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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기독교

 I. 3 세기의 박해

II. 3 세기 - 변화

1 세기가 "시작"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면, 2 세기는 "박해"로, 3 세기는 "변화"의 세기로 명명될 수 있다.
기독교가 고통을 당하는 기간동안 태도와 교리에서 변화가 생겼다. 변화가 있었던 몇 가지 주요한 영역은 다음과 같다.

A. 교회 직분(Offices)의 변화
2 세기에 목양자와 집사의 성경적 직무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목양자의 권능과 특성이 커갔다. 그리고 성직자 계급제도를 높이는데 영향을 끼친 성직자직분의 특성이 뒤따랐다.

3 세기 중반에, 성직자 계급이 나뉘기 시작했다. 감독과 장로 사이에 차별이 확립되었다.이후에, 많은 직분(office)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부집사, 성구 낭독자, 또는 성가대, 문지기, 시종직(acolytes)(감독 수종자), 무당(exorcists) 등이다.
오직 감독만이 임명하는 권리를 가졌다. 서방에서는 견진 성사(confirmation)의 개념이
생겼다. 견진례를 베푸는 권리는 오직 감독에게만 주어졌다.

성직을 계승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요약하면 : 1 세기 - 성직자 없음 : 장로(감독) & 집사
           2 세기 - 평신도 위에 성직자가 등용
           3 세기 - 성직자가 여러 등급으로 나뉨

1. 이레니우스 (115-200 A.D.)
그는 사도직을 존속시키고 캐톨릭 전통을 전하려는 매체로서 감독제도 개념을 감독관구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단에 대적하여 신앙의 보존자요 보호자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을 강조했다.   

2. 키프리안(Cyprian)(200-256 A.D.)
그는 희생 사역의 성직자직분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누구든지 감독과 같이 하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B. 교회 행정의 변화
초기부터 성직계급제도의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씨는 1 세기에 뿌려진 것이다. 

1. 교회 성직 계급제도의 출현에 영향을 끼친 요인
다음과 같은 요인의 영향으로 캐톨릭 성직계급제도가 서서히 발전되었다.

a.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델들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 안으로 태어났다. 로마는 종교적 의식(sacralist) 사회였다. - 로마의 행정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얽혀진 형태였다.
양자가 별개로 나뉘어서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국의 영토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로마 행정의 지배를 받았고 당연히 로마의 다신교를 신봉해야 했다.
 

이 혼합 사회는 결국 로마와 참 기독교 사이에 충돌을 낳았고, 또한 기독교 안에 종교적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b. 유대 (구약) 체계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유대교적 경향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는 교회 형태의 성직자 직분 개념에 대한 성경적 지지를 얻으려는 방법으로, 신약교회 체제(order)의 모형을 구약의 레위 성직자 직분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원래 종교적 의식 사회였다. 이스라엘 국가에 속한 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종교를 가져야 했다. 
 

구약 체제를 신약 교회의 실행에 적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약 성직자직분    →    신약 사제제도
구약 국가              →    신약 카톨릭주의
구약 할례              →    신약 유아세례
구약 유월절           →    신약 만찬
구약 종교적 의식   →    신약의 전례(예배식)


c. "모교회(Mother Churches)"의 승인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은 순수한 사도적 전통의 주(主) 매체(媒體)로 존중되었고, 자연히 이들 교회의 감독들은 큰 존경을 받았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감독관구로 나뉘어졌고, 각 감독관구는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졌다. 각 지방에는 수도가 있었다. 수도에 위치한 교회의 감독들은 수도대감독(Metropolitan Bishop)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다른 지방 분구(分區) 주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수도대감독들에게 대주교(Archbishop), 수도대주교(Primates), 총대주교(Patriarchs)의 명칭이 주어졌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끼친 3 대 중심지는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도시들은 무역과 여행과 정치적 영향에서도 주요한 중심지였다. 

d. 이단의 출현
이단들의 등장으로 참된 그리스도 교회(Catholic church)는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외적 특성들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2.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 

보편적(우주적) 교회 개념은 이 시대의 시대적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우주적 교회 개념을 조장시킨 이는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200-258)이다.

신학적으로, 이같은 이상한 개념은 "교회(에클레시아)"와 "왕국(바실레이아)"을 동일시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이 엄청난 오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제안한 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믿는이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실재(entity)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는 그 본성에 있어서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 구원의 영역이기 때문에 "교회"도 구원의 영역이 된다는 논리적인 결과를 추가로 제안자들에게 제공했다.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250 A.D.)

키프리안의 많은 교리는 그와 노바티안파와의 충돌의 결과로 발전된 것이다. 그는"한 개의 참된 우주적 교회(ONE true universal church)"를 제안하여 계급 제도를 반대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Cunningham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회 안에 오류와 부패가 진보하게 된 것은 키프리안의 지대한 공헌 때문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개념을 거부하고 신약 형태를 고집스럽게 고수하였다. 그 결과 제도권 교회들은 이들을 "교회 분리자(Schismatics)" 또는  "이단(heretics)"으로 불렀다.

 

3. 로마 교회
이 교회는 그 당시 큰 교회 중의 하나로서(롬 1:8), 다른 이들에 의해 큰 존경을 받았다.
a.로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b.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다.
c.많은 교회들을 세우는데 활동적이였다.
d.많은 지역을 도왔다. 이 교회는 그들이 베푼 사랑으로 존경을 받았다.
e.로마 제국에 의해 첫 번째로 박해를 받았다.
f.그들의 순교자 명부에는 많은 유명한 순교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순교는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g.논쟁이 있을 때에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h.사도 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였다.

모든 시선이 이 교회를 향했고, 곧 교회 권위의 가장 상좌(上座)로 여겨졌다.
로마의 감독 빅터는 교리적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들을 파문했다.
키프리안은 베드로의 우월성을 가르쳤고, 로마교회 감독직은 사제의 유일성(unity)의 원천인  베드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황제도를 옹호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3 세기에 로마 교회는 단지 교리의 해설자가 아닌 보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로마 교회는 명령 또는 통제에 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C. 교회 기율(紀律)의 변화.

성경은 때로는 교회 회원의 자격 박탈을 가르친다(마 18:17).
 

3 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회개자(Penitent)라는 부류가 생겨났다. 이 부류는 파문되었다가 회개 의사를 표시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도록 특별한 장소에 앉아야 했다. 성직자들이 그들에 대한 벌을 정하였다.
비록 이 당시에는 참된 내적 회개가 강조되었지만, 결국 이 기율은 "고해성사 (Penance)"의 교리로 발전되는 기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 가운데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venial sins)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mortal sins)가 구별되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후에 "밥티스마로 베푸신 은혜"를 상실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D. 교회 예배의 변화

 

1. 금욕주의의 출현

금욕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양 신비주의의 산물이다. 금식의 날을 정하는 것과 독신주의는 금욕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많은 경우, 수요일과 금요일이 금식의 날인데,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정했다가 후에 교령(敎令)으로 정해졌다.

2. 예배장소

그리스도인들이 모임 장소로 사용한 초기의 건물은 로마의 공회당(basilica)을 모방한
것이다. 이 공회당은 그 당시 재판소와 증권거래소였다. 성찬을 받는 사람(communicants)은 본당에, 회개자는 현관에, 관객은 별석(別席)(gallery)에, 성가대와
감독은 후진(apse)에 모였다.

3. 상징(Symbols)
3 세기말에 사람들은 "십자가의 상징"에 신비한 효능 같은 것을 부여했다.

 

E. 밥티스마(침례) 실행의 변화
3 세기까지, 모든 밥티스마는 성인을 물에 잠그는 것이라고 확실히 공표되었던 것 같다.교회들이 규례에 성례전의 강조 사항을 넣을 경우, 유아들은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물 뿌리는 양식을 실행하지 않았다.  몇몇 교부들(특히 터튤리안)의 고증을 연구한 결과
밥티스마의 실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얻을 수 있다.

 

1. 성인에게만 실행되었다.
2. 잠김으로 실행되었다.
3. 통상 긴 가르침이 선행되었다.
4. 자주 장대한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a. 이마와 가슴에 성호.
b. 밥티스마 후보자에게 우유와 꿀을 줌.
c. 소금을 baptizand의 머리 여러 곳에 둠
d. 256년 카르타고 공의회 후 밥티스마 전에 주문을 외우는 의식이 생김
e. 모든 밥티스마 후보자의 대부모(代父母) - 그들의 가르침을 보증

5.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
3 세기까지 밥티스마는 구원의 과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켜져 왔다. 밥티스마는 원죄를 씻어버린다고 했다.


a, 터툴리안

비록 밥티스트와 유아세례자들이 똑같이 그를 자주 인용하였지만, 터툴리안은 밥티스마와 관련한 많은 반대적인 실행에 대항했다. (터툴리안은 제도권 교회에 속했지만 후에는 회심하고 몬타니스트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터툴리안은 조기 밥티스마와 대부모의 사용을 반대했다.

b. 키프리안

대조적으로 키프리안은 밥티스마에 성수가 (따라서 성수를 뿌리는 자 -사제)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성수는 성령의 깨끗케 하는 에너지를 운반하는 매체가 된다"
또한 키프리안은 편의주의적 실행으로 물을 붓는(pouring) 것을 처음으로 지지하였다.

비록 밥티스마가 여전히 물에 잠그는 것으로 실행되었지만, 초기의 가장 큰 규례의 부패는 아프리카 교회로부터 왔다. 첫 번째 예로 Clinic Baptism을 들 수 있다.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Clinic Baptism을 받아들였다. 그가 종이로
자기 몸을 완전히 두룬 후 그 종이를 물에 담그어서 마치 그를 물 속에 잠근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로부터 그 당시에는 물에 잠그는 실행을 올바른 양식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2 세기 동안 유아세례가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학식 있는 유아세례자들도 충분히
인정한 것이므로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F. 주님의 만찬의 변화
     

1. "애찬(愛餐)(아가페)" 이는 초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지켜 온 애찬(love-feast)이다 - 행 2:46, 유다12박해를 받는 동안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모여서 음식을 나누었다. 때로는 주님의 만찬 후에 애찬이 있었으나 지나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2. Eucharist
이것은 주님의 만찬에 붙여진 초기의 명칭 중에 하나다. [헬라어 유카리스테로(Eucharisteo) - 감사(thanks)]. 성찬중시주의(sacrementalism)로 인해 주님의 만찬의 단순성과 순결성이 변했다.

 

3. 미사(Mass)

비록 오늘날 실행되는 것과 같은 미사가 얼마 동안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용어는
만찬 때 성찬을 받지 않는 사람들(non-communicants)을 제외시킨 3 세기의 관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예비 예배(Preliminary Worship) 후에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퇴장시켰다. "퇴장(dismissal)"의 라틴어 "missa"로부터 "미사"가 유래했다. 

 

G.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케 하는 영향력은 3 세기에 극에 달했다. 이는 주로 한 사람,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파 출신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철학자(골 2:8), 오리겐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오리겐의 생애
a.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남
b. 젊은 나이에 높이 평가받는 성공적인 교사가 됨
c.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일으킨 박해 중, 202년에 생애의 극적인 변화를 맞이함.
그의 아버지가 순교를 당함

그의 가족이 빈곤하게 됨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강제로 도피하자, 203년에 18 세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됨.
 

d. 그는 천재이며, 광범위한 독서와 저술과 수집을 함. 그노시스주의자 암브로우스의
서재를 가짐

e.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이교도 암모니우스 사카스(170-243 A.D.)의 문하생이 됨.
f.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함. 맨발로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고자가 됨.
g. 박해에 맞서는 용맹성과 극단적인 인내로 존경을 받음.
h. 213년에 로마를 방문함.
i. 215-219 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거주함.
j.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서 231년까지 머무름. 231년에 알렉산드리아 지도자와
              다툰 후 추방당하여 영구히 알렉산드리아를 떠남.

k. 232년에 가이사랴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학교와 경쟁이 되는 다른 학교를 설립함
l. 데키우스 황제가 일으킨 박해 때 받은 가혹한 박탈과 고문의 결과로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가이사랴에 머무름. 

 

2. 오리겐의 믿음

오리겐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지만, 그를 숭배하던
자들조차도 그가 엄밀하게 정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a. 비록 많은 그노시스파들과 철학적 논쟁을 가졌지만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조에
               정통했다.
           b. 플라톤 철학에 몰두했다.
           c. 구약을 신약과 비유하여 알레고리로 해석하며 자주 구약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따라 문법적 해석에서 자기 의견상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의미가 도출될 때마다, 문자적인 의미를 벗어났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이해하는 자에게 성경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고 했다.

          d.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했다.
          e. 혼이 영원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다(혼의 선재).
          f.  어떤 사람의 혼이 죽은 후,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다.
          g. 사악한 자도 형벌(연옥?) 후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다.
          h.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I. 별들과 행성이 혼을 가졌다고 믿었다.
          j.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k. 목양자를 사제로 언급한 최초의 사람 중에 하나이며 감독은 중대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l.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암시를 보였다.
         m.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후천년 견해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은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다.

       3. 오리겐의 작품들
          오리겐을 유력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다. 그의 생애 동안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다. 초기 교부들이 작성한 현존하는 신약 인용문의 50 % 가 그가 작성한
          것이다. 7 명의 유명한 교부가 작성한 신약 인용문 목록에서 오리겐이 작성한 것이
          거의 18,000 개다.

          a. 그의 주요 작품들
            · 오리겐은 거의 모든 성경책에 대하여 주석을 썼다.
            · 그의 저서 "제 1 원리(De Principiis)"는 방대한 조직신학이다.
            · 그의 책 "켈수스 이단 반박"은 변증론이자 논쟁이다.

          b. 구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 THE HEXAPLA
              헥사폴라는 6개국어 구약 대조(對照) 성경이다. 6 개의 난으로 구성되었고, 각
              난은 구약 본문의 번역본을 실었다.  
            · 그 크기가 대략 6500 페이지, 50 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한다.
            · 약 250 년에 완성되었다
            · 그는 7 명의 속기사와 7 명의 필경자와 같이 일했다.
            · 첫째 난
               히브리어 본문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후기 마소라 본문과 실질상
               동일한 것이다.
            · 둘째 난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 셋째 난
               아퀼라(Aquila)(95-137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아퀼라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다.
            · 넷째 난
               에비온파였던 심마쿠스(Symmachus)(160-211 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다섯째 난
               오리겐 자신의 작품으로 통상 70 인역(Septuaginst)과 동등시된다. 오리겐은
               히브리어에 대하여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으며, 그가 당시 유포된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 본문을 정열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 여섯째 난
               또 다른 에비온파 데오도티온(Theodotion)(160-211년)이 만든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헥사폴라는 가이사랴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여 분실 또는
               파괴될 때까지(638년) 이 곳에 남아 있었다.
            ·  5 번째 난은 오늘날까지 모두 잔존하며, 바티칸 사본(B) 필사본, 시내 사본(K),
                알렉산드리아 사본(A), Ephraemi Rescriptus(C)에서 발견된다.

          c. 신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오리겐은 자주"추측 교정(Conjectural Emendation)"이라는 본문 비평학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신약 본문을 고쳤다. 추측 교정이란 "당신이 생각하기에 본문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라!"를 뜻한다.    
                
    H. 교리의 변화
    
         2 세기의 대표적인 이단이 그노시스주의였다면 3 세기는 일위신론(一位神論)
       (단일신론 : Monachianism)이다. 이 이름은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단일성(unity)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계발한 가르침에서 적용한 것이다. 일위신론은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이 시대에 발달된 또 다른 이단은 "성자종속론(Subordinationism)"이다.

         1. 역동적 일위신론(Dynamic Monachianism)
            이것은 사실상 에비온 이단의 존속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이론이다.
            이 일위신론의 형식은 비잔틴의 데오도투스(Theodotus)가 처음으로 가르쳤으며,
            대부분은 특히 사모사타(Samosata)의 바울이 가르친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로고스(Logos)"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이 사람 안에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다. 비인간적 권능(로고스)은 사람인 예수 안에
            들어가서 점차적으로 그를 신성화했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할지라도"사람인 예수가 그렇게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신성한 영예
            (honor)를 받기에 합당하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2. 양식론적 일위신론(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
            Patripassianism/사벨리우스주의 :
            이 이단은 신격의 세 인격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세 양식으로 생각한다.
            이 이론은 스미마의 Prakeas 와 Noetus이 최초에 주장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제안자는 사벨리우스이다. 동부에서 이 교리는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
            불린다.
            사벨리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신성한 본질을 스스로 계시
            하는 세 양식(modes)또는 상(phase)의 명칭이다.이 이론은 '아버지가 육체가 되어서
            우리 안에 거하셨다'고 주장한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Patripassian 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Patri = Father, Passion = suffering)

         3. 성자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견해는 오리겐이 가르쳤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께 종속된 2 위(secondary divinity)
            를 가진 한 신(a god)이지 하나님(the God)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령은
            아들에게 종속되고 실제로 아들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있다고 가르쳤다.

           "오리겐의 삼위일체 교리는 ....아리우스파에게 디딤돌을 제공했다"
           "아리우스파의 논쟁의 뿌리는 위대한 오리겐의 그리스도론의 모순된 원리(elements)
           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I. 기억해야할 사람들

         1. 오리겐(184-254) - 부패한 성경의 아버지
         2. 키프리안(200-258) -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
         3. 유세비우스(260-339) - 부패한 사학의 아버지
         4. 어거스틴(354-430) - 부패한 신학의 아버지

III. 노바티안

     노바티안은 신약 신앙 및 반열의 노선에서 몬타니스트의 뒤를 잇는 다음 연결점이다. 2 세기의 몬타니스트 운동이 "모든 믿는이의 성직자직분 논쟁"이라면, 노바티안 분파는 "교회 기율 논쟁(church discipline controversy)"으로 불릴 수 있다.  양 운동은 신약교회의 순결과 관련된 것이다. 그들은 영 안에서 밥티스트였고 복음의 진보를 낳았다.

    A. 지도자
         노바티안파란 이름은 지도자 노바티안 때문에 명명되었다.
         노바티안은 250년경에 이교 철학의 배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가 병들어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고
         "clinic baptism"을 받았다. 회복된 후 그가 다시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노바티안은 감독 파비안(Fabian)에 의해 로마교회의 장로(목회자)로 임명되었다.

    B. 노바티안의 분파
         데시우스 트라얀 황제의 칙령으로 교회는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상과 황제의 수호신에게 희생물을 드렸던 자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자, 심각한 논쟁이 고조되었다.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주장되었다.

         1. 엄격한 기율
           배교에 대한 본성 때문에 그러한 자들은 결단코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가능성이 거절당한 것은 아니었다)

         2. 엄격하지 않은 기율
            그러한 사람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유예 기간이 지난 후 교회 일원으로
            복직될 수 있다.

            노바티안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은 로마인 목양자 Hippolytus(?-235 A.D)이다.
            그는 이레니우스의 제자였으며 티버 강에서 순교 당했다. 그는 엄한 규율의
            주창자였으며, 스스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노바티안은 엄격한 규율의 견해를 견고하게 지지했다. 250년에 파비안 감독이
            죽자마자, 그는 공석의 감독직을 가지고 유명한 코르넬리우스와 경쟁을 하였다.
            (코르넬리우스는 엄격하지 않은 규율을 지지했다) 코르넬리우스가 감독으로
            선정되자 노바티안은 교회의 소수 무리와 함께 교회를 떠났다.

           이 분열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많은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즉, 이 큰
           분열의 원인이 노바티안의 권력에 대한 개인적 야망 때문이며, 그가 당선되지 않자
           악의로 대항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
           논쟁은 교회의 기율에 관한 것이며, 노바티안은 실제로 자신이 원했던 바와는 반대로
           분열되어 나온 그룹에 의해 목양자로 뽑혔다.

    C. 노바티안파의 교리

         노바티안파의 교리는 다음을 지지했다.
    
         1. 교회 일원의 순결
            교회는 모든 배교, 불순물,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2. 엄격한 교회 기율

         3. 배교자의 재 밥티스마

         4. 밥티스마
           a. 잠김에 의해
           b. 성인에게
           c. 장대한 의식이 없이
           d. 교회의 권위 위에
 
         이들 교리는 기독교계 가운데서 실제적인 영구한 분열을 낳았다. 노바티안 교회들은
         더 이상 제도권 교회들의 밥티스마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분열은 251 년에 발생했다.

    D. 노바티안에 대한 고소

         우리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항은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소위 clinic baptism을 받아드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1. 밥티스마에 관한 노바티안의 가르침
            밥티스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그리고 오직 잠김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가르쳤다. 그는 제도권 교회로부터 온 모든 자들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이 사실은 비록 준비된 증거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밥티스마는 사람이 아닌 권위가 중요하다.
            비록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밥티스마에 관한
            권위가 교회와 관련한 것이지 밥티스마를 집행하는 사람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노바티안파의 밥티스마는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E. 노바티안 운동의 영향
   
        그 이름과 초기 시작은 로마였지만 분열을 일으킨 의견은 널리 퍼졌고, 운동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로마에서 보다 앞서서 250 년에 카르타고에서 유사한 분열이 일어났다. 키프리안이
        감독으로 성급하게 선임되자 노바투스라는 이름의 인자한 목양자와 Felicissimus라는
        이름의 집사가 교회를 떠났다. 그 때 회개자에 대한 논쟁에서 키프리안이 보다 더 엄격한
        견해를 가졌으나, 분열 후 노바투스는 그의 입장을 바꾸고 엄격한 노바티안 운동에
        합류했다.

         254년에 이들의 반대자들은 이들이 프랑스를 이들의 교리로 오염시킨다고 고소했다.

         역사가 샤프는 노바티안파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진지함 덕분에
         동쪽으로 여러 지방에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6 세기까지 전래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피리기아에서 몬타니스트의 잔류자들과 결합했다.

         "노바티안파는 최초의 재침례교도(Anabaptist)였다 : 반대자들의 사역과 성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참된 교회가 될 것을 주장하며, 카톨릭 교회로부터
        온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받을 것을 필수적으로 강요했다. 이 무리는
        소아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얻었는데, 거기서 많은 몬타니스트가 합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노바티안파는 6∼7 세기까지 잔존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의 존속이 종교개혁과 재침례교도 운동의 출현때까지라고 밝혀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바티안파의 본을 따랐고  제국 전역에 걸쳐 순결한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200 년 동안 번창했다. 후에 가혹한 법 때문에 부득불 희망자를 은밀히
        가입시키고 몰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했을 때, 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특징을
        이루며 종교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삶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을 '순결한'을 뜻하는 카타리(Cathari)라고
        불렀다. Mosheim은 말하기를 "더욱이 그들은 캐톨릭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
        를 베풀었다. 다른 단체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기 때문에 재침례교도라고
        불렸다. 제 4 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 재침례자들을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
        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을 Trinitarian Baptist(삼위일체를 믿는 밥티스트) 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존엄과 권위에 관하여 모든 목양자들의 동등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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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기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2 세기는 박해(PERSECUTION)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손으로부터 박해의 파도는 쉬지 않고 교회를 때렸다.

I. 2 세기의 박해들

주님의 교회는 대환란의 시대에서 2세기로 들어갔다.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여 성장했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1. 끊임없는 전파

믿는이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진지하게 수행했다. 그들은 참된 신념을 가졌다.

 

2. 복음의 배타성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들만이 진리를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독교는 "단지 또다른 종교"라고 믿지 않았다.

 

3. 회중 생활(congregational life)

이들 성도들은 복음을 살아냈다. 곧 그들이 선포한 바를 그대로 실행했다.

박해의 다른 효과는 박해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재고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renounce)". 이는 후에 교회에 몇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98년부터 211년까지 Trajan, Hadrian, Antonius Pius, Marcus Aurelius, Commodus,
Septimus Severus 등의 6 황제에 의한 잔혹한 박해가 있었다.  

 

II. 2 세기의 타락들

사도들의 생애동안 심겨졌던 오류의 씨앗들이 이 기간동안 열매를 맺기 시작함

A. 교회 실행의 변화
주로 유대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교회내에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 성직자주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급화하는 것임 :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kleros"는 '택한자들'을 의미함; "laos"는 '백성'을 의미함)신약은 감독의 직무가 교회내 지도권의 하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거만한 성직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가 베드로 전서 5:3에 주어졌다.

신약의 가르침을 넘어선 목양자들의 특권(prestige), 권능(power), 및 권위(authority)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카리스마(charisma), 강한 개성(strong personality), 또는 "영웅 숭배"를 통하여 두드러지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간적 본성에 흥미를 끄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 하든지, 신약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이러한 특성은 구약에 호소함으로 (구약의 레위 성직자제도와 이에 수반되는 권능 및 특권의 올가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백성의 몸(body)과는 별개의 특별한 성직자제도의 개념 및 제도는 수반되는 개념인 희생물과 희생단과 함께 유대교와 이교를 기억나게하는 유사한 것들로 기독교의 교회 안으로 알아챌 수 없게 귀속되어 갔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이 변화는 2 세기에 발생하였으며, "믿는이의 성직자직분"이라는 신약 교리를 벗어난 것이다.
a. 이그나티우스 (117년) :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감독과 장로와 집사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하는 자는 양심에서 순결하지 않다"
b. 로마의 클레멘트 (110년) : 그가 신약교회와 레위 성직자직분을 비교할 때, 처음으로 평신도(layman)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2. 비속화(卑俗化)(Sophistication)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형상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복음의 단순성과 순결이 잊혀져 갔다. 더욱이 사람의 타락한 죄성인 상상력에 의해 이러한 보조 기구는 급격히 인간 고안품의 잡동사니로 타락해 갔다. 

"2세기 중간 또는 말기에 심각한 심볼의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예술에서 시작되었음을
보게 된다...이러한 심볼의 근원은 종교적 진리의 상징을 가지려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적
욕망에서 발견되어짐에 틀림없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십자가 성호가 2 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터튤리안은 "십자가 숭배"의 고소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타 초기 기독교 심볼로는, 비둘기, 배, 닻, 등이 있다. "이들 심볼로부터는 단지
도상학적 표현의 측면에서 한 발자국의 진보가 있었을 뿐이다"고 샤프는 말한다
물고기 심볼은 2 세기 중반부터 유래되었는데, 그 근원지는 알렉산드리아로 여겨진다.

 

3. 성찬 중시주의(Sacramentalism)

2 세기 초에 중요성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보일 것이다. 실체(substance)와 상징(symbol) 간에 성경적 균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밥티스마의 규례가 크게 강조되었다.

 

a. 밥티스마의 부속물

먼저 규례에 의식(儀式)주의가 첨가되었다. 곧이어 다음 사항들이 뒤따랐다. 

(1) 도입부(Introduction)가 길어짐 - 교리문답
(2) 마귀 거절 설명서
(3) 신조(Creed)의 암송
(4) 삼중 잠김(Trine Immersion) - 간혹
(5) 형제의 입맞춤(Brotherly Kiss)
 

b. 밥트스마와 구원의 혼란
많은 교부들 가운데 켐벨주의와 유사한 견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의식에서 마술적인 것을 보지 않았지만, 밥티스마를 믿음의 행위로,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는 은혜(saving grace)의 전달자로 보기 시작했다

 

(1) 순교자 저스틴 (100-165년)

(2) 헤르마스(Hermas) (115-140 년)

 

B. 기독교 교리의 변화

일세기에서 두번째 주요 이단이었던 그노시스주의는 2 세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노시스주의는 창조의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너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는 선하고 얼마는 악한 많은 중간 신들에 의해 우주를 다스린다고 가르쳤다.

III. 2 세기의 명사들

A. 저스틴(100-165 A.D.)
B. 이레니우스(115-200 A.D.)
C. 터튤리안(160-230 A.D.) 
       

IV. 2 세기의 발전

교회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 신약 정경이 형성됨. 2 세기 초에 발생하였다. 신약의 최종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시대에도 신약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골 4:16)(살전 5:27)
(벧후 1:15, 3:1,2) * 딤전 5:18 과 마 10:10을 비교할 것  성경기록을 수집하고 편집한 곳 (4 곳)

팔레스타인 - 마태, 야고보, 히브리서
소아시아 - 요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서부터 계시록까지

그리이스 -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카전후서, 누가, 디도서
로마 - 마가, 사도행전, 로마서 

지리적인 분리 때문에 초기의 정경 수집은 완전하지 못했다.교부들의 글에서 신약성경의 정경화에 관한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주로 전달과 유포의 어려움 때문에 몇 가지 책들에 대한 작은 논쟁이 있다. 412년 까지논쟁이 되었던 책으로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 일서, 요한 이서이다 -
대체로 이단들을 정죄한 책들이다. 

 

 

 

V. 2 세기의 저항자 - (Monatanists)

몬타누스파의 출현. 대부분의 교회역사에서 몬타니스트들은 이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들의 신조와 실행들을 주의깊게 연구하면 그들이 정통이였음이 밝혀진다.몬타니즘은 교회의 순결과 영성에서 조류를 거스리는 첫번째 일반 저항이다

 

A. 지도자
그들이 몬타니스트라 불리운 것은 몬타니우스라는 사람의 선포때문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는 Cybele의 이교도 사제였으며 약 150 년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B. 위치
몬타니즘은 소아시의 중앙 프리기아에 있는 Ardabau라 불리우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신속하게 유럽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몬타니즘은 177년에 로마와 프랑스의 리용에서도 발견되었다.

 

 C. 시작

몬타니우스는 150년에 그의 관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명의 여자 명사인 맥시밀라와 브리스가를 포함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D. 몬타니스트 운동의 이유들
사도시대이후 곧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눈에 띄일만한 변화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들 중 몇 가지로는,
 

1. 의식주의(儀式主義)화 경향        
2. 성직자 계급의 등장
3. 영성의 부족
4. 기율과 교회회원의 기준이 헤이 해지기 시작함

 

E. 몬타니스트의 사명
몬타니즘은 실제에 있어서 교회를 그들의 영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는, 신약의 기초로 돌이키려는 개혁운동이였다.
몬타니우스는 믿는이들과 교회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복음에는 성직자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음을 표명했다. 그는 철학과 종교의 반대자였다.

 

F. 몬타니스트의 교리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과는 별개로 몬타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신조와 실행들을 지켰다.

1. 교회의 회원으로 거듭남을 강조함
2. 믿는이의 밥티스마

그들은 교제의 순결을 실행했으며, 제도권 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다. 그들은 오직 물에 잠그는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2 세기에는
이 밥티스마 외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3. 삶의 거룩함

 "그들은 과학과 예술, 모든 세상적인 교육 또는 삶의 화려한 형태를 피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이교주의에 속했기 때문이었다"(Christian Op. Cit. p. 42)그들은 재혼, 방종한 금식, 박해를 도피하는 것에 반대했다.

4. 교회 기강
"도덕적 죄에 대항하여 교회는 그 죄를 범한 자를 올바르게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나갔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함은 단순히 그 일원의 거룩함이기 때문이다(Christian Op. Cit. p. 43)"

5. 삼위일체 신학
6.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몬타니스트들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기록들을 전수하였다. 

7. 전천년주의 종말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다시 오셔서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러한 전천년주의 견해는 또한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몬타니스트들이 인기가 없었던 것이 전천년주의의 소멸에 기여했던 것 같다.

 

G. 몬타니즘에 대항한 변화
몬타누스파 교회들은 제도권 교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들에 관해 언급한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부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최근의 역사가들은 몬타니즘의 대적자들 편을 들었으며, 그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고소하였다.  

 

1. 가장 일반적인 고소
이는 몬타니스트들이 "고대의 Holy Roller (열광적인 종파의 신자)"라는 것이다.
몬타니우스가 위로자(Paraclete)이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의 계시를 초월하여 주장하였다고 고소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것 같다. 몬타니스트 교회의 영성과 삶은 제도권 교회들의 형식주의 및 무감각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a. 루터교 역사가 모헤임은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위로자라고 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 번역자 맥클린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스스로 성령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실수였다." (Church History. Mosheim, Volume I. p. 188) Armitage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몬타니우스는 자신을 성령과 동등시하였다고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은 단지 비방에 불과하였다"(Armitage, T. History of The Baptists. p. 175)

b. Jarrel은 "ecstasy"에 관한 터툴리안의 해설을 인용하면서 아마도 그가 다윗이 말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c. 터툴리안은, 이상(vision)과 초성경적 계시를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성경을 읽거나, 시편을 노래하거나, 강연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들은 이상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들이다"라고 했다. 어떠한 비성경적인 것도 없다!!
 

d.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제도권 교회의 교리들을 수용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 그들의 차이는 강조와 실행에 있다. 

2. 몬타누스파의 지나친 점들
비록 단호하게 입증되지 않을 지라도, 일부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다음과 같은 확실한 비성경적 실행들을 지켰을 가능성이 있다.

a. 여자의 임명
몇몇 교회들은 성령의 선물들이 모든 조건과 성에 차이가 없이 분배되었다는 그들의 신조로 인해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b. 삼중 밥티스마(Trine Immersion)일부 몇몇 몬타누스파 교회에서 실행되었다.
c. 목양자의 독신주의 - 아무런 규칙이나 또는 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박해의 때에 실제적인 예방조치였다. (예 고전 7:26,29 와 8,9 절)
d. 엄격한 금욕주의
e. 엄격한 교회 기강

 

 H. 몬타니즘의 결과
1. 터툴리안은 몬타니스트 사상으로의 전환자로 알려졌다. 그는 이 가르침들을 잘 정리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북 아프리카 지역(터튤리안파)에 유증으로 남겼는데, 후에 도나티즘으로 나타났다.

 

2. 이 운동에 대하여 수차례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공식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였다.
3. 이 운동의 영향은 노바티안파, 도나티우스파, 아르메니아와의 점촉, Paluician의
출현 등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역사가들 중에 몬타니스트를 옹호하는 역사가들이 있는데 그들 중 몇몇을 인용하면,

 

a. 초기 역사가인 W.R. 윌리암 박사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교리적 오류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들의 감정의 표현은, 훨씬 후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다른 교사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은혜의 참된 경험은 믿는이의 삶에서 분명하다는 그들의 믿음에서 유래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b. 도너 박사는 그들의 운동에 대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교회 몸의 지배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역자주:성직자계급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적 반발이였다고 썼다.

c. Schaff-Herzog 종교 백과사전의 기고자인 몰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몬타니즘은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며 몬타니스트는 새로운 종파가 아니다. 오히려 몬타니즘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가운데 안락하게 안주하려는 그 시대의 두드러진 경향에 대항한 단순히 고대 초기 교회의 반발이었다."  (Grimith, J. W. A Manual Of Church History: Vol. II.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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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이 없는 기도

 

시 38:15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H. G. 웰즈의 단편 ‘성직자의 죽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저녁 예배당에서 열성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성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몇 년간 빠지지 않고 기도를 드리는 성직자를 보고 사람들은 정말로 믿음이 좋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직자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기도를 드리던 순간 갑자기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
“아들아, 내가 듣고 있다.”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지만 성직자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너무 놀라 죽고 말았습니다. 항상 응답을 바란다고 말로는 고백하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기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바른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듣고 응답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위해 먼저 기도하십시오.
큐티/김장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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