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단과 교파에 관한 이해
 

 

 기독교에는 많은 교단(denomination) 혹은 교파가 있습니다.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구세군, 성공회, 루터교, 하나님의성회, 침례교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서로 다른 교단들이지만 원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면에서 하나이며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복음(신학에서는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재림)을 믿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등에서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교단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 정치체제, 신조, 신학적 바탕 등에서 조금씩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런 차이점은 마치 한 부모의 자식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생김새는 달라도 부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자식임은 불변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이제 이들의 차이점을 간략히 살펴 볼까요.

 

   1) 성결교회 :

 

성결교회는 성결교회 홈페이지인 본 싸이트의 외쪽 상단에 링크된 [헌법][역사]를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편의상 몇가지만 언급하면 성결교회의 신학적 바탕은 요한 웨슬레이며, 정치제도는 초기에는 감리교처럼 감독제를 가지다가 후에 대의제도를 선택했습니다. 대의제도는 쉽게 말해 장로의회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사중복음(중생(거듭남),성결,신유,재림)이며 성결교회의 시작은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정빈,김상준이란 분이 1907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데서 부터입니다. 일제시대에 재림사상 때문에 교단이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 재건 되었는데 이 폐쇄 기간 때문에 선교의 어려움이 있어 교회 성장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다른 교단과는 달리 해방 후 다시 시작된 후발주자로서 오늘날 손꼽히는 유수의 교단이 된것 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단신학교는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대학교입니다.  한국의 성결교회는 크게 본교단인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있는데 이 둘은 한 뿌리이며 신학적 바탕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성의 학교는 안양에 있는 성결대학교입니다. 기성과 예성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대한 입장차이로 분열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타 성결교회로는 나사렛성결회(아산,나사렛신학대학)가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신학적으로 감리교와 같이 웨슬레안입니다.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하면 1)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따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중시한 것입니다. 2) 장로교의 예정론과 달리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의 은총 3) 구원의 순서(대략, 선행은총-의인-성화-영화)에 따른 강조  4)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기대하시는 하나님 이해 등이 특징입니다.

  웨슬레의 성만찬 이해 :  상징설(감리교와 성결교, 구세군 등이 이에 따릅니다.)


  (1)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례전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표적(sign)과 인증(seal)으로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웨슬레는 성례전을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믿음이나 행위의 표적으로 보려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의 입장과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인 표현인 동시에 은혜로 용서받은 인증으로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를 견고케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WorksⅦ, 148 ; SermonsⅠ, 242)
  이 성만찬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시던 그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 찢겨지고 피를 흘려야 하는 대속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며 주신 교훈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님께서 당하신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성만찬은 그의 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 현재은혜(present grace)의 표적과 인증
  웨슬레는 성만찬은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나타내는 표적이면서 또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의미하는 모든 은혜를 이 성만찬에서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Letters Ⅰ, 118)]
  웨슬레는 유월절과 성만찬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애급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표적으로서의 어린 양의 살이 이제는 그리스도이신 어린양 예수의 피와 살을 통해서 구원의 표적과 인증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의 표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며 이를 확증케 하는 인증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웨슬레의 입장은 단순히 기념설을 말하는 쯔빙글리나, 한편 성만찬을 통하여 기계적으로 은혜를 받는다(ex opere operato)고 말하는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다릅니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만찬은 현재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회심케 하는 은혜", "성결케 하는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다른 말로 바꿔서, 성만찬에서의 떡과 잔은 구원에 관한 전체적인 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보느느 것입니다.

 

  (3) 천국의 보증과 인증
  웨슬레는 더 나아가 성만찬을 천국의 보증(a pledge of heaven)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즉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잔치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마라나타" 곧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웨슬레는 성만찬을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보았습니다.웨슬레에 의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표적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근거한 모든 은혜를 현재 여기에서 전달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렇게 해서 웨슬레는 성만찬이 단순한 "기념"이라는 해석을 반대합니다. 따라서 합당한 수찬자가 믿음으로 받을 때 그는 자기의 필요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성도의 교제의 인증
- 설명 생략 -
  정치 제도: 총회-지역총회-지방회-개 교회

 

   2) 감리교회http://kmc.sbr.net/  :

 

감리교회는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요한 웨슬레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올더스게잇이란 곳에서 회심을 체험하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동생과 몇몇의 동지들과 함께 Holy Club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성공회) 내에서의 교회 혁신 운동을 해 나갔으나 국교회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후 1740년 남26, 여48명이 론논 파운드리에서 모여 메도디스트 협회를 조직하였고 1784년 미국에 보낼 성직자 안수문제로 국교회와 결별하였습니다.
  감리교회는 1884년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한국에 선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리적, 신학적 특징은 위의 성결교회 부분(사중복음 강조를 제외)을 참고하십시오.
   감리교도 몇개의 교파가 있는데 기독교 대한 감리회(감리교신학대학), 예수교 대한 감리회, 기독교대한 자유감리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의 신학적입장은 같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제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계급의식이 강한 측면이 있어 상명하복의 관계가 개신교 안에서는 짙은 편입니다.
    정치제도 : 감독회장-연회감독-감리사-목사

 

   3) 장로교회 :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측 http://www.yejang.or.kr/, 개혁측 http://www.reformed.or.kr, 통합측 http://www.pck.or.kr/, 고신측 http://kpm.org/, 대신측, 고려 http://www.coramdeo.net, 재건 http://www.jaegun.or.kr/  등 이 대표적인 교파로 조사에 의하면 약 270여개의 파로 나눠져 있다합니다.)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 http://knp.or.kr/)가 있습니다.
    이들의 출발과 차이점 등은 99.11.19일자 국민일보 25면을 보시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글 후반부에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의 신학적 바탕은 16세기 제네바의 개혁자 죤 칼빈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란 것을 교단의 신조로 받아들입니다. 장로교회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주장하며 정치적으로는 의회정치를 채택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에게 있는 장로제도는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 영적임재설
   기념설을 주장한 쯔빙글리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어떠한 육체적인 임재도 거부하면서도 믿음으로 실제적인 임재를, 비록 영적이긴 하지만 받는다고 분명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뿐 아니라 비록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은 우리들에게 들어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퍼뜨리시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고, 장소적으로 제한을 받으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이 성물 가운데 육신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성찬에서 육신적 임재가 꼭 필요한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성령이 제한적 존재가 아니시므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을 한데 결합시키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실한 자들은 성령의 중재를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은 소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We must beware of being led into a kindred error by the terms, somewhat too extravagant, which ancient Christian writers have employed in extolling the dignity of the sacraments. We must not suppose that there is some latent virtue inherent in the sacraments, by which they, in themselves confer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upon us, in the same way in which wine is drunk out of a cup, since the only office divinely assigned them is to attest and ratify the benevolence of the Lord towards us; and they avail no farther than accompanied by the Holy Spirit to open our minds and hearts, and make us capable of receiving this
testimony, in which various distinguished graces are clearly manifested. For the sacraments, as we lately observed, (chap. 13 sec. 6; and 14 sec. 6, 7,) are to us what messengers of good news are to men, or earnests in ratifying pactions. They do not of themselves bestow any grace, but they announce and manifest it, and, like earnests and badges, give a ratification of the gifts which the Divine liberality has bestowed upon us.]
   정치제도 : 총회-노회-교회
   이들의 학교는 총신대학교(합동), 총회신학교(개혁), 장로회신학대학(통합), 고려신학대학(고신) 안양대학교(대신) 고려신학교(고려) 한신대학교(기장)등이 있습니다. 이들 대다수 교단의 분열 또한 신학적 차이보다는 정치적인 면 때문입니다. 물론 합동측은 ncc에 가입하지 않고 통합측은 ncc에 가입했다든지, 기독교장로회는 다른 교파보다 진보적이라든지 하는 차이들이 있습니다.

 

    4) 침례교회http://kcm.co.kr/kbfmb/  :

 

침례교는 카톨릭 다음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교파입니다.  침례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설립된 것은 1608년입니다. 암스텔담으로 쫓겨온 영국 분리교도들이 본래 영국교회의 목사였던 죤 스미스의 지휘아래 설립하였습니다. 침례교의 특징은 침례(온 몸을 물에 잠그는 세례)를 유일한 세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장로제도가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 안수집사, 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침례교회는  독립적, 자율적인 면을 중요시 하여 총회나, 연회 등을 두지 않고 '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침례교는 특별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몇가지 특징은 1) 개교회의 독립성 인정 2) 교회와 국가의 오나전 분리 3) 유아세례 반대 등입니다.
   침례교는 한국에서 일제시대에 동아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선교되다가 일제에 의해 교단이 폐쇄되었다가 해방후 재건되었습니다.

   5) 루터교회http://www.lck.or.kr :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톨릭에 반대하여 마틴 루터의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루터의 대소교리 문담(1529),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 슈말칼트 신앙개조(1580), 콘코드의 신조(1580)를 신조로 삼았습니다. 루터교는 이들 신조들 외에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안 신조를 고백합니다.
    교리적 특징은 1) 이신득의 강조 2) 성찬은 은혜의 방도가 된다(공재설(Consubstantiation):성찬 참여자는 떡과 포도주 안에서(in), 떡과 포도주와 함께(with), 떡과 포도주 아래서(under)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한다. 떡과 포도주의 물질요소 자체는 불변한 채 있지만, 성별의 기도를 마친 후에 여기에 참여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성찬 참여자에게 상징적으로 전한다.) 3) 세례에 의한 중생:세례는 성령께서 주시는 중생의 은사를 받게 하는 것 4)유아세례는 정당하며 합당하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에 부여된 것 6) 하나님의 은총에서 타락할 수 있지만 구원은 만민에게 보편적
    한국에서 루터 교회는 문서선교를 통해 확산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들어온 지원상 목사를 중심으로 컨콜디아사를 통해 문서선교를 하고 방송(루터란 아워)을 통해 선교했습니다.  한국에서의 루터교회는 그리 큰 교단은 아니지만 베델성서교육을 통해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학교는 용인에있는 루터신학대학입니다.
   오늘날 독일과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회중주의이며, 행정과 결의에 있어서는 대의정치를 추구합니다.

 

   6) 성공회http://anck.peacenet.or.kr/kindex.htm

   성공회는 아시다시피 영국에서 축발했습니다. 이 교회는 앵글리칸 처치, 성공회, 에피스코팔처치, 등으로도 불리웁니다.  1536년 로마감독의 교권을 폐지하고 1570년 교황 피오 5세가 영국왕 엘리자벳을 파문함으로써 로마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신앙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발생하였고 교회의 신학은 개혁파에 가깝지만 교회 및 예배의식 은 카톨릭에 가깝습니다. 조직은 주교, 신부, 부제라고 일컷는 종신직 신품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교회의 정점이고  국회가 교회법을 제정합니다. 그렇지만 켄터베리 대교구, 요크 대교구, 웨일스 대교구 로 나눠져 있으며 한국 성공회는 켄터베리 대교구에 속해 있습니다.
    영국교회의 교리의 표준은 39신앙개조와 기도문입니다.
    한국에 성공회가 전래 된 것은 1890년 코프감독에 의해서였습니다.
    학교는 역곡과 서울 사이에 있는 성공회대학입니다.
 

   7) 구세군http://soback.kornet21.net/~sally/


   구세군은 1858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뿌드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구세군(salvation army)이란 명칭은 1878.5에 정식으로 명명되었고 1880년 처음 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구세군의 특징은 사회봉사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균등의 인정하에 군대 조직을 차용합니다. 세계의 모든 구세군은 한 대장 아래 통솔을 받습니다. 구세군에서는 목사는 사관 평신도는 병사라고 지칭합니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8 평동에서 영국인 호가드 정령에 의해 옥외집회를 한데서 출발합니다. 구세군의 사회사업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남녀평등을 중요시 여겨 사관학교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입교토록하고 있습니다.

   8) 순복음, 하나님의교회(성회)http://www.ag.or.kr 등의 오순절 계열 : 이 계열의 교회들은 성령운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오순절파 라고 부르기도합니다. 신학적 바탕은 뚜렷하게 어느 것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대략 웨슬레안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한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이란 것을 중시합니다.  학교는 순신대학교(순복음), 한영신학대학 등이 있습니다.
 

   몇개의 참고서적을 소개합니다.

   세계 기독교회사 - 대한기독교서회
   한국 기독교회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종파의 유래 - 대한기독교서회
   한국교회교단형성사 1,2 - (주) 임마누엘
   청교도신앙 -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정신 - 기독교문서선교회
   한국성결교회사 - 기성출판부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헌법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문답해설 - 한국복음문서연구회출판부. 1974
   한국감리교회사 - 기감 교육국
   감리교의 유래 - 생명의말씀사
   교리와 장정 - 기독교대한감리회
   죤 웨슬리의 신학 - 전망사
   요한 웨슬레의 신학 - 대한 기독교출판사  etc.

 


부록 : 99.11.19일자 국민일보 25면(믿음의 유산 - 분열과 극복, 이승한) :장로교회들의 배경과 분열원인 등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지 1백14년,우리나라는 기독교 복음에 의해 엄청난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다.신교육으로 가치관과 인성이 변화됐으며 유교신분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설 수 있었다.유능한 인재들이 교회를 통해 배출되고,그들은 유학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에 공헌했다.

 교회는 또한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독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교회는 그래도 사회의 소외계층과 억압된 자의 대변자 노릇을 했으며,정의의 칼날을 세워 공동체의 평화와 평등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몸인 교회가 분열됨으로써 교파주의와 이기주의,물신주의,성공주의,성장제일주의 등 세속화의 부정적인 길을 열어 놓은 것은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분열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90년대 들어와 급속히 확산됐으나 아직은 결실이 미미하며 21세기 한국교회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게됐다.
 ◆분열=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억압으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크게 네 갈래의 입장으로 갈라진다.하나는 교회의 정통이 일제의 강요에 따라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 편입됨으로써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운동이다.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에 갇혔던 인사들이 해방후 출옥,교회재건에 나선다.바로 재건파교회이다.이들은 극우파로 기존교회를 거부하고 46년부터 별도의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서는 김린희전도사(선천),남한에서는 최덕지전도사가 중심인물이었다.재건교회는 곡간등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해 곡간교회라고도 불렸으며 평신도들이 많이 참여해 주상수 강상은 염애나 등이 평신도의 대표적인 인믈로 부상했다.
  다른 하나는 기성교회의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었다.당시 80%의 교회들이 바로 이 운동에 참여한다.또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지만 하나로 통합되었던 한국교회를 교파로 분열시키지 말고 그대로 지속하자는 운동이었다.그러나 일제하의 교회에 대한 윤리적 신앙적 자책과 회개의 심도가 있느냐는 비판이 일면서 감리교가 회의에서 퇴장하면서 무산됐다.

   마지막으로는 기성교회에 들어가 회개를 촉구하고 개혁을 해보자고 했던 중도우파의 운동이다.이 가운데 혁신복구파로는 이기선목사가 북한에서 활동했고 남한에서는 한상동 송양원 주남선목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한 인사들은 고려신학교를 만들어 경남노회를 통해 회개를  촉구했다.

   이처럼 네 갈래로 대립되었던 한국교회의 입장은 결국 교단의 분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기성교회의 질서에 들어가 회개를 촉구했던 장로교의 혁신복구파들은 수에서 밀려 추방당하는 형태로 1948년 장로교단에서 분열됐다.이들이 현재 예장고신과 예장고려교단이다.

   1940년 조선사람들에 의한 신학교육을 표방하며 승동교회에서 시작된 조선신학교는 1948년 김재준의 성서해석학 등 신학논쟁으로 갈등을 겪다가 1954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총회에서 김재준 송창근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정죄를 당함으로 교단에서 탈퇴했다.이들은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의 김재준을 중심으로 교단을 창립했다.이 교단이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이다.
  신사참배의 회개를 촉구하던 인사들을 축출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자들을 쫓아낸 장로교단은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등 에큐메니컬 노선의 차이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전중앙교회에서 치러진 44회 총회에서 갈라선다.WCC가입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했다.이 총회가 장로회신학대 출신의 인사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다.WCC가입을 반대하고 복음동지회(NAE)운동에 찬성하는 인사들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구성했다.이 총회가 총신대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다.

 50년대 세계 냉전체제의 구도속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공산주의의 종주국 러시아정교회가 가입되어 있는 WCC의 가입을 둘러싼 의견차이로 분열되어 결국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냉전체제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신학적 차이로,또한 이념적 차이에 따라 3개교단으로 분열됐던 장로교는 1979년 교권과 지역갈등으로 예장합동교단에서 정규오목사를 중심으로 한 호남권 인사들이 탈퇴,개혁교단을 설립하면서 핵분열을 일으켜 한국교회 분열의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만다.

 교단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활발해지면서 한국장로교협의회가 결성됐으며 이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로 개칭되어 장로교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또 13개교단의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98년 결성됐으며,평신도들도 한국장로회총연합회를 만들어 교회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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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미국 북장로교,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에 이어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 선교에 동참키로 결의하고, 18989월 푸트(W R Foote, 富斗一) 목사 부부, 그리어손(Dr. Robert G Grierson, 具禮孫) 의사 부부, 그리고 맥래(D McRae, 馬具禮) 목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고 후에는 원산 함흥 용정 등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세 분야에서 활동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925년 감리교, 회중교회와 연합해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를 구성했는데, 당시 주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중 한 사람인 루터 영(Luther L Young, 榮在馨)을 제외하고는 다 이 연합에 찬성해 1925년 이후에는 캐나나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비록 장로교회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캐나다인으 로 내한한 첫 선교사는 게일(James S Gale, 1863-1937) 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그는 동 대학 기 독교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으로 188812월 내한했다. 게일은 서울, 황해도 송천(소래), 부산에서 활동했고 후에는 북장로교로 이적해 원산, 서울 등지에서 활동했다.

 

게일은 한국 역사와 문화, 풍습 등 한국학 연구와 저술로 큰 업적을 남겼다. 게일의 뒤를 이어 18909월 내한한 의사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永)는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의사로, 전도자로,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07년 전후 한국 교회 부흥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89312월에는 캐나다인 매켄지(William J Mckenzie)가 독립선교사로 내한,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1895623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동기가 됐다.

 

2.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함께 한국 선교를 주도한 교파는 감리교회다. 미국 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북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5년 입국한 아펜젤러로 시작되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프랭클린 마샬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8522일 북 감리교 파울러(Fowler) 감독에게 안수를 받았다. 이튿날 한국으로 향해 227일 요코하마를 거쳐 188545일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했다. 그해 53일에는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내외와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itch Scranton, 1832-1929)이 입국했다.

 

서울 정동에 정착한 아펜젤러는 영어학교를 시작으로 한국 선교에 나섰고,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성경 번역, 신학교육, 문서 활동 등 다방면에서 한국 교회 형성에 기여했다. 1887년에는 존스(George Heber Jones)와 올링거(Franklin Ohlinger), 1889년에는 맥길(W B McGill)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했다.

 

윤치호(1865-1945)

 

남 감리회는 1896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 는데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1888년 미국 밴더빌 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 근대인물 중 신학을 공부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는 남 감리회에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그 결과 18951018일 중국 주재 선교사 헨드릭스(E. A.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李德)가 내한해 선교 가능성을 점검한 바 있다.

 

이듬해인 18965월 리드가 한국 선교사로 내한함으로써 남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1890년 내한했던 캐나다인 로버트 하디는 1898년에는 남 감리회로 이적해 목사 안수를 받고 의료활동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

 

3. 침례교, 성결교, 구세군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도 1890년에는 영국성공회가 콜페(C. J. Corfe, 高堯翰) 감독을 파송해 한국 선교에 동참했고, 미국 침례교 선교 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폴링(E. C. Pauling), 가들라인(A. Gadelinre) 등을 한국에 파송했는데, 재정난으로 1900년 사역을 중단했다. 이들의 사업은 독립선교사였던 캐나다인 펜윅(Fenwick)에게 이양되고 후일 침례교회의 모체가 됐다.

 

성결교는 1907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감리교적 배경에서 생성된 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인데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에 의해 창립됐다. 이들은 190511월 일본 도쿄에 성서학원을 설립했는데 한국인 김상준과 정 빈이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 종로 염곡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 됐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호가드(R. Hoggard, 許加斗)였다. 그는 1908101일 입국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4. 한국 기독교 여성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1884년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은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한국 파견 첫 여선교 사로 임명됐다. 스크랜턴은 52세라는 나이 때문에 한국행을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그를 움직였다. 스크랜튼은 의료 사업을 담당할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된 그의 외아들 윌리엄 스 크랜턴(William B. Scranton)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1885620일 서울에 도착한 스크랜턴은 한 달 먼저 서울에 자리 잡은 아들의 집에 거하면서 선교사업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양인들을 불신하고, 서양을 두려워하던 한국인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녀자가 있는 집에 가까이 가기라도 하면 그녀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 뒤로 숨어 버렸고 어린이들은 울부짖으며 달아났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인들이 한국 아이를 살찌워 피를 빨아 먹는다는 등의 괴 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1886년 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지만 학생은 모으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는 여자는 교육할 필요가 없다.”라는 인식이 확고했고, 여성들의 외출은 밤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졌다.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 전인 5, 스크랜턴은 아들 집에서 첫 학생을 만났다. “영어를 배워 황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관료의 소실(小室, )이었다. 그러나 첫 학생은 병으로 석 달 만에 학업을 접는다.

1886531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6,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찾아왔다. 가난한 여인이 딸을 부양할 수 없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겁을 주자 곧 여인은 아이를 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한 후에야 아이를 두 번째 입학생이자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permanent pupil)으로 삼을 수 있었다.

 

1886년 여름 서울에 만연한 콜레라로 서대문 근처에 버려진 별단이라는 아이를 아들 의사가 치료했다. 별단이는 두 번째 영구학생이 됐다. 네 번째로 이화학당을 찾은 학생은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 에스터(김점동)였다. 하나 둘 학생들이 늘어,

한국 최초 여의사 김점동(왼쪽)과 이화학당 학생들(1887)

 

1887년에는 학생이 11명이 되었다. 18862월 고종 23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는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인정됐다는 의미다.

 

스크랜턴은 교육이념을 가부장적 굴레 속에 고통 받는 여성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진정한 한국인으로 당당하게 서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여성교육 목적은 파이크(L. G. Paik)의 저서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 in Korea’(1929)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한국 소녀들이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이나 의복, 환경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만족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스크랜턴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의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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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하나님의 뜻-일본 제국주의와 식민통치에 대한 성경적 입장

  

뉴라이트 계열의 근본주의 개신교들 가운데서 일본식민사관을 가지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이 근대화하는데 일조했다고 하거나,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성경을 보는 신학의 부재에서 오는 기회주의자적 유치한 발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관은 반개신교, 반기독교 정서를 가속화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조선이 제사를 드리고 미신을 믿는 등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도를 믿고 신사에서 귀신에게 제사하며, 천황을 숭배한 일본은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을 받아서 세계 강국이 되어 제국주의를 이루었단 말인가?   비록 미국에게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다시 복구되어 세계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단 말인가?


이런 식의 사고를 하는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그들의 수준이 얼마나 저급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교회에는 비전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목회철학은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자!  죽으면 내세천당이다>  일 수 밖에 없기에 교회는 더욱 세속화와 타락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1870년대 이후로 자본주의는 자본의 집적 ·집중에 따라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단계에서 거대한 소수의 독점기업이 지배적인 힘을 가지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에 따라 세계 열강들은 앞다투어 팽창주의와 식민주의를 내걸고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자본과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국의 시장을 확장하였다.

 

제국주의를 표방한 세계 열강들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자원을 약탈하고 그들의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서 철도, 전기, 도로, 통신과 같은 사회 기간망을 확충하고 금융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고자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것은 식민지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오직 수탈과 침략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럼 이러한 제국주의가 하나님의 뜻인가?  피식민지를 무력으로 지배하면서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철도와 전기와 통신, 금융회사, 공장들을 만들고 피식민지인들에게 열강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며 교육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피식민지 국가들이 근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제국주의와 식민통치가 휩쓸고 간 피식민지는 종교적으로, 이념적으로 국민과 국가가 분열되는 큰 상처를 지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분열은 지금까지 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어서 전쟁과 내란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당장 중동의 시리아 내전을 보라.   과거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식민지 분할 통치하면서 종파간, 부족간 분열정책을 실시하였고, 사분오열된 그러한 후유증은 지금까지 중동의 불안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식민통치가 휩쓸고 간 아프리카, 베트남, 중국, 대한민국을 보라.  분열과 전쟁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하였다.   이렇게 국가가 분열되어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근본적인 원흉은 열강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힘과 권력, 정복과 착취, 탐욕과 강포, 전쟁과 살인을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사탄의 근본적 속성과 동일한 특성을 갖는다.    사탄은 탐욕의 화신이며, 죄악이 가득해 불공정한 거래와 무역을 일삼으며 강포를 저질어 범죄하여, 탐욕의 주인이 되었다.


사탄의 화신 제국주의와 식민통치는 불공정한 거래를 일삼고,  사람에게 살인과 강포를 저지르며, 돈과 이익을 위해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모든 자본주의 정신구조와 시스템이다.   불합리한 甲 乙관계, 착취와 비인간화, 돈으로 인간의 계급을 나누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온갖 강포를 저지르는 합법적인 도둑들과 탐욕의 정신에 함몰된 사회구조와 시스템은 사탄의 영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사탄적 속성은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을 수 없다.

 

겔 28: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겔 28: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문제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사탄적 속성을 경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개신교나 카톨릭을 신봉하는 국가들이 국가적 폭력을 사용하여 피식민지에 선교하였다. 


<오!  힘에 의한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로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방법은 비성경적인 방법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힘과 권력으로 피식민지를 정복하여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선교방법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들이 아니다.


정말 안타갑게도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은 순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전함으로서 물질문명과 맘몬숭배, 자연파괴와 경쟁, 착취와 비인간화를 유발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순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사탄의 통치를 전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또한 독일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유태인을 대학살 할 때  독일 기독교가 그 정당성과 신학적 원리를 제공하고(악의 처단) 그에 부역하고 동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가 해온 비참한 참상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편승한 결과 기독교는 급속한 세속화 과정을 겪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독교의 신앙과 가치관은 무력화되었고 그 대신에 물질문명과 과학지상주의가 그 공간을 채워 나갔다.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힘과 권력에 의지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해체되어 참 생명을 잃어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에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다.  지금 종교개혁의 뿌리였던 유럽을 보라.   누가 기독교를 참 생명의 종교로 생각하는가?  이것은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편승한 참혹한 결과물이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홍택기, 그 오른쪽은 김길창 목사

출처-<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신사참배 강요에서 나타난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성


조선을 지배한 일제는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고조되고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여 위기가 닥쳐오자 그 위기를 벗어나고자 의회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군국주의체제로 전환하여 중국과 필리핀, 동남아 지역으로 침략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였으며,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려 경제적 수탈과 인력수탈을 극대화하였다.

 

그 결과는 내선일체, 전시동원체제, 강제징집, 강제동원, 창씨개명, 전쟁 위안부 동원, 신사참배, 친일과 반일의 국민분열 등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의 신도는 성경적 입장에서 보면 다신교적인 정령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영웅숭배, 귀신숭배, 천황숭배를 포괄하는 사악한 우상종교이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조선의 장로교, 카톨릭,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굴복하여 동참하고 만다. 

 

하지만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이들이 있었으니,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다.  이런 고귀한 분들은 안으로는 분란을 조장하는 친일 기독교세력과 밖으로는 일제의 군국주의의 거대한 권력과 싸워야 했고, 많은 분들이 옥고를 치루며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기독교인들이 언론매체에 기고와 각종 시국 강연회를 만들어 강제부역과 전시동원, 내선일체를 옹호하는 행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결국 친일과 반일의 기독교로 양분된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친일 기독교세력은 신사참배는


1)정치적인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2)우상숭배였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며, 생존의 문제에 대해 각자의 양심과 믿음이 분량에 맡겨야 한다 라고 변명하였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건데 신사참배는 분명한 우상숭배이고, 배도이며 배교인 것이다.

 

어짜피 모든 배도의 시작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되고 생존의 문제에 고통을 주며 신앙적인 문제로 귀결이 난다.   그러면 이러한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남산의 조선신궁(1918착공-1925완성)


불교의 친일행적도 비슷하다.  일제는 사찰에 임야 소유권을 양도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조선의 총독부는 조선의 승려들을 식민지 정책에 적극 이용했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발동해 31본산 제도를 만들고 모두 사찰의 주지임명권과 재산의 처리, 사찰의 병합, 사찰의 신설등의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따라 31본산 주지들에서 말사 주지들까지 불교 언론계와 학계 등이 전방위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승려들은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군수품과 국방헌금등을 헌납했다.   1940년의 창씨개명에도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일본 임제종과 조계종의 합병을 도모해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는 이회광은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등 조선불교의 매국을 선동했다.   일제시대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처음으로 확립한 권상로는 각종 시국강연을 다니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국가적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난의 대표적인 예는 통일왕국을 이루던 이스라엘이 2개의 국가로 분단되어지고,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각각 패망한 사건이다. 


국가가 패망한다는 것은 일반론적 입장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인 다양한 원인들로 해석할 수 있지만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의 해석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 강포, 압제, 착취, 불의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신28장에는 언약적 복과 언약적 저주가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언약적 저주의 결과물인 것이다.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28: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신 28: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신 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신 28: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분단되거나 패망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 왕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라.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셨는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으며 더욱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았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거대 제국이었다.  바벨론은 왕을 숭배하고 다신교를 믿는 우상숭배의 나라였지만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악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악의 도구로써의 사용기간이 다 끝난 후에는 용도폐기되어 또 다른 거대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럼 남유다의 입장에서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가?  남유다가 생각하기를 <약소국인 우리나라를 강대국인 바벨론이 침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수 있을 것이야> 라고 했을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신명기 28장의 언약적 저주였던 것이다.  


신 29: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 29: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신 29: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신 29: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신 29: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과연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왜 조선은 일제의 침략을 받아야 했는가?

 

당시의 조선을 구약의 이스라엘과 비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고난은 불신앙과 불의와 강포외 죄악으로 발생하였지만, 조선이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이유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악한 가계저주론자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제사나 미신등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에 조선이 벌을 받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패망을 구약 이스라엘의 패망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선민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언약적 복과 언약적 저주를 맺는 관계도 아니었다. 


이런 식의 역사관을 가진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신앙과 믿음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세계를 보는 역사적 관점이 부족한 무지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그런식으로 가정한다면 신도를 믿는 귀신의 왕국 일본은 어떻게 제국주의화를 할 수 있었을까?   천황을 숭배하고 귀신을 믿는 일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 강대국이 되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귀신을 믿는 우상숭배의 왕국 일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러시아와 청나라를 물리치고 필리핀과 베트남과 동남아의 수많은 섬들을 정복하였는가?   귀신의 나라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원자폭탄 2개를 얻어 맞고 패망한 이후 지금까지 멸망당하지 않고 강대국으로써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일까?  아직까지 우상숭배의 나라 일본에게 왜 원천기술과 첨단 전자부품과 기계장비를 수입하여 쓰고 의존하고 있는가?

  

당시의 조선은 해외선교사들이 조금씩 들어와 조선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갖 유아기와 같은 시대였다.  이로 말미암아 각종 미신과 가난과 우매한 관습 등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근대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을 쌓고 있었다.  


해외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조선의 교회는 점차 성장하였고, 국제적인 기독교 네크워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외교적으로는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하여 기술과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군사력이 약하여,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 암투에 약소국으로 희생을 당하여야만 했다. 


당시의 조선은 부패한 세도정치를 겪으면서 국력을 강화시킬 원동력을 상실하였다.   세도정치하에 과거제 비리와 매관매직은 비일비재하였다.  


부패한 지방관리들은 조세제도를 불법적으로 운영하였다. 세도가문은 조선 후기 새롭게 성장하였던 상공인과 부농층마저 수탈하려고 애를 썼고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여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리고 삼정(토지세,군포,환곡)을 제멋대로 이용하여 평민들의 골수와 피까지 빨아먹었다. 

 

그 결과 잉여생산물이 나올 수 없었고 상업발달이 되지 않아 경제발전을 할 수없었다.  때문에 민란이나 혁명이 일어났지만 결국 민주주의 의식이 싹틀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책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타락한 위정자들로 인해서 국민들은 미신과 무기력증의 나락으로 더욱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세도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세계의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세계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제국주의와 식민지화, 침략과 전쟁으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조선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처신했고, 홀로 독야청청하였던 것이다.


뒤늦게 고종은 강한 조선을 꿈꾸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고종은 근대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를 개혁하고 관립학교를 설립 하는 등 백성들의 의식계몽에 힘을 쏟았다. 


실제로 고종은 해외 의병활동에 군자금을 보태고 끊임없이 세계열강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또한 서구식 제복과 총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고, 전신선·전기 가설 및 철도 부설 등 근대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미 시기는 너무 늦었다.  


러,일,청의 군대가 들어와 주둔하면서 대한제국은 희생양이 되어 각국의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서구 열강은 서로서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 건설을 경쟁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내민 도움 요청을 묵살하였다.  .

<대한제국의 13년>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기독교 국가요 하나님의 축복받는 세계 제일의 나라로 선망하고 있지만 그 미국이 과거에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하는데 동조하였다는 것(가쓰라-태프트밀약)은 알고 있는가?     

미국이 일제와 은밀한 거래를 하고 서로서로 제국주의를 용인해주면서 세계의 약소국을 침략하며 식민지화하 하는 것을 동조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만약 미국의 허락이 없었다면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 행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제침략과 식민지화에 대한 성경적 관점

 

구약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난과 조선의 국가적 고난은 성격과 의미에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선상에서 조선의 고난을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조선에 대한 일제침략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국주의와 식민통치, 침략과 정복, 약탈과 강포, 전쟁과 살인, 비인간화와 억압과는 전혀 뜻을 같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일제의 지배를 통해 조선이 변화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더욱 확산되고, 많은 수의 교회와 학교들이 지어져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의식과 정신이 계몽되어 민주주의 의식이 싹을 틔우며,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도록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의 능력으로 조선의 모든 국민의 의식이 변화를 받아 모든 미신과 패배의식과 무기력증에서 해방되어 비전을 가지고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일제의 침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러한 국가적 고난속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일제의 침략에 순응하고, 운명론적 자포자기에 빠져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하면서 교회와 국민이 친일과 반일로 분열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이 하나로 단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찾으며 현실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약소국의 설움과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숙명론과 패배의식과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열려있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일제로부터 해방을 앞당기고 남북 분단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복음의 능력이 조선을 지배하고 끊임없이 저항하였다면 사회주의가 발을 붙여놓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해체시키고 어용 기독교를 만든 일제의 지배에 맥없이 굴복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일본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많은 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추종한 이유가 약소국에 대한 관심을 가진 유일한 강대국이 러시아 혁명정부였고 또한 반反일에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사회주의와 교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서구 열강과 미국이 조선의 고통을 도와주고 독립운동에 협력적이었다면 과연 조선이 좌파 우파로 갈라졌을까?  이러한 일제침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가 앞당겨 질 수 있지 않았을까?

 
결론

 

이제 한국의 개신교는 바람직한 역사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거나,  일제 때문에 한국이 근대화하는데 유리했다고 보는 시각을 고쳐야 한다.   


운명론, 숙명론, 자포자기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실로 자기한계를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한계를 극복하며 믿음을 가지고 돌파구를 찾아가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다.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한 기독교는 철저한 회개와 반성위에 모든 친일사관을 뜯어고쳐야 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옥고를 치루고 순교한 이들 앞에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굴복한 자들은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배도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친일 사관을 갖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가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굴복한 부끄러운 기초위에 있는가 철저히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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