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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snuday sermons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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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snuday sermons

고난을 받는 자세  (골 1:24) 


본문 :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믿음대로 살아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 예수 믿게 된 것,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장 큰 것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짐으로 받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랄수록 말씀대로 살고 하루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 계속 되면 참 좋겠지만 때때로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같이 은혜롭게 살고 지금같이 좋을 때가 없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전혀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흉년이 와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고난이 정말 많았습니다. 욥과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지만 엄청난 고난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다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없이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올 때에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애매한 고난, 선한 일을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벧전 2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이 많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그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고난 중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고난 때문에 세상이 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2. 또 선한 일을 하는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받은 상과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고난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문제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런 고난이 올 때 화가 나고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해결이 안 되어서 고민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익을 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는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자세]

  믿음이 어린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받는 자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고난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고난이 온 이유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게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뜻을 알기 위해서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큰 축복을 받고 큰 일꾼이 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엎드리면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밥이 되는 고난이 왔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만 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 시대는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역마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을 때 18만5천의 군사들이 다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히스기야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더 살게 하시고 증거로 해 그림자가 15도나 더 뒤로 물러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낙심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처럼 엎드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만을 결심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복 받을 것을 믿습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애를 쓰면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줄 믿습니다. 창세기 26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 때에 100배의 축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이 포로였지만 왕의 진미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늘 3번 기도했을 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새로 잘 짓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보통은 강사숙소를 호텔로 자주 정하는데 저에게는 교회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사님 댁에 큰방을 주셨습니다. 제법 큰집이었지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물도 찬 물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남편이 왔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공손히 인사하면서 ‘목사님, 저는 1년에 한 두 번 교회에 소풍갑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을 교회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교회에 가고 저는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걸어가면 5분 거리를 고물 자동차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랐습니다.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니까 또 차로 저를 집에 데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예배 때에는 5시 정각에 남편이 넥타이까지 매고 부인 성경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제가 1시간 이상 기도하니까 그 분이 못 기다리고 먼저 가셔서 저는 걸어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 남편을 보면 귀하고 방을 보면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목요일 새벽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추리닝을 입고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차를 경찰이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면허도 없이 새벽에 운전 연습한다고 자신이 끌고 돌아다니다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운전 연습한다고 저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해주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주의 종이 대접받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낮 공부 때까지 계속 기도할 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낮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시내에서 먹고 돌아오니까 대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저를 데리고 소파에 앉더니 두 내외가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동에 수출을 했는데 사업을 확장시켰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은행에서 압류하려고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부흥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부흥강사를 위해서 호텔도 얻고 준비도 했는데 두 내외가 모시겠다고 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낙심할까봐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예배 나가서 부인집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십일조의 액수가 커져서 떼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5분 거리에 살면서도 장로님, 목사님 아무도 대접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대접하지 못하고 집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부흥강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머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사람이 결심하고 십일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장로님들과 저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저는 기도했는데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출전람회 중에 그 회사도 전시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회사를 보다가 1억 5천만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1억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서 그 회사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출 제품을 들고 교회에 가져와서 간증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둘째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3.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욥의 문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이 났다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욥이 그 상황 중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살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은 마치 뜨거운 불의 용광로와 같아서 금을 넣으면 모든 찌꺼기가 사라지고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주시는데 목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 사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욕, 혈기, 교만, 위선, 오만의 모든 찌꺼기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난의 용광로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넣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는 은혜를 받으면 위대해지지만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세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억울한 고난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3. 세 번째로 고난이 왔을 때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그 모습으로 사도 바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성숙의 변화는 고난 받는 태도와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져가는 것은 고난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표가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계속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것이 고난을 잘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되지 말고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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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snuday sermons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136:21-26)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1-26

한 해의 추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주신 수확을 감사하며 풍성한 곡식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절기입니다. 지금 계절적으로는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지만, 우리의 금년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허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는 거두어 들인 곡식만 예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가정을 함께 드리는 절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유대력에 의한 3대 절기는 출애굽기 23:14-17에 계시된 바와 같이, 무교절이라고 하는 유월절과, 칠칠절 또는 초실절, 오순절이라고 하는 맥추절과,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이 있습니다. 이 절기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서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인의 유일하신 하나님 사상에서부터 신약의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건은 이러한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민족적 단결을 도모한 것이 그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 때의 수장절을 은혜 시대의 감사의 제사로 여기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감사의 조건이 주어질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감사할 조건을 주실 하나님을 신앙하며 먼저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광야 40년의 노정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지 않았으면 허허한 벌판에 천막을 치고 그들이 어떻게 광야 생활을 견디어 내었겠습니까? 그들의 기다림은 맹목적인 신앙의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옮겼다가는 그들에게 금방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험에 의한 확신이었습니다. 구름이 머무는 곳은 성막 한 가운데입니다. 말씀 중심의 삶을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백성들이 고통의 종점이 되었다 싶으면 가나안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그들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결코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의 수확에 대한 기쁨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들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들이 얻은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기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1년 동안 수고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그들의 삶의 우선권이 먼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매사에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권을 하나님께 돌릴 때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기업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자 누구에게나 이미 응답된 기도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우는 무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통과 좌절과 슬픔의 역사로 점철되어 온 민족사 속에서 ‘한의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세에 ‘동방의 빛’으로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축복 앞에 감사의 눈물로 제사드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물이 ‘애통하는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했고 40년 광야 생활도 경험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가나안 족속과 수많은 피를 흘리며 전쟁을 치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적하고 있는 우상 숭배와 부정과 불의와 향락의 불레셋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36편에서와 같이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자신에게 향하여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가정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사회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역사가 재조명된 이 땅에서, 그들이 순전한 맘으로 감사하지 못하여 빼앗긴 축복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1. 창조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선하시고 인자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있기까지 인간은 낙원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있을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땅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심판과 축복 속에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이류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주었지만, 그들은 육체를 입고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 제물로 ‘빛의 열매’를 드립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시편 기자는 먼저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섭리된 삶을 살아감으로 감사드립시다. 그것은 오직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2.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애굽땅에 종이 되었던 430년, 요셉은 정착한 고센 땅에서 이제는 떠나야 했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긴 해도 먹을 것이 많은 나일강변을 떠나 황량하고 적막한 땅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이 있기까지 백성들의 부르짖음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고통이 임박해지자 그들은 탈출을 주저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막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하여 자유를 찾게 해주어도 잠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영원한 자유를 포기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고통을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온갖 경험을 한 다윗은 시편 118:6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애굽을 떠난 자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부터의 탈출입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삶은 고통과 안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한 때가 있고, 즐거운 때가 있는가 하면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앞장서신 싸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든지 평안하든지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약속의 자녀들을 위하여 영원토록 싸워 주십니다. 다윗의 원수들이 벌떼처럼 그를 에워 쌌으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신 것을 알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감사는 삶 속에서 여호와를 의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내가 안다”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부를 드림으로 감사절의 서원 제물을 삼읍시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4. 소망의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요 14:1, 2).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할 제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할지라도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질병과 절망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사망과 고통이 없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승리해야 합니다. 금년 감사절은 우리의 산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드리는 축제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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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설교  / snuday sermon

 

감사하며 삽시다  (시100:4)

(시 100:3,4)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께 감사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해 주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
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가끔 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던 모습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 하신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 입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한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출장근무를 자원하셨고, 회사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이후 늘 출장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4일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2주로 늘어나더니 요즘에 와서는 한 달에 한 번씩만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 걸어 다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나마 어느 구두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원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뒷 굽도 다 닳고 앞은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선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장 값싼 운
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면 금방 낡은 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의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 오갈 때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세 2,000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소복히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향해 가던 중, 저 앞앞에 웬 키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 다니면 피곤해 성적 떨어진다고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아?”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랬잖아”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 “누나 누나는 얼마나 모았어?” 2,500원이란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함하면 웬만한 구두는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 동안 2000원 모았어!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가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만원짜리 구두를 쌌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며칠 남지않은 아빠의 생신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만큼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가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길 위에선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에게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985년경 영락중학교 한 여학생의 글입니다.)
  본시는 '감사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로서, 예배자들이 감사제의 예물을 가지고 성전 문과 뜰을 통과할 때 부른 노래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가를 분명히 밝혀주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도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를 지으신 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거룩한 성품을 부여받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러한 거룩한 속성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성품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가장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모든 인류를 대속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천하보다 귀하게'대해 주셨습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이웃을 대할 때 죄와 허물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영혼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자신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시인의 묘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요 소유라는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돌보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헨리 왕은 퀸카게시마 주일날(Quinquagesima Sunday:사순절의 바로 전 일요일-역자 주)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행원들은 다 흩어지고 왕 혼자만 어떤 숲 어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근처에 교회가 있는 것을 발견한 왕은 그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치 군졸인 양 행세하면서 사제에게 미사를 집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얼굴이 심히 일그러져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왕은 사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못생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례전을 집전하게 하실까 하고 그는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진행되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는 말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이 말씀을 영창하자, 사제는 소년이 안이하게 노래한다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는 주님이시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들은 왕은 그가 선지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제를 쾰른 대주교로 승진시켰습니다. 이후 그 사제는 뛰어난 헌신과 덕으로 큰 칭송을 받았습니다. -로저 웬도버(Roger Wendover, Flowers of History, ?-1237).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합하여진 존재입니다. 영과 육이 합하여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과 육은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내 것입니다. 그런데 내 영과 육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몸은 값을 주고 산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 것이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함같이>(겔18;4)
우리의 절대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씨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과의사인 후치다씨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루에 1만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줄 것입니다” 그는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개를 건네주었습니다. 가와가미 기이치씨는 손을 내밀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났습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항상 ‘감사’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정보클럽- 감사와 치유)
우리를 소유 삼으신 하나님 치시기도 하시고 고치시기도 하시니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의 백성이요.' 이 말씀은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시인의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 하고 경배해야 하며 통치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해야 하며,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뜻을 이뤄 들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이를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대 왕정 시대의 백성들은 임금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요,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여 왕의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떠받들고 그의 통치에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받지 않고 다른 여자가 받더니 말했습니다. <저는 파출부입니다> 주인아주머니 좀 바꿔달라고 말했더니 파출부가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남편 분하고 침실로 드셨는데요?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누구시죠?> <헥! 남편이라고 했습니까?><예, 야근하고 오셨다던데...> <이백, 아니 오백, 드릴 테니 좀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몽둥이 하나 들고, 몰래 침실에 가서 남편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기절시키세요. 만약에 마누라가 발악하면 마누라도 같이 때려눕히세요.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파출부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전화도 그냥 내려놓았습니다. 전화를 통하여 으악 윽 아이구 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잠시 후 파출부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시키는대로 했어요, 둘 다 기절했는데... 이젠 어떻게 하죠?> <잘했습니다. 두 사람을 묶어두세요. 거실 오른쪽 구석에 다용도실이 보이죠? 그 안에 끈이 있으니 가져오세요> 파출부는 한참 찾았습니다. 다시 전화기를 들고 말했습니다. <이 집엔 다용도실... 없는데요?>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습니다. <거기 532-37XX 아닌가요?> 파출부 대답은 <아닌데요>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시 79: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하신대로  우리를 백성 삼으시고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우리를 기르시는 양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시다.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합니다. 하나님이 길러주신다는 말씀은 완전하게 복되게 길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길러 주시고 보호하여 주셔야 제일 안전합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양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알며 운동해야 할 시간과 안식해야 할 시간을 압니다. 또한 양의 아픈 곳을 알며 치유책을 압니다. 아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아는 대로 그 필요를 채워 줍니다. 그래서 양이 배고플 때는 좋은 목초지로 인도하며 목이 마를 때는 맑은 시냇가로 인도합니다. 목자가 이처럼 양떼의 사정을 잘 알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그만큼 양떼에게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늘 주시하게 되고 늘 주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자가 양떼에게 쏟는 것과 같은 지극한 관심과 보살핌은 목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똑같은 관심과 보살핌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된 백성들에게 가지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 139: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경상도 영주의 영주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시고 지금은 이사장이신 강 경훈 장로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이 강 장로님이 일제 말엽, 보급대로 끌려가 채석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채석장의 하루 일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위들 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 마다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는 작업을 점심시간 이전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점심시간 바로 직전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놓고 돌을 부숴뜨린 후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돌을 나른다고 합니다. 이날도 어김없이 오전일을 마치고 다같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강 장로님은 그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식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함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와서 기도하는 장로님의 도시락을 물고 가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기도를 마치고 보니 개가 자신의 도시락을 물고 저만치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배고픈데 빨리 먹지 무슨 기도는 기도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도시락도 안 지키시고 어디 계신가!”하면서 조롱합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도시락을 찾으러 개를 쫓아가는데 장난을 치듯 개는 잡힐 만큼 가까이 가면 얼른 도망가고 천천히 가면 개도 천천히 가면서 어느새 백여 미터를 넘어 이 백여 미터 가깝게 갔을 때 이상하게 그 개는 도시락을 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도시락을 주어 돌아서는 순간 다이너마이트가“꽝”하며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오전에 바위구멍에 넣어 두었던 다이너마이트가 다 터진 줄 알았는데 그중 불발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곳에 모여 점심을 먹던 사람들이 다 죽고 개에게 도시락을 빼앗겨 멀리 온 강 장로님만 살아 나게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도시락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 수고를 통해 그의 생명을 살리셨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 보리농사를 거두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만, 오늘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한 해의 전반기를 은혜 가운데 보내며, 또 후반기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며 드리는 절기입니다. 맥추감사 주일을 지키며 우리를 지으신 자시며 우리를 자신의 소유 삼으시고 백성 삼으시며 기르시는 양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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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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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올라가는 인생

말씀 : 사40:27-31

 

1.올라가는 인생이 됩시다.

여러분, 기왕이면 올라가고 자라고 전진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무슨 범죄율이나 빈곤계수나 지니계수(불평등계수)나 이혼율이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은 올라가면 안 되고 내려 가야되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것들은 올라가고 자라고 발전하고 향상되는 게 좋습니다. 몸도 자라고, 인격도 높아지고, 지식이나 문화나 과학 수준도 향상되고, 기왕이면 월급이나 사회적 지위나 명예도 올라가고 수확량이나 매출액이나 경제지표나 국민소득도 올라가는 게 좋습니다.

또 인생에서도 올라갈 때가 좋습니다. 30대 이전에는 올라가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40대를 넘어서면 벌써 내려가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힘도 기력도 기억력도 의지도 능력도 자꾸 약해집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여하간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실제로 참으로 영원히 좋은 것은 저 높은 곳에 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주님이 계시고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삶도 올라가는 것이 좋지만 더더구나 진짜 완전히 영원히 좋은 것은 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땅에 것에 얽매어 죽자 사자 땅의 것과 씨름하지 말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와 시선을 저 영광의 나라를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온갖 좋은 은혜들을 충만히 누리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3:1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를 바라보라고요? 위를.... 왜요? 그리스도께서 계시니까요. 그 안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기쁨, 완전한 행복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 31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라. 왜요?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거기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주를 앙모하는 자에게 새 힘을 주심으로 독수리처럼 힘차게 저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올라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왕이면 땅에서도 생활수준도 올라가고, 행복지수도 올라가고, 건강지수도 올라가고, 명예도 올라가고 인격도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진짜로 온전히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땅의 것을 생각하며 땅의 것을 바라보며 살지 말고 진짜로 높은 곳, 진짜로 우리에게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주님이 계신 곳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그곳을 향하여 올라간다면 생각도 좀 높은 생각을 하고, 말하는 것도 좀 고상하게 하고, 뜻도 좀 높은 곳에 두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 여러분의 삶이 정말 아름답고 고상하고 높고 고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사32:8절을 보세요.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니까 거기에 어울리게 존귀한 생각과 존귀한 계획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맨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하면서 땅에 것만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찌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당연히 우리 인생은 존귀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도 올라가는 삶을 살되 무엇보다도 믿음이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생각과 목표와 방향과 이상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욱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생명의 은혜가 풍성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존귀하고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올라가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그런 줄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잘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올라가야지 올라가야지 하면서 나름대로 애도 써 보지만 그러나 또 다시 미끄러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론 우리가 다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믿음도 의지도 약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마귀사탄은 어찌 하든지 우리를 붙들고 늘어져 높은 곳으로 못 올라가게 하고 지옥의 구렁 속으로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꾸만 낮은 곳으로 천한 곳으로 세상 속으로 향락 속으로 더러운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미끄러질 때가 많고 올라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됩니다. 나는 약하고 무능하고 무지하여 내 능력과 지혜로는 잘 안 되지만 주님은 완전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계시기에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심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갓난아기가 쌀 한 포대를 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천하장사에게는 그까짓 쌀 한 포대 드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갓난아기는 조그마한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도 무서워 벌벌 떱니다. 그러나 천하장사는 그까짓 고양이 한 마리쯤이야 한 주먹거리도 안됩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추함과 어리석음 속에 있어서 마귀의 조그마한 공격에도 넘어지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세상의 조그마한 고난에도 낙담하고 절망하고 괴로워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따위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능력과 사랑과 지혜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감히 주님 앞에 대들 장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27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무슨 말씀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데 하나님이 아시면 왜 도와 주시지 않느냐는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니라.’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만났는데 왜 하나님께서 날 변호해 주시지 않느냐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의로써 내 이 억울함을 풀어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실망하고 한탄하고 원망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28절을 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지혜로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결코 피곤치 않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어찌 너의 형편을 모르겠느냐? 어찌 너를 돕지 못하겠느냐? 어찌 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시겠느냐? 그런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분을 인정하고 그 앞에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힘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주시고 너를 도우셔서 너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얼마든지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겸손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하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받아 주시고 안아 주십니다. 위로하시고 능력주시고 은혜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오늘 29,30절을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어떤 형편에 있는 사람이라도 능히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천하 없는 장사라도 결국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결코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 인생길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공연히 혼자서 속단하거나 끙끙 앓거나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그 모든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주님, 우리를 넉넉히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소연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혼자 걱정하고 염려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말고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랑과 능력과 은혜가 충만하신 주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인도하실 것입니다.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힘차게 믿음의 날개 짓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일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믿음의 날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새에게 날개를 달아주신 것은 힘차게 창공을 향해 날아올라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먹잇감도 구하고 맹수로부터 안전을 도모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타조나 닭이나 오리나 펭귄이나 이런 것들은 새는 새인데 제대로 날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날개 짓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저 높은 하늘을 훨훨 날지 않고 그저 땅에 안주하며 땅에서 먹잇감을 구하며 날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개가 힘이 없어지고 퇴화되어 날지 못하게 되었고 혹시 좀 난다고 해도 겨우 몇 미터 날다가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새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엄청난 날개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귀한 육체와 지혜와 이성과 감성과 영성을 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물론 열심히 도구로 활용하여 자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하여 열심히 날개 짓을 할 때에 영과 육과 혼이 멋지게 발달하여 풍성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점점 퇴화됩니다. 더구나 좋은 것들을 나쁜 일에, 죄된 일에 부정적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는커녕 도리어 그것들로 인하여 자신도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남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날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열심히 날개 짓을 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열심히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발달하고 뼈가 튼튼해지고 균형 잡힌 몸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지적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하고 아름다운 인격체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날개 짓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믿음의 날개를 힘차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밝아지고 아름다워지고 강건하게 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날개 짓이 뭡니까? 믿음의 날개 짓이 무엇입니까? 먼저 말씀과 기도와 찬송에 힘쓰는 삶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듣고 심비에 새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열심히 찬양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런 풍성한 영성을 가지고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날개 짓을 열심히 하면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날개가 더욱 힘이 넘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훨훨 날아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것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험한 풍파가 몰려와도 거기에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라. 그러면 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 짓하며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듯이 너희 영혼도 힘차게 저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솟구쳐 오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과 환경과 조건 속에서 저 높은 곳에서 유유히 비행하며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러러 바라보며 가까이하면 어찌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으면 세상의 이기지 못할 것일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찌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와 무지속에 있습니다. 능력도 지혜도 사랑도 의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처받고 고통 받을 때가 많습니다. 자꾸만 진짜 생명의 은총을 주지 못하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고 따라가며 실망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확실히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온 인류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맛보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 이상 땅엣 것만 바라보며 세상의 것에 얽매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전도와 섬김이라는 믿음의 날개 짓을 더욱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독수리처럼 힘차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감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어려운 것들을 넉넉히 이기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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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어느 부자 청년의 번민

말씀 : 막10:17-22

 

1.어리석은 선택

여러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어떤 때는 너무너무 똑똑하고 잘나고 멋있는데 어떤 때는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착하고 대견스럽고 훌륭한데 또 어떤 때는 정말 무지하고 추하고 심지어 악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은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런 건 없다고 하고 자기 힘과 돈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교회나 절이나 사원이나 아무데나 다니면 좋은 데 간다고 하며 나름대로 종교생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교고 뭐고 그냥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그게 천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합니까?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아니 다 똑같은 죄인이요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인데 그걸 가르쳐 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아니며 죽어서 확인이라도 해 봤습니까? 아니 진짜 그렇잖아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이 그래서 이 세상의 일도 만분의 일, 억분의 일도 모르면서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과 창조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알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존재로 본질적으로나 일상생활에서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악하고 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런 근원적인 문제들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아니 근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펼쳐져있는 현상적인 문제들도 아는 것은 쥐꼬리만큼도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알고도 때로는 몰라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도 그랬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청년은 인간적으로는 돈과 명예도 있었고 인격적으로도 상당히 멋있고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마19:20절에서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눅18:18절에는 관원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22절에는 재물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17절에 보면 이 청년은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앞에 무릎 꿇고 영생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은 부자였고, 관원이었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물을 만큼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진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참 여러모로 너무나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윤리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진리에 대한 관심도 컸던 사람이었지만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만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다고요? 부자라서...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긴 한데 돈을 다 포기하라고 하니까 너무 아까워서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수님 말씀을 거역하려니 너무 괴롭고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슬퍼하며 근심하다가 결국은 돈에 져서 근심에 쌓여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무지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는 나름대로는 정말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그만 돈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이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가 이렇게 무지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코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을 좇아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잘 달려가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청년은 왜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2.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청년의 결정적인 잘못은 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러분, 보세요.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참 괜찮은 청년 아닙니까?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거기다가 영생에 대한 관심과 갈망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의 결정적인 오류는 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결국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의 길을 버리고 세상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청년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아닌 선한 선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잘못된 시각을 고쳐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8절을 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이 선하시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하시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선한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사람으로 아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선한 사람으로 알고 찾아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정도가 선한 선생에게서 영생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그 시도부터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선하시고 그 분만이 영생의 길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선한 선생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정한 선한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바르게 알고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에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받으실 만한 인류의 스승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무지에 의한 커다란 오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성인 즉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도 완전한 선한 선생이 될 수도 없고, 더더구나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위대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멋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미련함과 한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시오, 완전하게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완전하고 영원한 스승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청년처럼 자신의 그 알량한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가지고 예수님께 대하여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내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온전히 엎드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 예수님 말씀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생의 길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이 부자청년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오류는 영생의 길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여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17절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보세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즉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얼마나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8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완전히 선할 수 없으므로 어떤 선한 행동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정말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이런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참 괜찮은 청년이었는데 또 어리석고 바보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여러분, 참 맹랑하지 않습니까? ‘다 지켰습니다.’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상대적으로 남보다 좀 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 지켰다고 말한 것은 상대적으로는 꽤나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그가 얼마나 무지 속에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1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를 사랑하사....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무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로 완전히 선하게 살아왔다고 여기느냐? 그렇다면 네가 정말 완전히 선한 존재라는 것을 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을 통해 입증해 볼 수 있겠니? 네가 정말로 온전히 선하다고 여기고 또 나를 선한 선생으로 안다면 나의 말을 100% 따를 수 있겠니? 그렇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거라. 그러면 내가 인정해 주리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 자신만만했던 사람은 그만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맙니다. 근심과 고민에 쌓이고 맙니다. 그리고는 힘없이 돌아서서 예수님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인간의 선과 의와 똒똑함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무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모두가 약하고 어둡고 죄가운데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다고 여겨도 무지한 존재요, 제아무리 선해도 악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따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돈이나 선이나 권세나 지식이나 철학으로도 안되고 백년 천년 만년 도를 닦아도 안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모든 자만심, 지식, 경험, 이성 다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부족함, 어리석음, 죄됨, 모두 고백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임을 믿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함으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어 구원받고 여기서도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물질에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청년의 또 다른 오류는 물질을 진리보다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하고, 가장 절실한 것인지 그걸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보았던 22절 다시 봅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참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영생과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겸손히 무릎 꿇고 진리의 길을 물었고, 계명을 모두 지켰노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청년이 네가 그렇게 완벽하게 계명을 지켰다면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모든 재물인데, 그러면 난 뭐 먹고 살라고, 무슨 재미로 살라고 하면서 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예수님은 그 청년이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정작 자신은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했다가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초라하고 흉하고 궁핍하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말도 안되는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칼을 들어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십니다. 아니, 쟤가 정말로 아들을 잡아 제사를 드리려는 거야. 저런 순진한 녀석. 얘야, 안된다. 그만 두어라. 칼을 멈춰라.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을 가까스로 말리고 옆에 양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더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이 정말 예수님을 진정으로 메시아로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재산을 다 팔려고 했다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을 말렸거나 아니면 다 주게 하신 다음에 더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청년의 재산을 다 파느냐 안 파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청년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얼마나 순종하느냐,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 그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님도 우선순위도 제대로 몰라 그만 낭패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우선순위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에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고 참된 자유인이 됩니다.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 이 땅에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받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다 잘나고 똑똑하고 선한 것처럼 여기면서 예수님도, 인생의 우선순위도 몰라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조차도 이런 우선순위를 혼동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고, 세상 즐거움을 더 중요시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좇아가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그건 결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결코 거기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오직 말씀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 거기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단순히 위대한 성인이 아닌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고 알고 바르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님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로지 우리 주님과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가치와 목표와 방향을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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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 목 : 인생의 완전한 주인

말 씀 : 눅11:21-26

 

1.인간은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보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외모나 조건이나 이런 것들에 신경 쓰거나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인생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생각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고 그래서 발전성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주도적인 자세는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분수를 모르고 진짜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완벽한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이는 정말 치명적인 착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완전한 주인이라고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나나마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거지요. 안 그래요? 우리가 다 죄인이요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요 한계가 있는 데 자기가 주인이라며 자기 생각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어떻게 오류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해야 되는데 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또 생명은 어떻습니까? 시간은 어떻습니까? 돈은 어떻습니까?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생명도 시간도 돈도 건강도 자식도 권세도 명예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거두어가시면 속된 말로 찍소리 못하고 반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가 진짜 인생 주인행세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강합니다. 즉 인본주의,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누가 뭐라 건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왜 남의 눈치나 심지어 하나님의 눈치도 안보고 선 진리 의 거룩 이런 것들도 신경 안 쓰고 그저 나 좋은 대로 나 편한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 내 돈, 내 시간 하면서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 기쁨을 주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기쁨과 만족과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이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탄의 술수와 모함과 유혹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처럼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며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치달아 가면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며 정신을 차리고 이런 왜곡된 가치관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주인의식을 가지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거야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과 도전과 속임수에 속지도 않고 능력 있게 물리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습게 여기고 얼씬 거리지도 못하고 또 설령 덤벼든다 해도 즉각 깨닫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하나님 안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달려가면서 정말 능력 있고 생명력 넘치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은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고, 이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에 속한 모든 유혹이나 핍박이나 더럽고 추한 것들을 얼마든지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왜곡된 물결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시험과 도전과 환경과 상황과 어둡고 칙칙하고 추한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탄의 모든 지배 속에서 온갖 왜곡된 가치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심령 속에서 사탄이 좋아하는 것들을 씻어버리고 사탄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들, 반대로 말하며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물러가고, 성령님이 기쁘시게 우리 심령 속에 거하심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똥파리가 어디에 꼬입니까? 똥이 있는 곳입니다. 벌은 어디로 날아갑니까? 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디에 거하기를 좋아합니까? 깨끗하고 아름답고 향내 나는 심령입니다. 마귀는 어디가 좋다고 얼씨구나하고 들어와서 서식합니까? 더럽고 추한 심령입니다. 마귀는 우리 심령 속에 악하고 추하고 속되고 거짓되고 음란한 것들을 자꾸 집어넣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으면 얼씨구나 네가 내 친구로다 하면서 좋다고 그 심령 속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 속에 믿음과 선과 의와 거룩함 등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성령님이 기쁘시게 거하시게 되고 그러면 마귀는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소위 빈집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제압당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회에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추했는지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심령이 깨끗해지자 귀신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못되어 이 사람에게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찾아봤지만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이 사람에게 와 보았더니 깨끗이 수리가 되어 있긴 한데 주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귀신은 이 영혼을 완전히 제압하고 유린하여 거기 거하기 위하여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악한 귀신 일곱의 지배로 돌아가 전보다 더 형편없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빈집의 비유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을 청소했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는 것입니다. 25절 보세요.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 말씀은 귀신이 쫓겨났기 때문에 수리가 되었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청소를 하였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집은 인간의 심령입니다. 심령이 청소되었다는 것은 물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음란한 것들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살만한 곳이 못되니까 나가게 되었고 귀신이 나가니 그 심령이 더욱 깨끗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자꾸 귀신 귀신 그러니까 혹시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데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한번 죽으면 낙원과 음부로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낙원과 음부에서도 서로 왕래할 수 없고 이 세상과도 왕래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집을 수리했을 때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 속의 온갖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들어오셔야 깨끗해지지만 성령이 들어오시게 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추함 가운데 있는지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완전치는 못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히 못한 것들을 심령 속에서 스스로 추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가 서식할 공간을 해체시키고 반대로 우리 심령의 공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과 의와 거룩한 것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도망가고 성령님이 기쁘시게 거함으로 은혜 충만한 삶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약4:7,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도망하고 하나님이 가까이해주심으로 은혜가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꾸만 우리 심령을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의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심령 속에 더럽고 추한 것들이나 원망이나 분노나 증오나 욕심들이나 마귀에 속한 것들이 자리 잡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귀가 쫓겨나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한 다음에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건 뭐냐 주님을 우리의 새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은 약간의 은혜를 받고 심령을 좀 깨끗이 함으로 귀신이 나가긴 했는데 그리고 나서 주님을 온전히 새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갔던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그 영혼을 무참히 짓밟고 유린해서 전보다 더 형편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 정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심령을 깨끗이 청소를 했으면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완전히 새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러운 마귀사탄이 다시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웬만큼 청소를 하긴 했는데 완전한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지 않으면 자칫하면 또 마귀의 밥이 되기 싶다는 것입니다. 마귀란 놈은 얼마나 집요한지 쫓겨나가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찾아와 때로는 유혹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핍박을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덮쳐 우리 영혼을 유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름대로 마음을 청소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영위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말씀도 묵상한다해도 정말로 예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언제든 허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니 사실은 온전히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에 불과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는데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생명과 감격과 기쁨도 맛보지 못하고 다니니까 사단의 표적이 되어 집요하게 유혹하고 사납게 대들면 그만 사단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에게 명령하시고, 마귀에 호통을 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분을 주인으로 섬기면 감히 마귀사탄이 얼씬 거리지 못합니다. 혹시 얼씬거리면서 수작을 건다해도 즉시 깨닫고 사탄아 물러가라 호령하면 쫓겨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22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이고, 더 강한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사탄도 나름대로 힘이 있어서 세상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마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강한 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을 무장해제 시켜버리면 사탄은 꼼짝없이 자신이 지배하던 것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추한 것들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는 정말 온전히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이미 모셔들인 분들은 절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생각, 내 이성, 내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지 말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감히 마귀 나부랭이가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를 보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을 깨끗이 하고 주님을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 모셨으면 이제는 그 말씀을 따라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더욱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한마디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 편에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꾼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한지를 안다면,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안다면 생명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주님이 그 영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안다면, 그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않다면 어떻게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물론 우선은 자신이 먼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것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수수방관하는 일이요,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의 힘을 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고의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헤치지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반대한 것이나 헤친 것과 진배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더욱 활기차게 하고, 생명력이 있게 하고,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전도하고 하면 얼마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겠습니까? 얼마나 영성이 풍성해지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겠습니까? 또한 그러한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힘차게 이루어져 가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수고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씀으로 우리 심령 속에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 들임으로 진정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차게 이루어 가며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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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샬롬을 누립시다

말씀 : 대하14:1~7

 

1.부정적인 에너지를 추방합시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독특한 병 중에 화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화병은 불 화(火)자에 질병 병(病)자를 씁니다. 즉 가슴 속에 속에 불덩어리 같은 게 들어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속에 분노나 증오나 불평 등의 뭔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화병의 원인은 한마디로 억압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분노 증오심 불평불만 시기질투 등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쌍아둠으로써 마음속에 화덩어리가 뭉쳐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물론 살다보면 분노나 미움이나 불평불만이나 시기질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속된 말로 쎄가 빠지게 일해도 겨우 돈백만원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면서 시대가 하도 속되어 결혼도 조건을 보고 하는 시대라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결혼조차하기 힘든 그런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능력이 있거나 혹은 머리가 뛰어나거나 재주가 좋아 억대 심지어는 몇 십억의 연봉을 받으며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며 대접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그런 위치에 오르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그래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에 불평불만 시기질투가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나 증오나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마음에 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나쁜 에너지로서 우리들의 삶에 너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 있으면 자연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부정적이고 독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되고 공격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황폐하게 되고 가족과 이웃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어 서로의 삶을 파괴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엡4:26,2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러니까 잠깐 분이 일어날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마음에 계속 품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틈타 그 분(憤)이 우리를 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전5:16~18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혹시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는 좀 억울한 일을 당한다해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나 이런 나쁜 에너지를 마음에 품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어렵고 힘들고 불공평하고 억울해도 실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는 것, 게다가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믿음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차피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불공평한 일도 있고 어려운 현실도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천국에 가기까지는 그런 현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부조리한 현실들이 없애고 평안을 누리려 하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어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완전한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선이시며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불평불만이나 분노의 감정이 잘 일어나지도 않거니와 설령 일어난다해도 쉽게 이기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내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주님이 나를 온전히 지배한다면 어떻게 불평불만 시기질투 미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은 완전한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빛과 평안과 위로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주님이 내 이성과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사로잡으면 어떻게 우리 심령 속에서 미움과 원망과 증오와 불평불만과 시기와질투가 일어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완전할 수만 있다면 완전하게 일어나지 않겠지만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 않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적게 일어나고 또 내가 부족해서 일어난 그 부정적인 감정들도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 위로의 주님, 능력의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인도하셔서 얼마든지 다스리며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미술대학교에서 ‘평안’을 주제로 그림경시대회가 열려 많은 학생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상금도 타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실력을 동원해서 평안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심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두 학생의 그림이 최종결선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평안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한 학생의 그림은 정통적인 평화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양 옆과 뒤쪽은 푸르고 아름다운 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있는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앞 풀밭에는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해 있고,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호숫가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고 있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의 완전히 반대로 바닷가에 큰 바위 절벽에 엄청난 파도가 부딪쳐 사나운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바위 절벽에 있는 나무가 부러져 바다에 떠다니고 있는 사납고 험악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벽 사이의 바위틈에 갈매기 둥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위틈 둥지에서 갈매기 새끼들이 엄마 품에 안겨 평안히 쉬고 있었습니다. 둥지 밖에는 사나운 바람과 험한 파도가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 새끼들은 엄마 날개 밑에서 조금도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평안히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이 최우수작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림은 평화롭기는 한데 너무나 이상적인 환경에 의존하는 평안으로 그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 깨질 평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은 그 험한 풍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누리는 평안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외적인 평안 즉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누리는 평안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내적인 평안 즉 조건이 충족되지 못했어도 누리는 평안이 진짜 평안이고 더 중요하고 우리가 꼭 누려야 할 평안입니다. 물론 외적인 평안 즉 조건이 충족됨으로 누리는 평안도 당연히 필요하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언제라도 상황이 변하면 곧바로 사라져버릴 그런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비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여기에 보면 십년 동안 평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평안은 전쟁이 없으므로 누리는 외적인 평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평안은 몇 년 동안 누렸다고 했습니까? 10년입니다. 왜 십년입니까? 십년 후에 외국군대가 침입하여 그 평안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9절에 보면 10년 후에 구스 나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이 평화는 그만 물거품처럼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외적인 평안은 그 평안을 주는 외적인 조건이 사라지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외적인 조건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므로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평안은 늘 불안한 평안이요 금방 사라질 평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평안한 사람은 돈이 없어지면 평안도 없어집니다. 건강 때문에 평안하면 건강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높은 지위 때문에 누리는 평안은 지위가 사라지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돈과 명예와 권세와 건장을 지키려고 난리입니다. 왜요? 그런 것들로 평안을 누리려는 사람들은 그게 없으면 평안도 기쁨도 사라지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고 또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참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외적인 평안보다 주님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진정하고 완전한 영원한 평안입니다. 주님은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의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을 잔잔케 하시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시고 모든 죄와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쫓아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사탄에 속한 모든 어둠과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쫓아냄으로 온전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14:27절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십시오. 내가 평안을 주겠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즉 세상이 주는 것은 잠시잠깐 뿐이요,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걱정하지 말고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참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분명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소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당연히 내 심령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가 충만함으로 분노와 미움과 저주 원망 불평과 사나움 등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쫓아내고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심령의 중심에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주님 안에 있는 참 평안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뭐 간단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주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며 가까이하면 주님이 기쁨으로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사와 시대에 평안을 누리게 되었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4절을 같이 읽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7절 후반절도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어떻게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명령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았다는 것은 ‘자주가다, 찾다, 구하다, 문의하다,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을 찾아가서 엎드려 기도하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고 구하며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적군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인도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나타난 것은 주로 외적인 평안을 의미하지만 외적인 평안이든 내적인 평안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심령 속에 임재하시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세상의 것을 이기고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바람을 명령하여 잠재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심령속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욕심과 독과 화를 제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참 평안을 줄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만이 평안을 주실 수 있고 끝까지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 안에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충만하게 덧입어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온전한 평안을 누리려면 먼저 주님을 찾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물론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생명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얻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평안이 넘치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찾아와서 말씀을 듣기만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 찾아온 발걸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요, 4,5절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나라가 평안했는데 어떻게 평안했습니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우상을 깨트리고 율법과 명령을 다 행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어찌 평안이 없겠습니까? 반대로 이런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조종을 따라 살아간다면 어찌 평안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기에 분명히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그런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허물 많고 미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우리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의 역사를 결박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 안에는 그 어떤 어둠도 깃들 수 없습니다. 마귀 사탄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득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며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은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의 중심에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더욱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찾고 가까이 하며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일상의 삶속에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판을 치고, 그래서 불공평하고 힘들고 심지어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하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그러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하나님이 무한정으로 내려주시는 샬롬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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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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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수14:6-12

제목 : 멋있는 인생


1.내면이 멋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멋있는 게 뭡니까? 보통은 멋있다 그러면 겉모양을 생각하죠. 저 사람 멋있다. 아름답다. 그러면 인물도 좋고 허우대도 멀쩡하고 세련되고 그러면 보통 멋있다. 아름답다 그러죠. 물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듯이 기왕이면 외모도 멋있고 아름다운 것이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나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못나고 추한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은 외면이 아름답고 멋있는 것보다는 내면이 아름답고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겉보기에는 썩 아름답고 멋있고 세상적으로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어도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뭔가 모르게 그 사람에게서 향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반면에 설령 높은 지위와 학식이 있고 멋있게 생겼어도 내면이 추하거나 악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삶속에서 악취가 나게 마련 인 것입니다.


사실 뭐 당연한 거죠. 여러분, 우리 삶의 모습들이 무엇에 의하여 결정됩니까? 물론 내면 즉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요. 안 그래요? 우리 마음속에 올바르고 고상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선한 것들이 들어있다면 당연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왜곡되고 추하고 거짓되고 악한 것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눅6:45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그대로 마음속에 선이 쌓여 있으면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이 쌓여 있으면 악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또 삼상16: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 권력 능력 돈 조건 등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성결하고 사랑과 은혜가 많으냐 그걸 본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선이니까요. 그게 인간의 생명을 아름답게 하는 거니까요. 그게 우리를 아름답고 평화롭고 복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기왕이면 외적인 것도 아름답고 넉넉하고 멋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어찌하든지 먼저 여러분의 심령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선과 진리로 채우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아름답고 복되고 멋진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대접받기보다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런 귀하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렙이라는 분인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분이 얼마나 멋있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40년동안 힘든 생활을 보내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누구나 기왕이면 좋은 위치에 많은 면적을 분배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혹은 우리 지파는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이렇게 충성하며 공적을 세웠다며 은근히 자신을 내세우며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갈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12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여러분, 보세요. 갈렙은 어떤 땅을 달라고 합니까? 헤브론 산지입니다. 게다가 그 땅에는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아낙 자손 즉 거인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견고한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땅 중에 하필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들판에 초지가 형성되어 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꽃들이 만발하고 그래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하기에 좋은 땅이 아니라 반대로 산지에 그것도 거인들이 살고 있고 견고한 성읍이 있어 정복하기도 힘든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45년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이 각 지파별로 한명씩 열 두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 유다지파의 대표자로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할 때에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이 그 땅 거민이 워낙 강하고 성읍도 튼튼해서 그 땅을 점령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수인 열 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원망하고 불평하여 결국 출애굽 1세대의 사람들은 다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외쳤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 살아남아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갈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출애굽 1세대 중 여호수아와 함께 딱 두 명 밖에 살아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어른 중에 어른이요, 원로중의 원로요,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이요, 이스라엘의 영적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만하면 이제는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나이로 보나 공로로 보나 지위로 보나 무엇으로 보아도 이제는 좋은 땅을 분배받아 좀 편히 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하며 공적을 남기며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원로중의 원로이니 백성들이 미리 알아서 대접을 해 줄만한 위치에 있고, 그럴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오히려 산지를 내게 달라...... 거기 비록 아낙 자손이 거하고 있지만 그까짓 것 문제될게 없다... 비록 그 성읍은 크고 강하고, 내 나이 85세로 비록 늙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충분히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 그러니 거인이 거하고 있는 그 땅,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는 그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일차적으로는 믿음 때문이었고 동시에 그는 자신이 뭔가 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거리였고 영광을 돌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마음과 힘과 능력과 지혜와 여건과 상황과 환경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정말 내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마을에서나 국가에서나 뭔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요 기쁨이요 영광입니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초라한 인생입니까? 아니 얼마나 무가치한 인생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마을이나 국가를 위해 무언가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건 너무나 큰 축복이요, 감사거리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좀 했다고 내세울 일이 무엇입니까? 대접받으려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감사한 것 뿐이요, 영광스러운 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무언가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게 복이요 은혜요 귀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내세우거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귀히 쓰임받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85세나 된 어른의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정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찍이 45년전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한결같이 이 땅 사람들은 거인이요, 성읍은 요새라서 우리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했을 때에 ‘무슨 말이냐,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45년의 세월이 지나 나이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 85세이면 이젠 패기도 용기도 도전심도 다 사라지고 현실에 안주하며 편히 쉬며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젊은이와 같은 아니 젊은이보다 나은 믿음과 용기와 도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중의 원로요, 어른 중의 어른인 그가 ‘나는 산악지대이든, 거인이 거하든, 견고한 성읍이 있든 관계없다. 그 땅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이니 내가 가서 점령하겠노라고, 그러면 그 땅은 반드시 내 땅이 될 것이라.’며 헤브론 산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85세의 노인이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요? 물론 그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1:36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들은 우리 밥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 땅은 우리 땅’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그 믿음대로 내가 그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곳이 산지이든, 아낙자손이 있든, 성읍이 강하든 내가 가서 취할테니까 나에게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당연히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와 권세와 선과 의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완전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직 거기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오직 그 말씀을 믿고 주님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거기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말씀따라 살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경험과 지식과 이성대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잘나고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때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 속에 있는지 모릅니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쥐꼬리 만큼도 안됩니다. 모르는 것이 천배만배 더 많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못하는 만배 억배 더 많습니다. 우주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선과 진리와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만을 믿고 살아간다며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안 그래요? 모르고 할 수 없는 것이 천배만배억배 더 많은데 어찌 자기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가지고서야 어찌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간의 경험과 논리와 지식과 환경과 이해관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전능자이시여 전지하시고 완전한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진리와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믿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순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갈렙에게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실함입니다. 오늘 7절을 보세요.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여기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라는 말씀은 그 어떤 가식이나 꾸밈이나 과장이나 거짓 없이 오직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내가 확신하는 그대로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 땅은 우리 땅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보고는 전혀 과장도 아니요, 허풍도 아니요, 꾸밈도 아니고, 아부의 말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사실 그대로, 확신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은 우리 땅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믿음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뢰할 만하고, 주님의 약속은 100% 진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도가 100%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100%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갓난아기가 엄마를 100%신뢰하고 죽으나 사나 엄마 손잡고 따라가듯 주님의 손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갈렙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인 신뢰속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85세가 된 지금까지 변치 않는 성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순수하고 성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권리나 대접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땅으로 들어가 결국 견고한 성읍을 무너뜨리고 거인들을 물리치고 그 산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다가 마침내의 아름다운 인생을 마감하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갔습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한 그의 삶에는 얼마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쳤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성실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언가 한 일이 있다면 자신의 권리나 공로나 업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회이든 어느 곳에 있든지 믿음과 감사와 기쁨으로 충성스럽게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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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참된 생명의 기쁨

말씀 : :요일1:1-4

1.신앙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든 자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배고픈 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착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전쟁과 기아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보다는 혁명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강력한 능력으로 침략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빼앗고 압제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세상적 메시야 왕국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또 수백수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사 아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라 그냥 하늘에서 먹을 것이 막 쏟아져 내려오게 하셔서 당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군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모진 고초와 온갖 멸시 천대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이 세상에 물질적, 정신적, 정치적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예수라는 그 이름 자체가 그런 뜻 아닙니까? 마1: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신데 무슨 구원자이시냐 죄에서 구원하실 분, 그래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을 주실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왜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 물론 구원받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전인격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 할 이유이고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0:10절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세요.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생명을 얻게 하려고... 또 요11:25,26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세요. 나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높아지고 그게 아니라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것도 얻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런 말씀입니다.


물론 건강, 권세, 명예, 평안도 좋습니다. 아니 그것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 온전히 믿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우선이고 이것이 예수님 믿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그래야 평안하고 그래야 자유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그래야 부유해지고 그래야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자유도 만족도 누리지 못하고 게다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니 이렇게 안타깝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얽매이고 그것 때문에 지지고 볶고 시기질투 낙심근심 원망불평하지 말고, 그런 것들을 위하여 정열을 다 바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듯을 바르게 분별하고 주님의 방법대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 진정 완전하고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음을 분명하게 확실하게 마치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이는 것처럼 알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죽어도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그 안에 있은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 안에 생명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면 어떻게 예수님 따라 가며 그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반대로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 안에 정말 영원하고 완전하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온갖 풍성한 생명의 은총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실히 알고 믿는다면 어찌 주님을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따라간다면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진정하고 유일한 완전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내 지식과 경험이나 이성을 내려놓고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경험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한계와 무지 속에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복락의 길을 어떻게 압니까?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압니까?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이 짧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어떻게 압니까? 아니 우리가 다 죄가운데 무지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압니까? 아니 죽음 이후의 세상을 스스로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마치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모르는 것 하나없이 다 아는 것처럼 여기고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아간다면 세상에 이렇게 미련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생의 길도, 행복의 길도, 참된 진리도 선도 의도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아니 그 이전에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배워야 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고 그 길로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즉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꾸며낸 것은 더더구나 아니고 직접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께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고 경험한 것을 액면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으로 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이 일으켰던 기적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시는 것과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분이 명령하시자 죽어서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어정어정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중풍병자가 일어나며, 귀신이 쫓겨나며, 주님의 말씀에 성난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잔잔해 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말씀과 기적과 능력으로 똑똑히 보여주셨고, 그들의 두 눈으로 승천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그분이 다시 오시마 약속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렇게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고 확인해서 이 분이 정말 메시아구나, 이 분안에 생명이 있구나, 영광의 나라가 있구나 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강퍅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을 자를 살리고 자신이 살아나고 한 것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격화시켜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강퍅하고 무지한 인간의 어리석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나 능력이나 말씀이나 이런 것들을 뻥튀기해서 기록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하신 것도, 다시 오마 약속하신 것도, 천국과 지옥도 거짓이라면 어떤 바보가 그렇게 자기가 꾸며놓은 거짓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아니 안 그렇습니까? 거짓말을 기록하고 그것을 증언하다가 무슨 부귀영화나 큰 권력이나 명예라도 얻게 된다면 혹시 몰라도 어떤 바보멍청이가 자기가 꾸며낸 허무맹랑한 것을 위하여 핍박당하고 멸시천대를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칼에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고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주신 예수님, 그러나 그 크신 권세와 능력으로 사망권세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 그리고 마침내 때가되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님, 그 분만이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생명의 주십니다.

여러분, 이걸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의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지금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참 자유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감사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구세주시오 생명의 주님이심을 알고 믿고 따라 살아감으로 정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은 단지 영원한 생명의 은총만이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세상에서 복받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부자되고 평안하기 위해서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지 세상의 복은 필요치도 얻을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계시고 이차적으로는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복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28:2-6절에서는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일단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되고 그러면 이 땅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육체적 물질적 필요도 채워주심으로 말 그대로 영육간에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 주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육체적 물질적 복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도 않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멀리하며 살아가면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는 복을 충만하게 누리겠습니까? 안 그래요? 빛을 떠나 빛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영하 50도나 되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서서 따뜻함을 누릴 수 있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썩은 내가 풀풀나는 곳에서 향기로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신명기 28장의 축복의 말씀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입니다. 그러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오늘 3절도 보세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인데 사도들과의 사귐은 단순히 인간적 사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면 생명을 얻고 더 나아가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은 절대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과 만족하고 행복과 자유는 예수님과의 올바른 사귐을 가질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내안에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예수님과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죄의 벽이 무너지고,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물론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충만하게 있는 영원한 생명, 온전한 평안, 충만한 기쁨, 위로, 소망, 안식, 사랑, 은혜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만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와 나 사이에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나와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와 물질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의 모든 문제도 해결됨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에 현재적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도 천국과 같은 은총을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님들은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할 목적, 신앙생활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진정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인생의 복이 어디서 오는 지를 분명히 알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구하고 바라보기 전에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무엇과 교제하기 전에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온전히 사귀는 삶을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이웃과 물질과 자연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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