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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은 왜 이단인가? <1> 

 

유일한 참 교회? 교황은 페트로의 후예? 


김삼 교회의 진리 전달력이 약화되면서 종교 문제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얼마전 필자에게 온 한 편지는 혼기가 찬 젊은 아들이 천주교 여성과 사귀는 데 대한 한 신자 어머니의 고민 내용이었다. 드물지 않은 사례들이다. 나름대로 해결하기란 수월치 않은 문제다.

이런 현상은 신교회가 카톨릭의 문제점에 대한 적절히 대처하지않고 있는 탓이다. 마치 한국이 친북 좌경 세력들에게 이렇다할 대처를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진리의 바위 위에 굳건히 서있지 않고 모래 위에 선 교회들은 언젠가 무너질 날이 올 것이며 그 날은 결코 멀지 않다.

 

 


▲바티칸 교황청 산 피에트로 광장에 서있는 \'초대교황\' 페트로 상.     © 김삼 

대다수 이단비평가들은 한국의 소규모 이단들을 열렬히 비판하면서 정작 카톨릭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경우가 흔하다. 일부 기독교단체나 신학자/목회자들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감히 함부로 카톨릭을 이단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카톨릭은 이단비평의 마지막 수순인지도 모른다.명심할 것은 카톨릭은 중세 종교개혁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이단'시 한다는 사실이다. 적반하장 격이지만 말이다. 

오해 말라. 필자는 천주교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잘 아는 친지들도 있다. 여느 신자와 비신자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다. 필자가 이단시하는 대상은 비성서적인 바티칸 교황청과 카톨릭교회의 교리다. 약10억 된다는 세계 카톨릭 신도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이 교황청의 교리와 제도에 매인 노예들이나 다름없다. 

이단은 별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방향이면 이단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에 버금가게 말씀을 높이셨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기록하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더 나아가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추호라도, 파리똥 만큼이라도 가감하는 사람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승복하기보다 자기 뜻대로 맘대로 '자유자재'로 가감해온 바티칸 신학자들과 역대 교황들도 저주 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이건 필자자신의 생각과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 자체의 증언이다(계22:18,19). 할렐루야, 심판주 야훼 하나님과 재판장 예수 크리스토, 분별하시는 성령님께 영원히 영광!

카톨릭이 '이단'으로 규정받기엔 조건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다. 알고보면 카톨릭은 그 어느 기독교 계열 종파보다도 이단시비 여지가 있는 대표적 '문제집단'의 하나다.
그런데도 신교 일각에서, 특히 교계단체들이 카톨릭교회를 마치 험한 세상 길에 다정한 길벗이라도 되는 양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뭘까? 몇가지로 분석될 수 있다.

우선 카톨릭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단순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기독교계의 어느 이단종파보다도 더 규모가 큰 집단이다. 그래서 "10억이나 되는 카톨릭이 다 이단일까?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차 논할 것이다.

둘째로 개신교가 카톨릭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전통을 '공통요소'로 지닌다. 예를 들면 일부 예배의식의 유형, 사도신경, 사도신경/주기도의 의례적 사용, 물방울 세례, 어린이 세례, 일부 교파의 '사제' 제도 등이다. 또 성삼위일체 개념과 용언도 카톨릭과 공유한다. 그러기에 많은 교회들이 카톨릭과 '공통점'을 느끼는지 모른다.

셋째로 신교는 카톨릭에서 배태되어 갈려나온 존재로 자처하면서 카톨릭을 '모교회'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하기야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이 본래 카톨릭 사제였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인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로마에서 배태돼 나온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왔다. 교회의 근원은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임을 우린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루살렘교회는 하늘에서 오신 성령으로 태동됐기에 교회의 뿌리는 하늘이지 로마가 아닌 것이다.

  카톨릭은 유일한 참 교회?

로마교황 보니파체 8세는 바티칸 칙서 'Unam Sanctam'(1302년)에서 "..하나의 거룩한 카톨릭, 사도적 교회가 있을 뿐..이 교회 밖엔 구원이나 죄의 보속이 없다.." 라며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인류가 절대로 로마교황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니파체 자신이 교회의 머리 즉 크리스토가 된 셈이다. 카톨릭 유일주의의 이 기본원칙은 현재까지 변함 없다. 


▲교황 보니파체 8세 무덤 앞 석상.     ©김삼 

자고로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우리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경우 이단이다. 바꿔말하면 "어떤 교회건 다른 교회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지상교회는 이단이다. 그런 이단이 어디 한둘인가. 구원이 있는 교회는 지상의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명실공히 크리스토를 머리로 하며 그의 몸된,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교회 즉 거듭난 신자들의 연결체일 뿐이다.

바티칸 카톨릭은 제도적, 가시적 교회에 불과한데도 짐짓 우주에 단하나뿐인 공교회, 유일한 교회로 행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 [카톨릭교회=거듭난 신자집단], [가시적 교회제도=비가시적 우주교회], [카톨릭교회=천국교회] 같은 주장은 카톨릭 신학자들과 교황들만 할 수 있는 황당한 헛소리고 망언중 망언이다! 

이런데도 교황에게 조아리며 아부하는 신복음주의자들은 "당신은 우리를 이단으로 보셔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받드나이다"라며 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마치 상어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며 "우리는 당신의 것이니 제발 잡숴주시옵소서" 하는 물고기들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 된 대응방식이 아니다. 상어(카톨릭신학)엔 범고래(말씀중심 신학)로 대처해야 한다.

   교황은 '페트로의 후예'?

카톨릭 교회는 페트로를 '초대교황'으로 받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역대 교황을 페트로의 후예로 믿어왔다. 성경은 물론 교회사적으로도 증명되지 않는 헛소리다.
먼저 페트로가 바티칸의 주장처럼 과연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나 쉽게 알아보자. [이 부분은 헨리 헛슨, 데이빗 클라웃의 연구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성구엔 원어발음에 더 가까운 성경 각권 약호를 쓴다. 즉 '페a'은 페트로알파(베드로전서), '페b'는 페트로베타(베드로후서)를 뜻한다. 기타 이름도 이에 준한다. 그 이유는 필자의 딴 글들을 참조해주기 바란다.] 

성경엔 페트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로마서 16장 참조). 또 신약성경 전체에 로마교회의 특수성/우위성 따위를 내비친 구석이 단 한군데도 없고 로마에서 교황이 다스린다거나 '모교회'라고 한 부분이 눈 씻고 봐도 없다.


▲페트로를 \'초대 교황\'으로 묘사한 독일 \'뉘렘베르크 역대기\' 속 삽화.     © 김삼 

페트로의 첫 편지 페트로알파(벧전)는 로마가 아닌 바빌론에서 쓰여진 것이다(페a 5:13). 페트로 당시의 '바빌론'은 로마를 의미한다는 교황들의 주장은 정말 웃기면서도 딴엔 자가당착이랄까 의미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사실 로마교회는 계시록의 음녀 바빌론에 종종 비유되기 때문이다.

   파울은 '로마의 페트로'를 언급한 적 없어

사도 파울은 당대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로마서)를 보내면서 페트로를 언급한 흔적조차 없다. 당시는 주후 58년쯤이다. 그는 로마에서 특별한 은사를 나누길 원했고(롬1:11) 거기서 말씀 전하기를 원했다(1:15). 그러면서 그곳 성도중 27명에게 일일이 문안한다. 그러나 페트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주후 61년 파울이 로마 죄수로 갇힌 중 몇몇 형제들을 만나지만 그 가운데 페트로는 없다.

이런 사실만 봐도 페트로는 로마 교황이나 로마교구의 감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로마교구란 제도 자체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파울이 돌보던 로마의 가정 교회만이 있었을 뿐이다.

로마에서 파울은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페트로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페트로가 로마에 있다거나 [바티칸 주장처럼] 그곳에서 20년간 교황 직위에 있던 페트로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에페소/필리포/콜로사이/필레몬 등의 서신서는 모두 로마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 서신서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페트로에 관한 언질은 단 한건(!)도 없다. 로마에서 파울이 보낸 마지막 서신서인 티모테 베타에서 파울은 "나의 첫 답변 때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고 오히려 모두 나를 버렸다"(티b 4:16)고 밝힌다. 만일 페트로가 로마감독이었다면 왜 파울과 함께 하지 않았겠는가? 만일 그가 있었는데도 딴 사람들처럼 파울을 버렸다면 그 엄청난 죄책을 어찌 면하겠는가!

순교 직전인 당시 파울은 이 편지(티모테 베타)에서 "오직 루카스(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티b 4:11)고 했지, "페트로도 나와 함께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페트로가 로마감독/교황이었을 수 있겠는가? 이것만 봐도 바티칸이 얼마나 거짓말덩어리인지 알수있다. 성경을 제멋대로 가감수정하는 것, 그것이 이단이다.

  페트로와 교황, 어느 쪽이 맞나?
-역대 교황들의 거짓


▲스승 크리스토께 \'열쇠\'를 받는 것으로 잘못 묘사된 카톨릭 그림. 주님은 \'초대 교황\' 페트로가 아닌 교회에 열쇠를 주셨다.     © 김삼 

페트로는 기혼자였다(마테오 8:14). 예수님과 모든 사도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장모도 있었고 사역 때 아내를 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교황들은 모두 미혼자/독신자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특히 코린토알파(고전) 9:5은 카톨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도무지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한번 잘 살펴보자.
"우리는 딴 사도들, 주님의 동생들, 케파(페트로)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이오?"(코a 9;5)
파울이 쓴 편지의 이 부분이 확실히 밝혀주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사도들 다수가 결혼했다.
2. 주님의 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도 결혼했다.
3. 케파도 아내가 있어 사역 시 대동했다. 

위 세가지중 그 어느 것에도 카톨릭은 해당되지 않는다. 카톨릭은 결혼하지 않은 사제/수녀들만이 일반 평신도보다 거룩하고 제대로 사목을 할 자격이 있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과는 반대다! 또 카톨릭은 주님의 친동생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정녀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란 근거가 성경에 전혀전혀전혀(!) 없다는 것은 카톨릭 신도들에게 충격을 주는 놀라운 진리다.

이 구절 딱 하나만으로도 카톨릭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황청은 자기네 나름의 '성서' 또는 '성서해석'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티칸 교황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계22:18,19).

성경을 맘대로 가감하니 말이다.
결혼한 페트로가 264명이라는 미혼자 교황들의 선배요 '초대 교황'이라니 얼마나 모순된 주장인가? 그러고도 페트로의 올바른 계승자/후계자/후예일 수 있는가? 카톨릭의 거짓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페트로는 성경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주목해야한다고 가르친다(페b 1:19~21). 그러나 교황들은 바티칸의 영감 없는 전통도 주목해야 한다고 보태어 주장한다.

페트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품화 하는 거짓교사들을 경계한다(페b 2:1~3). 그러나 교황들은 미사/기도/면죄부 등을 팔아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돼온 사실이다.

페트로는 침례/세례가 상징적일 뿐 성령과 예수 크리스토의 부활이 곁들여져야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일러준다(페a 3:21. 이 구절의 한글번역은 개역이 제일 낫다). 그러나 교황들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주는 세례(영세) 자체가 구원을 갖다주며 세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숭상을 거부했다(행전 10:25,26). 그러나 역대 교황들은 천주교도들로부터는 물론 정치가/지도자들로부터의 영예/배례/키스/숭배를 기꺼이 수용하며 거의 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페트로는 구원이 오로지 예수 크리스토의 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페b 1:1). 그러나 교황들은 구원엔 영성체(성체를 받음)도 필요하다고 곁들여 주장한다.

페트로는 교권제도와 함께 목회자들의 권위주의적 자세를 경고하고 양떼의 본이 될 것을 권고했다(페a 5:3. 이하 성구들 모두 페a 즉 베드로전서). 또 장로 외엔 어떤 교회직분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들은 교권체계를 세우고 신약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제도와 직책을 만들어냈다.

페트로는 신약시대의 유일한 사제(제사장)직은 예수 크리스토의 하늘 대사제직 뿐이라고 가르치며 모든 신자들의 영적/보편적 사제직을 말했다(2:5~9). 그러나 교황들은 성체를 나눠주도록 서품된 카톨릭만의 특수 사제제도를 보유했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기초이자 바위이신 예수 크리스토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한다(2:4~8). 그러나 교황들은 페트로가 곧 반석이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페트로 자신을 거짓말쟁이, 모순된 사람으로 내모는 격이다.

페트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친다(1:23). 그러나 교황들은 사람이 영세(세례받음)로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상 피에트로 바실리카 안의 페트로 동상. 로마주신 주피터 상을 닮았다는 설이 있어왔다. 발은 키스로 닳아있다     © 김삼 

페트로는 크리스토께서 죄를 위해 한번 희생되셨다고 가르친다(3:18). 나무(십자가)위에서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지셨다고 가르친다(2:24). 그러나 교황들은 매번 미사 때마다 크리스토께서 새로 희생되며 예수 크리스토와 그 십자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로마카톨릭교회와 영성체와 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신자가 산 소망과 하늘 유업을 지녔다고 가르친다(1:2~5). 그러나 교황들은 신자가 하늘나라에 제 집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페트로는 신자가 살인자/도둑/악행자와 남의 일 간여자가 되지 말라고 훈계한다(4:15). 역대 교황 대다수는 이 모든 죄를 골고루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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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주의(영어: Calvinism) 또는 개혁주의(영어: Reformed Theology), 장 칼뱅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1] 종교 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어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잡은 사상을 가리킨다.[2] ‘칼뱅주의란 말은 칼뱅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나 이는 매우 드물다.[3] 다만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 칼뱅이 미친 지대한 영향에 칼뱅주의란 이름이 연유한다. 칼뱅주의가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영어: Reformed Church)가 발생하였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뱅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뱅주의를 말할 때에는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별칭들이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개혁 침례교회가 대표적이다. 칼뱅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4]

 

역사적 배경[편집]

 

종교 개혁[편집]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바꾸고자 한 종교 개혁은 결국 개신교회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에는 다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장 칼뱅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장 칼뱅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5]

 

장 칼뱅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그리고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뱅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뱅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6]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7]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 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포함하여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편집]

 

개혁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네덜란드)이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신앙고백은 침례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개혁교회의 가지들[편집]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질서를 바벨탑 이야기에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적인 성서해석이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진짜 의미에는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는 개혁파 교회 교리의 악용으로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책고백을 실천하였다.[8]

 

핵심 교리[편집]

 

칼뱅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다섯 솔라,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영어로는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파와 칼뱅주의를 구분짓는 내용들이 된다.

 

다섯 솔라[편집]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

 

언약신학[편집]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가지 언약이 결국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구속 언약 (covenant of redemption):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며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이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된 것으로 본다.

행위 언약 (covenant of works):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이 왔다고 본다.

은혜 언약 (covenant of grace): 아담이 실패한 이후로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5대 강령[편집]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편집]

 

칼뱅주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서 예배를 성경, 기도, 찬송, 헌상, 성찬 과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르는데, 어떠한 것들이 은헤의 방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방도들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에 계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 구절에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예배하지 말라"[9]이다. 둘째 계명이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10]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가 성경 출애굽기 324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칼뱅주의[편집]

 

칼뱅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뱅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전적 타락'설에서 언급되었듯이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든지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냐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이러한 칼뱅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의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지을 수 있다:

합력설(sy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단독설(monergism)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르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다.) 18세기에는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합력설/단독설과 관련해서 잘 알려진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을 들 수 있다.

 

 

그 누구라도 구원을, 아무리 작은 일부분이라도, 사람의 자유의지와 연관짓는다면, 그는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

마틴 루터(Martin Luther), Bondage of the Will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엇이라도 우리가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

존 오웬, Works of John Owen, Vol.3, p.433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자유의지는 있으나 천국으로 가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힘을 만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

   

죽은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아마 죄인이 자기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것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 (하나님의 주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멸망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주권과 맞선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우리의 영혼에 대한 주권에 습복하는 것입니다; 곧 그 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강퍅케 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분으로서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2, The Banner of Truth Trust, Reprinted 1995, pp.849-854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편집]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대상과 속죄의 유효성과 범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칼빈주의는 복음의 유효성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 동시에 제한적 속죄를 말한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계량적인 뜻만이 아니라 한정적(definite) 또는 특정적 (particular)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인류에 대한 복음의 유효성과 제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량적으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예배의 전통과 형식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초기 종교개혁 시대의 전통을 고수한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자체를 극단적 칼빈주의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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