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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용서와 화해의 기도 (Prayer of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당신의 사랑을 제게 부어주셔서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하시고,

미움과 원망과 비난과 불평은 다 사라지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제 마음을 만지셔서 마음의 분노가 사라지게 하시고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언행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지금도 제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습니까?

그 마음이 변화되게 하옵소서. 사랑하게 하옵소서

용서하고 이해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제가 먼저 사랑하고, 용서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혹시 그도 나 때문에 받았을지 모르는 상처가 있으면

그 상처도 치유하여주옵소서

 

서로 주고 받은 상처를 치유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에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부어주옵소서.

 

형제가 저를 미워해서 마음이 몹시 아팠고 상했습니다.

그 상처에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을 부으셔서 치유하여 주옵소서.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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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이 넘는 노인이 되는 연습  그리스도인의 가정  
 
 

-- 어느 한 미국 할머니 집을 방문하고 나서 --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대에 접어 들고 있다. 영아 사망, 교통사고 등을 포함해서도 그 정도 수치라니, 이제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노인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노인이 될 준비를 잘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지 저축을 잘 하여 여생을 편히 보낼 준비를 하라는 질문은 아니다. 노인으로서 정말 존경을 받을 훈련을 제대로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경로사상은 이제 옛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도 특히 그러하다. 노인들은 코메디 프로에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오히려 노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존경을 받을 훈련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이 그 자체가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게 하여(대표적으로 존대어), 나이가 들면 자동적으로 존대를 받게 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서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우러나오게 하는 훈련은 잘 못하는 것 같다.

지난 주 나는 이곳에 사는 룻이라고 하는 독신 할머니를 방문하였다. 내가 미국인 교회 다닐 때, 친절하게 잘 대해 주신 분이다. 이제 나이가 80을 바라 보는 분이시다. 아직, Nursing Home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다. 수퍼마켓에서 만났는데,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여 기저귀를 찰 정도이지만 아직까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여, 남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셨다.  만남 김에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 하여, 그 다음날 2시 쯤 갈 것이라고 약속을 잡았다.  그 다음날 1시 45분 쯤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2시 20분 쯤에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간에 맞추어 도착을 하였다. 20분 늦은 이유는 그곳에 도착하여서야 알 수 있었다. 룻 할머니는 머리를 드라이하여 머리를 단정히 가꾸어 놓았고, 옷도 화사한 것으로 갈아 입고, 화장도 진하게 한 후에 우리 가정을 맞을 준비를 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우리 아이 셋 모두를 위해서 선물을 하나씩 준비 놓았다. 처음, 할머니에 어색하였던 아이들도 선물을 받으니 금새 친해졌다.  큰 딸아이의 생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크와 간단하 다과도 친히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찍어 두었던 우리 아이들의 사진들도 모아서 주었다. 80 먹은 할머니의 집이지만, 우리나라 신혼 방보다 더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70이 넘게 되면, 죽을 준비를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자기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변호사를 선임하여 유언장을 작성한다. 자식 중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교회, 학교, 사회단체, 장학금 등으로 기부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교회는 나이든 분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그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교회에 기부하는 액수도 많아 질 것이기 때문이다.

룻 할머니를 방문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인가?   나이든 사람들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왜 존경을 받지 못하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기성 세대들이, 모두 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도덕성에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탈법과 편법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고, 쓸데없는 권위로 합리적인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이든 사람이 왜 존경을 받아야 할까?  나이 자체가 많다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의견이 왜 경청되어야 할까?  단순히 경험이 많기 때문일까?  중요한 것은 나이가 많다는 자체가 아니라, 나이를 어떻게 먹었느냐일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나이 든 사람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에 대한 증인이다.

룻 할머니의 경우,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분은 특별히 열심있는 성도는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성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정과 부활의 확신 속에서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 속에서 참으로 신앙인으로 마지막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이곳에 있는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한결같이 느낀 것은, 비록 음성은 약하지만, 젊은 목사들 보다 성경 해석과 주석에 있어서 훨씬 탁월하다 것이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 은퇴하신 목사들이 설교를 들어 보면, 성경 해석 보다는 자신의 옛날 경험담을 무용담 비슷하게 하는 것과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나이가 들 수록, 노인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자신의 옛날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 깊은 체험과 확신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젊은이들에게 존경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도 노인 사회에 접어 들었다. 아무리 젊었더라도, 어떻게 늙어야 할 지, 어떻게 노년을 보낼 지,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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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아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부제: 남녀 평등에 대하여

오늘날, 비록 현실적으로는 차별적 요소가 있을 지 모르지만, 남녀 평등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만약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교회들은 정말 큰 위기와 숙제를 안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올 때만해도 교회가 남녀 평등을 선도하였는데, 이제는 그와 반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자신들을 성찰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교회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철저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남녀 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현대적인 관점에 보았을 때, 성경이 남녀 차별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에게 교회 안에서 다스림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스림의 권한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의 권한을 제한한다.  많은 이들이 이것은 차별이 아니고 구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오늘날 누가 보아도 이것은 차별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직 능력에 따른 차별만이 인정될 뿐이지 성에 따른 차별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 중에서 지적으로 훨씬 탁월하고 리더쉽도 있는데, 금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숙제는 이러한 차별이 평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간 사회는 본질적으로 타락하여서 참된 평등의 사회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평등에 대한 올바른 개념도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평등의 모습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마, 이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모습은 삼위 하나님 그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구분된 세개의 위격을 가지시면서도 동시에 본성에 있어서 단일한 이것 보다 더 평등한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대단히 불평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서에 있어서 성부는 항상 1위가 되신다.  더구나 성자는 단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성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한다. 심지어 그분은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성령 하나님 역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성자께서 주시는 말씀만 교회에 주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하나의 평등한 모습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 지체로서의 교회는 한 몸을 이룬다. 이 속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비록, 교회가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간구하고, 강청하고, 심지어 불평하고 원망할 수는 있겠지만(대표적으로 시편의 탄원시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되고 더구나 그리스도께 명령을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역시 아무리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교회를 사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 버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삼위 안의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떻게 보면 아주 불평등한 모습이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성경은 여자와 남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니까 남녀 간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녀간의 차별을 말하는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도 정직한 성경읽기는 아니다. 문제는 남녀가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인가가 중요하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머리 대 머리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머리와 지체로서 하나라고 말한다. 만약, 이것을 불평등의 관계로 본다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불평등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관계 역시 대단한 불평등의 관계이다.

문제는 왜 머리와 몸의 관계를 불평등의 관계로 보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머리와 몸을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떼어 놓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사고 방식 속에는 이것은 조화와 평등이 아니라 차별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머리와 몸의 관계가 지극히 정상적이며 올바른 관계임을 가르친다. 즉, 사랑과 복종은 평등이나 하나의 개념과 상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평등의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까? 오직 사랑과 복종이라는 “차별”적인 요소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성경은 아내에게 대해서 말하기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말한다(벧전 3장 7절).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들의 기도가 막히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생명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는 전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남녀평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남성들은 특히 남자인 목사들은 여자를 귀히 여겨야 한다.  만약 그들이 귀히 여지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주님 역시 그들의 기도를 귀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즉, 아내를 귀히 여기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생사가 걸린 영적인 문제이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아내 귀한 줄 모르는 남편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함을 암시하고 있다. 정말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남자들이 교회 안에서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수적인 교회들은 남녀 차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회들 보다 자신들이 더 성경적으로 옳다고 자만만 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노력을 들여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따른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

[아내를 구체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방법 하나를 제안하고자 한다. 바로 아내에게 경어체를 쓰는 것이다. 내 경험상, 이것은 아내와 다툴 때,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결혼을 앞두거나 갓 결혼한 젊은 청년들에게 권한다. 벧전 3장 7절에 따르면,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다. 잘못된 말 한마디가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반말은 평소 사이 좋을 때는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툴 때는 험한 말이 쉽게 나오게 되고 서로의 관계에 치명상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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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혼인 주례식에서 목사들은 주로 다음의 성경 구절로 예식을 마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7). 오늘날 이 구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혼인식 마지막에 첨부되는 한 구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혼인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 의해서 나뉘어 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주의 말씀과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러한 말씀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천생연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구절이 한국 교회에서 그 강조점이 본문의 의도와는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세상 사람들의 "천생연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가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주셨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준" 배우자를 위해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본문의 강조점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혼인의 엄숙성"이라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사의 주례로 짝이 지어지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례자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감독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혼외 정사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롬 1:23)"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부부의 사랑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남편이 실직을 해서 경제적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아내가 정신병이나 불치병을 앓고 있어도, 심지어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왜냐하면 혼인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 19:7은 혼인을 앞둔 청년이나 혼인식의 주인공들에게도 적합한 말씀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불가피한 경우"로 인해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있는 부부이다.  혼인식을 막 치룬 부부들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는 말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 아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불신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 서류를 앞에 둔 부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교회당 안에서) 혼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혼은 사람 앞에서 (법정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혼의 거의 불가능성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혼한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숫자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어떤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남편은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고 자녀 교육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에 남편은 생을 자포자기하고 아내에게 오히려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평생동안 성의 즐거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내에게 엄청난 짐이다. 남편이 자기 스스로가 이혼을 요청할 때, 아내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을 했는가?"이다. 그들은 혼인식에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겠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자들이다.  "배우자가 건강하고 부유할 때"라는 조건이 혼인에 붙는다면, 우리는 혼인을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혼인의 본질을 계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이 없다. 100번을 혼인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혼인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음행"에서만 나온다. 요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이 음행을 확대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라.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그렇게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행 보다 가정 폭력이 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이 이혼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에도 어느 기간 동안 별거를 하든가 아니면 그 남편을 법에 호소하여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혼이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방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부부생활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이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허락"이지 "장려"나 "권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배우자 중 한 명이 음행을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오해이다. 어떤 교인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혼하기 위해 의도적인 음행(비록 자신이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된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편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부부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비록 이혼하더라도 . .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의 연고(불신자의 핍박)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이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 10, 11)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다.  1)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엄격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  2) 이 말씀은 혼인을 앞에 둔 사람이나 이혼을 이미 한 사람들이 아니라 혼인을 이미 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3) 강조점은 역시 이혼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에게 만일 이혼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안 된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심하여야 한다: 독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전 남편과 화합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이러한 결단 없는 이혼은 교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은 우리 임의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혼만큼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교회 안에서의 이혼은 재 결합을 전제로 한 이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사도 바울은 "갈릴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시 전 배우자와 화합하라고 명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본문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가 상대방 배우자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우리는 이혼은 혼인의 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이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하나됨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나뉨은 사람에 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왜 "이혼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는가?  하나의 대답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나눈 것"과 "하나님이 나눈 것"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누고 계시는가? 이혼과 나눔의 동일시 할 때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두 배우자가 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혼인식)이 필요로 하듯이, 두 사람이 나누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은 바로 죽음(장례식)이다.  한 배우자가 죽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혼인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 (고전 7:39). 그렇다면 상대편이 죽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들에게조차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다음에 바로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혼인 적령기를 앞두고 있는 청년에게 권하는 독신(7:32-34)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상처한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일차적인 권면은 재혼이 아니라 독신이며, 따라서 독신의 복됨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상담학과는 구별되는 말인가?

        이혼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권면하신다. 하나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다. 혼인의 끝이 될 수도 없다. 혼인의 끝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한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한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 기간 동안 원수사랑의 훈련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기간은 원수인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또한 자신을 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다시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기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원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록 그 사람에게 뼈아픈 시간이 된다 할 지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복 있는 자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이혼자들이 교회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교회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혼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듯이 이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혼한 사람들만큼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이혼하더라도 무조건 다시 합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 말씀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전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즉, 전 배우자가 회개하거나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든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나뉨을 허락 받을 때까지, 즉 상대방이나 자신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결국 이혼 기간 동안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합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혼인의 엄숙함에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0)"라고 불신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지만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오직 귀 있는 자만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장기려 박사님을 한 번 보자.  그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홀로 두고 이남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끝가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부부로 살 것이라는 기대를 늘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갔다. 결국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분은 독신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부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재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혼은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합할 가능성을 현저하게 막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재혼은 혼인이 아니라 간음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간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재혼을 옹호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남편이 폭행이 심하다고 하자. 그 남편이 평생동안 그렇게 폭행이 심할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돌이키셔서 정말 훌룡한 남편으로 바꾸실지 누가 알겠는가?

        재혼이 더 나은 혼인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재혼한 가정의 85%가 이전 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재혼은 부모들의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혼과 재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좋은 혼인 생활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도 곤란하다.  혼인의 일차적이 목적은 두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만 있다면"이란 말을 교회는 삼가야 한다.  "좋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전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혼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혼과 재혼의 문을 쉽게 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문을 쉽게 열어 버린 미국 교회들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평신도는 고사하고 교회의 저명한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으리라. 어떤 분은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가정을 떠났기 때문에 재혼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목회나 신학 교수를 포기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병든 아내와 도망간 아내, 그리고 목회와 신학 활동,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그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와 동거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목회자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라.  목회나 성도는 포기해도 된다. 당신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돌들을 일으켜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포기한다면 누가 그녀를 보호해 주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음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간음하는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간음하게 하는 죄", 즉 아내를 버리는 죄를 짓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혼과 재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전 남편(아내)과 다시 화합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도저히 서로 같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인간적 상황!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넓은 길은 존재한다.  이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왔을 때, 목사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답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료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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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머니 모시기--양로원에서?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노인들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귀찮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효를 강조해 온 한국인들도 이제는 노부모를 서로 안 모시려고 한다.  더구나 이제는 양로원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만 있으면 노무보를 집에서 모시기 보다는 양로원으로 보내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보편화 되어 있어서 기독교인들에게 조차 좋은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생각들이 과연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5: 4).  사실 이 본문은 헬라어 원문 자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자세한 것은 칼빈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한 칼빈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볼 수 있다). 특히 "집에서"라는 말은 원문상 "집을"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현대어 역본들은 "집에서"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어 성경에 나온 "효를 행하여"라는 말은 치명적인 번역의 실수이다. 왜냐하면 "효"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은 "경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부모를 섬기는 것은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 킹제임스 성경의 경우 문법적인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집에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성경은 "효"가 아니라 "경건"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경건은 원래 "하나님 같은"이라는 뜻인데, 어떻게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경건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너무 경건을 추상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경건이라고 하면, 기도생활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경건이 무언인지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27절).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생각과 경건의 뚜렷한 차이를 본다. 경건은 홀어머니를 돌아보는 것이고 세속적인 생각은 홀어머니를 홀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경건)한다고 하면, 결코 홀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는 것을 쉽게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경건을 실천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건은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으로 구체적을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홀어머니를 집에서 모셔야 하는 것은 부모에게 받은 것을 보답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특히 어머니로부터 어렸을 때, 거의 무한대의 은혜를 받고 자란다.  그 어머니가 힘이 없어서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회피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자"라고 정죄받기 때문이다(딤전 5: 8).

유교 사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우리나라는 아들이, 그것도 첫째 아들이 부모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지게 된다. 이것 때문에 서로 아들을 가지려고 하고, 아들을 갖지 못하면 실망하거나 더 나아가 아직 나지도 않은 딸 아이를 살해하는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부모를 보답한다는 측면에서, 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것 보다 딸이 부모를 모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제 생활에서 부모를 모신다는 것은 남자 보다는 여자가 훨씬 많은 부담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 보다 친정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며느리(딸)에게는   훨씬 부담이 덜 될 것이다. 이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교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더구나 성경에 따르면,  홀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것은 자녀 뿐만 아니라 손자(원문 따르면 조카)에게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부모를 집에서 모시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크나 큰 변증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효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모두가 양로원을 선호하는 세속적인 흐름에 맞서 기독인들이 노부모를 집에서 섬긴다면 우리는 그러한 비난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의 올바를 행위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것이다."  야고보서 역시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코람데오의 정신을 보게 된다.  이 코람데오는 고려신학대학원의 모토이고 고신정신을 대변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코람데오는 거창한 구호도 아니고 우리 생활과 멀리 떨어져 고귀한 이상도 아니다. 우리가 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코람데오의 정신을 가장 잘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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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적 경험에서 본 혼전 성관계 
 
 

인디애나에 Grace Theological Seminary라는 곳이 있다.  독일계 재세례파의 후예들이지만 칼빈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신학적으로 세대주의를 지향하는 독특한 교단이었다.  아카데미 한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현장중심의 실천신학 중심의 신학이었고 교수들은 너무나 인격적이었으며 학생을 사랑하는 태도에 있어서 탁월하였다.  이곳에서 통역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혼전 성관계에 대한 강의가 인상이 깊어 소개하고자 한다.

성경에는 혼전 성관계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다룬 곳이 거의 없다. 그러나 간음을 혼인의 언약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행위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혼전 성관계 역시 명백한 간음 행위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혼전 성관계를 그렇게 나쁜 행위로 보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특히 결혼을 앞둔 사이라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자의 생각은 사랑 앞에서는 절대적인 예외가 없다고 보는데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신학은 대체적으로 사랑을 하나님을 본질로 설명하면서 정의의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만드는데 개혁주의 신학은 한 번도 정의의 하나님 혹은 법의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Soto 교수는 결혼 상담을 15년간 해 온, 결혼 상담의 베테랑이었다. 그에게 혼인 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상담하기 위해 온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면 Soto 교수는 제일 처음에 이 질문을 똑 같이 던졌다고 하는데, 놀라웁게 15년 동안 상담을 해온 모든 사람들의 대답이 한결같이 Yes였다. 그 질문은 바로 혼인 전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가였다.

이 상담 결과에 근거하여 Soto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였다. 1. 혼전 성관계는 상대방의 신뢰를 깨뜨린다.  2.  혼전 성관계로 깨드려진 신뢰를 잘 회복이 되지 않는다. 3. 부부간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의 만족은 서로간의 신뢰감에 의해서 증진되기 때문이다. 성생활의 불만족으로 자연스럽게 부부간의 불화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Soto 교수의 상담 결과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 맞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서로간의 사랑의 행위는 일시적으로 육체적인 기쁨을 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이 언약 밖에 있을 때는 그 사랑의 행위는 오히려 혼인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담 결과에 근거하여 Soto 교수는 젊은이들이 주례를 부탁할 때, 제일 먼저 그들에게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한다. 만약 없다면 혼인식 전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게 한 후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게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맹세하게 한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그 시점으로부터 혼인식을 6개월 연장시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속도위반"한 선배를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결혼식 이후 몇개월 되지 않아 출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선배도 누구나 생각하기에 착한 신앙인이었고 자매도 아주 신실한 자매였다. 아니다 다를까? 얼마전에 들려 온 소식에 의하면, 선배는 다른 여자가 생겼고 이혼하기 위해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자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들의 결혼식 적에, 교회나 그를 아는 형제 자매가 그들의 혼전 관계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권징이나 죄의 고백없이 혼인식은 모두의 축하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제라도 목사는 젊은이들에게 혼인의 신성함을 잘 가르쳐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고전 13장을 보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혼인식 전까지 참지 못하는 사람이 평생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을 혹은 남편이 될 사람을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전 성관계를 심각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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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천하보다 귀한 생명


지금 신학계에서 가장 큰 이슈는 인간이란 무엇이냐입니다. 그 중에서도 언제부터 인간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입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신학의 문제입니다. 과학이나 의학조차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과학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고,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고 요한은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하는가라는 문제는 우리 삶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늘 일상적인 문제는 아니라 할 지라도 매우 결정적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일반 의학계에서도 (대표적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 수정이 된 순간부터 생명이라고 보고 그것을 온전한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아마 여기에 대해서는 일반 성도님들은 다 수긍하리라 보십니다. 시편 139편은 태에서부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낙태의 문제입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였을 때, 낙태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배속의 생명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생명이 수정된 때부터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낙태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낙태라는 말 보다는 "태아살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낙태에 대한 문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가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1. 어린 여학생이 임신한 경우,  2. 혼외 정사로 임신한 경우, 3. 성폭행으로 인하여 임신한 경우, 4. 기형아인 경우.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신앙의 선배들은 낙태는 불가하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심지어, 산모가 위독한 경우라 할 지라도 낙태는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입니다.

그 생명의 출생으로 인하여 야기될 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의 극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교사들이 낙태 불가라는 결정을 한 가장 큰 이유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명백한 가르침 때문이고, 무엇보다 생명이란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정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할 때는 "생명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생명을 마음대로 한다면, 우리는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낙태와 더불어 관계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시험관 아기의 문제입니다. 잘 아시다 시피, 이것은 채 외에서 수정시켜 임신을 하게 하는 기술인데, 만약 이 기술이 수정란 하나만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여러개의 수정란을 만듭니다. 이 경우에도, 산모가 수정란 전부를 사용하면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대부분 첫번째가 성공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나머지 수정란은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수정란부터 참된 생명을 간주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시험관 아기에 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없는 부모들은 어떻게 하란말이냐"라고 물으실 분이 계실 지 모르겠지만, 입양은 아이가 없는 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피"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에서 입양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 만큼은 '피'나 '지역'이나 '학벌'을 따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데 교회 안에서 이것은 치유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교회에서 고쳐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존재자체는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만약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자기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그 불쌍한 어린 생명을 우리가 자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낙태율이 세계 1위라는 것, 유아 수출이 세계 1위라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만큼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이 상당히 희박한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상대방에게 화가나면 가장 쉽게 나오는 말이 "너 죽여"라는 말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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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하지 아니하며--가정폭력에 대한 성경적 교훈 
 

개그 우먼 이경실씨로 인하여 요즘 가정 폭력이 아주 중요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사실 남편이 아내에 대한 폭력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명에 한 명꼴로 혹은 적어도 3명에 한 명 꼴로 남편이 아내를 때린다고 한다. 아마 신자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 목사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남편들의 폭력은 성도라고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목사직이 다른 직업과 다른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대부분의 경우, 가정과 직장이 분리되어 있는 반면, 목사의 경우에는 가정과 일터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지 못하다. 사모는 가정에만 충실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모라 하더라도 사모는 교회에서 영적 어머니로 간주된다. 특히 교회의 여성들의 목소리가 목사에게 직접 가기 보다는 사모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목소리 중에, 상당수는 그냥 단순한 불만이지만 어떤 것은 목사가 꼭 알아야 할 정보를 담는 경우도 있다. 사모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든지 남편 목사에게 알리려고 할 것이고, 남편은 그러한 것을 목회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목사의 가정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는 서로가 정말로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가정 자체가 매우 불행해 질 수 있다.

주위의 경험상, 목사가 아내로부터 참기 가장 참기 힘든 경우는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 아마도 사모만큼 설교에 대한 스트레스가 강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목사의 모든 삶을 다 아는 자로서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설교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의 기준을 나의 아내에 기준을 맞추고 있다. 만일 나의 아내가 잘했다라고 평가하면, 진짜로 잘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의 형편에서 목사에게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사모외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사모의 설교비평을 무조건 폄하하기 보다는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이 좋다고 본다.

부부가 서로 이렇게 이해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인격적인 미성숙으로 인하여 그러한 충고들이 서로를 세우기보다는 논쟁과 다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이 심해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타로 발전하게 된다. 구타가 일어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구타는 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때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아내가 맞을 짖을 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시킨다. 구타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는 생각은 구타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게 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나도 잘못했지만 당신은 더 잘못했어"라는 생각은 다음에도 부부간의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도록 만든다.

목회서신인 디모데서와 디도서(딤전 3:3, 디 1:7)는 감독의 자격 중 하나가 구타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로 선출될 정도라면 구타라고 했을 때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아마 그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맨날 주먹질이나 하였다면 아예 직분에 선출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구타는 가정폭력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목사와 장로를 세우기 전에, 그들이 가정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지 그렇지 않은 지 세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다스리는 하는 일을 그 아내나 자녀들이 보는 것은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맞는 것, 그 자체만큼 고통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아내에게는 그렇게 대하면서도 교회의 여성도들에게는 정말 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그 아내가 "당신은 좋은 남편 두어서 참 행복하겠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직분자가 구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아마 대부분의 경우에 가정 폭력이 교회에 쉽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디도서는 어떤 사람이 구타할 위험성이 많은 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디도서는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을 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면 구타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다. 나는 이것들을 따로 보기보다는 같이 보았으면 한다. 구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고집대로 하기를 원한다." 즉 왜 다툼을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타하는 사람들은 또한 대개 급히 분을 내는 사람들이다. 즉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쉽게 큰 소리치고 쉽게 열을 내고 쉽게 손이나 발이 나간다. 디모데서는 감독은 "관용하는 자"여야 한다고 하는데, 오래 참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가정 폭력의 경우 상당수가 술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주위에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교회에서 가정 폭력이 설교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목사가 가정 폭력이 얼마나 가정에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는지, 아니면 교인들은 가정 폭력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든지 아니면, 목사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디도서나 디모데서에서 말하는 구타를 "가정 폭력"이라고 한정시키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구타를 상습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 직분에서 면직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가정 폭력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정 폭력은 교회 내에서 반드시 제거하여야 할 악이라는 생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연약한 그릇"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정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아내를 때리면, 그 그릇은 약하기 때문에 깨어지게 되어 있다. 깨어진 다음 후회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맞은 아내는 깨어진 심령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남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맞고 사느니, 차라리 이혼하라." 하지만, 아내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정말로 믿는다면,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맞기기를 권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9-21) 이 말씀은 누구 보다 매맞고 살아가는 믿음의 여성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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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여인--남편의 면류관  그리스도인의 가정

 

어진 여인은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2: 4]

잠언에는 믿음의 여성에 대한 지혜로운 교훈을 많이 담고 있다. 잠언에 따를 때, 여성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현숙함"이다. 이 현숙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일"이라는 단어이다. 이 카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구약 성경에는 거의 대부분 "강함" "부" "힘"으로 번역되어 있고 대부분 남자와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간혹 여자와 관련되어 쓰이기도 하였다. 오늘 본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단어는 여기에서는 "어진"으로 번역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현숙한"으로(잠 31: 10) 번역되어 있다.

사실, 이 카일이라는 단어는 여자에게 적용될 경우 이상한 의미가 될 가능성이 많아서 영어 번역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다. 우리 나라 성경 "어진" "현숙한"이란 단어 역시 이 점에서 문제가 많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부드러움과 유순함을 떠오르게 하고, 원어가 갔고 있는 "강함"이라는 의미를 거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의 가장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70인 역은 "남자 같은"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결국 "강함"이라는 개념과 "고결한 인격"을 포함하는 단어가 필요한데, 나는 "카일"에 해당하는 가장 좋은 한국어 단어는 "굳센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좋은 우리나라 표현은 "생활력이 강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잠언 31장에 보면 이 당찬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잘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31장에 따르면, 굳센여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부지런함이다.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식물을 나눠주며",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굳센여인" 반대되는 여인은 "부끄러움을 끼치는 여인"이다. 전자가 남편의 면류관이 된다면, 후자는 남편의 뼈를 썪게 만든다. 그러면 어떤 여인이 부끄러움을 끼치는 여인일까? 앞에서 말했다시피, 굳센 여인은 부지런한 여인임에 반하여, 부끄러움을 끼치는 여인은 게으른 여인이다. 이것은 바로 두 장 앞의 10장 5절이 그대로 말하여 주고 있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즉 자기 할 일을 제 때에 하지 않고 무책임한 여자가 바로 수치스러운 여자인 것이다. 이러한 여자는 남편의 뼈를 썪게 한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출근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고, 아이들은 학교 가야 하는 데 여전히 잠이나 자고 있는 아내를 본 남편이라면, 아마 "뼈가 썩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리라 본다.

성경에서 이 현숙한, 아니 "굳센" 여인은 누구일까?  성경에서 이 단어가 유일하게 적용된 여자는 바로 "룻"이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이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즉 룻은 자신이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로 "굳센 사람"이었다. 왜 사람들이 룻을 "굳센 사람"으로 보았을까?

우리는 그 힌트를 보아스의 종이 보아스에게 전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는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라"고 답하였다. 즉, 룻은 시어머니의 강한 호소력있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한 심지를 지켜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게 되었고, 비록 남편도 자녀도 없는 과부에 불과하였지만 억센 남자들 세계에서도 굴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다. 그리고 라헬이 몸이 약하여서 베냐민을 낳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에브랏에서, 룻은 "유력하게 될 것"이다(룻 4:11). 여기서 유력하다는 말 역시 히브리어로 "카일"이라는 단어인데, 현숙하다는 말 대신 우리나라 말에서 유력하다는 말이 되었다. 즉, 문자적으로 보았을 때, 룻은 "카일"한 여인이었고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계속 "카일"을 행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룻과 같이 "굳센 여인" 여인은 정말 남편에게 면류관과 같은 존재이다.

누가 현숙한(굳센)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잠 3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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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불가피 한 경우"에는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한국 교회 세태를 통탄하면서 -

                                                                이성호 목사

        혼인 주례식에서 목사들은 주로 다음의 성경 구절로 예식을 마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7). 오늘날 이 구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혼인식 마지막에 첨부되는 한 구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혼인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 의해서 나뉘어 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주의 말씀과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러한 말씀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천생연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구절이 한국 교회에서 그 강조점이 본문의 의도와는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세상 사람들의 "천생연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가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주셨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준" 배우자를 위해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본문의 강조점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혼인의 엄숙성"이라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사의 주례로 짝이 지어지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례자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감독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혼외 정사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롬 1:23)"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부부의 사랑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남편이 실직을 해서 경제적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아내가 정신병이나 불치병을 앓고 있어도, 심지어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왜냐하면 혼인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 19:7은 혼인을 앞둔 청년이나 혼인식의 주인공들에게도 적합한 말씀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불가피한 경우"로 인해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있는 부부이다.  혼인식을 막 치룬 부부들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는 말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 아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불신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 서류를 앞에 둔 부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교회당 안에서) 혼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혼은 사람 앞에서 (법정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혼의 거의 불가능성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혼한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숫자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어떤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남편은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고 자녀 교육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에 남편은 생을 자포자기하고 아내에게 오히려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평생동안 성의 즐거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내에게 엄청난 짐이다. 남편이 자기 스스로가 이혼을 요청할 때, 아내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을 했는가?"이다. 그들은 혼인식에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겠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자들이다.  "배우자가 건강하고 부유할 때"라는 조건이 혼인에 붙는다면, 우리는 혼인을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혼인의 본질을 계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이 없다. 100번을 혼인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혼인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음행"에서만 나온다. 요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이 음행을 확대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라.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그렇게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행 보다 가정 폭력이 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이 이혼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에도 어느 기간 동안 별거를 하든가 아니면 그 남편을 법에 호소하여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혼이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방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부부생활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이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허락"이지 "장려"나 "권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배우자 중 한 명이 음행을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오해이다. 어떤 교인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혼하기 위해 의도적인 음행(비록 자신이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된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편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부부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비록 이혼하더라도 . .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의 연고(불신자의 핍박)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이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 10, 11)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다.  1)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엄격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  2) 이 말씀은 혼인을 앞에 둔 사람이나 이혼을 이미 한 사람들이 아니라 혼인을 이미 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3) 강조점은 역시 이혼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에게 만일 이혼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안 된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심하여야 한다: 독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전 남편과 화합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이러한 결단 없는 이혼은 교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은 우리 임의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혼만큼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교회 안에서의 이혼은 재 결합을 전제로 한 이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사도 바울은 "갈릴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시 전 배우자와 화합하라고 명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본문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가 상대방 배우자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우리는 이혼은 혼인의 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이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하나됨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나뉨은 사람에 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왜 "이혼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는가?  하나의 대답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나눈 것"과 "하나님이 나눈 것"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누고 계시는가? 이혼과 나눔의 동일시 할 때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두 배우자가 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혼인식)이 필요로 하듯이, 두 사람이 나누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은 바로 죽음(장례식)이다.  한 배우자가 죽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혼인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 (고전 7:39). 그렇다면 상대편이 죽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들에게조차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다음에 바로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혼인 적령기를 앞두고 있는 청년에게 권하는 독신(7:32-34)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상처한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일차적인 권면은 재혼이 아니라 독신이며, 따라서 독신의 복됨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상담학과는 구별되는 말인가?

        이혼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권면하신다. 하나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다. 혼인의 끝이 될 수도 없다. 혼인의 끝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한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한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 기간 동안 원수사랑의 훈련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기간은 원수인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또한 자신을 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다시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기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원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록 그 사람에게 뼈아픈 시간이 된다 할 지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복 있는 자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이혼자들이 교회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교회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혼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듯이 이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혼한 사람들만큼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이혼하더라도 무조건 다시 합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 말씀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전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즉, 전 배우자가 회개하거나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든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나뉨을 허락 받을 때까지, 즉 상대방이나 자신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결국 이혼 기간 동안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합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혼인의 엄숙함에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0)"라고 불신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지만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오직 귀 있는 자만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장기려 박사님을 한 번 보자.  그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홀로 두고 이남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끝가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부부로 살 것이라는 기대를 늘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갔다. 결국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분은 독신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부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재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혼은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합할 가능성을 현저하게 막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재혼은 혼인이 아니라 간음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간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재혼을 옹호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남편이 폭행이 심하다고 하자. 그 남편이 평생동안 그렇게 폭행이 심할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돌이키셔서 정말 훌룡한 남편으로 바꾸실지 누가 알겠는가?

        재혼이 더 나은 혼인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재혼한 가정의 85%가 이전 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재혼은 부모들의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혼과 재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좋은 혼인 생활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도 곤란하다.  혼인의 일차적이 목적은 두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만 있다면"이란 말을 교회는 삼가야 한다.  "좋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전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혼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혼과 재혼의 문을 쉽게 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문을 쉽게 열어 버린 미국 교회들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평신도는 고사하고 교회의 저명한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으리라. 어떤 분은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가정을 떠났기 때문에 재혼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목회나 신학 교수를 포기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병든 아내와 도망간 아내, 그리고 목회와 신학 활동,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그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와 동거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목회자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라.  목회나 성도는 포기해도 된다. 당신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돌들을 일으켜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포기한다면 누가 그녀를 보호해 주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음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간음하는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간음하게 하는 죄", 즉 아내를 버리는 죄를 짓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혼과 재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전 남편(아내)과 다시 화합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도저히 서로 같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인간적 상황!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넓은 길은 존재한다.  이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왔을 때, 목사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답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료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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