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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 목표로 한 이슬람

 

해외의 기독교 선교단체들은 2005년 세계 이슬람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한국 선교단체들에 전했습니다. 전 세계 이슬람 국가 연합기구인 '이슬람 회의(OIC)'에서 "한국을 2020년까지 무슬림화 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며, 그 첫 단계로 한국의 대학가를 선교 우선 거점지로 하는 전략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10년이 지난 현재 전국 주요 대학에는 이미 '이슬람 동아리'들이 생겼으며, 일부 대학의 교수들은 이미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학생들에게 이슬람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서울대 이슬람 동아리는 영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사를 초청해 강연회를 여는 등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117년 전에 세운 대구의 한 기독교 대학에서는 2년째 이슬람 국가의 축제·종교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 외 해외 선교단체들이 전한 이슬람 진영의 한국 진출 계획으로는 '이주노동자'라고 부르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거 보내 한국 여성과 교제 및 결혼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 주변 사람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중동의 석유자금을 지원받아 한국에 투자하거나 이슬람 문화센터를 세우는 등으로 한국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슬람 진영은 이러한 포교 활동을 통해 2020년까지 모스크의 수를 기존의 7개에서 20여 개로 늘리고, 이미 존재하는 '기도처'를 수천 개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또 파키스탄 등에서는 한국으로 유학생 1000여 명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으며, 용인에 세우기로 한 이슬람 대학도 완공할 계획이라고 하며 이후로는 이슬람 초중고교와 유치원도 세울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편 한국의 공중파 방송들도 이들의 포섭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KBS와 MBC는 2005년 이슬람에 우호적인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뒤 종종 '친 이슬람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으며,

SBS도 이슬람에 우호적인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가 담당 PD가 이슬람 단체로부터 받은 뇌물 수수죄로 구속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이슬람은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접근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는 이에 대해 별다른 경각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중동 진출과 오일 머니 확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슬람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정치권은 '다문화 정책'을 내세워 이슬람의 한국 진출을 돕고 있는 실정입니다.

언론들도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경계를 무장 해제시키고 있습니다.  한국 내 이슬람 인구는 공식 수치는 13만 명이지만, 실제로는 20만 명을 넘는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며. 2005년 이후 10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난 것 입니다. (출처: 미래한국일보, www.prayer24365.org, revised by UPS.)


이 말씀을 이슬람의 교묘한 전략으로부터 깨어있어 기도할 한국 땅의 교회들에게 선포합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7: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영적 파수 기도문]

주여 주님은 저 원수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돈을 사랑하는 세상 풍조를 타고 맘몬의 영으로 미혹하고 있음을 보십니다. 각자 유익을 따라 오일머니를 앞세운 이슬람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이슬람에 대해 거부감이 없이 동화되도록 조장하고 더 나아가 주의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의 터가 있는 이 땅을 이슬람화 하여 하나님의 선교의 뜻을 훼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께서 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죽은 뼈들로 무덤에서 나오게 명하시는 하나님이시오니 이제 눈과 귀가 어두워 영적인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들로 깨어서 이 시대의 가장 큰 적그리스도인 이슬람의 영을 대적하게 하시고 물질 숭배로 무너진 한국사회의 담벼락을 막아서고 눈물로 이 땅을 치유하시도록 간구하는 주의 기도자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멘

[기도제목 1]
한국 사회에 죄악된 풍조를 타고 들어오는 모든 원수의 술수가 드러나고 그 권세가 파하여 지길 기도합니다.

한국의 돈을 숭배하는 풍조를 타고 오일 머니를 앞세워 이슬람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친이슬람화 하도록 조장하는 모든 미혹의 영들의 술수가 드러나게 하사, 이제 주의 교회들로 분별하여 깨어서 주의 몸된 교회들을 지키며 모든 이슬람의 권세로부터 한국 땅을 파수하는 기도가 일어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제목 2]

선교사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한국 땅에 다시 회개와 각성의 기도가 일어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선교사님들의 땀과 눈물로 한국 땅을 선교의 나라로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역으로 이슬람의 포교의 전략의 대상이 되어 버린 이 땅을 주 앞에 통렬히 회개하며,

오순절 성령강림절의 그 성령의 불길이 다시 한국 땅을 뒤덮어

주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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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원인

유해석 선교사(FIM선교회 대표)

제가 1990년 처음 영국에 공부하러 왔을 때, 영국 무슬림 인구는 110만 명이었습니다. 2001년 인구조사에서 종교를 쓰도록 했는데 무슬림 인구는 15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280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10년 사이에 이슬람 인구는 130만 명이 늘었습니다. 인구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시민들입니다.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약 5백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원인은

첫째, 이민입니다.

2000년에 들어서서 평균 매년 10만 명 이상이 이민왔습니다. 이민자 가운데 무슬림 인구 비율이 높았습니다.

둘째, 다산입니다.

영국에서 무슬림은 평균 6-7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무함마드가 마지막 설교에서 “자녀를 많이 낳아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결혼입니다.

쿠란에 의하면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해야 하지만, 무슬림 남성은 유대인·기독교인·무슬림 여성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이슬람법에 의하여 아버지의 종교를 따릅니다.

넷째, 개종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테러가 증가한다는 것은 이슬람 인구가 늘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이슬람의 세계관에 의하면 평화의 집(Dar al-Salam)과 전쟁의 집(Dar al-Harb)이 있는데,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평화의 집에 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전쟁의 집에 살기 때문에 전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는 곳마다 테러가 일어납니다.

저는 지난 3월 18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한국 주요 이단 및 이슬람 대책 세미나’에서 논문 발표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무슬림 인구는 약 10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0년 전에(2003년)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이라는 책을 처음 출판했습니다. 그 서문에 “우리 주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더블어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무슬림 인구는 약 20만 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년이 지난 2013년 말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 거주하는 이슬람 인구는 약 23만 명입니다. 영국에 2000년대에 매년 약 1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왔는데 이슬람이 이렇게 급증했습니다.

한국은 지금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하여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체 인구의 약 14%(643만 명)를 수입해야 한다는 예측으로 인하여, 매년 약 30만 명의 이민자가 들어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슬람화는 가속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의 생각이 아니라 마틴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존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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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슬람 유입 과정


▶ 유라비아(Eurabia), 런던니스탄(Londonistan) : 유럽이 이슬람化 되고 있다!
▶ 유럽의 多문화주의는 이슬람 테러리즘, 무슬림에 의한 性폭력, 폭력 범죄, 마약으로 실패
▶ 이민, 무슬림의 多産, 한국인과의 결혼, 개종 등을 통해 10년 내에 국내 이슬람 인구 100만 명 예상
▶ 기독교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충돌하면 한국도 테러 위험지대가 될 것

지난 3월 1일부터 9일까지 중동(中東) 4개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순방 기간 동안 세일즈 외교에 집중, 48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성과를 얻었다.

큰 성과에 고무된 박 대통령은 3월 12일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지난주 중동 순방을 통해 열사(熱沙)의 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면서 ‘제2의 중동 붐’을 예고했다.

같은 날 ‘제2의 중동 붐’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에 무슬림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현재 전국에 60개 정도 있는 이슬람 기도처소(Musalla)를 보완하고, 주요 관광지에 이슬람 기도처소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둘째,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전환을 위해 여행업계 등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6월) 및 교육(4회)을 실시하고 3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이밖에 의료관광객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이슬람 음식인 할랄 음식을 상품화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3 월 12일 한국식품연구원은 할랄식품사업단을 발족했고, 4월 10일 정책 브리핑에서 농림축산식품부는 할랄식품의 원료부터 제조·생산·물류 등을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는 할랄 식품 전용단지를 전북 익산에 50만 평 규모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3 월 19일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관광산업의 성장을 위해 무슬림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할랄 음식과 이슬람 기도실 보급, 아랍어 등을 구사하는 소수언어 가이드 양성 등 무슬림 음식과 생활문화에 맞는 여행 인프라를 구축하고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4월 29일 ‘할랄 시장 진출 기업을 위한 설명회’를 개최했다. 정부는 “무슬림 프렌들리(Muslim Friendly)”를 외치면서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기 위해 여념이 없는 것 같다.

 

 

1 차 중동 붐이 한국인 근로자들이 중동에 가서 일을 한 것이라면, 이번 2차 중동 붐은 무슬림 관광객을 유치하고, 각 병원마다 무슬림을 위한 시설을 강화하고, 할랄 음식을 위한 타운을 조성하는 등 한국에서의 이슬람 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면에서 이제 한국은 반드시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하며, 이미 다문화(多文化) 정책을 실행했던 유럽의 모습을 통해 다문화와 더불어 이슬람 붐이 가져올 한국의 미래에 대한 공론(公論)이 필요하다.

‘이슬람의 중심’으로 변해가는 유럽

최근 몇 년 동안 유럽은 중동을 제외한 대륙 중에서 이슬람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유라비아(Eurabia)라는 단어는 유럽에 사는 아랍 사람들의 연합과 결속을 위해 1970년대에 만들어진 잡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유라비아는 유럽이 이슬람화 되어간다는 의미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유라비아의 수도는 런던니스탄(Londonistan,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테러지원 도시를 비꼬는 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 북유럽 최초의 이슬람사원은 1889년 런던 외곽의 워킹에 들어선 사쟈한 모스크였다.

현재 영국에는 1800개의 모스크가 세워졌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은 서쪽에 찬란하게 빛날 것” 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그 예언이 실현되듯이 이슬람은 유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유럽의 무슬림 인구는 1970년 720만 명에서 1990년대에는 1300만 명으로, 2000년에는 3700만 명으로 늘어났다.

2007년을 기준으로 전체 유럽(동유럽 포함)에는 약 5300만 명의 이슬람 인구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유럽의 이슬람 인구가 증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1) 노동력 부족

유럽이 다문화 사회를 부르짖게 된 배경은 2차 세계대전 때 수천 만 명의 유럽인이 사망하면서 종전(終戰) 이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무 슬림의 증가는 전쟁 후의 재건을 위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프랑스는 프랑스 제국주의 영향 아래 있었던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이민자들이 들어왔고, 독일은 동맹국이었던 터키에서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영국은 자메이카,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무슬림들의 대규모 이민은 유럽 도시들을 제3세계 시장과 같이 변하게 만들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인구 통계학자인 데이빗 콜맨에 따르면 현재 영국이 이민을 완전히 중단시킨다고 해도 2050년이면 외국인 700만 명이 영국에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영국은 2000년 초부터 10년 동안 매년 약 50만 명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영국 인구의 1%가 되는 숫자다.

2) 저출산

저출산으로 인한 유럽의 인구감소 문제는 심각하다. 인구통계학은 사회학처럼 정확하게 예측 가능한 학문이다. 한 사회가 현재와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아 사망률을 감안해 한 여성이 평균 2.1명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를 총출산인구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 여성이 평균 1.6명을 낳으면 인구감소가 천천히 이뤄지거나, 또 그 사이에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이를 안전지대라고 부른다.

만약 그 이하로 아이를 낳으면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회가 한 명의 여성이 1.8명의 총출산인구를 유지한다면 한 세기가 끝날 무렵에 인구는 80%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1.3명의 총출산율을 유지하는 국가들(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그리고 발트해 국가들)은 한 세기 후에는 현재의 4분의 1의 인구만 유지하게 될 것이다.

3) 고령화 사회

20세기 노인 인구 문제는 유럽 경제의 공통적인 문제다. 저출산으로 인해 젊은이들은 줄어드는데 노인 인구는 늘어난다. 그래서 각국은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현재 유럽은 4명의 젊은이가 한 명의 노인을 부양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민자는 18~34세로 젊은 편이며, 이민은 인구의 평균 연령을 낮추기 때문에 처음에는 4:1비율보다 조금 높은 비율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이민자들이 필요하며, 이는 총인구의 엄청난 증가를 야기한다. 그렇다면 이들 이민자들이 노인이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답은 더 많은 이민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1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의 경우 인구가 2051년까지 1억1900만 명이 되어야 한다. 2100년에는 3억300만 명의 인구가 필요하다. 이런 상황이 유럽 각국에 발생하고 있기에 더 이상 유럽은 문명화 된 국가가 아닐 것이다.

실패로 끝난 유럽의 다문화(多文化)주의

20세기 말에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이슬람 세계가 그 폭력성과 인구 폭발로 서구 문명과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그 현상이 증명되고 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유럽으로 오는 이민자들은 연간 약 170만 명으로 집계된다.

20세기 중반에 서유럽에는 무슬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자 프랑스에 500만 명, 독일에 400만 명, 영국에 200만 명의 무슬림을 포함하여 서유럽에 1700만 명의 무슬림이 존재한다.

유럽인들의 평균 19%만이 이민자들이 자신의 나라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유럽인들의 69%가 이민자가 너무 많고, 이민자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급기야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다문화는 실패했다고 공언했다.

앙 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0년 10월에,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2011년 2월 10일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011년 2월 5일 독일 뮌헨의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실패한 정책(다문화주의)을 접을 시간이 됐다”고 선언했다.

캐머런 총리가 다문화 실패를 선언하자 2월 7일 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 신문의 칼럼니스트 레오 미킨스트리는 다문화 실패 원인을 ▲이슬람 테러리즘 ▲무슬림에 의한 성폭력 ▲폭력적인 범죄 ▲마약 등 네 가지로 꼽았다.

이를 포함하여 이슬람이 성장함으로서 유럽에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자.

1) 테러리즘

영국 내 무슬림의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에 따르면 16~24세의 젊은 영국 무슬림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보다 종교적으로 더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약 50%가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41%가 다이애나 전(前) 왕세자비가 무슬림과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살해 당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슬람 공립학교를 선호했으며, 여자들이 머리에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외출 시 착용하는 의류로, 베일의 일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국법보다 이슬람법을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그들의 3분의 1 이상이 이슬람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답했다.

테러의 이유는 이슬람의 구원관과 관계가 있다. 꾸란의 많은 구절이 알라와 이슬람을 위한 전쟁, 즉 지하드에 참전했다가 순교할 경우 천국으로 안내된다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알라의 길에서 성전(聖戰)케 해 내세를 위해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알라의 길에서 성전하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알라는 그에게 크나큰 보상을 주리라”(꾸란 4:74)

이슬람의 알라는 알라와 이슬람을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보상을 주는 것이다.

2) 무슬림에 의한 성(性)폭력

성폭력에 대한 유엔의 공식통계를 보면 영국이 2009년 여성인구 10만 명당 79.5명, 독일은 59.6명, 참고로 한국은 33.7명이다.

영국 국회 청소년위원회(Children’s Commissioner) 부대표 수 베렐로위츠의 연구에 의하면, 2010년부터 2011년까지 14개월 동안 영국에서 2409명의 소녀들이 아시안 조직폭력배(이하 조폭)들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영국에서 아시안 조폭은 무슬림 조폭을 의미한다. 옥스퍼드 주(州) 법원은 9명의 무슬림 조폭들이 79번의 범죄 행위에 대해 재판을 했다.

그들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11살에서 15살 사이의 어린 영국 소녀들 가운데 가정에 문제가 있는 소녀들에게 마약과 집단 성폭력을 행사했으며 성매매를 강요했다.

3) 폭력 범죄

1991년부터 1995년 사이 영국 감옥에서 이슬람 인구가 40% 증가했다. 영국의 조사기관인 ‘파수꾼(watchdog)’에 의하면 영국 교도소에 있는 15세에서 18세 죄수들 가운데 20%는 무슬림이다.

무 슬림 수감자들 중 65% 이상이 18~30세 사이의 젊은 무슬림들이었다. 1991년에는 영국 교도소에 무슬림이 1957명 수감되어 있었는데, 2013년에는 무슬림 수감자가 1만1683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22년 만에 596%가 늘어난 것이다.

무슬림들은 감옥에서 서로의 동질성으로 인한 형제애와 이슬람 신앙을 굳게 다지며 매주 금요일 이슬람 예배에 참석해 꾸란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며 이슬람 원리주의에 심취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이미 살인과 폭력에 익숙한 사람들이기에 미래의 이슬람 과격화를 가속화시킬 것으로 본다.

특히 영국에서 가장 강력범들을 수감하고 있는 케임브리지 주 교도소의 경우 10명 중 4명이 무슬림이다.

영국인들은 2011년 8월 런던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이슬람의 폭력성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 경찰 통계에 의하면 체포된 사람들 중 55%가 아시아 무슬림 혹은 흑인이었으며, 13%가 범죄조직의 일원이었다.

4) 마약

젊은 무슬림들은 학교의 무단 결석, 반달리즘(Vandalism, 다른 문화·예술 등에 대한 무지로 인해 문화유적이나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행위), 마약 밀매, 범죄 및 조폭으로 성장했다.

브레드포드, 버밍햄, 런던의 빈민가에는 실업률, 도시 부패 및 공동체 부패를 경험한 젊은 무슬림들이 가족을 벗어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마약을 팔고 있다.

1990년대 영국 감옥에는 무슬림 수감자들의 숫자가 급증했으며, 그 중의 4분의 1이 마약 관련 혐의로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런던의 타워 햄릿 자치구 경찰 발표에 따르면 마약 관련 혐의를 받은 사람의 50%가 방글라데시 젊은이들이었다.

급속하게 늘고 있는 한국 內 무슬림 인구

한국은 1990년 이후 외국인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외국인 인구가 유입되는 이유는 유럽과 비슷하다.

첫째가 노동력 부족이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서서히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무렵 국내 노동시장에는 산업별 노동력 이동현상이 일어나면서 제조업 분야에 심각한 인력난을 초래했다.

반면 가난과 실업으로 노동력을 국제시장에 배출해야 했던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새로운 노동시장의 판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한국 노동시장의 경제적 요구와 아시아 국가 노동인구의 요구가 부합되면서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을 향해 밀려왔다.

1990년부터 한국의 노동시장은 한국인 노동력 수출량보다 외국인 노동력 수입량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둘 째, 저출산 문제다. 저출산은 저성장을 초래한다. 우리나라는 1970년 4.53명의 출산율을 기록한 이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1980년 2.63명으로 급격히 줄었고, 1990년 1.60명, 2000년 1.47명, 2014년 1.20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인류통계학에 의하면 이대로 100년이 지나면 순수한 한국인은 21.6%밖에 남지 않는다. 204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400만~500만 정도, 2050년에는 800만~1000만 정도가 줄게 될 것이다.

셋째, 고령화 현상이다. 고령화 사회는 65세 이상 인구가 14% 이상인 사회를 말한다. 한국은 2018년에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2026년에 인구의 20%가 고령화 된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외국인 이민자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에 따라서 이슬람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한국 내 이슬람의 성장 요인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 째, 이민에 의해 국내 이슬람이 증가하고 있다. 1990년 외국인들이 대거 유입됨에 따라 2000년에는 재한(在韓) 외국인 총수가 20만 명을 넘어 전체 인구의 0.44%를 차지했으며, 2005년에는 전체 인구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외국인 체류자는 꾸준히 늘어 2013년 말 157만 명을 기록, 4920만 명인 국내 총인구의 3.2%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 인구를 한국 전체 인구의 14%(643만 명)를 수입해야 한다는 예측 등으로 외국인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울 한남동의 이슬람 사원. 터키 정부가 350억 원이 넘는 비용을 부담하여 새롭게 짓기로 했다. 현재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약 25만 명인데, 이대로 가면 10년 내에 1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혹자는 중동이 한국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한국의 이슬람화는 지나친 생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인도네시아(2억4000만 명), 파키스탄(1억9000만 명), 방글라데시(1억6000만 명)이며, 인도의 무슬림 인구는 1억6000만 명이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70%는 아시아에 살고 있다. 한국에 유학하러 온 이슬람권 유학생들도 급증하고 있다.

출입국 외국인정책 본부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어 연수와 일반 연수생을 제외한 이슬람권 유학생은 2006년에 1466명에서 2011년 12월 3841명으로 2006년 대비 262% 증가했다.

둘째는 무슬림의 다산(多産)이다.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4명보다 낮아 최저 수준이다.

조희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는 2012년 약 4000명의 무슬림 자녀들이 살고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무슬림 여성은 산아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무슬림 2세들이 급증할 것이다.

셋째, 무슬림과 한국인의 결혼을 통해 이슬람이 성장하고 있다. 2013년 6월 법무부 통계를 근거로 보면, 한국인과 결혼해서 국내에 머물고 있는 국제결혼 비자 체류자는 14만8746명이다.

이 중 주요 12개의 이슬람 국가 출신이 4935명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주요 12개 이슬람 국가만을 고려한 것이다.

현재 OIC(이슬람회의기구) 회원국은 57개국이며, 회원국에 속하지 않지만 전체 인구의 9% 정도가 무슬림인 프랑스 같은 나라도 있다.

이들 나라에서 온 무슬림들, 그리고 그들과 결혼한 내국인들까지 계산하면 국내 무슬림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꾸란에 의하면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한다(꾸란 2:221). 그러나 무슬림 남성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꾸란 5:6). 한국에 유대인 여성이나 무슬림 여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기독교 여성들이 무슬림과 결혼해 무슬림 자녀를 낳음으로써 기독교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넷째가 개종이다. 〈표1〉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한국에서도 이슬람 인구가 성장하고 있다. 한국인 이슬람 인구가 성장한 배경은 1970년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남동에 이슬람 사원을 건축했다.

당시의 중동 붐으로 인해 6000명 정도의 이슬람 인구가 성장했다. 1990년 이후에는 외국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한국 무슬림들이 늘어나 2005년부터 2009년 사이에 약 3만 명이 성장했다.

한국인 중에서도 매년 약 7500명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가 교회에 출석하던 기독교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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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니파학파 the Hanifite

 

법학적 측면에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페르시아인 Abu Hanifa(767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시되었다. 이라크의 상황이 무함메드가 살던 상황과 유사한 경우 쿠란 그대로 적용하고, 다를 경우 유추해서 적용했다. 다른 학파에 비해 인간의 사유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더 넓게 열어놓았다. 유추에 의한 결정이 일반적 정의에 어긋날 경우 공공이익을 위한 판단 istihsan에서 나오는 '신중한 의견' 또는 '인정된 정의'를 참고로 다시 결정했다. 압바스조, 오스만 터어키가 이들의 입장을 따랐다.

 

말리크 학파 the Malikite

 

메디나에서 말리크 이븐 아나스 Malik ibn Anas(753-795)가 창시했다. 쿠란과 하디스에 의해 법, 의식 해석하고, 애매한 경우 메디나의 '합의된 의견' ijma에 의존했다. 하디스의 정밀한 분석과 엄정한 비판을 통해 신뢰성을 고양시켰다. 해석이 어려운 경우 유추법 사용하고, 이것이 ijma와 상충할 경우 공공이익을 감안하여 결정했다. 이 학파는 보수적 성격을 가졌으며, 꾸란에 배치되는 예언자의 관행을 과감히 배척했다. 현재 북아프리카, 남부 이집트, 동부 아라비아에서 지지되고 잇다.

 

피 학파 the Shafiite

 

법학을 체계화한 학파로, 페르시아 출생 아랍인으로 쿠라이쉬 부족 출신 알-샤피이 al-Shafii가 창시했다. 그는 말리크의 제자로, 독자적인 법률과 전통 관습의 조화로운 절충을 통해 합리적 법학 이론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 학파는 법의 네 근원을 구분한다. 알라의 계시 쿠란, 예언자의 언행 하디스, 법학자들에 의해 표명된 무슬림 공동체의 여론 ijma, 이성에 의한 유추 qiyas가 그것이다. 그중 끼야스 적용에 명백한 규정과 한계를 두었다. 네 근원의 배열에서 이성의 사용을 부차적 요소로 두었다. 쿠란과 하디스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했는데, 때로는 하디스에 더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독자적 해석'도 거부했고 이즈티흐산(선호)을 부정한다. 현재 동부 인도, 북부 이집트(카이로), 동부, 남부 아프리카, 남부 인도에서 지지되고 있다.

 

한발리 학파 the Hanbalite

 

아흐마드 이븐-한발 Ahmad Ibn Hanbal(855 사망)이 창시했다. 그는 알-샤피이의 제자이지만 '독자적 해석'에는 스승보다 더 비타협적인 순수한 전통주의자였다. 꾸란과 예언자의 관행, 즉 순나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현재까지도 샤리아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신앙공동체로 지속되고 있다. 끼야스를 샤리아 법원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가장 배타적 입장을 취했다. 무타질라파에 반대했는데, 무타질라파가 쿠란의 창조성을 주장할 때, 이에 단호히 맞서 쿠란의 영원성을 주장했다. 첫째는 쿠란, 둘째는 하디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Hijaz와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서지지되고 있다.

 

기타

 

자히르 법학파

4대 법학파에는 들지 못하나 중요한 학파이다. 쿠란의 외면(자히르)적 의미를 강조했다. 법률해석에서 꾸란과 순나의 언어적 의미에 크게 의존한다. 다른 학파의 견해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 고립적 해석태도 견지한다. 그러나 이성, 유추, 유효 istishab, 모방 taqlid 반대한다. 이 학파는 이라크에서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909 사망)가 창시했고, 이븐 하즘(1064)이 발전시켰다. 이븐 하즘에 의해 유독 스페인에서 성행했다. 후에 신지학적 수피즘의 대가 이븐 아라비(1240)에도 영향을 미쳤다.

 

 

법학파들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

 

마드하브(법학파) 통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견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징표라는 하디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법학파 간 차이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다.

 

이즈마

11세기에 마드라사(신학교) 설립하여 네 개 법학파 모두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이즈마(공동체의 합의) 정신에 따랐는데,이즈마는 쿠란, 전승, 유추에 이어 네 번 째 法源이 되었다. 초기 이즈마는 다른 지역의 관례나 전통 받아들여 새로운 방안 모색하는 창조적 역할 했으나,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경직화되어 변화 억제 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즈티하드(法源)의 문은 닫혔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 결과 이즈마가 고착되며 적응력울 잃기 시작했다.

 

샤리아(넓은 길, 곧은 길)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신자들의 의무조항으로, 이것의 유일한 입법자는 알라이다. 이 샤리아는 법전화된 적이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종교적 가르침이 지닌 실천적 면을 형성하며, 또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세세대대로 전수되었다. 종교판사(카디)는 그 이행여부를 감독했고, 무프티는 어떤 행위가 율법에 준하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적 소견서(파트와)를 제출했다.

 

피크(통찰)

샤리아를 다루는 학문으로 신학에 바탕을 두고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샤리아 중 사법적인 부분은 1869년 오스만 제국의 메젤레 속에 법전화되었다. 모든 행위를 다섯 범주로 분류했다. (의무적 행위, 바람직한 혹은 추천할만한 행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행위,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금지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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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신조 iman

 

1.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없다. la ilaha illa Allah

 

신의 인도에 관한 해석의 문제에서, 쿠란의 어느 부분은 자유의지를, 어느 부분은 예정론을지지한다. 무함메드는 20여년 동안 엑스타시 상태에서 말을 하였던 예언자였으므로 체계적 신학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Sunni들은 쿠란이 예정론의 입장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알라의 방법은 무함메드와 쿠란, 천사로 여겨졌다.

 

2. 무함메드는 알라의 사자다. Muhammad rasul Allah

 

무함메드는 예언을 완나성시킨 마지막 예언자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함메드도 인간이다. 기적, 신비한 성만찬, 성직자 임명 등을 하지 않은 완전한 인간이었다.

 

3. 쿠란

 

쿠란은 인류에 대한 알라의 마지막 말이다. 유대,기독교의 경전은 인간이 수정하고 오염시켰으므로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3. 천사

우두머리 천사는 가브리엘로 충실한 천사, 성스러운 천사로 묘사되었다. 알라는 일곱 번째 하늘 옥좌에 않아 있는데, 천사들이 그를 보좌한다. 악마는 타락한 천사이며 저주받은 유혹자이다.

 

4. 최후의 심판

 

종말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나 기괴한 자연현상 일어나고,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일어나 알라의 최후심판대 앞에 모여들 것이다. 오른편의 신앙심이 돈독한 자들은 낙원으로 간다.

 

윤리

 

여자에게 좀더 높은 지위를 인정했다. 술과 도박을 금지했고, 평등, 약자 보호, 음식 금기 등이 있었다. 이는 더 나은 도덕적 생활을 위한 윤리였다.

 

종교적 의무 : 다섯 기둥 al-Arkan

 

1. 신앙고백 Shahada(샤하다)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메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La ilaha illa Allah ; Muhammad rasul Allah. 이 말은 쿠란에 있지 않다. 이슬람의 핵심을 요약한 말이다.

 

2. 기도, 예배 Salat(페르시아어, 터키어로는 나마즈)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가는 첩경은 예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루 다섯 번 기도(동틀녁, 정오, 오후3, 해질녁, 어두워진 후 또는 잠자리 들 때)하는데, 이는 쿠란에는 없으나 무함마드 생전이 관례가 된 것이다. 재계의식 후 무릎깔개를 펴고 서서 기도후,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멕카 향해 절을 한 후 알라를 찬미하고 복종을 맹세, 다시 서서 알라를 찬미, 그리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리면서 알라를 찬미, 그 후 경건히 앉아서 간청, 마지막으로 다시 엎드린다. 그 동안 "알라는 가장 위대하다" Allah akbar 낭송한다. 매일 올리는 예배는 숭배와 겸손의 행위이다. 금요일은 정오나 해질녁 imam의 인도 아래 공중기도를 한다. 이 때에는 두 부분으로 된 짧은 강설(후트바)을 포함한다. 후트바는 보통 쿠란이나 하드스에 언급된 덕담과 위정자를 위한 기도로 구성된다. 여성은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예배의 부름 아단이 있으면 신자들은 세정(정화)하고 참여한다. 타하주드는 밤을 새워 드리는 예배로 의무사항은 아니다.

 

예배 끝내기 전 개인적 기원 올릴 수 있다. 예배의 정화하는 힘에 대한 믿음이 크다. 하루에 다섯 번씩 죄를 씻어내는 물줄기에 비유한 예언자들도 있었다. 정해진 시각의 예배는 정확성, 청결성, 공동체의 평등함 참여의식을 일깨운다. 예배의 장소인 마스지드(꿇어 엎드리는 곳)에서 모스크 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모스크는 돔 구조물과 높은 미나렛으로 구성된다. 민 바르(연단)에는 그림 장식이 없고, 대신 아라베스크 문양, 글씨 장식이 발달했다.

 

3. 자선 Zakat(구휼세)

 

원래 자선을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하느님에게 해 드리는 대부금으로 간주되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자발적 선물이나 자선금으로, 액수는 율법에 의해 산정되어 있었다. 현재 무슬림 국가에서는 개인이나 가족이 1년 번 수입의 2.5%를 자카트로 낸다.

 

4. 라마단의 달에 행하는 단식

 

이슬람 음력(354)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는 해 뜬 후부터 해질녁까지 음식, 음료수 먹을 수 없다. 해진 후에는 다음날 단식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과 음료수 먹을 수 있다. 단식 하는 사람을 이를 지키겠다는 니야(다짐)을 매일 아침 새롭게 해야 한다. 여행자, 노인, 임산부, 유모, 환자는 단식 지킬 필요가 없다. 다른 날 모자란 만큼 단식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 제공하는 자선행위 등을 통해 면제받아야 한다. 전시에는 단식 지킬 필요가 없다.

 

5. Haji

 

일생중 한 번 모든 무슬림은 멕카를 순례해야 한다. 성스러운 달 Dhu-al-Hijja에 카바의 巡行과 대,소순례, 대축제에 참가한다. 카바의 순행은 검은 돌에서 지작해 건물을 세 번은 빨리, 네 번은 천천히 돌며, 매번 남동쪽 모퉁에서 멈춰 검은 돌에 입을 맞춘다. 소순례(움라)는 카바 주위를 순회하는 의례, 계곡의 양편 언덕인 SafaMarwa 사이를 어깨를 흔들며 빠르게 일곱 번 왕복(하갈의 물 찾는 행위 흉내내는 것)하는 의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대순례를 위해 먼저 정화의례를 한다. 남성들은 삭발, 이흐람이라는 옷 걸침, 여성은 몸매를 감출 수 있는 허름한 옷을 걸친다. 성스러운 달의 여덟 번째 날, 멕카 동쪽 9마일 Arafat로 이동하고, 도중의 Mina에 정오에 도착 후 밤을 샌다. 다음날 아라파트 평원에서 의식에 참여하고 명상, 천천히 걷는 의식을 수행한다. 해 지면 소란하게 멕카로 돌아오며 도중의 Muzdalifa에 달려가 노천에서 다시 밤을 샌다. 해 뜬 후 미나로 가며 산 비탈길 세 장소에 일곱 개의 조약돌 던지며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전능하다" 라고 외친다. 이 대순례 후 대축제에 참석하여 제물을 바치고 함께 먹고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 다음 3일 동안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키면서 먹고, 떠들고, 즐겁게 놀고, 마지막으로 멕카로 돌아와 카바를 한 번 더 돈다. 성지순례는 건강하고 빚을 지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경우에만 수행한다. 순례 중 죽은 사람은 샤히드(순교자)로 간주된다. 메카 순례는 이슬람 신학, 신비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슬람 세계의 개혁운동도 성지순례에 의해 점화되었다. 멕카 방문과 함께 메디나의 예언자 영묘(라우다) 방문도 관례가 되었다.

 

조직

 

움마(공동체)는 신자들로 구성된다. 심판의 날 무함마드가 "움마티 움마티"(저의 공동체를, 저의 공동체를(구해주소서))라고 외치면서 공동체를 위한 샤피(중재자)로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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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무슬림 ?

Muslim이란 '복종하는 자', '이슬람에 자신을 봉헌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Islam'승인하다', '복종하다', '자신을 봉헌하다'는 동사의 부정형에서 파생한 명사로 순종, 복종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은 쿠란을 최종 계시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사의 자료는 Hadith(전승집), 예언자의 전기로 구성된다.

 

무함메드 이전의 아랍 종교

 

인종과 경제적 상황

아랍인은 셈어를 사용하는 족속이 다수이지만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함메드 당시에 도망해온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서부에 자유롭게 거주하고 있었으며, 대상들의 교역로가 발전하고 있었다.

 

종교적 상황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종교는 원시 셈족의 사막 신앙에서 발전했다. 남부 아라비아는 바빌로니아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月神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지방신을 숭배했고, 멕카에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세 여신 숭배가 있었다. 그 신들은 母神 -라트 al-Lat, 운명의 여신 알-마나트 al-Manat, 비너스의 배우자이며 새벽별을 상징하는 알-우즈자 al-Uzza, 이들 모두는 알라의 딸들로 믿어졌다. Allah는 창조자, 지고신으로, 무함메드의 부족 Quraysh가 숭배한 신이다. 이들은 상위신 외에 천사와 여러종류의 靈魔 jinn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천사들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유익한 존재로 여겨졌고, 영마는 아담보다 2천년 먼저 창조되어 대부분 악의 근원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아라비아 전역, 특히 베드윈족 사이에서는 자연 숭배가 보편적이었다.

 

멕카 Mecca

가장 성스러운 신전 중 하나인 Kaba가 있는 곳이었다. 이 안에 있는 거대한 운석이 숭배의 대상이다. 카바 근처의 성스러운 우물 Zamzam(하갈과 이스마엘에 이곳에 왔다는 전설)도 숭배의 대상으로 소순례 Lesser Pilgrimage가 행해졌다. 카바 안에는 일종의 판테온이 구성되어 있었다. 주요 순례지로 멕카가 자리잡고 있었고, 또한 부족간 갈등의 정점이기도 했다.

 

 

예언자 무함메드

 

대략 571년 쿠라이쉬 부족 하심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출생 이전, 어머니는 6살 때 사망했다. 그후 조부 아브드--무타립 Abd-al-Muttalib과 삼촌 아부 타립 Abu Talib 밑에서 어려운 성장기를 거쳤다. 후발과 알-우즈자를 숭배했고, 영마, 사탄, 길조와 흉조 등을 믿는 아리비아 신앙에 회의를 가졌다. 그의 종교적 변화는 유대교, 기독교의 신관념, 심판, 종교적 삶의 영향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친지 WaraqaUmaiya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심취했다. 기독교에 대한 정보는 주로 네스토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15세 연상의 하디자와 결혼 2,3명의 아들 낳았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네 딸 중 오직 파티마 Fatima만이 그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정신적 시련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신관과 심판 관념등에 동요했다. 40세깨 메카 주변을 방황하며 명상했다.

 

예언자의 소명

멕카 북쪽 수 마일 떨어진 히라 Hira 산의 동굴에서 명상을 하다가 "권능과 명증의 밤"이라고 부르는 날 신의 사자인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환상이 끝난 후 계시의 전체를 재현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고민하여 수개월에 걸쳐 체험을 회의하다 스스로가 알라의 진정한 예언자 nabi 이며 사도 rasul 임을 자각했다.

 

초기활동

설교의 기본 내용은 육체의 부활과 지옥의 불에 대한 예언이었다. 초기계시에서는 신의 단일성보다는 신의 권능과 최후 심판에 대한 언급이 주종을 이루었다. 신이 복수로 나타나기도 했다. 쿠라이쉬 부족 사람들은 신의 단일성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않았으나, 무함메드가 예언자라는 주장에는 반발했다. 예언자라면 부족 전체의 지도자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정의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의무를 강조했다. 추종자들은 소수(초기 4년 동안 불과 40여명)였다. 첫 추종자는 하디자, 양자가 된 노예출신 소년 자이드, 아부 탈립의 아들 알리, 상인 아부 바크르 Abu Bakr얐다. 유일신 교리는 메카의 주된 수입원(순례객)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반발을 초래했다. 무함메드의 활동에 대한 부족의 반대자들의 방해가 극심했다. 그는 아부 탈립 사망후 이주 계획를 세웠다. 이주 Hijra6226월에 야트립으로 이주하면서 이루어졌다.

 

메디나의 신정정치

 

야트립으로 이주 후 도시의 통치권 장악 후 마디나트 안-나비(줄여서 메디나,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했다. mosque를 건설했고, 단순하고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냈다. 멕카의 대상 공격으로 멕카와 공방전 후 6301월 멕카를 정복했다. 그후 무함메드는 카바 신전의 개혁을 단행해 우상을 파괴하고, 아브라함과 천사들의 그림도 파괴했으며, Zamzam을 정화했다. 이를 통해 그는 아라비아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지배권을 확보했다.

 

생의 후반기에는 계시의 운문 형식은 줄고 종말론적 경고는 의례나 제도적 문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대체되었다. 무슬림들의 삶의 모든 분야를 종교에 의해 규정했다. 비스밀라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로 모든 행위를 시작했고, 하느님 앞에 직접 서므로, 중재자 역할 하는 사제 계급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무함메드는 632년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그는 죽기 직전 설교에서 "모든 무슬림은 모든 무슬림과 형제"임을 천명했고, 죽기 전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 caliph(계승자)로 선출했다.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

 

무함메드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이슬람의 신앙 iman 의식, 또는 의무 din의 토대가 되었다. 신앙보다는 의식의 많은 부분이 정형화되는 과정에서 후대의 변화와 영향이 많았다.

 

쿠란과 그 가르침

쿠란은 이슬람의 근본, 낭송, 복창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를 의미한다. 쿠란은 하늘나라에 보존되어 있는 서판에 담긴 쿠란의 원본이 드러난 것이다. 오직 정결한 자만이 만지거나 낭송할 수 있다. 무슬림들에게 쿠란은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므로 번역할 수 없는 일이다. 번역하는 경우도 단지 그 책의 의미에 대한 설명, 즉 여러 가지 의미의 해석 중 하나일 따름이다. 쿠란의 문체는 모방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고 여겨졌다. 또한 문장의 배열이나 문자 하나하나의 배치에 있어서조차 신성하고도 불가사의한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쿠란의 편집은 우스만 시절에 이루어졌는데, 시대순이 아니라 길이순으로 편집되었다. 심판을 강조하는 초기의 단편적 계시가 뒷부분에 수록되었다. 단지 하나의 짧은 기도문만이 일종의 서문으로 채택되어 맨 앞에 배치되었다. 그것은 파티하(開章)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처럼 사용되었다. 114개의 수라에는 소, , 질주자 등 각각 짧은 표제가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수라 112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주제로 하고, 악으로부터의 보호를 구하는 두 개의 짧은 기도문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어떤 수라, 또는 단 한 개의 소절이라도 낭송하려면 먼저 저주받은 사탄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주문과 바스말라를 낭송했다. 바스말라는 "비스밀라힐-라흐마닐-라힘"(자비롭고 자애로운 하느님의 이름으로)으로, 수라 9를 제외한 모든 수라 앞에 놓여 있는 말이다. 우르드어로 비스밀라 카르나는 단순히 '시작하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터키어로 하디 비스밀라는 '시작하자' 라는 의미이다.

 

어떤 수라는 각별한 영험(바라카)가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수라 36(야신)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위해 낭송된 것이다. 각각의 쿠란 구절은 아야트(징표,기적)라고 불렸다. 쿠란에 나오는 인간 존재의 위상은 영들이나 천사보다도 우월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로부터' 생명의 입김을 아담에게 불어넣었고, 그릴 자신의 대리자(할리파)로 삼고자 했고, 천서들로 하여금 그에게 절을 올리도록 명했다고 한다. 한편 쿠란은 원죄를 부정한다. 인류 최초의 죄는 유전되지 않았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나 환경의 영향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쿠란은 인간과 하느님의 절대적 유대관계를 강조했다. 하느님이 아담의 자녀들을 영예롭게 하고(수라 17/70), 아마나(신탁)를 맡겼다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쿠란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이 지평선 안(즉 이 세상)과 자신들 속에 놓아둔 징표를 보며 숙고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기 수라(메디나에서 계시된 수라)에는 세상사, 일상사, 정치적 문제에 대한 상당한 양의 가르침을 포함했다.

 

언어의 숭고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경시가 있었다. 이 쿠란은 영창조로 낭송되었다. 암송자 암송자 하피즈(모두 암기하고 있는 사람)는 존경받음

 

쿠란의 해석

무함마드 사후 몇 세대 동안은 무슬림들 대부분은 쿠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완전히 일치하는 해석은 없었다. 다앙햔 해석의 사실 자체가 쿠란의 초자연적 성격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무한한 것이었다.

 

주석 작업은 타바리(935 사망)30권 주석서가 최초의 역작이다. 쟈마흐샤리(1146 사망)는 유명한 주석서를 무타질라파 입장에서 저술했다. 13세기 바이다위 주석서, 15세기 말 잘랄루딘 앗-슈우티 주석서, 19세기 오스만 터키의 엘말리 주석서 널리 사용했다.

 

신비가들은 의미의 참된 핵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문자의 장막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어의 어근을 캐고 각 표현을 관련지어 보고하는 것이 거의 무한하게 가능한 아랍어의 특성으로 대단히 용이했다.

 

쉬아파, 특히 바티니야 파는 쿠란의 비의적 의미를 강조했다. 쿠란을 읽거나 낭송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직접 대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하느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쿠란 읽는 행위 자체가 성례였다.

 

중세에는 신비수리학적 해석술이 발달했다. 일련의 문자로부터 그 數理値나 조합을 구해 심오한 의미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는 필사본이 다소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간과했다.

 

현대적 해석으로는 무스타파 알-마자라기의 "어떤 명백한 진리가 계시된 문장과 양립할 경우, 그 문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 사이트 아흐마드 칸(1898 사망)의 자연에 드러난 하느님의 役事는 쿠란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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