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엠마오로 가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 13~15절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온누리에 미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세월호 침몰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과 용기를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사도에 의하면 당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500여명도 넘었고, 고린도서를 기록할 때도 많은 목격자들이 생존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어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가신 곳은 직계 제자들이 머물러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이 힘없이 낙향하던 엠마오라는 곳이었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황급히 엠마오로 내려가셨을까 궁금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은 글로바와 그의 아내일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요한복음 19장에는 글로바의 아내 이름은 마리아이고, 그녀는 골고다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현장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글로바와 그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 절망 속에서 낙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글로바의 아내는 같은 이름을 가진 예수님의 모친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들은 정말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상실하는 일은 우리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고 인생에 절망감을 줍니다.

우리는 통한의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눈물과 고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승객들을 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정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를 믿고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렸을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차디찬 배 안에서 들려오는 자식들의 울부짖음을 가슴으로 듣는 부모들의 고통을 우리가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의 주검을 마음에 안고 살아갈 부모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잃은 글로바와 그의 아내도 세월호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가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지만 그들은 다른 방도가 없어 낙향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힘없이 걸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잡아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황망하여 정신이 없는 터라 자신들을 일부러 찾아오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건의 전말과 자신들의 처지를 토로했습니다. 결국 고향 집에 도착해 영접한 후 애찬시간에 축사하시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따라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부활의 주님은 실의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달려가시는 분입니다.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오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은 분명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과 어린 학생들의 주검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는 우리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달려가실 것입니다. 분명 어려움을 이길 믿음과 능력을 부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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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히브리서 11장 1∼2절

 

이솝 우화에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거북이가 이겼다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북이는 경주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언덕 위에 있는 깃발만 보고 전진했습니다. 토끼가 열심히 뛰든 말든, 낮잠을 자든 말든, 거북이는 경쟁자와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오직 깃발만 보고 묵묵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반면 토끼는 어땠습니까. 토끼는 처음부터 거북이만 보고 달렸습니다. “저런 느림보 거북이 같으니…”라고 비웃으며 안심하고 낮잠을 자다가 토끼는 결국 거북이에게 뒤지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까지 “주만 바라볼지라”가 아니라 세상만 바라보며,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한탄하고 배 아파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은 바로 우리의 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을 정탐했던 12명을 보십시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곳에 사는 거인족속과 견고한 성을 봤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봤습니다. 다니엘이 봤던 것도 사자가 아닙니다. 배고픈 사자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을 봤다면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은 바꾸지 않고 삶만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눈을 바꾸는 종교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가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립니까. 그것은 바로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눈이 변화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눈이 변화되는 것이 부흥의 첫걸음입니다. 눈이 변한 사람만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은 남들이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보며,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보며, 심판 중에 구원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면만 보이고,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였지만 언제부턴가 감사가 보이고, 희망이 보이고,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주로 삼은 사람에게는 이런 고백이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한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며 묵묵히 전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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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믿음으로 승리하는 길  

 

마가복음 5장 25~34절

 

오늘 본문에는 12년간 고통 속에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혈루증을 앓던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고,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병을 죄에 대한 형벌과 같이 생각했던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그녀를 철저히 고립시켰을 것입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처음 들리는 것은 사단의 음성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낙심시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자아의 음성도 들립니다. 우리의 시선은 좁아져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다 잊고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시선을 갖고 내 문제를 볼 때 고통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이 여인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런 용기를 갖게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퍼진 희망의 소식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리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혈루증의 근원이 마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모르시겠습니까. 모든 고통의 근원까지 마르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갔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지요.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옷을 스쳤고 심지어 예수님의 몸에 접촉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으신 손은 소문을 자신의 믿음으로 발전시킨 사람의 손입니다. 믿음의 손이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찾자 여인은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옷자락을 만졌기에 그녀는 자신의 병이 고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무리들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를 바라보십니다.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요.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하십니다. 그제야 여인은 환하게 웃었고, 동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정체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딸, 구세주의 딸, 예수님의 딸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생 듣고 싶었던 말, 평생소원이 믿음으로 인해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이 그녀에게 펼쳐진 것입니다.

혹시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여인처럼 믿음을 회복합시다.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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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 말씀 속에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좋은 약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은 모든 병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기뻐하며 사는 것을 마귀는 싫어합니다. 기뻐하며 주를 바라보십시오. 인생은 짧습니다. 기뻐하며 살기도 바쁩니다.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해를 보고 기뻐하고 달을 보고 기뻐하세요. 배우자를 보고 기뻐하고 누구를 보더라도 기뻐하세요.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해산한 산모가 모든 신경이 갓난아이에게 집중돼 있듯 기도를 호흡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태양과 달도 기도로 멈추었듯,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듯, 불의한 재판관이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었듯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운명 직전까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사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추장은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안 오는데, 다른 마을의 추장은 기우제를 지내기만 하면 비가 오더랍니다. 이유를 알아본즉 다른 마을의 추장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기도가 아프리카 추장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응답이 올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세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잘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될 때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영혼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감사하세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세요. 좋은 생각은 감사입니다. 시험이 닥쳐도 감사하세요. 실패해도 감사하세요. 물질이 없어도 감사하세요. 모든 것을 가졌어도 불평하면 가난한 자요,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하면 부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가진 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심지어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천국을 바라보며 늘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만복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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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무기력한 부활신앙

요한복음 20장 11~18절

 

본문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울고 있습니다(요 20:11). 그녀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있던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13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보살피고자 하는 여인의 착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려고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것(막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곧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20:18∼19).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물이 되기로 작정하고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였고 죄악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찬양하는 대신 울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면 무덤이 비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다면 안심하고 울지 않았을까요. 말씀이 이뤄진 현장에서 오히려 감격하고 기뻐해야 될 자리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불신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낙심하여 울고 있는 여인처럼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무덤에 찾아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만남은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코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절망하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울고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우리들에게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지난 허물을 들추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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