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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꾸란의 아브라함의 아들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에 대한 성경과 꾸란의 개혁 신학적 비교 연구


I. 서론

꾸란의 아브라함은 이슬람의 6대 선지자들 중의 하나이다.2 아브라함은 꾸란 14 장(아브라함 장)을 비롯하여 12개장들(2,3,4,6,7,9,11,15,21,26,37,87장)에 반복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꾸란의 아브라함이 성경의 아브라함과 같은 점들도 있지만 다른 점들이 훨씬 더 많다. 지면 관계상, 아브라함의 아든 제사에 대한 개혁 신학적 비교연구로 제한하고자 한다.

 

II.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에 대한 성경과 꾸란의 비교 연구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에 대한 성경과 꾸란의 공통점들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알라의 시험사건(창22:1a /꾸란37:106). ② 하나님/알라의 명령(창22:1b/ 꾸란37:102a). ③아브라함의 순종(창 22:15-18/ 꾸란37:103) ④ 대체제물(창 22:11-14/ 꾸란 37:107). ⑤ 순종하여 복을 받음(성경: 창 22:15-18/ 꾸란37:108-111). 아브라함의 아든 제사에 대한 성경과 꾸란의 상이점들은 다음과 같다. ① 제물로 드려진 아들 ② 아들과 의논 여부 ③ 대체제물의 정체 ④ 대체제물의 실체 ⑤ 시험의 의도 ⑥ 오늘 날의 기념 등이다. 상이점들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보자.

1. 제물로 드려진 아들

아브라함의 아든 제사에 대한 기사는 창세기 22:1-9과 꾸란 37:100-113에서 각각 소개되고 있다.

성경에는 그 아들의 이름이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꾸란에는 아들이라고만 소개되어 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제물이 되었던 아들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다.

이삭은 이스마엘보다 14년 정도 후에 때어났기 때문에 독자라는 표현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신성윤은 아브라함의 아들 제사에 대한 성경과 꾸란의 본문을 아래와 같이 병렬시킨 가운데 꾸란의 제물도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라고 밝히고 있다.

창세기 22장/꾸란 37장 내용

1-2절 / 101-102절 ①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

3-10절 / 103절 ② 아브라함이 실제적으로 순종하려 함

11-12절 / 104-105절 ③ 하나님/알라께서 아브라함을 막으심

13절 / 107절 ④ 아들 대신 다른 것으로 번제를 드림

15-18절 / 108-113절(112,113: „이삭‟이 등장) ⑤ 순종에 대한 하나님/알라의 복 주심

이 도표에 따르면, 꾸란 37: 108-113은 창세기 22:15-18의 병렬 본문이며, 그 본문의 주제는 “⑤ 순종에 대한 하나님/알라의 복 주심인데, 그 본문(꾸란 37장)의 112과 113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로 이삭이 각각 소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꾸란의 아브라함도 성경의 아브라함처럼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

2. 아들과 의논 여부

성경의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이삭과 전혀 의논하지 않았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는지에 대하여 문의하였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여 주실 것이라고만 답하였다(창 22:7-8)

그러나 꾸란의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너를 제단에 올리라는 명령을 내가 꿈에서 보았노라.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자세히 말하였고,

이에 대하여 그의 아들은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 받은 대로 하옵소서…”라고 응수하고 있다(꾸란 37:12).

그리고 그 둘이서 함께 순종하였음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꾸란 3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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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라마단 금식(Muslim Fasting Month)

 

 이슬람교의 교리 중에 신앙고백, 기도, 금식, 자선 그리고 순례가 있다. 이슬람교를 연구하고 있는 비 무슬림 학자들은 그것들을 일컬어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번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기둥인 금식과 자선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무슬림은 일년 중 이슬람력(Hegira)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 금식을 한다. 한달동안 계속되는 금식의 시간은 동트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이다. 병자, 여행자, 임산부, 아기 엄마 그리고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남녀 무슬림이 그 시간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되고 흡연도 삼가 해야 한다. 그 금식을 일명 ‘라마단 금식’이라고 한다.

필자가 사우디에 가서 처음 목격하게 된 라마단 금식은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 라마단 금식이 봄철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헤지라(Hegira)의 계산 방식이 음력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과는 달리 윤달이 없어서 매년 라마단 달이 9일씩 빨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헤지라는 계절에 무관한, 오직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년 라마단 달에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금식의 유래는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명상을 하다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게 된 것을 기념하고, 예언자의 고행에 동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 신학자들은 금식의 12가지 의미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반포하였다.

1. 금식은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2. 창조적 희망감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3. 진정한 덕을 심어 준다. 4. 건전한 양심을 배양한다. 5. 인내심과 비 이기심을 고취시킨다. 6. 절제와 의지력의 효과적인 실습이다. 7. 투명한 영혼으로 초월의 경지에 들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여 경쾌한 몸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8. 현명한 저축과 건전한 가게 예산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9. 노련한 적응 기술을 터득시킨다. 10. 심신 단련과 건전한 생존의 기초를 닦아준다. 11. 사회적 귀속, 화합과 형제애, 알라와 법 앞에서 참다운 평등의 정신을 진작시킨다. 12. 자기 안정과 자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보존, 승리와 평화를 위한 알라의 처방이다.

 

필자는 이슬람 신학자들이 라마단 금식을 통해서 구도자가 체험하게 될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훈련과 공동체에 미칠 장점들은 언급하고 있으나 매년 행하는 라마단 금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매년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는 사우디 무슬림들에게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마단이 오면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금식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음식과 물을 금하고 담배를 피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규칙적으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던 사람이 음식을 금하니 얼마나 배가 고프고 힘이 들겠는가?

특히 현장에서 뜨거운 태양을 온몸에 받으며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주로 삼국인들임)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금식기간에 몸이 야위고 건강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에 참여하는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알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라를 기쁘게 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금식한다. 오직 알라를 생각하여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할 때에 박탈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한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의 정욕을 훈련하고 육체적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

그러나 성서적인 관점에서 바라 볼 때 라마단 금식은 바른 금식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금식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저녁(해가 지면서 해가 뜨기 전까지)에 두 세 차례의 식사를 한 후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낮에 잠을 자는 식으로 생활 패턴이 바뀐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식 기간에 식품이 더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금식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라마단 금식은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 기간에는 비 무슬림도 무슬림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신고가 되면 구속이 되고 추방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학교를 짓던 공사 현장에서 한 미국인이 라마단 금식 기간에 담배를 피우다가 자기 수하에서 일하던 사우디인이 신고하므로 추방되는 일이 있었다. 셋째, 외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라마단 기간에 많은 현지인이 해외 여행을 한다. 그들은 주로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하며 즐긴다. 그 기간에 각 항공사의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어려운 사실이 이를 묵시적으로 증명해 준다.


축제의 향연

 라마단 금식이 끝나면 그들은 ‘이드’ 축제를 가진다. ‘이드’ 축제는 금식을 무사히 끝낸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향연이다. 3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를 위해 집집마다 수양을 잡아 요리(갑싸)를 해 놓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은 초청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우애를 다진다. 때로는 외국인을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현지인과의 이런 유대 관계는 사역에 아주 중요한 교량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나심이라는 동네에서 살 때에 마음씨 착한 30대 초반의 현지인이 앞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부인 둘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었는데, 어느날 필자의 대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그가 큰 고기 덩어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필자에게 건네 주며 ‘이드’ 축제를 위해 잡은 양고기인데 먹으라고 했다. 그가 준 고기는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 선물에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이 배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날 선물 받았던 고기는 냉동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양고기 요리를 잘하는 유집사님(지금은 한국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음)께 드렸다.

축제 기간에 무슬림들은 연 수입의 2.5%를 구제금으로 사회에 환원을 한다. 이를 자카트(Jacket)라고 한다. 자카트는 종교성을 통해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금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개인이 이웃을 돕기도 한다. 그들의 자카트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니라 의무 사항으로 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자카트를 종교적인 의무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 한국일보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거지가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필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체류하는 동안 거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다만 라마단 금식이 끝난 후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목격한 적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고 돕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여인들이 차도르를 쓰고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구걸을 하고, 길거리에 좌판을 벌려 놓고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 여인들은 가난한 과부들과 대부분 성지 순례를 왔다가 사우디에 체류하고 있는 아프리카인 들이라고 알려 지고 있다.

자카트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현지인 인데, 경제 사범으로 장기 복역 중에 있던 한국 사람(무슬림)이 자카트의 혜택을 입고 출옥하여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무슬림들이 자카트를 죄 사함과 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 믿고 행하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기독교인의 금식 기도는 어떠한가? 현대 크리스천들은 금식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문화적인 경향이라고 본다. 현대 문화가 사람들을 편하고, 급하게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한번 클릭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무엇 때문에 금식 기도를 하겠는가? 그들은 물질이 필요하면 하나님보다 먼저 파워 볼 티켓을 생각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어둡던 시대(중세)에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만약 루터가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면, 물질 문명은 이루었으나 중세기보다 더 영적으로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재난과 질병과 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금식하지 않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장 탄식을 할 것이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교훈과 실례가 많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소원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를 들면, 에스더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고(에4:16), 다윗은 병든 아들의 회복을 위해 7일을 금식 기도했으며(삼하12:16-18), 다니엘은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21일을 금식 기도했다(단10:2-3). 그리고 모세는 언약의 돌판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 기도했고(신9:9),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마4:2).

성경은 금식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천명했다(사58:6). 어떻게 금식 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금식 기도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금식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소개하셨다(마6:9).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금식 기도의 목적은 영적인 승리여야 한다. 이사야는 금식의 목적을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고 했다. 성도는 매일 매일 영적 전쟁에 직면하며 살고 있다.

성도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 이면에 자신을 억압하고, 넘어뜨리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사탄이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 기도하여 영적 권능을 힘입고 강력한 진들을 파하며, 삶 속에서 빛의 영역, 자유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셋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사야는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7)라고 했다. 금식 기도를 하면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공복의 아픔과 박탈의 경험을 통해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이웃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금식 기도를 드리는 구도자에게 너무나 귀한 축복들을 약속하셨다(사58:8-11)

금식 기도의 목마름과 갈증을 갖자. 금식 기도를 통해 영성을 회복 받자.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고전10:31).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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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분열 (Divisions of Islam)

 

9월 11일날 있었던 무역센터와 국방성 테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기독교인은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선교적인 차원에서 알라를 믿고 있는 이슬람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번 호에서 독자들에게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세계 12억 무슬림들의 분파와 학설 그리고 근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슬람교도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알라를 믿고 꾸란을 외우며 쌀라를 하는 동일한 사람들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이슬람에는 네 종류의 분파가 있다.

수니, 시아, 드루즈 그리고 수피파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계승된 칼리프들에 의해 발전되어온 정통 이슬람을 말한다.

현재 수니파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심하여 전체 이슬람의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수니파 다음으로 큰 시아파는, 무함마드가 632년에 병사한후 후계자 문제로 논쟁할 당시,

이슬람교의 지도자들 중에서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에게 통치권을 상속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사촌인 ‘아부 바르크’가 교권(칼리프)을 계승하게 되자 알리의 추종자들이 시아파(시아 알리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란의 무슬림들이 시아파에 속한다. 드루즈파는 베드 다라지(Beth Darazi)에게서 유래되었다.

이 파는 주로 레바논, 이스라엘, 그리고 다마스커스 주변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끝으로, 수피파는 신비적이고 시적인 차원의 이슬람교를 의미한다. 수피 사상의 스승은 시아파 학자였던 알 수피이다. 그후 A.D. 1111년경에 이슬람교의 고전적 가르침에 신비적 요소를 첨가하기 시작한 알 가잘리(Al-Gazalie)에 의해서 더욱 발전이 되었다.

현재 수피파는 모든 이슬람교 분파내에 존재하고 있으나 수단과 인도에서 강한 성향을 보이고 있다.

네 종류의 분파에 속하는 12억 이슬람은 다시 대중 이슬람과 근본주의 이슬람으로 분류가 된다.

대중 이슬람은 타종교와 같이 생동감과 역동성을 갖고 있다. 대중적인 이슬람교는 정령 숭배자의 신앙과 의식에 의한 총체적인 삶의 방편을 내포하고 있다. 점치고 병고치는 데에 염주를 사용하고, 부적을 이용하거나 자른 머리카락과 손톱을 이용하고 죽은 성자 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다.

대중 이슬람은 꾸란이 주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대중 이슬람은 일부 성자들이 하나님과 신실한 인간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특히 예수님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성자들의 무덤 근처에 그들의 영들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엄격한 율법을 요구하기보다는 관용과 타협의 노선을 택한다.

근본주의 이슬람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근본주의를 지키는 것이 조화와 정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근본주의 이슬람은 세 종류의 학파로 대변이 된다.

첫째, 와하비즘(Wahhabism)이다. 이 사상은 오토만 제국(1517-1918)의 통치가 끝나고 칼리프 제도가 폐지(1924)되므로 아라비아 반도내에 정치적인 혼란이 있을 때에 Abdul Aziz Ibn Saud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입헌 군주 국가를 세우는데 1등 공신이 된 종교심이 강한 Muhammad Ibn Abdul Wahhab로부터 유래가 된다.

이 Wahhabi 운동은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만 주변 국가들에서 여전히 중요한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운동은 꾸란의 가르침에 완전한 순종과 샤리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죽은 성자 숭배와 신비주의적 예식을 금하고 있다.

둘째, 1827년에 창립된 이슬람교 형제단이다.

이 형제단은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강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단체의 근본 목적은 통치의 도구로서 샤리아를 회복시키고 미신과 성자 숭배를 제거하고 수피즘을 몰아내고 원초적인 이슬람의 이상을 반영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소수 타종교인이나 타민족을 핍박하고 테러에도 관여한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던 하마스가 여기에 속하는 단체이다.

셋째, 자마트 이 이슬람(The Jamatt I Islam)이다. 이 단체는 마우라나 마우두디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파키스탄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마우두디는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신정정치의 구현을 위해 샤리아가 최대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샤리아에 반대되는 다른 어떤법도 시행될 수 없다고 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속하는 세 학파의 공통점은 이슬람 공동체에 샤리아법(신의 법)의 적용과 복고주의 사상이다.

현재 샤리아법이 강하게 적용되고 있는 이슬람 국가는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다.

출처 :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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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강좌>

한국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약의 코이노니아

 

아랍 이슬람 국가에 적은 수효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그렇지만 정작 아랍 이슬람 세계를 잘 알고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적으로 국내 사정상 교회와 신학교가 이슬람과 아랍을 잘 공부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이슬람 강좌를 선교단체나 신학교에서 듣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이슬람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혹자는 충분하다고 할지 모르나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아랍 무슬림의 세계관을 아는데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국내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 역시 아랍 국가에서 이슬람과 편차가 있다. 사실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도 아랍 무슬림끼리 서로 시각 차가 있다 2012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자 무함마드 무르씨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자 무슬림과 비이슬람주의자 무슬림 간에 “무엇이 이슬람이냐”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고 이슬람주의자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주의자 살라피 간에는 “무엇이 이슬람 율법(샤리아)이냐”를 두고 의견이 달랐다.

한국도 여전이 무엇이 이슬람이냐와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 무엇이 서로 다른가?

 

첫째, 이슬람의 뜻은 평화peace이다. 이슬람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복종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고 전문용어로는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말에는 평화라는 의미가 없다.

둘째, 이슬람은 삶의 양식 a way of life이다. 이슬람은 법과 정치, 경제,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무슬림들이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삶은 이슬람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 무슬림들이 더 많다. 일부 이슬람학자들은 오늘날 무슬림들의 행태를 보면 무함마드가 기겁을 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이고 국가이다. 이 부분에서는 무슬림들끼리 의견이 갈린다. 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이슬람이 종교와 국가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슬람은 종합적인 제도nizām shāmil라고 한다. 그러나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종교는 알라에게, 조국은 모두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어 종교와 정치를 구별 지었다.

넷째, 이슬람은 영적인 종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꾸란에서 성령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본질상 하나님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로서 인격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고 운행한다. 이런 정의에 따른 성령은 꾸란과 이슬람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무슬림이 이슬람을 spiritual이라고 쓴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성령과 다른 개념이다.

실제 꾸란과 성경간의 연속성은 없다. 특히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효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전의 경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알라”라면 “알라”는 유대인들의 신은 아니라고 했다.

다섯째, 이슬람교는 인간완성의 정점이다.[1] 이슬람은 이 땅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인간 완성에서 가장 좋은 종교는 이슬람이라고 했다.

이슬람은 알라- 무함마드를 빼놓고 성립이 되지 않는 종교이고

전 세계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기도를 해야 하므로

세계 무슬림들은 아랍인 무함마드의 사상을 꾸란과 하디스에서 배우게 된다.

아랍어를 모르면 이슬람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언어와 종교가 밀접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신약에서 partnership이란 말에 해당하는 키워드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코이노니아는 공동 참여joint participation, 교제fellowship, 커뮤니티community, 동역partnership 등으로 번역되었다. J.Y. Campbell은 “코이노스koinos로 표현된 주요 개념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참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70인역에는 코이노니아가 3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개인과 개인 간의 교제로서 수평적 관계를 가리켰으나

사도 행전 2:42 등 신약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인간과 하나님 간의 수직적 관계를 자주 나타낸다.

그 예로서 고후 6:14절의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에서 사귐은 코이노니아인데 교제(파트너십)과 동일어이다.[2]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에서는 communicate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과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삶과 봉사와 재산을 남과 나누는 것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교제fellowship이다. 이 교제는 초대 기독교인들 간에 있었던 영적 교제이었다. 또 요한 1서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와 공동참여와 다른 사람과 공동 참여를 가리켰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란 내적인 태도가 밖으로 나타나려면 희생이 요구된다.

그 동안 대개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전도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슬림과의 새 패러다임은 먼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 혹은 좋은 이웃이 되면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이야기도 포함되고 꾸란과 성경의 공통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전개하면 좋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아랍인들의 문화와 세계관에 적합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가 대화 상황이 적절할 때 그들과 나누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코이노니아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전에 우리들이 무슬림과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전도의 첩경이 된다. 신약의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 간의 신앙 교제를 말하지만 우리와 종교가 전혀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공주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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