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19년 5월 주일예배설교 (성가대헌신예배설교)거룩한 사역자(대하20:2023)


제목 : 거룩한 사역자

말씀 : 대하20:20~23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당시 암몬과 모압과 에돔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라며 너희가 싸울 것이 없이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희한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열을 이루고 그 앞에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찬송이 시작될 때에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칼 한번 안 쓰고 오직 찬양으로 전대미문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성가대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가대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21절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여기에 보면 거룩한 예복 즉 성가대 가운을 입혀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송은 왠 찬송이며 거룩한 예복은 또 뭡니까? 그럼 왜 이런 비상상황에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찬양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사명감의 고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힘으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가대도 거룩한 예복 즉 가운을 입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폼으로 입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멋있으라고 입는 게 아닙니다. 목사 가운이나 장로 가운이 성가대 가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운을 입는다고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그 거룩한 직분이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들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특별히 세움 받은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입는 예복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사명감이 진정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다면 일상적인 삶도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아무렇게 하면서 성가대석에 앉아서 아무리 꾀꼬리 같은 소리로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예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세상에서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찬양한다고 그게 온전한 찬양이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인자와 자지를 높여 드리는 일인데 그러한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해야 하고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당연히 일생생활에서도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성가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일상생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며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더욱 생명의 은총과 능력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가대는 믿음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귀한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1절 다시 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여호사밧은 성가대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의 앞에 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전술적으로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다. 적군이 성가대를 향해 돌진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려서 찬양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두에 서서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즉 여호사밧이 ‘걱정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하자 성가대원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적을 눈앞에 두고 군대의 제일 앞에서 담대히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성가대원들은 이런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믿음 생활에서 앞장서고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목사님 강단보다도 더 앞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가대원들은 목사님 뒤통수 보면서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니뭐니해도 예배의 꽃은 말씀인데 말씀보다 앞에 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뭐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일 앞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려면 마주보고 해야지 뒷모습보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하면 어떻겠어요?

여하간 여러분,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귀한 사명,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성가대도 동일합니다. 특히 성가대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마찬가지지만 성가대는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면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안 그래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빠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쁘다고 빠지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빠지고 상황이 그래서 여건이 그래서 빠지고... 아닙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예배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나 변명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사탄의 소립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목사님, 세월이 그런데요. 요새 교인들 다 그런데요. 그러면 교인들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힘들어서 교회 생활 못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사람 생각대로 편한대로 하니까 믿음이 죽어가고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욕을 먹고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면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졸면 안됩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의 다른 일에도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폼 나게 싹 차려입고 하는 일에는 제법 참여하고 궂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보면 자녀들을 폼나는 일은 안시켜주면 뭐라고 그러고 궂은 시킨다고 뭐라 그럽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궂은 일에도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어떤 교회 이야기인데 그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는 성가대 찬양 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가대가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다른 쪽에서 학생들이 관현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합주를 하는데 그 악기 소리 때문에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고음은 그런대로 들리는데 저음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악기연주자를 줄이자고 하니까 목사님이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서운해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학생들에게 교회 화장실 청소를 시키다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여러분, 폼나는 자리는 안 앉혀 준다고 뭐라 그러고, 궂은 일은 시킨다고 뭐라 그런다면 이게 믿음있는 행동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도 궂은 일도 해야 합니다. 궂은 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폼나는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요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특별히 너무나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은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이고 앞장섬으로 삶의 예배가 뒷받침되어 여러분의 찬양이 진정 향기로운 찬양이 되고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성가대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자기 만족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면서 우리도 은혜와 위로가 되고 소망도 갖게 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찬양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찬양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은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황이나 환경도 이기게 되고 위로도 받고 소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바뀌어 자신이 뭔가 얻으려고 찬양을 한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노래이므로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후반부 다시 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힘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저들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찬양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힘을 달라고 소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찬양입니다. 나의 위로 소망 구원 도움이 목적이 되면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나의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찬양 사역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되새겨보며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보기에 그럴듯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정말 여러분의 찬양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mission school

우리 모두는 오대양 육대주 선교사입니다.여러분의 구독은 선교사 교육과 후원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Subscriptions are helpful for missionary education and support.

www.youtube.com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헌신 절기] 모세의 마지막 설교 ( 축복과 저주 )

 

모세의 마지막 설교 ( 축복과 저주 )

11:26-32

이제까지 읽은 신명기 11장의 결론으로 모세는 순종에 대한 권고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권고는 대단히 감격적이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영원히 따르게 하며 결코 낡아 없어지지 아니할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광야까지 인도하셨던 사실과 복의 땅에 대한 약속과 경고,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에 대해 말한 모세는 이제 결론으로 단호한 자세로 복과 저주는 너희 앞에 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 자신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바로 26-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라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의 열쇠는 이스라엘백성들 자신이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여부가 복과 화를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한 도를 지키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것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서 돌이켜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저주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다시 분명하게 복이 얼마나 바랄만한 것이며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복과 저주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일이 말했습니다.

 

27-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복이 될 것이고 28-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며, 저주는 불순종할 경우 받게 될 징벌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계속 누리게 될 것이고 아니면 반대로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자기 멋대로 살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를 백성들의 결정하기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마치 기계처럼 이미 만들어진 계획에 따라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 강제로 훈련시켜서 사람의 용도에 따라 부려 먹는 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또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되 창2:16-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시기를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아담 자신에게 결정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독재나 자유를 구속하는 강제명령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으로 싫어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내 멋대로라는 방종과 혼돈한 삶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택할 여유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백성을 사랑하시고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나 강제가 아니라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므로 복과 저주에 대한 선택권을 전적으로 사람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못됩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한 결과는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루에도 크고 작은 수도 없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갈림길에서 이것이다. 라고 선택하는 일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에게 선택의 문제가 제기될 경우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선택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장 유익한 것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삼상15:22-사무엘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23-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더구나 28-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이란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또한 섬겨서도 안 되는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알, 아스다롯, , 하늘 황후 등이 있는데(왕상11:7;

 

16:31;7:18) 모두 사악하며 음란한 제전(祭典)에 의해 숭배되던 특징이 있습니다<6:14>.

28-저주를 받으리라는 말도, 모세 설교의 독특한 특징은 먼저 순종하므로 누리게 될 풍성한 복을 말한 후, 이어 불순종함으로 당하게 될 무서운 저주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리하여 백성들을 항상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앞에 세워놓고 그들의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권고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모세는 지금까지(8-25) 말한 복과는 달리, 만일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길 경우 가나안 땅의 모든 풍요로움도 한낱 물거품에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29절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의 땅을 약속의 선물로 받은 후 그 복이 영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온 정열을 다하여 가르쳤습니다. 복과 저주는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쳤는데 29-그 복과 저주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스스로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선포하는 그리심산의 축복과 에발산의 저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27:11-13에 다시 강조합니다. 이 모세의 지시는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때 따르는 복과 저주에 대하여 보다 생생히 교훈하기 위함인데, 훗날 여호수아는 그대로 실행했습니다(8:30-35).

 

헷세드강해 29-그리심산에서 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의 두 산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왜 그리심산이 복의 산으로 에발산이 저주의 산으로 지정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두 산의 자연적 양상이 복과 저주를 구별하게 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산의 위치가 복과 저주의 산으로 지정된 이유라는 설이다. '스트라우스'(Strauss) 같은 학자는 그리심산의 비옥함과 에발산의 황폐함을 주장하는가 하면 '로빈슨'(Robinson)은 두 산이 모두 벌거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두 산의 사이에 있는 세겜에서 볼 때 그리심산이 해뜨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별이 드는 반면 에발산은 동쪽을 등지고 있어서 그늘이 지기 때문에 각기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설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디에서나 ''은 복으로 '어두움'은 저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참고

 

1. 환경적 조건의 복과 저주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며 골짜기에는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1) 두 산의 골짜기 세겜

 

아브라함의 제사: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이 두 산의 골짜기인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땅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의 청결: 야곱은 하란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곳에서 자기 가족들이 지니고 있는 이방 신상을 땅속에 묻어 자기와 그 가족을 청결케 하였던 곳입니다(35:4).

즉 믿음의 조상이 드린 제사와 청결은 그곳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보이는 그리심산과 에발산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의미로 나뉘었습니다.

 

2) 두 산의 비교적 요건들

 

두 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서로 상대적인 극과 극을 보여 주는 비교적인 요건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심산: 골짜기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해가 뜨는 동편에 위치한 양지 바른 곳이며 또한 수목이 울창하여 아름답고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산입니다.

 

에발산: 그리심산 맞은편 해가 지는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은 수목이 자라지 못하는 황폐한 산입니다. 동편은 밝아옴의 복을 상징하며 서편은 어두워짐의 저주를 상징합니다.

  

또한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은 복의 상징이며 황폐함은 저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지리적 조건의 축복과 저주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약속의 선물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의 땅인 가나안 지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1) 에덴동산과의 비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동방에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2).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최초로 만드신 복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에 순종하게 하시므로 에덴동산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복의 땅입니다.

 

2) 위치적 비교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와 그 실과가 있었고 죽음의 저주가 담겨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실과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중앙에는 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이 위치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를 언제나 인간 생활의 중앙에 두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중심에 복과 저주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신 뜻

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공존하는 복과 저주를 하나님은 우리들 스스로가 선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제한된 선택의 자유 의지

인간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복과 저주입니다. 이 복과 저주가 선포된 후 선택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입으로 시인한 것들을 복과 저주로 확정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행한 대로의 결과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나가 입술의 열매와 행위의 열매를 먹고 그 영혼과 육체의 삶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에 합당한 선택에는 복으로 갚아 주시고 저주에 합당한 선택에는 저주로 갚아 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6, 37)는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1-당신들은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거든, 가나안에 반드시 들어가 그 곳에서 살 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널 것이 확실하니(31) 요단 저편에서 그 일을 행하라(30. 모세가 말한다). 이 일을 가나안에서 행해지도록 제정함은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을 그들에게 확실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과 같은 증거인 것이다(3:12).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또 그것은 그들이 저주를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하여서는 복종해야 된다는 책임을 일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명령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명령을 공중 앞에 선포한 엄숙한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2-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준 모든 규례와 법규를 성심껏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이 엄숙한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느니라.

이 구절 들은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가나안에 들어가는 확신과 아울러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계명을 부디 잘 지키라는 권면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고 내 멋대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에 따라서 생명과 죽음 번성과 멸망 축복과 저주가 확실히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꼭 받고 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에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저는 부족하고 준비된 것이 적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쓰임받기 원하오며 더욱 순종하기 원합니다. 제게 주의 복을 허락하시고 함께 하소서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