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눈물의 기적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우리 교회가 기적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눈물의 기도 덕분이었다. 기도는 기적을 만든다. 20년 동안 침체돼 있던 교회에 부임하던 날부터 1주일 동안 금식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주님도 함께 울고 계셨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신'(5:7) 주님은 그때 "네 제단에 눈물이 배일 때 일어나리라"고 응답해 주셨다. 주님은 눈물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 후 계속해서 회개와 강청기도의 눈물로 제단을 적시던 중 성령께서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셨다. 330되는 곳에 세워졌던 낡은 흙벽돌 교회당을 9917나 되는 큰 성전과 함께 넓은 주차장으로 바꿔주셨다. 주님은 '눈물의 병'(56:8)에 눈물이 가득 차기를 원하시며 그 눈물을 보고 일하신다(38:5).

 

서재일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겨자씨] 경건의 실천

 

한국 교회는 온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선교 1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갖게 됐고,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됐다. 도처에서 한국의 도움을 기다리며, 한국 교회를 배우려고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성장 동력은 경건의 실천에 있었다. 새벽기도와 가정예배, 말씀 중심의 사경회, 그리고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던 순교적 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건의 모습들은 안타깝게도 변질되고 있다. 기복적 신앙을 추구하고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세속적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맛을 잃게 된다. 맛을 잃은 소금은 버림을 받고 짓밟히기 마련이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회복할 때, 우리는 맛을 찾고 온 세상을 비추는 거룩한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덕교 목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겨자씨] 꿀맛

 

아내가 친정에 간 날 점심을 건너뛴 후 저녁을 먹었는데 꿀맛이었다. 식은 밥에 김치 한 조각이 전부였지만 맛났다. 무슨 까닭일까? 첫째, 허기 때문이다. 끼니를 걸렀으므로 배가 고팠다. 배가 부르면 그 어떤 진수성찬도 꿀맛이 나지 않는다. 둘째, 건강 때문이다. 몸이 아프면 입맛부터 떨어진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소태같이 쓰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꿀맛인가? 최고의 뷔페 음식 같은 명설교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말씀은 몇 안 된다. 왜일까? 말씀에 갈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재미에 배부르니 생명과 진리의 말씀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또한 영혼이 건강치 못해 말씀의 맛이 쓰다.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기 원하는가? 허기져라. 건강하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27:7)

 

김흥규 목사(내리교회)

 

[겨자씨] 무지개

 

우리는 보통 무지개의 색깔을 일곱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여섯으로, 마야족의 경우는 다섯 가지로 인식한다. 사실 무지개의 색깔은 무수히 많다고 한다. 무지개는 비가 그친 뒤 물방울이 많은 대기에 햇빛이 비칠 때 나타나는 반원 모양의 호이다. 그것은 빛의 굴절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나타난다. 성경에 나오는 무지개는 노아 홍수 후 더 이상 물의 심판이 없다는 언약의 증표다.

 

흔히 우리에게 무지개는 아름다운 것으로, 더 나아가 희망의 한 상징처럼 인식되어 왔다. 영화 '오스트레일리아'에 나오는 음악에서도 "무지개 너머 어딘가엔그곳은 당신이 꾸는 꿈들이 실현되는 곳이에요"라고 했고, 우리 동요에도 무지개는 희망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무지개, 곧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우리의 삶에 무지개가 뜨면 좋겠다. 밖에 있는 무지개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마음속에 스스로 무지개를 띄워 작은 희망을 만들어 가야겠다.

 

김경원 목사<서현교회>

 

[겨자씨] 예수를 바라보자

 

몇년 전 교회를 섬기던 목회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갔을 때의 일이다. 저녁 기도회 시간에 부목사 한 사람이 "우리 목회자들이 먼저 거룩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게 더 거룩해지는 것일까?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하나? 성경을 더 읽어야 하나? 담임목사인 나는 어떻게 하는 게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일까?" 그때 주님께서 마음에 말씀을 주셨다. "혼자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순간 애통한 마음이 들어 울며 기도했다. 나는 그날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혼자 있을 때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쉽게 타락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더욱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은밀한 시간은 죄짓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겨자씨] 발을 품는 사랑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은 세 번 놀라다는 뜻의 '삼경'(三驚)이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목사님의 키가 너무 작아 놀라고, 목소리가 너무 커서 놀라고, 설교를 들으면 너무 힘이 있고 감동이 있어 놀랐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들의 공동체인 애양원을 섬기면서 환자의 고름 나는 발을 빨아줄 만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했다.

 

손 목사님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식사 때가 되면 항상 밥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나는 몸이 작아 하나님이 적게 먹도록 만들었으니 드세요"라고 하며 밥을 주었던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추운 겨울밤 죄수들은 모포 하나에 의지해서 잠을 청해야 했다. 목사님은 키가 큰 죄수가 모포가 작아서 추워할 때 그 죄수의 발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잤다고 한다. 추운 겨울, 우리의 마음을 낮출 때 우리가 섬길 일들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겨자씨] 불의 공동체

 

엄동설한이 되면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이는 자리가 있다. 따뜻한 온돌방이다. 냉랭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인다. 교회도 뜨거워야 성도가 모인다. 기도가 뜨겁고, 말씀이 뜨겁고, 찬송이 뜨겁고, 성도 간의 사랑이 뜨거운 불의 공동체가 될 때 사람이 모인다.

 

우리 하나님은 불의 하나님이시며(12:2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불을 붙이러 오셨으며(12:49), 성령님은 불길 같은 모습으로(2:3) 임하셨다. 삼위일체 불의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그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24:32). 절대로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며(살전 5:19), 기도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왕상 18:24)을 만나야 한다. 불세례(3:11) 없이 교회성장은 없다.

 

서재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겨자씨] 가정예배

 

17431231, 위대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가 영국의 소도시 키더민스터를 방문했다. 이 도시는 청교도였던 리처드 백스터가 목회했던 곳으로, 부임 당시 신자가 한 동네에 한 가정 있을까 말까했지만 떠날 땐 믿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크게 부흥됐다. 백스터의 부흥운동 비결은 가정예배 활성화에 있었다. 그는 심방을 통해 가장들에게 가정예배를 권함으로써 가정의 경건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아침 저녁으로 가가호호에서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성경 읽는 소리가 온 마을에 메아리쳤다.

 

백스터가 떠나고 80년이 지난 뒤 휫필드가 키더민스터를 방문했을 때 여전히 가정예배가 힘 있게 드려지고 있었다. 이에 큰 은혜를 받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백스터의 가르침과 사역, 권징의 달콤한 향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원기를 회복하게 됐다." 진정한 교회 부흥이 가정예배를 통한 경건 회복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오덕교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겨자씨] 부자유친

 

박기영은 나의 군목 동기. 임관하자마자 우리는 강원도 양구 백두산 부대에 배속됐었다. 헤어진 지 20년도 더 지난 뒤 그와 재회했다. 그의 간증에 눈시울을 적셨다. 누구보다 선하고 성실했기에 중령까지 진급했으나 몇 해 전 간경변증 말기 판정을 받았다. 큰아들 제민이가 자신의 간 3분의 2를 제공해서 간이식을 받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제민이는 돌이 갓 지난 아기였는데 그토록 대견하게 자랐다니. 어떤 아들은 아버지에게 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수술 당일 겁이 나 내빼기도 했다는데, 자랑스러운 제민이.

 

박 목사가 아들 이야기를 할 때 불현듯 예수님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십자가 위에 한 목숨을 내놓으신 효자. 박 목사가 제 아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미안하며 사랑스러울까. 박 목사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과 내 아들을 생각하며 그날 밤 나는 많이 울었다. 몇 번이고 부자유친을 되뇌며. "아빠 아버지여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

 

김흥규 목사(내리교회)

 

[겨자씨] 양보와 타협

 

요즘 세태를 보면서 이솝 우화 중 외나무다리 위의 두 염소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우화는 두 마리의 염소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두 염소는 서로 한 발의 양보도 없이 자기가 먼저 다리를 건너겠다고 고집부리며 상대방의 양보를 요구하다가 뿔을 서로 치받으며 싸운다. 결국 두 마리 모두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다리 아래로 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정치권을 보면서 한 치 양보도 없이 그냥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여야의 모습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교계 안에도 같은 현상이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좁게는 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나 한 교단 안에서 교권 쟁탈을 위한 양보와 타협이 없는 투쟁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성경의 교훈이 생각난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김경원 목사<서현교회>

 

[겨자씨] 스스로 속이지 말라

 

내가 어렸을 때, 교회 어른들을 보고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주일 예배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이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라고 하시던 장로님이 너무 자주 화를 내는 모습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믿는다면서 자기 주위에 나쁜 사람들이 참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다. 세상에 자신보다 더 악질인 죄인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가장 큰 죄는 자기 의(). 도둑질이나 간음 같은 죄는 너무 부끄러운 죄지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 그러나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양심의 가책도 없다. 십자가의 도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새해는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아가 스스로 속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겨자씨] 부메랑 효과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라는 말이 있다. 부메랑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수렵기구로서 던지면 다시 던진 자에게 돌아온다. 부메랑 효과란 바로 자신이 한 어떤 행위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솝이야기에 늙은 사자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다. 생쥐가 사자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생쥐는 살려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하여 사자는 생쥐를 살려준다. 어느날 사자가 덫에 걸렸을 때 생쥐가 그물을 갉아서 풀어줬다.

 

성경은 온통 부메랑 이야기로 가득하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리라"고도 했다. 빈 평안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지 않으면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라고도 했다. 섬김과 베풂은 절대 공짜가 없다. 하나님은 베푸는 자에게 베푸신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겨자씨] 덮는 사랑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통이 넓은 치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이 넓은 치마로 12남매의 코를 다 닦아주셨고 숨바꼭질을 하다가도 숨을 곳이 없으면 치마 속에 숨겨주시곤 했다. 어머니는 치마만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죄와 허물도, 아버지의 술주정까지도 통이 넓은 치마처럼 넓은 마음으로 덮어주셨다. 바람 잘 날 없는 가정은 어머니의 통이 넓은 치마와 한없이 덮어주는 사랑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다. 험악한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속죄'라는 말이 '죄를 덮어주시는 주님의 피 사랑'임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영원한 어머니인 하나님 품인 것을 알고 너무나 고마워서 울고 또 울었던 적이 있다.

 

나의 허물에 대해 덮음을 받았으니(32:1)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남은 생애에 보답하고(116:12), 이제 남을 덮어줄 일(17:9)만 남았다.

 

서재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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