되었다.

 

메디나 학파의 공헌과 순니 신학의 형성 배경

 

신학의 확립과정에서 아립 이념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정치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메디나 학파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라는 종교이론과 초기 칼리프들이 추구했던 도덕적, 종교적 결속을 바탕으로 이슬람 신학의 주류로서 정통성을 보존했다. 한편 세속적 노선에 대한 종교적 반대와 정치적 저항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메디나 학파는 초기 이슬람 교회 조직에 실용적이고 경건한 기풍을 심어주고,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 성격으로 굳어지게 했으며, 이슬람 종교를 정치조직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종교를 정치권의 상위에 두게 했다.

 

무타질라파의 성장과 이븐 한발의 신학적 논쟁

 

무타질라파는 신학적으로는 이슬람에 헬레니즘적 해석주의를 접목했고, 정치적으로는 히즈라 1세기 말경의 극단적 두 사상적 조류의 중도를 표방하고 등장했다. 극단적 교조주의와 무조건적인 실천주의를 주장하던 카와리즈파의 지나침과, 정치적으로 순응하면서 행위보다 내적 신앙만을 고집하는 무르지아파의 윤리적 방종에 대한 반작용에서 시작한 것이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이슬람 신학에 처음 도입했으며 압바스조 칼리프들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했다.

무타질라파의 신학은 호교론적 입장이다. 신의 개념에서 신인동성론의 요소를 제거했는데, 이 입장은 알라의 인격적 모습에 대한 설명에서 실패하여 신자들의 지지 얻지 못했다. 한편 이성과 정의의 개념을 통해 알라의 절대성에까지 이 개념을 적용시켰다. 그것은 신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인간 이성의 산물과 일치시키는 결과였다. 이 때문에 정통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꾸란의 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꾸란은 신이 창조한 말씀이고, 태초부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예언자와 함께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순니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순니학자들은 꾸란을 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하면서 꾸란의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븐 한발(780-835)은 꾸란의 영원성 설파하며 무타질라파를 비판했다. 그는 합리적 방법, 그리스철학의 영향 받은 이원론적 철학을 거부했으며, 하디스를 추종하는 보수적 노선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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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개요] 이슬람 by 무슬림 -2

 

신조 iman

 

1.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없다. la ilaha illa Allah

 

신의 인도에 관한 해석의 문제에서, 쿠란의 어느 부분은 자유의지를, 어느 부분은 예정론을지지한다. 무함메드는 20여년 동안 엑스타시 상태에서 말을 하였던 예언자였으므로 체계적 신학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Sunni들은 쿠란이 예정론의 입장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알라의 방법은 무함메드와 쿠란, 천사로 여겨졌다.

 

2. 무함메드는 알라의 사자다. Muhammad rasul Allah

 

무함메드는 예언을 완나성시킨 마지막 예언자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함메드도 인간이다. 기적, 신비한 성만찬, 성직자 임명 등을 하지 않은 완전한 인간이었다.

 

3. 쿠란

 

쿠란은 인류에 대한 알라의 마지막 말이다. 유대,기독교의 경전은 인간이 수정하고 오염시켰으므로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3. 천사

 

우두머리 천사는 가브리엘로 충실한 천사, 성스러운 천사로 묘사되었다. 알라는 일곱 번째 하늘 옥좌에 않아 있는데, 천사들이 그를 보좌한다. 악마는 타락한 천사이며 저주받은 유혹자이다.

 

4. 최후의 심판

 

종말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나 기괴한 자연현상 일어나고,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일어나 알라의 최후심판대 앞에 모여들 것이다. 오른편의 신앙심이 돈독한 자들은 낙원으로 간다.

 

윤리

 

여자에게 좀더 높은 지위를 인정했다. 술과 도박을 금지했고, 평등, 약자 보호, 음식 금기 등이 있었다. 이는 더 나은 도덕적 생활을 위한 윤리였다.

 

종교적 의무 : 다섯 기둥 al-Arkan

 

1. 신앙고백 Shahada(샤하다)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메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La ilaha illa Allah ; Muhammad rasul Allah. 이 말은 쿠란에 있지 않다. 이슬람의 핵심을 요약한 말이다.

 

2. 기도, 예배 Salat(페르시아어, 터키어로는 나마즈)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가는 첩경은 예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 다섯 번 기도(동틀녁, 정오, 오후3시, 해질녁, 어두워진 후 또는 잠자리 들 때)하는데, 이는 쿠란에는 없으나 무함마드 생전이 관례가 된 것이다. 재계의식 후 무릎깔개를 펴고 서서 기도후,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멕카 향해 절을 한 후 알라를 찬미하고 복종을 맹세, 다시 서서 알라를 찬미, 그리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리면서 알라를 찬미, 그 후 경건히 앉아서 간청, 마지막으로 다시 엎드린다. 그 동안 "알라는 가장 위대하다" Allah akbar 낭송한다. 매일 올리는 예배는 숭배와 겸손의 행위이다. 금요일은 정오나 해질녁 imam의 인도 아래 공중기도를 한다. 이 때에는 두 부분으로 된 짧은 강설(후트바)을 포함한다. 후트바는 보통 쿠란이나 하드스에 언급된 덕담과 위정자를 위한 기도로 구성된다. 여성은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예배의 부름 아단이 있으면 신자들은 세정(정화)하고 참여한다. 타하주드는 밤을 새워 드리는 예배로 의무사항은 아니다.

예배 끝내기 전 개인적 기원 올릴 수 있다. 예배의 정화하는 힘에 대한 믿음이 크다. 하루에 다섯 번씩 죄를 씻어내는 물줄기에 비유한 예언자들도 있었다. 정해진 시각의 예배는 정확성, 청결성, 공동체의 평등함 참여의식을 일깨운다. 예배의 장소인 마스지드(꿇어 엎드리는 곳)에서 모스크 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모스크는 돔 구조물과 높은 미나렛으로 구성된다. 민 바르(연단)에는 그림 장식이 없고, 대신 아라베스크 문양, 글씨 장식이 발달했다.

 

3. 자선 Zakat(구휼세)

 

원래 자선을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하느님에게 해 드리는 대부금으로 간주되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자발적 선물이나 자선금으로, 액수는 율법에 의해 산정되어 있었다. 현재 무슬림 국가에서는 개인이나 가족이 1년 번 수입의 2.5%를 자카트로 낸다.

 

4. 라마단의 달에 행하는 단식

 

이슬람 음력(354일)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는 해 뜬 후부터 해질녁까지 음식, 음료수 먹을 수 없다.  해진 후에는 다음날 단식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과 음료수 먹을 수 있다. 단식 하는 사람을 이를 지키겠다는 니야(다짐)을 매일 아침 새롭게 해야 한다. 여행자, 노인, 임산부, 유모, 환자는 단식 지킬 필요가 없다. 다른 날 모자란 만큼 단식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 제공하는 자선행위 등을 통해 면제받아야 한다. 전시에는 단식 지킬 필요가 없다.

 

5. Haji

 

일생중 한 번 모든 무슬림은 멕카를 순례해야 한다. 성스러운 달 Dhu-al-Hijja에 카바의 巡行과 대,소순례, 대축제에 참가한다. 카바의 순행은 검은 돌에서 지작해 건물을 세 번은 빨리, 네 번은 천천히 돌며, 매번 남동쪽 모퉁에서 멈춰 검은 돌에 입을 맞춘다. 소순례(움라)는 카바 주위를 순회하는 의례, 계곡의 양편 언덕인 Safa와 Marwa 사이를 어깨를 흔들며 빠르게 일곱 번 왕복(하갈의 물 찾는 행위 흉내내는 것)하는 의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대순례를 위해 먼저 정화의례를 한다. 남성들은 삭발, 이흐람이라는 옷 걸침, 여성은 몸매를 감출 수 있는 허름한 옷을 걸친다. 성스러운 달의 여덟 번째 날, 멕카 동쪽 9마일 Arafat로 이동하고, 도중의 Mina에 정오에 도착 후 밤을 샌다. 다음날 아라파트 평원에서 의식에 참여하고 명상, 천천히 걷는 의식을 수행한다. 해 지면 소란하게 멕카로 돌아오며 도중의 Muzdalifa에 달려가 노천에서 다시 밤을 샌다. 해 뜬 후 미나로 가며 산 비탈길 세 장소에 일곱 개의 조약돌 던지며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전능하다" 라고 외친다. 이 대순례 후 대축제에 참석하여 제물을 바치고 함께 먹고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 다음 3일 동안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키면서 먹고, 떠들고, 즐겁게 놀고, 마지막으로 멕카로 돌아와 카바를 한 번 더 돈다. 성지순례는 건강하고 빚을 지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경우에만 수행한다. 순례 중 죽은 사람은 샤히드(순교자)로 간주된다. 메카 순례는 이슬람 신학, 신비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슬람 세계의 개혁운동도 성지순례에 의해 점화되었다. 멕카 방문과 함께 메디나의 예언자 영묘(라우다) 방문도 관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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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개요] 이슬람 by 무슬림 -1


이슬람

 

Muslim이란 '복종하는 자', '이슬람에 자신을 봉헌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Islam은 '승인하다', '복종하다', '자신을 봉헌하다'는 동사의 부정형에서 파생한 명사로 순종, 복종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쿠란을 최종 계시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사의 자료는 Hadith(전승집), 예언자의 전기로 구성된다.

 

무함메드 이전의 아랍 종교

 


인종과 경제적 상황

 

아랍인은 셈어를 사용하는 족속이 다수이지만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함메드 당시에 도망해온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서부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있었으며, 대상들의 교역로가 발전하고 있었다.

 

종교적 상황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종교는 원시 셈족의 사막 신앙에서 발전했다. 남부 아라비아는 바빌로니아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月神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지방신을 숭배했고, 멕카에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세 여신 숭배가 있었다. 그 신들은 母神 알-라트 al-Lat, 운명의 여신 알-마나트 al-Manat, 비너스의 배우자이며 새벽별을 상징하는 알-우즈자 al-Uzza로, 이들 모두는 알라의 딸들로 믿어졌다. Allah는 창조자, 지고신으로, 무함메드의 부족 Quraysh가 숭배한 신이다. 이들은 상위신 외에 천사와 여러종류의 靈魔 jinn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천사들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유익한 존재로 여겨졌고, 영마는 아담보다 2천년 먼저 창조되어 대부분 악의 근원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라비아 전역, 특히 베드윈족 사이에서는 자연 숭배가 보편적이었다.

 

멕카 Mecca

 

가장 성스러운 신전 중 하나인 Kaba가 있는 곳이었다. 이 안에 있는 거대한 운석이 숭배의 대상이다. 카바 근처의 성스러운 우물 Zamzam(하갈과 이스마엘에 이곳에 왔다는 전설)도 숭배의 대상으로 소순례 Lesser Pilgrimage가 행해졌다. 카바 안에는 일종의 판테온이 구성되어 있었다. 주요 순례지로 멕카가 자리잡고 있었고, 또한 부족간 갈등의 정점이기도 했다.

 

예언자 무함메드

 

대략 571년 쿠라이쉬 부족 하심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출생 이전, 어머니는 6살 때 사망했다. 그후 조부 아브드-알-무타립 Abd-al-Muttalib과 삼촌 아부 타립 Abu Talib 밑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거쳤다. 후발과 알-우즈자를 숭배했고, 영마, 사탄, 길조와 흉조 등을 믿는 아리비아 신앙에 회의를 가졌다. 그의 종교적 변화는 유대교, 기독교의 신관념, 심판, 종교적 삶의 영향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친지 Waraqa와 Umaiya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심취했다. 기독교에 대한 정보는 주로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15세 연상의 하디자와 결혼 2,3명의 아들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네 딸 중 오직 파티마 Fatima만이 그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정신적 시련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신관과 심판 관념등에 동요했다. 40세깨 메카 주변을 방황하며 명상했다.

 

예언자의 소명

 

멕카 북쪽 수 마일 떨어진 히라 Hira 산의 동굴에서 명상을 하다가  "권능과 명증의 밤"이라고 부르는 날 신의 사자인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환상이 끝난 후 계시의 전체를 재현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고민하여 수개월에 걸쳐 체험을 회의하다 스스로가 알라의 진정한 예언자 nabi 이며 사도 rasul 임을 자각했다.

 

초기활동

 

설교의 기본 내용은 육체의 부활과 지옥의 불에 대한 예언이었다. 초기계시에서는 신의 단일성보다는 신의 권능과 최후 심판에 대한 언급이 주종을 이루었다. 신이 복수로 나타나기도 했다. 쿠라이쉬 부족 사람들은 신의 단일성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않았으나, 무함메드가 예언자라는 주장에는 반발했다. 예언자라면 부족 전체의 지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정의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의무를 강조했다. 추종자들은 소수(초기 4년 동안 불과 40여명)였다. 첫 추종자는 하디자, 양자가 된 노예출신 소년 자이드, 아부 탈립의 아들 알리, 상인 아부 바크르 Abu Bakr얐다. 유일신 교리는 메카의 주된 수입원(순례객)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반발을 초래했다. 무함메드의 활동에 대한 부족의 반대자들의 방해가 극심했다. 그는 아부 탈립 사망후 이주 계획를 세웠다. 이주 Hijra는 622년 6월에 야트립으로 이주하면서 이루어졌다.

 

메디나의 신정정치

 

야트립으로 이주 후 도시의 통치권 장악 후 마디나트 안-나비(줄여서 메디나,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했다. mosque를 건설했고, 단순하고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냈다. 멕카의 대상 공격으로 멕카와 공방전 후 630년 1월 멕카를 정복했다. 그후 무함메드는 카바 신전의 개혁을 단행해 우상을 파괴하고, 아브라함과 천사들의 그림도 파괴했으며, Zamzam을 정화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아라비아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생의 후반기에는 계시의 운문 형식은 줄고 종말론적 경고는 의례나 제도적 문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대체되었다. 무슬림들의 삶의 모든 분야를 종교에 의해 규정했다. 비스밀라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로 모든 행위를 시작했고, 하느님 앞에 직접 서므로, 중재자 역할 하는 사제 계급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무함메드는 632년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그는 죽기 직전 설교에서  "모든 무슬림은 모든 무슬림과 형제"임을 천명했고, 죽기 전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 caliph(계승자)로 선출했다.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

 

무함메드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이슬람의 신앙 iman 의식, 또는 의무 din의 토대가 되었다. 신앙보다는 의식의 많은 부분이 정형화되는 과정에서 후대의 변화와 영향이 많았다.

 

쿠란과 그 가르침

 

쿠란은 이슬람의 근본, 낭송, 복창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를 의미한다. 쿠란은 하늘나라에 보존되어 있는 서판에 담긴 쿠란의 원본이 드러난 것이다. 오직 정결한 자만이 만지거나 낭송할 수 있다. 무슬림들에게 쿠란은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므로 번역할 수 없는 일이다. 번역하는 경우도 단지 그 책의 의미에 대한 설명, 즉 여러 가지 의미의 해석 중 하나일 따름이다. 쿠란의 문체는 모방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고 여겨졌다. 또한 문장의 배열이나 문자 하나하나의 배치에 있어서조차 신성하고도 불가사의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쿠란의 편집은 우스만 시절에 이루어졌는데, 시대순이 아니라 길이순으로 편집되었다. 심판을 강조하는 초기의 단편적 계시가 뒷부분에 수록되었다. 단지 하나의 짧은 기도문만이 일종의 서문으로 채택되어 맨 앞에 배치되었다. 그것은 파티하(開章)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처럼 사용되었다. 총 114개의 수라에는 소, 별, 질주자 등 각각 짧은 표제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수라 112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주제로 하고,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구하는 두 개의 짧은 기도문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어떤 수라, 또는 단 한 개의 소절이라도 낭송하려면 먼저 저주받은 사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주문과 바스말라를 낭송했다. 바스말라는 "비스밀라힐-라흐마닐-라힘"(자비롭고 자애로운 하느님의 이름으로)으로, 수라 9를 제외한 모든 수라 앞에 놓여 있는 말이다. 우르드어로 비스밀라 카르나는 단순히 '시작하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터키어로 하디 비스밀라는 '시작하자' 라는 의미이다.

어떤 수라는 각별한 영험(바라카)가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수라 36(야신)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위해 낭송된 것이다. 각각의 쿠란 구절은 아야트(징표,기적)라고 불렸다. 쿠란에 나오는 인간 존재의 위상은 영들이나 천사보다도 우월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로부터' 생명의 입김을 아담에게 불어넣었고, 그릴 자신의 대리자(할리파)로 삼고자 했고, 천서들로 하여금 그에게 절을 올리도록 명했다고 한다. 한편 쿠란은 원죄를 부정한다. 인류 최초의 죄는 유전되지 않았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나 환경의 영향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쿠란은 인간과 하느님의 절대적 유대관계를 강조했다. 하느님이 아담의 자녀들을 영예롭게 하고(수라 17/70), 아마나(신탁)를 맡겼다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쿠란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이 지평선 안(즉 이 세상)과 자신들 속에 놓아둔 징표를 보며 숙고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기 수라(메디나에서 계시된 수라)에는 세상사, 일상사, 정치적 문제에 대한 상당한 양의 가르침을 포함했다.

언어의 숭고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경시가 있었다. 이 쿠란은 영창조로 낭송되었다. 암송자 암송자 하피즈(모두 암기하고 있는 사람)는 존경받음

 

쿠란의 해석

 

무함마드 사후 몇 세대 동안은 무슬림들 대부분은 쿠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완전히 일치하는 해석은 없었다. 다앙햔 해석의 사실 자체가 쿠란의 초자연적 성격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무한한 것이었다.

주석 작업은 타바리(935 사망)의 30권 주석서가 최초의 역작이다. 쟈마흐샤리(1146 사망)는 유명한 주석서를 무타질라파 입장에서 저술했다. 13세기 바이다위 주석서, 15세기 말 잘랄루딘 앗-슈우티 주석서, 19세기 오스만 터키의 엘말리 주석서 널리 사용했다.

신비가들은 의미의 참된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자의 장막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어의 어근을 캐고 각 표현을 관련지어 보고하는 것이 거의 무한하게 가능한 아랍어의 특성으로 대단히 용이했다.

쉬아파, 특히 바티니야 파는 쿠란의 비의적 의미를 강조했다. 쿠란을 읽거나 낭송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직접 대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하느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쿠란 읽는 행위 자체가 성례였다.

중세에는 신비수리학적 해석술이 발달했다. 일련의 문자로부터 그 數理値나 조합을 구해 심오한 의미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필사본이 다소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간과했다.

현대적 해석으로는 무스타파 알-마자라기의  "어떤 명백한 진리가 계시된 문장과 양립할 경우, 그 문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 사이트 아흐마드 칸(1898 사망)의 자연에 드러난 하느님의 役事는 쿠란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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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샤리아 법정에서 무슬림 여인들의 고통

 

영국의 무슬림 여인들이 이슬람교 샤리아 법에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례가 계속 보고되고 있다.

BBC 방송이 영국의 샤리아 법정에서 무슬림 여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에는 이슬람법을 적용하는 최소 85개의 ‘샤리아 포럼’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10여개는 지난 1982년부터 운영해온 이슬람 샤리아 의회가 관할하고 있으며

대부분 무슬림 부부 문제 건을 다루어 왔다.

 

 

BBC 라디오4의 ‘더 리포트’ 프로그램은 남편들에게 학대받는 무슬림 여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제니 크리스 기자에 따르면 ‘나딘’(가명)이라는 한 무슬림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질식시키려 했는데

샤리아 법정은 자신을 “차등 시민인 양 다루었다.”고 폭로했다.

나딘은 자신은 아무 친구도 사귀지 못했고

소셜미디어도 사용하지 못하며 남편에게 공격받았다고 밝혔다.

나딘은 또 남편이 주먹질 했으며 입과 코를 가려 숨통을 막으려 했다고 말했다.

나딘은 샤리아 법정을 통해 이혼하기 위해 런던의 샤리아 의회와 연락했으나 이혼을 허락받지 못했다.

나딘은 샤리아 법제도에 의해 공평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레이턴에 있는 이슬람 샤리아 의회는 이런 그녀의 불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반응한 당국자가 있다면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크리스 기자는 일부 이슬람 의회는 공중의 지적을 받아들이지만

단단히 잠가놓은 문 뒤에서 여성을 다루는 데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샤리아 법정은 흔히 남성 쪽이 원할 때는 너무나 쉽게 자유롭고도 무조건적인 이혼을 허용해 왔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 남성들은 종교법의 우산 아래 다처혼을 하여 수많은 자녀들을 둘 수 있게 돼 있고,

자녀보호나 유산상속, 가내폭력 해소 등의 문제에 있어 늘 여성 쪽이 불리한 차별 정책을 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면, 영국 중재법령(AA)에 따라 샤리아 학자와 함께 국가 법정변호사 또는 사무변호사가 엄연히 배석해 있는

너니턴 소재 무슬림중재법원(MAT)에서 벌어진 세 자매와 두 형제 등 5남매 사이의 유산상속 재판에서 샤리아 법을 따라 남성들이 여성의 2배를 갖는다는 판결이 내려져 여성 측의 원성을 샀다.

 

오래전 터리사 메이 영국 내무장관은 샤리아 법원 이슈를 거론하면서 영국과 웨일즈 내 샤리아 법 적용에 관하여

자신이 독립적으로 조사하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메이 장관은 여성들이 (샤리아 법정에서, 남편이나 남성 가족과의) 피학대적 관계로 되돌아가길 강요당해 왔고

샤리아 법정에서는 “여성들의 증언과 진술은 남성의 증언에 비해 절반 정도로 밖에 중시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다.”고 지적했다.

 

원로 상원의원(무소속)인 캐럴라인 콕스 여남작(baroness)은 무슬림 여성 및 소녀들의 인권과 샤리아 법정의 문제점에 관해 집중연구를 해온 이 방면의 전문가로 샤리아 법의 원리에 대해 “영국 여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도 불안정하게 만드는 위협요소”라고 단죄해왔다. 그녀는 내무부의 이런 발표를 환영하면서도 무고한 행동이 발목 잡히거나 종교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게 보장해 주는 것이 필수적이라면서 샤리아 법정에 대한 특별독립판사의 청문조사를 주문했다. “취약한 여성들이 강압과 협박 또는 불공정으로 고통당하는 현 상황을 계속 방치해 둘 순 없다.”고 콕스 의원은 강변했다.

콕스 의원은 또 팅크탱크 보우그룹에 실린 그녀의 최근 보고서에서 유산상속, 다처혼, 이혼 문제, 가내폭력 문제 등 영국의 무슬림 여성과 소녀들이 조직적으로 당해온 샤리아 법원의 성차별적 정책을 폭로했다.

콕스 의원이 다룬 한 무슬림 여성은 “영국에 배신당한 느낌이다. 문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여기 왔는데 정작 상황은 내가 탈출한 나라보다 이곳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라고 억울해 했다. 이 보고서는 또, 수많은 무슬림 여성들이 자신의 합법적인 권리를 모른 채 지내거나 억압 아래 살고 있으며, 가족들이나 공동체가 당할 수치나 불명예 때문에 당연한 전문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콕스 의원은 “물론 개인 개인의 모든 복잡하고 민감한 이슈들을 일일이 다 다룰 수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우리나라(영국) 여성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현실과 고통의 스케일을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취약한 여성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콕스 의원이 입안한 의원입법법안(PMB)이 이미 상원의 정치 스펙트럼과 무슬림 여성그룹 등 기타 단체들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다.

보우그룹이 출판한 콕스 보고에 의하면, 이 법안은 두 가지 상호연계 된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첫째는 종교의 미명아래 허용된 성차별로 인해 여성들이 당하는 억압, 둘째는 모두를 위한 법의 기본원리를 무시한 채 빨리 적용돼가는 (샤리아 따위) 대체법의 문제이다. 이 법안은 차별판결에 순응하기를 원치 않는 여성들을 위한 모종의 구제책도 제공해 놓고 있다.

 

부부간 갈등 문제가 발생하여 법원에 도움을 요청하면, 이슬람 중재법원은 양측이 인정하는 제3자에게 의뢰하여 이 제3자를 통해 양자가 수용할 수 있는 합의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샤리아 법원의 심리 이전의 합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잦다.

특히 여성들은 가족들의 압력을 받아 영어 해득을 위한 도움이나 영국 법 아래서의 권익에 관한 지식이 결핍된 가운데 출두하게 된다. 또 중재합의안을 거부할 경우 으레 협박을 받고 출교를 당하거나 불신자로 낙인찍힌다. 신앙을 떠난 무슬림은 배교자로서 처형될 수 있다는 것이 이슬람교 측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 억울한 일이 있다고 경찰에 가거나 비교도 법률 전문인 또는 전문 단체를 찾거나 하는 행위는 문화적으로 용납되지 않거나 수치스런 일로 간주된다.

파트와(샤리아 재판, 법적 견해)는 세속법과 세속 재판 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돼 왔다. 영국 무슬림들의 6%는 국내 무슬림들이 영국법을 늘 지켜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들 생각하고 있다. 일부 무슬림들은 아예 세상 권력과 단절한 채 상관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나타난 무슬림 여성들의 피해상황은 한 마디로 빙산의 일각 내지 ‘새 발의 피’일 뿐이다. 엄청나게 많은 문제점과 피해상황이 마치 그들의 차도르 속 얼굴처럼 베일 뒤에 감춰져 있다. 하지만 수많은 피해여성들이 증언에 앞서 자기 정체를 밝히기를 무서워한다.

대다수의 샤리아 법정에서는 이혼(이슬람 용어 ‘탈라크’)이 순수종교적 의미에서만 이뤄진다. 민법상의 이혼이 아니라 단지 샤리아 법에 따른 종교적 이혼만 선언해 줄 뿐이다. 무슬림 남편들은 이혼시 아내와 같이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이 ‘나는 당신과 이혼하오.’라고 3회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아내 쪽은 다양한 조건에 부합해야 하고 돈을 내어 이혼이 가능하다.

‘니카’라고 불리는 결혼식도 종교적으로만 이뤄지고 공식 등록이 되지 않아 실상 민법상으로는 무효에 불과하다. 실제로 웨스트 미들랜드 거주 무슬림 여성들을 상대로 한 50건의 여론조사 결과 ‘결혼했다’고 밝힌 사람들의 90%는 영국법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다. 상당수는 ‘니카’가 영국 내에서 치러졌으므로 자동효력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이들 조사대상자 여성들의 3분의 2는 남편이 둘 이상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고 밝혔다. 남성들은 여러 차례의 ‘니카’를 거쳐 가며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섹스와 돈을 향유한다. 이런 과정은 주로 남성들만을 위한 것이지 여성들에겐 방어적 도움이 안 된다. 이 관행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을 갖다 준다. 실제로 국내법상의 보호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성들은 자신의 종교결혼이 영국법상 공식 승인되지 않았음을 모를 수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이슬람 반대 시위

무슬림 여성 ‘미리’(가명) 씨는 자신이 실제 겪은 일들을 이 보고서에서 진술했다. 미리는 19세 때 부모의 결정으로 결혼하게 됐다. 당시 그는 국제 IT회사의 예비사원으로 발탁됐고 학업과 경력을 계속 하고 싶었으나 부모들은 그녀의 감정을 억압하여 파키스탄으로 데려가서 강제로 무함마드와 결혼시켰다. 미리는 2주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배우자 비자를 신청, 무함마드가 영국에 도착했으나 외국문화에 적응하느라 힘겨워 했다. 아내의 직업과 옷차림도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무함마드는 갈등과 감정을 견디다 못해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했고 이를 발견한 가족은 그녀의 이혼을 허락했다. 미리는 우선 샤리아 이혼을 신청하려고 인근 모스크를 알아봤다. 그러나 그곳 이맘(이슬람 사제)은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고 도움 받을 아무 전화번호도 없다고 해 그녀의 의문과 분노를 자아냈다. 그럴수록 그동안 낳은 자녀들과 가족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결심이 굳어져갔다.

마침내 인터넷에서 샤리아 의회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연락하자 그들은 서류와 100파운드(약 16만원)의 돈을 요구했다. 결과는 2년간의 싸움이었고 미리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탈진했다. 겨우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거의 매일 전화를 걸었다. 반응이 없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두 달이 지난 뒤 샤리아의회로부터 또 다른 서류를 쓰라는 서신이 왔다.

또 남편이 어디 있는지 증명하라는 요구도 왔다. 마침 민법상의 이혼도 함께 진행하게 됐으나 사무변호사에게도 수수료를 주고 별도의 수속을 밟아야 했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하고 수속은 느려졌다. 샤리아 의회는 남편에게 3통을 편지를 보냈으나 회신이 없자 3개월을 더 기다리겠다고 했다. 샤리아 의회에서 온 그 다음 서신은 남편에게 양육권리와 함께 아이들을 통째 넘기라며 불복할 경우 이혼은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리는 여태 기다려온 긴 시간의 보상이란 게 결국 내 아이들을 빼앗기는 것이구나 하고 통탄하면서 삶이 끝난 것 같고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별도의 민사법원과 협력기구들은 남편에게 자녀와의 접촉할 법적 권리가 없다고 밝혀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모든 결혼지참금을 되돌려 주라.’는 샤리아 법정의 최후통첩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니카 때의 금 장신구들은 이미 남편이 자기 빚을 갚느라고 팔아치웠기 때문에 없다고 답신했고 남편 쪽의 답장이 날아가자 그때서야 이혼증서가 발부됐다. 미리는 이슬람 법원으로부터 여성의 권리를 철저히 무시당하고 경시 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동안 겪은 일은 내 희생 뿐 아니라 내 아이들과 내 가족의 희생이었음을 잊어선 안 되겠다.”는 것이 그녀의 다짐이다.

역시 비슷한 피해자이자 여성인권 저널리스트인 무슬림 여성 ‘사미’ 씨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영국 내 샤리아 법을 전적으로 반대한다. 민주국가법 아래서는, 종교인 남성들이 여성들을 조종하게끔 방치해 두어선 안 된다. 모든 영국민이 동등하게 법에 순복하게끔 하는 것은 영국 정부의 책임이다. 소수계의 민감 이슈(에 대한 보장)보다 대다수의 웰빙이 더 중요한데도 (영국)정부와 무슬림 공동체 바깥사람들이 샤리아 법 같은 민감한 이슈를 다루기를 겁낸다는 사실을 나는 우려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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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무슬림 (독실한 무슬림)

 


이슬람교로 개종한 미국인 토마스 클레이톤(Thomas Clayton)이 무슬림이 드리는 예배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소감을 “높은 나무 망루 위에 깨끗한 의복에 하얀 터어번을 쓴 소경 아랍인이 앉아 황홀한 음조로 하늘 나라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기묘하고 영적인 후렴에 최면이 걸린 듯 앉아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황홀한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렸다”고 고백했다.

필자도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 더위를 가르고 담맘(Dammam)으로 가던 길목에서 경건한 무슬림을 보았다.

그는 하이웨이 옆에 차를 세워 놓고 정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칼날같이 내리 꽂히는 그 뜨거운 태양 빛을 온 몸에 받으며 메카를 향해 무릎 끊고 기도하는 그 모습에서 경건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씩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 이른 아침 해뜨기 전에 첫 예배를 드리고, 정오 예배, 이른 오후 예배, 해질 녘 예배, 그리고 지평선에 저녁놀이 사라진 후 마지막 밤 예배를 드린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횟수는 무함마드의 교훈에 근거한다.

어느날 무함마드가 추종자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가령 너희 집 앞으로 개울이 흐른다 하자 그 개울에서 하루 다섯 번씩 목욕을 한다면 그래도 몸에 때가 있겠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몸에 때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하루 다섯 번의 예배가 이와 같으니라. 알라께서 모든 죄를 씻어 주시느니라”

그 후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씩 의무적으로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는 집에서 걸어서 2-3분 정도의 거리에 모스크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며 예배를 드리곤 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아잔이 육성으로 스피커를 통해 쌀라(salat)를 알린다. “알라후 아크바르”(God is great)로 시작되는 예배 초청의 소리가 너무 커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입국 한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은 엄청난 소음으로 새벽잠을 설치고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2-3개월 정도 지나면 무감각해 지고 엄무상 쌀라 시간을 의식하며 생활하게 된다.

 

그들은 쌀라 시간이 되면 관공서, 기업체, 상점 등 모든 문을 닫는다. 그래서 사람들로 북적대던 쇼핑몰도 쌀라 시간이 되면 조용해진다. 그 시간에는 종교 경찰이 순찰을 하는데, 문을 닫지 않은 가게가 있을 경우 일차 경고를 하고 또 단속에 걸릴 경우 주인을 구속시킨다. 그래서 비무슬림도 쌀라 시간에는 반듯이 문을 닫아야 한다.

 

무슬림은 쌀라를 하기 위해 제일 먼저 물로 얼굴, 손, 발, 그리고 다리를 씻는 정결 의식을 갖는다. 이 의식을 ‘우두’라고 하는데 그 의식에는 순서와 규범이 있다. 먼저 숭배와 청결을 위해서 세정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손을 손목까지 세 번 씻어 낸다. 그리고 입을 세 번 물로 헹궈 내고, 콧구멍 속으로 물을 들이켜 세 번 씻어 낸 후, 얼굴 전체를 양손으로 세 번 씻는다. 그리고 귀 안쪽은 집게손가락으로, 귀 바깥쪽은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내고, 젓은 손으로 머리를 한 번 닦아 낸 후 오른팔과 왼팔을 팔꿈치 끝까지 세 번 씻은 후 양발을 발목까지 세 번 씻는다.

 

수피파(신비주의) 무슬림들은 닦는 예식을 행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알라여 눈을 통해 나의 영혼으로 들어온 정욕의 생각을 모두 용서하옵소서” “악한 것을 들음으로써 더러워진 내 영혼을 깨끗케 하옵소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악하게 말하는 연약함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죄로부터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알라여 이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이다 좀더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이라면 동행치 않으실 곳으로 저는 갔습니다. 방황하려는 마음을 용서하시고 곧은길을 충실히 걷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루에 다섯 번씩 행하는 회개를 동반한 정결 예식은 그들을 경건한 무슬림이 되게 한다.

그러나 병중이거나 물을 쓸 수 없을 때 그리고 물을 쓰면 해가 되거나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세정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한다.

 

정결 예식을 마친 무슬림은 모스크에 들어가서 줄을 맞추어 서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처음 예배를 선 자세로 드리는데 ‘와꾸프’ 자세라고 한다. 그 다음 동작은 머리를 직각으로 구부리고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 허리 굽힌 자세를 취한다(루꾸자세), 그 다음, 양발의 발가락과 양 무릎과 양손과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한다(수주드자세). 끝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잘싸자세) 좌우를 바라보고 인사(쌀라마리쿰)를 나누며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처음 동작으로 돌아가서 반복을 하고 1차 예배를 끝낸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갖는 공통점은 동작을 바꿀 때마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우는 것이다.

어떻게 무슬림은 그런 예배 형태를 갖게 되었을까? 꾸란이 예배자에게 “꿇어 엎드려 알라 곁으로 가까이 가라”(수라96:20)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슬림은 땅에 엎드리는 것은 복종을 나타내는 최고의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의 예배자세는 1400년이 지나도록 동일하다. 그리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

 

획일성과 다양성의 차이

 필자는 선교지에서 쌀라를 알리는 소리를 수없이 듣고, 기도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몇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첫째, 예배자의 열심과 정성이었다. 필자는 목사지만 선교 현장에서 피곤하고 힘이 들 때에 새벽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번은 고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세 번의 기도도 드리지 못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 무슬림은 비록 강제성이 있었지만 하루에 다섯 번씩 꼭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둘째, 성경적인 예배 자세였다. 무슬림이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은 이슬람적이기 보다 성경적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의 기원이 ‘엎드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축복하다의 뜻은 ‘무릎을 꿇다’이며 감사는 ‘손을 펴다’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이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했다(민16:22).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도 땅에 엎드려 절하고 기도했다(수5:14). 지혜의 왕 솔로몬도 여호와 앞에 서서 손을 펴 기도하고(왕상8:22),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폈다(역하6:13).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기도했다(역하7:3). 시편 기자는 백성들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소호 했다(시95:6).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단6:10),

예수님께서도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는 꿇어 엎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은 지나치게 안일을 추구하고 있다.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도 황송한 일인데,

책상다리를 하고, 껌을 씹고, 음료수를 마시며 예배를 드리는 한심한 사람들도 있다.

만약 무슬림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기독교를 경건치 못한 종교로 정죄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정죄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외적인 형태의 진전은 내적인 자아의 성숙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전적으로 필수적이다”라고 말한 이슬람 학자의 말과 같이 행동 하나 하나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척도가 됨을 기억하고 언제나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공동체 의식이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인구는 1,600만명(현재2,200만명)정도였다. 그들은 왕을 위시하여 온 국민이 하루에 다섯번씩 같은 시간에 동일한 기도자세, 동일한 기도 내용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응집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무슬림이 15억이 넘는다고 한다. 비록 시아파, 수니파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쌀라는 교파를 초월하여 동일하다. 동질감에서 오는 시너지 효과는 놀라운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첫째, 정교일치의 위험성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정교 일치의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다. 그 제도는 부족을 통일할 때에 동맹자였던 Muhammad Ibn Abdul Wahhah가 죽은 후 Saud 왕가가 정교를 장악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Perter Viereck'가 “권력은 신성한 것이며 신의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권력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그 사명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말했듯이 권력자가 사랑과 덕으로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오일 수입의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번영과 안정이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회에서 정교일치로 인해 파생되는 모순들을 여러 가지 목격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걸프전 이후 각 언론에서 Fadh 왕을 'Custodian of Two Holy Mosques King Fadh Abdul Aziz'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사담 후세인이 그 전쟁을 지하드(聖戰)라고 천명하므로 아랍세계에 있었던 분쟁과 신학적 논쟁에 대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을 15억이 넘는 무슬림의 영혼의 고향인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관리자요, 보호자라고 지칭한 것은 대내적으로 종교를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왕정을 수호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둘째, 강제성이 있는 분위기였다.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비 무슬림도 많이 있다. 그러나 비 무슬림이라도 쌀라 시간에는 관공서 업무도 볼 수 없고, 물건도 살수가 없다. 쌀라 시간에 물건 거래를 하다가 적발이 되면 주인과 손님이 둘 다 처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쇼핑몰에서 쌀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비 무슬림은 처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건물 밖에서 쌀라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고, 순찰을 도는 종교 경찰의 눈도 피해야 한다. 강압에 의한 삶에는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 “강한 말은 매놓은 기둥이 상한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셋째, 반복되는 예배 형식이었다. 당신이 하루에 다섯 번씩 동일한 내용, 동일한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일생동안 반복한다고 가정해 보라. 어느 시점에 가서는 내용이 없는 형식을 붙잡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사우디 무슬림이 그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슬림이다. 기독교인 중에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구태 의연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듯이 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타인의 이목 때문에 모스크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2000년 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형식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았듯이, 형식을 앞세우면 책망을 면하기 어렵다.

기독교의 장점은 진리 안에서의 의식의 다양성에 있다. 그래서 교단마다 예배 의식이 다르고, 성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아서, 서서, 걸으며, 뛰며, 그리고 누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겸손한 예배의 자세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어찌 만왕의 왕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가식이 없는 그런 구도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출처 :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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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실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터넷에 이슬람에 관한 글이 올라오면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 이슬람’ 을 무조건적으로 찬동하는 댓글을 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슬람은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이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이슬람이 기독교와 교리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잇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날 이슬람이 유대교나 기독교와 그토록 많은 충돌의 양상을 빚는 것만 보아도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커다란 강이 놓여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일 아시아 최고의 축구스타 중에 그리스도교인인 한 선수가 이슬람으로 오늘 개종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슈화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아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잠시 의아해 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란이나 사우디 아라비아의 한 축구선수가 오늘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자. 내일 아침이면 그의 몸이 시체로 발견될 확률이 99%에 이를 것이다. 이슬람이 꿈꾸는 알라의 법 샤리아는 그를 ‘자유롭게 개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악마의 시’ 라는 소설을 썼던 인도 출신의 살만 루시디라는 작가는 그 소설에서 꾸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란의 호메이니로부터 살해명령(파트와)을 받고 십 수 년간을 영국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며 지내야 했다. 그 책을 일본어로 번엮했던 일본인은 그 일로 인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심지어 사생아 취급을 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며, 심지어 그 사실을 책으로 내고 영화로까지 만들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면, 무함마드에 관한 네 컷짜리 만평 하나를 가지고도 폭력사태를 겪어야만 하는 이슬람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슬람은 결코 다른 종교와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은 한국인들이 친숙한 불교나 무교와 같지 않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을 위해 상대와 투쟁할 이유가 없지만,

이슬람은 ‘알라을 위해’ ‘ 이교도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자들을 격려하는 종교이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한 이슬람교도’의 전형이요,

낙원은 바로 그러한 이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내 무슬림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한국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슬림의 한국 이슬람화 전략, '결혼'"

투아이즈 네트워크,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피해 사례 발표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피해 사례 잇따라…

지난 2008년 7월 19일 투아이즈 네트워크는 아프간 사태 1주년 행사 준비모임에서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심각한 피해 사례"를 발표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지식없이 포교 활동을 하는 무슬림 남성의 감언이설에 속아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피해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슬람 국가는 모스크에서 혼인 서약을 해야만 혼인신고가 가능하다. 그러나 서약 중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선서를 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 따른 피해를 줄이도록 법적 제도적 보완과 이슬람 문화와 가치관을 포함한 무슬림과의 국제결혼 안내서 등 홍보와 교육이 필요한 실정이다.

결혼의 목적, 국적취득과 개종요구

를 발제한 GNI 최헵시바 소장은 "사랑이 라는 이름으로 끈질기게 유혹한 파키스탄인은 결혼 후 이혼을 요구하는 김씨에게 국적취득 후 이혼해 주겠다고 본성을 드러냈다"며 모 사이트에 충격고백을 한 김씨 사례와 "결혼 생활 내내 코란 읽기와 기도하기를 강요하며 폭력을 가하는 것은 기본, 어린 딸을 두고 협박하는 파키스탄 무슬림과 최근 3년 만에 결혼생활을 마무리 했다"는 김모씨의 사례를 소개했다.

최 소장은 "이 외에도 피해사례는 상당하며 공통적으로 끈질긴 유혹과 감언이설로 결혼한 후 국적취득과 개종을 요구하며 비도덕적 행위(협박, 폭력, 성폭력, 사기, 재물탈취 등)를 일삼은 범죄"라 했다.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 인권보호를 위한 제안: 법적·제도적 장치 보완-국제 결혼관리소 설치

최헵시바 소장은 "외국인 노동자 인권확보를 위한 센터가 오히려 문제"라며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인 여성과의 결혼을 통한 피해사례를 다루는 카페 사이트(파키스탄*방글라데시 외국인에 의한 피해자 모임 : http://cafe.daum.net/leavingpakistan) 운영자의 주장을 전했다. 덧붙여 "외국인 노동자들의 거짓과 한국 여성들의 인권은 묵인하며 행해지는 외국인 노동자 센터의 인권보호는 누구를 위한 법인가, 이슬람의 교리 안에 합법적인 범법행위는 무시하고 인권운동 하는 그들은 누구를 위한 인권행위인가"라며 "이러한 주객전도의 사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를 발제한 안상준 사관(구세군개운교회, 명지대 아랍지역학 박사)은 "외국인과 결혼할 경우 반드시 외국정부에 의한 공식문서인 독신 증명서(총각, 이혼남, 사별 등) 등을 발급받아 한국정부에 제출하고 그것을 기초로 한국여성은 결혼신고를 조사하는 정부내 조직이 필요하다"며 "국제 결혼관리소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가능하다면 출입국 관리소에서 여권을 통해 외국인들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국제결혼도 관리하도록 건의한 다"며 피해를 사전에 차단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더불어 안 사관은 "대한민국은 일부일처를 표명한다"며 "일부다처는 헌법에서 규정된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경우라도 범죄행위로 간주되며 범법자로 취급되어야 함"을 명백히 주장했다.

무슬림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 인권보호를 위한 제안 2 : 무슬림과의 국제결혼 안내서 발간

최 소장은 "일부다처제가 합법적인 그들의 문화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다른 여성관과 결혼관을 한국인 여성은 감언이설로 속고 있는 것이기에 이제는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될 일"로 간주하며 "정확한 이슬람의 이해를 위해 한국교회와 시민단체 여성인권 단체는 앞장서야 할 때임"을 밝혔다.

 

안 사관은 그것을 위해 "무슬림들과 결혼시 필요한 절차와 주의해야 할 것 등 전반적인 일에 관한 지침서를 발간하여 미리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며 "이슬람에 대한 소개와 무슬림들의 삶과 결혼, 출산과 육아, 의복 등에 관한 것을 수록하여 미리 결혼 전에 숙지도록 하는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타깃으로 삼은 무슬림 vs 이슬람화 막기 운동, 4HIM(Halt Islamization Movement)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는 를 발제했다.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몰려오는 것은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전하기 위해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을 들어 이해 할 수 있다"며 "이주는 이슬람의 매우 중요한 선교전략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무슬림들은 이 전략으로 유럽과 동남아 아프리카 미주 등지를 다산정책으로 선진국의 일반적 인구성장율의 3배에 달하는 인구의 폭발을 보이며 이슬람화 하고 있다"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며 경계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 나라를 복음으로 굳게 지켜 대한민국이 이슬람의 제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4HIM(Halt Islamization Movement)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각 국에 지부를 두어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정보교환과 사례들을 공유하고 기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이 운동의 중요 목적은 일차적으로 다음과 같다.

1.이슬람의 정체를 연구하고 알린다.
2.이슬람의 확산을 예방한다.
3.각국의 이슬람 단체들의 전략과 움직임을 확인한다.
4.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영적 기류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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