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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추수감사절예배설교) 하나님의 은혜라

 

 

 


제목: 하나님의 은혜라.

성경: 고전 15:9-10

1517년, 마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이후 그 영향은 곧바로 인근 유럽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지 약 20년뒤인 1534년부터 종교개혁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신교와 구교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558년에 즉위한 엘리자스(Ⅰ세)여왕에 의해 영국국교회제도가 기틀을 잡게 됩니다. 영국국교회는 제도적으로는 로마카톨릭교회를 따르고,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는 개신교를 따르는 신교와 구교의 절충형 형태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영국국교회의 모습에 반대하여 일어나 운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과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한 잔재를 완전히 버리고 루터와 칼빈의 정신을 따라 철저히 영국교회를 개혁하려고 일어났던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의 중생과 성화를 중시하며, 가정에서의 기도생활, 사회에서의 엄격한 도덕생활과 절제의 생활로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영국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되어 일부는 국내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유럽대륙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1620년 9월 16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몇 개월간의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1621년 1월 미국의 동부해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신마고 끝에 도착한 그땅에는 그들을 반겨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반겨주기는커녕 그들은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그러니까 불과 2-3개월동안에 질병과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반수 이상이 죽고 마는 불행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조건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속에서 필사적인 개척자정신을 발휘하여 그 해 가을에는 어느 정도의 농산물을 수확하게 됩니다. 그들은 첫열매를 거두어 들이고 나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울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감사제를 지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수확을 할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던 청교도의 정신을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잘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감사의 내용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때, 걸어온 자취자취 돌아볼 때, 그리고 현재 자기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라고하는 감사와 감격에 벅차 외친 영혼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바울의 감사가 우리 모두의 감사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바울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감사했을까, 왜 우리는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같이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애창하는 찬송가 405장의 작시자는 죤.뉴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라는 죄는 안지어본 죄가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던 탕자였습니다.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후 후에 목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엄청난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에 벅차 읊은 시가 바로 저 유명한 “Amazing grace”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은혜 고마와

나처음 믿은 그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우리의 지난 세월을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를 둘러 봅시다. 목석이 아니라면, 소나 말과 돼지같은 짐승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머리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자녀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습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계절이 있습니다. 저 눈부신 태양이 있습니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그저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이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더더구나 사랑하는 주의성도들이 여러분 곁에 있다는 것 정말 감사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저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며칠도 못 살고 미쳐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조건들이 하나하나 모여 오늘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땅에 이렇게 서 있는것, 나혼자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은혜를 입고 사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설령 여러분곁에 별로 달갑지 않은 이웃이 있더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비 신앙인들과 다른 차원의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한단계 높은 차원의 감사입니다. 그저 우리가 복받고, 물질적으로 무언가 척척 풀려 나갈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남들처럼 지위가 높지 않다고 해도, 돈이 남들처럼 많지 않다고 해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의 주위에는 감사해야 할 일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정도로도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한단계 더 높은 수준의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 나타난 바울의 감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고전 9:19-22에 고백했던 것처럼 때로는 자존심도 다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미련하게 살았습니다. 주변도 없고 고집도 없고 속도 없는 무골충과 같이 살았습니다. 억울하게 핍박당하며 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며 살았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무엇이 그 똑똑했던 바울을 그렇게도 바보로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은총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내까짓게 뭔데...”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죽어라고 자기를 포기하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고마우심에 비해본다면 억만분의 일도 보답되지 않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너무 고마와 “어떻게 하면 보답하고 살까?”그것만 생각하고 살다보니 “나”라는 존재는 다 죽어 없어지고 주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고후 11:22-27까지 자기의 좋은 조건을 다 열거하면서 그러나 “이까짓게 뭔데...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고마우심을 생각하면 이제는 자신이 박살이나고 가루가 된다해도 아무런 여한도 없었습니다. 억만분의 일이든 보답할 수만 있다면 자기 한 몸 불속에라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요?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망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못박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감사찬양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간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불평을 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감사할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감사할 것을 찾아도 다 찾지 못할판에 왜 불평거리를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저 밖을 잠시 내다 보십시오.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보십시오. 저 신비로운 산천을 한 번 둘러 보십시오.돌아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것이 없습니다.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그 신비한 경륜가운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한 번 보십시오. 저 에머랄드빛 하늘을 창조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저 화창한 봄날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꽁꽁 얼어붙은 땅에 묻혀 있던 그 작은 씨앗하나에 다시금 싹을 틔우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저 신비롭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이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주시는 분을 누구십니까? 누가 저 따사로운 태양빛을 주고 계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저 대자연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아니 들을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성이 구원받은 이성이라면, 우리의 감성이 구원받은 감성이라면 우리는 한 마리 작은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찬미소리를 듣습니다. 들녁의 한 작은 들꽃을 보며 거기서 하니님의 신비로운 솜씨를 발견합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할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고마움도 모릅니다. 밥 한그릇의 소중함도 모릅니다. 그러나 허랑방탕하다가 있는 것을 다 허비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서 탕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허랑방탕할때는 밥은 그냥 밥일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그냥 그저 입혀 있는 옷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돌아와서 어머니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어머니의 밥 한 그릇에 눈물겨운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아 입히는 그 옷을 입으며, 그는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때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고마움도 제대로 알수 없습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 태양이 저 물이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품에 안긴 사람은 압니다. 구원받은 이성은 거기서 하나님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어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나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보다 점잖고 잘나고 지위 높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와 같은 나를 사랑하십니까? 내가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당신의 아들을 주십니까? 무엇이 내가 잘한 것이 있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주신단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입이 있어 겨우 한마디 할수 있다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뿐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뿐이 아니겠습니까?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 복음전도대회’가 세계 4,000여명의 대표가 모여서 “성경이 말씀되게 하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째 저녁 예배에 특별찬송을 위해 한 맹인 여가수가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못하네

저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맹인 가수가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동안 4,000여 청중들은 감사의 감동에 젖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듯 한사람 한사람씩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대표들은 감사로 성령의 충만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맹인 여가수는 6.25전쟁때 두눈을 잃고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하여 가수가 된 한국인 킴 스윜양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맹인가수가 가졌던 그런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왔다간 사람은 수천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인 나,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수천억원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분에게 있어서 1원이라는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수천억원중에 1원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나 하나쯤 이 세상에서 없어 진다 해도, 세상은 눈하나도 깜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이 아름다운 대 자연을 우리게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수천억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형벌에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수가 있단 말입니까?

한 사형수가 있다고 합시다. 사형날자가 잡혀 이제 철장안에서 죽을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는 땅도 하늘도 봄 여름도 부귀 영화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제 그 사형수에게 있어서는 전혀 무용지물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특사로 무죄방면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아마도 엎드려 땅에 입이라도 맞추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며 환호성을 지르지 않겠습니까?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그에게 펼쳐지는 모든 것에는 이전에는 그가 미쳐 몰랐던 엄청난 의미가 부여 될것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가 한 사형수였습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는 모든 것이 다른 의미다 부여됩니다. 아니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구원받지 못한 이성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을 구원받은 이성의 활동으로 비로소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이제는 구받은 지성의 눈으로 생각하십시오. 이제는 구원받은 감성의 눈으로 기쁨을 누리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의 감사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돈벌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돈 잃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건강하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건강 잃었을 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했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실패하면 감사 못합니다. 내 소원들어주셨다고만 감사하는 사람, 내소원이 안이루질때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단순히 풀한포기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끼의 밥을 먹으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래서 그 희생을 통하여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화된 감사를 통하여, 진정한 감사를 통하여 기쁨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감격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를 정말이지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며 진정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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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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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예배 설교 ] 부활절 주일 설교 부활신앙

 

 

늘 살아 계시네  (막16:1~18 )

가이드 포스트지에 실린 킬링거 부인의 간증입니다. 이혼한 지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 과제물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설명한 과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 (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 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딸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 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 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러나 끝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의 많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언제나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삶이 전개될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살아 계신 주" 함께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지금도 늘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늘 살아 계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어,


첫째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절망에 처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27세가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언제 자살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약이나 의사보다, 뛰어나다고 믿는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 그는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께서 내 병을 못 고치시겠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 그 말씀을 종일 복창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점점 커지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아 계신 주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몰았던 신경쇠약으로부터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심리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을 겪으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염려합니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순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입니다. 이는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는 오로지 슬픔과 두려움 밖에 없었습니다. 3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며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과 염려는 이미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돌이 벌써 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활을 계획하셨기에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인들은 보이는 돌은 염려했지만 부활신앙을 가로막은 절망의 돌을 치우는 일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의 돌을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무덤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만나시려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늘 살아 계시어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 또한 날마다 물리쳐 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클락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하는 전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매일 밤 전도 집회를 합니다.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런데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클락의 설교는 형편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일 밤 5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단단히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옵니다.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었을까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힘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울지 않는 노력은 성공했으나 설교에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주셨고 놀라운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본문에 의하면 부활 사건의 초점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덤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장소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려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 사랑의 장소인 갈릴리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주고, 첫 사랑을 회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분이 있습니까? 신앙의 좌절을 맛보고 낙심한 분이 있습니까? 부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첫 사랑을 회복하시고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일본의 최고 기업인 '가네보' 제약회사의 경영자 미타니 야스토는 예수님을 만나 부활신앙으로 인생이 역전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인사과장으로 일하면서 회사에서도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상부에서 회사 안에서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상사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자책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고 기도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회사 동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이백여 회의 전도집회를 하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급격히 승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 회사를 일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여를 인정받아 그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야스토는“예수님의 부활 신앙 체험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부활하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내용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며 목숨걸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 신앙과 부활신앙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부활절에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계란을 준비하여 나눠주고 새벽 예배드리는 일들은 부활절 신앙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것은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신앙이 아닌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신앙입니다. 부활사건은 나 자신이 믿어져야 관계가 있게 됩니다. 부디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주시고,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며,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주시는 늘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는 부활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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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 종려주일 설교 Palm Sunday preaching

 

 

 

제목 : 만왕의 왕 예수
말씀 : 눅19:28-40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는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했습니다. 폭격으로 중요한 모든 건물들이 다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사람들이 죽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라크 국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바그다드에 왔다. 고 했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울부짖음, 병상에서 부모를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 그 처참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 군정을 통해서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고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영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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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목: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마 7:13,14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물 한방울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습니다. 우주의 지혜를 바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물한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바다에 비해 물한방울과 같은 그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세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길 것,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가질 것 등 이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깊이 성찰해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세파 속에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후 유명해 진 미국의 성공철학자 지그 지글라(zig ziglar)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①정직한 사람 ②인격이 좋은 사람 ③성실한 사람 ④신념이 강한 사람 ⑤충성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세계에서 가장은 많은 강연을 한 인물로 20세기말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영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그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①주도적이 되라 ②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③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④상호이익을 추구하라 ⑤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⑥시너지를 활용하라 ⑦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의 비법이 어디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믿음과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다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건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믿음과 노력이 없다면 그 위대한 것도 이루어낼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낸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설령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성공하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인내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무언가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매맞고 주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힘써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몇 번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함으로 주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은 이만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전구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웹스터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36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두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시인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시를 보통 99번씩 다듬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무려 1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좁은 길을 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험하고 힘들어서 가기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정말 올바르게 성공한다는 것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부러 골목길을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다니지 말고 일부러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로로 가지말고 음침한 골목길로 가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길을 그저 가기 쉽다고 아무 길로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기 쉬운대로, 마음에 끌리는대로, 무사안일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라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섭하는 것이 성가시고, 마음에 부담이 가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그 길이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무사안일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러나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길을 가야만하는 것입니까?

1. 넓은 길은 육신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고 넓은 길은 그저 육신의 이끌림을 따라 대강대강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대로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그저 죄된 본성의 욕구를 따라 가면되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통제나 제재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간섭도 거부하며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세상물결 흘러 가는대로 적당히 따라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저 육신이 요구대로 살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죄된 본성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편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겠습니까? 물론 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편한 길도 아니고, 자유의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대로 놀아나는 길입니다. 편하고 좋고 자유로운 길 같지만 그 길은 결코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 죄의 노예된 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죽음의 길일 따름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뱀의 속삭임에 유혹되어 아담과 하와가 갔던 길인 것입니다.

어느날 뱀은 하와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그렇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은 다시 말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하와는 점점 뱀의 꾀임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괞찮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편한대로 해라. 네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라.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네 인생 네가 네 뜻대로 살아라. 왜 간섭받고 사느냐? 자꾸만 이래라, 저래라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없다. 그들은 너를 얽어매려고 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니 네 마음에 편한대로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사단의 소리가 별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역하면 그게 곧 사단이요,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4절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 눅8: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모친이요,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요구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을 길로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실때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좁은 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데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이 뭡니까?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님 밖에 없는 외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딱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만이 생명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많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굳이 외길만 고집할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가든 북쪽에서 올라가든 아무데로나 올라가도 정상에 올라가기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나름대로 신을 찾아 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탄의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소리가 사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라고 하는데 둘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사람이 연구해보니까, 내가 도를 닦아 보니까 그런 것처럼 보이더라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이땅에 오신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인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직 한길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좁은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실때에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두번째로 좁은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습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대강대강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죽은 삶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 갑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죄와 무지로 오염된 심령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이상과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길은 간섭받아야 하고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알기는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를 자꾸만 다른 길로 내 몰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진리만이 가득하다면 저절로 진리의 길로 가겠는데 우리 안에 비진리가, 거짓된 것들이, 죄된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들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꾸만 그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그것들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어떤 제재를 받는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육신의 요구와 생각과 세상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면 쉽겠는데 그것들을 부정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좀 힘이들고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니까 물질적으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도 내 혈기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희생해야 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안되고, 힘이 들고, 그래서 가기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길이 비록 좁을 지라도 가야하고, 답답해도 가야하고, 손해를 봐도 가야하고, 희생을 당해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손해를 보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리의 길은 결코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과 연약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전한 진정한 성공자도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생명을 원하신다면 다수가 가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우리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면, 더욱이 여러분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기를 원하신다면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열심히 좁은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부인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생명을 향하려 세상의 조류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나 하나님나라에서나 진정한 성공자가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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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부활절예배설교 (Easter Worship Preaching)

 

 

 


제목 : 부활은 우리 믿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집필자 서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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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절기] 모세의 마지막 설교 ( 축복과 저주 )

 

모세의 마지막 설교 ( 축복과 저주 )

11:26-32

이제까지 읽은 신명기 11장의 결론으로 모세는 순종에 대한 권고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권고는 대단히 감격적이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영원히 따르게 하며 결코 낡아 없어지지 아니할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광야까지 인도하셨던 사실과 복의 땅에 대한 약속과 경고,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에 대해 말한 모세는 이제 결론으로 단호한 자세로 복과 저주는 너희 앞에 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 자신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바로 26-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라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의 열쇠는 이스라엘백성들 자신이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여부가 복과 화를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한 도를 지키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것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서 돌이켜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저주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다시 분명하게 복이 얼마나 바랄만한 것이며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복과 저주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일이 말했습니다.

 

27-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복이 될 것이고 28-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며, 저주는 불순종할 경우 받게 될 징벌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계속 누리게 될 것이고 아니면 반대로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자기 멋대로 살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를 백성들의 결정하기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마치 기계처럼 이미 만들어진 계획에 따라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 강제로 훈련시켜서 사람의 용도에 따라 부려 먹는 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또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되 창2:16-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시기를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아담 자신에게 결정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독재나 자유를 구속하는 강제명령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으로 싫어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내 멋대로라는 방종과 혼돈한 삶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택할 여유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백성을 사랑하시고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나 강제가 아니라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므로 복과 저주에 대한 선택권을 전적으로 사람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못됩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한 결과는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루에도 크고 작은 수도 없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갈림길에서 이것이다. 라고 선택하는 일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에게 선택의 문제가 제기될 경우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선택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장 유익한 것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삼상15:22-사무엘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23-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더구나 28-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이란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또한 섬겨서도 안 되는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알, 아스다롯, , 하늘 황후 등이 있는데(왕상11:7;

 

16:31;7:18) 모두 사악하며 음란한 제전(祭典)에 의해 숭배되던 특징이 있습니다<6:14>.

28-저주를 받으리라는 말도, 모세 설교의 독특한 특징은 먼저 순종하므로 누리게 될 풍성한 복을 말한 후, 이어 불순종함으로 당하게 될 무서운 저주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리하여 백성들을 항상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앞에 세워놓고 그들의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권고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모세는 지금까지(8-25) 말한 복과는 달리, 만일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길 경우 가나안 땅의 모든 풍요로움도 한낱 물거품에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29절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의 땅을 약속의 선물로 받은 후 그 복이 영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온 정열을 다하여 가르쳤습니다. 복과 저주는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쳤는데 29-그 복과 저주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스스로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선포하는 그리심산의 축복과 에발산의 저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27:11-13에 다시 강조합니다. 이 모세의 지시는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때 따르는 복과 저주에 대하여 보다 생생히 교훈하기 위함인데, 훗날 여호수아는 그대로 실행했습니다(8:30-35).

 

헷세드강해 29-그리심산에서 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의 두 산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왜 그리심산이 복의 산으로 에발산이 저주의 산으로 지정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두 산의 자연적 양상이 복과 저주를 구별하게 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산의 위치가 복과 저주의 산으로 지정된 이유라는 설이다. '스트라우스'(Strauss) 같은 학자는 그리심산의 비옥함과 에발산의 황폐함을 주장하는가 하면 '로빈슨'(Robinson)은 두 산이 모두 벌거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두 산의 사이에 있는 세겜에서 볼 때 그리심산이 해뜨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별이 드는 반면 에발산은 동쪽을 등지고 있어서 그늘이 지기 때문에 각기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설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디에서나 ''은 복으로 '어두움'은 저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참고

 

1. 환경적 조건의 복과 저주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며 골짜기에는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1) 두 산의 골짜기 세겜

 

아브라함의 제사: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이 두 산의 골짜기인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땅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의 청결: 야곱은 하란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곳에서 자기 가족들이 지니고 있는 이방 신상을 땅속에 묻어 자기와 그 가족을 청결케 하였던 곳입니다(35:4).

즉 믿음의 조상이 드린 제사와 청결은 그곳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보이는 그리심산과 에발산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의미로 나뉘었습니다.

 

2) 두 산의 비교적 요건들

 

두 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서로 상대적인 극과 극을 보여 주는 비교적인 요건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심산: 골짜기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해가 뜨는 동편에 위치한 양지 바른 곳이며 또한 수목이 울창하여 아름답고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산입니다.

 

에발산: 그리심산 맞은편 해가 지는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은 수목이 자라지 못하는 황폐한 산입니다. 동편은 밝아옴의 복을 상징하며 서편은 어두워짐의 저주를 상징합니다.

  

또한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은 복의 상징이며 황폐함은 저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지리적 조건의 축복과 저주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약속의 선물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의 땅인 가나안 지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1) 에덴동산과의 비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동방에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2).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최초로 만드신 복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에 순종하게 하시므로 에덴동산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복의 땅입니다.

 

2) 위치적 비교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와 그 실과가 있었고 죽음의 저주가 담겨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실과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중앙에는 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이 위치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를 언제나 인간 생활의 중앙에 두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중심에 복과 저주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신 뜻

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공존하는 복과 저주를 하나님은 우리들 스스로가 선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제한된 선택의 자유 의지

인간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복과 저주입니다. 이 복과 저주가 선포된 후 선택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입으로 시인한 것들을 복과 저주로 확정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행한 대로의 결과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나가 입술의 열매와 행위의 열매를 먹고 그 영혼과 육체의 삶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에 합당한 선택에는 복으로 갚아 주시고 저주에 합당한 선택에는 저주로 갚아 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6, 37)는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1-당신들은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거든, 가나안에 반드시 들어가 그 곳에서 살 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널 것이 확실하니(31) 요단 저편에서 그 일을 행하라(30. 모세가 말한다). 이 일을 가나안에서 행해지도록 제정함은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을 그들에게 확실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과 같은 증거인 것이다(3:12).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또 그것은 그들이 저주를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하여서는 복종해야 된다는 책임을 일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명령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명령을 공중 앞에 선포한 엄숙한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2-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준 모든 규례와 법규를 성심껏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이 엄숙한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느니라.

이 구절 들은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가나안에 들어가는 확신과 아울러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계명을 부디 잘 지키라는 권면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고 내 멋대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에 따라서 생명과 죽음 번성과 멸망 축복과 저주가 확실히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꼭 받고 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에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저는 부족하고 준비된 것이 적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쓰임받기 원하오며 더욱 순종하기 원합니다. 제게 주의 복을 허락하시고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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