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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운동으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

 

 

 

1.시온운동 (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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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선포한 말씀

 

필자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아랍교회 담임목사가 “그렇다”라고 서둘러 답을 하였다. 그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는 가운데, 그 모임 분위기가 아주 어수선하게 되었다. “그렇다”라고 답을 하면, 세대주의가 되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개혁/언약신학이 된다. 그 목사는 이집트 장로교회 산하 카이로복음주의신학교 출신으로 그의 교단 소속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개혁/언약 신학이 아니라 세대주의 신학이었다. 세대주의는 성경예언 성취의 주인공을 야곱의 피를 이어받은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그리고 개혁/언약신학은 그 주인공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교회라고 한다. 그리하여, 세대주의는 개혁/언약신학을 대체신학이라고 비판을 하고 있다. 성경예언성취의 주인공이 야곱의 혈통적 후손들인데 개혁/언약신학이 그 주인공의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교회로 대체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히 안타깝게도, 중동의 개신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그들이 속한 교단의 신학 노선과 상관 없이 세대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이른바 이스라엘 회복 운동에 연루된 자들이 많다. 그들은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졌고, 그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도 탈환하였으니, 이제 예루살렘 성전건축에 대한 예언도 곧 성취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중동의 개신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이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앞잡이라고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르단의 최초 선교사는 로이 위트만(Roy Whitman)이다.그는 14세에 교회의 휴거에 대한 설교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고, 훗날 아랍권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21세의 나이에 예루살렘에 왔고, 22세의 나이에 당시 요르단의 수도인 쌀트에 왔다. 그가 요르단에서 사역하던 중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1948.5.14)그는 이스라엘 건국 사건을 성경 예언의 성취적 사건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가롯 유다가 결코 존경을 받을 수 없지만, 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의 역할만큼은 성경예언의 성취적 사건이 되었던 점을 그의 교우들에게 상기시키시며, 이스라엘의 건국사건에 대한 성경예언의 성취적 사건이라는 그의 해석을 정당화시키곤 하였다.

이사야 19: 23-25은 ”앗수르인들과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하나가 되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해서 성취되기 시작하였음이 분명한다.

 

사도행전 15:39에 따르면, 바나바는 바울과 다투고 난 다음에, 그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구부로를 거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또한 다른 제자들이 앗스르인들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의 그 예언의 말씀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사건 이전에는 성취되지 못하였다가, 건국 사건 이후에야 마침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고 해석하는 가운데, 그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랍 교회의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세대주의에 기초한 아랍 기독교인들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라는 말씀에서 ‘그의 나라’가 곧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재림하셔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함으로 회복시킬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회복되는 이스라엘이 곧 이른바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의 건국이나 1967년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탈환은 그 왕국의 전초적 단계가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는 말씀도 친이(스아엘)파의 길을 걷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는 심히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곧 이 시대에 그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적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은 그 성전 터가 있는 동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게 양보할 수는 없는가?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전 이슬람 세계가 결코 양보할 수가 없다고 한다.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성전 터의 바위 돔 사원에 있는 “바위” 때문이다.

성전 터에는 바위 돔 사원과 더불어 알아끄사 사원이 있다. 편의상, 그 두 사원은 알아끄사 사원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그 “바위”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알라 이외는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메신저)이다”라는 이슬람의 샤하다, 즉 신앙 고백문이 그 “바위”와 더불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비록 그의 몸은 메카에 있었지만,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터의 “바위”를 발판으로 하여 천국에 오르게 되어 알라의 최대 사도로 인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메신저)이다’라는 내용이 이슬람의 신앙고백문에 포함되었다.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이 테러를 행하기 약 2년 반 전인 1998년 2월 23일에 자신을 포함한 5명의 이름으로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한 성전을 촉구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세계 이슬람 전선 선언문”(Jihad Against Jews and Crusaders/WorldIslamicFrontStatement)을 발표하였다.     

출처 : 정형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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