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청일전쟁 이후 한국교회 들불처럼 성장

 

외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전통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受容)은 아아(亞阿)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경우였다. 기포드(Gifford)189691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들판을 태워가는 들불(wildfire)’에 비유했다. 로이 쉬리어(Shearer) 또한 지역적 편차가 있었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성장은 요원지화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것은 서양 선교사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IMC)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교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고투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신자 증가율은 미미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 유가적(儒家的) 전통문화와의 갈등, 정치적 정황이 복음전도의 장애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도사라고 불린 노춘경(盧春京)의 세례(1886711) 이후 수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86년 말, 수세자는 전국적으로 9명에 불과했으나 다음 해에는 25명으로 불어났다. 1888년에는 65, 1889년에는 100명에 달했다. 1890년 당시 11명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해의 수세자는 장로교 119, 감리교 36명 등 15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95년부터 수적 성장이 현저해졌다. 1894년까지만 해도 신자는 불과 500명 전후로 추정되지만 1895년에는 746명으로 성장했다. 1895년에서 1896년 사이에는 2500여명으로, 18967년에는 3300여명으로 증가했다. 1900년에는 약 12000명으로, 1905년에는 26057, 1920년에는 92510, 1930년에는 125479명으로 성장했다. 민경배 교수는 1930년대 한국교회 신자가 38만명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물론 통계자료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아아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특별한 경우라는 점이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선교사의 입국 이후 첫 10년간의 성장은 미미했으나 1895년 이후 급속한 성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세가 그 이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낙준은 특히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성장이 뚜렷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 커다란 숙제는 왜 이때 갑작스런 성장이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다.

 

청일전쟁, 그리고 기독교 수용

 

1895년 이후라는 말은 청일전쟁(18941895) 이후라는 의미인데, 이 전쟁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 변화에 유효한 의미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1894725일에는 일본군이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된 청일전쟁의 전장(戰場)은 우리나라였고, 우리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싸움이었다. 이때 조야(朝野)는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두 달이 못돼 일본이 승기를 잡았다. 816일 평양전투에서, 다음 날은 압록강 입구에서 청의 육군과 해군을 격파했다.

 

청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곧 그 원인은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인식은 당시로서는 중대한 발견이었다. 조선의 조야는 이제 세계질서, 그리고 극동의 새로운 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점증하는 열강들의 야욕을 희미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민족적 자강(自强)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서구와 손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시로서는 기독교라는 통로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서양기술에 대한 인식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론은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코리안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은 고난과 불안의 와중에서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 미미한 서양종교로만 이해되던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었고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신자 수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문화의 도관(導管)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신자의 급증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 자강의식의 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호주의 역사가 케네드 웰즈(K M Wells)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이라고 불렀다.

 

적어도 1895년 이후 1910년대의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적 자강을 이루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또한 이런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1895108, 국모로 일컫던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은 단순히 한 여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 변란을 시도한 사변이었다. 일본의 조선침탈 야욕을 선명하게 노출한 이 사건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였다. 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은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을 노출하였고, 고종은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 집단 스스로 충군애국의 종교로 민족의 과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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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의 준비(1832 - 1884)

 

상업과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 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스리 형제의 조지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도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귀츨라프, 토마스, 그리고 윌리엄슨의 한국선교의 준비 역시 그와 맥을 같이한다.

1832년 7월 통역인, 의사 및 선교를 위해 로드암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시에 정박한 귀츠라프는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따라서 그의 입국은 비록 직접적인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선교를 목적으로 한 순수한 입국이었다. 또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와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 모두 한국개신교 선교의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구과의 개항의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줄기차게 지기되었다. 문호개방은 단순히 조선이 외국과 수교를 시작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외국과의 개항 문제를 두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열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선교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 확대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한국선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토양이 조성되었고, 따라서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미의 해외선교운동, 존 로스와 맥킨타이아, 그리고 의주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주에서의 복음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일본에서의 선교 준비는 한국개신교 선교의 장을 여는 직간접적인 전기가 되었고, 국내선교를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주변국에서는 한국선교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문호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후 정치, 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하고 3년 후인 1883년에는 제물포항을 개항하였고, 이들 항구를 통해 자행되는 일본 경제의 국내 침투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독자적인 무역으로 인한 국내 시장의 잠식,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탈, 일본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국내 화폐의 통화장애, 점점 더 강화되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에 대해 더 이상 좌시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차제에 열국과의 과감한 개항을 통해 그들이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서가 일부 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고 있었다. 개항을 반대하던 이들도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이 강화되자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한국선교는 개항, 특히 조미수호조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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