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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가는’ 영국 교회가 사는 법  

 

텅 비어가는’ 영국 교회가 사는 법 [2018-03-27 00:01]


세례·결혼·장례 등 이벤트 함께하고… 홈피·SNS로 디지털 전도 활성화

 

 

▲영국 성공회의 한 교회 마당에서 세례식이 열렸다. 세례를 받은 성도는 가족과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식 기독교인으로 거듭난다. 성공회 홈페이지 캡처


영국 교회가 텅 비어가고 있다. 주일에 교회를 찾는 성도는 줄어들고 목회자만 예배당을 지키는 1인 교회가 급증하는 추세다. 냉혹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영국 성공회는 신앙심 회복을 위해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세례식이나 결혼식, 장례식과 같은 인생의 3대 중요 이벤트를 활용하거나 소셜미디어와 같은 디지털을 전도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줄어드는 성도들


2017년 9월 실시된 영국사회태도(British Social Attitudes) 조사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53%가 무종교인이었다. 성공회교도는 15%에 불과했다. 청년층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세인트메리대 스티븐 불리번트 교수의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영국 젊은이 70%가 무종교인이었다. 여론조사 기관 콤레스(ComRes)가 비슷한 시기 조사한 설문 결과도 암담하긴 마찬가지다. 꾸준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성인 비율은 고작 6%에 불과했다.

영국 교회는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로 국제구호단체인 크리스천에이드와 티어펀드가 지난 1월 콤레스에 공동 의뢰한 조사에 따르면 무종교인의 55%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기도한다고 대답했다. 즉 무종교인이 늘고 주일예배 참석률이 저조하지만, 이는 현대인들이 더 바빠지거나 관심사가 이동해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성공회 산하 ‘라이프이벤츠(Life Events)’의 대표인 캐넌 샌드라 밀라 목사는 최근 크리스천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현대인들은 관심사가 달라지고 삶이 바빠졌다”면서 “사람들이 매일 교회에 가기보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1년에 몇 번 교회에 나가도록 변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프 이벤트와 디지털


성공회가 내놓은 대책은 간단하다. 사람들의 변화에 발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우선 인생의 중대한 순간에 교회가 함께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밀라 목사는 “세례식이나 결혼식, 장례식 등과 같은 인생의 중대한 순간이 되면 우리는 교회에 가서 촛불을 켜고 그 지역사회의 구성원이 되려고 한다”며 “교회는 이런 점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나 웹페이지 등 디지털 활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실시한 ‘#GodWithUs’ 해시태그 이벤트에는 무려 680만건의 반응이 이어졌다. 성공회 웹사이트는 1년에 3500만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성공회의 디지털팀 대표 아드리안 해리스씨는 “많은 기독교인이 창조적인 디지털 기술로 전도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이런 디지털 혁신은 미래 교회를 위해 어마어마한 영감을 주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23086&code=23111115&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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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이슬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무슬림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현재 전 세계 인구는 약 70억 명이다. 이 가운데 무슬림 인구는 약 16억으로 전 세계 인구의 22% 정도이다. 이슬람을 아랍 지역의 종교로만 여겨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대도시에서는 모스크와 무슬림들을 만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지역과 국경을 넘어 만날 수 있는 이슬람, 이런 이슬람을 향한 기독교의 선교적인 접근은 아주 미미하였다. 현재까지도 기독교 선교는 미완성 사역이다.

 

전 세계 미전도 종족은 약 8,000~6,000개 이고, 그중 성경이 번역되지 않은 종족은 4천 개나 된다. 영국의 데이빗 바렛(David Barrett)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선교지도를 A, B, C로 구분하였다. A가 미복음화 된 지역이다. 30개 국가로 인구는 13억 정도이며 23.7%이다. B지역은 전도된 국가이면서도 기독교 신자가 적은 나라이다.

 

이들 나라가 76개국으로서 23억 정도이다. C국가는 기독교 국가로서 145개국이며 인구는 18억이다. 기독교인이 60% 이상인 나라들이다. 전 세계교회의 모든 수입 중에 99.8%가 이미 복음화 된 곳에서 사용되고 0.09% 만이 비기독교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0.01% 만이 A지역, 즉 미 복음화된 지역을 위해서 사용되어진다. 전 세계 기독교 선교사 가운데 3천 명만이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전 세계선교사는 약 17만 명이다. 전체의 2% 만이 미전도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그곳의 대부분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권을 향해 최초로 선교적 접근을 한 사람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였다. 그는 5차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집트의 술탄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선교사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물론 가시적인 열매는 없었으나, 중요한 것은 이슬람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1219년 다섯 명의 수도사가 모로코로 갔다. 그러나 1년 후에 그들은 순교하였다.

 

실제로 최초로 무슬림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사역한 선교사는 레이몬드 룰 Raymond Lull,(1235-1316)이다. 그는 이슬람권에 보낼 선교사의 훈련을 위하여 1290년 아랍어과와 신학부가 있는 몽펠리에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유럽에 이슬람과 아랍에 관한 학문을 고취시켰다. 그는 82세의 노구로 튀니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자야 해변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핸리마틴 Henry Martyn(1781-1812)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성공회 목사로서 인도로 가서 동인도회사의 전임 사목으로 있다가 힌두교성경을 번역했고, 이란으로 가서 이란성경을 번역했지만, 결핵으로 인해 겨우 31세의 나이에 터키 토카트에서 죽었다.

 

그 후에 이슬람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무엘 쯔머 Samuel Zwemer(1867-1952)이다. 학생신앙운동에 자극을 받고 헌신하여 아랍선교회를 세우고 그의 친구들과 아랍어를 배우기 위하여 레바논에 들어갔으며, 1900년대 초반에 이집트에서 사역을 하였고 40년 동안 20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에 알렸다. 그는 21년간 아라비아 반도에서 사역을 하였다.

 

이것이 19세기까지 이슬람권에 들어가서 사역한 사람들이다. 이슬람권을 향한 몇몇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는 달리 서구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목과 갈등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항상 걸림돌이 되어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무슬림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 대해 무관심함에 따라

결국 무슬림들은 복음을 듣고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무슬림들은 자연스럽게 서구교회로부터 냉대를 받았으며,

무슬림은 그들의 관심 밖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서구의 자세가 지속되어 왔는데 이는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장벽과 함께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무관심으로 인하여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은 무함마드에 의하여 이슬람이 시작된 지 227년이 지난 837년이었다. 아랍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고 해도 정작 아랍어 성경이 출판된 것은 1516년이다.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서구의 이슬람에 대한 심리적 원수관계로 인하여

전 세계 무슬림들의 80%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구교회로부터 무시당했다.

 

기독교회사에서 무슬림이 구교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099년부터 8차에 걸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성지탈환이라는 구호아래 약 200년간 예루살렘을 다스렸는데, 무슬림 역사가들에 의하여 군인들은 말을 타고 모스크 안을 휘젓고 다닐 때 모스크 바닥에 피가 얼마나 흥건했던지 말의 굽이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2) 그때 많은 무슬림들이 학살당함으로서 이슬람과 기독교사이에 큰 상처가 생겨난 것이다.

 

데이빗 바렛(David Barrett)<세계 그리스도인 백과사전>(The 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 AD 33년부터 AD 2000년까지 약 69,420,000명의 남녀 및 아이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 전체 인원 중에 9,101,000 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3)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종주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의 복음의 진보와 역사 앞에 이 같은 엄청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를 가장한 인종주의와 차별주의에 대해 분명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인류를 편애하지 아니하시고

 전 세계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슬림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은 과거 기독교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살던 시절에 중동은 기독교의 중심이었다. 북부아프리카는 가장 큰 교구를 자랑했었다.

초대교회 기독교는 5곳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로마였다.

그런데 이 5곳 중에 지역적으로 4개는 모두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가 있었을까?

 

첫째, 당시 비잔틴 제국은 페르시아와 100년 넘게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다.

특히 비잔틴 제국 아래에서 살아가는 기독교 이단들에게 더욱 가중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단으로 판명된 이후에 가중한 세금을 견디기 힘들어 하던 중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슬람을 해방자로 여기고 이에 협력하였다.

 

수백 년 동안 쌓아왔던 신학적인 공로와 업적들이 단지 몇 십 년의 역사밖에 없던 이슬람에게 넘어간 것이다.

기독교 안에 수세기에 걸친 이단 논쟁과 끊임없는 영토전쟁 등으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식어갔고,

믿음 또한 한계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이슬람의 협박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적, 경제적 실리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치가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지지야(Jizya)라는 약간의 종교세(인두세)만 내면 각자의 종교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이는 아주 관대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자유를 주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딤미가 되는 것이었다.

딤미는 2등 국민으로서 정치적, 사회적인 불평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개종 할 경우, 고위관리, 군 장성 등 사회 지도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4)

 

셋째, 무슬림 남자들이 샤리아 법에 따라서 기독교여성들과 결혼을 하게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은 감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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