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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은 우리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집필자 서문강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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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부활주일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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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말씀]사망의 양면(장례) 

 

 

          

 사망의 양면(장례)

  눅 16:27-31

          

          부자와 나사로가 죽은후에 당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택한 백성의

     축복은 이루 형용할 길이 없다. 성도를 구별하여 택해 세웠고 또 택한 백성

     은 언제나 간섭하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여 주시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나간다.  성도는 세상을 떠날 때 웃음으로 세상을

     이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소망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1. 불신자가 보는 사망

          ① 내세를 모르기 때문에 공포가 쌓인다.

          ② 누구든지 사망을 싫어한다. 죄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다.

          ③ 슬퍼한다. 믿지않은 책임으로 처벌이 있기 때문이다.

           

          2. 신자의 입장에서 보는 사망

          ① 죽음은 사는 길이다.

          불신자는 울고오고 울고가지만 성도는 기쁨으로 간다.

          ② 안식세세로 들어가는 길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지만 이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안식세게로 들어간

     다.   ③ 죽음은 부활의 길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사는 축복이 있으

           니 웃음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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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나같은 사람도 부활을 전하는데요

 

 

 

나같은 사람도 부활을 전하는데요

마가복음16;9-11


단체로 삭발한 교회

미국 미주리(Missour)주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에,

그날따라 많은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마다 하나같이 삭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은 50여 명 정도가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삭발을 요청하는 손님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상한 광신도들이 아니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골교회에 사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성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여중생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친 소녀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몇몇 성도님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소녀는 항암치료 중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서 외출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성도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삭발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이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지역 방송국에 연락했습니다.

이 여중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드디어 부활주일날, 엄마는 자기 딸을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교회 문을 연 순간, 모든 성도들의 빡빡머리를 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 상황을 중계하던 방송국 기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이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다.”

그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 금요일 오후 3시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후5시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빈 바위무덤에 장례를 치르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일등공신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병사들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할 수 없도록 바위무덤에 커다란 돌로 닫아놓고 병사들을 시켜서 지키도록 한다.

아무리 커다란 돌로 무덤 문을 닫고,

병사들이 겹겹이 무덤 주변을 지킨다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길은 없다.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다.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일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캄캄한 밤 시간을 지나고 이른 새벽시간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홀연히 다시 살아나신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부활하신 시간에는 유월절을 지나고 무교절 절기 기간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아침 번제와 초실절이라고 부르는 맥추절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물의 제사를 드리고 있고,

성전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당하게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자가 누가 있을까?

사탄, 마귀가 가로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강한 권세, 공중권세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권세는 없다.

대제사장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두 눈 부릅뜨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로마제국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전 세계를 로마로’라고 하면서 전 세계를 정복한 권세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없다.

무덤이라고, 시신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무덤이라 해도, 이미 죽은 시신이라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어떤 권세도, 어떤 세력들도, 어떤 환경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으니까 부활하시고,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 부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믿거나 믿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나타나신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서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셨다고 전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① 나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고 제자들이 믿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들 남자들이고, 나는 연약한 여자 아닌가?

그것도 일곱 귀신에 걸려서 제대로 사람이라고 인정도 받지 못하던 여인이 아니던가?

지금이야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주셔서 귀신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귀한 딸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하게 살지만 내 전력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② 여자인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가장 먼저 만나주셨다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수치를 안기는 결과가 되지 않나?

유대인들은 명예와 수치를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여자인 내가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자들에게 명예롭지 않고 수치를 안겨다 주는 꼴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명예롭게 살아야 앞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지 않나?

그러니 내가 여자인 내가, 그것도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경력이 있는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③ 남녀구별이 엄연하던 시대 아닌가?

여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나같은 여자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다고 증언하면 누가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서 자신이 부활하였노라고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시는 예수님.

빨리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

사탄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였다고 증언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낙심하고 좌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서

“왜 믿음이 없느냐?”고 하시면서 책망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것은 다 보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하고 염려할 때 예수님은 책망하시고 꾸짖으신다.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다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세워나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11명의 제자들, 70명의 제자들,

120명의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전할 때

이들은 마리아가 전하는 부활의 소식을 믿을 수 없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시고 책망하고 꾸짖으면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사도들로 세워 가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축복의 여인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최초의 여인이 된다.

?

하나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여인이 되어진다.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인이 되어진다.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더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고 성숙해지면서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로 교회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로 세워진다.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가 되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목격하는 여인이 되어진다.

수치의 상징이라는 여인이라고, 일곱 귀신에 걸렸던 여인이라는 과거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인이 되어지고,

교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인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위하여 훌륭하게 세움을 받는 여인이 되어진다.

초대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로서 강한 리더쉽을 가지고 교회의 여성들을 잘 이끌면서

사도들을 도와서 예루살렘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는 축복을 받는다,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핍박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서

흔들리는 약한 성도들을 이끌고 믿음을 세워가는 일꾼으로 세워진다.

*** 우리가 진정으로 전해야 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종교지도자들, 교주들은 한결같이 다 죽었다.

죽지 않았거나 다시 살아난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스스로 태양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벨론의 이방종교를 만들어낸 니므롯도 죽었고,

달신이라고 주장하던 세미라미스도 죽었고,

별신이라고 하는 담무스도 죽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죽었다.

유교의 공자도 죽었다.

힌두교, 이슬람교의 마호멧도 죽었다.

천주교의 교황들도, 추기경들도 죽었다.

통일교의 문선명이도 죽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안산홍이도 죽었다.

이제 멀지 않아서 신천지의 이만희도 죽을 것이다.

스스로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장길자 여인도 죽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김일성이도, 김정일이도 죽었다.

그렇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 기독교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일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500여명의 무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자살하여 죽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선별하는 조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베드로는 선언한다.

 

행1:22에서 베드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고 하시면서 맛디아를 뽑아서 12명의 사도로 세우게 된다.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인류 최악의 사기사건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500여명의 무리들의 두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식사도 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단 몇 사람밖에 없다면

그들을 매수하여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얼마든지 거짓말했다고 하면서 덮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적어도 500여명의 무리들이 보았다는데,

어떻게 500여명의 눈을 가릴 수 있단 말인가?

500여명의 무리들 중에서 120여명의 무리들이 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10일 동안 전심으로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어진다.

믿음의 표적이 나타나게 된다.

믿음의 표적을 행하는 주인공들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교회와 구령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지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숨 걸고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시작이자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축복의 시작이자 축복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시작이자 믿음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시작이자 생명의 완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시너지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은혜의 최고봉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고

나눌 수 있는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통로, 축복의 근원이 되어지는 사람이다.

와?우리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입으로,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전하고 또 전하고 또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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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의 예배는 기독론적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 서 계시며,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인간은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응답한다.

 

즉, 예배란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성도의 인격적이며 순종적인 믿음의 반응이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예배는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이다. 물론, 이런 교제와 인격적 관계는 예배자의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예배의 중심 행위라 할 수 있는 '말씀'과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지난날 행하셨던 공생애 사역 및 십자가와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비(고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참여는 단순히 지적인 수긍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경험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외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보다는 내적인 요소를 강조하셨고(요4:24), 특히 십자가 희생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모든 희생제사를 마감, 완성하셨다(히10:12-18).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희생제물을 드리는 대신 대속 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감사, 찬송하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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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전도란?

 


전도의 정의:


21세기를 사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갖고있는 가장 잘못된 개념중 하나가 전도일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전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열명중 아홉명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전도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은 "전도"라는 단어를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라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성서적 뜻은 무엇인가?
"전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선포하다'는 뜻이다.
전도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란 말이다.


선포의 내용:


그렇다면 무엇을 선포하는게 전도인가?
"전도"라는 단어는 헬라어 성경 60구절 속에서 28개의 다른 형태로 61번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의 쓰임새를 분석하여 선포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선포"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12가지의 내용으로 구체화된다:


(1) 회개의 침례,
(2) 예수님의 심판,
(3) 예수님의 성육신,
(4) 예수님의 이름,
(5)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
(6) 예수님의 성자되심,
(7) 예수님의 복음,
(8) 예수님의 나라,
(9) 예수님의 기적,
(10) 예수님의 은혜,
(11) 예수님의 부활,
(12) 예수님의 말씀.
이 열두가지를 선포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기에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당신을 심판하기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당신의 죄를 담당케 하셨고,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며, 당신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셨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삼일만에 부활시키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예비하셨다.
당신은 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는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주되심과, 성자되심을 믿으라!
은혜의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실 것이다!

이것이 선포의 내용인 것이다.


현재의 문제: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만난 21세기의 많은 전도자들은 이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그대신 교회나가세요!
교회나가면 자녀가 잘될 것입니다!
교회나가면 만사가 형통하고 병이 낫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교회가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고, 공짜 점심도 먹을 수 있으며,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교회에 나갔더니 건강해 졌고, 사업이 번성해졌으며, 자녀도 좋은 대학 갔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십시오!


말하며 전도한다.

마치 낚시꾼이 냄새가 구수한 깻묵을 바늘에 걸고 물속의 물고기를 낚듯이, 스파게티 소스를 파는 장사꾼이 소스를 팔기위해 통에 각종 장식을 달아놓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을 꼬시려고만 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저 사람들을 구수한 말들로 꼬셔 무작정 교회로 데려오려고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탕발림말로 사람을 꼬셔 교회로 나오게 하는것이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진리를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포함으로써 죄인을 예수님의 몸인 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인 죄, 심판, 지옥, 회개, 구원, 천국등을 선포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질문 1: 이쯤에서 나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초면에 만나는 사람에게 죄, 죄인, 심판, 지옥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좋은이야기만 하다가 성장한 후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게 효과적입니다.

그렇지 않다.
이러한 발상은 세상의 마케팅 전략에 물들어버린 인본주의적 전도방식이다. 고린도후서 4:1~2는 이러한 발상을 이렇게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전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혼잡"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과일 장수들이 보기 좋은 과일을 맨 위에 놓고 아래에다가는 작은 과일들을 숨겨넣는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하는 행위는 하나니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인지라, 그렇게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도할 적에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이나, 상급이나, 천국이야기만 위에다 죽~ 늘어놓고, 죄나 지옥이나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살짝 가리며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대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들려 주라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혼잡"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도주에 물을 탐으로 원래의 농도를 줄이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포도주에 물을 타서는 안된다.
포도주는 포도주 자체로 있어야지 물을 타면 본래의 맛을 잃고 싱겁고 맛없게 된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불신자들의 비유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심판과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축복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복음을 희석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절대로 이렇게 전도해서는 안된다.
말씀이 있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인본주의에 찌들어 있는지라 불신자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하여 될 수 있으면 지옥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오직 복이나 천국, 축복이나 형통등의 말로만 사람들을 꼬시려 한다.
이것은 전도가 아니다!
죄를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심판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공의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죄와 심판과 지옥이 없으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부활도 필요없다!
죄와 심판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고로 이 모든 것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다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질문 2: 이렇게 질문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준비도 안된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듣다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어떡합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이는 미련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다.
이 세상에 준비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어디에 있던가?
여러분들은 준비된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구원에 이르렀나?
아니지 않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의 말씀이 순식간에 바람처럼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구원에 이른것이 아닌가?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던가?
죄인이 죄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어찌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진리앞에서 귀를 틀어막고 도망가고자 하는 것이 지극히도 당연하다.
게다가 죄인을 찔러 반응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듣는 사람들의 심령속으로 들어가 죄성을 비수처럼 찌른다고 했는데, 말씀의 칼날이 내 심령속에 사정없이 와서 꽃히는데 어찌 꿈틀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예레미아가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저넣었나?
에스겔이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핍박했던가?
사도 바울이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전도하실때 왜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나?
복음을 들은 불신자들이 거부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벌레에게 빛을 비추어봐라.
꿈틀대며 그 빛으로부터 도망가기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처럼 어둠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전했더니, 그들로부터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명심하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전하는 복음은 희석된 복음이요, 가감된 복음이라는 것을!


질문 3: 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불신자들의 심기를 건드려 마음의 문을 닫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이 역시도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다.
위의 질문은 우리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우리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이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내 자신도 살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살린단 말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러한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혼잡하지 않게 충실히 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사용하사 예정된 자를 부르신다.
고로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이상, 듣는 자들이 구원으로 예정받은 자라면 그들은 반드시 돌아오고, 예정받지 못했다면 복음을 거절할 것이다.
고후 2:15-17를 들어보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우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보라.
우리가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때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고, 망하는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른다.
이것이 참된 전도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전도란 예정된 자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 들여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고, 예정받지 못한 자로 하여금 복음을 거절하여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작업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명을 말씀을 심고 물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명은 그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고후 4:3도 보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이 얼마나 명확한 계시인가?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그 복음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남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더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더러 죄인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딤후 4:2의 말씀처럼 오로지 하나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여기에 "전파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도 케루쏘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질문 4: 이렇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불신자들이 일단은 교회에 와야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됩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는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머리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이지, 불신자를 초대하여 전도하는 곳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를 절대로 교회당 안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함께 예배드리지도 않았다.
교회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산자를 위한 공동체이지 죽은자를 살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당 안에서 예배드렸고, 교회당 밖에서는 전도했다.
그래서 밖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을 교회당으로 데려와 함께 예배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전도의 방법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한다.
'일단은 교회로 불러놓고서 교제를 통하여 친목을 다진후 마음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열린 예배"따위나 "알파코스"등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이 별 차이가 없다는 식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나서 복음을 전하려 한다. 교회에서 가요를 부르고, 세상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세상과 교회는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너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말라는 식으로 어필을 한다.
그리고 교회로 불러모은 불신자들의 비유를 맞추며 굽실댄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아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에 부족하기에 "열린 예배"나 "알파 코스"와 같은 것을 사용하라고 되어있는가?
성경 어디에 불신자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비유를 맞추며 기독교는 그렇게 폐쇠적인 곳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라고 되어있는가?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선포함으로써만 열린다.
그리고 그 일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계시하는 구절이 있다.
행 2:14이하를 보면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베드로의 선포가 나와있다.
베드로의 선포를 보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로부터 자유하게 위해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계시되어 있다.
예수님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사교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운동이나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나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다.
그랬더니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기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심령의 '중심'이라는 뜻이고 "찔리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뚫리다,' '꿰찔리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중심에 쉬지않고 뚫리고, 꿰찔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역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의 심령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짓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음이 찔리기 시작한 것이다.
좌우에 날선 양날검보다도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죄인들의 중심에 사정없이 꽃히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는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리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의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순서가 보이는가?
말씀이 먼저왔고, 그 다음에 구원이며, 그 후에 성도의 교제다.
이것이 성경적인 순서이다.
교제가 먼저 오지 않는다.
구원이 먼저 오지도 않는다.
말씀이 먼저요, 구원은 그 다음이며, 교제는 가장 나중이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교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한다.
일단 불신자들을 교회로 불러 교제하게 한 후, 그 후에 구원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말씀을 전한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낸 인본주의적 순서이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순서가 아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순서를 따르니까 교회에는 죽은자들로만 꽉 차서 바른 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 5: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에이~ 너무 원론적으로만 하지 맙시다.
그렇게 원론적으로만 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교회는 원론적으로만 해야 한다.
원론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는 것이다.
교회는 사업터가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위에만 세워지며,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운행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아무리 교회가 양적으로만 부흥하면 뭐하나?
그 안에는 죽은 시체들이 득실대는데?
참된 전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그들을 모은 결과이다.
명심하자.
교회에서는 성경이 열려야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하며, 그 분의 가르침이 가르쳐져야 한다.
바로 그럴 때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다.

ㅡ이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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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만물을 창조하신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

 

오늘 이 시간 부활의 첫 열매로서 부활의 근거가 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일 아침 무덤에 계신 주님을 만나러 갔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처럼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해 주옵소서.

 

 

부활의 영광을 알고 있건만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죄와 어두움의 궈넷를 이기지 못해

 

 

죄를 범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에게 부할의 생명을 넘치도록 공급하여 주옵소서.

 

  

 

 

무덤 문을 여시고 사망 권세를이기신 주님,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두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약하게 하는 사탄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지 않게 하시고,

 

 

죄가 가져오는 유혹 앞에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자신을 쳐서 이기고 죄를 멀리하며

 

 

어두움의 세력 앞에 십자가의 군사로 가력히 맞서게 하소서.

 

 

때로는 주변의 복잡한 정세로 인해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고,

 

 

악한 사람들이 가하는 공격 앞에 무기력하기도 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들로 인해 분노하고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모든 염려를 주님 앞에 맡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심을 잊지 않게 허옵소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리지 않고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이유는 우리 믿음이 작은 탓인 줄 압니다.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큰 믿음을 주옵소서.

 

 

어떤 상황에도 절망을 이기신 주님을 붙잡게 하시고,

 

 

포기하여 모든 것을 얻으신 주님처럼 우리도 희망의 찬가를 부르게 하옵소서.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

 

 

절망적인 상황에 둘러싸여 주눅들어 있는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시지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자꾸 환경을 바라보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환경에만 고정된 우리 눈을 들어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을 주옵소서.

 

 

비록 죽을지라도 다신 산다는 확신을 갖게 하시고, 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늘 아버지와의 영원한 교제에 들어갈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잠시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현재의 불편한 여건에 낙담하지 않고 내일 새로워질 환경을 바라보며 인내하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님, 시들어가는 영혼이 회복되고, 상한 마음이 고침을 받으며 ,

 

 

깨어진 관계가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군대를 일으키셨듯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스러운 여건들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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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가복음 16:15)입니다. 이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4:12)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분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의 생애와 교훈은 누구보다도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계는 그의 탄생으로 년도를 기록합니다. 그의 교훈은 인종, 문화, 국가의 장벽을 넘어 호소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교훈을 구분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예수처럼 사람을 가르친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랑을 한 일이 없습니다. 세계사에  예수와 비길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그와 비교할 대상은 없습니다.

 

그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이 대답은 모두 틀린 것 입니다. 예수는 계속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6:13-18을 보시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셨습니다. 그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신문을 받을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예수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네가 말한대로니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했다. 마태복음 26:63-68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송사했다. 예수 외에 누가 감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한복음 5:21-23)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사도요한은 그이 복음서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고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한복음1:14)한 분이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정도 밖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한복음14:9)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군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1:15-17)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로새서2:9),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는 성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인간은 모두 공통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3:22,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3:10). 죄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6:23.)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브리서9:27). 아무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라디아2:16)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하셨나니”(디도서3:5). 그대가 스스로의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셔야 했을까요?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2:21)” 라고 답합니다.

그대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당신 대신 죽으신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6-8). 예수는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고,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를 행위로 보이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오한1서4:10). 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구원에 자신을 던지셨다.

십자가의 도는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린도전서15:3)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십자가는 전도의 절반이고, 부활이 있어야 완성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15:4).

예수는 요한복음10:17, 18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10:17,18). 아무도 이런 선언을 할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과 동물을 쫓아 내실 때,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을 몰랐습니다(요한복음2:19, 21). 나중에 그는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12:39,40)라고 말씀하시며 이적을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12제자에게와  그 후에 5백여 형제에게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15:5-8).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눈으로 본 증인들이다.

사도들은 이 도를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 전파가 금지되었지만, 그들은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을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친히 보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구언하는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부활의 거짓 증인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짓을 전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전시할 수만 있다면, 부활을 전하는 입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예수의 시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나셨습니다. 그는 구주시고, “나는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으리라”(계시록1:18)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어찌하려는가

예수는 당신의 구주신가? 당신은 그를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로마서1:16)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전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지진이 나고, 간수는 죄수들이 탈옥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처벌이 두려운 간수는 주의 종에게 나아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고,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답한다(사도행전16:31).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예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 말씀하신다(요한복음 6:4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1:10-13).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단지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마치 죠지 와싱튼이나 어떤 역사적 인물을 믿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기본 진리를 알고, 그리스도인이라 시인합니다. 그들의 이론은 옳고, 교리적으로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개인의 구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9,10)라고 말 합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적이 없다면, 오늘 그를 부르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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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 (종말론) 4.부활(부활의 성경적 증거, 부활의 성질)

 

4. 부활(復活)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일 뿐 아니라 이 지상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이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이다. 
  

1. 부활의 성경적 증거 
 

1) 구약의 증거         
 

  (1) 아브라함의 신앙 - 이삭의 부활을 믿었다(히 11:17-19).

  (2) 죽음 묘사 - 깨어남을 전제, ‘잔다’라고 묘사한다(대하 26:23).

  (3) 부활 언급 - 직접 ‘살아나고’라고 말한다(사 26:19).
 

2) 신약의 증거         
 

  (1) 그리스도의 증거 - 스스로를 부활과 생명으로 말씀하셨다(요 11:25,26).

  (2)그리스도께서 직접 부활하셨다.(마28:6, 막16:6, 눅24:6)

  (3) 바울의 증거 - 논리적으로 언급하였다(롬 8:11,23; 고전 15장.

  (4) 요한의 증거 - 계시록은 부활을 회화적으로 그린다(계 20:4,5). 
  

2. 부활의 성질
 

여기서는 그리스도 재림 직후 있을 성도의 생명의 부활만을 다룬다.
 

  (1) 부활은 삼위의 사역이다(요 5:21).

  (2)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증이다(고전 15:22).

  (3) 육체적, 가견적 부활이다(고전 15:52).

  (4) 옛 육체의 신령한 회복이다(고전 15:53).

  (5) 전인류의 예외없는 부활이다(행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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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부활은 우리의 믿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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