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맙시다.
말씀 : 살후3:13-18
1.끝까지 선을 행합시다.
옛날에 수리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서 농사짓기가 힘들었던 시절에는 가뭄이 들면 논에 물을 대는 문제로 곧잘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바로 그런 시절의 이야기인데 한 농촌교회의 한 집사님이 밤 늦게까지 수고해서 논에 물을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을 나가보니 자기 논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바로 아랫 논에만 물이 있었다. 아랫논 임자가 자기 논의 물을 훔쳐간 것이다. 집사님은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에 한번 꾹 참고 다시 밤늦게 까지 논에 물을 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또 아랫논 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훔쳐갔다. 그래서 집사님은 화가 치밀어 당장 달려가서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다. “집사님,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이번에는 그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대어주고 그 다음에 집사님의 물에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님은 한번 더 참기로 하고 먼저 그 원수 같은 사람의 논에 몰을 대준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대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이 그 고약한 사람이 이 집사님을 찾아와서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달려와서 내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논에 물을 대주다니 예수님 믿으면 그렇게 됩니까? 그러면 나도 예수님 믿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집사님의 선행으로 귀한 영혼을 구원하고 이후로 좋은 친구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론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아니 열매는커녕 도리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동시에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령 열매를 맺지 못해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해야 한다. 그게 선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알고 계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선을 택하여 선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고, 오늘 13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하셨다.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말씀을 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전1:6절을 보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힘든 현실들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낙심도 되고, 심지어 회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 어려움 없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게다가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낙심하는 자도 생기고 회의를 갖는 자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믿음을 따르라.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라. 그것만이 살길이고 그럴 때 분명 열매가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선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그러나 문제는 선을 따라 사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어 낙심하기 쉽고 포기하기 쉽다. 그건 나나 세상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죄와 무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참고 기다리며 선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분명히 그 열매를 누리게 된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얻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기를 10년 이상 도망 다니다가 결국 왕으로 등극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가서 10년 이상을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참고 선을 따랐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며 선을 따랐다. 그럴 때 결국 전세계에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잘 몰라도 그저 기다리라.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2.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태도(14,15절)
그러나 이런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어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살후3:14,15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여기에 보면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세가지 태도가 있다. ①지목하라. ②사귀지 말라. ③부끄럽게 하라.
지목하라는 것은 대상자를 밝히라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밝히지 말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대상자를 공개적으로 밝힘으로 그런 잘못된 사람이나 태도에 대한 분명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런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사귀지 말라는 것도 결국 같은 의미이다. 그들과 절교하고 내치고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함께 교제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태도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부끄럽게 하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과정에서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내치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아프지만 이런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그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악을 그냥 묵인하고 감싸주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분명히 악을 악이라 말하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만들어야 한다. 죄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수치도 모르고 살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자신도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의 문을 막는다. 교회 공동체에 죄를 누룩처럼 퍼지게 하여 교회 공동체마져도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우리는 그냥 무조건 감싸주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싸주는 것은 실수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지혜와 능력이 모자라는 것 등을 덮어주는 것이다. 고의적 악의적 의도적으로 행하는 악한 죄나 습관을 덮어주는 것은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져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도 그렇다. 죄와 악을 행하고도 아무런 반성이나 회개나 돌이킴이 없는데 무조건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죄와 허물에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것을 벗어던지고 선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는 당연히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용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실 때는 징계하신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책망할 것을 책망하라고 하신다. 아이를 훈계할 때도 때로는 매도 들라고 하신다. 교회에서도 분명히 징계할 것을 징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잠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러므로 가족이든 교회 안에의 형제자매이든 진정어린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그러나 윤리적 도덕적인 죄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바로잡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함으로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
3.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기원함(16-18절)
살후3:16, 18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교인들을 축복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축복의 내용인데 그것은 평강과 하나님의 은혜이다.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무슨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축복해 줄 때 가장 기쁜가? 물론 돈, 건강, 물질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이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위로, 소망, 믿음, 사랑, 보호, 인도 등의 인생에게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먼저 이것을 누려야 한다. 설령 세상의 것은 조금 못 누려도 이것만은 누려야 한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적게 받았어도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하게 산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된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다 가졌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 진짜 자유 평화 기쁨 은혜 소망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자. 그래서 모든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자. 사랑으로 책망할 것은 책망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주고 이끌어가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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