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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설교 : 섬기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8, 막10:45)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내기 위한 유월절 양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맞춰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층이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떡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5-1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유월절 식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눌 마지막 식사이며, 그 식사 후에는 잡히셔서 고난과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일이며, 그 뒤에 남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잔을 돌리시고 떡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눅22:17-20).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는데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며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오늘 본문 직전의 2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 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난주일 장로 열 분을 선출하기 위해 공동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조례가 금지하고 있는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어 긴급히 모인 당회에서 의논 끝에 이번 공동의회를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기껏 모인 공동의회를 유회시키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치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문제 삼은 일은 세상에서라면 문제꺼리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라 해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한국교회의 본이 되고 무엇을 하든 교과서같이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의지이기에 우리에게서는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깨끗한 선거풍토를 다지고 과열선거운동의 재발을 막자고 모든 장로님들이 몇 달 동안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도 스스로 삼가고 장로로 선출되신 분들은 임직을 육 개월 이상 미루는 아픔을 감내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교회이기에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짓밟고 지지하는 특정 인물들의 명단을 만들어 다량으로 복사해서 버젓이 교회마당에서 돌리는 일은 당회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교회에 대한 심대한 배신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은 세상사람들이 갖는 사고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세상에서 하는 행태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배신이며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당회에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당회원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면 어떻게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겸손하게 열심히 섬기고 항존직을 선출하는 때가 되면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꾼들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항존직에 세울 줄 아는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국교회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꺼뜨리는 일체의 행위는 한국교회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장래가 우리 한 사람 사람의 의식과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모두가 성숙한 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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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할절주일 설교 :: 부활의 첫 열매

 

 

 

제목 : 부활의 첫 열매
말씀 : 고전15:20-28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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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추수감사절설교 / 감사의축복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여러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치안상태를 조사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100만점에 83.1을 기록하여 1등이고 그 다음에 싱가폴, 카타르, 일본 등이고 서유럽이나 미국은 6,70점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은 2,30점대가 수두룩하고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인데 15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83점으로 당당히 1등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범죄율은 가장 낮고 범인 검거율은 1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에도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안전한 나라, 식당이나 편의점이나 심지어 술집에서도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두고 나와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제법 오래전에 제 스마트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폰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제 폰에 저장 되어 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에 취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저라나 싶어서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치안상태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보장 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풍요로습니까? 올해도 농사가 대풍이어서 올해 쌀생산량이 약434만톤으로 최근 6년간 최고의 풍작이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풍년이라 쌀이 남아돌아 정부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140만톤이나 되어 처치 곤란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우유가 남아돌아 난리입니다. 그래서 젖소 수를 줄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젖소를 도축하고 그래도 안되어 분유를 만들어 처리하는데 분유 재고가 쌓여 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어느 나라를 먹을 게 없어 난린데 우리는 남아돌아서 난리인 것입니다.

뭐 그밖에 감사할 것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만8천불 약300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GDP 그러니까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1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고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해도, 혹 힘든 일이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고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비록 때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귀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해 두시고 이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흉악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당연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총과 감격가운데 살다보면 당연히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욱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능력으로 채워주심으로 그 삶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점점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할수록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아니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정말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아니 더 주기는커녕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눅19:24~26절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자꾸 불평이나 하고 더 달라기만 하는 사람은 준 것도 아까워 주었던 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뭡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능력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 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 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주고 드리며 자꾸 복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은혜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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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나같은 사람도 부활을 전하는데요

 

 

 

나같은 사람도 부활을 전하는데요

마가복음16;9-11


단체로 삭발한 교회

미국 미주리(Missour)주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에,

그날따라 많은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마다 하나같이 삭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은 50여 명 정도가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삭발을 요청하는 손님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상한 광신도들이 아니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골교회에 사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성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여중생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친 소녀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몇몇 성도님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소녀는 항암치료 중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서 외출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성도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삭발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이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지역 방송국에 연락했습니다.

이 여중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드디어 부활주일날, 엄마는 자기 딸을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교회 문을 연 순간, 모든 성도들의 빡빡머리를 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 상황을 중계하던 방송국 기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이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다.”

그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 금요일 오후 3시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후5시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빈 바위무덤에 장례를 치르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일등공신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병사들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할 수 없도록 바위무덤에 커다란 돌로 닫아놓고 병사들을 시켜서 지키도록 한다.

아무리 커다란 돌로 무덤 문을 닫고,

병사들이 겹겹이 무덤 주변을 지킨다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길은 없다.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다.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일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캄캄한 밤 시간을 지나고 이른 새벽시간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홀연히 다시 살아나신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부활하신 시간에는 유월절을 지나고 무교절 절기 기간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아침 번제와 초실절이라고 부르는 맥추절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물의 제사를 드리고 있고,

성전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당하게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자가 누가 있을까?

사탄, 마귀가 가로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강한 권세, 공중권세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권세는 없다.

대제사장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두 눈 부릅뜨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로마제국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전 세계를 로마로’라고 하면서 전 세계를 정복한 권세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없다.

무덤이라고, 시신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무덤이라 해도, 이미 죽은 시신이라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어떤 권세도, 어떤 세력들도, 어떤 환경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으니까 부활하시고,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 부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믿거나 믿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나타나신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서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셨다고 전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① 나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고 제자들이 믿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들 남자들이고, 나는 연약한 여자 아닌가?

그것도 일곱 귀신에 걸려서 제대로 사람이라고 인정도 받지 못하던 여인이 아니던가?

지금이야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주셔서 귀신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귀한 딸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하게 살지만 내 전력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② 여자인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가장 먼저 만나주셨다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수치를 안기는 결과가 되지 않나?

유대인들은 명예와 수치를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여자인 내가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자들에게 명예롭지 않고 수치를 안겨다 주는 꼴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명예롭게 살아야 앞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지 않나?

그러니 내가 여자인 내가, 그것도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경력이 있는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③ 남녀구별이 엄연하던 시대 아닌가?

여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나같은 여자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다고 증언하면 누가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서 자신이 부활하였노라고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시는 예수님.

빨리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

사탄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였다고 증언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낙심하고 좌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서

“왜 믿음이 없느냐?”고 하시면서 책망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것은 다 보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하고 염려할 때 예수님은 책망하시고 꾸짖으신다.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다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세워나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11명의 제자들, 70명의 제자들,

120명의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전할 때

이들은 마리아가 전하는 부활의 소식을 믿을 수 없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시고 책망하고 꾸짖으면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사도들로 세워 가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축복의 여인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최초의 여인이 된다.

?

하나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여인이 되어진다.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인이 되어진다.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더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고 성숙해지면서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로 교회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로 세워진다.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가 되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목격하는 여인이 되어진다.

수치의 상징이라는 여인이라고, 일곱 귀신에 걸렸던 여인이라는 과거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인이 되어지고,

교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인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위하여 훌륭하게 세움을 받는 여인이 되어진다.

초대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로서 강한 리더쉽을 가지고 교회의 여성들을 잘 이끌면서

사도들을 도와서 예루살렘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는 축복을 받는다,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핍박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서

흔들리는 약한 성도들을 이끌고 믿음을 세워가는 일꾼으로 세워진다.

*** 우리가 진정으로 전해야 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종교지도자들, 교주들은 한결같이 다 죽었다.

죽지 않았거나 다시 살아난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스스로 태양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벨론의 이방종교를 만들어낸 니므롯도 죽었고,

달신이라고 주장하던 세미라미스도 죽었고,

별신이라고 하는 담무스도 죽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죽었다.

유교의 공자도 죽었다.

힌두교, 이슬람교의 마호멧도 죽었다.

천주교의 교황들도, 추기경들도 죽었다.

통일교의 문선명이도 죽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안산홍이도 죽었다.

이제 멀지 않아서 신천지의 이만희도 죽을 것이다.

스스로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장길자 여인도 죽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김일성이도, 김정일이도 죽었다.

그렇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 기독교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일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500여명의 무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자살하여 죽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선별하는 조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베드로는 선언한다.

 

행1:22에서 베드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고 하시면서 맛디아를 뽑아서 12명의 사도로 세우게 된다.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인류 최악의 사기사건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500여명의 무리들의 두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식사도 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단 몇 사람밖에 없다면

그들을 매수하여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얼마든지 거짓말했다고 하면서 덮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적어도 500여명의 무리들이 보았다는데,

어떻게 500여명의 눈을 가릴 수 있단 말인가?

500여명의 무리들 중에서 120여명의 무리들이 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10일 동안 전심으로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어진다.

믿음의 표적이 나타나게 된다.

믿음의 표적을 행하는 주인공들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교회와 구령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지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숨 걸고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시작이자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축복의 시작이자 축복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시작이자 믿음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시작이자 생명의 완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시너지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은혜의 최고봉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고

나눌 수 있는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통로, 축복의 근원이 되어지는 사람이다.

와?우리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입으로,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전하고 또 전하고 또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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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고난주간]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Season Preaching / passion week] Tribulation for the salvation of mankind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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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설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제목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고린도후서 9:8-15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필요한 것을 언제나 다 가지고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9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하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가 행한 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0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고,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씨앗을 주시고 그것을 성장시키셔서 여러분이 거둘 의의 열매가 많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11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하여 넉넉하게 헌금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친 헌금을 우리가 전달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행한 이러한 봉사는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3 여러분이 낸 구제 헌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과 여러분이 그들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을 너그럽게 도와 주었다는 증거이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4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이신 놀라운 은혜로 인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쉬운 성경)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Happy thanksgiving!” 하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사의 마음은 금방 낡아 버린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쉽게 잊혀집니다. 감사의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은 늘 찾아 옵니다. 쉽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감사에는 세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감사는 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제일 낮은 차원의 감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조건적인 감사의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감사의 조건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이 생각나지 않거나 감사의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감사는 역경 중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조건적인 감사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감사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지금 우리가 사는 메싸추세츠 남쪽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청교도들(Puritans)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중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102명의 사람들이 모두 청교도들은 아니었습니다. 또 이 사람들의 개척정신을 존중하여 필그림 파더스 (The Pilgrim Father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620119, 지금의 케이프 카드 (Cape Cod)에 도착한 이들은, 주변 정세를 살피다가 정박을 하지 않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의 플리머스 (Plymouth)에 정박을 합니다. 그 때가 16201225, 크리스마스였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신대륙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절만 가량이 죽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만들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적이 알고 기습을 해 올까봐 무덤 대신 그 자리에 옥수수 씨앗을 심습니다. 정말 운 좋게도 이들은 착한 인디언 부족이었던 왬파그노 (Wampagnoag)를 만나게 되어 농사 짓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플리머스에 가면 플리머스 락 (Plymouth Rock)” 건너편 언덕에 왬파그노 인디언 추장 마싸소이트 쎄이첨 (Massasoit Sachem, 1581-1661, sachem"chief"라는 뜻)의 동상이 대서양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드렸던 감사는 역경 중에 드린 감사였습니다. 기후가 맞지 않고,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이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땅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 집보다 교회를 먼저 지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야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시편 119:71) 이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시인은 무슨 생각에서 고난이 자기 인생에 약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주목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사람에게 고난이 없었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더라면 그 때도 “pay attention to God’s word”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pay attention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성공을 자기가 이룬 것처럼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 번째 감사는 존재론적인 (ontological) 감사인데, 가장 성숙한 감사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렇게 고백했던 다윗의 고백은 존재론적인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무슨 감사의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히 무슨 역경 중에서 드린 감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0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라고 고백했던 것도 존재론적인 감사였습니다. 단순히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송명희 시인이 쓴 감사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 아이러닉하지 않습니까? 송명희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제가 송명희가 쓴 글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입니다. 마치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감옥 안에서 바울이 써 보낸 항상 기뻐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빌립보서 4:4, 6)” 이 말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라고 하겠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감사를 잃게 하는 문화였습니다. “산소 호흡기 안 달고도 숨쉬며 의식이 있고 살아 있으니 감사해야지! 힘겹고 고된 삶을 살면서 날마다 다짐하는 나의 생각입니다. 6년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뭘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감사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 앞에선 웃고 있지만 항상 제 눈가엔 눈물이 묻어납니다. 있어야 감사하고 무언가 받아야 감사하는 이 시대, 우리에게서 감사를 빼앗아가는 문화적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현란한 불빛에선 한 자루 촛불이 초라하듯 예쁘고 잘 생긴 외모의 연예인들만 보면 자신의 건강은 안 보이고, 멋진 집과 자동차만 보면 자신이 초라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감사보다 범죄가 늘고 있는 뉴스를 보며 탄식합니다. 예쁘고 잘 생긴 것만 추구하는 세상 문화가 교회 안에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나 진리 탐구는 사라져가고, 가볍고 예쁜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서 예수님이 오셔도 맞출 수 없는 까다롭고 개인주의적인 교회 문화로 변해 가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모든 것이 다 있다고 감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감사하는 본인에게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금세 싫증 내고 금방 없어지는, 인내가 존재되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감사는 인사일 뿐입니다. 유전공학으로 송아지를 우량 소로 키우고 하우스 재배로 항상 채소와 과일을 먹다 보니 인내의 결실은 점차로 사라져 그에 따르는 감사도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서로 함께 살게 하심을 감사하며 만족스런 남편과 아내가 아닐지라도, 훌륭한 부모와 똑똑한 자녀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인해 감사하는 생활은 감사가 메마른 현대에 필요한 활력소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 감사주일!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언제까지 감사하고 있는지....... 그 무엇보다 감사가 축복이며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감사절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1620년에 필그림 파더스들이 드린 감사절을 “The First Thanksgiving”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도와주었던 왬파그노 인디언 부족들을 초대해서 같이 예배 드리고, 같이 축하를 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서 “The First Thanksgiving"의 정신이 퇴색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 감사절은 family reunion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평소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데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절의 본 정신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외로운 이웃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오늘 우리는 바울이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써 보냈던 편지를 읽으면서 베푸는 삶에서 오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그동안 유고연방에 속해 있다가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로 독립했습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 여행 때 이 지역에 빌립보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께서 루디아라는 한 여자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시작한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짐을 싸서 고린도를 떠나려고 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너는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해라.” (사도행전 18:9-11) 바울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18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두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구제사업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헌금을 요청합니다. 그 말씀이 뜻 밖에도 로마서 15:25-27에 나옵니다. “나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려고, 기쁜 마음으로 구제 헌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 부터 영적인 복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They were glad to do this because they feel they owe a real debt to them. Since the Gentiles received the spiritual blessings of the Good News from the believers in Jerusalem, they feel the least they can do in return is to help them financially).”

 

아니? 왜 그 교회가 어려운데 우리가 도와야 합니까?”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했고, 바울은 지금 그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감격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9:15에 이렇게 나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NLT 성경에는 이 말씀이 “Thank God for this gift too wonderful for words!”이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보람과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통해 복음을 들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 보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목회자의 최고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이런 감사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설교를 마치면서 저의 조그만 간증 하나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낮에 집에 있을 때 전화 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도 쓸 데 없는 전화가 많이 오기 때문에 발신지를 보았더니 오레곤 (Oregon)주입니다. 거기는 제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어서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몇 번 벨 소리가 더 울리는데, 왠지 받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김태환 목사님세요? 저는 오레곤에 사는 김에스더 선교사라고 하는데요. 갑자기 어디 도움을 청할 데도 없고 해서 인터넷에서 목사님 교회를 보고 전화를 드립니다. 제가 아파트 렌트비가 없거든요. 좀 도와 주셨으면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좀 황당한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못 알아 듣겠는데요? 좀 자세히 말씀해 보시지요그랬더니 제가 남편과 함께 미국 교회에 초청을 받아 왔는데 비자 문제가 잘 해결이 안 되어서 맘 고생을 하다가 이제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요. 그 와중에 남편이 병을 얻어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아파트 렌트비 800불을 당장 내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이렇게 염치 없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는 퉁명스럽게 그런 얘기를 전화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좀 자세하게 이메일로 사정을 써 보내세요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요. 그 선교사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열어 보니까 남편과 찍은 사진이 있고, 남편의 병원 진단서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사기꾼들이 하는 수법이구만!” 하고 무시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귓전에 , 진짜면 어떻게 할래?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어떻게 할래?”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그 선교사에게서 받은 이멜을 프린트해서 재정부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이멜을 어느 선교사에게서 받았는데,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혹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구제금에서 얼마를 보냅시다이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800불을 다 보내지 않고 400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늘 400불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사기꾼이라면 이 돈을 가지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마세요. 정말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우리교인들이 헌금한 돈이니까 필요한 곳에 쓰세요이렇게 쓰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쓰지 못하고 오늘 400불을 보냈습니다. 필요한 곳에 귀하게 쓰세요이렇게 써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내 이메일을 받고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이라면 아무 연락이 없겠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는 것입니다. 3일이면 편지가 도착할텐데,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고 5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저는 속았구나!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400불을 교회에 헌금을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6일째 되는 날에 그 선교사에게서 이멜이 왔습니다. 제 이메일을 늦게 봤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수술을 해서 병원해 쫓아 다니느라고 경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도 받았답니다. 저는 내심 반가워서 이메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쓰세요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을 모두 잊어 버렸는데, 며칠 후에 저에게 카드 한장이 교회로 왔습니다. 그 선교사에게서 온 감사 카드였습니다. “김태환 목사님, 진심으로 정말 감사 드립니다, 도움 주신 것 정말로 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희 필요한 렌트에 사용하겠습니다. 저희 가정이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많은 은혜와 도움 속에서, 여러가지 것들이 해결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해 용기를 내서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따뜻하게 이해해 주시고 선뜻 도와 주시니, 감사의 마음을 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남편 김다윗 선교사의 건강도 회복 중에 있습니다만, 몸의 면역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목사님께 감사 드리며, 목사님과 가정 위에 기쁜 성탄절 되시기를 미리 인사 드립니다.” - 김다윗, 에스더, 엘리야 선교사 가정 올림

 

저는 이 카드를 받고 얼마나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 내가 너무 쪼잔했구나. 800불을 다 보내 줄 걸....... 그걸 반으로 쪼개서 400불만 보내다니! 내가 너무 쪼잔했구나!” 이런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 추수감사절에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보내 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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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절기] 모세의 마지막 설교 ( 축복과 저주 )

 

모세의 마지막 설교 ( 축복과 저주 )

11:26-32

이제까지 읽은 신명기 11장의 결론으로 모세는 순종에 대한 권고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권고는 대단히 감격적이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영원히 따르게 하며 결코 낡아 없어지지 아니할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광야까지 인도하셨던 사실과 복의 땅에 대한 약속과 경고,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에 대해 말한 모세는 이제 결론으로 단호한 자세로 복과 저주는 너희 앞에 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 자신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바로 26-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라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의 열쇠는 이스라엘백성들 자신이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여부가 복과 화를 좌우한다는 의미에서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한 도를 지키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것이지만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서 돌이켜 듣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저주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다시 분명하게 복이 얼마나 바랄만한 것이며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복과 저주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일이 말했습니다.

 

27-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복이 될 것이고 28-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며, 저주는 불순종할 경우 받게 될 징벌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계속 누리게 될 것이고 아니면 반대로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자기 멋대로 살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를 백성들의 결정하기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마치 기계처럼 이미 만들어진 계획에 따라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 강제로 훈련시켜서 사람의 용도에 따라 부려 먹는 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또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시되 창2:16-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시기를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아담 자신에게 결정할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독재나 자유를 구속하는 강제명령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으로 싫어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내 멋대로라는 방종과 혼돈한 삶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택할 여유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백성을 사랑하시고 순종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억지로나 강제가 아니라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므로 복과 저주에 대한 선택권을 전적으로 사람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못됩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한 결과는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루에도 크고 작은 수도 없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갈림길에서 이것이다. 라고 선택하는 일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신에게 선택의 문제가 제기될 경우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선택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장 유익한 것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삼상15:22-사무엘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23-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더구나 28-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이란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또한 섬겨서도 안 되는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알, 아스다롯, , 하늘 황후 등이 있는데(왕상11:7;

 

16:31;7:18) 모두 사악하며 음란한 제전(祭典)에 의해 숭배되던 특징이 있습니다<6:14>.

28-저주를 받으리라는 말도, 모세 설교의 독특한 특징은 먼저 순종하므로 누리게 될 풍성한 복을 말한 후, 이어 불순종함으로 당하게 될 무서운 저주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리하여 백성들을 항상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 앞에 세워놓고 그들의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권고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모세는 지금까지(8-25) 말한 복과는 달리, 만일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길 경우 가나안 땅의 모든 풍요로움도 한낱 물거품에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29절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의 땅을 약속의 선물로 받은 후 그 복이 영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온 정열을 다하여 가르쳤습니다. 복과 저주는 이미 수십 차례에 걸쳐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쳤는데 29-그 복과 저주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스스로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선포하는 그리심산의 축복과 에발산의 저주,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27:11-13에 다시 강조합니다. 이 모세의 지시는 하나님말씀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때 따르는 복과 저주에 대하여 보다 생생히 교훈하기 위함인데, 훗날 여호수아는 그대로 실행했습니다(8:30-35).

 

헷세드강해 29-그리심산에서 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의 두 산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왜 그리심산이 복의 산으로 에발산이 저주의 산으로 지정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두 산의 자연적 양상이 복과 저주를 구별하게 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두 산의 위치가 복과 저주의 산으로 지정된 이유라는 설이다. '스트라우스'(Strauss) 같은 학자는 그리심산의 비옥함과 에발산의 황폐함을 주장하는가 하면 '로빈슨'(Robinson)은 두 산이 모두 벌거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 두 산의 사이에 있는 세겜에서 볼 때 그리심산이 해뜨는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별이 드는 반면 에발산은 동쪽을 등지고 있어서 그늘이 지기 때문에 각기 축복과 저주의 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설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디에서나 ''은 복으로 '어두움'은 저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참고

 

1. 환경적 조건의 복과 저주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이며 골짜기에는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1) 두 산의 골짜기 세겜

 

아브라함의 제사: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이 두 산의 골짜기인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 땅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의 청결: 야곱은 하란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곳에서 자기 가족들이 지니고 있는 이방 신상을 땅속에 묻어 자기와 그 가족을 청결케 하였던 곳입니다(35:4).

즉 믿음의 조상이 드린 제사와 청결은 그곳을 중심으로 양편으로 보이는 그리심산과 에발산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의미로 나뉘었습니다.

 

2) 두 산의 비교적 요건들

 

두 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서로 상대적인 극과 극을 보여 주는 비교적인 요건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심산: 골짜기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해가 뜨는 동편에 위치한 양지 바른 곳이며 또한 수목이 울창하여 아름답고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산입니다.

 

에발산: 그리심산 맞은편 해가 지는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산은 수목이 자라지 못하는 황폐한 산입니다. 동편은 밝아옴의 복을 상징하며 서편은 어두워짐의 저주를 상징합니다.

  

또한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은 복의 상징이며 황폐함은 저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지리적 조건의 축복과 저주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약속의 선물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의 땅인 가나안 지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1) 에덴동산과의 비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하여 동방에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2).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최초로 만드신 복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에 순종하게 하시므로 에덴동산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복의 땅입니다.

 

2) 위치적 비교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와 그 실과가 있었고 죽음의 저주가 담겨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실과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중앙에는 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이 위치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를 언제나 인간 생활의 중앙에 두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중심에 복과 저주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3. 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신 뜻

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공존하는 복과 저주를 하나님은 우리들 스스로가 선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1) 제한된 선택의 자유 의지

인간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복과 저주입니다. 이 복과 저주가 선포된 후 선택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입으로 시인한 것들을 복과 저주로 확정하신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행한 대로의 결과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나가 입술의 열매와 행위의 열매를 먹고 그 영혼과 육체의 삶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에 합당한 선택에는 복으로 갚아 주시고 저주에 합당한 선택에는 저주로 갚아 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6, 37)는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1-당신들은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거든, 가나안에 반드시 들어가 그 곳에서 살 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널 것이 확실하니(31) 요단 저편에서 그 일을 행하라(30. 모세가 말한다). 이 일을 가나안에서 행해지도록 제정함은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을 그들에게 확실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과 같은 증거인 것이다(3:12).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라."

 

또 그것은 그들이 저주를 피하고 복을 얻기 위하여서는 복종해야 된다는 책임을 일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명령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명령을 공중 앞에 선포한 엄숙한 사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2-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준 모든 규례와 법규를 성심껏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이 엄숙한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느니라.

이 구절 들은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가나안에 들어가는 확신과 아울러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계명을 부디 잘 지키라는 권면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고 내 멋대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에 따라서 생명과 죽음 번성과 멸망 축복과 저주가 확실히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꼭 받고 살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에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저는 부족하고 준비된 것이 적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쓰임받기 원하오며 더욱 순종하기 원합니다. 제게 주의 복을 허락하시고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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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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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감사충만한 인생

말씀 : 대상29:10~17

1.감사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이 분은 1954년에 미시시피 주의 어느 시골에서 사생아로 태어나서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손을 전전하며 상처투성이로 자랐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9살 때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역시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14세에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는 2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가출하여 마약을 복용하며 한동안 지옥같은 삶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고 다시금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들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며 책을 많이 읽는지 선생님이 더 좋은 학교의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어서 좀 더 좋은 학교에서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열심히 성경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을 나오고 박사과정을 마치고 1983년에 시카고에서 시청률이 제일 낮은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라는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 프로를 맡은 지 한 달 만에 이 프로그램이 시카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러자 이 토크쇼를 아예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어 전국적으로 방영되자 미국 전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되어 전 세계 140여개 나라로 배급이 됨으로 세계적인 토크쇼가 되었습니다.

이 후로 그녀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사가 되어 1985년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 2004년 유엔이 주는 올해의 세계지도자상, 200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명사 100人 중 최고의 명사, 2010년 케네디센터 평생공로상,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 평생공로상, 2013년 포브스 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100인 중의 한 사람이 되는 등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사 중 한명이 되었고 그러 사이에 재산도 불어나 7억 달러가 넘는 억만장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불우한 처지를 이기고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습니까? 세가지 정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녀는 절망 중에서도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부입니다. 그는 그 서러운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것입니다. 남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감사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몇 년동안 방황하긴 했지만 다시 시작하며 감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던 모든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그래도 그런 가운데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미움과 원망과 절망이 점점 사라지고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계속해서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미움 속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은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로 방황을 바꾸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의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그녀는 그 바쁜 일과 중에서도 매일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면 감사한 일 다섯가지를 적으며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음에도 그녀의 감사의 조건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적어 놓은 감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①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②오늘은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③오늘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④오늘 얄미운 짓을 한 동료가 있었는데 잘 참고 화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⑤오늘 책을 한권 읽었는데 너무 좋은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할 것은 감사 거리는 그렇게 먼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사거리는 항상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거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냥 당연히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실상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늘 하루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아무 걱정 없이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누군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자며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길을 가다가 국수 한 그릇 사먹을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다는 게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마음껏 숨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오늘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껏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는 죽을 때까지 말해도 다 못할 만큼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 5: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와 이웃과 교회와 국가와 회사와 동료와 공무원과 농사짓는 분과 장사하시는 분과 여하튼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모든 환경에 감사하고, 밥 한 그릇에 감사하고, 냉수 한 모금에 감사하고, 숨한번 쉬면서 감사하고, 따뜻한 잠자리에 감사하고, 일어날 때 감사하고 그저 앉아도 감사 서서도 감사 집에서도 감사 나가서도 감사 우리 곁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 감사거리를 생각하며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감사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런 감사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2.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료로 주셔서 마음껏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을 예물 드리기를 마친 다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 중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앞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예물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 중 3,4절에 보면 다윗은 개인의 사유의 금 3천달란트와 순은 7천달란트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금 3천달란트와 은 7천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몇십조원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엄청난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덩이를 주셔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금덩이를 드리고 너무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드리면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좀 길지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왕이 되어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어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 동안 누린 것이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을 주신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이 고귀한 일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해서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내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지혜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의 터전들을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무료로 공급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걸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릴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지혜를 짜내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뛰어 놀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놀고 하는 그 모든 것 중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도 공짜로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조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자기 힘과 지혜로 된 것인양 여기며 살아가는 그래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몸, 내 생명, 내 시간, 내 재능, 내 능력, 내 지혜,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땅,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따뜻한 태양, 쉴 수 있는 집, 먹는 밥,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해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능력과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주님께 드리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면 우리는 마땅히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감사함이 있다면 드림도 늘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 엄청난 것들을 주셨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이렇게 받은 바 은혜가 큰 줄을 알고 감사드린다면 어떻게 드리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14절을 보겠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나와 백성 즉 우리들 모두는 너무나 부족한 존재인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까? 하면서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엄청난 예물 들을 드리면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예물을 드리면서 그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내 것을, 내가 노력하고 힘써서 벌은 것을 바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바쳤을 뿐이니 그 많은 것을 주셨으니 감사할 뿐이요, 그걸 그동안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할 뿐이요, 그걸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면 정말로 기쁨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많은 것을 주셨는데 어찌 감사가 없겠으며, 그런 감사가 있을 때 어찌 기쁨으로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기쁨으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기쁨으로 자녀에게 줍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줍니까? 그렇다면 주님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천지만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마저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그 끔찍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며 줄 수 밖에 없고 주면서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기쁨으로 줍니까? 주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으로 줍니까? 주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드리겠으며, 드리면서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받는 게 행복합니까? 주는 게 행복합니까? 물론 받는 것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몇 배 더 기쁩니다.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자랑스러워집니다. 뿌듯해집니다. 자부심과 긍지가 생깁니다. 자신이 자신을 보아도 웬지 흐뭇해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다. 더구나 주님께 드리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주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너무나 귀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더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의 그 고귀한 생명까지 바쳐서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정말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여러분 자신도 정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정말 감사하면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하는데 드릴 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은 지금 엄청난 예물을 드리면서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원문의 뜻은 충만하게, 완전하게, 마음의 중심을 다해... 이런 뜻입니다. 즉 조금치의 거짓이나 불성실이 없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온전한 마음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담아서 드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생각이나 감정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고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따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진정한 정직이란 내 생각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나 위선이나 변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 생각 처지 환경의 모든 주변적인 것들을 벗어던지고 다만 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대일로 대면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들려주시고 요구하시고 권면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내 생각이나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내 생각을 첨부하거나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첨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게 되고 그러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잘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꾸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의 다른 것들을 섞어서 혼잡하게 만듭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왜곡과 혼잡이 심각합니다. 자기 편의대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을 것은 크게 생각하고, 드릴 것은 적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할 일은 내 믿음과 형편보다 더 많이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할 일은 내 믿음과 형편보다 훨씬 작게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적게 생각하고 감사할 것은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받아야 할 것은 적게 생각하고 드려야 할 것은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넉넉해지고, 인생이 풍요로워 지고, 진정 자유하게 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의 신앙의 고백이며, 그럴 때 그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며 잘했다 칭찬받으며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인이요 부요한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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