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타하지 아니하며--가정폭력에 대한 성경적 교훈 
 

개그 우먼 이경실씨로 인하여 요즘 가정 폭력이 아주 중요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사실 남편이 아내에 대한 폭력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명에 한 명꼴로 혹은 적어도 3명에 한 명 꼴로 남편이 아내를 때린다고 한다. 아마 신자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목사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남편들의 폭력은 성도라고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목사직이 다른 직업과 다른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대부분의 경우, 가정과 직장이 분리되어 있는 반면, 목사의 경우에는 가정과 일터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지 못하다. 사모는 가정에만 충실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모라 하더라도 사모는 교회에서 영적 어머니로 간주된다. 특히 교회의 여성들의 목소리가 목사에게 직접 가기 보다는 사모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목소리 중에, 상당수는 그냥 단순한 불만이지만 어떤 것은 목사가 꼭 알아야 할 정보를 담는 경우도 있다. 사모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든지 남편 목사에게 알리려고 할 것이고, 남편은 그러한 것을 목회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목사의 가정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는 서로가 정말로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가정 자체가 매우 불행해 질 수 있다.

주위의 경험상, 목사가 아내로부터 참기 가장 참기 힘든 경우는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 아마도 사모만큼 설교에 대한 스트레스가 강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목사의 모든 삶을 다 아는 자로서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설교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의 기준을 나의 아내에 기준을 맞추고 있다. 만일 나의 아내가 잘했다라고 평가하면, 진짜로 잘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의 형편에서 목사에게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사모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사모의 설교비평을 무조건 폄하하기 보다는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이 좋다고 본다.

부부가 서로 이렇게 이해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인격적인 미성숙으로 인하여 그러한 충고들이 서로를 세우기보다는 논쟁과 다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이 심해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타로 발전하게 된다. 구타가 일어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구타는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때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아내가 맞을 짖을 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시킨다. 구타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는 생각은 구타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게 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나도 잘못했지만 당신은 더 잘못했어"라는 생각은 다음에도 부부간의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도록 만든다.

목회서신인 디모데서와 디도서(딤전 3:3, 디 1:7)는 감독의 자격 중 하나가 구타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로 선출될 정도라면 구타라고 했을 때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아마 그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맨날 주먹질이나 하였다면 아예 직분에 선출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구타는 가정폭력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목사와 장로를 세우기 전에, 그들이 가정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지 그렇지 않은 지 세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다스리는 하는 일을 그 아내나 자녀들이 보는 것은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맞는 것, 그 자체만큼 고통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아내에게는 그렇게 대하면서도 교회의 여성도들에게는 정말 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그 아내가 "당신은 좋은 남편 두어서 참 행복하겠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직분자가 구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 가정 폭력이 교회에 쉽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디도서는 어떤 사람이 구타할 위험성이 많은 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디도서는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을 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면 구타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다. 나는 이것들을 따로 보기보다는 같이 보았으면 한다. 구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고집대로 하기를 원한다." 즉 왜 다툼을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타하는 사람들은 또한 대개 급히 분을 내는 사람들이다. 즉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쉽게 큰 소리치고 쉽게 열을 내고 쉽게 손이나 발이 나간다. 디모데서는 감독은 "관용하는 자"여야 한다고 하는데,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가정 폭력의 경우 상당수가 술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주위에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가정 폭력이 설교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목사가 가정 폭력이 얼마나 가정에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는지, 아니면 교인들은 가정 폭력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든지 아니면, 목사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디도서나 디모데서에서 말하는 구타를 "가정 폭력"이라고 한정시키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구타를 상습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 직분에서 면직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가정 폭력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정 폭력은 교회 내에서 반드시 제거하여야 할 악이라는 생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정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아내를 때리면, 그 그릇은 약하기 때문에 깨어지게 되어 있다. 깨어진 다음 후회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맞은 아내는 깨어진 심령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남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맞고 사느니, 차라리 이혼하라." 하지만, 아내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정말로 믿는다면,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맞기기를 권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9-21) 이 말씀은 누구 보다 매맞고 살아가는 믿음의 여성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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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여인--남편의 면류관  그리스도인의 가정

 

어진 여인은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2: 4]

잠언에는 믿음의 여성에 대한 지혜로운 교훈을 많이 담고 있다. 잠언에 따를 때, 여성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현숙함"이다. 이 현숙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일"이라는 단어이다. 이 카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구약 성경에는 거의 대부분 "강함" "부" "힘"으로 번역되어 있고 대부분 남자와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간혹 여자와 관련되어 쓰이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단어는 여기에서는 "어진"으로 번역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현숙한"으로(잠 31: 10) 번역되어 있다.

사실, 이 카일이라는 단어는 여자에게 적용될 경우 이상한 의미가 될 가능성이 많아서 영어 번역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 성경 "어진" "현숙한"이란 단어 역시 이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부드러움과 유순함을 떠오르게 하고, 원어가 갔고 있는 "강함"이라는 의미를 거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의 가장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70인 역은 "남자 같은"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결국 "강함"이라는 개념과 "고결한 인격"을 포함하는 단어가 필요한데, 나는 "카일"에 해당하는 가장 좋은 한국어 단어는 "굳센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좋은 우리나라 표현은 "생활력이 강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잠언 31장에 보면 이 당찬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잘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31장에 따르면, 굳센여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부지런함이다.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식물을 나눠주며",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굳센여인" 반대되는 여인은 "부끄러움을 끼치는 여인"이다. 전자가 남편의 면류관이 된다면, 후자는 남편의 뼈를 썪게 만든다. 그러면 어떤 여인이 부끄러움을 끼치는 여인일까? 앞에서 말했다시피, 굳센 여인은 부지런한 여인임에 반하여, 부끄러움을 끼치는 여인은 게으른 여인이다. 이것은 바로 두 장 앞의 10장 5절이 그대로 말하여 주고 있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즉 자기 할 일을 제 때에 하지 않고 무책임한 여자가 바로 수치스러운 여자인 것이다. 이러한 여자는 남편의 뼈를 썪게 한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출근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고, 아이들은 학교 가야 하는 데 여전히 잠이나 자고 있는 아내를 본 남편이라면, 아마 "뼈가 썩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리라 본다.

성경에서 이 현숙한, 아니 "굳센" 여인은 누구일까?  성경에서 이 단어가 유일하게 적용된 여자는 바로 "룻"이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이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즉 룻은 자신이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로 "굳센 사람"이었다. 왜 사람들이 룻을 "굳센 사람"으로 보았을까?

우리는 그 힌트를 보아스의 종이 보아스에게 전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는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라"고 답하였다. 즉, 룻은 시어머니의 강한 호소력있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한 심지를 지켜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게 되었고, 비록 남편도 자녀도 없는 과부에 불과하였지만 억센 남자들 세계에서도 굴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다. 그리고 라헬이 몸이 약하여서 베냐민을 낳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에브랏에서, 룻은 "유력하게 될 것"이다(룻 4:11). 여기서 유력하다는 말 역시 히브리어로 "카일"이라는 단어인데, 현숙하다는 말 대신 우리나라 말에서 유력하다는 말이 되었다. 즉, 문자적으로 보았을 때, 룻은 "카일"한 여인이었고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계속 "카일"을 행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룻과 같이 "굳센 여인" 여인은 정말 남편에게 면류관과 같은 존재이다.

누가 현숙한(굳센)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잠 3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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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불가피 한 경우"에는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한국 교회 세태를 통탄하면서 -

                                                                이성호 목사

        혼인 주례식에서 목사들은 주로 다음의 성경 구절로 예식을 마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7). 오늘날 이 구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혼인식 마지막에 첨부되는 한 구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혼인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 의해서 나뉘어 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주의 말씀과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러한 말씀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천생연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구절이 한국 교회에서 그 강조점이 본문의 의도와는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세상 사람들의 "천생연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가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주셨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준" 배우자를 위해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본문의 강조점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혼인의 엄숙성"이라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사의 주례로 짝이 지어지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례자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감독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혼외 정사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롬 1:23)"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부부의 사랑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남편이 실직을 해서 경제적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아내가 정신병이나 불치병을 앓고 있어도, 심지어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왜냐하면 혼인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 19:7은 혼인을 앞둔 청년이나 혼인식의 주인공들에게도 적합한 말씀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불가피한 경우"로 인해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있는 부부이다.  혼인식을 막 치룬 부부들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는 말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 아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불신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 서류를 앞에 둔 부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교회당 안에서) 혼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혼은 사람 앞에서 (법정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혼의 거의 불가능성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혼한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숫자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어떤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남편은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고 자녀 교육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에 남편은 생을 자포자기하고 아내에게 오히려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평생동안 성의 즐거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내에게 엄청난 짐이다. 남편이 자기 스스로가 이혼을 요청할 때, 아내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을 했는가?"이다. 그들은 혼인식에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겠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자들이다.  "배우자가 건강하고 부유할 때"라는 조건이 혼인에 붙는다면, 우리는 혼인을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혼인의 본질을 계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이 없다. 100번을 혼인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혼인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음행"에서만 나온다. 요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이 음행을 확대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라.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그렇게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행 보다 가정 폭력이 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이 이혼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에도 어느 기간 동안 별거를 하든가 아니면 그 남편을 법에 호소하여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혼이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방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부부생활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이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허락"이지 "장려"나 "권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배우자 중 한 명이 음행을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오해이다. 어떤 교인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혼하기 위해 의도적인 음행(비록 자신이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된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편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부부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비록 이혼하더라도 . .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의 연고(불신자의 핍박)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이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 10, 11)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다.  1)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엄격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  2) 이 말씀은 혼인을 앞에 둔 사람이나 이혼을 이미 한 사람들이 아니라 혼인을 이미 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3) 강조점은 역시 이혼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에게 만일 이혼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안 된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심하여야 한다: 독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전 남편과 화합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이러한 결단 없는 이혼은 교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은 우리 임의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혼만큼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교회 안에서의 이혼은 재 결합을 전제로 한 이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사도 바울은 "갈릴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시 전 배우자와 화합하라고 명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본문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가 상대방 배우자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우리는 이혼은 혼인의 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이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하나됨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나뉨은 사람에 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왜 "이혼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는가?  하나의 대답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나눈 것"과 "하나님이 나눈 것"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누고 계시는가? 이혼과 나눔의 동일시 할 때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두 배우자가 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혼인식)이 필요로 하듯이, 두 사람이 나누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은 바로 죽음(장례식)이다.  한 배우자가 죽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혼인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 (고전 7:39). 그렇다면 상대편이 죽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들에게조차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다음에 바로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혼인 적령기를 앞두고 있는 청년에게 권하는 독신(7:32-34)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상처한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일차적인 권면은 재혼이 아니라 독신이며, 따라서 독신의 복됨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상담학과는 구별되는 말인가?

        이혼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권면하신다. 하나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다. 혼인의 끝이 될 수도 없다. 혼인의 끝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한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한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 기간 동안 원수사랑의 훈련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기간은 원수인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또한 자신을 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다시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기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원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록 그 사람에게 뼈아픈 시간이 된다 할 지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복 있는 자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이혼자들이 교회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교회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혼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듯이 이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혼한 사람들만큼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이혼하더라도 무조건 다시 합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 말씀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전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즉, 전 배우자가 회개하거나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든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나뉨을 허락 받을 때까지, 즉 상대방이나 자신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결국 이혼 기간 동안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합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혼인의 엄숙함에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0)"라고 불신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지만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오직 귀 있는 자만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장기려 박사님을 한 번 보자.  그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홀로 두고 이남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끝가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부부로 살 것이라는 기대를 늘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갔다. 결국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분은 독신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부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재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혼은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합할 가능성을 현저하게 막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재혼은 혼인이 아니라 간음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간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재혼을 옹호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남편이 폭행이 심하다고 하자. 그 남편이 평생동안 그렇게 폭행이 심할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돌이키셔서 정말 훌룡한 남편으로 바꾸실지 누가 알겠는가?

        재혼이 더 나은 혼인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재혼한 가정의 85%가 이전 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재혼은 부모들의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혼과 재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좋은 혼인 생활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도 곤란하다.  혼인의 일차적이 목적은 두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만 있다면"이란 말을 교회는 삼가야 한다.  "좋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전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혼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혼과 재혼의 문을 쉽게 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문을 쉽게 열어 버린 미국 교회들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평신도는 고사하고 교회의 저명한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으리라. 어떤 분은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가정을 떠났기 때문에 재혼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목회나 신학 교수를 포기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병든 아내와 도망간 아내, 그리고 목회와 신학 활동,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그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와 동거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목회자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라.  목회나 성도는 포기해도 된다. 당신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돌들을 일으켜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포기한다면 누가 그녀를 보호해 주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음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간음하는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간음하게 하는 죄", 즉 아내를 버리는 죄를 짓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혼과 재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전 남편(아내)과 다시 화합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도저히 서로 같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인간적 상황!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넓은 길은 존재한다.  이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왔을 때, 목사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답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료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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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 평등]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아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부제: 남녀 평등에 대하여

오늘날, 비록 현실적으로는 차별적 요소가 있을 지 모르지만, 남녀 평등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만약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교회들은 정말 큰 위기와 숙제를 안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올 때만해도 교회가 남녀 평등을 선도하였는데, 이제는 그와 반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자신들을 성찰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교회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철저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남녀 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현대적인 관점에 보았을 때, 성경이 남녀 차별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에게 교회 안에서 다스림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스림의 권한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의 권한을 제한한다.  많은 이들이 이것은 차별이 아니고 구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오늘날 누가 보아도 이것은 차별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직 능력에 따른 차별만이 인정될 뿐이지 성에 따른 차별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 중에서 지적으로 훨씬 탁월하고 리더쉽도 있는데, 금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숙제는 이러한 차별이 평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간 사회는 본질적으로 타락하여서 참된 평등의 사회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평등에 대한 올바른 개념도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평등의 모습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마, 이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모습은 삼위 하나님 그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구분된 세개의 위격을 가지시면서도 동시에 본성에 있어서 단일한 이것 보다 더 평등한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대단히 불평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서에 있어서 성부는 항상 1위가 되신다.  더구나 성자는 단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성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한다. 심지어 그분은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성령 하나님 역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성자께서 주시는 말씀만 교회에 주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하나의 평등한 모습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 지체로서의 교회는 한 몸을 이룬다. 이 속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비록, 교회가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간구하고, 강청하고, 심지어 불평하고 원망할 수는 있겠지만(대표적으로 시편의 탄원시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되고 더구나 그리스도께 명령을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역시 아무리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교회를 사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 버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삼위 안의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떻게 보면 아주 불평등한 모습이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성경은 여자와 남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니까 남녀 간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녀간의 차별을 말하는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도 정직한 성경읽기는 아니다. 문제는 남녀가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인가가 중요하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머리 대 머리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머리와 지체로서 하나라고 말한다. 만약, 이것을 불평등의 관계로 본다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불평등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관계 역시 대단한 불평등의 관계이다.

문제는 왜 머리와 몸의 관계를 불평등의 관계로 보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머리와 몸을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떼어 놓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사고 방식 속에는 이것은 조화와 평등이 아니라 차별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머리와 몸의 관계가 지극히 정상적이며 올바른 관계임을 가르친다. 즉, 사랑과 복종은 평등이나 하나의 개념과 상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평등의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까? 오직 사랑과 복종이라는 “차별”적인 요소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성경은 아내에게 대해서 말하기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말한다(벧전 3장 7절).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들의 기도가 막히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생명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는 전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남녀평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남성들은 특히 남자인 목사들은 여자를 귀히 여겨야 한다.  만약 그들이 귀히 여지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주님 역시 그들의 기도를 귀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즉, 아내를 귀히 여기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생사가 걸린 영적인 문제이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아내 귀한 줄 모르는 남편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함을 암시하고 있다. 정말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남자들이 교회 안에서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수적인 교회들은 남녀 차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회들 보다 자신들이 더 성경적으로 옳다고 자만만 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노력을 들여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따른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

[아내를 구체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방법 하나를 제안하고자 한다. 바로 아내에게 경어체를 쓰는 것이다. 내 경험상, 이것은 아내와 다툴 때,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결혼을 앞두거나 갓 결혼한 젊은 청년들에게 권한다. 벧전 3장 7절에 따르면,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다. 잘못된 말 한마디가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반말은 평소 사이 좋을 때는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툴 때는 험한 말이 쉽게 나오게 되고 서로의 관계에 치명상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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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을 위한 배려] 앉아서 소변보는 남편 


남편이 아내를 얼마나 배려하는 지를 알려주는 작은 척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남자들은 변기를 다 쓰면 의자 받침대를 내려 놓는 반면, 아시아 계통의 남자들은 받침대를 올린 그대로 두고 화장실을 나온다.

 

남편이 화장실에 갔다 왔을 때, 변기의 의자 받침대가 내려져 있으면, 그 사람은 아내를 정말 배려하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올려져 있으면 그다지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자 받침대가 내려져 있으면,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 왔을 때 바로 볼 일을 볼 수 있지만, 의자 받침대가 올려져 있으면, 의자 받침대를 내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남편의 오줌 자국이지만, 변기 주위에 남아있는 그것들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미국 남학생 열 대여섯명이 모여 간단한 파티를 하였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고 가서 보니 화장실이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 처럼 깨끗하였다. 그 이유는 그 남학생들 모두가 다 앉아서 소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조준"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서서 용변을 보면 주위로 변기 안 의 물이나 소변이 튀기 마련이다. 만약 모든 남학생들이 서서 용변을 보았다고 생각해 보라.

 

결혼하고 나서 나의 생활 습관이 완전히 바뀐 것 중의 하나가 소변보는 자세이다. 결혼식을 하자마자, 나의 사랑하는 비둘기는 매우 망설이면서 나에게 조용히 진지한 부탁을 하나 하였다. 처음에 나는 무슨 대단한 부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부탁은 앉아서 소변을 봐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매우 황당하였다. "앉아서 소변을 보다니!" 남동생 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곰곰히 들어보니 아주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이후로 나는 앉아서 소변을 본다. 적응이 되고 나니 이제는 앉아서 볼 일을 보는 것이 너무 편하다.

 

소변과 관련된 이야기는 참으로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주제들이다. 믿음의 여성들이여, 속으로만 고민하지 말고 남편에게 진지하게 한 번 부탁해 보기를 바란다.  특히 결혼식 올리자 마자,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워 보일 때, 이런 부탁을 지혜롭게 해 보기를 권한다.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남편이라면, 아내로 하여금 자신이 튀긴 오줌물을 청소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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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가정] 끊을 수 없는 언약으로서의 혼인(10가지 명제)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속에 담긴 뜻은 사람이 정말로 혼인의 끈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창 2: 24, 마 19: 5-6).

 

2.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혼인은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배우자의 죽음이다.

 

3.  배우자가 죽으면, 혼인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에,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 (롬 7: 2).

 

4. 음행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이유로도 이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마 5: 32).

 

5. 불신 배우자가 신앙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떠나면, 신자는 자신의 배우자로 하여금 그냥 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이혼을 당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 스스로 이혼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 (고전 7: 13-15).

 

6. 모든 이혼은 법적인 분리를 뜻할 뿐이며, 그 부부가 실재적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7.  모든 이혼한 배우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부부이며, 따라서 배우자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이와 재혼하는 것은 음행이다.

 

8. 이혼을 한 신자는 그냥 독신으로 지내든지 아니면 전 배우자와 합하든지 할 수 있을 뿐이며 다른 선택은 허용되지 않는다 (고전 7:11).

 

9.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며, 다시 화합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재혼은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성령님의 용서와 화해의 역사를 현저하게 가로막는다.

 
10. 세속주의에 물든 느슨한 결혼관은 부부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가정을 파괴할 뿐이다. 반대로, 혼인을 끊을 수 없는 언약관계로 보는 성경적 혼인관은 부부에게 멍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부의 하나됨을 굳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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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가정] 여보, 우리 각자 다른 교회 한 번 다녀 볼까? 

 

한국 교회는 아직은 부부가 같은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참으로 복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현상도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어린 자녀들이 부모와 다른 교회를 다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과연 앞으로 한국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부모와 자녀도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닐 수 있다면, 부부라고 해서 꼭 같은 교회를 다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더우나 한국 정서상, 결혼하면 여자가 남편의 교회를 따라가야 하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수십년동안 정든 교회를 떠나 결혼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교회를 출석해야 할까?   교회에 다니면서 정도 들지 않고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딴 교회를 다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서 의미있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비록 미국에서 나온 통계 자료지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는 에드나 브라운(Edna Brown)으로 미시간 대학애서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1986년 이후로 373 쌍의 커플을 조사하였는데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부부가 교회를 각자 다른 교회를 출석하는 경우, 불신자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혼율이 거의 같았다. 즉, 이혼에 관한한, 부부가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니면, 불신자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부부가 교회를 같이 다니는 경우에는 부부가 교회를 같이 다니지 않는 경우에 비해서 이혼율이 현저한 차이가 났다.

에드나 브라운의 결과는 서로 다른 교회를 출석하는 것을 고려하는 부부들에게 큰 경종을 울린다.  배우자와 다른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함이겠지만,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오히려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부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면, 같은 교회에서 같은 말씀을 듣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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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면 남인가?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혼인과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을 결혼 식 때 단골로 인용되는 본문이 때문에 모르는 성도들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을까? 이 질문에 처음에는 나눌 수 없다고 확신있게 대답하는 사람들도 점차적으로 나눌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나눌 수 없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관심에서 사라지고, “어떤 경우에 나눌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 난무하게 된다--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이고 세속적 호기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들은 “어떤 경우”를 찾아 해맬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이 “어떤 경우”가 음행이나 고의적 유기와 같은 성경적 원인에 한정되지만 나중에는 불치병, 정신병, 폭행, 도박, 우상숭배 등등으로 확대된다. 이것은 교회 역사가 증명한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혼의 원인은 ‘불가피한 경우’로 정의되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혼의 원인에 대해서 묻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오죽 했으면 이혼 했을까?”라는 동정적 심정이 다른 모든 고려들을 앞도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속에서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시느니라(말 2:16)”라는 성경적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말라기 3장 16절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말라기 2장 16절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그 만큼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본문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근본적인 명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명제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혼이 혼인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이혼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신자들은 불신자와 결혼의 본질에 관한 한 아무런 실제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불신자들도 이혼하면 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 사고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혼이나 재혼과 관련하여 의외로 성도들이, 심지어 성경을 많이 아는 목사나 신학 교수들조차 잘 모르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7장 10-11절 말씀이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이것은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는 몇 개 되지 않는 성경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관하여 아주 명시적인 가르침을 준다. 첫째,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이혼을 할 경우에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독신이고 다른 하나는 전 남편과 다시 화합하는 것이다. 셋째, 재혼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혼이 결혼의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혼이 결혼의 끝이라고 했다면, 사도 바울은 그 배우자에게 독신이나 전배우자와의 재결합을 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은 사람이 법적으로 나눈 것이지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법적인 분리와 실재적인 분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라 전남편과 다시 화해하기를 소망하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참고 인내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이혼한 부부가 서로 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짝지은 것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두 부부는 여전히 하나로 묶여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누구든지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라고 선언하셨다. 만약 이혼이 혼인의 끝이라면 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음행이 될 수 있겠는가? 이혼은 재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은연중에 “이혼하면 남”이라는 불신자들의 생각이 성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이혼할 수 있는가?”라는 바리새인적인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어떤 경우”라는 늪에서 헤어 나와 “끊을 수 없는 언약의 끈(the indissoluble bond of covenant)”이라는 성경적 혼인관을 붙들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는 혼인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적 안목을 갖도록 하자. 이것이 이혼과 재혼이 난무하는 세속화된 한국 사회에서 가정을 바로 세우고 교회를 튼튼하게 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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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에게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허락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은 저희와의 관계를 중히 여기셔서 목숨까지 버려가며

그 관계를 회복해 주셨지만, 저희는 주님과의 관계를

막 연하게 생각하며 저희들과의 관계도 손쉬운 관계로만 여겨 왔습니다.

 

주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정말 소중한 관계를 이루어나가게 도와주소서!

 

주님!

저희 가정에 비둘기 같은 평화를 주옵소서! 온 가족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묶어 주셔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게 허옵소서!

 

먼저 저희 가정에 주신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깨닫고

감사할 때 행복이 있사오니 범사에 감사하며

불평이나 원망하는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행복과 사랑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불행과 다툼을 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사탄의 장난이오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가정,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가정, 찬송과 기도가 언제나

끊이지 않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희생과 양보와 절제 속에 행복이 있음을 깨달아

그러한 생활을 하게 하시며 저희 가정의 행복이

이웃과 사회와 온 인류의 행복의 밑거름이 되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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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주일 대표 기도문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저희를 불러 주셔서

주님 전에 함께 모여 예배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이 시간 저희들이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갖게 하시며,

거짓 없는 마음을 주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는 항상 저희들에게 한 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건만, 어리석은 저희들은 주님의 귀한

사랑을 잊은 채 살곤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사귐보다 오히려 세상 친구들과 더 가까이 지내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고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무능함과 부족함은 이 시간 회개하오니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매일의 하루를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게 하시고,

이웃을 돌아보며 전도에 힘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 영혼을 구하는 귀한 주님의 사명에 다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전도의 부지런함을 일깨워 주시옵오서.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아 우리의 부모님들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낳으시고 기르시며 애쓰시는 그 사랑과 정성에 감사하지 못하고,

부모의 가르침에 불순종하기도 했던 저희들입니다.

사랑과 기도와 눈물로 길러주신 어버이의 마음을 잊지 말고,

주의 말씀 안에 거하며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녀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버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크고 놀라우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하신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부모에게 순종하며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마땅히 자녀의 도리임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께서 맡기어 주신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주장과 마음의 욕심으로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기도로 양육하여

주의 바른 자녀로 만들 수 있도록 훈육의 지혜를 부어 주옵소서.

 

은혜로우신 주님,

 

믿지 않는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가족 모두가 함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인지요.

가족 모두가 한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선 가정을 만들 수 있도록 더욱 힘써 기도하는 가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계속되는 세계 불황에 이 나라의 경제가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주여, 행여 경제적인 문제로 실족하여

상처받는 자가 없도록 주여 보살펴 주시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주님께서 지혜와 총명함을 더해 주셔서 하루속히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어려울 때 일수록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들과 하나되어

이 난관을 헤쳐 나가며,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는

복된 나라로 만들어 주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귀한 말씀을 선포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붙들어 주셔서,

 

힘있고 권세 있는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시고 목마른 영혼마다

생수가 되는 은혜의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의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이 시간 드리는

저희들의 감사가 지극히 미비할지라도 주님의

한량없으신 크신 사랑으로 받아 주시옵소서.

 

언제나 함께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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