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무슬림 (독실한 무슬림)

 


이슬람교로 개종한 미국인 토마스 클레이톤(Thomas Clayton)이 무슬림이 드리는 예배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소감을 “높은 나무 망루 위에 깨끗한 의복에 하얀 터어번을 쓴 소경 아랍인이 앉아 황홀한 음조로 하늘 나라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기묘하고 영적인 후렴에 최면이 걸린 듯 앉아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황홀한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렸다”고 고백했다.

필자도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 더위를 가르고 담맘(Dammam)으로 가던 길목에서 경건한 무슬림을 보았다.

그는 하이웨이 옆에 차를 세워 놓고 정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칼날같이 내리 꽂히는 그 뜨거운 태양 빛을 온 몸에 받으며 메카를 향해 무릎 끊고 기도하는 그 모습에서 경건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씩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 이른 아침 해뜨기 전에 첫 예배를 드리고, 정오 예배, 이른 오후 예배, 해질 녘 예배, 그리고 지평선에 저녁놀이 사라진 후 마지막 밤 예배를 드린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횟수는 무함마드의 교훈에 근거한다.

어느날 무함마드가 추종자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가령 너희 집 앞으로 개울이 흐른다 하자 그 개울에서 하루 다섯 번씩 목욕을 한다면 그래도 몸에 때가 있겠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몸에 때가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하루 다섯 번의 예배가 이와 같으니라. 알라께서 모든 죄를 씻어 주시느니라”

그 후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씩 의무적으로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는 집에서 걸어서 2-3분 정도의 거리에 모스크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며 예배를 드리곤 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아잔이 육성으로 스피커를 통해 쌀라(salat)를 알린다. “알라후 아크바르”(God is great)로 시작되는 예배 초청의 소리가 너무 커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입국 한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은 엄청난 소음으로 새벽잠을 설치고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2-3개월 정도 지나면 무감각해 지고 엄무상 쌀라 시간을 의식하며 생활하게 된다.

 

그들은 쌀라 시간이 되면 관공서, 기업체, 상점 등 모든 문을 닫는다. 그래서 사람들로 북적대던 쇼핑몰도 쌀라 시간이 되면 조용해진다. 그 시간에는 종교 경찰이 순찰을 하는데, 문을 닫지 않은 가게가 있을 경우 일차 경고를 하고 또 단속에 걸릴 경우 주인을 구속시킨다. 그래서 비무슬림도 쌀라 시간에는 반듯이 문을 닫아야 한다.

 

무슬림은 쌀라를 하기 위해 제일 먼저 물로 얼굴, 손, 발, 그리고 다리를 씻는 정결 의식을 갖는다. 이 의식을 ‘우두’라고 하는데 그 의식에는 순서와 규범이 있다. 먼저 숭배와 청결을 위해서 세정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손을 손목까지 세 번 씻어 낸다. 그리고 입을 세 번 물로 헹궈 내고, 콧구멍 속으로 물을 들이켜 세 번 씻어 낸 후, 얼굴 전체를 양손으로 세 번 씻는다. 그리고 귀 안쪽은 집게손가락으로, 귀 바깥쪽은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내고, 젓은 손으로 머리를 한 번 닦아 낸 후 오른팔과 왼팔을 팔꿈치 끝까지 세 번 씻은 후 양발을 발목까지 세 번 씻는다.

 

수피파(신비주의) 무슬림들은 닦는 예식을 행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알라여 눈을 통해 나의 영혼으로 들어온 정욕의 생각을 모두 용서하옵소서” “악한 것을 들음으로써 더러워진 내 영혼을 깨끗케 하옵소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악하게 말하는 연약함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죄로부터 저를 지켜 주시옵소서” “알라여 이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이다 좀더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이라면 동행치 않으실 곳으로 저는 갔습니다. 방황하려는 마음을 용서하시고 곧은길을 충실히 걷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루에 다섯 번씩 행하는 회개를 동반한 정결 예식은 그들을 경건한 무슬림이 되게 한다.

그러나 병중이거나 물을 쓸 수 없을 때 그리고 물을 쓰면 해가 되거나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세정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한다.

 

정결 예식을 마친 무슬림은 모스크에 들어가서 줄을 맞추어 서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처음 예배를 선 자세로 드리는데 ‘와꾸프’ 자세라고 한다. 그 다음 동작은 머리를 직각으로 구부리고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 허리 굽힌 자세를 취한다(루꾸자세), 그 다음, 양발의 발가락과 양 무릎과 양손과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한다(수주드자세). 끝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잘싸자세) 좌우를 바라보고 인사(쌀라마리쿰)를 나누며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처음 동작으로 돌아가서 반복을 하고 1차 예배를 끝낸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갖는 공통점은 동작을 바꿀 때마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우는 것이다.

어떻게 무슬림은 그런 예배 형태를 갖게 되었을까? 꾸란이 예배자에게 “꿇어 엎드려 알라 곁으로 가까이 가라”(수라96:20)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슬림은 땅에 엎드리는 것은 복종을 나타내는 최고의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의 예배자세는 1400년이 지나도록 동일하다. 그리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

 

획일성과 다양성의 차이

 필자는 선교지에서 쌀라를 알리는 소리를 수없이 듣고, 기도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몇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첫째, 예배자의 열심과 정성이었다. 필자는 목사지만 선교 현장에서 피곤하고 힘이 들 때에 새벽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하루에 다섯 번은 고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세 번의 기도도 드리지 못하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 무슬림은 비록 강제성이 있었지만 하루에 다섯 번씩 꼭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둘째, 성경적인 예배 자세였다. 무슬림이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은 이슬람적이기 보다 성경적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로 번역한 히브리 단어의 기원이 ‘엎드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축복하다의 뜻은 ‘무릎을 꿇다’이며 감사는 ‘손을 펴다’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이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했다(민16:22). 가나안 정복의 영웅 여호수아도 땅에 엎드려 절하고 기도했다(수5:14). 지혜의 왕 솔로몬도 여호와 앞에 서서 손을 펴 기도하고(왕상8:22),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폈다(역하6:13).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기도했다(역하7:3). 시편 기자는 백성들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소호 했다(시95:6).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으며(단6:10),

예수님께서도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는 꿇어 엎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은 지나치게 안일을 추구하고 있다.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도 황송한 일인데,

책상다리를 하고, 껌을 씹고, 음료수를 마시며 예배를 드리는 한심한 사람들도 있다.

만약 무슬림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기독교를 경건치 못한 종교로 정죄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정죄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외적인 형태의 진전은 내적인 자아의 성숙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전적으로 필수적이다”라고 말한 이슬람 학자의 말과 같이 행동 하나 하나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척도가 됨을 기억하고 언제나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공동체 의식이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인구는 1,600만명(현재2,200만명)정도였다. 그들은 왕을 위시하여 온 국민이 하루에 다섯번씩 같은 시간에 동일한 기도자세, 동일한 기도 내용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응집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무슬림이 15억이 넘는다고 한다. 비록 시아파, 수니파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쌀라는 교파를 초월하여 동일하다. 동질감에서 오는 시너지 효과는 놀라운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첫째, 정교일치의 위험성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정교 일치의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다. 그 제도는 부족을 통일할 때에 동맹자였던 Muhammad Ibn Abdul Wahhah가 죽은 후 Saud 왕가가 정교를 장악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Perter Viereck'가 “권력은 신성한 것이며 신의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권력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그 사명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말했듯이 권력자가 사랑과 덕으로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오일 수입의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번영과 안정이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사회에서 정교일치로 인해 파생되는 모순들을 여러 가지 목격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걸프전 이후 각 언론에서 Fadh 왕을 'Custodian of Two Holy Mosques King Fadh Abdul Aziz'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외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던 사담 후세인이 그 전쟁을 지하드(聖戰)라고 천명하므로 아랍세계에 있었던 분쟁과 신학적 논쟁에 대한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을 15억이 넘는 무슬림의 영혼의 고향인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관리자요, 보호자라고 지칭한 것은 대내적으로 종교를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왕정을 수호하는데 필요한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둘째, 강제성이 있는 분위기였다.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비 무슬림도 많이 있다. 그러나 비 무슬림이라도 쌀라 시간에는 관공서 업무도 볼 수 없고, 물건도 살수가 없다. 쌀라 시간에 물건 거래를 하다가 적발이 되면 주인과 손님이 둘 다 처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쇼핑몰에서 쌀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비 무슬림은 처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건물 밖에서 쌀라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고, 순찰을 도는 종교 경찰의 눈도 피해야 한다. 강압에 의한 삶에는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 “강한 말은 매놓은 기둥이 상한다”는 말이 있는가 보다.

 

셋째, 반복되는 예배 형식이었다. 당신이 하루에 다섯 번씩 동일한 내용, 동일한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일생동안 반복한다고 가정해 보라. 어느 시점에 가서는 내용이 없는 형식을 붙잡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사우디 무슬림이 그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슬림이다. 기독교인 중에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구태 의연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듯이 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타인의 이목 때문에 모스크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2000년 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형식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았듯이, 형식을 앞세우면 책망을 면하기 어렵다.

기독교의 장점은 진리 안에서의 의식의 다양성에 있다. 그래서 교단마다 예배 의식이 다르고, 성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아서, 서서, 걸으며, 뛰며, 그리고 누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겸손한 예배의 자세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어찌 만왕의 왕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가식이 없는 그런 구도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출처 :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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